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매일 시니어문학상 수상작] 논픽션 부문
박정화 (시인. 수필가) 대구 출생 2004년 수필집 「복사꽃 지는 소리」 2020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 공모전 수필 문학상 수상 2021 매일신문 시니어 논픽션 공모전 문학상 수상 2020 2021 경북일보 문학대전 수필 입선 --------------------------------------------------------------------------------------
버즘나무 댁
박정화
“뜨겁다 빨리 나온나 집에 가자”
1200도의 불 속으로 그를 밀어 넣었다. 컴컴한 수렁 같은 화구 속을 들여다보며 목이 터지도록 그를 불렀다. 영혼도 불에 타는지 그렇게 혼을 불러내야 한다고 화장장의 늙은 인부가 일러 주었다. 넉넉하게 얹어준 저승길의 용돈으로 기분이 좋은지 화장장의 인부는 실실 웃고 있었다. 내 속에서도 1200도의 불길이 솟고 있었다. 마스크를 벗어 던져 버렸다. 이 부당한 죽음 앞에서 살겠다고 마스크를 끼고 있는 내 모습이 너무 숨이 막혔다. 누가 풀무질을 하는지 울화가 불길처럼 일어난다. 그녀를 보내는 여름날은 태풍 마이삭이 미친 듯 북상하고 있었다.
죽을힘을 다해 버티고 있던 나무가 쓰러졌다. 한차례 분탕질을 치다가 시침을 뚝 떼고 있던 바람이 목쉰 휘파람을 불며 내려꽂힌다. 금방이라도 와락와락 달려들어서 남김없이 부숴버릴 것 같은 분노는 폭발하듯 휘몰아친다. 세상의 마지막처럼 불어대는 바람 앞에 쓰러진 나무 한 그루는 우리 집 앞 도로에 서 있는 흔한 가로수 버즘나무였다. 밤새 태풍과 싸우면서 명줄을 잡고 있던 나무는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 허연 뿌리를 하늘로 솟으며 누워있는 버즘나무의 모습에서 나는 그녀의 모습을 보았다. 죽지 않으려고 아직은 죽을 때가 아니라고 얼마나 애원하고 바들바들 떨었을까. 어느 죽음인들 당연한 죽음은 있을 수 없겠지만 그녀의 죽음만큼은 왜 그리 부당하고 억울한지, 이승과 저승의 사이를 그녀 혼자 견디고 있었을 시간이 너무도 애처로웠다.
그녀는 버즘나무의 얼룩같이 얼굴과 온몸에 얼옻을 달고 있었다. 얼룩얼룩한 하얀 반점이 버즘나무 같다고 남편이 붙여준 별명이 택호가 되어 버렸다. 한길의 가로수로 서 있는 일명 플라타너스라는 나무의 모습과 그녀의 얼굴은 너무 흡사하다. 그녀의 전신에 분포되어있는 얼 옻은 의학적으로는 곰팡이균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녀는 병원 한 번 가보지 못하고 평생을 얼옻을 달고 살았다. 버즘나무의 얼룩덜룩한 껍질처럼 그녀의 모습도 얼룩덜룩하고 그녀의 삶도 버즘나무 껍질처럼 거칠거칠하다. 크림 한번 발라보지 못한 그녀의 척박한 얼굴처럼 그녀의 팔자도 참으로 척박했다.
세상에서 가장 못생긴 아이로 태어난 것도 모자라 얼옻까지 주렁주렁 달려 있으니 여자의 모습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흑인처럼 검은 피부에 입술은 툭 튀어나오고 머리까지 곱슬 이라서 누구든지 외면하고 싶은 흉한 모습을 하고 있다. 얼마나 깊고 길면 바늘과 실 같아서 바느실 골짜기라고 불리는 산골에서 입하나 덜자고 먼 친척 집으로 보내진 게 열다섯 살이었다. 그 후 형제와 부모의 소식마저 단절되어 버리고 이어진 끈이라고는 우리 집뿐이었다. 태어난 이후부터 세상을 떠나던 그 순간까지 그녀는 한 번도 행복이란 것에 선택되어보지 못한 여자였다. 태어났으니 살아갈 수밖에 없는 지독한 그녀의 삶은 이번 생으로 끝나기를 빌어본다. 그녀는 나의 팔촌 언니였고 이름은 늠이였다.
“빨리 들어오이라 안들어 오고 머하노”
모시 적삼이 땀으로 젖은 아버지의 뒤에 조그마한 보따리를 움켜 안은 낯선 처녀가 서 있었다. 나는 용수철처럼 퉁기듯 일어나 공 구르듯이 뛰어나갔다.
“세상에 이럴 수가 옴마야” “깜디 아이가, 기가 막히네” “아부지 또 새 여자 들어오는 거 맞지예?
나의 서슬이 담을 넘어서고 엄마는 담 너머 먼 하늘만 보고 있었다
“저리 비키라 고마, 니가 머를 안다꼬”
아버지는 요상 하게 생겨 먹은 처녀를 데리고 뜨락으로 올라선다. 뭐가 그리 당당한지 큰소리마저 친다.
“물 한 사발 떠 온나 목말라 죽겠다”
마당의 쫑이도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할 뿐이다. 이 상황이 의아한지 그 처녀의 생김새가 짐승의 눈에도 이상한지 고개를 갸웃거린다. 댓돌 위에서 물 한 사발을 단숨에 들이킨 아버지는 요상 하게 생긴 처녀를 손짓한다.
“야야 여 와서 할매한테 인사 드리라” “어무이요 야가 영일에 사는 육촌 행님의 맞이 아입니꺼 밥이나 멕여 달라고 부 탁을 하길래 데불고 왔심더 우짜겠습니꺼.”
할매는 담뱃대만 놋쇠 재떨이에 땅땅 떨고 엄마와 나는 쿵 하고 심장이 마당으로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다.
“우리 아부지가 인자 미쳐 부렀구나 우짤라고 저런 여자를~”
우는 게 웃는 것 같고 흑인 같은 피부에 입술마저 툭 튀어 나와서 못생겼다 하기도 송구하리만큼 추한 모습이었다. 거기다 열다섯 살이라 하기는 너무도 조숙한 처녀였다. 우리는 아버지가 미쳐서 저런 아이까지 첩으로 데리고 왔다고 아연실색을 하고 있었다.
희대의 카사노바였던 아버지는 철 따라 여자를 바꿔가며 데리고 온다. 새로운 여자가 아버지의 허리춤을 잡고 들어오는 날이면 엄마는 분홍색 깃을 댄 명주이불을 하루 왼 종일 만들고 있고 할매는 ‘썩을 놈 죽일 놈’ 욕을 리듬 삼아 옥색 사기요강을 닦고 또 닦았다. 어둑사리가 슬금슬금 눈치 보듯 댓돌 위를 기어오르는 시간이면 문간방으로 엄마의 명주 이불과 할매의 요강이 들어가고 어린 나의 눈에도 꽃같이 예쁜 색시가 그 방으로 든다. 헛기침 뱉으며 슬그머니 아버지가 그 방으로 숨듯 들어가면 엄마는 소리 없이 대문을 빠져 나와 뒷산으로 오른다. 어린 나를 끌어안고 밤이 이슥하도록 토해낸 엄마의 한숨은 몇 번쯤이었을까. 복사꽃 피던 봄밤의 처연했던 엄마의 모습은 아직도 내게 아픔으로 각인되어 있다. 문간방에 불이 꺼질 때까지, 쫑이가 아버지의 구두에 주둥이를 박고 잠들 때까지, 엄마는 움직일 줄 모르는 망부석처럼 앉아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엄마의 몸에서 담배 냄새가 짙어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해되지 않는 그 시절의 우리 집 풍경이다. 열 손가락을 꼽아도 모자랄 만큼 수많은 여자가 다녀갔다. 그러한 시절 그녀가 아버지의 여자가 아니라는 게 참 다행이긴 하나 그때부터 그녀와 내가 한방을 써야 한다는 사실 앞에 당혹스러웠다. 그녀가 내 옷을 세탁하고 내 도시락을 싸준다는 것은 너무도 끔찍했다. 너무도 못생긴 그녀의 외모는 불결하기까지 해서 벌레 보듯 했던 나의 오만을 오롯이 그녀가 겪어야 했던 시절이었다. 머슴과 할매와 일꾼들, 많은 식구를 건사해야 하는 엄마에게 그의 출현을 고마워해야 할 부분이라는 걸 모르고 있었다. 그 후 내가 그녀에게 가했던 표독과 심술들은 지금까지 많은 후회와 반성으로 남아있는 부분이지만 그때 나는 열세 살 풋사과 같은 소녀였다고 변명을 해본다. 그녀의 웃음을 본 적이 있었던가 전혀 기억이 없다.
그녀를 만나러 가고 있다. 아니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녀의 집으로 피 접을 가고 있다고 해야 하는 게 맞다.
“늠이네 집으로 가거라 아~들 걱정은 잊어뿌고 한참 쉬다 보면 맴 정리가 되지 않겠나. 전화 넣어 놨응께 창지까지 깨끗하게 씻고 오이라.”
엄마에게 등 떠밀려 여기까지 오면서 나는 과연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내 상처에 피가 동이동이 쏟아질 것 같아서 내 가슴만 싸매고 오느라 옆도 뒤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그것이 얼마나 오만한 이기였나를 그녀의 삶에 들어와서 알았다. 불혹의 중간지점에서 고만고만한 아이들 셋을 끌어안고 홀로서기를 해야 하는 중압감에 나는 철퍼덕 앉아 버렸다. 일어서야 할 지팡이 하나 없었다. 고만고만한 아이들 셋과 살아야 할 방법마저 모르는 불안을 안고 있었다. 생채기가 나도록 할퀴며 살았던 사람이라 하더라도 갑작스러운 사별 앞에 서버린 나의 당혹감은 무기력하고 대책이 없는 우울로 나를 끌고 갔다. 커튼을 무겁게 내리고 현실을 밀어내며 모든 것과의 단절을 원하던 지독한 우울 앞에 엄마의 처방은 나를 그녀에게로 보내는 것이었다. 그녀와 헤어진 지 몇 년 만인지도 모른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나는 그녀에게 한 번도 안부를 물어보지 않았다. 잊어버린 그녀의 집으로 가는 유월의 하늘은 왜 그리도 푸르던지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친척 언니가 아닌 우리 집 식모였다. 한 번도 그녀에게 언니라고 불러주지 않았다. 나는 갑이었고 그녀는 철저한 을이였다. 집안의 자잘한 일들은 모두가 그녀의 차지였고 당연한 줄 알았다. 나는 공주였고 그녀는 나의 시녀라는 게 정해진 운명인 줄 알았다. 항상 윗목에서 동그랗게 몸을 말아 안고 잠들던 그녀였다. 숨 한번 크게 쉬는 걸 본 적이 없었다. 그녀의 눈은 항상 아래를 보고 있었다. 나는 한 번도 그녀에게 살갑게 대해 본 기억이 없다. 그녀의 추한 얼굴이 부끄러웠다. 그리고 우리 집 간장 단지 같은 그녀의 뚱뚱한 몸도 내 친구들에게 챙피스러웠다. 친척 언니라는 걸 누구에게도 부정하며 밥도 같이 안 먹고 쳐다보지도 않고 철저하게 무시하던 어린 날이었다. 그녀가 스무 살이 되던 해 엄마의 주선으로 시집을 갈 때까지 나는 그에게 군림하는 존재일 뿐이었다. 아니오 라는 말을 모르던 사람이다. 네 하는 대답만 아는 사람이다. 그녀의 삶은 그렇게 길들여 저 있었다. 우리 집 마당에 차려진 초례청에 선 그녀를 본 게 마지막이었다. 산 밭을 일구며 산다는 도둑놈같이 생긴 그녀의 신랑과 우리 집을 떠나간 후 나는 그녀를 잊고 살았고 내가 그에게 가했던 악행들도 잊어버렸다. 우리의 인연은 그게 끝인 줄 알았다. 그러나 가끔 그녀가 떠난 후 살강 위에 얹혀있던 퇴색된 누런 가방이 눈에 밟혔다. 명료한 감정은 아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있어야 할 무엇인가가 없어진 빈자리 같은, 약간의 허전함이 아닐까 생각했다. 오 년이란 동거가 무시할 세월은 아니라고 생각을 하지만 그때는 그게 무슨 마음이었는지 몰랐다. 가끔 한숨 묻은 엄마의 푸념 속에서 그녀의 일상이 비극으로 흘러나오긴 했지만 내겐 옛날이야기 한 자락쯤으로 치부되고 말았다
중학교 2학년 봄이었다. 엄마와 그녀가 항상 모든 걸 챙겨 주는 게 습관이 되었는지 그날도 도시락 챙기는 걸 잊고 등교를 했다. 그날 역시 그녀가 다림질해준 교복을 낚아채듯 입고 갔다. 오전 수업 끝난 직후였다. 도시락 때문에 걱정을 하고 있을 때였다. 교실 문을 드르륵 열고 도시락을 든 그녀가 들어서고 있었다. 나는 어디론가 숨어 버리고 싶었다. 쭈뼛쭈뼛 나를 향해 오는 그녀를 확 밀어 버리고 교실 밖으로 도망을 쳤다. 얌전하게 나의 책상 위에 도시락을 두고 돌아가는 그녀를 숨어서 바라보며 나는 울고 있었다. 왜 그리 창피하고 부끄러웠을까? 우리 집 식모라는 소리를 수십 번도 더 하고 절대로 나의 친척이 아니라는 걸 수도 없이 말을 했다. 그러나 친구들은 다 알고 있다는 듯 실실 웃고만 있었다. 그날 끝까지 그 도시락을 먹지도 않고 가져와서 그녀 앞에 집어 던져 버렸다. 고픈 배를 참아가며 무슨 오기였을까? 그때의 표독을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그녀에게 한마디 사죄도 없이 오랜 공백을 넘어 나는 어떻게 그녀의 삶 속으로 올 수 있었을까.
“어서온나 덥제?”
덥석 손을 잡지도 않는다. 역시 웃지도 않는다. 어느 월세방 싸구려 벽지 같은 포프린 몸빼바지를 입고 우는 듯 웃는 듯 찡그리고 서 있다. 나 역시 눈을 마주할 수 없어 하늘만 보고 섰다. 그녀의 옷에서 쉰 술빵 냄새가 나고 있었다. 이곳까지 온 나를 후회하긴 늦었다. 나를 내려놓은 버스는 천식 기침 뱉어내듯 털털거리며 황토 먼지 속으로 떠나고 이미 그녀가 내 가방을 들고 산비탈을 오르고 있었다.
잠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암담함이 산 그림자처럼 나를 짓눌렀다. 말없이 따라 오르는 나를 기다려 주는 듯 섰다가 다시 걷는다. 슬쩍 쳐다본 그녀의 얼굴은 옛날보다 더 심한 얼 옷이 피어 있었다. 푸른 수트를 입은 것 같은 유월의 산은 런 웨이를 걷는 모델 같다. 뽕나무밭에는 여인네의 젖꼭지 같은 검은 오디가 가지가 휠 듯이 달려 있고 그들의 산 밭은 기름을 부은 듯 윤기가 나게 가꾸어져 있었다.
분통만 한 방이었다. 내가 온다고 준비를 했는지 새로 산 것 같은 조그마한 경대 하나가 윗목에 놓여있고 남자가 만들었을 것 같은 나무 책상 하나가 세간의 전부였다. 살강 위에는 올이 굵은 삼베이불이 얹혀있고 기름 먹인 것 같은 오래된 돗자리가 깔려 있었다. 정갈 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녀의 냄새와는 또 다른 냄새가 났다. 산이 주는 냄새일 수도 있겠지만 그녀의 마음이 주는 정갈함 같아서 조금 낮 설었다. 먼 옛날 잠들어 있는 그녀를 벽 쪽으로 밀어붙이며 멀리 떨어지라고 소리 지르던 어린 나를 회상하며 세차게 도리질을 했다. 내 방에서 밤새 뒤척거리며 편안한 잠을 자지 못했을 것을 왜 이제야 생각하게 되는 것일까. 공주병에 걸려 자기를 학대했던 계집애의 불행이 고소하지 않을까? 그녀와 나의 어린 날을 생각하며 싱그러운 유월의 산 밭에서 나는 또 우울의 늪으로 빠졌다.
“쪼매 쉬고 있거라”
나지막한 말 한마디 남겨놓고 산 밭으로 종종걸음 걷는 그의 등 뒤에서 유월의 산바람 한줄기가 살랑이며 들어왔다. 정갈한 삼베이불에 어깨를 감아 안고 비스듬히 기대앉아 스르르 잠속으로 빠져들었던 것은 뻐꾸기의 긴 울음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흙내가 폴폴 날아다니는 조그마한 토방이 초라한 나를 숨기기에 맞춤이어서 그런 건지, 내 상처의 진액이 마르는 소리를 듣는 것 같았다. 한 번도 언니라 불러주지 않았던 그의 삶 속에 들어와서 이렇게 달콤한 오수에 빠질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지만 충분한 산소를 마신 것처럼 마음이 개운해지고 있었다.
“고마 일어나라 밥 묵자”
열다섯 살 속의 그가 아닌 너무도 더 늙어 버린 중년의 산골 여인이 나를 깨우고 있었다. 산 밭에 걸음의 간격이 느린 초여름 저녁이 내려앉아 있었다. 뭘까? 지금의 이 편안함은, 이렇게 편해도 되는지 잠을 깨우는 그의 손길이 고향 같았다. 어쩌면 나의 기억 속에 그의 온기가 저장되어 있었을까? 밤눈 어두운 사람처럼 더듬거리며 나서는 데 한 무더기의 짓푸른 향기가 와락 가슴에 달려든다.
“오니라고 욕봤소”
화가 잔뜩 난 것 같은 그녀의 남편을 저녁상과 함께 만났다. 오가피 순, 가죽나물, 각종 산나물과 막걸리 한 주전자가 양은 상 위에 올려져 있었다. 형부가 되는 사람이 떫은 감 씹은 얼굴로 왜 왔느냐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대패질도 안 된 송판 몇 장으로 얼기설기 엮어놓은 마루에 앉으라는 인사도 없이 벌컥벌컥 막걸리를 마시고 있는 그의 남편과 차마 저녁상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밥 생각 없다고 토방으로 건너왔다. 가시처럼 찌르는 눈빛이 등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가끔 흘려들었던 그녀의 일상이 그제야 기억나기 시작했다.
“팔자 도망은 못 한다 카드마는. 도적놈, 썩어 뒈질 놈, 그리도 두들겨 팬다 카더라. 우째 살겠노, 불쌍한 늠이를 우짜모 좋겠노, 다부 데불고 올수도 없고, 에이그 쯧쯧”
당장 내일 아침에 첫 버스로 돌아가리라. 불도 켜지 않고 우두커니 앉아 어쩌면 처음으로 그녀의 삶 속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보다 더 아픈 것 같은 그녀의 삶과 만나고 있었다. 버거운 내 삶 위에 더 무거운 그녀의 삶까지 다가왔다. 작은 쟁반 위에 나물 한 접시와 밥 한 그릇을 들고 조금 이슥한 시간에 그가 토방을 들어섰다. 알전구 불빛에 서로의 시선이 거북해서 눈길을 피하면서 마주 앉았다.
“니는 늙지도 않았구마 고등학생 가시나 같다 아이가”
“씰데없는 소리 고마해라”
마음과는 달리 툭 던지는 내 말에 미안한 듯 나 역시 고개를 숙였다.
잊었던 냄새가 훅 전해진다. 땀 냄새와 반찬 냄새와 빨랫비누 냄새 그리고 흙냄새까지 그 모든 것들이 옹 집 되어있는 시큼털털한 냄새를 그리도 싫어하던 나의 어린 날이었는데 마주앉은 나에게로 폴폴 스며드는 그 냄새가 어쩌면 친숙한 느낌이었다. 오류였던 나의 지난 삶이 많은 걸 깨우쳐 주었는지 어느새 나는 그녀의 삶을 연민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감정과 상관없이 나의 허기는 밥 한 대접을 다 비워냈다. 얼마 만에 가져보는 포만감일까. 건너가지 않고 미적거리는 그와 무슨 말이 던 해야 하는 데 오랜 세월의 빈 공 간을 어디부터 열어야 할지 애꿎은 손톱만 뜯고 있었다.
“막걸리 한 병 없나? 아까 그 사람 마시는 것 같던데~”
깊은 산골이라 아직 취나물이 여리다며 새파랗게 금방 데친 나물 한 접시와 막걸리 두 병을 들고 들어선다. 몇 잔의 막걸리가 침묵 속에서 비워졌다. 쟁반을 마주하고 앉아 마음을 조금씩 게워내기 시작할 때 달빛은 어찌 그리도 곱던지, 사르르 마음이 달빛에 씻기고 있었다. 누에는 석 잠이나 잔다는데 사람인 나는 반 잠도 자본 적이 없다며, 가슴에 돌덩이 같은 게 너무 많아서 죽으면 부처님 사리 같은 게 나올지도 모르겠다고 그녀는 가슴을 쳤다. 학부모들 부를 때도 절대로 학교에 못 오게 하고 졸업식 때도 어미가 오면 죽어버리겠다고 하는 자식들이라며 내 새끼가 아니라고 도리질을 했다. 열다섯 나이에 너희 집으로 식모살이 갈 때 네가 아무리 날 미워해도 네가 너무 예뻐서 밉지가 않더라 했다. 다시 환생하면 너처럼 예쁘게 태어나는 게 소원이라고 웃던 그녀였다. 나는 그날 밤 그녀를 끌어안고 미안하다고 백번쯤 빌었던 것 같다. 그 날밤 막걸리 몇 잔에 그와 내가 풀어낸 회한으로 산도 잠을 설쳤으리라 생각된다. 그녀와 나의 암묵적이던 오랜 세월의 침묵이 스르르 풀어져 버렸다.
쨍그렁 쾅쾅! “썩어 뒤질 년 엊저녁에 내 적삼 데리 놓으라꼬 캣나 안캤나. 귓구녕에 쇠 말뚝을 처 박았나. 넘이 말 할때는 귓구녕을 영천 장에 보냈나. 첫차 놓치모 니 년 이 걸어서 읍내 꺼정 같다 올끼가?”
스랑을 집어던지며 거품을 물고 욕을 하고 있는데도 정지문을 붙들고 선 그는 하늘만 보고 섰다. 낯설긴 하지만 자기의 처제가 되는 사람이 손님으로 와 있는데도 연신 칠 듯이 설쳐댄다. 외면하고 뽕밭 둔 턱으로 내려섰다. 산 허리춤에서 안개가 아직도 잠을 자고 있는지 자욱한 회색의 아침이었다. 그놈의 인간은 아직도 패악질을 멈추지 않는다.
“낯짝에는 버짐이 주렁주렁 붙어서 입인지 똥구녕 인지 분간이 안되는 년 저런 년이 사람이라고 입 구멍에 밥숟가락 처넣는지 말귀도 못 알아듣는 저런 년을 귀신도 무심하제 와 안 잡아가노”
숯불이 내 속처럼 이글거리는 다리미를 쥐고 대꾸 한마디 없이 적삼을 다림질하는 그녀를 보며 이곳으로 나를 보낸 엄마를 원망하고 있었다. 패악질하는 남자의 등 짝을 후려치고 싶은 울분을 다스리는데 익숙한 광경이 내 머리에 포개어지며 나락으로 떨어진다. 지금은 가고 없는 내 남편이었던 사람의 모습과 무엇이 다를까. 가슴을 치며 내 삶을 물어내라고 악착을 떨던 나의 모습과 수행하듯 다림질을 하는 그의 마음이 무엇이 다를까 그녀의 기막힌 삶을 만나라고 엄마는 나를 이곳으로 보낸 것일까. 어쩌면 이 모든 것들이 그녀와 나의 인연이 처음 시작 되었던 그곳에서 예비 된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우리들의 이 고통이 내 아버지의 지독한 이기의 꼭짓점에서 시작된 것 같은 생각으로 아침의 안개가 내 머리까지 스멀거렸다. 엄마가 반대했던 그녀의 결혼이었다. 옥답도 아닌 산 밭 몇 뙈기 부쳐 먹고 사는 사람이라 반대를 했다고, 더구나 심성도 고와 보이지 않는 사람이라서 반대를 했으나 아버지의 호령에 어쩔 수가 없었다고 늘 후회하고 있었다.
“지지리도 못생긴 지집아를 누가 데꼬 갈끼고. 데불고 갈놈 있을 때 보내야지 시집도 못가 본 처녀 구신 만들랑가.”
아버지의 말은 곧 우리 집의 법이었던 시절이었다. 열아홉의 꽃이 하르르 지던 날 나의 오류도 시작되었다. 아버지의 완고한 이기로 대학교를 포기하며 내 삶도 포기했는지도 모르겠다. 문학을 하겠다고 바락바락 아버지를 기어오르던 내게 아버진 하나뿐인 외동딸을 밀어내며 내 인생을 아버지의 생각으로 포인트를 맞추고 있었다
“문학은 무신~ 가시나가 공부 많이하모 팔자가 사나워 못씬다 조신하게 바느질이나 배우다가 시집 가야제 씰데 없이 공부는 무신놈에 공부 쯧쯧”
당신은 처첩을 둘씩 셋씩 거느리며 그 시대에 턴테이블에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사는 신식 사람이었다. 여자는 공부를 많이 하면 팔자가 사납다는 아버지의 사고는 흔들릴 수 없는 고착된 생각이었다. 나의 어떠한 반항도 엄마의 간곡한 애원과 부탁도 아버지를 꺾을 수가 없었다. 시대를 원망하는 건 나중의 일이었다. 어쩔 수 없는 나의 팔자가 그때 아버지의 이기로 예비 되지 않았나 싶다. 그녀와 나는 동병상련의 아픔을 느끼며 그 날 아침 우린 어색했던 침묵에서 나올 수 있었다.
“손바닥만 한 화전을 이만큼 금 싸레기 밭으로 맹글어 논 게 뉘긴데 저 혼자 잘나서 그란 줄 아는 인간이다. 지나 내나 글 한 자 모르는 거는 마찬가진데 눈곱 만큼도 잘난기 없음시록 욕질에 매질에 ~새끼들도 지 에미 무시하는 건 딱 지 애비 닮았더라, 그란들 우짜겟노 내가 워디 갈데가 있어야제 이 꼬라지를 하고는 어디가서 식모 살이도 못한다 아이가 우짤 수 없이 참고 참고 살아야제. 목심이 웬수구마"
막걸리 한잔에 생전 처음으로 속내를 울컥울컥 토해내던 그녀였다.
“신발 벗고 도망 댕기도 팔자 도망은 못 한다 카더라. 그란데 늦었지마는 그 팔자 도망 을 한 번만 해 보고 죽으모 한이 없겠구마”
“내 같은 것도 사는데 맴 단단이 묵고 얼릉 몸을 추스리라 아이들 때문에라도 일어나야 안되것나 정신 채리라 그리 이쁘고 똑똑하던 니가 팔자가 와 이렇노”
훌쩍거리며 내 손을 잡던 그녀의 치마폭에 그만 엎어지고 말던 그 날 밤, 물먹은 솜 같던 내 마음이 가벼워 지고 있었다. 삶을 팽개치고 싶던 그 시간에 그곳은 분명 내게 커다란 동아줄 같은 희망이었다.
그녀의 남편 패악질이 있던 그 후 산 밭의 토방에서 거의 한 달을 머물렀다. 밥 먹듯 부리는 남자의 욕질은 모른 척 외면했다. 그가 해주는 나물밥과 세심한 배려의 손길과 산이 주는 안락함 속에 묻혀 조금씩 생의 촉수가 자라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시장기처럼 내 삶이 고파오고 아이들이 밟혀올 때, 가방을 챙기는 내 등을 가만히 쓸어 주는 그녀. 상상도 하지 못할 그녀와 나의 관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터닝 포인트가 되었던 산 밭의 그 후 나는 그녀를 언니라 불렀고 오랜 세월까지 나는 그의 동생으로 그는 나의 언니로 의지하며 위로하며 살고 있었다. 항상 바빠서 사는 게 폭폭 해서 전화마저 소홀한 내게 감자며 옥수수며 산에서 나온 제일 좋은 것들을 한 아름씩 보내오는 엄마 같은 그녀였다. 아프면 오라고, 언제든지 와서 쉬어 가라고, 다독이는 나의 엄마였다. 사건이 일어난 그 날까지 아프면 아픈 데로 참으며 견디며 우린 그렇게 살고 있었다.
“그 사람 거 안 갔능교?”
이제는 매질할 힘도 없다는 다 늙어버린 형부의 전화가 이른 새벽을 두드렸다. 갈 곳은 우리 집뿐인데 대체 어디 갔을까? 행방을 알 수 없었다. 손전화기도 꺼져있고 집 나간 지 사흘이라고 했다. 버즘나무 같은 그 얼굴로 집을 나선다는 건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언니였다. 일년에 한 번쯤 우리 차를 타고 우리 집을 다녀가는 것 외엔 서울 구경 한 번마저 손사래를 치던 언니였다. 산 밭과 집 외엔 언니의 삶과 연관되는 곳이 전혀 없었다. 늙어도 성질은 못 버리는지 형부는 전화기가 들썩거릴 정도로 고함을 질러댄다.
“은행 갈 줄도 모리는데 돈 찾아갔다고 카더라 이년이 뒈질라꼬 노망이 났다. 적금도 찾고 아래 밭 팔아 둔 것도 내 도장 갖고 가서 찾아가고 도대체 이기 무신 일이고 빨리 좀 내리오소 나는 해결 할 수가 아이가. 새끼들은 아직 모른다 알모 난리가 뒤집어 질끼다, 아~들 알기 전에 얼릉 찾아야 할낀데,”
은행 업무는 언니의 능력 밖이라는 걸 우리는 다 알고 있다. 삼 자의 개입 없이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 일어났다. 칠십 후반의 언니에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마음이 먼저 달려가고 있었다. 세균전이 태풍처럼 휩쓸고 있는 펜데믹 시대에 어떠한 바람이 휘몰아칠지 두려운 걸음이었다. 몸빼바지를 입고 기다려야 할 언니 대신 북유럽풍 호텔 앞에 몇십 년 더 늙어 버린 것 같은 형부가 서 있었다. 세상의 멋진 도시를 옮겨 놓은 것 같은 비탈이 아직도 낯설었다. 바람 나다니는 길목에 차들이 바람처럼 다니고 샹송이라도 흘러나올 것 같은 레스토랑이 언니의 산밭을 침식하고 있었다. 덕분에 부자가 되어버린 형부와 두 아들은 어깨가 올라가고 읍내 네온이 화려한 술집에서 사장님의 대우를 받는다고 가끔 언니의 걱정 같은 푸념이 있었다. 노을을 등지고 호텔로 들어서는 남자와 여자를 쳐다보며 늙은 형부는 부러운 눈빛을 흘리고 있었다.
“집에 올라갈 것도 없고 따라오소”
양복 입고 짚신 신은 것처럼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카페를 들어선다. 언제부터 친해 졌는지 주인인지 종업원인지 젊은 여인의 호들갑스러운 환대를 받으며, 내 집처럼 편안하게 커피를 시킨다.
“라뗀지 뭔지 그거 두 잔 주소”
내 입맛은 물어보지도 않고 일방통행이다. 막걸리만 마시던 입으로 라떼를 후후 불어가며 마시는 형부의 거들먹거림이 그간의 상황을 말해주었다.
“양복 입은 사람들이 가끔 집에 다녀가는 걸 봤다 카드마는 나는 그것밖에 모른다. 책임지고 찾아주소. 바람 넣을 사람은 처제 밖에 없는기라. 이 인간이 누구를 믿고 이런짓을 하겠능교. 뻔할 뻔자 아이가. 언니야 찾든지 말든지 내 돈만 돌리주라 카소.”
“삼사일 된 사람을 실종신고를 하는 건 좀 그렇고 하루 이틀 더 기다려보소. 아지매가 화가 나서 가출했는지도 모른다 아닙니꺼. 영감님하고 쌈하고 나갔는 갑네.”
실종신고 하러 간 사람의 절박한 심정도 모르는 듯 시골 경찰의 안일하고 판에 박힌 말을 듣고 화가 났으나 며칠 더 기다려보자고 겨우 달래 놓았다.
산은 어둠에 들지도 않았는데 별빛보다 더 반짝이는 불빛들로 산이 꽃처럼 피던 어느 날이었다. 도시가 되어버린 산비탈에서 왜 아직도 몸빼 바지를 벗지 못하냐고 눈을 흘기는 내게 내 주제에 이것도 과하다며 같이 눈을 흘기던 언니였다. 언제부터 와 있었는지 읍내 사는 큰아들놈이, 나를 보고도 인사 한마디 없이 못 볼 걸 본 것처럼 가래를 캭 하고 뱉으며 산 아래로 내뺀다. 기름지던 산 밭은 분명 아니었다. 농사를 작파한 아들놈과 남편은 밭농사를 팽개치고 번갈아 가며 읍내를 드나들고 있다고 아들놈 뒤에서 힘없는 주먹질을 하고 있었다. 아마 언니는 아무도 모르게 그때부터 준비를 하였을까? 그러나 팔십을 바라보는 노인이었다.
음성 메시지를 수도 없이 남겼다. 살아 있으면 들을 수 있을 것이고 나에게까지 숨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언젠가 내게 한 말을 생각하며 뭔가 약간의 실마리가 풀어지는 것 같았다.
“언젠가는 갚아 줄끼다. 냄편이고 자식이고 다 원수 같은기라.”
맞아서 갈비뼈가 두 대 부러졌다고 압박 붕대를 칭칭 감고 있는 언니를 우리 집으로 데려오던 날이었다. 어쩌면 언니의 이해 못 할 지금의 행보는, 갚아줘야 한다는 그때가 아닐까? 어쩌면 약간의 안도마저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이후 언니의 얼굴을 한 번도 볼 수가 없었다. 산 밭에서 키운 배추라서 달다고 겨울 김장을 차에 실어주던 작년 가을, 손을 흔들고 섰던 노을 속 모습이 마지막 기억으로 저장되어 있다. 1200도의 화구 속으로 언니를 밀어 넣으며 끓어 오르던 울화를 삼키던 그 날까지 이별의 연습도 없었는데~ 언니는 그렇게 갔다.
언니가 보낸 장문의 편지가 도착한 날은 코로나 19가 전국을 강타하고 있는 여름이었다. 누가 대필을 했는지 A4 용지 두 장의 분량으로 그동안의 과정과 지금의 상황과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하여 소상하고 담담하게 적혀있었다. 대필한 사람의 성격이 보일 정도로 언니의 심적 묘사가 세밀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언니의 편지를 쥐고도 언니를 만나러 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발신지의 우체국 소인을 보고 찾아간다는 것도 그렇지만 그 도시는 코로나 19의 잠식으로 거의 고립되어 있었다. TV에서 연일 그 도시의 상황을 대서특필하고 있었다. 전국이 세균전이란 거대한 회오리바람 앞에 대문의 빗장을 걸고 마스크를 낀 상태로 살고 있었다. 납 득이 되지 않고 이해는 더구나 불가한 이 현실을 세게는 펜데믹 시대라고 했다. 내 친정이 있고, 내 형제가 살고 있고, 나의 언니가 그곳 어딘가에 있다는데 아무도 만나러 가지 못하고 꼼짝없이 갇혀 버렸다.
“걱정하였을 줄 알지만 나도 많은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이니 너무 서운하다고 생각 말거라.”
누가 썼는지 간결한 문장으로 언니를 대변한 편지를 읽으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너도 알다시피 나는 한 번도 내 삶을 살아 본 적이 없었다. 신의 저주인지 너무도 흉하게 생긴 내 몰골 때문에 태어나면서부터 이때까지 고개를 들어보지 못했다. 누구에게도 사랑이란 걸 받아보지도 못하고 누구를 사랑해본 적도 없이 평생을 살아왔 다. 남편이나 두 아들도 내겐 남보다 더 못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나는 갈 데가 없어 서 천대와 멸시를 받으면서도 그곳을 나올 수가 없었다. 죽으라고 일궈놓은 그 곳에 도 로가 생기고 관광지가 생기더니 평생을 바쳐 만들어 온 산 밭들이 비싼 값으로 팔리기 시작하더라. 농사밖에 모르던 남편도 자식새끼도 돈에 환장한 것처럼 읍내 술집으로 돌 기 시작하고 조금씩 산 밭은 어느새 반 토막 나더라. 그때 나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을 만났다.”
하나님을 만났다고 했다. 행복을 알았다고 했다. 그 하나님의 품속에서 처음으로 사랑을 알았고 못생겼다고 비웃음당하지도 않았다고 했다. 평등했다고 했다. 모르던 세계에서 충만한 삶을 살고 있다고 했다. 무언가 조금씩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게 느꼈지만 내가 생각하고 있는 그런 상황이 아니길 바라면서 유서 같은 언니의 편지를 읽었다.
“이젠 집으로 돌아가지 않을거야. 가지고 나온 돈은 내 몫이라고 그 사람에게 전해. 이 정도는 나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해. 어쩌면 내가 일궈놓은 것에 비하면 턱없이 모자라지만 나에겐 그리 많은 시간이 남아있지 안잖아. 네 형부와 아들들에게 따로 소식 전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네가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날 찾아올 생각 말아라. 내가 가끔 소식 전할게. 너라도 있어서 그동안 숨을 쉬고 살았다. 고맙다 하늘에서 만나자."
한동안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멍하게 앉아 있었다. 행복하다고, 평안하다고, 차별 없는 세상에서 사랑하며 사랑받고 살고 있다고, 거듭거듭 강조하는 언니의 편지는 진정성 있게 다가왔다. 어떤 하나님을 만났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손톱만큼 남은 짧은 세월이나마 행복하고 웃으며 살 수 있으면 그것으로 되었다고 생각했다. 종교적인 문제를 나는 말할 생각이 없다. 그의 하나님을 논할 이유는 없다 그러하기에 나는 그의 편지를 덮어두기로 했다. 찾을 수가 없다고 아무리 찾아봐도 모르겠다고 가족이 실종신고를 하든지 알아서 하라고 언제부터 그렇게 언니가 소중했냐고 큰소리를 치며 언니를 숨겨 버렸다. 그러면서 점점 횡포가 심해지는 세균전에 지치고 있었다. 더구나 언니의 편지에 찍힌 편지의 소인이 고립된 도시였다는 것과 하나님이라고 자처하는 늙은 남자가 국민을 상대로 엎드려 사죄하는 장면이 TV 화면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 하나님의 성전에서 세균이 전파된 도시는 스톱워치에 걸린 것 같이 일상이 정지된 것 같다. 상가들이 셔터를 내리고 사람들의 물결로 넘실대던 대로변이 고적하게 텅 빈 체 유령의 도시 같았다. 물 위로 떠 오르는 그 하나님 성전의 실체는 사이비 종교라며 하나님이던 그 사람을 사기꾼으로 몰아갔다. 모든 언론과 가짜뉴스까지 합세해서 세균을 전파한 곳이라고 떠들고 있었다. 나의 우려는 적중했다. 새로운 천지를 개발한 종교 집단에 언니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땐 코로나 19에 감염되어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였다. 병원에 입원하고 있다는 것 만 알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채로 무엇인지도 모를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오래된 감나무에 까치가 울었다. 어수선한 시절에 반가운 소식이 있을 리 없겠지만 행여 기다려본다. 나의 유년이 있었고 지금도 내 형제가 살고 있고, 그곳의 어느 병원에 언니가 누워 있다. 나는 갈 수 없는 그 도시의 소식에 하루 왼 종일 귀를 열고 있다. 고위험군에 속한 언니의 목숨은 어떤 고비를 넘고 있을까. 신의 노여움일까. 노아의 방주가 필요한 시점일까. 모호한 안개속을 헤매고 있었다. 언니의 하나님은 그를 살려주실까? 해보지도 않는 기도를 하며 하루를 TV 뉴스에 초점을 맞추고 살았다. 갑자기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온몸의 신경 줄이 살아 오르는 것 같았다.
“갔다네 내리 올라요?”
아직도 퉁명스러운 형부라는 사람의 전화에 가만히 앉았다. 달칵! 사슬 하나가 풀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힘들게 오르며 들숨 날숨을 헐떡이든 삶의 고리가 풀어지는 소리였다. 갑자기 공기의 흐름이 느슨해진다. 편안한 그녀의 삶이 실루엣처럼 내 창가에 미끄러진다. 고달팠던 그녀의 삶이 끝났다는 생각을 한다
어느 날 찾아온 한 줄기 빛 속으로 걸어가며 웃음이란 걸 배웠다고 했다. 얼룩덜룩 한 얼굴도 흉이 되지 않는 세상, 처음으로 간절하게 사랑을 해본 하나님이라고 했다. 그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늘나라까지 가버린 언니의 행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삶의 또 다른 유형이라고 할 수도 없는 언니의 삶이었다. 누가 인간을 평등하다고 말했는가? 못나고 흉하다고 제 어미를 부정하던 자식들과 개 패듯이 패던 서방이라는 작자는 언니의 죽음 앞에서도 일말의 예우를 거부하고 섰다. 말기 위암 판정을 받고 병원으로 가지 않고 하나님의 성전에서 살겠다고 간 언니를 나는 이해한다. 텅 빈 도시의 병원에서 홀로 죽음과 싸울 때 언니의 하나님은 그의 곁에 있었을 것이라고 이해하기로 했다. 국민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사죄하는 그의 하나님이라 할지라도 잠시 언니가 행복하게 웃을 수 있었으면 그것으로 고맙다. 세균의 온상이라고 질시 하던 그 성전에서 웃으며 기쁨에 충만한 찬송가를 불렀으면 더 무엇을 바랄까. 비록 그 성전에서 옮겨온 세균으로 언니의 죽음을 초래했다 하더라도 그곳이 어디 든 언니의 마지막 삶의 시간을 웃음으로 채워졌다면 너무도 감사한 곳이다. 항시 얼음을 업고 살던 등허리가 따뜻하게 사랑으로 데워 젓길 바라며 나는 그녀를 웃으며 배웅하자고 가슴을 쓸고 또 쓸었다. 어쩌면 이승보다 저승이 더 안락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역설 같은 위로를 한다. 우린 아직 태풍 속에 있다. 세균전이라는 거대한 태풍의 소용돌이가 세계를 강타하고 있다. 아직도 거리엔 마스크만 동동 떠다니고 표정을 잃어버리고 결벽 한 환자처럼 손을 씻고 또 씻는다. 마이삭이 훑고 지나간 자리에 쓰러진 늙는 버즘나무 대신 덜자란 버즘나무 한그루가 얼룩덜룩한 얼굴로 서 있다. 가만히 내 언니의 안부를 물어보며 언니를 만지듯 나무를 쓸어본다. 1200도의 불 속으로 언니를 밀어 넣으며 불같이 끓어 올랐던 나의 울화도 이제 삭고 있다. 곧 모든 것이 일상으로 돌아올 것이고 버즘나무 댁 내 언니도 언니의 하나님과 뜨거운 사랑을 하고 있을 것이기에 나는 예약된 면역 주사를 맞으러 갈 것이다.
“안녕 언니야 다음 생은 버즘나무 옷을 입고 오지 말기를~ 하늘에서 만나자”
[출처] [2021 매일 시니어문학상 수상작] 논픽션 부문 / 버즘나무 댁 / 박정화|작성자 마경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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