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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월 31일 월요일 [(백)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 기념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이냐시오 데 로욜라 성인은 1491년 스페인의 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군인이 된 그는 전쟁에서 입은 부상을 치료받다가 현세의 허무함을 깨닫고 깊은 신앙 체험을 하였다. 늦은 나이에 신학 공부를 시작한 이냐시오는 마흔여섯 살에 사제가 되었고, 이후 동료들과 함께 예수회를 설립하여 오랫동안 총장을 맡았다. 그는 『영신 수련』 등 많은 저술과 교육으로 사도직을 수행하였으며, 교회 개혁에도 크게 이바지하였다. 1556년 로마에서 선종하였고, 1622년에 시성되었다. 증언판을 들고 시나이 산에서 내려온 모세는,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기는 것을 보고 돌판들을 깨 버리고는, 주님께 돌아가 백성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아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고 누룩과 같다며 모든 것을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다(복음). <이 백성이 큰 죄를 지었습니다. 자신들을 위하여 금으로 신을 만들었습니다.> ▥ 탈출기의 말씀입니다. 32,15-24.30-34 그 무렵 15 모세는 두 증언판을 손에 들고 돌아서서 산을 내려왔다. 그 판들은 양면에, 곧 앞뒤로 글이 쓰여 있었다. 16 그 판은 하느님께서 손수 만드신 것이며, 그 글씨는 하느님께서 손수 그 판에 새기신 것이었다. 17 여호수아가 백성이 떠드는 소리를 듣고, “진영에서 전투 소리가 들립니다.” 하고 모세에게 말하였다. 18 그러자 모세가 말하였다. “승리의 노랫소리도 아니고, 패전의 노랫소리도 아니다. 내가 듣기에는 그냥 노랫소리일 뿐이다.” 19 모세는 진영에 가까이 와 사람들이 춤추는 모습과 수송아지를 보자 화가 나서, 손에 들었던 돌판들을 산 밑에 내던져 깨 버렸다. 20 그는 그들이 만든 수송아지를 가져다 불에 태우고, 가루가 될 때까지 빻아 물에 뿌리고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마시게 하였다. 21 모세가 아론에게 말하였다. “이 백성이 형님에게 어떻게 하였기에, 그들에게 이렇게 큰 죄악을 끌어들였습니까?” 22 아론이 대답하였다. “나리, 화내지 마십시오. 이 백성이 악으로 기울어져 있음을 아시지 않습니까? 23 그들이 나에게 ‘앞장서서 우리를 이끄실 신을 만들어 주십시오.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리고 올라온 저 모세라는 사람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기에, 24 내가 그들에게 ‘금붙이를 가진 사람은 그것을 빼서 내시오.’ 하였더니, 그들이 그것을 나에게 주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것을 불에 던졌더니 이 수송아지가 나온 것입니다.” 30 이튿날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큰 죄를 지었다. 행여 너희의 죄를 갚을 수 있는지, 이제 내가 주님께 올라가 보겠다.” 31 모세가 주님께 돌아가서 아뢰었다. “아, 이 백성이 큰 죄를 지었습니다. 자신들을 위하여 금으로 신을 만들었습니다. 32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부디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시지 않으려거든, 당신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제발 저를 지워 주십시오.” 33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나에게 죄지은 자만 내 책에서 지운다. 34 이제 너는 가서 내가 너에게 일러 준 곳으로 백성을 이끌어라. 보아라, 내 천사가 네 앞에 서서 나아갈 것이다. 그러나 내 징벌의 날에 나는 그들의 죄를 징벌하겠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겨자씨는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인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31-35 그때에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군중에게 31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뿌렸다. 32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 33 예수님께서 또 다른 비유를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34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이 모든 것을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말씀하지 않으셨다. 35 예언자를 통하여 “나는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리라. 세상 창조 때부터 숨겨진 것을 드러내리라.”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 제1독서를 보면 모세는 하느님으로부터 십계명이 담긴 돌판을 받아들고 산에서 내려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수송아지를 만들어 우상 숭배를 하는 것입니다. 화가 난 모세는 돌판을 던져 깨 버립니다. 그 심정은 어떠하였겠습니까? 그렇지만 모세는 다시 하느님께 기도합니다. “이제 그들의 죄를 부디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시지 않으려거든, 당신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제발 저를 지워 주십시오.” 이런 모세의 기도를 어찌 안 들어주시겠습니까? 우리도 늘 기도를 하고 있지만, 나를 위한 기도보다 다른 이들, 특히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위한 기도가 더 중요함을 묵상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를 겨자씨에 비유하십니다. 그 작은 겨자씨가 크게 자라나 새들마저 깃들게 하기 때문입니다. 겨자씨가 큰 나무가 되듯이 우리의 조그만 선행과 사랑이 이웃에게 퍼지고, 더욱 확산하여 큰 사랑의 공동체가 형성되어 나갈 것입니다. 따라서 눈앞에 보이는 작은 일부터, 사랑을 실천해 나갈 것을 다짐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우리 각자는 조그만 변화, 겨자씨와도 같은 ‘나의 작은 변화’를 발견해 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늘 잘못과 실패를 되풀이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런 과정에서도 조금씩 변화되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지요. 그러기에 늘 되풀이하는 실수와 잘못에도 희망을 품을 수 있지 않습니까?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뿌렸다.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 <성장의 비결> 오늘 복음인 겨자씨의 비유를 묵상하면서 지상에 두발을 딛고 살아가는 우리들의 어쩔 수 없는 초보 신앙 역시 언젠가 맞이하게 될 하늘나라에 합당한 성숙한 신앙으로 성장시켜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이토록 불완전하고 미성숙한 사랑도 보다 완전하고 성숙한 사랑으로 성장시켜나가야겠지요. 참사랑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성장하는 사랑이 분명합니다. 제대로 된 신앙 역시 나날이 성장하는 신앙이 확실합니다. 초보신앙인일 때 지니고 있었던 유아기적인 신앙이 조금도 성장하지 못한 채 20년 30년 세월이 흘렀다면 그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갓 신앙에 입문했을 때 지니고 있었던 어린티를 조금도 벗어버리지 못했다면 진지한 자기반성이 필요할 때입니다.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뿌렸다.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우리들의 신앙도 겨자씨만큼이나 미미합니다. 우리들의 사랑 역시 겨자씨만큼이나 보잘 것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작은 우리들의 신앙일지라도 물을 뿌려주고, 잡초를 제거해주고, 해충을 잡아주고, 비료를 뿌려주고...관심의 손길을 지속적으로 보낼 때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자신도 모르게 우람한 ‘신앙의 거목’, ‘참 하느님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될 것입니다. 성장은 사실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아주 작은 성취에 감사할 때 우리 신앙은 성장합니다. 순간순간의 감정에 충실하며 즐길 때 우리 삶은 성장합니다. 우리 인생에 대한 지나친 기대를 내려놓을 때 우리 인생은 성장합니다. ‘나’와 철저하게도 다른 ‘그’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보다 자주 그의 입장에 서보며, 삶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상대방의 나와 다름 앞에 분노하기보다는 호기심을 갖고 연구하기 시작할 때 우리 신앙은 성장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창조물인 우리들을 바라보시면서 가장 흐뭇해하실 순간은 어떤 때일까요? 마냥 같은 자리를 뱅뱅 맴도는 모습일까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안절부절 하는 모습일까요? 몇 년 만에 보는 얼굴인데 아직도 마냥 그대로, 아직도 자기라는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해 노심초사하는 모습일까요? 그보다는 아무래도 이런 모습이 아닐까요? 몰라보게 성숙된 모습, 얼마나 성숙했는지 이젠 웬만한 상처 앞에서도 끄떡도 않는 모습, 알아서 척척 꾸려가는 모습, 의젓해져서 더 이상 징징대지 않는 모습, 고통과 시련, 병고와 죽음조차 넉넉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모습...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교만을 썩게 하리라!"
IBM 설립자 톰 왓슨(Tom Watson)의 사람을 대하는 방식은 지금의 우리 ‘틀리면 안 되는 문화’를 가슴 아프게 꼬집고 있습니다.
한 번은 젊은 부사장이 매우 자신있어하며 신제품 개발을 하였다고 투자비를 지원해 줄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톰 왓슨은 미심적어 다시 한 번 성공에 대한 확신이 있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는 큰 수익을 올릴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사장은 당시로는 엄청난 금액을 투하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1000만 달러 이상의 손해를 냈습니다.
부사장은 회사에 막대한 손해를 끼쳤다는 사유로 사직서를 제출하러 사장 방에 들어왔습니다. 그 때 톰 왓슨 사장이 이렇게 말하였다고 합니다.
“아니, 지금 무슨 소린가? 내가 자네를 교육하는데 무려 1000만 달러를 들였는데 그만두겠다니 말이 되는가? 자네는 우리 회사의 누구보다 귀한 인재가 되었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말할 것도 없이 그 부사장은 연이은 새로운 히트상품을 개발해 냄으로써 IBM을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유학을 나가 말을 배우면서 느낀 것인데 저를 포함해 우리나라 사람들은 틀리는 것에 대한 공포가 다른 나라 사람들에 비해 엄청나게 크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학교에서 꼭 맞는 답만을 써야만 하는 정형화된 교육을 받아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10년 이상 영어를 배워도 막상 외국인 앞에서 말을 하려고 하면 두려움에 떱니다. 문법에 틀리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외국인들은 1년이면 유창하게 말을 잘 합니다. 물론 문법은 우리나라 사람들보다는 형편없습니다. 그러나 편하게 의사소통을 하는 것을 보면 다만 부러울 뿐입니다. 우리는 머릿속에 완전한 문법에 맞는 문장을 구상해야만 말이 나오는데 그러다 보면 말을 해야 하는 타이밍을 놓치고 마는 것입니다.
유태인들이나 하버드 대학과 같은 데서는 토론하는 교육을 즐긴다고 합니다. 코페르니쿠스 이전에는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는 것이 정설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고 말하면 목숨까지 걸어야만 했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지금 정답이라고 하는 것들에 ‘왜?’라는 의문사를 던지며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음을 주장해 보아야합니다.
오늘 독서에서는 하느님께서 예레미야 예언자에게 상징적인 행위를 시킵니다. 허리에 매는 띠를 사오라고 해서 그것을 차고 다니게 합니다. 그러다가 그것을 습기가 많은 강 옆에 감추어 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서 다시 가져오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가 보았더니 띠가 다 썩어서 부서져버렸습니다. 하느님은 이렇게 당신 옆구리에 붙어있지 않는 교만한 인간들을 그렇게 썩혀버리겠다고 하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당신은 포도나무이니 당신께 붙어있어야만 말라서 죽지 않을 것이라고 하신 말씀과 같은 맥락입니다. 교만은 아담과 하와 때부터 인간 안에 들어와서 하느님께 불순종하는 인간을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은 그렇게 죄를 지어도 절대 그들을 완전히 버려두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 옷을 지워 입히시듯 그렇게 썩어버린 이스라엘 백성도 완전히 저버리시는 일은 없습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그들의 교만을 썩도록 내버려 두시어 그 교만으로 당신을 떠나 사는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느끼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문화는 틀리면 매우 창피해 해야 하는 분위기이기에 겉보기에는 항상 옳은 삶만 사는 것처럼 경직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는 유산을 달라는 둘째 아들에게 유산을 나누어 줍니다. 그리고 그가 돌아오기를 손꼽아 기다립니다. 그 이유는 그가 그 돈을 흥청망청 쓰고 죄를 짓고 고통 받을 것을 이미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실수를 하게 유도한 것입니다. 너무 지나치지만 않다면 이렇게 실수도 해 볼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것이 안 좋은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다시는 그런 죄에 빠지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수천 번 넘어져 봐야 걷는 것을 배우는데, 넘어지지 않는 것만을 교육한다면야 어떻게 무서워서 걸을 수 있겠습니까? 걷는 법보다 잘 넘어지는 법, 넘어졌다 일어서는 법을 먼저 가르쳐야합니다.
“나는 지금까지 9000번도 넘게 샷을 성공시키지 못했습니다. 나는 300번도 넘게 져봤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믿어주었을 때 나는 26번이나 경기 종료 몇 초 전 마지막 슛을 미스 해봤습니다. 나는 계속 실패하고 실패하고 또 실패했습니다. 그것이 내가 성공한 이유입니다.
중요한 건 날마다 절망을 이겨낼 수 있을 만큼 정신적으로 강해지고, 다음날이면 돌아 와서 새로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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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욜라의 聖 이냐시오 님 |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Ignatius) |
젊은 날 방탕과 무절제의 군 생활을 거쳤지만 다리에 부상을 당한후 우연히 성인전을 읽으면서 주님의 평화를 느끼기 시작하였고 성모님의 환시를 본 후 육적인 삶을 벗어나는 영적 체험을 겪었던 님,
동료들과 더불어 예수회를 창설하여 종교 분열의 시대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교회를 지키는 큰 일꾼이 되신 로욜라의 성 이나시오 님이시여
주님을 외면하고 있는 젊은이들의 빠른 회두를 위하여 그리고 전 세계 예수회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하여 천상 기도의 축복을 보내 주옵소서!...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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