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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쓰비시중공업 등 조선여자근로정신대 강제동원 피해자 김성주ㆍ김정주 할머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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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초반의 앳된 소녀들이 자기 몸집보다 크고 둔탁한 기계를 돌리고 몸이 찢기며 굶주림과 차별에 시달려야 했던 역사가 있었다. 불과 56년전 나라 잃은 나이어린 소녀들이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겪어내야 했던 아픈 기억이다.
동아시아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일본의 야욕은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의 삶을 통째로 바꿔놓았다. 전쟁에 광분한 일제에 의해 전국적으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전쟁 수행을 위한 수단으로 노무자, 군속(군무원), 군인, 위안부 등으로 강제동원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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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을 맞아 일본에 육성메시지를 보내는 강제동원 할머니들 (맨왼쪽부터 김정주 할머니, 김성주 할머니 자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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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생이 그 오가키 선생한테 속아서 후지코시 공장에 와 있다는 거야, 그때 걔가 초등학교 6학년이었는데 졸업을 바로 앞둔 1945년 2월이었어. 하도 어이없고 기가 막혀서. 어려서 엄마 없이 서로 의지하며 자랐는데, 얘가 나를 많이 그리워 했었는지 이곳으로 온 거야, 그래 주먹밥 10개와 오렌지 쥬스를 마련해서 딱 한번 면회를 갔는데 동생이 막 울며 배고파 못 살겠다고 하는 거야. 우린 그래도 쪼까씩 삼시세때 밥은 줬는데 얘는 그것도 아니었나봐. 얼마나 맘이 아픈지. 그래 내가 있는 공장에 돌아와 같이 근무하게 해달라고 울며불며 하소연 해도 소용없고, 그냥 밤새 눈물만 흘렸어.”
새벽 5시에 일어나 10시간 이상 이어지는 중노동과 조센징이라는 놀림과 차별, 춥고 배고픔에 의지할 곳 없는 외로움, 그리고 고향에 두고 온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자기보다 더 어리고 여린 동생이 겪고 있을 고생에 언니 김성주의 마음은 무너지는 듯 아팠다.
“나가 순천남초등학교를 졸업했는데, 어느날 동생이 나한테 와서 오가키 선생이 오라고 했다는 거야. 그때 오가키선생 집이 우리집과 이웃이었거든. 가니까 고등교육도 시켜주고 돈도 벌수 있다는 거야. 그 말에 속았지. 그런데 그것보다 선생님이 너무 무서웠어. 그때는 일제시대라 선생님 말씀이면 꼼짝을 못했지. 아버지는 이미 경남 진해 공사장에서 강제노역을 해서 집에 안계시고, 그래 빼닫이(서랍)를 뒤져 아버지 도장을 몰래 가져다가 뭔지 모르고 꾹 찍었지. 그러니까 10원을 주데. 그게 아마 계약 뭐 그런거였나 봐. 집이 제법 잘살아서 규모가 컸는데 산에 가 나무 이고, 흙도 파 나르고, 농사일이며 할머니를 도와 거들일이 산더미였거든. 일본가기 하루 전에야 할머니께 말씀드렸지. 그때 할머니 심정이 어땠겄어. 울고불고 이것이 왠일이냐고. 가지말라고, 그래 도장 찍어놔서 안가면 우리 아버지나 할머니 잡아갈지 모른다고 했어. 그런께 할머니가 놀래더라고. 손녀딸 간다니까 고춧가루, 깨소금, 피문어 사다가 절구통에 쾅쾅 찧어갖고 명베로 차대기를 꼬매갖고 넣어주며 배고플때 내서 먹으라며, 주먹밥도 마포수건에 몇 개 싸주더라고. 비상금도 20원 챙겨주셨는디 그 돈 일본가서 못쓰겠더라고, 그래 해방되며 송금했는데 어수선한 통에 돈이 어디 가버렸는지 몰라.”
1944년 5월 김성주는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전남 1중대 소속으로 순천에서 같은 나이또래 소녀 13명과 함께 부산으로 향했다.
“그때 목포에서 40명, 광주에서 40명, 여수에서 20명, 나주에서 17명이 모였는데 순천이 젤루 적었어. 순천군청에 모여 순천역에서 여수로 부산으로 이래 모여 떠났는데. 배에서 하도 멀미해서 송장이 되다시피 해서 도착했지. 내가 그걸 다 기억하고 같이 간 동창들 이름도 다 외우고 증언하니까 일본사람들이 깜짝 놀래더라고, 머리 좋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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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여자근로정신대가 흰색하복을 입고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 항공기제작소 오에공장 작업장으로 들어가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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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전시 노동력 보충을 위해 희생된 이들의 나이는 불과 13~15살이었으며, 1944년부터 나고야 미쓰비시중공업으로 300여 명, 도야마 후지코시 강재(鋼材)주식회사로 1,089명의 어린 소녀들이 동원되었다.
“내가 또래보다 덩치가 컸어. 추운 겨울에 비행기 몸체에 뺑끼질하고, 찬물로 비행기 닦고 힘든 일만 걸리더라구. 언젠가 기계로 뭘 자르는데 고만 손가락 끝이 잘려서 뼈다구가 하얗게 드러났어. 피가 철철 나는데 뭐 병원에 가서 치료는 엄두도 못내. 그냥 아까징끼 바르고 붕대로 칭칭 감고, 다음날 또 바르면 피가 줄줄 흐르고, 참 죽을 것 같더라고.”
김성주 할머니의 고생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전쟁이 막바지를 향해 치닫고 있는 상황에서 언제 닥칠지 모를 공습과 엄습해 오는 지진에 죽을 고비를 무수히 넘겨야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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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고야 아쓰다신궁에서의 조선여자근로정신대 (깃발에「女子航空挺」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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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도 한참 공장에서 재봉틀처럼 생긴 기계를 만지고 있었는데 탁 이마가 부딪치더라고. 나는 쇠를 자르는 기계를 움직이거든. 어 왜 이렇게 어지럽지. 빈혈인가. 그러는데 갑자기 또 머리를 치는 거야. 그래 바닥으로 곤두박질 쳤지. 그때 누가 지진 지진 이러는 거야. 도망 간다고 후문으로 갔는데 사람들이 그냥 와갔고 패때기를 쳐버리더라고. 그래 땅에 툭 떨어져갖고 정신을 잃었는데 손이고 뭐고 지근지근 밟고 지나가서 참 죽을 걸 살아서 집에 왔어. 지금도 힘만 주면 멍지고 붓고 날이 쪼까 비올라면 며칠전부터 온몸이 아파서 못 견뎌. 아직 허리도 아프고 정말 내 인생이 송두리째 어긋났지.”
두 할머니의 회한은 끝이 없었다. 지금도 그 고통이 그림자처럼 따라 다닌다. 자매의 운명의 질곡은 해방후에도 이어졌다. 위안부라는 오해와 주변의 차가운 시선에 남편마저 등을 돌리고, 이혼 후 산동네 떡장사를 하며 3남매를 부양해야 했다. 그 뿌리깊은 상처에 남의 이목을 피해 다녀야 했고 행여라도 자식에게 피해가 갈까 근로정신대의 강제노역 사실을 숨겨야 했다.
“내가 일본 가서 당시 일 다 얘기하고, 잘린 손가락 보여주며, 증거 서류 내고 해서 일본 변호사 이런 사람들도 내막을 다 알아. 그래 언제든지 그 서류로 보상받으라고 했지. 여기저기 다니며 억울한 사정 다 얘기하고, 소송도 하고 했어.”
2008년 11월 도쿄(東京) 최고재판소는 조선여자근로정신대 피해 할머니들이 일본 정부와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낸 소송에 대해 최종 기각 결정을 하였다. 1965년 ‘한ㆍ일협정’을 통해 제공한 경제협력자금 3억불이 이유였다.
“일본에서 고생고생하고 한국 돌아와 고생고생하고, 내가 죄라면 일본 다녀온 건데.”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김성주 할머니의 마음엔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처가 깊이 자리하고 있었다. 강제노역 후 할머니가 짊어졌던 삶의 무게에서 우리도 자유롭진 못하다. 이젠 우리가 함께 나누고, 풀고, 보듬어야 한다. 그것이 역사적 진실을 밝히고 선진 조국을 만들어 가는 첫걸음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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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 운영지원과 사서 김춘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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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다 좋은데, 이런 글에서까지 선진 조국이니 뭐니 꼭 그렇게 표현해야 하나. 선진은 커녕, 이런 것 안하는 나라를 나라라고 해야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