(계 18:1~8)
'for her sins are piled up to heaven,
and God has remebered her crimes.
Give back to her as she has given, pay her back
double for what she has done. Mix her a double
portion from her own cup.'(5~6절)
'음녀의 죄가 쌓여져 하늘에 닿을 정도이고
하나님은 그녀의 죄악을 기억하신다.
그녀가 저지를 죄악을 보응할 것이다.
2배로 갚아줄 것이다.
그녀가 부은 잔에 2배로 부어 주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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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의 혼란한 상황에서 생각이 벗어나질 않는다.
우리 인격의 가장 기저에 있는 '가치'
기독교인이라면
일단 '복음적 사랑'이나 명칭은 다르나 맥락과 의미는
같은 어떤 것을 가치로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인정하는 것과 전인격적으로
어떻게 수용하는가는 다른 문제이다.
그 다름에서 간극이 있고
가치를 투영하는 이념에서부터 간극히 표면화 된다.
순기능적이라면 다르지만 틀리지 않는 것으로
받아들이겠지만 지금 우리 시대는
단지 다른 수준이 아니라 옳거나 그름의 상황이다.
그렇다면 다시 가치로 들어가
'복음적 사랑'에 대한 이해와 적용에서부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 나, 그리고 타자.
흔히 윤리에서 '이타성'의 크기만큼
윤리적 옳음이 높아진다고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과 나보다
이타성을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현실이 워낙 하나님만을 강조하는 그룹과
또는 자기중심적인 것을 추구하는 그룹으로
편향되어 있으므로 그런 것을 묵시적으로 감안하여
부족한 부분인 '이타성'을 강조하는 것이리라.
가장 이상적인 것, 옳은 것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나 자신을 제대로 사랑할 수 있다.
하나님과 나를 제대로 사랑한다면
같은 인격체, 피조물인 타자도 진실된 마음으로 사랑한다.
만약 이런 상태에 이른다면,
하나님, 나, 타자를 구분할 필요가 없어진다.
이렇게 얘기하면, 근본주의자들은
그 지점으로부터 인간중심의 인본주의의 위험성이
싹튼다라고 말할 지 모르겠다.
성숙의 수준은
비록 risk가 있지만, 내 몸이 진흙탕이 될 지도 모르지만
내재된 복음적 사랑을 절대 훼손시키지 않는 상태에서
복잡한 실존에 가능한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수준, 정도로
결정된다고 생각한다.
거룩은 내가 입은 하얀 옷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골방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비록 더렵혀지더라도 복음적 사랑을 마음에 품고
진흙탕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왜?
그렇게 해야 한 영혼이라도 더 유익함을 줄 수 있으므로.
한 영혼이라도 도울 수 있으므로.
한 영혼이라도 생명을 잃지 않게 할 수 있으므로.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동안 보여주신 것이
온통 그런 것이다.
사람들이 꺼리고, 두려워하고, 더럽게 느꼈던
사람과 장소, 상황에 몸을 던지셨다.
겉은 거친 곳으로 향했지만 마음은 고귀하고 거룩한
복음적 사랑이 고스란히 놓여진 상태로.
인본주의.
단어가 무슨 잘못이 있는가?
단어는 그저 가치중립적이다.
그것에 의미를 어떻게 덧입히는가에 따라
악마도 되고 천국도 된다.
지금 현실에서, 기독교계에서는
인본주의가 일종의 대명사가 되어
'하나님보다 사람을 우선시하는 어떤 이념'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를 제대로 이해하고 사랑하며
이러한 맥락에서 타자를 사랑하는 것의 의미로 여긴다면
인본주의는 고귀한 것이다.
아무튼 그런 의미로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이들에게
신본주의를 거스르는 자들이라고 섣불리 정죄하는
근본주의적 행태를 보면서 통탄스러움을 느낀다.
오히려 사람을 존중하는 것을 무시하고
신본주의에만 매몰되었을 때
양심과 상식에 심히 거스르는 사건조차
정당성을 부여하는 극도의 위험한 인식을 자행시킨다.
이번 계엄을 미화하는 수많은 기독교 신자들이 그렇다.
그것은 하나님을 비상식의 하나님, 잔인한 하나님,
폭력과 인명을 경시하는 하나님으로 만드는 죄악이다.
혹 양심과 상식 너머에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 같다면
먼저 '질문'해야 한다.
하나님은 늘 '감동과 설득'으로 우리를 가르치신다.
그렇지만 지금 그들의 해설은 그런 질문의 산물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저 근본주의에 휩싸인 목사들이나
이미 세상의 기준으로도 범죄자 수준의 목사들,
또는 얼토당토하지 않은 유투버들의 주장을 근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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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현상과 타인에 대해서 말했다.
그러면서 나 스스로를 경계한다.
나를 다시 한 번 바라보아야 한다.
내게도 많은 시한폭탄이 있으므로...
<오늘의 명언>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는 복 있는 사람은
마음에서 모든 악과 소유욕을 뿌리 뽑은 이들이다.
-A.W. 토저-
"하나님! 감사하옵고 또 감사합니다.
지난 계엄의 공포와 위험을 하나님께서 살피셔서 도움을 주셨습니다.
우상과 폭력을 추구하는 집단을 관용으로 바라보는 일은 현재로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이 무서운 일이 어느 정도 해결될 때,
그들이 조금이라도 회개의 국면에 다다르면
그때 그들의 '존재'를 생각하겠습니다.
저의 가정도 조금 높은 파도가 있습니다.
가족간 견해가 다른 점과 막내의 사춘기 행태가 그것입니다.
은준이가 사춘기 기간을 하나님의 도움으로
잘 지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자기 주장이 부각되고 특출난 행동을 하려합니다.
부모로서 좀 더 이해하고 인내하며 수용적으로 대처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수술 후 회복의 시간을 가지고 있는 정환이 재발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그가 우리에게 있어
서로 사랑을 나누고 그의 귀한 성품으로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기를
저와 가족들이 바라고 있습니다. 도와주시옵소서.
지권사님, 수술 잘 하고 잘 회복하게 도와주소서.
장로님, 저로서는 그 분의 생각에 문제를 품을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 개입하셔서 하나님의 양심과 상식을 간과하지 않게 도와주소서.
저의 불찰이라면 저를 고쳐 주소서.
감사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였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