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 대통령은 연례 행사인 '국민과의 대화'를 30일 모스크바 국제무역센터에서 약 3시간 48분에 걸쳐 진행했다. 그는 이날 러시아 전역에서 실시간으로 접수된 질문 중 모두 68개에 대해 답변했다.
전국 각지의 주민들로부터 TV 생방송과 전화와 인터넷 등을 통해 질문을 받고 답하는 '국민과의 대화'는 푸틴 대통령이 지난 2000년 집권한 이후 이번이 18번째다. 현지 언론이 중요하게 다룬 질문과 답변을 중심으로 올해 '국민과의 대화' 내용을 정리한다.
푸틴 대통령, '국민과의 대화'를 진행하는 장면/사진출처:크렘린.ru
◇ 대통령직 이양과 후임자 문제
푸틴 대통령은 '전임인 옐친 대통령이 선례를 남긴 자발적인 권력 이양이 지금도 가능한가, 현재 확신을 갖고 권력을 넘겨줄 만한 사람이 측근들 가운데 있는가'라는 질문에 "후임자를 추천하는 것은 대통령인 자신의 의무"라며 "대통령직에 합당한 후보를 지명할 수 있는 때가 올 것"이라고 말했다. 또 "그런 사람(후임자)이 우리 조국 러시아와 같은 대단한 나라를 이끌 자격이 있다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푸틴 대통령은 그러나 “헌법에 따르면 대통령이 사임하면 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게 된다"며 "당시 나는 총리였다"며 옐친 전 대통령의 권력 이양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해 상당한 시간을 할애했는데, 주요 내용은 이렇다.
푸틴 대통령, 차기 대통령 후보자 추천은 자신의 책임/얀덱스 캡처
"내가 맡고 있던 연방보안국(FSB) 국장의 후임자를 찾을 때(1999년), 많은 사람들이 사양했다. 당시 나라 상황이 매우 어려웠고, 사람들은 책임을 지고 싶어하지 않았다. 나 역시 옐친 대통령이 총리직을 제안했을 때 '준비가 되지 않았다'며 거절했다"
"1999년 12월 옐친 대통령이 사임하는 바람에 총리인 내가 대통령 권한 대행이 됐다. 2000년(푸틴 대통령 취임)부터 후계자를 생각을 해왔지만, 최종 결정은 국민이 내릴 것이다. 현재의 지도자(대통령이)가 무엇을 어떻게 하는 지는 중요하지 않다. 또 후임자가 누구를 어떻게 대표하는 지도 중요하지 않다. 법률 교육과 법에 대한 지식이 국가 수반이 되는 데 도움은 되겠지만,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든지 국가를 이끌 수 있다. 다만 중요한 것은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은 자신의 삶을 상당 부분 일(국정 운영)에 바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궁극적으로 모든 결정은 러시아 국민에게 달려 있으며, 이 방법으로만 (차기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 그는 강조했다.
실시간으로 전국 각지에서 올라오는 질문을 취합하는 장면/사진출처:크렘린.ru
화상으로 대통령에게 질의하는 모습/사진출처:크렘린.ru
푸틴 대통령은 지난 2018년 옐친 전 대통령의 총리직 제안을 거절했다고 공개한 바 있다. 당시 그는 옐친 전 대통령이 1999년 자신에게 총리직을 맡아달라고 부탁했을 때 처음에는 거절했다고 말했다. 매우 놀란 옐친 전 대통령이 그 이유를 물었을 때 "나는 준비되지 않았다"고 답변한 바 있다고 그는 밝혔다.
옐친 대통령이 그를 총리를 발탁한 것은 1999년 8월. 푸틴은 당시 FSB국장을 맡고 있었다. 옐친 대통령은 푸틴을 총리로 발탁한 다음, 방송 연설에서 그를 후임자로 지명했다. 이후 20세기의 마지막날인 1999년 12월 31일 옐친이 전격 사임하면서 푸틴 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고, 이듬해 3월 26일 실시된 조기 대선에서 승리, 5월 7일 공식 취임했다. 그는 대통령직을 연임한 뒤 헌법에 따라 실세 총리(2008~2012년)로 물러났다가 대통령직에 컴백했다. 현재 4기 집권 중이다.
러시아는 지난해 7월 국민투표를 통해 푸틴 대통령이 오는 2036년까지 장기 집권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하는 개헌안(기존 임기의 백지화 규정)을 채택했다. 이에따라 푸틴 대통령은 72세가 되는 2024년 5기 집권을 위한 대선에 출마할 수 있고, 84세가 되는 2036년까지 6년 임기의 대통령직을 두 차례 더 역임할 수 있다.
◇ 영국 군함과의 흑해 대치
푸틴 대통령은 최근 크림반도 인근 흑해 해역에서 발생한 영국 군함과의 대치 사건에 대해 "러시아 해군이 영국 구축함 '디펜더'를 격침했더라도 제3차 세계대전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며 "영국은 그 상황에서 승리할 수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는 그 사건(?)을 '영국과 미국의 복합적인 도발'로 규정하면서 러시아측의 입장을 명확하게 설명했다.
푸틴 대통령, 흑해 해상의 영국 군함과의 대치 사건에 미국측도 가담/얀덱스 캡처
그는 "오전 7시 30분 식별번호 063/9792의 미군 전략 정찰기가 (그리스의) 크레타 섬을 이륙했다. 우리가 그 정찰기를 추적한 결과, 영국 구축함은 미군 정찰기의 도움을 받아 우리의 방어선을 시험하려는 군사적 목표를 갖고 우리 해역에 진입한 게 분명했다. 아마도 내가 실수를 하도록 (유도)했을 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이어 "이같은 도발은 무엇을 겨냥한 것일까"라고 되물은 뒤 "서방이 크림반도 주민의 선택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라면, 인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도발에 대응해 영국 군함을 격침시킨다 해도 3차 세계대전 직전으로 가지 않을 것이다. 그들도 승리할 수 없다는 걸 안다"며 "우리도 그러한 사태 발전을 원하지 않지만, 적어도 우리는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는지 알고 있다. 우리 영토에서 우리 자신과 미래를 위해 싸우고 있다. 그들은 바다에서 우리 국경을 침범했다"고 강조했다.
러시아와 영국 전함간의 흑해 대치 사건은 지난 23일 벌어졌다. 러시아 국방부는 "영국 미사일 구축함 'HMS 디펜더'가 크림반도 세바스토폴 인근의 러시아 해역을 3㎞ 정도 침범했다"며 "러시아 흑해함대와 국경수비대가 '디펜더'함을 향해 경고사격을 가하고, 수호이(Su)-24M 전폭기가 구축함 진행 방향 항로에 폭탄 4발을 투하해 '디펜더'를 러시아 해역에서 몰아냈다고 발표했다. 세바스토폴은 2014년 3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로부터 병합한 크림반도의 항구 도시다.
질의를 듣고 있는 푸틴 대통령/사진출처:크렘린.ru
그러나 유럽연합(EU)과 미국 등 서방측은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을 인정하지 않고, 크림반도를 여전히 우크라이나의 영토로 간주하고 있다. 영국 측이 "해군 군함은 국제법에 따라 우크라이나 영해를 평화롭게 통과했다"고 주장한 이유다.
푸틴 대통령은 대치 상황을 설명하면서 "나는 오히려 다른 것을 걱정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우크라이나 접경지역에서 군사훈련을 하는 우리를 향해 서방진영에서 난리를 치길래 훈련을 마무리하고 철수하라는 지시를 내렸다"며 "그들은 거꾸로 우리의 국경으로까지 밀고 들어온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나아가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우크라이나내 상황"이라며 "우크라이나 헌법에 따르면 그곳에는 군사 기지를 설치할 수 없다. 그러나 군 교육 센터를 세울 수는 있다. 우리와 직접 국경을 접하는 우크라이나를 군사적으로 개발한다면, 이는 우리에게 심각한 보안 문제를 야기할 것이다. 정말 골치 아픈 일"이라고 우려했다.
푸틴 대통령, 스푸트니크V 백신 접종/얀덱스 캡처
◇백신 접종
푸틴 대통령은 이날 국민과의 대화에서 '스푸트니크 V' 백신을 접종했다고 처음으로 공개했다. 그는 "내가 접종했을 때 '에피박코로나' 백신과 '스푸트니크 V' 백신이 시중에 공급되고 있었다"며 "둘 다 좋은 백신이지만, 나는 가능한 한 오래 보호받을 수 있는 백신을 맞으려 했고, 그래서 스푸트니크V를 맞기로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러시아 '벡토르 센터'가 개발한 '에피박코로나' 백신은 접종 부작용은 적으나 보호기간은 '스푸트니크V'보다 짧다고 한다.
그는 "전문가들로부터 '스푸트니크V' 백신의 면역 기능이 '에피박코로나'보다 좀 더 오래 지속된다고 들었다"고 소개하면서 “군 부대에서도 '스푸트니크 V'가 접종되고 나는 군 최고사령관”이라고도 했다.
푸틴 대통령은 지난 3월과 4월 신종 코로나 백신을 1차, 2차 접종을 받았다고 밝혔으나 어떤 백신을 맞았는 지는 공개하지 않았다. 푸틴 대통령의 접종 모습도 공개되지 않았다. 그는 "이상하게 들릴 지 모르지만, (접종) 의사와는 거의 한마디도 섞지 않고,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그냥 쳐다만 봤다”고 접종 순간을 회상했다.
'스푸트니크 V' 백신은 러시아 정부가 지난해 8월 세계 최초로 개발해 승인한 것으로, 러시아 보건부 산하 '가말레야 센터'가 개발했다. 현재 러시아를 포함한 60여 개국이 긴급 사용 승인을 받았으며, 세계보건기구(WHO)와 유럽의약품청(EMA)도 승인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
◇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회담
푸틴 대통령은 블라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제안한 정상 회담에 대해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에서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은 부적절하다"고 말했다.
푸틴 대통령, 젤렌스키(대통령)에 의해 전적으로 외부 통제로 넘겨진 우크라이나에 대해 언급/얀덱스 캡처
그는 "그(젤렌스키 대통령)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통제권을 외부에 넘겨줬다"며 "우크라이나의 주요 문제는 키예프가 아니라 워싱턴, 부분적으로는 베를린과 파리에서 결정된다. 그와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라고 반문했다. 그러나 그는 "(젤렌스키와의) 만남을 거부하지 않는다"며 "(만나서) 무엇을 이야기해야 할지 이해하기만 하면 된다"고 정리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지난 24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정부가 양국 정상회담의 가능한 날짜와 장소를 논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 대변인은 "미-러 제네바 정상회담 후에도 여전히 젤렌스키 대통령과 만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
젤레스키 대통령은 지난 4월 푸틴 대통령에게 돈바스(친러 반군이 장악한 우크라이나 동부 도네츠크주와 루간스크 주) 지역에서 만나, 돈바스 문제를 논의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푸틴 대통령은 이를 일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