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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국 대통령 이승만 ]
이승만은 1875年 태어난 인물로 출생일 기준으로 정조 사망(1800年)의 시간적 거리가 2020年인 오늘보다 더 짧은, 생각보다 훨씬 오래 전의 인물이다.”
답) 나도 같은 一家로서 이승만 전 대통령이 “건국대통령, 國父” 소리를 들으면 좋겠다. 이런 말은 그가 독립운동에 지대한 공이 있다고 온 국민이 믿고 있던 시대까지이고
그가 스스로 자필로 국적이 일본이라고 한 사실이 밝혀진 오늘날에는 “건국 대통령, 國父”라는 말이 타당치 않다 단지 초대 대통령일 뿐이다.
그는 조선의 왕족 출신으로서 조선 왕조의 폐위와 공화정 도입을 제창했다는 반역 혐의로 20대의 대부분을 한성 감옥에서 보냈다. 이때 맞은 곤장 100대와 겪은 고문의
후유증은 그를 일평생 안면경련증에 시달리게 했다.
답) 이승만은 조선 3대왕 태종대왕의 첫째 아들 양령대군의 자손이다. 조선 말 혼난기에 훈구세력과 개혁세력간의 안력이 심화된 정국에서 이승만은 신세대 젊은이로서 개혁파의 일원으로 1898년 정부전복을 꾀한 죄목으로 투옥됐다가 "민영환에 의해 미국으로 유학 온 것 외엔 뚜렷한 것이 없다. “조선 왕조의 폐위와 공화정 도입을 제창”한 사실이 없다. 그럴만한 환경이 아니다. 만약 고종황제의 폐위를 운운 했다면 이완용보다 더한 역적 중의 역적으로 기록 되었을 것이다. 역사적인 사실을 잘 알고 글을 올려야 한다.
고종 때는 일본과 중국, 러시아는 조선을 자신들의 독점적 영향권 아래 두기 위해 치열한 각축전을 벌였다. 그중 일본이 가장 적극적이었는데, 1894년 청일전쟁 승리를 발판으로 대륙과 한반도 침략 야욕을 본격적으로 드러냈다. 명성황후가 일본에 대해 비우호적인 태도를 보이자, 1895년(고종32) 10월 8일 새벽 미우라 고로(三浦梧樓) 서울 주재 일본 공사의 지휘 아래 〈한성신보(韓城新報)〉 주필 구니토모 시게아키(國友重章)가 일본에서 건너온 자객[낭인(浪人)]들을 이끌고 경복궁 내 건청궁에 침입해 명성황후를 무참히 시해하고 시신을 불태웠다. 이른바 ‘을미사변’이다. 역사학자 중에는 “명성황후 시해참변”이 옳은 표현이라고 한다. 이후 친일세력 김홍집 내각은 음력을 폐지하고 양력을 도입하는 등의 내용을 골자로 하는 을미개혁을 선포하고, 성인 남자들은 모두 상투를 자르라는 단발령을 내린다. 그러나 백성들은 단발령을 인륜을 파괴하는 야만적 조치로 여겼고, 개화를 ‘일본화’로 받아들였다. 결국 단발령은 명성황후 시해참변 이후 팽배해 있던 반일감정을 폭발 시키는 기폭제가 되었고,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을미의병).
고종은 일본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1896년 2월 11일 경복궁을 나와 경운궁(지금의 덕수궁) 옆에 있는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아관파천(俄館播遷)]. 김홍집의 친일 내각은 붕괴 되었고, 새로 구성된 친 러시아 내각은 흐트러진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단발령을 철회했다. 1년 동안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면서 정국을 운영하던 고종은, 1897년 2월 환궁할 때 경복궁으로 가지 않고 경운궁으로 갔다. 당시 경운궁 주변에는 외국 공관들이 모여 있어, 일본이 함부로 군사를 동원할 수 없을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898년은 친러파가 정권을 잡은 때이다. 이런 때에 고종황제를 폐위 시키는 행위를 했다면 乙巳五賊 박제순(朴齊純, 1858~1916) 이지용(李址鎔, 1870~?) 이근택(李根澤, 1865~1919) 이완용(李完用, 1858~1926) 권중현(權重顯, 1854~1934) 더한 역적 중의 역적이 되었을 것이다. 1898년 정부전복을 꾀한 죄목으로 투옥되었는데 이는 친러정권을 전복하려 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이 무슨 힘이 있어 친러정권을 전복하려 했겠는가? 아마도 일본세력을 등에 업었겠지요.
“미국엔 건국의 아버지들인 Thomas Jefferson, Benjamin Franklin, John Adams 가 있다면, 대한민국엔 이승만이 있다.”
답) 이승만은 국적을 일본이라고 자필로 쓴 사람이다 Thomas Jefferson, Benjamin Franklin, John Adams 이분들이 자필로 敵國을 국적으로 쓴 사람들인가? 묻고싶다.
이승만과 비교 자체가 가당치도 않다.
네덜란드계 미국인 화가 휴버트 보스(Hubert Vos)가 1898년 조선을 방문해서 그린 〈서울 풍경〉은 근대가 막 시작되고 있는 서울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그림 오른쪽 멀리 보이는 경복궁 건물 세 채 중 맨 앞이 정문인 광화문이고, 그 뒤가 근정전이며 맨 뒤가 경회루다. 광화문을 출입문으로 하는 경복궁은 조선왕조의 정궁(正宮)으로, 당시 서울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건물로서 위풍당당한 모습이다.
콘스턴스 테일러, 〈서울 거리 풍경〉, 수채, 크기 미상, 1894~1901년경, 소장처 미상
스코틀랜드 화가 콘스턴스 테일러(Constance J. Tayler)는 1894년경부터 몇 차례 방문해서 그린 서울 풍경을 자신의 책 《코리아앳홈(Korea at Home)》(1904)에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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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1897년, 네 차례에 걸쳐 조선을 다녀간 영국의 여행가 이사벨라 비숍(Isabella Bird Bishop, 1831~1904)은 자신의 책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rs)》 (1897)에 서울을 묘사하면서 “인구 25만 명의 도시 서울은 다른 나라들의 큰 수도와 비교해 당당할 자격이 있고, 다른 어느 나라의 수도보다 아름답다”고 극찬했다
이승만은 하버드에서 석사를 마치고 자신은 2년 안에 조국을 위해 귀국해야 하니, 그 안에 박사과정을 마치도록 협조해 줄 것을 하버드에 요청한다. 그러나 거절당하여 프린스턴으로 가서 박사를 마치게 된다. 그는 윌슨 총장에게 직접 국제법 박사학위를 수여 받았는데, 윌슨 총장은 시간이 조금 흐른 후에 미국의 제 28대 대통령이 되는 우드로 윌슨이다. 윌슨 대통령은 우남을 매우 아껴 애제자이자 파트너로 칭하고 가족 파티에도 그를 항상 초대하였으며, 그에 대한 전폭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Princeton Univ 에는 Woodrow Wilson School, 일명 우디우, WWS가 있는데 프린스턴 학부생 중에서도 최상위 클래스의 학생들만 들어갈 수 있다. 일단 합격이 되면 정부 고위직 관료 층을 형성하고 있는 졸업생들의 후광과 인맥, 엄청난 후원과 인턴쉽이 주어지며 각국의 대사들에게 논문 협조를 받기도 한다. 3학년을 시작하면 학기마다 있는 Policy Task Force에서는 교수들과 실제 국제 정세에 적용시킬 수 있는 정책을 만들어서 미국 의회와 UN 상임위원회에 제출하는데, 채택되는 경우도 흔하다. University of Oxford 에는 WWS 전공자만 받아들이는 코스가 있다. 그리고 이 WWS 에는 이승만 홀이 있다.
답) 이승만은 명석하고 표리가 부동하고 기회주의자로서 23-24세 때 명필이고 한학자 이상의 수준에 이른 사람이다. 그러니 미국에서 자신만을 위하는 삶을 했을 것이다. 요즈음 밝혀진 미국에서의 행적을 살펴보자
<한인사회>
이승만 미국생활 발자취 밝혀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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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 국가기록원, 연방정부 문서 60건 공개 독립운동 주요 사료
▶ 징집카드 국적란 ‘일본’표시 눈길
1918년 이 전 대통령이 작성한 ‘제1차 세계대전 징집카드. 이 전 대통령은 필기체로 자신의 인적사항을 상세하게 기록했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1900년대 초 뉴욕과 뉴저지 등 미국에서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연방 정부 기록 문서들이 다수 공개돼 관심이 쏠리고 있다.
1일 본보가 미국 국가기록원과 민간 고문서 보관 웹사이트 엔세스트리닷컴(Ancestry.com)이 최근 공개한 문서를 확인한 결과, 이승만 전 대통령의 ‘영문 이름’(Syngman Rhee), ‘생년’(1875년) 등과 일치하는 연방 문서는 약 60건에 달했다.
이 전 대통령의 연방기록 문서들이 이처럼 다량으로 공개되기는 처음으로 향후 독립운동사 연구에 큰 도움을 줄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번에 공개된 문서 대부분은 이 전 대통령이 조지워싱턴 대학, 하버드 대학, 프린스턴 대학 등에서 재학하던 워싱턴 D.C., 매사추세츠주 보스턴, 뉴저지 프린스턴의 거주 시절과 하와이, 캘리포니아 등지에서 독립운동 활동을 하던 당시 기록된 것들이다.
이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자료는 1918년 이 전 대통령이 직접 작성한 ‘제1차 세계대전 징집 카드(U.S. World War I Draft Registration Cards)’로 당시 43세이던 이 전 대통령은 필기체로 자신의 인적사항을 상세히 게재했다. 생년월일은 이 전 대통령의 음력 생일인 3월26일로 적혀있으며, 직업은 ‘한국학교 교장’(Korean School Principal), 주소는 ‘하와이’로 돼 있다.
무엇보다 국적란에 ‘일본’(Japan)으로 게재한 점이 흥미롭다. 이 전 대통령이 이듬해인 1919년 상해 임시정부 대통령에 선출되기까지 국적을 ‘일본’으로 밝힌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대목이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이 전 대통령이 작성한 징집 카드는 당시 미국에 거주하는 18~45세 사이의 남성을 대상으로 했다. 시민권 보유와 상관없이 의무적으로 이 카드를 작성해야 했으며, 당시 이 전 대통령을 포함한 전국 약 2,400만명의 남성이 이 카드에 자신의 인적사항을 적어 넣었다. 현재 이 징집카드는 ‘셀렉티브 서비스’란 이름으로 남아 전국 만 18~25세 남성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이번에 발견된 고문서 중에는 이 전 대통령의 뉴욕 입항 기록 또한 눈길이 모아진다.
이 전 대통령은 1933년 유럽을 순방한 후 프랑스에서 출항한 ‘렉스’호에 올라 며칠 뒤 뉴욕항을 통해 미국에 입국한다. 이 입국 서류에서 이 전 대통령의 직업은 ‘박사·교수’(Doctor, Professor)로 표기돼 있고, ‘영어를 읽고 쓸 수 있냐?“는 질문란에 ‘그렇다(Yes)’고 돼 있다. 인종은 ‘한국인’(Korean), 출생지는 ‘한국(Korea), 서울(Soeul)’로 적혀있다.
그 외에도 필리핀과 일본 등을 출발해 하와이 호놀룰루나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 등에 도착한 다수의 입항기록과, 육로를 통해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 주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입국기록 등이 이번 조사에서 발견됐다.아울러 이 전 대통령과 1934년 뉴욕에서 재혼해 영부인 자리에 올랐던 프란체스카 여사 역시 1930년대 같은 입항 기록에 이름을 올린 문서가 다수 확인됐다. <함지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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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과연 그는 누구인가? '충격적인 자료' 안중근의사도 살인자로 규정한 '밀고자' 이승만
안중근의사도 살인자로 규정한 '밀고자' 이승만
서울의소리 | ㅣ기사입력 | 2011/07/07 [04:51] |
이 자료는 kbs가 과거 방송한 자료를 토대로 구성한 내용 이다.
이승만은 "한국이 일본에 합병된 뒤에 눈부시게 발전했다. 그리고 나는 단 한 번도 독립운동을 획책한 적이 없다. 한국독립은 국제연맹에 "청원서"를 내고 "위임통치를" 받은 후에 해야 할 일이며, 독립이 된다면, 반드시 "기독교" 국가를 건설하고 "미국식" 민주주의를 표방할 것이라고 역설을 하며 가장 양심적 평화를 사랑하는 박애주의자처럼 2박 3일간 미국 각지에서 몰린 교민들을 기만하며 치렀다.
이승만이 임시정부에서 축출된 것은 논문 때문입니다.
그의 논문은 미국이 조선에 대한 신탁통치에 관한 논문으로 미국이 한국을 신탁통치 해달라는 논문이었고, 이에 격분한 임시정부에서는 만장일치로 그를 탄핵 했지만 이승만은 나는 대통령이므로 너희들의 탄핵은 인정할 수 없다며 무시하자, 신채호 선생은 이완용은 나라를 팔아먹었다면, 이승만은 없는 나라를 팔아먹었다! 고 격분했다고 합니다.
또, 전명운 장인환 의사에 대한 이야기는 더 있습니다. 우선 교민들은 전명운 장인환 의사를 구명하고자, 당시 하와이 바나나농장에서 어렵게 일한 동포들이 정말 목숨 같은 돈을 모으게 됩니다. 애국지사를 죽일 수 없다는 애국심'에서 동포애가 발휘된 것입니다. 그러나 동포들 중 아무도 영어를
유창하게 할 수가 없었고, 황색인종을 도와줄 백인은 없었습니다. 다행이 하버드 석사'요, 프린스턴 대 철학박사인 이승만을 찾아갔고, 이승만은 수락합니다.
그러나 1등급 호텔에서 자신이 머물게 해달라는 현실에 맞지 않는 조건을 내세워 교민들은 모금한 그 피 같은 돈으로 그의 조건을 들어 줍니다. 그러나 이승만은 쓸데없는 곳에 돈만 쓰고 시간만 허비하다, 마지막엔 나는 살인자를 변호하는 통역은 할 수 없다! 라는 말을 남기고 도망칩니다.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행위에 망국의 한을 품은, 교민들을 타국 땅에서 믿었던 이승만 땜에 또 한 번 피눈물을 흘리며 나라 없는 절망에 땅을 치며 통곡을 해야만 했습니다
1904년"민영환 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건너온 이승만은 1905년, 공부도 열심히 했지만 그의 포부는 남달라 미국사회에 유명 인사들과 교류를 위해 틈나는 대로 편지와 메모로 자신의 입지를 폭 넓게 굳힌 것 같다. 그것은 "테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을 조그만 동양의 고학생이 만났다는 사실에서 입증되며, 후에 2차 대전의 영웅 "맥아더"를 만난 사건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그가 5년 만에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 "하버드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함은 그 당시나 지금이나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그러한 그가 천재적 기질을 갖고 애국을 한 사실은 1904년 이전 1898년 정부전복을 꾀한 죄목으로 투옥됐다가 "민영환에 의해 미국으로 유학 온 것 외엔 뚜렷한 것이 없다. 1908년 3, 23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전명운" "장인환" 의사가 미국인 "친일파" 스티븐슨"을 살해 했을 때 이승만은 이들의
법정통역을" 살인재판"으로 명명하고 무참히 거절해 버렸다.
그리고 "안중근 의사의 의거도"테러로 간주하고
살인자라 맹 비난했는데, 어떤 이유에서 일까?
1, 프린스턴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을 때 그는 "교육과 선교활동에 뜻을 밝힌 것으로 보아, 종교적 문제로 거절했을 수 있고,
2. 자신의 외교적 입지를 곤란하게 하므로 통역을 거절했을 수도 있다. 어느 것이던 거절을 함으로써 인종차별이 심한 미국사회에서 자신과 테러를
차별화 시키기 위한 방법일 수 있다
그럼, 그는 인종차별이 심한 미국사회에서 어떤 외교활동을 펼쳤을까? 미국 외에 접촉한 나라는 몇 나라나 될까? 전혀, 소득의 결과가 없다. 그는"하와이로 건너와" 박용만 이 이끄는 "국민회를 장악하고 법정투쟁을 벌리는데 이는 나라를 위함이 아니요, 자신의 입지를 굳히기 위해 든든한 "친위대"를 양성시키는 수순이었을 뿐이었다.
이 승만 의 야심 과 비열한 욕망
그의 야심이 드러난 것은 1919년 3월 1일 고국에서 일제에 항거하는 3. 1운동이 일어나자 그를 따르는 교민들을 규합하여 "필라델피아' 독립기념관에서 열린 한인대회의 발언이었다." 이승만은 "한국이 일본에 합병된 뒤에 눈부시게 발전했다. 그리고 나는 단 한 번도 독립운동을 획책한 적이 없다. 그러나 한국독립은 국제연맹에 "청원서"를 내고 "위임통치를" 받은 후에 해야 할 일이며, 독립이 된다면, 반드시 "기독교" 국가를 건설하고 "미국식" 민주주의를 표방할 것이라고 역설을 하며 가장 양심적 평화를 사랑하는 박애주의자처럼 2박 3일간 미국 각지에서 몰린 교민들을 기만하며 치렀다. 이날 이승만은 미국의 신화 같은 초대 대통령 "워싱톤이 앉았다는 의자에 앉아 건방을 떨며" 새한국의 초대대통령이 자신이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과시하며 대통령 취임식 까지 했다.
이때는 이미 임시정부의 직함인 "국무총리" 직을 박탈당하고 퇴출당한 아무것도 아닌 신분인데도 "임정의 대통령" 직함을 그냥 사용했다. 이것은 분명한 사기인 것이다. 마치 그의 행위는 "그리스신화"의 기회의 신 "카이로스"를 연상시켰다.
▲ 1919년 3.1절을 기화로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한인대회"의 이승만과 그가 규합한 순진한 교민들. 몇 안 되는 이들을 모아놓고 "대통령' 취임식을 했다.
▲ 죠지 워싱톤의 의자와 그 의자에 앉은 이승만
1918 년 "국민군단"과 박용만 사건
박용만은 강원도 철원 태생으로 "일본 동경으로 유학, 1904년, "보안회"에 입회하여 "일본의 개척권 요구"에 항거하는 운동에 참여, 한성 감옥에 투옥됐는데 그는 그 감옥 안에서 "이승만과 운명적으로 만나 "결의형제가 되었다. 1904년 출옥한 박용만은 이승만과 동일시점에 미국으로 출국하여, 1906년 "헤이팅스 대학에서 "정치학과" 군사학을 전공하고 1909년 "네브라스카"에서 "한인소년병 학교"를 설립하였다. 1911년 "신한민보"의 주필을 거쳐, 1913년 "하와이"로 와서 "신한국보"의 주필이 되었다.
그는 "군대를 양성해 일본본토를 공격해 독립을 이룩하자! 고 외쳐 교포사회에 감동을 일으켰다. 교포들의 감동으로 그는 1913년 6월11일 하와이 "호놀룰루시"의 큰 산 너머 코올라우(Koolau)구역 "아후이마누"에 위치한 "파인애플 농장(1360에이커)에 "대조선군단"이라는 독립군을 창설하였다. 그는 생도들에게 "낮에는 일을, 밤에는 군사훈련을 시켰다. 애국심에 독립이란 감동이 더해져 교포사회의 지원은 상상 이상 이었다. 박용만은 1차적으로 "하와이 항"에 정박 중인 "일본함정 츌운호"를 격침시키는 목표를 세웠는데, 때를 같이해 "이승만은" 하와이의 독립운동 자금에 눈독을 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백인우월주의에 돈 없는 "황색인종"이 무슨 방법으로 외교를 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오로지 "돈"의 힘이었다.
그는 미국본토에서 "박용만'의 대의에 참여와 협조를 빙자해 하와이로 건너 와, 그곳애서 교육 사업으로 학교를 세워 "역사와 세계사를 가르치고 "교장'으로 취임했는데, 그를 기억하는 교포들의 증언은 과히 충격적이었다. 그는가는 곳마다 "분열'과 대립의 상징이었으며, 공포의 대상이었다고 증언 했다."신앙에 있어서는 자신이 믿고 만든 교회와 "감리교중 하나만 선택하라며, 교회를 분열 시켰으며, 이것은 자신이 세운 자신의 우상화 종교를 믿고 자기를 추종하는 "사제"가 되라고 강압적 압력을 가했다고 한다. 이는 박용만과 "대조선국민군단"의 와해를 획책키 위한 고도로 기획된 야비한 이승만 식의 전략이었다. 급기야 이승만파 와 "박용만'파로 갈리어 분열 됐는데, 하와이 교민 1세대들은 분열로 인한 큰 고통의 상처로 남게 되었고 이들은 이승만이 교포사회에서 잔악한 위험인물 이라는 걸 서슴없이 증언하고 있다. KBS에서 어렵잖게 취재한 증언을 들어보자.
▲ 이승만은 하와이교포들사이에 반목과 적개심을 불러 일으켜 서로 앙숙이 되게 철저히 양극화 시켰다
밀고성 증인이 된 이승만
이승만 ! 이 사람은 평화를 사랑하기 보다는 평화를 빙자해 동족의 피의 대가를 자신의 업적으로 치부하는 비열하고 악랄한 무뢰한에 지나지 않았다. 평화와 외교를 지향한 그가 하나님을 앞세워 행한 일은 종교와 동족분열, 그리고 그토록 증오하던 "테러리즘을 손수 자행한 장본인이었다.
또, 그는 증인이 아닌 밀고자 로 전락하는데........
국민군단의 위용이 나날이 높아지자, 주미"일본영사관"에선 어찌 알았는지? 미국국무장관에게"한국인의 군사훈련에 항의를 하여"무기불법 소지"문제로 교민의 대표인"박용만"이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이 사건은 이승만에게"천재일우"의 기회가 되었다. 놀라운 것은, 이때 이승만이 증인으로 나와, 박용만이 미국영토에 군사학교를 설립한 것은"하와이에 정박 중인 일본군함"츌운호"를 격침시키기 위함이며,"미국과 일본 사이에, 사변을 일으켜 양국 간 외교를 깨려하는 위험한 인물이라고 진술했다.
그로인해"박용만은 유죄판결을 받아 몰락하고"대조선 국민군단"도 사라지고 말았다. 이승만은 눈엣가시 같은"박용만을 제거하는데 성공하여 하와이 의 주도권을 잡았다. 그러나"박용만을 추종하던 애국심에 불타는 사람들은 동조를 거부하자, 본격적인 테러와 폭행을 감행했으며 총기난사 까지 서슴지 않았다. 이승만의 증언은 밀고성 고발이며 결의형제 의 결속을 배반하고, 교포사회의 애국심을 무참히 짓밟은 반역행위였다. 어떠한 변명과 구실도 대신할 수 없는 선택이었으므로, 굳이 변명을 한다면, 이는 마치"씨저"를 살해한"브루터스의 웅변과 같을 것이다. 하와이와 같은 좁은 땅에서 외교를 위한 동족을 범법자로 만든 파렴치한 짓이었고, 개인의 야심에 애국심을 뭉개버린 그의 독선적인 욕망의 극치였다.
그의 테러행각은 오늘날 잘 포장되어 애국과 한국의 "국조"로, 모래위에 누각처럼 서게 됐다. 그를 옹립한 "뉴라이트"의 공로다.
동시대에 "시카고"에서 악명을 높이던 이태리계"깽두목 알 카포네"와 다를 게 무엇인가? 사진에 보이는 빽속에 야구배트가 있는걸 보아 폭행직후"기념촬영"을 한껏 같다. 누굴 해한 것인지? 기념사진을 찍은걸 보면, 대단한 인물에게 폭력을 가한 것 같다. 대한민국" 국부의 경력치곤 너무 소름끼치게 비열하다.
이 분이 박용만씨 다. 님은 1928년"베이징에서 흉한의 습격을 받고 살해 되었다. 누가 살해했는지…? 명확치 않다. 1925년 베이징에서 "이승만의 대통령직을 탄핵한 후 3년 뒤였다. 이들의 "결의형제" 맹세는 이렇게 끝났다.
이승만은 자신의 욕망을 달성키 위해 "전명운" “장인환" 의사, 및 "안중근 의사까지" 살인자로 규명하고 활동시킨 단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