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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늘한 여름
이 문 열
전화를 받은 것은 마침 형이었다. 형의 목소리를 알고 있는 아우는 대뜸 본론으로 들어갔다.
“형님, 오늘 어디 교외로 놀러 나가는 것 어때요?”
“좋지. 그런데 갑자기 웬일이냐? 양키 지갑이라도 주웠니?”
언제나처럼 약간 비꼬는 듯한 형의 반문이었다. 아우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횡재야 그리 흔하겠어요? 어쨌든…….”
“그럼 너희 호스티스한테서 팁이라도 받았니?”
형은 언제나 자신이 가정교사로 있는 집의 안주인을 호스티스라 불렀다. 영어의 원뜻이 그렇다는 핑계로, 그들의 여유에서 비롯된 성적(性的) 부패를 간접적으로 비난하는 말이었다.
“그렇게 말하면 너무 비참하고…… 현장 실습비죠. 애들과 함께 놀고 오라고 몇 천 원 집어 주더군요. 그럼 가시는 거죠? 준비하고 계세요. 곧 그리로 갈 테니.”
형이 그 집안에서 가진 강력한 발언권을 믿고 있는 아우는 확실한 대답을 받지도 않고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
형은 곧 준비에 들어갔다. 늦더위가 예상되는 후텁지근한 여름 아침이어서 그렇지 않아도 몸을 비비 꼬고 앉았던 약수동 병신들은 그 뜻밖의 낭보(朗報)에 환호마저 올렸다. 약수동 병신들이란 약간 저능(低能)의 기미가 있는 그 집 아들 삼 형제를 형이 한꺼번에 싸잡아 부르는 이름이었다.
약수동 호스티스도 별로 이의가 없었다.
“선생, 마침 집에 현금이 이것뿐이니 적당히 놀구 와요. 셋째는 두고, 물가에라도 간다면 애들 물 조심 부탁해요.”
젊은 의사를 애인으로 두어 한 몸에 다섯도 넘는 병을 가지고 있는 그녀는 있는 대로 몇 장의 지폐를 건네주었다. 형은 유능한 가정교사였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회화(會話) 선생이기도 했다. 아우가 신촌에서 가정교사 겸 잡무수(雜務手)로 얻고 있는 허약한 발언권에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땡큐 호스티스.”
“유아 웰컴.”
형의 설명으로 호스티스란 말의 원뜻을 숙지(熟知)하고 있는 그녀는 전혀 의심 없이 간신히 기억해 낸 영어로 형의 감사에 답했다. 약수동 병신들이 콜라며 카스테라, 초콜릿 같은 것을 함부로 쑤셔 넣다 비닐 가방 하나를 찢고 서로 메고 나서려다 카메라 렌즈 하나를 박살 낸 후에야 아우가 신촌 백치(白痴)와 함께 도착했다. 비상히 머리 나쁜 제자이긴 해도 아우는 원래 둔재(鈍才) 정도로만 불렀던 것을 형이 굳이 백치로 깎아내린 아이였다.
“그런데 어디로 가죠? 나는 뚝섬이나 광나루로 생각했는데.”
유원지에 대해서는 크게 아는 바가 없는 아우였다. 피나는 절약과 근면만으로 겨우 한밑천 장만한 장사꾼의 고용인이 된 탓에 풍요와 여가의 혜택을 맛볼 기회가 별로 없었다.
그날도 가정교사로 입주한 지 여섯 달 만에 베푼 이례적인 선심이었다.
“옛날얘기를 하고 있군. 그런 곳은 이미 물이 더러워 못써.”
그사이에도 한바탕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약수동 병신들을 노려보며 유원지에 대해서는 다소 견식 있는 형이 말했다.
“차라리 그린 파크로나 갈까? 하지만 거기는 모처럼의 하루를 보내긴 따분하고……. 좌우간 예산이나 알고 하자. 얼마 있니?”
“삼천 원이에요.”
아우는 대금(大金) 을 말하고 있다는 표정 이었다.
“노랭이군.”
형은 아우를 고용하고 있는 신촌의 장사꾼을 냉소했다
“보자, 우리가 오천, 합하면 팔천이라…….”
“제게도 오백 원쯤 있어요.”
행여 형의 마음이라도 변할까 보아 약수동 병신이 주머니를 털고 나섰다.
“저두요.”
작은 병신도 벙어리 저금통을 찢으며 거들었다. 신촌 백치라고 죽고만 있으랴. 녀석도 가슴 깊이 간직해 두었던 비상금 오백 원을 미련 없이 꺼내 놓았다.
“좋다. 나도 천 원 더 냈다.”
형도 제자들의 자발적인 헌금에 만족한 듯 처음부터 횡령하려고 마음먹었던 금액을 포기했다.
“이만하면 됐다. 그럼 우리 월미도(月尾島)나 가자. 모자라면 돌아올 때는 버스를 타지.”
그리하여 다섯 살 터울의 국립대학생 형제와 그들의 제자인 약수동 병신 형제, 그리고 신촌 백치는 1970년 늦은 여름 아침을 떠났다.
모두들 기분은 좋았다. 택시를 타고 새로 난 지 얼마 안 되는 경인(京仁)고속도로를 달리며 형은 약수동 병신 형제를 상대로 지극히 교훈적인 얘기를 들려주었다. 고속도로와 월남전과 정부의 위업에 대해. 다만 신촌 백치는 좀 덜 행복했다. 말라깽이 대학생 둘과 중학교 1학년짜리 둘, 그리고 국민학교 5학년 하나였지만, 그래도 택시 한 대를 다섯 명이 타게 된 탓이었다. 중학생으로는 지나치게 비만증이 있는 신촌 백치는 골통이라도 차창 밖으로 내미려고 기를 쓰고 있었다.
앞자리에 앉게 된 동생은 벌써부터 준비해 간 깡통 맥주를 꿀꺽꿀꺽 마셔 댔다. 날은 점점 뜨거워져서 택시와 고속도로가 아니었더라면 손수건 한 장쯤은 참하게 적실만했다. 그날 출발을 앞두고 그들 형제 사이에 무언으로 이루어진 약속은 뜻밖에 주어진 시간과 돈으로 될 수 있는 한 최대의 호화판을 누리자는 것이었다. 사실 한 달에 팔천 원 남짓 받고 있는 그들 형제에게 그날의 총액 만 오백 원은 아무리 써도 다 쓸 것 같지 않은 거액으로 보였다.
얼마나 달렸을까. 아우가 문득 돌아보며 싱긋 웃고 말했다.
“권력의 간생자(姦生子)든 복권 당첨자든 돈은 역시 많이 가져볼 만한 것이군요, 형님.”
그런 아우의 표정은 그제야 그들의 일상과는 먼 그 호화판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는 투였다. 식모와 각별한 친교를 맺고 있는 형은 그 덕택에 콜라 병에 따라 온 양주를 찔끔찔끔 마시면서 가는 눈웃음으로 아우의 말을 받았다. 오래잖아 그의 엷은 입술이 독설로 온통 분주해지리라는 전조였다.
사실 권력의 간생자나 복권 당첨자란 말도 형이 당시의 고소득층을 비꼬아 부르는 이름이었다. 언젠가 형제만의 술자리에서 아우는 그들이야말로 새로운 형태의 소시민(小市民)이 아닐까, 새로운 형태의 자본가 계급으로 자라나 ― 먼저 이 사회의 하부구조(下部構造) 를 장악하고 이윽고는 상부구조(上部構造) 마저 온전히 차지하게 될 것이 아닌가를 우울하게 얘기한 적이 있었다. 그리하여 늦게 출발하는 자기들은 기껏해야 그들이 달아 주는 ‘화이트 칼라’에 만족하며 그들을 위해 일생을 봉사하게끔 운명 지어져 있지나 않은가, 하고. 그때 형은 말했었다.
“이 아노미[不適應型] 야, 어디서 지각한 사회주의자들하고라도 어울렸냐? 누보 부르주아라고? 걱정 마라. 아직 우리에게는 진정한 산업사회가 오지 않았고, 따라서 그따위 계급도 생겨날 틈이 없어. 저들은 다만 특혜의 마차에 매달려 부(富)의 지름길을 달린 권력의 간생자들이거나 우연히 한판 잘 맞아떨어진 복권 당첨자들에 지나지 않아. 언제든 진정한 산업사회가 오면 쓰레기통에나 처박혀야 할…….”
차창 밖으로 산과 들이 질주하고 있었다. 짙은 녹색으로, 가슴 저리게 그리운 빛이었다. 아우가 지금까지의 도회적인 생각에서 벗어나면서 불쑥 말했다.
“집이 그립군요. 고향이…….”
미처 말할 틈이 없었지만, 그들 형제는 멀리 경상도에서 유학 온 터였다. 더구나 아우는 늦게까지 응석을 피우던 홀어머니의 막내였다. 어쩌다 멀리 보이는 초가와 한창 짙은 푸나무의 싱싱한 빛이 몸에 비해 마음은 아직 어린 아우를 강하게 자극하는 모양이었다.
“집에 돌아가지 못한 방학이 벌써 두 번째예요.”
“나는 다섯 번째다, 시인(詩人).”
더욱 가늘어진 눈으로 법학도인 형은 국문학도인 아우에게 말했다. 희미한 조소가 엷은 입술가에 떠올라 있었다.
국립대학이란 레테르는 있지만, 당시만 해도 문과생들에겐 가정교사 자리가 흔치 않았다. 첫 번 방학에 멋모르고 귀향했다가 돌아와 몇 달 쓴맛을 본 적이 있는 아우였지만, 나이가 나이였다. 그러나 군대까지 마친 법대 4년생은 짐짓 갓 스물인 아우의 나이를 용서하지 않았다.
“망향부(望鄕賦)라, 좋은 시제(詩題)다. 한 수(首) 어떠냐, 시인?”
기어코 아우는 낯을 붉힌 채 입을 다물고 말았다.
한여름의 인천은 흥청거리고 있었다. 세상은 의외로 풍요했으며 행복하고 생기가 넘쳐흘렀다.
“형님, 퍽 어울리는 쌍이지요? 저기.”
부두로 향하는 길에서 아우가 문득 한 쌍의 남녀를 턱짓하며 말했다. 남자는 훤칠한 키에 미색 양복으로 정장을 한 호남이었고, 가볍게 그 팔을 끼고 있는 여자 또한 그에 못지않게 늘씬한 몸매에 화사한 차림의 미인이었다. 누가 보아도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그러나 형은 그들에 대한 아우의 선망(羨望)을 여지없이 짓밟아 버렸다.
“털 없는 원숭이의 지겨운 성욕이다. 지금은 번식기가 아닌데…….”
하지만 형도 낭패할 때는 있었다. 부두에서 알아본 바에 의하면 월미도는 당일치기의 유원지가 아니었다. 실은 형도 아우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런 곳에 정통하지는 못했다. 며칠 전 우연히 보게 된 여행사의 관광 안내서에 있던 월미도와 남이섬〔南怡島〕을 기억했던 것이지만 자세한 관광 일정은 그 역시 모르고 있었다.
거기서 독설가는 약간 주춤했다. 새로운 행선지가 필요했지만 가능한 것은 부근의 몇 군데 해수욕장뿐이었다.
“우선 점심이나 들며 천천히 생각해 보자.”
형이 그렇게 말하자 먼저 신촌 백치가 환성으로 동의했다. 끊임없이 먹고 마셔 온 것 같던 약수동 병신들도 그 제의에 희희낙락 ― 그들은 가까운 경양식점으로 들어갔다. 그 전에 소심한 시인이 차라리 미더운 중국음식점을 건의했지만, 형은 그걸 가볍게 묵살했다.
“우리는 비프스테이크나 하자. 술 좀 남았지?”
경양식이긴 하지만 그래도 양식이라 주문에 별 자신이 없는 형의 제안에 식욕이 없는 아우는 말없이 따랐다. 그러나 두 병신과 백치는 무슨 경쟁이나 하듯 생소한 이름의 요리를 주문해 댔다. 형은 언뜻 불안하였으나 메뉴와 음식값을 확인해 모처럼의 흥겨운 기분을 깨고 싶지는 않았다. 이윽고 주문한 요리가 나왔다. 형제에게는 대개 낯선 음식들이었는데 아이들은 걸신들린 것처럼 먹어
대기 시작했다. 보면 볼수록 감탄스러운 식욕이었다. 형은 잠시 술잔을 멈추고 그런 아이들을 살피다가 다시 자신의 장기(長技)를 살렸다.
“나는 식탁에 둘러앉은 인간들을 바라보면 약간은 그들이 기특하게 느껴진다. 발정기에 있는 암수컷 외에 동물들이 평화롭게 식탁을 함께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지. 친구나 이웃 따위는 물론 한 배 새끼 서로 간이나 심지어는 어미 자식 사이에서도 완전한 평화란 장담할 수 없어. 그런데 인간은 여러 가지 이름으로 식탁을 같이 한다. 그것도 단순한 평화 이상의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 어쩌면 로마의 강력함이나 초기 기독교의 성공적인 전파는 그들의 화기애애한 공동 식사에서 온 것인지도 모르지.”
그러다가 잠시 말을 멈춘 형은 방금 작은 병신의 접시에서 튀긴 새우를 재빨리 집어 가는 큰 병신의 유별난 탐식에다 법학도로서의 알밤을 먹였다.
“하긴 이 녀석들처럼 가끔씩 동물의 꼬리를 보일 때도 있지만. 그리고 그걸 위해 법이 생겨난 것이지만……. 각자에게는 각자의 분(分)을.”
작은 병신은 그 전에 편 형의 논의에 더욱 확실한 반증이라도 내놓듯 흰자위만의 눈으로 큰 병신을 노려보았다. 신촌 백치는 그런 주위에는 아랑곳없이 오로지 먹는 데만 골몰했다.
제자들의 접시가 핥은 개죽사발처럼 깨끗해지고 그들 형제도 비포스테이크를 안주 삼아 집에서 가지고 나온 주류(酒類)를 깡그리 소탕한 후에야 형은 계산서를 청했다. 그런데 그 계산서가 두 번째 뜻밖의 사태로 형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사천칠백오십 원 ― 그것이 차라리 미더운 중국음식점을 건의했던 아우를 무시한 형의 허영에 요구되는 금액이었다. 철없는 제자들. 참으로 비싼 것만 골라먹었다…….
마음속으로는 진작 녀석들의 메뉴를 통제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면서도 형은 두말없이 음식값을 물었다. 보아 온 대로 하고 나니 오백 원권 열 장이 그대로 불귀(재尋)의 객이 되고 말았다. 형의 지갑에 남은 돈의 얼마 안 되는 두께를 홈쳐본 아우는 낙담했다. 그러나 소위 상류사회의 교양 있고 세련된 신세가 되어 가고 있는 형은 식탁에서 그날의 잔액을 계산하는 식의 천박은 떨지 않았다.
“이제는 가까운 해수욕장에나 가는 거다.”
경양식집을 나온 형이 그래도 여전히 택시를 잡으며 하는 말이었다.
택시 안에서 확인해 본 재정은 형제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한 상태였다. 써도 써도 다할 것 같지 않던 그날의 예산은 어느새 이천오백 원 남짓으로 줄어 있었다. 초반의 흥청거림과 고속도로를 달린 택시 요금에다 제자들의 엄청난 식욕이 결정타가 된 탓이었다.
하지만 일은 그 정도로 끝나지 않았다. 택시 운전수가 선심 쓰듯 내려준 가까운 해수욕장에는 또 새로운 불행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해수욕장은 유료(有料) 였을 뿐만 아니라 입장료도 서울의 웬만한 목욕탕 입욕료를 웃도는 금액이었다. 방금의 택시 요금으로 줄어든 잔액에서 그걸 치르면, 그들 다섯이 서울로 올라갈 버스비나 남을까 말까였다.
일인즉 난감했지만, 그렇다고 일껏 와서 그대로 돌아갈 수는 더욱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형제는 두 제자의 중학생 모자를 벗겨 소인(小人)으로 만든 후 해수욕장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두 녀석 모두 사복 차림이어서 그 일은 별 탈 없이 넘어갔다.
유료(有料)답게 울타리 안은 무엇이든 인공(人工)이었다. 인공의 수풀, 인공의 화단, 인공의 연못, 개울, 축대, 방파제 ― 사장(沙場)의 모래까지도 트럭으로 실어 와 덮은 것이었다. 따라서 울타리 안에서는 다시 무엇이든 유료였다. 옷을 벗고 입기 위해, 앉기 위해, 소금기를 씻어 내기 위해, 먹기 위해, 마시기 위해…….
입장료를 문 때문에 조그만 여유도 없어진 그들은 다시 한 번 암담해졌다. 형조차도 한동안은 막연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내 원기를 회복한 그는 복잡한 미소로 아우를 보다가 뒤이어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그럼 지금부터 가난을 배운다. 제1과(課) 부끄러움.”
그러면서 일행을 멀지 않은 은백양나무께로 인도하는 형의 표정에는 장난기와 악의와 진지함이 묘하게 섞여 있었다.
“여기서 해수욕복으로 갈아입는다.”
그 은백양 아래에 이르자 형은 아이들에게 단호히 말했다. 사방이 그대로 틔어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쉴 새 없이 지나다니는 길목이었다. 형의 단호한 목소리가 아니더라도 제자들에게는 이미 딴 도리가 없었다. 스승의 곤궁을 번연히 알면서도 굳이 비싼 유료 탈의장을 고집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제자들이 수영복을 갈아입고 나자 스승이 말했다.
“이것이 가난이다. 사람들은 흔히 가난을 뻔뻔스러움으로 잘못보고 있지만, 실은 피할 도리가 없는 부끄러움이다. 다시 말해서, 없는 사람들이 가진 자들에게 손을 내미는 것은, 그들이 특히 뻔뻔해서가 아니라 방금 너희들처럼 부끄러우면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은 근처의 공중변소에서 옷을 갈아입은 후 아이들을 데리고 물가로 갔다. 아우는 나무 아래 남았다. 별로 바닷물에 뛰어들고 싶지 않았을 뿐더러 옷가지와 소지품을 지키기 위해서도 하나쯤은 거기 남아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 오후는 가련한 제자들에게는 그대로 재앙과도 같았다.
먼저 세 녀석 모두 적어도 반 되 이상의 소금물을 마셔야 했다. 수영을 가르친다는 구실로 형이 몇 차례나 바닷 속에 밀어 넣었다가 꺼낸 탓이었다. 한차례 바다를 다녀온 녀석들이 메스꺼운 얼굴로 헛구역질을 해 대는 것을 보며 형은 이죽거렸다.
“보트나 튜브 없이는 드뜨지 못하는 녀석들아, 어떠냐? 바닷물 맛이.”
그리고 그때까지 남아 있던 약간의 마실 것을 서둘러 비워 없애기 시작했다.
“자, 마셔 둬.”
몇 번이나 쉬어 가며 수통에 남은 물을 억지로 다 마신 형이 마지막 남은 콜라 병 마개를 따 아우에게 내밀었다.
“전 별로 생각이 없는데요.”
“그래도 마셔 없애. 이왕 가르치려면 철저해야지.”
영문도 모르면서 아우는 재촉 속에 그 콜라 병을 비웠다. 그제야 형은 여전히 벌레 씹은 얼굴로 서 있는 아이들을 둘러본 후 아우에게 이유를 영어로 설명했다.
“Now these guys shall know what is thirsty(이제 나는 녀석들에게 목마름이 무엇인지를 가르칠 작정이다.)”
과연 아이들은 오래잖아 물을 찾기 시작했다. 물놀이만 해도 목이 타기 쉬운데 적지 않은 소금물까지 마셨으니 예사 목마름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이미 마실 것이라고는 한 방울도 남아있지 않았다. 아이들은 공동 수도로 달려가 보았지만 그들이 빨아들인 것은 녹 냄새 섞인 뜨거운 공기뿐이었다.
“참아, 서울까지 걸어가지 않으려면.”
견디다 못한 아이들이 형을 찾아 목마름을 호소했을 때 무정한 스승은 그렇게 말했다. 형은 가난 공부의 제2과(課)를 인내(忍耐)로 잡은 것 같았다.
그러나 아이들이 참아야 할 것은 목마름뿐만이 아니었다. 형은 틈틈이 아이들을 해변 여기저기에 널려 있는 유락장(遊樂場)으로 끌고 갔다. 각종 물놀이 기구를 빌려주는 곳, 실내 축구장 탁구장 빙고 게임장…… 그런 곳을 지날 때마다 그와 같은 종류의 쾌락에 익숙해 있는 아이들은 못 견뎌 했다. 또 다른 마음의 갈증이었다.
“선생님, 서울까지 걸어두 좋아요. 실내 축구 한번 해요.”
“여기서 택시를 대절해 집까지 가면 되잖아요? 돈은 기기서 주죠, 뭐. 우리 보트 좀 타요.”
그러나 형은 아이들을 냉정 하게 나무랄 뿐이었다.
“저런 것들이 무슨 소용에 닿는가를 생각해 봐. 너희들에게는 다만 돈과 시간의 낭비일 뿐이야. 그걸 지금까지 말없이 보아 넘긴 아버지 어머니나 원망해라. 나는 저런 쓸데없는 짓으로 차비를 써버려 백 리를 걷고 싶지는 않다. 택시를 대절해 ― 너희 부모를 성나게 하고 싶지도 않고.”
아이들은 차츰 지쳐 갔다. 그리하여 물에 뛰어들 생각도 잊고 시원한 나무 그늘이나 음료수 가게 근처에만 힘없이 서성거리게 되었을 때쯤 형은 약간 부드럽게 물었다.
“너희들 괴롭니?”
“네.”
아이들은 간절한 눈빛으로 형을 바라보며 일제히 대답했다. 형은 그런 아이들을 조용히 둘러보더니 다시 가르치는 목소리로 돌아갔다.
“이것이 바로 가난이다. 더구나 너희들이 받는 괴로움은 대개 꼭 필요하지도 않은 것을 원하는 데서 온 것이고, 또 잠시 동안이다. 돌아가면 부유한 아버지 어머니가 있으니까. 하지만 세상에는 꼭 필요한 것, 예를 들면 먹을 것이나 입을 옷이나 살 집 따위마저 없어 괴로움을 겪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도 언제 그 괴로움에서 벗어난다는 확실한 기약도 없이. 너희들이 몇 시간 동안 받는 이 괴로움에는 비할 수가 없지…….”
“그럼 그 사람들도 부지런히 일해 벌면 되잖아요?”
무언가 형의 속마음을 어렴풋이 짐작한 것 같은 약수동 큰 병신이 약하게 항의 했다. 형의 목소리가 이내 차가워졌다.
“그게 항상 부자들이 내세우는 인정머리 없는 변명이지. 부자는 개미고 가난뱅이는 베짱이다. 그러므로 베짱이같이 게으른 가난뱅이가 굶어 죽는 것은 당연하고 개미같이 일한 부자의 책임이 아니다, 그런 얘기겠지.”
“…….”
“누구든 마음만 먹으면 부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건 엉터리야. 세상에 있는 것은 무엇이건 일정한 양뿐이기 때문이지. 한 사람이 많이 가지려면 누군가는 적게 가지거나 전혀 가지지 않아야 돼. 다시 말해 가난한 이들이 있었기 때문에 너희 아버지도 부자가 될 수 있었던 거야. 이해하겠니?”
“…….”
“언제나 그들을 잊지 마라. 너희들이 지금 받고 있는 괴로움보다 몇 배나 큰 괴로움을 날마다 되풀이해 받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을. 그것이야말로 가장 떳떳하게 너희들을 변명해 줄 수 있는 미덕이다.”
“네.”
형의 목소리에 섞인 한 가닥의 진지함에 억눌린 큰 병신은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채 어물어물 대답했다. 작은 병신과 신촌 백치도 덩달아 동의했다. ― 형은 오후 늦게야 사이다 두 병을 샀다.
형과 아이들이 이따금씩 다녀가는 것을 빼면 아우에게는 무료하기 짝이 없는 오후였다. 원래 아우는 홀로 보내게 된 그 시간을 최근에 손에 넣은 프랑스의 시 이론서(詩理論書)로 때울 작정이었다. 나중에 시인과 평론가를 겸하려는 야심에 차 있는 그가 춘추복 바지 하나로 여름을 날 각오를 하고 산 영역판이었다.
그런데 아우가 자리 잡은 나무 밑은 책을 읽기에는 그리 알맞은 곳이 못 되었다. 그곳에서 스무 발짝도 안 되는 곳에 설치되어 있던 야외 무대가 갑자기 꿍꽝거리기 시작한 탓이었다. 처음 그들이 자리 잡을 때 조용했던 것은 점심시간이었기 때문인 듯했다.
먼저 아우의 눈길을 끈 것은 요란한 음악 소리에 이어 무대에 오르는 남녀의 피부색이었다. 돈만 내면 누구든 올라가 춤출 수 있는 모양인데, 난데없이 흰 피부와 까만 피부가 뒤섞여 있었다. 외출 나온 GI라도 끼어든 것일까. 무대에 올라간 사람들은 곧 신들린 듯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참 놀랍구나. 이 더운 날에 그것도 뜨거운 태양 아래서…….’
아우는 그들의 번들거리는 피부를 보며 감탄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런 감탄은 혐오로 바뀌었다. 춤추는 그들의 꿈틀거리는 몸이 점액질로 덮인 파충류를 연상시킨 것과, 분명 수가 많건만 어쩐지 미군 병사들 사이에 끼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동족의 어울리지 않는 몸매 때문이었다.
‘검은 안경에 시원찮은 콧수염을 기른 너 왜소한 환웅(桓雄)의 아들이여, 옥도정기로 머리의 멜라닌 색소를 빨아낸 너, 거짓 금발을 늘어뜨린 웅녀(熊女) 의 딸이여, 그래도 너희 피부는 너무 누렇고 두 다리는 너무 짧구나…….’
거기다가 귀가 따갑도록 울려 퍼지는 재즈 가락도 언제부터인가 아우의 감정을 거스르고 있었다. 반복되는 싱코페이션〔折音技分法〕의 기조(基調), 높낮이의 급격한 전환, 끼어드는 기성(奇聲)들 ― 그런 것들은 그 어느 때보다 역겨운 것으로 밀림과 야수와 노예선과 흑노(黑奴) 의 광란을, 아메리카, 포만감에 빠진 아메리카의 부패와 혼란을 느끼게 하였다.
‘아메리카, 아메리카, 아메리카의 절규…….’
그 무렵이었다. 약간 찌푸린 얼굴로 무대 쪽을 보고 있는 아우에게 작은 사건이 일어났다.
“도대체 무엇이 그리 못마땅하죠?”
자신의 생각에만 빠져 있던 아우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그 목소리의 주인을 올려 보았다. 언제 왔는지 정확한 나이를 어림할 수 없는 젊은 여자가 나부 곁에 서서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대단한 미인은 아니었지만 새하얀 원피스와 함께 꽤 인상적인 얼굴이었다.
“아, 네…….”,
“저기 즐거워 뵈지 않으세요?”
까닭 없이 당황해 있는 아우에게 그녀가 길고 우아한 손가락으로 야외 무대를 가리키며 다시 물었다.
“별로…….”
그녀의 의견이란 게 기껏 그 정도라는 데 다소 자신을 회복한 아우는 자신도 모르게 형의 말투를 흉내 냈다.
“뜨거운 여름날, 부글부글 괴는 막걸리와 함께 나온 돼지 비계를 씹는 듯한 기분이어서요.”
그새 아우의 손에 들려 있는 책을 흘깃 살피던 그녀는 그 말을 듣자 문득 재미난다는 표정이 되어 물었다.
“아직 학생인 것 같은데……. 그래 학생은 살아 있다는 게 굉장하게 느껴지지 않아요? 특히 몸으로 그걸 확인한다는 게 즐겁지 않아요?”
“저들이 나무 그늘에서 쓸모 있는 사색에 잠겨 있거나 서재에서 조용히 책을 읽는다고 해서 아무도 저들이 살아 있음을 의심하지는 않을 겁니다. 게다가 또 살아 있다는 게 뭐 그리 대단할 사람들 같지도 않군요.”
“이상해요. 학생은 어딘가 현대의 젊은이와 달라…….”
“저는 현대가 무슨 인류사(人類史)의 한 이변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조악한 음률에 맞추어 몸을 비꼬고 뒤트는 것이 현대의 젊은이라면 저는 그런 것 사양하겠어요.”
완연히 자신을 회복한 아우가 그렇게 잘라 말하자 그녀는 말을 중단한 대신 이상하게도 탐욕스레 느껴지는 눈길로 아우를 살피기 시작했다. 섬세하면서도 앳된 얼굴, 시원하게 걷어붙인 팔다리와 다소 야위었지만 탄탄해 뵈는 몸매 ― 그렇게 차례로 아우를 살피는 그녀의 눈에서는 이상한 광채와 열기가 뿜어 나왔다. 마치 수없이 작은 불길이 타오르는 것 같았다.
“학생은 정말 동정(童貞) 같애…….
그녀는 갑자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리고 이내 전과는 판이한 상스럽고 천박해진 어투로 물었다.
“이봐요, 학생. 당신 여자 있수?”
“아직…… 어, 어려서요.”
그녀가 찬찬히 자기를 살필 때부터 몸둘 바를 모르던 아우는 그 당돌한 질문에 완전히 더듬거렸다. 그러나 여자는 더욱 불타는 듯한 눈길로 아우를 바라보며 바싹 다가앉았다.
“학생. 내가 오늘 당신 여자가 되어 줄까?”
여인은 금방 손이라도 잡을 기세였다. 아우는 원인 모를 섬뜩함으로 한 발이나 물러앉았다.
“자, 나와 같이 가요. 정말 멋진 애인이 되어 줄게.”
그녀는 더욱 집요하게 다가왔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와 같은 천박한 언동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감싸고 있는, 무언가 함부로 범할 수 없는 기품이었다. 아우는 그 때문에 더욱 혼란되었다. 소리라도 질러 구원을 청하고 싶은 게 솔직한 심경이었다.
“저기, 형님이…… 나는…… 여기서 오, 옷을 지켜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아우는 갓 스물의, 시인을 지망하는 문과대학 2년생이었다. 약간은 조숙해도. 아직 그에게 있어서 여자란 몸보다는 마음으로 파악되는 어떤 존재였다.
그런데 구원은 뜻밖의 방향에서 왔다. 갑자기 여인이 일어서며 태양을 향해서가 아니고 앞쪽으로 수선스럽게 양산을 폈다. 아우는 무심코 그쪽을 살폈다. 사람들 틈에서 웬 중년 남자 하나가 멍한 눈길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가까이서 보니 초췌한 얼굴에는 구레나룻이 더부룩했고 두 눈은 드러나게 충혈되어 있었다.
이 남자 때문이었을까, 하는 기분으로 아우가 여인을 돌아보았을 때 그녀는 이미 자리에 없었다. 양산으로 깊숙이 얼굴을 가린 채 반대편으로 떠나가 ― 아우의 의아로운 눈길이 겨우 따라잡았을 때는 인파 속으로 막 사라지려는 중이었다.
오후의 그 나머지는 그럭저럭 지나갔다. 아우는 야외 무대에 대한 혐오감과 시 이론서의 현학(衒學)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형은 무정한 스승으로서 교육에 골몰한 채, 그리고 아이들은 가련한 제자로서 고통스럽게 가난을 배우면서. 일이 있었다면 그저 눈치 없는 아우가 부근에 펴 있는 빈 돗자리 한 장을 가져와 깔았다가 우락부락한 청년들에게 난데없는 자릿세 삼백 원을 뜯긴 정도일까.
그리하여 해가 서편으로 기울면서부터 사람들은 하나둘 그 해수욕장을 떠나기 시작했다.
“이만하면 대강 가르친 것 같다. 눈물과 피로가 더 남았지만 그건 또 돌아가는 길에 기회가 있겠지.”
거의 가학적(加虐的)인 교육에 몰두해 있던 형도 드디어 그렇게 말하며 돌아갈 채비를 시작했다. 아이들은 바닷물도 헹궈 내지 못한 채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하여 그들 일행이 오후를 보냈던 은백양나무를 떠나려 할 때였다. 갑자기 해수욕장 한쪽이 술렁거리며 사람들이 그쪽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형이 궁금해하는 아이들과 먼저 그리로 가 보았다.
“털 없는 원숭이의 치정(痴情)이다.”
아우가 다가갔을 때 형이 돌아서며 무감동하게 하는 말이었다.
“네?”
“인간이 얼마나 쉽게 문명과 교양의 옷을 벗어던질 수 있는가를 저들이 보여 주고 있다. 질투가 한몫 단단히 하는 모양이다.”
여전히 종잡을 수 없는 형의 말을 귓가로 돌리고 아우도 구경꾼들의 어깨 너머로 그 안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어떤 남자가 여자 하나를 짓뭉개고 있었다. 발로 밟고, 주먹으로 때리고 ㅡ 거의 실성한 것 같았다.
“이년, 바른대로 말해, 이 개 같은 년아, 여긴 어떤 놈과 붙어 왔어? 어떤 놈이야?”
아우는 이내 그를 알아보았다. 얼마 전 뜻밖의 구원자로서 그 은백양나무 곁을 지나간 중년 남자였다. 그제야 아우는 쓰러져 꿈틀대는 여자 쪽을 살폈다. 짓밟혀 형편없는 몰골이었지만 바로 낮에 본 그 이상한 여자였다. 피와 흙먼지로 더럽혀진 원피스를 걸친 채 이리저리 뒹구는 그녀는 그대로 천한 짐승처럼 보였다. 몇 사람인가 말리려 나섰으나 소용이 없었다.
아우는 그 충격적인 광경에 자신을 잊은 채 보고만 있었다. 그런데 그때 정말로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그 중년 남자가 갑자기 근처에 있던 큼직한 돌을 들어 말릴 틈도 없이 여인의 머리를 찍어 버린 것이었다. 그제야 다급해진 구경꾼들이 그 남자를 덮쳐 누르고 일부는 피투성이로 축 늘어진 여자를 떠메고 갔다.
“자업자득이지. 다른 동물들에게도 질투는 있지만 인간처럼 집요하지는 않아. 적어도 질투 때문에 미치는 수컷은 없으니까. 성(性)을 너무 남용한 결과야. 감동할 필요 없다.”
아연해 있는 아우의 어깨를 치며 형이 하는 말이었다. 방금의 그 끔찍한 사건도 형에게는 그리 큰 충격이 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대신 그 총중에도 기지를 발휘해 당면한 자기들의 곤궁을 해결하는 여유까지 보였다.
“저 여자.”
형이 어떤 여자의 옆모습을 가리키며 아우의 주의를 그쪽으로 돌렸다. 구경꾼들의 담으로부터 서너 발짝 떨어진 곳에서, 그런 사건에는 전혀 관심 없다는 표정으로 서 있는 스물두셋쯤의 아가씨였다.
“우선 발등의 불이나 끄고 보자. 저 여자를 잘 봐 둬라.”
“아는 분이세요?”
“잘 알지. 지금 구경꾼 틈에 섞인 일행의 천박한 호기심을 은근히 경멸하며 서 있다. 아마 꽤 큰 회사의 경리거나 부속실에 나가고, 거기서는 유능하다는 평판도 듣고 있겠지. 평론가가 좋다는 책은 무조건 사들이지만 실제로 가장 애독하는 것은 시시껄렁한 수필류다. 드문 연극 관객 중의 한 사람이고 별 볼일 없는 개인전이라도 초대가 있으면 기꺼이 응하지만, 결국 칠팔 년 이내에 장바구니를 든 평범한 주부로 콩나물값이나 다투게 되겠지.”
“언제부터 사귀셨어요?”
“지금부터. 이제 저 여자는 우리에게 부족한 차비를 대고, 몇 번의 데이트를 거쳐 내 화대(花代)를 절약시키다가, 어쩌면 네 형수가 될는지도 모르지. 크누트 함순 정도 응용하면 될 것 같다.”
그렇게 말한 형은 여전히 어리둥절해 있는 아우를 남겨 놓고 똑바로 그녀에 게 다가갔다.
“이봐요, 여기 책이 떨어졌소.”
“……?”
그녀는 알 수 없다는 눈길로 형을 쳐다보았다.
“아가씨의 책이 떨어졌단 말이오.”
“전 책을 가져오지 않았는데요.”
“저런, 아가씨. 이건 아가씨의 책이 아니고 뭐요?”
형은 몸을 굽혀 무언가를 집어 올리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 과장스레 털고 닦더니 책의 제목이라도 읽듯 빈 손바닥을 들여다보았다.
“『사랑과 영원의 피안』이라, 이건 신문이나 잡지에 실었던 잡문 나부랭이를 끌어모은 것이지만 그래도 꽤 깔끔한 수필집이죠. 가끔씩 장마 도깨비 씻나락 까먹는 소리가 섞여 있어 탈이지만.”
그제야 아우는 크누트 함순의 소설 중에서 지금 형이 벌이고 있는 연극과 비슷한 대목이 있다는 걸 기억해 냈다. 그때쯤 아가씨의 얼굴에도 의혹이나 적의의 그림자는 찾을 수가 없었다. 그걸 보며 형은 다소 안심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공손히 바치는 시늉을 했다.
“틀림없이 아가씨의 책이지요?”
그녀는 잠깐 망설이다가 이내 은은한 웃음기와 함께 손을 내밀었다.
“고맙지요?”
“네, 아주.”
“그런데 이렇게 친절한 기사(騎士)를 도와줄 자비로운 마음은 없으신지?”
“시간 있으면 차나 한잔, 하는 따위만 아니라면.”
“그건 마음 놓으십시오. 지금 불행한 기사와 네 명의 종자(從者)에게 필요한 것은 부족한 서울까지의 차비뿐이니까요.”
“어느 정도예,요?”
“이 달러쯤.”
“칠백 원 말씀이에요?”
“아니, 이 달러요. 아가씨처럼 머리 좋은 숙녀들은 숫자의 마력에 잘 현혹되니까. 만약 칠백 원의 칠백이란 어마어마한 숫자에 놀라 기절하게 되면…….”
“좋게 보아 주셔서 눈물이 날 지경입니다.”
“원화(圓貨)의 인플레이션에 대비해서도…….”
“알겠어요. 말하자면 달러 약관(約款)부로 칠백 원을 부담보 융자해 달라는 거군요.”
“담보는 여기 있습니다. 고시(考試)에 가망이 없어 은행에 들어가 남의 돈이나 헤아려 줄 작정이지만, 그래도 국립대학교 법대생의 학생증입니다.”
“담보로는 마땅하지 못하군요. 넣어 두세요. 그리고……옜어요.”
그녀는 핸드백에서 돈을 꺼내 건넸다.
“언제 갚으시겠어요?”
“다음 주 토요일 D극장 매표구 앞에서 4회 상영 시간 십 분 전에 쯤.”
“뭐 그리 복잡하죠?”
“이자는 관람료로 치르려구요. 「지바고」의 앵콜 상연이죠.”
“여러 번 써먹은 수법 같군요.”
“뭘요, 겨우 열세 번짼데. 잊지 마십쇼. 다음 주 토요일, D극장, 4회 상영 시간…….”
그때 마침 그녀의 친구인 듯한 아가씨가 질린 얼굴로 돌아왔다.
“가 보겠어요.”
그녀는 별일 없었던 얼굴로 그렇게 말하며 친구와 함께 가 버렸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그들 형제의 고민도 사라졌다.
정류소가 가까운 탓인지, 서울로 가는 버스 안은 그 해수욕장에 놀러 왔던 사람들로 붐볐다. 버스가 인천시를 벗어날 때쯤 사람들은 조금 전의 끔찍한 사건들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 여자 색광(色狂)이라지, 아마.”
“나는 그 남자가 심한 의처증 환자라고 들었는데.”
“생활에 여유도 있고 교육도 상당히 받았다더군.”
등 너머로 그런 대화를 듣고 있던 형이 아우에게 말했다.
“색광은 아니었을 거다. 그 여자는. 다만 먹고살 걱정 대신 그쪽으로만 신경을 쓰다 보니 비정상적으로 성(性)이 비대해졌을 뿐이다. 의처증 환자는 아니었을 거다. 그 남자도 역시 그 여자와 같은 이유로 지나치게 아내에 대한 의심을 키웠을 뿐이다.”
그때 큰 병신이 불쑥 물었다.
“선생님, 색광이 뭐예요?”
“음 말하자면…… 아기를 낳을 생각도 없이 남자와 같이 자기를 좋아하는 여자지. 특히 남편 아닌 다른 남자와…….”
형은 거기서 잠깐 망설이다가 이어 내뱉듯 말했다.
“어쩌면 네 어머니도 거기 속할지 몰라. 함께 어울려 다니는 김 국장 부인 같은 여자도.”
“몹시 나쁜 건가요?”
그런데 형이 무어라고 말하기도 전에 큰 병신의 고막을 잔인하게 찔러 오는 대답이 있었다.
“어쨌든 맞아 죽어 싼 여자야.”
앞서 얘기하던 사람들이었다. 그 말을 듣는 큰 병신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굳게 입을 다문 채 깊은 생각에 잠겼다.
차가 서울 거리로 접어들 무렵 형이 흘낏 큰 병신을 보았을 때 그의 볼에는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삶의 비참을 속속들이 맛보았다는 그런 대단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눈물이었다.
무슨 진기한 것을 보고 있다는 눈길로 그런 제자를 살펴보던 형은 문득 아우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제 약수동을 떠날 때가 된 모양이다. 무엇인가가 녀석의 철판 같은 무관심과 둔감의 벽을 뚫었다. 그것만으로도 녀석은 아마 영원히 나를 잊지 못할 거다. 나는 내일 고향으로 돌아가련다. 학점은 어떻게 될 거야. 몇 개 안 남은 데다 논문으로 때울 수 있으니까. 여기 남아 취직 시험 준비라도 할까 했지만 우선은 집에 가서 좀 쉬어야겠다. 내일부터 홀로 분투해 봐라, 시인. 역에는 나올 필요 없다. 학기 말 시험 때는 올라올 테니까.”
여전히 냉정하게 말하고는 있었지만, 어딘가 아우에게 느끼는 애처로움이 배어 있는 목소리였다.
말없이 듣고 있는 아우에게는 그때부터 이상하게도 여름이 서늘해졌다.
(1981년)
2016년 11월 28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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