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 및 경력
인천미술협회장 인하전문대학서예지도강사 신세계, 주안도서관, 인천문화원서예강사
국전, 대한민국서예대전입선,특선 인천미술대전특상
관호 최 원 복 1949년 4월 27일 인천출생 ‘68. 인천송도고등학교 졸업 ‘75. 동국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과 졸업
수상 경력 1968. 경기도전 특선 1979. 제28회 국전 입선 ‘91~’93. 인천직할시 미술대전 서예부문 특선 2회, 대상 수상 ‘93~’01. 대한민국 미술대전 서예부문 입선 4회, 특선 2회
작품 발표 1968~‘74. 동정 한묵회전 출품 1969 ~ 인천광역시 미술협회 회원전 출품 1982~ 인천광역시 서예가 협회전 출품 1994~ 인천광역시 미협 초대작가전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 개관 초대전 1995. 인천광역시 서예가 연합전 ‘98~’00 인천, 상해 국제미술 교류전 2002. 묵벌전 한,일 우호 난정 서도연전 203. 미주 한인 이민 100주년기념, 하와이?인천 미술교류전 대한민국 미술대전 서예 초대작가전
서단 활동 인천광역시 미술협회 부회장역임 인천광역시 서예가협회 회장역임 인천광역시 미술대전 서예부문 초대작가 대한민국 미술대전 서예부문 초대작가 신세계 문화센터 서예 강사
운영 및 심사 1995. 인천광역시 미술대전 서예부문 운영위원역임 1998. 인천광역시 미술대전 운영 부위원장역임 1999. 광주비엔날레 기념 서예휘호대회 심사위원 역임 2000. 제물포서예문인화대전 심사위원 역임 2002. 제물포서예문인화대전 운영위원 역임 인천광역시 미술대전 서예부문 심사위원 역임
현. 관호서예연구실 원장
작가론/평론
인류 역사의 시작과 함께 가장 오래된 표현도구인 붓을 사용하여 난해한 문자를 보여주는 서예는 그 자체가 지닌 역사성과 고도의 예술성, 그리고 발생학적 타당성의 우위에도 불구하고 시대의 담론을 담아내지 못한 한계성으로 인하여 대중과 접촉하는데 일면 한계가 있어 보인다. 이는 전통적 유통체계에 대한 반성과 함께 시대변화에 따른 새로운 유통메커니즘을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거니와 본질적으로는 현대 서예 자체가 지닌 구조적 한계에서 기인된 것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초서의 경우 그 심오한 정신성과 예술성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에게는 한낱 뜻모르는 흑색의 분방한 선, 즉 관객의 욕구를 헤아리지 못하는 무심한 추상회화와 다를 것이 없어 보일 수도 있다. 이 점에서 볼 때 대중으로부터 외면 당하고 있는 현단계 한국 서예의 문제점은 일면 시대변화를 작품 속에 효과적으로 담아내지 못하고 있는 작가들이 스스로 초래했다는 자조적 비판에 일면 수긍이 가기도 한다. 물론 예술품이라는 것을 상품의 유통논리에 적용하여 수요공급의 원칙에 따라 논한다는 것 자체에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타 예술장르에 비하여 서예는 유독 우리 대중과 괴리되었다는 점은 하나의 자성적 메시지가 될 수 있다는 점은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현대 서예의 이러한 취약성에 대한 반성과 그 극복에 대한 인식론적 모색에 고심하고 있다. 그가 서예에 입문하기 위하여 동정서숙을 찾은 동기가 서예를 잘하는 분이 방명록에 멋있게 붓글씨로 서명하는 것을 보고 부러워서였다고 말하는 것에서 보더라도 그의 서예는 정신적으로 순수하면서도 또한 실사(實事)적인 이율배반이 잠재되어 있다. 동기야 어쨌든 간에 고교시절 관호는 인천 현대서단의 양대 거목 중 한 분인 동정 박세림의 문하에 들어가게 되는데 여기에는 이미 월강 강난주와 청담 전도진이 입문하여 수련하고 있었다. 그 후 동국대학교 미술대학에 입학하여 대학 재학 중에도 꾸준히 연서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그러나 서예라는 것이 몇 년 동안 수련하였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어서 서예의 본질이나 의의 등 기본적인 개념조차 파악되지 않았다. 또한 훌륭한 선생님 문하에서 불과 몇 년을, 그것도 어린 나이에 지도 받은 것을 가지고 큰 자만에 빠져 동정선생 작고 후에는 그림에 몰두하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간혹 서당글씨 또는 바르지 못한 운필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으나 젊고 자신감에 차있던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한편 최원복은 1949년 인천시 중구 유동에서 한의원을 운영하던 최근철(崔根鐵)의 8남매 중 7남으로 태어났다. 창영초등학교를 나와 송도 중ㆍ고를 다니면서 황추 선생에게 미술을 배운 그는 서예를 그림과 같이 연구하기 위하여 동국대학교 미술학과에 들어간다. 이는 대학에 서예과가 없던 당시에 서예를 가장 근접하게 공부할 수 있는 학과가 미술학과라는 생각에서 내린 결정이었다. 대학졸업 후 인성여중에서 약 4~5년 미술교사로 근무하던 그는 용단을 내려 교직을 버리고 서예 연구에만 몰두하게 되는데 이는 자신을 극한 상황으로 몰아 감으로써 서예가로서 치열한 삶을 살게 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다. 말하자면 이는 일부러 상황을 어렵게 만들어 글씨를 쓰지 않고서는 삶이 무의미해지도록 자신을 몰아가는 고육책이었던 것이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내 글씨가 잘못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혹이 들 즈음 결단을 내려 미술교사직을 그만두고 서예학원을 하며 본격적으로 서(書)연구에 전념하게 되었다. 초정 권창륜(艸丁 權昌倫)선생님에게 사사하기로 결심한 것도 이때였다. 그리고 서예는 어느 정도의 수준까지는 독학으로 될 성질의 예술분야가 아님을 깨닫게 되었고, 분명 체계적이고 추구해야 할 서예술의 본질이 있으며 법이 있는, 법을 존중해야 하는 고도의 서법예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때 그가 감명을 받은 경구는 왕희지(王羲之)의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었다.「錐劃沙 印印泥」말하자면 이는 「송곳으로 모래 위에 글씨를 쓰듯 (圓筆中鋒) 운필」하고 「뻘흙에 도장을 찍 듯 (方筆中鋒) 운필」하라는 뜻이다. 아울러 서예술의 본질이 선질(線質)에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선질 연구가 선행되어야 좋은 글씨, 감정이 있는 글씨가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국전 및 미술대전 등에서 입선과 특선을 하고 인천직할시 미술대전에서 대상을 받는 등 공모전에서 나름의 성과를 거두었지만 이것이 본질과는 관계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떨쳐 버릴 수 없어 이제 서예적 표현의 내면을 성숙시키는데 힘을 쏟겠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30년 이상을 서예연구에 공력을 다하였으나 아직도 미흡함이 많다고 자인하며 그 자신을 포함해 모든 서예인들이 올바른 서예관을 세우고 바른 서법을 연구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일갈한다. 書不盡言 言不盡意(글로 말을 다하지 못하고 말로 뜻을 다하지 못함)라는 말로 자신의 변을 마치고 총총히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에서 서예가로서의 그의 고충과 함께 충만한 의욕이 느껴졌다. [새롭게 본 인천미술인]관호 최원복 ----- 이경모 (미술평론가)
<인천일보 발췌> - 부평 문화원 자료
* 서예세상 국내작품 *
http://cafe.daum.net/callip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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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인품도 고결하신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