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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8일 오후, 본토의 전투가 점차 격화되는 가운데 런던에서 루이스 볼린이 준비한 드래건 라피데 비행기 한 대가 카나리아 제도로 날아가 비행장에서 민간인 복장으로 기다리고 있던 프랑코 장군을 태웠다. 영국인 조종사는 반쪽짜리 카드를 가지고 자신이 태운 승객이 가진 나머지 반쪽과 맞추어보는 방식으로 프랑코의 신분을 확인하라는 자시를 받았다. 그러나 프랑코는 그런 아마추어 냄새가 물씬 풍기는 유치한 장난같은 짓을 가볍게 무시해버렸다. 아마도 그런 행동이 한 나라의 운명을 결정짓게 될 사람한테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프랑코는 산후르호가 반란 세력의 간판으로 인정받을 만한 인물인지는 모르지만 거사가 성공하려면 자신의 능력이 필수불가결하다는 확고한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
프랑코는 루이스 볼린이 기다리고 있는 프랑스령 모로코에 있는 카사블랑카로 날아갔다. 그러나 프랑코는 우선 반란 세력이 아프리카 주둔군을 확실하게 통제하고 있는지 확인해야 했다. 그래서 먼저 자신에게 탕헤르에 착륙하지 말라고 조언했던 라라슈에 있는 장교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7월 19일 새벽에 프랑코는 테투안으로 출발했고, 비행기 안에서 군복으로 갈아입었다. 비행장에서는 반란군 고위 장교들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야구에, 솔란스, 세기, 사엔스 데 부루아가, 베이그베데르 등이었다. 비행기 근처에서 회의가 열렸다. 거기서 프랑코는 반란이 완전히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볼린이 ‘스페인의 비(非)마르크스주의 군대’에게 필요한 비행기와 보급품을 구입할 권한을 가지고 즉시 그곳을 출발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프랑코가 그날 테투안에서 내린 두 번째 결정은 포로로 잡힌 공화 정부 지지자들을 도시 근교에 있는 포로수용소와, 세우타에 있는 엘에초(El Hecho) 성에 수용한다는 것이었다. 포로들은 신속한 분류 작업을 거친 다음 매일 아침 그곳으로 찾아오는 팔랑헤당원들에게 집단 사살되었다.
엘 에초 성
본토에서는 지원 병력이 시급히 필요했고, 해군의 반란이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에 아프리카 주둔 병력을 스페인으로 실어 나르려면 수송기가 필요했다. 7월 22일 테투안 주재 독일 영사는 전에 베를린에서 스페인 무관으로 근무했던 베이그베데르가 건네준 메시지를 빌헬름 슈트라세 거리에 있는 독일 행정부로 보냈다. 메시지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프랑코 장군과 베이그베데르 대령은 그들의 친구인 존경하옵는 퀼렌탈(Kuhlental) 장군에게 안부를 전하면서, 더불어 스페인에 새로 국민 정부가 출범한 사실을 알려드립니다. 아울러 장군님께 독일 민간 회사를 통해 될 수 있으면 많은 인원이 탑승할 수 있는 군 수송기 10대만 이곳으로 보내주시기를 간청드립니다. 그 수송기들을 독일인 승무원과 함께 스페인령 모로코에 있는 아무 비행장에라도 보내주셨으면 합니다. 그에 대한 계약은 후에 체결하도록 하겠습니다. 한시가 급합니다. 프랑코 장군과 스페인 드림.
스페인 북쪽 해안 지역에서 산탄데르 항은 7월 19일 아침 제23보병연대가 반란에 합류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유혈 사태 없이 공화 정부가 확보했다. 그러나 오비에도 시에서는 좌파가 1934년 아스투리아스 반란 때 자신들이 보여준 힘을 지나치게 과신하는 바람에 다른 상황이 벌어졌다. 그 지역 군사령관 아란다 대령은 지난 몇 달 동안 주지사와 노동자 지도자들에게 자신이 정부에 충성하는 사람이라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아란다는 마드리드 정부의 지시에 따라 행동할 뿐이라면서 노동자들에게 무기를 나누어주는 것을 거절했다. 주지사는 대령의 충성 약속을 믿고서 노동자 지도자들에게 그를 ‘믿어도 되는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아란다는 자신이 오비에도를 지킬테니 광부들은 대열을 이루어 마드리드를 도우러 가라고 제안했다. 그러나 광부들이 도시를 떠나자마자 아란다는 반란을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아란다의 군대와 치안대가 도시를 점령하자마자 주지사는 그들의 첫 번째 희생자가 되었다. 노동자들은 아란다에게 속은 것을 알고 되돌아와 도시를 포위했으며, 그때부터 오래고도 격렬한 공성이 시작되었다.
안토니오 아란다. 내전 발발 당시 오비에도 기지의 지휘관이었다.
히혼 시에서는 피니야(Pinilla) 대령이 이끄는 반란 군대에 맞서 부두 노동자들이 단호하게 대처한 덕분에 반란이 실패로 돌아갔다. 반란군은 시망카스 병영으로 철수하여 거기서 다이너마이트 폭파 기술자들이 막사 건물을 폭파할 때까지 한 달 넘게 포위된 상태로 저항을 계속했다.
카를로스파의 도시 팜플로나의 상황은 그보다는 덜 극적이었다. 7월 19일 아침 ‘지도자’ 몰라 장군은 주도면밀하게 자신의 시간표에 따라 행동했고, 나바라에 전시 상태를 선포했다. 자주 ‘스페인의 방데’로 묘사되곤 하는 이 전통주의자 성채에서는 반란군에게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았다. ‘인민의 집’에서 저항을 시도한 사람들은 곧바로 몰살당했다. 그날 하루 종일 카를로스파 농민들이 반란군에 자원입대하기 위해 중앙광장으로 몰려들었다. 진홍색 큰 베레모를 쓴 그들은 ‘그리스도 왕 만세(Viva Cristo Rey)!'라는 옛날 전투 구호를 외쳤다. 그 장면을 직접 목격한 한 프랑스인은 만약 자신이 같은 시기에 이단자들을 처형하기 위한 종교 재판을 목격했더라도 놀라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모두 8천 명 가량의 레케테(카를로스파 의용군)들은 이런 노래를 부르면서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내 베레모를 주오
내 총을 주오
나는 4,5월 들판에 핀 꽃들보다
더 많은 빨갱이들을 죽이리라.
나바라는 전에 공화 정부가 제안한 바스크 자치법을 투표로 부결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바스크인들은 군사 반란에 합류한 카를로스파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다. 7월 19일 국민 진영은 또한 바스크 남부 알라바(Alava) 주의 심장이랄 수 있는 비토리아(Vitoria) 시를 장악했다. 그러나 빌바오에서는 주지사가 몰라와 지역 사령관 사이에 오가는 전화를 도청하는데 성공했다. 비스카야(Vizcaya) 주를 수호하기 위한 방어위원회를 설치하고 바수르토 성채를 포위했으며, 병사들은 결국 무장해제되었다.
비토리아 시의 위치
바스크 지역 동쪽에서는 노동자 조직들이 주도권을 잡고 있었는데 에이바르 시는 노동자총동맹이, 산세바스티안 시는 전국노동연합이 장악했다. 산세바스티안에서는 오비에도와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카라스코(Carrasco) 대령이 공화 정부에 충성을 선언해서 공화 정부 병력의 일부가 몬드라곤의 공화 진영을 도우러 파견되었다. 대령이 마침내 본심을 드러내자 공화 정부 지지자들은 대령의 부하들이 집결해 있던 마리아 크리스티나 호텔과 그란 카지노 클럽을 포위했다. 스페인의 여름 수도이자 분위기가 가장 세련된 해변 휴양지였던 산세바스티안 시에은 우파 지지자들이 꽤 많았다. 그러나 그들은 예기치 못한 노동자들의 맹렬한 공격을 당해낼 수 없었다. 마리아 크리스티나 호텔을 방어하는 과정에서 반란 세력이 살아 있는 사람들을 창문에 인질로 세워 모래주머니 대용으로 사용했다는 주장이 있었으나 아마도 당시 선전으로 이용된 과장된 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나키스트들은 바스크 민족주의당(PNV)이 반란에 어떻게 대응할지 예상할 수 없어서 일단 로욜라 병영에 있는 무기들을 탈취했다. 이 일에다 얼마 후에 우파 포로 사살 사건이 일어나 아나키스트들과 바스크 민족주의당 내 바스크 가톨릭 동맹 세력의 관계가 나빠졌다.
구(舊)카스티야 지방의 경우, ‘병사들과 사제들의 도시’ 부르고스는 후에 바에야노(Valleano) 백작 부인이 적십자사의 후노드(Junod) 박사에게 발했듯이, ‘돌부리 하나까지 철저하게 국민 진영 편’이었다. 반대파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이곳에서도 반(反)쿠데타 분자로 분류된 사람들의 이름과 주소를 경찰 본부로부터 넘겨받는 것과 함께 대량 학살이 자행되었다. 반란에 참여하지 않고 정부에 충성을 바친 바데트 장군과 메나(Mena) 장군 등이 맨 처음 총살당했다.
부르고스에서 발견된 대량 학살 매장지
쿠데타 음모에서 가장 눈에 띄는 민간인이었던 사인스 로드리게스(Sainz Rodriguez), 고이코에체아, 바예야노 백작, 베가스 라타피에(Vegas latapie), 양구아스(Yanguas), 순수네기(Zunzunegui), 발데이글레시아스(Valdeiglesias) 후작 등이 산후르호 장군을 새 국가 수반으로 환영하려고 이미 부르고스에 모여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기다림은 허사로 돌아갔다. 산후르호 장군을 태우고 포르투갈에서 출발한 비행기가 이륙하자마자 추락하는 바람에 ‘리프의 사자’가 현장에서 사망하고, 비행기 잔해도 그의 군복과 장식품들과 함께 불에 타버렸던 것이다.
사인스 로드리게스. 프랑코 정권에서 교육부 장관을 지낸다.
베가스 라타피에
산 후르호의 장례식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가 낭만적으로 묘사한 바 있는 금욕적인 카스티야의 중심 도시 바야돌리드에서는 돌격대가 주지사 루이스 라빈(Luis Lavin)에 대항하여 봉기를 일으켜 바야돌리드 라디오 방송국과 우체국을 점령했다. 지사는 체포되고 그가 감금했던 반란군 장교들이 석방되었다. 살리케트 장군과 폰테 장군이 반란군을 직접 지휘하려고 권총을 들고 반란군 본부로 들어갔다. 이에 니콜라스 몰레로(Nicolas Molero) 장군과 그의 부하들이 반격함으로써 서로 총격이 오갔고, 그 과정에서 3명이 죽고 몰레로를 비롯하여 5명이 부상당했다. 몰레로는 며칠 후 처형되었다. 살리케트는 전시 상태를 선언하고 군대에게 거리로 나가라고 명령했다. 노동자총동맹 소속 철도 노동자들이 이들을 상대로 용감하게 저항했으나 얼마 가지 않아 전멸당했다. ‘인민의 집’으로 피신한 478명은 구금되었다.
살리케트 장군
니콜라스 몰레로 장군
좌파가 아라곤의 수도인 사라고사를 확보하는 데 실패한 것은 뼈아픈 손실이었는데, 특히 아나키스트들에게 그랬다. 카바네야스(Cabanellas) 장군의 속내를 알 수 없었던 주(州)정부는 그가 공화 정부에 충성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친구인 누네스 데 프라도(Nunez de Prado) 장군을 보냈다. 그런데 카바네야스는 반란 지지를 선언하고 누네스 데 프라도와 부관을 쏘아 죽였다. 사라고사에는 약 3만 명의 전국노동연합 조합원들이 있었다. 그러나 전국노동연합 지도부는 주지사가 무기 공급을 거부하는데도 지사를 통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고집했다. 7월 19일 새벽 모나스테리오(Monasterio) 대령이 이끄는 군대가 거리로 진출했고, 노동자들은 사실상 무방비 상태에서 참혹하게 학살당했다.
미구엘 카바네야스. 프랑코 정권 아래서 수상이 된다.
누네스 데 프라도
쿠데타 주동자들이 바르셀로나를 가장 확실한 점령 대상지로 뽑았음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그들의 예상과는 사뭇 다르게 전개되었다. 쿠데타 세력은 우파이며 반(反)카탈루냐 성향인 에스파냐 군사동맹 장교들을 중심으로 병영에서 뛰쳐나와 중심 지역을 장악하기로 한 1만 2천 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마요르카에 머물고 있던 고데드 장군이 마요르카 섬을 장악하는 대로 비행기로 바르셀로나로 건너와서 반란 세력을 지휘하기로 계획되어 있었다. 그러나 반란 공모자들은 노동자 조직들의 결사 항전을 미처 예상하지 못했고, 돌격대는 물론이고 놀랍게도 치안대 대원들까지 자신들에게 맞서리라는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7월 18일 저녁 카탈루냐 헤네랄리타트(카탈루냐 지역정부) 수반 콤파니스는 모로코와 세비야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고 있었고, 바르셀로나에서도 반란이 예정되어 있음을 말해주는 문서로 된 증거물을 손에 들고 있었으면서도 전국노동연합 조합원들에게 무기 지급을 거부했다. 카탈루냐 경찰은 무기를 갖고 있는 아나키스트들을 체포했다가 전국노동연합 지역위원회의 강력한 항의를 받고 나서야 풀어주었다.
만일 군대가 도시를 장악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 잘 알고 있었던 아나키스트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정치가들의 손에 맡기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날 밤 전국노동연합 지역 방어위원회는 전투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노동자들은 외딴 병기고들을 공화 정부에 동조하는 부사관들의 적극적 지원으로 탈취했고 항구에 정박 중인 선박 4척의 무기도 회수했다. 심지어 노동자들은 감옥으로 이용하던 폐선(廢船) 우루과이호를 습격하여 간수들에게서 무기를 빼앗았다. 항구에 다이너마이트가 선적된 것을 알고 있었던 노동자총동맹 소속 항만 노동자들은 그것을 탈취하여 밤새 수제(手製) 수류탄을 만들었다. 도시에 있는 총포상도 대부분 약탈당했다. 승용차와 화물차들이 징발되었으며, 금속 노동자들은 징발한 차에 두꺼운 금속판을 씌우고 트럭 운전대 뒤에는 모래주머니들을 쌓아 올렸다.
스페인 내전 당시 바르셀로나의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 시민군 - 1936년 8월 28일
자동차 지붕이나 옆면에 크고 하얀 글씨로 대부분 아나키스트와 관련된 약자인 ‘CNT(전국노동연합)-FAI(아나키스트연합)’ 표시를 했는데, 간혹 ‘POUM(마르크스주의 통합노동자당)’이나 ‘PSUC(카탈루냐 통합사회당)’라는 약자도 눈에 띄었다. 아스투리아스 반란 때 노동연합의 공동구호였던 UHP(프롤레타리아 형제연합)라는 약자를 쓴 차도 있었다.
그날 무더운 여름밤의 분위기는 긴장이 고조될 대로 고조되어 있었다. 인민 올림픽(나치 독일에서 열리는 올림픽 게임을 거부하는 의미로 계획되었다)이 다음날 바르셀로나에서 열릴 예정이었으나 그날의 위기 상황에서 행사는 거의 잊혀진 상태였다. 경기에 참가하려고 외국에서 온 선수들은 호텔이나 숙소에서 불안한 마음으로 사태를 지켜보았다. 그중 다수는 그 다음날 노동자들과 함께 전투에 참여했고, 그중에서 약 200명은 후에 의용군 대열에 합류했다. 그 무렵 콤파니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고 생각하고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중절모를 깊이 눌러쓴 채 바르셀로나 중심에 있는 대표적인 산책로인 람블라스(Ramblas) 거리로 나갔다. 거리는 인파로 넘쳐 흘렀고, 나무에 매달린 확성기에서는 계속 음악이 흘러 나오다가 가끔 음악이 끊기고 선언문이 낭독되는 등 매우 소란스러웠다. 아나키스트들이 즐겨 찾는 장소인 카페 ‘라트랑킬리다드(La Tranquilidad, 정적靜寂)에서는 전국노동연합 조합원들이 새로운 소식을 듣고 노동자들의 무장과 관련된 보고를 받기 위해 분주하게 들락거렸다. 부에나벤투라 두루티, 후안 가르시아 올리베르, 디에고 아바드 데 산티안(Diego Abad de Santillan) 등 지역위원회 위원들은 콤파니스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헤네랄리타트와 긴밀한 연락을 주고 받고 있었다. 실제로 소수 돌격대 대원들은 헤네랄리타트의 지시를 무시하고 돌격대 무기고에서 소총을 꺼내 전국노동연합에 넘겨주기도 했다.
바르셀로나의 람블라스 거리
카페 라트랑킬리다드
7월 19일 동이 트기 직전에 페드랄베스(Pedralbes) 병영에서는 장교들이 병사들에게 럼주를 나누어주면서 마드리드로부터 아나키스트들의 봉기를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말했다. 부대원들이 바르셀로나 주요 간선도로인 디아고날 대로를 향해 출발하자 팔랑헤당원들과 기묘한 복장을 한 반란군 지지자들이 합류했다. 거의 즉각적으로 공장 사이렌이 시내 곳곳에서 요란한 경고음을 내며 울려 퍼졌다. 아침 5시경 몬테사 기병 연대가 타라고나 가에 있는 병영에서 나와 중심가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고, 산티아고 기병 연대는 트라베세라 데 그라시아(Travessera de Gracia) 병영을 출발했으며, 제7경포병 연대의 한 중대도 3만 정이 넘는 소총을 보관하던 산안드레스 병영을 출발하여 시 중심지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트라베세라 데 그라시아 병영
이 군대들은 서로 아무 협력도 없이 도시 중심지 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파르케 병영에서 출발한 보병 연대는 도중에 강력한 반격에 부딪혀 막사로 후퇴했고, 산티아고 기병 연대는 싱크도로스(Cinc d'Oros) 근처에서 뿔뿔이 흩어졌다. 어떤 부대는 거리로 진출해보지도 못했다. 도심 쪽으로 행군해 간 부대들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건물들을 점령하기 위해 에스파냐 광장과 카탈루냐 광장 근처로 갔다. 그들은 콜론 호텔과 리츠 호텔, 중앙전화국 건물을 장악하고 바리케이드를 쳤다. 시내로 진출하려다가 도중에 공격을 받은 부대들은 그 자리에서 바리케이드를 쳤으나 자살 특공대원들이 대형 화물차를 몰아 돌파했다. 싸움에 참가하지 못한 시민 대부분은 병사들의 시내 진입을 막기 위해 바리케이드를 쌓는 일에 나섰다. 포장용 돌로 쌓은 바리케이드는 잘 쌓을 경우, 1909년 ‘비극의 한 주’에 일어난 시가전에서 노동자들이 경험했듯이, 웬만한 경포 공격 정도는 막아낼 수 있었다.
싱크 도로스 광장 근처에 모인 산티아고 기병 연대
오전 11시경 고데드 장군이 수상비행기를 타고 마요르카로부터 바르셀로나에 도착했다. 그 전에 마요르카 섬은 반란군이 어렵지 않게 장악했다. 그에 비해 마온 항구에 잠수함 기지가 있었던 메노르카 섬은 장교들의 지시를 거부한 병사들과 부사관들의 도움으로 좌파가 장악했다. 고데드 장군은 곧바로 사령관실로 가서 공화 정부 지지를 선언한 사단장 야노 데라 엔코미엔다(Llano de la Encomienda)를 체포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시내에서 반란군이 장악한 모든 건물들이 공화 정부 지지자들에게 포위되었다. 바리케이드, 화물차, 공공건물에는 흑색과 적색이 대각선으로 교차하는 전국노동연합-아나키스트연합의 깃발이 나부꼈다. 가로수 위에 걸린 확성기들은 길고 더운 일요일 오후 내내 계속해서 새로운 소식과 지시, 경고를 토해냈다. 교회 종탑에서 사제들이 총을 쏘았다는 소문이 퍼지고 나서 여러 교회가 불길에 휩싸였다. 그러나 총을 쏜 것은 사제들이 아니라 수도원과 교회 종탑을 장악한 군인들이었다. 창문에서 사람들에게 총을 쏘았다는 혐의로 고발된 갈멜 수도원 성직자 10여 명등 ‘우파 분자들’은 즉각 처형되었다.
야노 데라 엔코미엔다
포위당한 건물들 사이의 공간에서 치열한 총격전을 벌이면서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오후 2시경에는 결연한 의지로 저항하는 많은 노동자들을 군대가 당해내지 못하리라는 것이 분명해지자 에스코바르 대령이 이끄는 치안대가 노동자 편에 가담했다. 대령은 800명에 이르는 치아대원을 이끌고 대열을 이루어 라에타나 가를 따라 공공질서위원회가 있는 건물로 왔으며, 발코니에서는 콤파니스가 그들을 맞이했다. 말을 탄 기병 대대가 람블라스 거리를 따라 행군하면서 꽉 쥔 주먹을 들어올려 인사하자 군중들이 환호로 맞아주었다. 이는 준군사 기구인 치안대가 바르셀로나 노동자들에게 환영받은 최초의 일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군중들이 치안대에게서 의심을 완전히 거둔 것은 아니었다. 우수한 저격병들을 보유한 치안대는 콜른 호텔과 리츠 호텔을 공격할 때 정부군에 큰 힘이 되었다. 그러나 전화국 건물은 이들의 도움 없이 아나키스트들의 힘만으로 탈환했다.
그러나 진짜 전환점은 이카리아 대로(Avencia Icaria)에서 있었다. 노동자들은 시내에서 포위당한 반란군을 돕기 위해 출동한 기병대와 제1산악 포병 연대의 시내 진입을 막기 위해 이 거리에 거대한 회전 압형기들을 동원해 바리케이드를 쳐놓았다. 싸움이 한창일 때 몇몇 노동자와 돌격대원 하나가 광장을 가로질러 75mm 대포 두 문을 앞세우고 있던 반란군 포병대 쪽으로 달려갔다. 그들은 뜻밖의 상황에 어리둥절해 있는 반란군 병사들에게 소총을 머리 위로 올려 공격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알렸다. 그들은 병사들 앞에 도착해 숨을 헐떡이면서 “당신들은 장교들에게 속은 것”이라면서 왜 병사들이 같은 형제들에게 총을 쏘면 안 되는지 열정적으로 설명했다. 이에 설복된 병사들은 포신을 반대편으로 돌려 반란군을 겨냥했다. 이를 계기로 점점 더 많은 병사들이 노동자들과 돌격대 대열에 합류했다.
이카리아 대로
사령관실에서 버티던 고데드 장군은 한 부두 노동자가 적으로부터 탈취한 대포를 앞세우고 일제사격을 가하자 마침내 항복했다. 많은 공화주의자들이 반란 수괴인 고데드 장군을 현장에서 사살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공산당원이면서 트로츠키 암살범의 어머니인 카리다드 메르카데르(Caridad Mercader)가 설득한 덕분에 고데드 장군은 즉결 처분을 면했다. 고데드는 콤파니스에게 인계되었고, 콤파니스는 그를 설득해 라디오 방송으로 이제 유혈 사태를 중지하자는 연설을 하게 했다. 고데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고데드 장군입니다. 스페인 국민들에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지금 불운하게도 포로가 되었습니다. 아직까지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 사람들(국민 진영 사람들)에게 더는 저에게 아무런 의무감도 느낄 필요가 없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고데드가 한 연설은 다른 지역의 좌파 세력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특히 마드리드에서 그의 연설이 확성기를 통해 몬타냐 병영을 방어하던 반란군에게 중계되었다. 그러나 이 연설이 고데드 장군을 살려내지는 못했다. 그해 8월 공화군 장교들로 구성된 군법회의는 그에게 반란 혐의를 적용하여 사형을 선고했다.
체포되어 재판을 받는 고데드 장군
해질 무렵 바르셀로나에서는 항구 근처 아타라사나스 병영과 산안드레스 병영만이 저항을 계속하고 있었다. 콜럼버스 기념탑 부근에 기관총이 설치된 장소들은 초저녁에 침묵을 유지했다. 프라트(Prat)에 있는 공항은 공화 정부를 지지하는 디아스 산디노(Diaz Sandino) 대력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그가 이끄는 비행기들이 콜럼버스 기념탑을 공격하는 틈을 타 노동자들과 돌격대원들이 콜럼버스 기념탑을 급습하여 반란군을 궤멸했다. 몬주익 성채에서는 수비대 병사들이 반란군에 동조한 장교들을 쏴 죽이고 무기고의 열쇠를 전국노동연합에 넘겼다.
디아즈 산디노 대령
다음날 아침 아나키스트들은 아타라사나스 병영 점령은 자신들의 몫이라면서 돌격대나 치안대아게 나서지 말아줄 것을 요구했다. 부에나벤투라 두루티가 “전국노동연합 전사들이여 돌격!”하고 총공격 명령을 내렸다. 그는 전우인 프란시스코 아스카소(Francisco Ascaso)와 함께 공격을 이끌었는데, 아스카소는 공격이 시작되자마자 전사하고 말았다. 이 마지막 공격에서 600명의 사망자와 4천 명의 부상자가 나왔다. 모든 싸움에서와 마찬가지로 아나키스트들은 결사적이고 살신성인하는 용기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꼭 그렇게 많은 죽음이 불가피했던 것은 아니었다. 특히 마지막 공격의 경우 아나키스트들은 대포를 가지고 있었고 공군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피해를 최소로 줄일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 용감한 공격은 아나키스트들의 신화가 되었으며, 돌진과 용기가 군자 작전의 대용물로는 위험하다는 사실은 그 신화에 묻히고 말았다.
프란시스코 아스카소(오른쪽)과 부에나벤투라 두루티(가운데)
바르셀로나를 장악한 스페인의 혁명적 노동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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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보고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