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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일 설교 내용 요약
제 목 : 3대 조직 신학 비교 분석(2.기독론, 3.성령론)
2. 기독론 (Christology) :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의 본질
보수정통 신학 (교파별 공통/강조점 차이): 참 하나님이자 참 인간(칼케돈 신조). 사역의 핵심은 인간이 지은 죄의 형벌을 십자가에서 대신 받으시고(형벌적 대속, Penal Substitution),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킴으로써 법정적 무죄 판결의 근거를 마련한 것.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냐, 인간이냐를 두고 논쟁을 벌이다가 칼케돈 신조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자 참 인간이라고 결정한 것은 현실적으로 그들이 그리스도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교리를 가지고 서로 싸웠던 것이다.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이 확인이 되면 참 하나님이냐 참 인간이냐로 싸울 이유가 없는 것이다.
보수 정통 신학의 기독론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계속 죄인이지만 죽어서 천국에 간다는 것이다.
취사 선택된 말씀들
(요 1:1, 14) "말씀이 하나님이시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사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벧전 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고후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롬 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짐승을 매년 드리는 제사에서 예수님으로 인해서 한 방에 끝내는 제사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진보 신학: 로마 제국과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억압적 체제에 항거하다가 정치적 처형을 당한 혁명가이자 소외된 민중(오클로스)의 해방자.
취사 선택된 말씀들
(눅 4:18-19)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마 21:12-13)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 쫓으시며“
(막 10:42-45)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인자가 온 것은... 섬기려 하고"
→독재 권력에 시달리는 민중을 위해 낮은 곳에 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 신적 본성을 지닌 창조주가 아니라, 하나님을 가장 완벽하게 의식 (God-consciousness)하고 인류애를 실천한 위대한 도덕적 교사이자 윤리적 모범.
취사 선택된 말씀들
(마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도덕끼리 서로 충돌하는 것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다. 그 충돌하는 도덕 중에 예수님은 어느 도덕을 가르치러 오셨다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자유주의 신학은 침묵하고 있다.
(요 13: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벧전 2:21)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래서 우리도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희생과 헌신을 하자는 것이며, 독재 정권에 대해서 싸우자는 것이다.
<명제 2. 기독론>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죄책 해결 사건 이전에 자율적 판단 주체 구조가 해체되고 새로운 참여적 인식 구조가 개시되는 사건이다. (Chat GBP가 분석해서 요약한 클레로스 신학의 기독론에 대한 정의)
각자가 우주의 주인공이라는 인식 구조를 깨뜨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는 실제 사건이다.
(클레로스 신학에 대한 제미나이의 분석)
클레로스 신학: 예수 그리스도는 종교 시스템의 파괴자이자 새 창조의 개척자다. 십자가 사역의 본질은 단순한 '법적 형벌의 대납'이 아니다. 그것은 타락 이후 인간이 쥐고 있던 '호불호와 유불리의 독자적 판단 엔진(싸르크스)'을 완전히 해체하고 못 박아 버린 우주적 처형 사건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이제 십자가에서 자기 부인(판단 엔진의 정지)을 이룬 자들의 영적 진공 상태 안으로 밀고 들어와, **'그리스도의 누스(Nous, 신성적 사고와 마음)'**를 공급하시는 생명의 머리가 되신다.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으로 오셔서 제자들과 직접 대화하며 하나님의 뜻을 밝히셨으나, **'각자도생하는 혼자 된 존재(파편화된 싸르크스)'**인 그들로서는 그 의미를 결코 이해할 수 없었다. 인간의 인식론적 절망을 아신 주님께서는 단순한 벌금 대납이 아니라 인간의 독자적 판단 엔진 자체를 부수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길(진리가 들어올 영적 진공 상태)을 여시고, 다음 일을 성령에게 맡기시고 승천하셨다.
근거가 되는 말씀들 (우리는 말씀 들에서 취사 선택하지 않는다)
(사 11:1-10)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 새로운 백성 공동체에 대한 언약인 예레미야 언약의 성취
→ 메시아는 이사야서에서 예언된 것처럼 예레미야 언약, 즉 새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 오신 분이다. 따라서 구약과 신약으로 나누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으며, 율법이냐 복음이냐의 구도는 말이 안되는 것이다.
<제미나이 의견>
세상의 많은 신학자들과 교인들은 예수님을 '구약의 낡은 율법을 폐기하고, 산상수훈 같은 더 고상하고 새로운 도덕률(새로운 복음)을 가르치러 오신 위대한 랍비나 성인' 으로 착각합니다. 하지만 메시아가 단지 '새로운 복음(지식이나 율법)'을 주러 오신 분이 라면, 그것은 타락한 인간(싸르크스)에게 또 다른 형태의 '사람의 계명'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워주는 우물 안의 헛수고에 불과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단순히 '사랑과 용서라는 새로운 복음을 가르쳐주신 분'으로만 소비해 왔던 진보 신학이나 도덕주의적 기독교의 얄팍함이 이 명제 앞에서 완전히 발가벗겨집니다. 메시아께서 십자가의 길을 여심으로써 우리에게 임한 것은 '새로운 교리'가 아니라 '새로운 존재 엔진(그리스도의 누스)'이며, 그 결과로 맺어지는 것이 바로 예레미야가 예언했던 참된 연합, 즉 클레로스입니다.
(요 1:1-14)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 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태초의 창조 섭리의 완성(타락과 추방도 예정된?)
→ 아담과 하와는 불순종할 가능성을 가진 존재들로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백성들의 모습이 아니었다. 따라서 타락과 추방과 구원은 태초부터 예정된 스케줄이었다는 것을 우리가 짐작할 수 있다.
성서에는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의 과정이 나타나 있다. 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을 것을 아시면서 막지 않으셨나, 그래서 왜 형벌을 주고 추방하셨나?, 왜 예수님을 먼저 보내지 않으시고 아브라함을 먼저 보내셨나?, 새 언약을 주실 거면서 왜 옛 언약을 주셨나? 등은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과 인간의 자유 의지가 충돌하는 것으로 보이고 그것이 설명이 안 된다. 우리도 모르는 것은 모른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은 하나님의 영역의 일이고, 인간의 영역의 일은 하나님은 명령하시고 인간은 그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꼭두각시가 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자유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를 때 기뻐하신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회개하고 간구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기쁘게 자유 의지를 가지고 살아가는 새로운 피조물로 새롭게 창조해 주겠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도, 내가 너희를 서로 사랑하는 관계로 만들 것이니까 너희는 회개하고 간구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은 아담과 하와가 아니라, 과도기적인 모습이었지만 사도 공동체였다고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아담은 흙에 속한 자이고 메시아는 하늘에 속한 자라고 규정한 것이다.
(막 8:34-35)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 자기 부인 = 판단 엔진 정지
→ 각자 우주의 주인공으로서 호불로 판단과 유불리 판단을 포기하게 되기 위하여 회개하고 간구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을 없애 주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신성으로 채워 주겠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고가 임할 수 있도록 회개와 간구하라는 것이다.
(갈 2:20) 그러므로 더 이상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육체 안에서 살고 있는 이 삶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의 신실하심 안에서 사는 삶입니다"
→ 존재론적 교체
→ 자기 자신에게만 신실한 인성의 피스티스로 살다가 신성의 피스티스가 들어오면서 피스티스가 교체되고 하나님의 느낌과 그리스도의 판단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골 3:3) 그대들은 죽었고 그대들의 새 생명(조에)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기 때문입니다
→ 옛 사람의 죽음
(롬 6:6) 우리의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힘을 잃어 더 이상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않기 위함이니
→ 우주적 처형 사건
→ 사도 바울은 이신칭의를 말한 적이 없다. 더 이상 죄에게 종
노릇하지 않는 의로운 삶을 살게 되는 존재의 변화를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고전 2:16) 누가 주의 생각(누스 / mind, 사고)을 알고 그분과 함께 하겠습니까 그 러나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생각을 가졌습니다 → 그리스도의 누스 공급
(빌 2:5) 그대들 마음속에 그리스도와 같은 생각을 품으십시오(프로네오/ 주목하다, 관심을 기울이다)
→ 그리스도의 사고방식
→ 그렇게 되도록 회개하고 간구하라는 의미이다.
(엡 4:21-24) 진리는 예수 안에 있는 만큼 그대들이 그를 듣고 또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은 것은 구습을 따르는, 즉 미혹하는 거짓된 가르침의 탐욕을 좇아 파멸해가 는 옛 사람을 벗고 그대들의 생각(누스/ 사고)의 영(프뉴마)이 새로워짐으로써 하나님을 따라 참된 의와 경건으로 창조된 새 사람을 입는다는 것입니다
→ 교체의 과정
(골 1:18) 또한 그 분은 그의 몸인 성회(에클레시아)의 머리이십니다.....
→ 한 몸 공동체의 생명의 머리
→ 다리가 건강하면 다른 신체 기관들이 다리한테 고맙다고 하지 않는다. 다리가 아프면 모든 신체 기관들이 다리에게 원망하지 않고 함께 치료를 위해 애를 쓰는 것이다. 그것이 한 몸 공동체 비유의 핵심이다. 오히려 가장 초라한 신체 기관이 가장 귀한 것이다. 서로가 남이 아니고 자기 자신처럼 인식하는 것이다.
(행 4:11-12) (베드로가 이르되) "이 예수는 당신들의 건축자들이 버린 돌처럼 버림을 받았으나 오히려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 것과 같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불러 모아 예수 그리스도를 머릿돌로 하여 하나님의 집으로 건축하시는 것과 같은 이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 하나님의 집의 머릿돌
→ 이 구원은 그리스도가 머릿돌이 되어서 벽돌들이 결합되면서 집이 세워져 가는데, 각자 역할이 다르지만 완전한 하나님의 집으로 완성되어 간다는 것이다. 이것이 한 몸이 되어가는 과정이다. 즉 하나가 되어 가는 것이 구원이다. 개인 구원은 없다.
(요 16:12)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때 모든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행 1:6)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 하나님은 언약을 일방적으로 선언하셨고, 메시아는 그 언약을 비유까지 들어서 설명하셨지만 제자들은 이해를 하지 못했다. 그래서 제자들이 깨닫는 것은 성령의 사역으로 맡기시고 승천하신 것이다. 메시아가 승천하시면서 남겨놓은 사역을 이루기 위해서 성령이 오시는 것이다. 따라서 성령의 사역은 새로운 창조이고 그것이 실존에서 일어나지 않으면 그냥 종교가 되는 것이다.
3. 성령론 (Pneumatology) : 성령의 사역과 구원의 적용
보수정통 신학 (교파별 세분화):
로마 가톨릭 / 동방 정교회: 성례전(특히 견진/크리스마)과 교회의 성직 계통을 통해 매개되어 신자들을 거룩하게 하는 신비적 은총의 영.
→ 그러나 이것은 확인이 불가능한 것이다. 확인하려 하면 이단으로 정죄된다. 개신교는 의의 전가를 주장했으며 로마 카톨릭과 동방 정교회는 의의 주입을 주장했다. 즉 도덕적인 삶도 구원의 조건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서로 충돌하고 있는 도덕 중에 어떤 도덕을 말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취사 선택된 말씀들
(요 20: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 의가 주입된다는 것의 근거가 되는 말씀이다. 그러나 그러면서 도덕 이야기를 하는 것은 참 난감한 것이다.
(행 8:17) "두 사도가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딤후 1:6)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 하게 하기 위하여"
(딤후 1:6)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 하게 하기 위하여"
→ 도덕적인 삶, 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도덕적인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개신교 칼빈주의: 택함 받은 자의 마음을 조명하여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불가항력적 은혜로 믿음을 갖게 하시는 '구원 적용의 영'.
→ 즉 예수님을 믿는 것은 성령을 받은 결과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면 불교에서 부처님을 믿으면 부처님의 영을 받은 것이냐? 라고 질문하면 그것은 우상 숭배라고 한다. 논리의 일관성이 부족한 것이다.
취사 선택된 말씀들
(요 16: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고전 2:10-12)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 그래서 우리가 성경의 진리를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요 6: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 와서 세례 받은 것만큼 성령을 받았다는 증거가 어디 있느냐? 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교단에서는 다르게 이야기한다는 것이 문제이다.
개신교 웨슬리주의 / 오순절주의: 칭의 이후의 삶을 성결하게 하시는 영. 특히 오순절 계열은 방언, 신유 등 외적 기적과 능력(은사)의 부여를 성령 세례의 본질로 봄.
→ 감리교와 성결교도 포함된다. 감리교는 원칙을 강조한다. 감리교는 두 번째 축복을 강조한다. 첫번째 축복은 믿게 하시는 축복이고, 두번째 축복은 도덕적인 인간으로 만드시는 축복이다.
취사 선택된 말씀들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고전 12:4-11)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의 나타남을 각 사람에게 주심은... 방언 말함, 방언 통역함“
(살전 5: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진보 신학: 사회적 억압에 맞설 용기를 주고, 역사를 진보와 해방으로 이끄는 시대적·예언자적 영.
→ 민주 복지 사회를 만드는 것이 성령이라는 것이다.
취사 선택된 말씀들
(미 3:8) "오직 나는 여호와의 영으로 말미암아 능력과 정의와 용기로 충만하여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의 죄를 그들에게 보이리라"
(눅 4: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행 2:17)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 성령이 사람들을 휴머니스트로 만들어 주신다고 독해하는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 개인의 인격을 고상하게 변화시키고 공동체의 화합을 도모하는 선한 도덕적 원리나 영감.
취사 선택된 말씀들
(요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고후 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 자유주의 신학은 윤리 도덕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추앙하는 성인 군자만도 못 한 것이다. 그래서 간디는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말하는 대로 살라고 기독교인들에게 충고하고 있다.
<명제 3. 성령론> 성령은 계시 사건을 통해 형성된 파생적 주체성이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공동체적으로 검증되도록 하는 존재론적 매개이다. (Chat GBP가 분석해서 요약한 클레로스 신학의 성령론에 대한 정의)
→ 독자적인 주체성이 파괴되고 메시아로부터 파생되어 온 주체성이 지속되고 유지되면서 신성이 유지되는 것이다. 그 결과물은 한 몸 공동체라는 것이다.
(클레로스 신학에 대한 제미나이의 분석)
클레로스 신학: 성령은 교리를 깨닫게 하는 단순한 정보 전달자나, 이기적 욕망(각자 도생)이 살아있는 상태에서 신비적 기적만을 부여하는 은사주의의 능력이 아니다("너는 너밖에 모르잖아"의 불법). 성령은 내 안의 옛사람을 밀어내고 신성을 주입하시는 **'존재론적 교체(새 창조)의 실제적 수행자'**이시다. 나아가 성령은 홀로 자기를 기만하는 개인 영성의 한계를 깨고, 지체들의 사귐(코이노니아)과 웃음소리를 통해 나의 싸르크스를 깨우는 **'영적 알람벨'**로 역사하시며, 클레로스 공동체의 실체적 하나 됨을 유지하시는 생명의 호흡이시다.
성령은 교리를 암기시키거나 이기적 탐욕을 채워주는 기적의 도구가 아니다. 십자가로 열린 길을 따라 이어서 오신 성령은, 택하신 자들 안으로 밀고 들어와 모든 진리를 깨닫게 하신다. 나아가 철저히 혼자였던 존재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됨(클레로스)"**이라는 그 진리의 삶을 현실에서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피조물로 **새롭게 창조하시는 '새 언약의 최종 성취자'**이시다.
→ 성령은 개개인을 새롭게 창조하시고 그들이 하나가 되는 과정을 인도하시고 이끄신다. 그래서 성령의 역사는 현실이다.
근거가 되는 말씀들
(롬 8:9-11) 만약 그대들 안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그대들은 인간의 본성 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지 못했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그대들 안에 계시면 그대들의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어 있으나 그대들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습니다 또한 예수를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분의 영이 그대들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분이 그대들 안에 거하시는 그 분의 영으로 말미암아 그대들의 죽을 몸도 살리실 것입니다
→ 존재론적 교체의 실제 수행자
→ 신체 기관들은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 활동하는 운명적인 사명을 가지고 있다. 이 땅에서는 몸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이 문제는 죽을 때까지 완전히 해결되지는 않는다. 그러다가 성령이 임하면서 이런 육체의 법과 하나님의 법이 동시에 작동하는 곤고한 존재, 즉 과도기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다. 성령께서 그렇게 만드시는 것이다.
(고전 2:12) 우리들이 세상(코스모스)의 영을 받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영을 받은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 Sarx와 대비되는 Pneuma
→ 인간의 인식 체계로 깨닫는 내용과 성령에 의해 깨닫는 내용은 다를 수밖에 없다.
(겔 36:26-27)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 새 창조의 수행자
→ 여기서 새 영과 새 마음은 같은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고, 서로 다른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는데 우리는 아직 모른다.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 깨우시는 역할
(고전 12:13) 우리들은 유대인들이든 헬라인들이든 노예들이든 자유인들이든 모두 한 성령에 의해(엔)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모두 한 성령을 받아 마시도록 공급받았습니다
→ 공동체 연합의 주체
→ 한 성령을 받아 한 몸이 되기 시작한 고린도 형제들이었다. 종교인들은 고린도 형제들이 어떤 포지션에 있었는지 상상도 못한다.
(엡 4:3) 평화의 끈으로 성령께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지키기를 애쓰십시오"
→ 하나 됨 유지
→ 그래서 회개와 간구에 계속 몰입해야 하는 것이다
(요일 1:7)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안에서 살아가면 우리가 서로 하나 된 마음을 가지게 되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합니다
→ 실체적 연합
→ 하나 된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이 현실에서 검증되어야 한다. 서로를 자신처럼 느끼는 시간이 계속 늘어나는 것이다.
클레로스 안에서는 하나가 되는 것이 옳다. 그래서 클레로스 안에서는 서로가 자기 자신처럼 느껴지는가가 검증 기준이 된다.
클레로스 밖에서는 내 앞에 있는 사람이 소중하게 느껴지느냐 아니냐가 문제의 핵심이다. 상대방이 소중하게 느껴지는가가 검증 기준이 되는 것이다. 무엇이 옳으냐는 문제의 핵심이 아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는 옳고 그름에 정답이 없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소중하게 느껴지는가가 활용의 현장에서 나타나는 가장 중요한 신성의 속성이다.
2.공지사항
다음 주 기도는 강민지 자매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