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안중근 의거 농촌전파 속도
이헌창 고려대 교수·경제학
1909. 8. 29.~1910. 8. 29.경북 예천군 용문면 대제리(맛질이라고도 함)의 박씨가는 1834년부터 1950년대 초까지 5대에 걸친 117년간의 일기를 남겼다. '저상일월(渚上日月)'이란 제목의 이 일기책 1909년 10월 22일자에는 안중근 의사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당시의 가장인 박주대는 '등(藤)통감이 청나라에 들어가 해를 입었다'는 소문을 적었다. 안중근 의거일이 10월 26일이니 추후에 듣고 날짜를 거슬러 적은 것으로 보인다. 또 일기에 '소문이 확실하지 않다'고 한 점과 황성신문이 이토의 피격 사건을 10월 28일자 전보란에 처음 게재한 점 등을 감안하면, 이는 신문을 본 것이 아니라 소문을 듣고 적은 것이다.
10월의 달력과 11월의 달력 사이에 적힌 일기에는 '추가 소식(追聞)'으로 이토 히로부미가 저격당한 하얼빈이 정확히 제시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안중근에 대해서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그 사람은 평안도 사람이라고 한다. 성명은 윤지안, 본명은 안중근이다. 그 성명은 임시로 변개(變改)한 것 같다. 다시 들으니 황주의 안응칠이라고 실토했다 한다."
▲ 경북 예천군 용문면 대제리(맛질이라고도 함)의 박씨가(사진 아래),1834년부터 1950년대 초까지 5대에 걸친 117년간의 일기를 남겼다. '저상일월(渚上日月)'(사진 위)
대한매일신보 11월 9일자에 안중근 본명이 처음 나오는데, 일기는 신문 기사보다 포괄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처음 접한 정보는 불충분하였으나, 두 번째 기록은 안중근의 정보까지 정확하게 파악하였다. 일기는 또 1910년 4월 14일에는 매일신보를 보아 안중근이 여순에서 처형당한 소식을 적었다. 임종 당시 입은 옷, 노모를 잘 봉양하라고 동생에게 당부한 일, 그리고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道心)은 미미하다"는 서경(書經)의 구절을 옥중에서 일본인에게 써준 일을 아울러 기록하였다. 이를 통해볼 때 박주대는 감정을 배제한 채 안중근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 소식을 꼼꼼히 기록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신문을 정보 획득의 한 원천으로 삼았지만, 개인이 얻은 정보까지 종합했다.
신문이 나오기 전부터 박씨가의 일기는 주변 지역의 정보를 잘 파악하고 있었고 외국을 포함한 원격지의 정보도 수록하였다. 순조의 승하 소식은 1834년 11월 19일 읍내에서 온 사람이 박득녕(박주대의 부)에게 전해주었는데, 승하한 13일부터 6일이 지난 후였다. 박득녕은 헌종이 1849년 6월 6일 승하한 소식을 12일의 예천장에서 들었다. 멀리서 일어난 중요한 사건은 5일장 출입, 인적 교류 등을 통해 열흘 이내에 농촌에 널리 전파되었던 것이다. 중국 소식도 지방에까지 전달되었다. 태평천국군은 1853년 초 호북성의 수도 무창(武昌)을 점령하고 3월 남경으로 진격했는데, 1853년 3월 1일 일기에 '중원(中原)에 전란이 있어 3분의 2를 잃었다'고 기록하였다.
여기에서 드러나듯이 조선은 여론이 활발하여 정보가 널리 전파되는 사회였다. 개항 후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고 신문이 나와 정보의 전파 속도는 더 빨라졌다. 3·1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적으로 확산된 것도 정보 전파력에 힘입은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