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2948
11월18일 [연중 제33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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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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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v4cjwwJiYHc (박성재 엠마누엘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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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떠나가는 존재의 이유>
지상에서 마지막으로 사명을 완수할 장소인 예루살렘 성 앞에 서신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우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로마 병사들에게 체포될 장소, 진저리쳐지게 채찍질 당할 장소, 끔찍한 십자가형에 처할 두려운 곳이기에 서러워서 눈물 흘리신 것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당신이 끔찍이도 사랑했던 성도 예루살렘의 멸망이 안타까워 우셨습니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파멸이 안쓰러워서 눈물 흘리셨습니다. 죽기 일보 직전까지 당신 자신보다는 당신 양떼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시는 구세주 예수님의 모습이 돋보입니다.
인간은 보통 언제 웁니까? 사랑이 떠나갈 때 서럽게 웁니다. 희망이 절망으로 바뀔 때 눈물 흘립니다. 내가 베푼 호의가 배은망덕으로 돌아올 때 웁니다. 내 진심을 몰라주고 오해할 때 눈물 흘립니다.
예수님을 낳아 기르셨던 성모님께서도 우셨습니다. 그런데 그분 울음의 특징은 소리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으로 인해 소리 없는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아무리 무염시태 잉태라고 하지만 자신의 태중에 머물렀던 열 달이나 머물렀던 예수님이셨습니다. 갓난아기 때는 불철주야, 애지중지, 노심초사하면서 정성껏 길렀습니다. 소년 시절 무럭무럭 성장하는 예수님의 필요성을 채워주며 어찌 모자간의 정이 싹트지 않았겠습니까?
성모님에게서 예수님은 삶의 이유였고 존재의 이유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존재의 이유가 떠나갔습니다. 물론 성모님은 떠남의 이유를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더 큰 사명 수행을 위해 출가하는 예수님을 아프지만 기꺼이 떠나보냈습니다. 그 떠나보냄은 한번 두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일상적으로 되풀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당신 안부가 너무 궁금해 먼 길을 찾아오신 성모님이셨습니다. 문밖으로 나와서 인사라도 하는 게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도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밖으로 나오지 않으셨습니다. 그러고는 하시는 말씀.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마태오 12장 48~50절)
더 큰 선을 추구하기 위해, 더 큰 하느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 사사로운 정을 눈물을 머금고 단절해버리는 예수님의 모습이 참으로 눈물겹습니다. 내가 낳은 아들, 내가 애써 키운 아들이지만 인류 구원 사업의 완결을 위해 기꺼이 세상에 내어놓은 성모님의 신앙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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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sMJb9snd5w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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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는 곧 나의 환경: 나의 환경은 내가 지키는 법>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평화를 원하지 않는 예루살렘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시며 우십니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예수님께서 주시려는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은 당신 자신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루살렘 입성 다음 내용입니다.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이는 듯 했지만, 그들은 자신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평화는 세속적인 평화였습니다. 그 일시적인 평화를 위해 영원한 평화를 알아볼 눈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려면 우선 평화를 깨는 것부터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평화를 깨는 것은 우리 생존을 위협하는 것들입니다. 누구나 자신의 생존에 위협을 받으면 평화가 깨집니다.
얼마 전 평균 고도가 2m밖에 안 되는 작은 섬나라 투발루 외교부 장관이 바닷물 속에서 연설한 뉴스가 있었습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 자리는 육지였습니다. 하지만 기후변화로 인한 해수면의 급격한 상승으로 그 섬나라 주민들은 생존을 위협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평화로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네팔과 같은 높은 산지에 사는 사람들은 해수면 상승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것으로 평화가 깨지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사람이 불안해지는 이유는 ‘생존이 위협받는 환경에 살기 때문’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습니다.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은 바로 ‘환경’입니다. 그런 환경을 조성할 줄 아는 사람은 심지어 많은 수가 걸리는 암과 같은 질병 앞에서도 평화로울 수 있습니다. 한상도 씨는 자연식물식을 하여 1년 3개월 만에 전립선암이 완치되었습니다. 이 경험으로 펴낸 책이 『수술도 없이, 약물도 없이 사라진 암』입니다.
2020년 암 진단을 받은 저자는 2021년 식이요법만으로 암세포가 사라지게 하였습니다. 처음에 의사는 당장 수술을 종용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더욱 근본적인 원인을 제거하려 하였습니다. 암이라는 것은 결과물이고 암이 생기게 된 원인과 과정을 돌아보며 수정하고 치유하여 앞으로도 암이 살 수 없는 조건과 환경을 만들어주려는 시도입니다. 수술로 당장 보이는 암을 제거할 수는 있어도 보이는 암은 물론 보이지 않는 암까지 (저절로) 사라지게 할 수는 없습니다. 암이 생기지 않게 하는 삶의 환경을 만들려고 한 것입니다.
이 책의 서문의 제목은 「나를 죽여야 내가 산다」입니다. 그리고 “2020년 5월 25일. 나는 나를 죽였다.”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암 진단을 받고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습니다. 그를 아는 사람의 대부분은 그가 암에 걸렸다가 나았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다만 지금까지의 삶을 살던 자신을 죽이고 ‘생활 태도’를 뜯어고친 것입니다.
“나는 평소의 일상을 그대로 유지했다. 그와 달리 내적인 생활은 180도 달라졌다. 먹는 음식이 달라지고, 생활습관이 달라지고,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가리는 것 없이 닥치는 대로 먹던 습관을 버리고 몸에 좋은 음식을 철저히 가려 먹었다. 육류와 생선, 우유, 계란, 밀가루, 가공식품을 완전히 끊었고, 과일과 채소, 현미잡곡밥에 채소 반찬을 먹었다. 아침저녁으로 매일 1만 보 이상 걸었고, 주말에는 가까운 산을 찾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명상으로 하루를 시작했고, 어떤 상황에서도 밝고 긍정적인 생각을 유지했다. 암을 치료한다는 생각 대신 몸과 마음을 재생시킨다고 생각하고 행동했다. 그것뿐이다. 누구나 알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상식에 가까운 것을 묵묵히 실천했을 뿐이다.”
나의 생활 태도가 바로 건강을 위한 나의 환경입니다. 이 환경을 조성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병에 대해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그 병이 침투할 수 없는 환경을 조성할 줄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평화를 얻는 법을 아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이라도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수는 없습니다. 죽음이라는 생존을 위협하는 병은 누구도 이기지 못합니다. 그래서 결국엔 불안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환경은 없습니다. 코로나가 끝나면 안전할까요? 또 다른 불안이 시작될 것입니다. 결국, 죽음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지 않으면 불안은 멈출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모든 피조물은 창조자 안에서 평화롭습니다. 동물의 새끼들도 어미가 보호해주면 안전하다고 느낍니다. 우리가 생겨났을 때 가장 안전한 장소는 어디였을까요? 바로 어머니의 태중이었습니다. 태중의 아기는 부모의 태중에 머무는 것 하나만으로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삶은 발전이 없습니다.
존 A. 셰드는 “항구에 머물 때 배는 언제나 안전하다. 그러나 그것은 배의 존재 이유가 아니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더 큰 세상으로 내보내기 위해 자녀를 분리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 하지 않아도 사춘기가 되면 자녀는 더는 부모가 자신들의 평화로운 환경이 될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이때 찾아야 하는 것이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이 아버지이시고 교회가 어머니입니다. 참 평화는 내가 하느님 태중에 있음을 믿는 것으로 얻어집니다. 순교 성인들은 죽음의 칼날 앞에서도 평화로웠습니다. 그 이유는 창조자 안에 머묾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창조자를 알 수 있을까요? 바로 양식과 보호와 가르침을 주는, 곧 살과 피를 내어주는 대상으로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이 창조자이심을 알리시기 위해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셔서 살과 피를 양식으로 내어주게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하느님이라고 하시며 우리의 양식이 되어주신 신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유일한 피난처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예수님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들의 피난처를 자신들이 만들 능력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태중에 머물며 하느님의 법을 지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느 공간이나 그곳에 머물려면 그 공간을 제공하는 이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암을 극복하려면 그것이 침투할 수 없는 공간에 머물려야 하는데 그 공간에 머무는 방법이 자연식물식단법이었습니다. 어느 공간이나 법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법을 따름으로써 하느님 품에 머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 느끼는 평화가 이미 땅이 아니라 하늘에 머물고 있음을 믿게 합니다.
태중의 아기는 자기 자신을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공간에서 벗어나려고 어머니의 뜻을 어길 줄 모릅니다. 그러니 평화로울 수 있습니다. 결국,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아 스스로 평화를 찾게 만드는 것이 ‘자아’입니다. 나를 죽이고 그리스도 안에 머물면 평화롭습니다. 내가 그분처럼 될 수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불안 자체인 내가 죽고 그분 안에 머물 수 있고 영원한 생명으로 이 세상에서부터 평화롭게 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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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9,41-44: 네가 평화를 가져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보고 우신다. 이것은 복음서에서 말씀하신 참 행복에 대해 당신이 가르치신 것을 몸소 증언하신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1”(마태 5,5) 그분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9)고 하셨다. 그분은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마태 5,9) 그분은 “우리의 평화”이시며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신”(에페 2,14-15), 그래서 진정한 평화를 가져다주신 분이시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마태 5,10) 그분은 우리 죄로 인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그분만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은 사람은 없다.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말씀하신 모든 참된 행복을 몸소 보여주셨다. 그래서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루카 6,21)라고 하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보고 우신 것이다.
그분은 우시며 말씀하셨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42절) 그 이유는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44절)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장차 일어날 일을 미리 내다 보시고 눈물을 흘리셨다.
복음사가들은 주님께서 예루살렘을 두고 하신 말씀을 기록하였다. “그 때가 너에게 닥쳐올 것이다. 그러면 너의 원수들이 네 둘레에 공격 축대를 쌓은 다음, 너를 에워싸고 사방에서 조여들 것이다. 그리하여 너와 네 안에 있는 자녀들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네 안에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있지 않게 만들어버릴 것이다.”(43-44절) 이 일은 말씀하신지 40년 후 서기 70년에 그렇게 되었다.
주님께서는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불행하여라, 그 무렵에 임신한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 이 땅에 큰 재난이, 이 백성에게 진노가 닥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칼날에 쓰러지고 포로가 되어 모든 민족들에게 끌려갈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다른 민족들의 시대가 다 찰 때까지 그들에게 짓밟힐 것이다.”(루카 21,23-24) 또한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된 것을 보거든, 그곳이 황폐해질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아라.”(루카 21,20)고 하셨다.
하느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우리 자신도 예루살렘과 똑같은 운명에 떨어지고 만다. 하느님의 자녀라면 그분의 뜻을 실천하려 노력하여야 한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매 순간 우리를 당신의 사랑에로 초대하신다. 이 순간은 우리에게는 참으로 은총의 순간이 된다. 이 초대에 올바르게 응답하는 것이 우리의 본 모습이며, 그리스도를 맞이하고 그분을 닮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매 순간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는 그분께 문을 열어드려 우리에게 오실 수 있도록 깨어있는 삶을 갖도록 주님의 은총을 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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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며 우시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고 우시며 말씀하셨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그때가 너에게 닥쳐올 것이다. 그러면 너의 원수들이 네 둘레에 공격 축대를 쌓은 다음, 너를 에워싸고 사방에서 조여들 것이다. 그리하여 너와 네 안에 있는 자녀들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네 안에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루카 19,41-44)
예수님께서 우신 일은, 인간들이 멸망을 향해서 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의 표현입니다. 그 안타까움은, 구원과 생명의 길을 알려 주어도 받아들이지 않고 멸망 쪽으로만 가는 인간들의 ‘고집’에 대한 안타까움입니다. (그 안타까움은, 당신의 능력이 부족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은 전능하신 아버지 하느님의 권능을 함께 가지고 계신 분이니, 당신의 능력으로 인간들의 멸망을 막고 인간들을 구원의 길로 데리고 가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들 자신들이 원하지 않는데도 억지로 붙잡아서 끌고 간다면, 그것은 구원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인간들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구원을 받든지 멸망을 당하든지, 그것은 우리가 선택하는 일입니다.) 여기서 ‘오늘’은 ‘오늘이라도’로 해석됩니다.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는 “너는 그것을 외면하고 있다.”이고,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는 “너 자신이 알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입니다.
앞의 13장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인간들에 대해서 안타까워하시는 당신의 심정을 다음 말씀으로 표현하셨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루카 13,34) 예수님의 심정은, 죽을병에 걸려서 누워 있는 자녀에게 ‘특효약’을 먹이려고 애쓰는 어머니의 심정입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와 같은 예수님의 사랑을 외면하거나, 그 사랑에 무관심한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1) 하느님, 영혼, 내세, 구원, 영원한 생명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우주와 이 세상은 우연히 생겼고,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도 우연히 생겼다고 생각합니다. 우연히 생겼다고 생각하니까 그냥 사라져도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귀한 존재라는 것을 부정합니다. 자신의 생명도, 남의 생명도, 다른 피조물의 생명도 존중하지 않습니다. 허무한 인생을 살다가 허무하게 사라질 뿐입니다. “그들은 지혜롭다고 자처하였지만 바보가 되었습니다."(로마 1,22) 바오로 사도가 아테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었을 때, “저 떠버리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가?”라는 반응을 보인 사람들도 있었고(사도 17,18), 바오로 사도를 비웃기만 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사도 17,32) (오늘날에도 과학만능주의에 빠져서 종교와 신앙을 비웃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2) 하느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한다고 말하면서도, “나는 죄가 없으니 회개할 필요가 없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신 일이 많은데, 바리사이들이 바로 그런 오만과 위선에 빠져 있었습니다. “나는 죄가 없으니 회개할 필요가 없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자신의 죄를 분명히 인식하면서도 그것을 감추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죄의식 자체가 없거나 자기의 죄가 무엇인지 모르거나, 자기가 지은 죄를 잊어버린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요한 9,41)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정말로 모르거나 잊었다면 옆에서 깨우쳐 주면 됩니다. (모르거나 잊었다고 해도 죄는 죄입니다.) 그런데 “나는 죄가 없다.”라고 주장하면서, 옆에서 깨우쳐 주는 것도 거부한다면, 죄가 자꾸 커지기만 할 뿐입니다. (모르는 것과 없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3) 자신의 죄를 인식하긴 하는데, 자기는 충분히 회개했다고, 또는 회개를 마쳤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실상 자기에게는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고, 그래서 그것도 교만죄이고, 신성모독죄입니다. 회개를 충분히 했는지, 또 회개한 다음에 보속을 충분히 했는지, 그것은 누가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죄를 짓고 나서 고해성사 한 번 보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일까? 고해성사는 하느님의 용서를 전달해 주는 성사이지 회개가 끝났다고 선언하는 성사가 아닙니다.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의 경우에, 예수님의 용서를 받은 뒤에도 평생 ‘회개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누구든지 회개가 완성되었다는 선언을 듣는 때는 심판 때입니다. 하느님(예수님)만이 그 선언을 하실 수 있습니다. <고해성사를 보지 않고서 어떤 개인적인 체험만으로 “나는 하느님의 용서를 받았다.”라고 자기 마음대로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고해성사를 세우신 예수님의 권한을 침해하는 죄이고, 예수님을 모독하는 죄입니다.>
4) 자신의 죄를 인식하고, 또 그 죄를 뉘우치고 후회하면서도, 회개하기를 포기하고, 구원받기를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배반자 유다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사형 선고를 받으시는 것을 보고 자기 죄를 뉘우쳤지만, 자살해 버렸습니다.(마태 27,3-5) 그가 자살한 일은 회개가 아니라 회개와 구원을 포기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가 그렇게 끝나버린 것을 안타까워하시면서 눈물을 흘리셨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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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한국은 내년에 대통령 선거가 있습니다. 저도 재외국민으로 투표할 수 있도록 선거관리위원회 홈페이지에 등록했습니다. 재외국민이거나, 투표 당일에 해외에 체류하는 사람은 선거관리위원회 홈페이지에 등록하면 사전에 투표할 수 있다고 합니다. 정당은 대통령 후보를 선출하는 과정에서 토론을 통해 정책을 이야기합니다. 정책을 들은 당원들은 경쟁력이 있고, 좋은 정책을 보여준 후보를 당의 공식 후보로 선출하게 됩니다. 경쟁이 치열하다보면 때로 상대방의 약점을 들춰내기도 하고, 인신공격을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 경쟁은 자칫 후보와 지지자들 간에 앙금으로 남게 됩니다. 그러나 정식 후보가 선출되면 축하의 박수를 보내기 마련입니다. 아쉽게 경쟁에서 탈락한 경쟁자들도 이제는 한 팀이 되어서 당의 공식 후보가 대통령이 될 수 있도록 선거운동을 합니다. 만일 아쉬움 때문에, 억울함 때문에 독자적으로 대통령 후보로 등록하면 당의 선거운동에도 커다란 피해를 주게 됩니다. 저는 그런 모습을 몇 번 보았습니다. 내부의 단합된 힘이 없으면 아무리 약한 상대라도 쉽게 이길 수 없습니다. 강대한 제국이 무너지는 것은 외부의 공격 때문이기도 하지만 대부분 내부의 분열과 갈등이 원인이었습니다. 그래서 공식 후보가 된 사람은 아쉽게 탈락한 경쟁자들을 만나 위로하고, 큰 대의를 위해서 함께 하기를 청하게 됩니다.
소금은 물에 녹아듭니다. 그래서 음식에 맛을 낼 수 있습니다. 물은 소금이 들어 올 수 있도록 문을 열어줍니다. 소금은 자신을 버리고 기꺼이 물과 하나가 됩니다. 그러나 ‘물과 기름’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물에 떠있는 기름은 물에 녹아들지 않습니다. 물은 기름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습니다. 기름 역시 자신을 버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같은 강에 있으면서도 더 넓은 바다로 가면서도 하나가 되지 못합니다. 물과 기름 같은 관계는 사람들 사이에도 있습니다. 아름다운 공동체가 때로 아픔을 겪기도 합니다. 한국에서 온 신부님이 한국에서의 사목 방침을 고수하면 현지에 있는 신자들은 당황하게 됩니다. 현지에 있는 신자들이 한국에서 온 신부님에게 현지의 상황을 따라야 한다고 이야기하면 한국에서 온 신부님도 마음이 상하게 됩니다. 물과 기름 같은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한국에서 온 신부님이 현지에 적응하려고 노력하고, 사제 모임에도 잘 참석하면서 이해하고 경청하면 조금씩 현지의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현지에 있는 분들이 한국에서 온 신부님이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기다려 주고, 새로운 사목의 방향을 받아들일 준비를 한다면 공동체는 더욱 풍요로워집니다. 물과 소금 같은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가 되어서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건강하게 생활 할 수 있는 것은 우리 몸의 지체가 한 몸이 되어서 협조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 몸의 지체가 물과 기름처럼 따로 활동한다면 우리는 건강한 몸과 마음을 지닐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몸에 이상이 생기는 것은 몸의 지체들이 하나가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몸은 혈관, 신경, 척수를 통해서 긴밀하게 소통하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마타티아스는 하느님의 법과 계명을 어기며 이방인의 풍습을 따르는 동족들에게 이야기합니다. “임금의 왕국에 사는 모든 민족들이 그에게 복종하여, 저마다 자기 조상들의 종교를 버리고 그의 명령을 따르기로 결정했다 하더라도, 나와 내 아들들과 형제들은 우리 조상들의 계약을 따를 것이오.” 그때에 정의와 공정을 추구하는 많은 이들이 광야로 내려가서 거기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하느님을 따르는 마타티아스는 율법과 계명을 지켜 하느님을 따르는 것이 이스라엘 공동체를 살리는 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안타까움에 우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의 원수들이 네 둘레에 공격 축대를 쌓은 다음, 너를 에워싸고 사방에서 조여들 것이다. 그리하여 너와 네 안에 있는 자녀들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네 안에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과 기름처럼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의 신앙이 물과 기름 같은 신앙으로 겉도는지, 물과 소금 같은 신앙으로 풍요로운 신앙인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재앙이 아니라 평화를 주노라. 나를 부르면 너희 기도를 들어 주고, 사로잡힌 너희를 모든 곳에서 데려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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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대교구 이철희 요한금구 신부님]
<지도자의 힘>
세상을 바꾸는 힘이라고 말할 것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가장 큰 것은 정치라고 하겠지만, 시간이 흐른 다음에 판단하면 그 정치의 힘에서 바뀐 것은 신기루가 되기 십상입니다.
지금은 아주 강한 힘이라고 생각했던 것의 힘이 그처럼 쉽게 사라질 줄은 몰랐다는 말도 가능할 것입니다. 세상에 반드시 힘이 강한 것만 살아남는 것은 아닙니다.
농촌에서 사람이 먹을 양식을 생산하는데 방해된다고 해서, 아주 독한 농약을 쓰고 강력한 제초제를 써서 ‘사람에게 유익하다고 판단하는 것’들을 뺀 나머지를 모조리 없애버린다고 하지만, 그래도 그것을 이기고 다시 공격해오는 것은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사람이 만들어낸 약의 힘이 강하다고 찬사를 보내는 일로 끝내지만, 실제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그렇게 강하다고 말할 농약이나 제초제’들을 이기고 살게 된 ‘유익한 농작물’이 사람에게 정말로 안전한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그러한 음식물을 먹고 사는 사람은 또 얼마나 힘이 센 존재들일까요?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순환시키다보면, 사람이야 말로 정말 강력한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그 목숨의 기간이 누구에게나 일정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힘에 의해서 죽을 수 있다는 단점만 뺄 수 있다면 말입니다.
오늘 독서말씀의 배경이 된 것은 서글픈 역사입니다. 역사의 흐름이라는 것이 슬플 때도 있고, 기쁠 때도 있기는 하겠지만, 사람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기쁠 때보다는 슬플 때가 더 많습니다.
그렇게 말한다면, 우리가 가진 힘을 빼는 힘겨운 날이 왔을 때, 우리가 어떻게 행동할 사람으로 마음을 세우고 사느냐 하는 것도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물론 내가 마음먹은 대로 행동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미리 준비하는 방법에 따라서 결과를 대하는 자세가 달라지는 것뿐입니다. 사상의 흐름이나 역사의 전환에는 지도자가 갖는 힘이 아주 큰 영향을 끼칩니다.
오늘 독서에 등장한 마타티아스는, 밀려오던 세계의 물결을 반대하여 신앙을 더 앞세워 행동에 나서지만, 그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지, 그 당시에는 짐작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물론 사람이 자신에게 다가올 미래를 안다면 무슨 행동을 하겠습니까? 그것이야 말로 개신교에서 선택한 ‘예정설’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삶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어떤 자세로 그 순간을 대하느냐의 차이뿐입니다. 마타티아스와 뜻을 같이 한 사람은 삶의 조건이 힘겨운 광야로 내려갑니다.
오늘 복음은 예루살렘이 올바른 모습으로 변화되지 않는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리시는 예수님을 전합니다. 예수님이 눈물을 보이셨다는 것이 큰 뉴스는 아닙니다. 다만 그렇게 미래를 보신 분의 힘을 우리는 어떻게 대하느냐는 것뿐입니다.
세상 어떤 것도 다시 바뀔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영원히 사는 존재가 아닌 이상, 사람은 그 변화의 어느 순간에 삶을 마치기 마련입니다.
우리들이 맞이하는 삶의 끝이 내 삶에 이로운 것이 될 순간은 언제일까요? 어떻게 만들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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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전영준 D.안드레아 신부님]
<혹시 최근에 눈물을 흘려본 경험이 있으십니까?>
혹시 최근에 눈물을 흘려본 경험이 있으십니까? 저는 주일 저녁마다 눈물을 지을 일이 생깁니다. 주일 저녁에 해외 입양아와 친부모가 상봉하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그것을 볼 때마다 그렇게도 눈물이 날 수가 없습니다. 물론 동생을 입양했기 때문에 그것이 남의 일 같지 않아서 그렇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가족이 서로를 모른 채 살아가야 했다는 것이 너무나도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주일 저녁미사는 퉁퉁 부운 눈으로 미사를 드릴 때가 많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십니다. 왜 우실까요? 그것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신을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그토록 많은 기적을 행하시고,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비유라는 방법을 통해 쉽게 설명해 주었지만, 사람들은 자신들의 메시아를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이렇게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시고, 예수님은 잘못되는 자녀들을 보고 마음속으로 우시는 부모의 심정으로 눈물을 흘리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결단을 요구하는 표징으로 예루살렘의 멸망을 말씀해주십니다.
특히 이방인도 아닌,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간다는 사람들, 더욱이 이스라엘의 중심인 예루살렘 사람들이 잘못된 모습을 보시고 얼마나 가슴이 미어지셨겠습니까?
예수님의 눈물을 통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태도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즉, 어린이와 같은 단순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일부러 쉽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트집을 잡고, 결국 십자가상의 죽음으로 모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완고한 마음이 아니라 그 말씀에 감화되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고자 노력하는 단순한 신앙인의 태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들은 그 옛날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치던 사람들과 같은 마음으로 살아서는 안됩니다. 저것은 주님의 뜻이 아니라고 스스로 판단하여 주님의 뜻을 외면하고 세속의 탐욕에만 젖어 살아간다면, 예수님은 그 옛날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면서 우셨듯이 우리들을 바라보시면서 다시 한번 눈물을 흘리실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분 눈에 눈물 대신 웃음꽃을 피어나게 할 수 있을까?"를 먼저 생각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하루 예수님의 성심에 눈물이 아닌 웃음을 드릴 수 있는 마음을 가져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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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도미누스 플레빗(Dominus Flevit)>
어제 복음의 마지막 구절을 보면 예수께서는 ‘금화를 맡긴 종들의 비유’ 말씀을 마치시고 앞장서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길을 떠나셨다고 했다.(28절)
이로써 루카복음이 보도하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상경기(9,51-19,28)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이제부터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활동기(19,29-24,53)가 시작될 것이고, 이로써 예수님의 공생활도 끝을 보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활동기는 성도 예루살렘을 향한 성대한 입성과 함께 시작된다.(19,29-40) 우선 예루살렘 동쪽 올리브산 너머에 있는 베파게와 베타니아 근처에 도착하신 예수께서는 나귀를 타고 제자들과 군중의 환호를 받으며 올리브산을 넘어 예루살렘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중턱에 이르러 행렬을 멈추셨다. 여기서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예루살렘을 향한 불행을 예고하신다.
바로 이곳, 올리브산 정상에서 가파른 경사를 따라 키드론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예루살렘 성도가 한눈에 들어오는 이곳에 ‘도미누스 플레빗’(Dominus Flevit, 주님께서 우셨다!)이라는 이름을 가진 성전 하나가 세워져 있다. 우리에게는 ‘눈물성전’으로 알려져 있다.
5세기부터 수도원이 있었던 이 자리에 세워진 ‘눈물성전’은 1955년 이탈리아의 건축가 안토니오 바루치가 설계하여 완공한 것으로서 성전의 지붕을 눈물방울 모양으로 만들어 놓았다.
실제로 성지순례를 가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코스를 걸어보면 만감(萬感)이 교차한다. 베파게에서 올리브산 정상에 이르는 코스를 걸으면서 묵상하면 군중들의 열광적인 환호가 시끄럽게 들린다.
그러나 정상에 이르러 예루살렘 성도와 성전이 한눈에 들어오면 갑자기 고요해짐을 느끼게 될 것이다. 비탈길을 내려와 눈물성전에 이르면 당시 예수님의 눈물이 나의 눈물이 되고 만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마태 21,1-9; 마르 11,1-10; 루카 19,29-40)과 성전정화 사건(마태 21,12-17; 마르 11,15-19; 루카 19,45-48; 요한 2,13-17) 사이에 삽입되어, 눈물과 한탄으로 예루살렘을 바라보는 내용의 오늘 복음은 루카만이 전하는 고유사료이다.
신약성서에서 예수님의 울음에 관한 보도는 모두 세 곳인데, 라자로의 죽음을 향한 울음(요한 11,35), 하느님께 큰소리와 눈물로 기도하고 간구하심(히브 5,7), 그리고 오늘 복음의 예루살렘을 향한 울음이다.
“오늘 네가 평화의 길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너는 그 길을 보지 못하는구나.”(42절)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예수님의 비통한 눈물과 한탄은 그분의 착잡한 심정을 헤아리기에 충분하다. 아직도 시대의 징표를 읽지 못하고 ‘요란한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 그리고 그 성도를 대표하는 무리들. 예수를 반대하는 예루살렘 성도의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메시아의 영광은 없다.
기적의 시간도 모두 끝이 났고, 평화의 날들도 모두 지나갔다. 예루살렘은 하느님께서 그들을 구원하러 오신 때마저 놓치고 말았다. 그에게 남은 것은 전쟁과 멸망과 심판이다.
실제로 기원후 70년 8월 29일 예루살렘은 로마제국의 군대에 의해 완전히 멸망하였다. 율법에의 충성이 예수께 대한 믿음과 회개를 대신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율법만능주의가 그 믿음을 방해하였다.
예수님의 비통한 눈물과 한탄이 오늘날 우리 자신을 향한 것일 수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오늘이 가기 전에 진정 평화의 길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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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가까이에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시며 우시며 말씀하셨다.”(루카 19,41)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마치 엘리사가 이스라엘의 범죄를 두고 울었던 럼(1열왕 8,11), 또 예레미아가 유다의 유배를 두고 세 번이나 울었던 처럼(예레 9,1;13,17;14,17), 우십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두고 전에도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루카 13,34)하고 탄식하신 적이 있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라자로의 죽음을 슬퍼하는 마리아 앞에서도 우신 적이 있습니다(요한 11,35).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우셨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께서 큰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식을 올리셨음”(히브 5,7)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셨습니다.
“행복하여라. 우는 사람들!”(마태 5,4)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보시고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루카 19,42) 하고 탄식하시며, 당신께서 우시는 이유를 이렇게 밝히십니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루카 19,44)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알지 못함에 대해 우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간다는 예루살렘 사람들의 무지와 어리석음에 가슴이 미어지셨습니다. 그토록 많은 기적을 행하시고,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셨지만, 그들은 ‘평화를 가져다주는’ 당신과 ‘당신이 찾아오신 때’를 알지 못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파괴에 대해서, 세 번씩이나 예고(루카 19,43-44;21,20-24;23,28-31)하시고, 그것을 종말을 예시하는 역사적 심판으로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니, 이러한 예수님의 울음과 말씀은 단순한 탄식이 아니라, 예루살렘에 대한 예언적 경고요, 회개의 결단을 촉구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태도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지를 당신의 눈물로 말씀해 주십니다. 그것은 우리도 세상을 보고 울 줄을 알고, 아파할 줄을 알라는 것이요, 또한 하느님과 하느님의 뜻을 알아들으라는 말씀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저희가 당신의 뜻을 외면하여, 또 다시 당신을 울리지 않게 하소서!
당신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드리고, 당신의 눈에 웃음을 꽃피워 드리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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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도성을 보시고 우시며”(루카 19,41)
주님!
도시를 보고, 세상을 보고,
비난할 줄은 알아도 울 줄은 몰랐습니다.
세상의 아픔과 슬픔을 보고, 범죄와 불의를 보고,
울지도 기도하지도 않았습니다.
무관심과 패배의식에 갇혀 당신의 뜻을 찾지도 않았습니다.
안정과 편리를 도모하며 이기심과 타협 했습니다.
하오니, 주님! 제 마음에 눈물을 주소서.
세상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울 수 있는 사랑의 눈물을 주소서.
우는 이들과 함께 울며 당신의 눈물을 닦아드릴 수 있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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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루카19,42)
<예수님의 눈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고 우십니다.
예수님께서 드디어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임금님'으로서 예루살렘을 찾아오시는데, 예루살렘은 그런 예수님을 배척합니다. 그 결과는 멸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시면서 우십니다.
복음 안에서 드러난 예수님의 눈물은 친구 라자로가 죽었을 때(요한11,35)와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실 때에만 나옵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우십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당신에게 닥쳐올 운명, 곧 십자가의 죽음 때문이 아니라, 예루살렘이 당할 멸망 때문이었습니다.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시고 우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울고 계시지 않을까? 예루살렘 도성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죄 때문에 울고 계시지 않을까? 예루살렘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처럼, 우리의 삶이 예수님의 삶과 멀어져 있기 때문에 울고 계시지 않을까?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아직도 죄악 속에서 허덕이고 있기 때문에 울고 계시지 않을까?
"오늘 너희는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복음환호송/시편95,7.8)
예수님께서 흘리셨던 아픔의 눈물을 '나의 회개로' 기쁨의 눈물로 바꾸어 드립시다! 우리에게 평화를 가져다 주시는 '예수님 안에 머무는 우리들', 그래서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보시고 기뻐 즐거워하시는 예수님이 되게 합시다!
오늘은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있는 날입니다. 오늘을 위해 그동안 수고를 다한 우리 수험생들이 최선을 다해 그리고 평화로운 마음으로 수능시험에 임할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합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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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
루카 19,41-44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며 우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고 우시며 말씀하셨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그때가 너에게 닥쳐올 것이다. 그러면 너의 원수들이 네 둘레에 공격 축대를 쌓은 다음, 너를 에워싸고 사방에서 조여들 것이다. 그리하여 너와 네 안에 있는 자녀들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네 안에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
감사한 마음 담은
들숨 하나 날숨 하나
나와 너 벽을 허물어
우리 이루는 한 걸음
어둔 세상 밝히는
해맑은 웃음 한 줄기
속 먼지 씻어내는
깨끗한 눈물 한 방울
보잘것없는 이 보듬는
좁지만 넓은 마음 한 줌
더불어함께 삶 일구는
뜨거운 열정 한 모금
있고 없음에 매이지 않은
참되고 착한 삶 한 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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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3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라고 바꿔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만큼 빨리 변하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놀기 바빴습니다. 학원 다니는 아이도 없었고, 선행 학습이라는 말조차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학원 안 다니는 아이 찾기가 힘듭니다. 선행 학습은 당연한 것이 되어서, 학교에서는 당연히 알 거라면서 진도를 나간다고 합니다.
특히 인터넷의 발달로, 또 엄청난 데이터가 그 안에 공개되어 있어서 자료를 찾는데 책보다 검색하는 것이 더 빨라졌습니다. 스마트폰으로 손안에 엄청난 지식을 담고 있으니, 늘 새로운 지식을 소유해야 하는 세상이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빠르게 변하는 세상을 보며 억지로 하는 교육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습니다.
억지로 시켰는데 3년만 지나도 옛 지식이 되니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혼자 공부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아닐까요? 혼자 공부하는 것을 읽혀야 새로운 지식을 계속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그렇습니다. 부모가 억지로 끌어주는 신앙이 아닌 스스로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는 법을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새로운 모습을 계속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십니다. 왜 우실까요? 바로 어리석은 인간들의 모습을 보고 우시는 것이 아닐까요? 당신을 통한 하느님의 구원을 알리고자 그토록 많은 기적을 행하셨고 비유라는 방법까지 동원하면서 쉽게 설명을 해주셨지만, 사람들은 주님을 알아 뵙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열쇠를 들고 계시지만 트집을 잡더니 결국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길로 가는 인간의 모습에 슬피 우는 부모의 심정으로 눈물을 흘리시는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 자신이 필요한 것을 계속 청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봅니다.
스스로 하느님께 나아가려고 하지 않고, 그 옛날 계속해서 표징을 보여달라는 유다인들처럼 기적을 자신에게 달라고만 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보려고 하지는 않고 세속의 뜻만을 보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의 실천보다 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데 더 많은 시간을 소비합니다.
이런 모습을 보신 주님께서는 어떠하실 것 같습니까? 또다시 눈물을 흘리지 않으실까요? 잘못된 자녀를 보고 마음속으로 우는 부모의 마음이며, 빗나간 길을 걷는 당신 백성을 보고 눈물 흘리는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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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우리 글 만들기>
중세 때까지만 해도 성경은 무조건 라틴어로 되어 있어야 했습니다. 자국의 언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라틴어 성경을 자기 나라의 언어인 독일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1521년, 이 사실을 미리 알게 된 교황청은 강력하게 제지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독일어로 특히 궁중에서 쓰는 고급 언어가 아닌 일반 백성의 언어를 기준으로 번역했습니다. 그 결과 현대 독일어가 탄생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더군요.
많은 언어학자가 언어는 만들어져 가는 도중에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한글도 그렇지 않을까요? 사실 우리 한글의 역사는 세종대왕 때부터이니 결코 짧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한자에 밀려 언문으로 불렸고, 일본 강점기 때기에는 이 언문마저 제약을 받았습니다.
속어라고 해서 무조건 부정할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 속어도 우리의 한글을 만들어가는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더 좋은 우리의 글이 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오늘 수능날입니다. 시험보는 모든 학생들에게 주님 사랑이 가득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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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님의 눈물을 닦아드리자>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비시는 분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주님께 기도하며 청한다고 하지만 그분은 우리 모두의 구원을 바라고 계시며 그 범주에서 벗어날 것을 염려해 우리를 위해 빌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의 구원을 바라시는 그분의 사랑이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의 뜻 안에 머물지 않고 있으니 눈물을 흘리며 안타까워하십니다. 부모가 자식을 염려하는 애끊는 바로 그 마음입니다.
예루살렘도성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마음은 너무도 아프셨습니다. 왜냐하면, 회개의 길을 걸어야 할 사람들, 평화를 갈망해야 할 사람들이 그 본연의 것에는 관심이 없고, 적개심과 더불어 죽음의 길을 걷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참 평화의 길을 걸었으면 좋으련만! 그들의 완고한 마음은 자신의 삶을 돌이킬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멸망의 길을 자초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실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우리의 완고함 때문에 우십니다. 남을 판단하고 비난하는 소리에 우십니다. 평화를 말하면서도 정작 평화를 위해 노력하지 않고 자신의 마음도 다스리지 못하니 가슴이 아픕니다. 자기 잇속을 차리기에 급급한 모습을 보자니 눈물이 납니다. 이기심으로 가득 차서 주님을 생각할 틈이 없으니 참된 평화는 영영 멀기만 합니다. 평화를 원한다면, 먼저 마음의 무질서를 바로 세워야 합니다.
주님께서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해 주신다.”는 약속을 믿는 이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마음의 고요를 누립니다. 시련과 어려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누가 알아주든 그렇지 않든 구애 없이 주님의 뜻을 행하고 그것을 기뻐합니다. 그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른 주님의 참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그 평화를 일찍 알았더라면 그렇게 사사건건 마음의 혼돈을 가져오지는 않았을 텐데 …. 주님께 대한 믿음은 모든 것을 이겨내게 하고 또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사랑은 사랑을 낳고, 미움은 미움을 낳는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게 되고 마침내 구원을 갈망하며, 구원을 살게 됩니다. 주님의 눈물을 씻게 됩니다. 참으로 올바르게 주님을 믿는 이에게는 참 평화가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것에서 평화를 갈망합니다. 재물이나 명예, 건강, 외모, 자식 등이 평화를 가져다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것에 전력투구하며 애를 씁니다. 그렇지만 그런 것들은 영원하지 않고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변합니다. 결국, 그것이 참 평화를 줄 수는 없습니다.
참 평화를 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주님만이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함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지켜주시고, 그것을 믿는 이는 그 안에서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만을 찾지 말고 한 번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귀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오늘은 근본에로 돌아가서 믿음으로 주님의 눈물을 씻겨드리는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웃을 위해 울어줄 수 있는 넉넉한 마음과 주님의 눈에서 눈물을 그치게 해드리고 웃음꽃이 피게 할 수 있는 새 삶이 지금 여기서 시작되기를 희망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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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영원한 롤모델 예수님>
-예수님이 됩시다, 웁시다, 평화가 됩시다-
“오늘 너희는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말라.”(시편95,7.8)
지금은 웃어야 할 때까 아니라 울어야 할 때가 아닐까 싶습니다. 나를 위해서, 너를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세상을 위해서, 지구를 위해서입니다. 비관주의, 염세주의자, 허무주의자가 되라는 게 아니라 참으로 제대로 제정신으로 투철透徹한 의식으로 세상 현실을 보고, 듣고, 살라는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분노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문득 변영로의 “논개”라는 시 첫 연이 떠오릅니다.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맹목적 분노가 아니라 의노義怒와 같은 분노입니다. 정말 값싼 낙관주의는 혐오해야 할 것이요, 주님의 영적 전사로서 치열히 분투의 노력을 다해야 할 때 같습니다. 집무실에서 호탕하게 웃는 예수님 사진을 치운지 오래입니다. 아무래도 복음의 예수님 분위기와는, 특히 오늘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며 우시다”라는 제하의 복음의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문득 떠오른 성규, ‘제7장 겸손에 대하여’라는 장에 나오는 주옥같은 구절들입니다.
“겸손의 열째 단계는, 쉽게 또 빨리 웃지 않는 것이니, 성서에 ‘어리석은 자가 큰 소리를 내어 웃는다’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성규7,59)
“겸손의 열 한째 단계는, 수도승이 말할 때 온화하고 웃음이 없으며 겸손하고 정중하며 간결한 말과 이치에 맞는 말을 하고, 목소리에 있어서 큰 소리를 지르지 않는 것이다.”(성규7,60)
“겸손의 열두째, 단계는, 수도승이 마음으로뿐 아니라 몸으로도 자기를 보는 사람들에게 겸손을 항상 드러낼 것이다.”(성규7,62)
“그러므로 겸손의 이 모든 단계들을 다 오른 다음에 수도승은 곧 하느님의 사랑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이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내며, 이전에는 공포심 때문에 지키던 모든 것을 별로 어려움 없이 자연스럽게 습관적으로 지키기 시작할 것이니, 이제는 지옥에 대한 무서움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좋은 습관과 덕행에 대한 즐거움에서 하게 될 것이다.”(성규7,67-69)
얼마나 참 좋고 아름다운 겸손인지요! 모든 덕의 어머니이자 영성의 잣대인 겸손입니다. 예수님이, 베네딕도 성인이 그렇게 겸손했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 그리스도께 대한 깊은 사랑에서 샘솟는 겸손이요 여기서 나오는 울음입니다. 새삼 자연自然스러운 성聖스러운 겸손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우리의 영원한 롤모델인 예수님을 닮아갈수록 겸손한 사랑, 겸손한 믿음임을 깨닫습니다.
폭력의 악순환입니다. 아무리 동기가 옳고 좋아도 폭력적 방법을 합리화할 수는 없습니다. 마카베오서의 오늘 주인공 마타티아스의 극한 한계 상황에서의 반응을 십분 이해합니다만, 그의 폭력적 방법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본 마타티아스는 열정이 타오르고 심장이 떨리고 의분이 치밀어 올랐다. 그는 달려가 제단 위에서 그 자를 쳐 죽였다. 그때에 그는 제물을 바치라고 강요하는 임금의 신하도 죽이고 제단도 헐어 버렸다.---그때에 정의와 공정을 추구하는 많은 이들이 광야로 내려가서 거기에 자리잡았다.’
정의와 공정의 목적 추구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폭력적 방법은 성공할 수 없습니다. 새삼 지도자의 리더십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무능해서도 안되겠지만 이렇게 마타티아스처럼 과격한 폭력은 피해야 할 것입니다. 성규 겸손의 넷째 단계 말씀이 생각납니다.
“겸손의 넷째 단계는, 순명에 있어 어렵고 비위에 거슬리는 일 또한 당한 모욕까지도 의식적으로 묵묵히 인내로서 받아들이며, 이를 견디어 내면서 싫증을 내거나 물러가지 않는 것이다. 이에 대해 성서에는 ‘끝가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하셨고, 또 ‘네 마음을 굳게 가지고 주님을 견디어 내라’고 하셨다.”(성규7,35-37)
겸손과 인내는 한 실재의 양면이요 궁극의 승리는 겸손과 인내의 사람에 있음을 봅니다. 바로 이점에서 마타티아스의 한계가 드러납니다. 어제 읽은 조선 최고의 성군聖君이라 칭하는 세종대왕의 일화도 생각납니다. 광화문에는 성군聖君 세종대왕과 성웅聖雄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나란히 있습니다. 다음은 ‘세종실록’에 나오는 실화입니다.
“세종의 용인술, 신하들 재능 탈탈 털었다. 세종은 신하들을 절대 그냥 두지 않았다. 조금 심하게 말해 호호백발이 될 때까지 부려먹었다. 임금이 주야장천 근정전에 앉아 있으니 원로대신들까지 퇴근 후 집에 가서도 관복을 벗지 못했다.”
“세종의 총명함과 학문을 좋아함은 천성이었다. 수많은 신하의 이름과 그 사람의 이력, 그 사람의 가계도까지도 한 번 들으면 절대 잊지 않았다. 한 번 신하의 얼굴을 보면 몇 년이 지나도 절대 잊지 않고 기억했다가 ‘아무개야!’하고 이름을 불러 주었다.”
“세종은 게으른 천재가 아니었다. 100-200번은 기본이고, 1100번이나 읽은 책도 있다. ‘주상께서는 수라를 들때도 반드시 책을 펼쳐 좌우에 놓았고, 밤중에도 그치지 않았다’고 기록한다. 세종은 ‘내가 궁중에 있으면서 한가롭게 앉아 있을 때가 있느냐. 책을 읽는 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유익한 것’이라 말했다.”
기사는 다음과 같이 끝을 맺고 있습니다. “천재 임금에 천재 정치가, 천재 관리, 천재 과학자들이 한꺼번에 나타나는 세종시대가 재림하면 얼마나 좋을까요”(주간경향;2021.11.24. 1453호 53쪽).
새삼 나라든 가정이든 사회 공동체든 지도자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공동체의 명운이 달린 지도자의 자질이자 리더십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야말로 우리의 영원한 롤모델입니다. 지도자 없다 탄식할 것이 아니라 우리 하나하나가 예수님이, 예수님의 평화가 되어야 하고, 예수님처럼 울 수 있어야 합니다. 예루살렐을 보고 안타까움에 울으시는 예수님은 오늘 우리를 보고 울으십니다. 바로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울음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은 우리의 평화입니다. ‘평화의 실현’이자 ‘하늘 나라의 실현’인 예수님을 받아들임으로 폭력의 악순환을 끊어 버리는 것입니다. 평화에 이르는 지름길은 평화의 예수님과 하나되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도성을 보고 울으시며 말씀하십니다. 그대로 오늘 우리를 향한 말씀입니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 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감추어져 있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 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다.”
바로 하느님께서 평화의 예수님을 통해 오늘 우리를 찾아 오십니다. 오늘 지금 여기 계신 평화의 예수님을 모시고 우리 모두 하나하나 예수님이, 예수님의 평화가 되어 삽시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예수님, 자비를 베푸소서, 평화를 주소서, 평화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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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평화를 빕니다. 오늘 미사의 말씀은 '주님의 평화'를 추구하라고 이르십니다.
"오늘 네가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루카 19,42)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보고 우시며 말씀하십니다. 안타까움으로 애가 타시는 듯합니다. 하느님의 도성이며 평화의 도성인 예루살렘이 정작 평화에 대해 무지하다니요...
지금 이스라엘은 진정한 평화를 위해 나아가야 할 길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에게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인류를 향해 활짝 열린 계시가 예루살렘의 눈에는 아직 봉인되어 있는 셈입니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루카 19,44)
바로 직전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지요. 사람들은 "호산나"를 외치며 환호했지만, 예수님을 진정한 평화의 왕으로 알아본 이는 거의 없었습니다. 권력과 세도에 흑심을 품은 제자들은 자리 경쟁에 골몰하고 군중은 정치적 메시아를 꿈꾸었지요. 그리고 종교 기득권자들은 자리를 보전하려 음모를 꾸밉니다.
하느님께서 오셨지만 사람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들 관념 안에 새겨진 하느님 상이 각자의 야망과 욕망을 반영하는 탓이지요. 사람들은 예수님이 가난한 이와 약자, 고아와 과부, 병든 이와 소외된 이의 보호자임을 알게 되면 그분에게서 등을 돌릴 것입니다. 힘과 권력, 성공과 재물 등 그들이 바라는 무사 무탈 풍요 안위의 평화와 결을 달리하기 때문입니다.
"그때가 너에게 닥쳐올 것이다."(루카 19,43)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입을 통해 기원후 70년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하여 파괴한 실제 역사를 예견합니다. 세상이 보장하는 평화에 취해 칼을 주러 오신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한 그분 백성은 실제로 많은 것을 잃게 될 것입니다.
제1독서는 다섯 아들과 함께 독립 항쟁을 시작한 마타티아스를 소개합니다.
"당신도 앞장서서 왕명을 따르시오. 그러면 당신과 당신 아들들은 임금님의 벗이 될 뿐만 아니라, 은과 금과 많은 선물로 부귀를 누릴 것이오."(1마카 2,18)
배교를 강요하는 관리들이 마타티아스를 회유합니다. 그가 성읍의 지도자이고 동족의 존경을 받는 큰 사람이어서 그의 배교가 적잖은 파급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임금의 측근이 되고 세속의 재물까지 누리는 삶은 안전하고 풍요롭기까지 할 겁니다. 그야말로 세상이 주는 평화에 길들여지는 삶이지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안에서는 하느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세상 것으로 이미 충분하고 흡족하기 때문에 하느님이 필요 없으니까요.
"정의와 공정을 추구하는 많은 이들이 광야로 내려갔다."(1마카 2,29)
세상이 주는 평화를 거부한 이들은 광야로 떠납니다. 광야는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삶의 결핍과 가난을 껴안는 장소이고 기회입니다. 하느님께 신의를 지키기 위해 광야에 자리를 잡은 이들은 목숨을 걸고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 안으로 들어갑니다.
주님의 평화를 지키는 삶은 종종 세상의 비웃음과 조롱거리가 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이름과 하느님 백성의 정체성을 위해 목숨을 초개같이 내놓고 영육의 가난을 떠안은 이들은 이미 하느님과 닿아 있기에 누구도 그 평화를 빼앗을 수 없습니다.
"평화를 가져다 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나의 평화는 어디에서 오는지 살피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평화의 길을 헛짚고 헤매일 때 슬피 우십니다. 세상이 주는 풍요와 안위에 취해 진정한 평화가 던지는 도전을 외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영혼이 무뎌지지 않도록 마음을 성실히 벼리고 닦아나가는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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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931sQ5MRux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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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루카 19, 42)
평화는
십자가를
닮아간다.
평화는
자기방어가
아니다.
예수님께서
우시며
말씀하신다.
평화를
만들기 위해
예수님의
아픈 죽음이
있다.
십자가 속에
평화가 있다.
사랑이
깊으면
십자가도
깊다.
영원한 것은
십자가의
사랑이다.
자아가
무너져야
숨지 않는
소통의
사랑이 된다.
사랑보다
욕심이
앞에 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신 때를
우리가
알지 못한다.
하느님께
머물 수 없는
우리들
아픔이다.
아픔이
욕심이다.
예루살렘을
내려놓아야
예루살렘이
보인다.
위령성월은
우리가 무엇을
내려놓아야
할지를 다시금
일깨워준다.
예루살렘이
폐허가 된다.
무너져야
다가설 수 있는
은총이다.
평화의 관계는
참된
사랑의
관계이다.
우리가 사랑한
욕심의
모든 것들이
무너져내린다.
무너져야
다시
보게 된다.
우리가
잊고 사는
평화이다.
하느님과
함께하는
평화이다.
막을 수 없는
평화이다.
오늘 우리의
참된 평화가
이 하루를
새로이 여신다.
평화는
십자가와 함께
사는 은총이다.
평화의 기쁨!
바로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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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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