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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외교
삼하 10:1-5
1 그 후에 암몬 자손의 왕이 죽고 그의 아들 하눈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
2 다윗이 이르되 내가 나하스의 아들 하눈에게 은총을 베풀되 그의 아버지가 내게 은총을 베푼 것 같이 하리라 하고 다윗이 그의 신하들을 보내 그의 아버지를 조상하라 하니라 다윗의 신하들이 암몬 자손의 땅에 이르매
3 암몬 자손의 관리들이 그들의 주 하눈에게 말하되 왕은 다윗이 조객을 당신에게 보낸 것이 왕의 아버지를 공경함인 줄로 여기시나이까 다윗이 그의 신하들을 당신에게 보내 이 성을 엿보고 탐지하여 함락시키고자 함이 아니니이까 하니
4 이에 하눈이 다윗의 신하들을 잡아 그들의 수염 절반을 깎고 그들의 의복의 중동볼기까지 자르고 돌려보내매
5 사람들이 이 일을 다윗에게 알리니라 그 사람들이 크게 부끄러워하므로 왕이 그들을 맞으러 보내 이르기를 너희는 수염이 자라기까지 여리고에서 머물다가 돌아오라 하니라
삼하 10:1-5 / [암몬 족속과의 전쟁] 그 뒤 얼마 지나서 암몬 족속의 왕 나하스가 죽자, 그의 아들 하눈이 아버지의 왕위를 이어받아 새 왕이 되었다. 2) 나하스는 사울의 적이었기 때문에, 사울에게서 피신해 다니던 다윗에게 호의를 베풀었던 사람이다. 그래서 다윗은 이런 기회에 나하스의 호의에 보답할 생각을 하였다. `하눈의 아버지 나하스가 곤경에 빠진 나를 도와주며 나와 좋은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나도 그의 아들 하눈에게 호의를 베풀며 좋은 관계를 계속해 나가고 싶다' 그래서 다윗은 나하스의 장례식에 사절단을 보내 조의를 표하게 하였다. 그러나 다윗의 조문 사절단이 암몬 족속의 땅에 다다르자 3) 암몬 족속의 대신들이 나이 어린 왕에게 아주 그릇된 조언을 하였다. `임금님, 이스라엘의 왕 다윗이 이렇게 사절단을 보낸 것이 단순히 선왕의 영예를 기리고 조문을 전달하려는 것으로 여기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은 우리 도성의 정보를 얻어 내어 이 나라를 정복하려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4) 그러자 철없고 나이 어린 왕 하눈이 다윗의 사절단을 체포하여 그들의 수염을 반쪽씩 밀어 버리고, 그들의 의복도 허리 밑동을 모조리 잘라내어 양쪽 엉덩이와 부끄러운 곳이 드러나도록 하였다. 하눈은 그들을 이렇게 수치스러운 모습으로 만들어서 다시 이스라엘로 돌려보냈다. 5) 그러나 모욕을 당한 다윗의 사절단은 자신들의 모습이 너무나 부끄러워 감히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지도 못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다윗왕에게 이러한 사실을 살며시 알렸다. 그러자 다윗은 사람을 보내어 그들을 위로하고, 수모와 모욕을 온 백성에게 공개하지 않으려고 이렇게 지시하였다. `여러분은 수염이 다 자랄 때까지 여리고에 머물러 있다가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시오.'
본장은 삼하 8장 12에 간략히 언급된 암몬과의 전쟁에 대해 보다 상세한 부연 설명으로 이해됩니다.
그의 아버지가 내게 은총을 베푼 것 같이(1-2) 암몬 족속의 왕 나하스가 죽고 그의 아들 하눈이 새 왕이 되다는 소식이 다윗에게 들립니다. 다윗은 죽은 나하스가 사울에게서 피신해 다니던 때에 베푼 어떤 호의를 기억하고 장례식의 사절단을 보내 조의를 표하려 했습니다. 이를 통해 하눈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역시 우리는 여기서 생각해 둘 것은 비록 적이라 할지라도 한 때 자기에게 베풀었던 작은 호의라도 잊지 않고 대를 이어서 후손에게라도 갚고자 한 다윗의 의리 있는 인격과 그의 행동에 보다 더 주목하여야 할 것입니다.
왕의 아버지를 공경함인 줄로 여기시나이까(3) 그러나 다윗의 조문 사절단이 암몬 족속의 땅에 다다르자, 암몬 사람의 고관들이 이 도성을 두루 살피고 정탐하여 함락시키려고, 정탐꾼을 보낸 것이라고 의심을 불어 넣었습니다. 이런 암몬 고관들의 오해는 그들 스스로가 다윗 왕의 고매한 품성을 헤아리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낸 것이며, 승승장구하는 다윗 왕의 통치세력 확장에 대한 저들의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즉 저들은 가나안 지역의 최강자 블레셋과 이웃 나라인 모압이 이미 다윗의 군대에게 처참하게 패배한 사실과 끔찍한 형벌(삼하 8:1-2)을 알고 자신들의 미래를 걱정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암몬의 수도인 랍바 성은 외부로부터의 공격에 의해서는 좀처럼 함락되지 않는 견고한 요새였습니다(11:1). 그러므로 암몬 사람들은 타국의 사절들에게 이 성의 내부를 보여 주는 것을 가장 꺼려했을 것입니다.
그들의 수염 절반을 깎고 의복을 자르고(4-5) 어리석은 하눈은 다윗의 조문사절단을 잡아 수염을 절반씩 깎아 버리고 옷은 부끄러운 곳인 엉덩이가 드러나도록 절반씩 잘라 욕되게 한 후 그대로 돌려보냅니다. 당시 남자의 수염은 명예와 권위를 상징하였고 수염을 기르는 것은 자유인의 권리를 상징한 것이었습니다. 하눈의 이런 행위는 그들을 노예보다 못하게 한 수치 중의 수치였습니다(사 7:20; 50:6). 여기서 ‘수염의 절반을 깎았다’는 말이 수염 전체를 잡아 절반을 싹둑 잘랐다는 말인지, 얼굴의 한쪽 면만 수염을 밀어 깎고 다른 한쪽 면은 그대로 두었다는 말인지 확실치 않습니다. 또한 그 당시는 겉옷 속에 딱 붙는 속옷을 입지 않았을 것이니 옷을 자른 것도 지독한 모욕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하여 다윗 왕을 상징하는 조문사절단에게 가해한 것은 곧 다윗 왕에게 한 것입니다. 다윗 왕은 조용히 침묵으로 그들을 맞이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길목 성읍인 여리고에 머물다가 수염이 어느 정도 자라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라고 명합니다. 이런 조치는 저들의 수치를 백성들과 가족들에게 감추어 주기 위한 배려요 그들이 당한 수치를 반드시 갚아 줄 것이라는 의미를 담은 지시입니다.
적 용 : 통찰에 어둡고 아첨하는 사람들의 말에 휘둘리며 상대의 진심어린 호의조차 통찰하지 못하는 하눈에게서 어떤 교훈을 받습니까?
현재 교회가 세상에서 손가락질 받는 것은 진리 위에 제대로 서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교회가 세상을 향해 사랑과 은총을 베풀고 오직 진리 위에 바로 서 있어야 합니다. 다시 십자가의 복음으로 돌아가 진리를 붙들어야 합니다.
< 설 교 >
선을 악으로 갚은 하눈
본 장에서는 선을 악으로 갚은 암몬의 왕인 하눈에 대해서 언급되어 있습니다. 암몬 자손의 왕인 나하스가 죽었기 때문에 그의 아들 하눈에 왕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언제 어떻게 다윗이 나하스에게 도움을 받았는지는 몰라도 2절에 보면 “내가 나하스의 아들 하눈에게 은총을 베풀되 그 아비가 내게 은총을 베푼 것 같이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나하스라는 이름은 뱀을 의미하며 몇몇 암몬 족의 왕들에 의하여 취해진 이름이던 것 같습니다. 나하스는 사울의 원수일 가능성이 많은 것으로 보이는데 사울의 세력으로 인하여 당했던 패배의 상처가 오히려 결과적으로는 다윗에게 은총을 베풀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기가 받은 은총을 생각하여 조문객을 암몬 땅에 파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땅에 사는 방백들은 하눈을 충돌질 하였습니다. 3절에 보면 “왕은 다윗이 조객을 보낸 것이 왕의 부친을 공경함인 줄로 여기시나이까 다윗이 그 신복을 보내어 이 성을 엿보고 탐지하여 함락시키고자 함이 아니니까”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 방백들이 이렇게 말함은 전쟁에서 다윗이 승리하자 시기하는 마음이 생겨서 그랬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의 나라를 불신하는 눈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암몬의 새 왕인 하눈은 귀가 옅은 사람인 듯 합니다. 생각도 해 보지도 않고 그냥 다윗의 신복을 잡아서 수염을 절반을 깎아버렸습니다. 동양인에게 수염은 자신이 자유인이라는 표시이며, 이렇게 함은 단순한 모욕이 아니라 노예로 취급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수염만 깎은 것이 아니라 그 의복의 중동볼기까지 잘랐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제사장만이 속옷을 입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의 평상복은 윗옷과 그 위에 헐렁하게 걸치는 겉옷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동불기까지 잘랐다는 것은 엉덩이 바로 위까지 자른 것으로 하반신을 다 드러내기 때문에 이것은 대단히 이스라엘 사람에게 있어서 수치스럽고도 지독스러운 모욕이었던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볼 수 있지만 노아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벌거벗은 채로 있었는데 노아의 아들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하자 두 형제는 옷을 취하여 뒷걸음질쳐서 아비의 하체를 덮었다고 하였습니다(창 9:20-23). 그 결과 아비의 하체를 본 가나안의 아비 함은 자기 형제들을 섬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만큼 하체를 드러내는 것은 커다란 수치였던 것입니다. 하눈이 이렇게 행한 것은 다윗에게 전쟁의 선전포고를 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어떻게 했습니까? 자기의 신복들이 그런 모욕을 당하고 돌아온 것은 다윗 자신을 모욕한 것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 신복들이 그런 일을 당하고 부끄러워하자 다윗은 그들을 여리고로 가서 수염이 자라기까지 머물러 있으라고 하였던 것입니다(5절). 여기에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몇 가지 사실들이 있습니다.
1. 선을 선으로 갚은 것입니다
성경에는 전에 다윗이 나하스에게 도움 받은 사실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다윗은 그 사실을 깊이 간직 하였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기에 나하스가 죽자 자신이 받은 친절을 생각하여 조문객을 보내었던 것입니다. 요즈음의 시대에서는 우리에게 주어졌던 많은 친절들이 복잡한 사회 속에서, 또 삶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사라지게 되었고, 받은 친절에 대하여 거의 잊어버리거나 당연한 것으로만 생각해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다윗은 암몬 왕의 호의에 대해서만 은혜를 갚은 것이 아니라 삼하 9장에도 기록되었지만, 자신이 요나단의 도움을 받은 것을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았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래서 그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에게 사울과 그 온 집의 재산을 다 돌려주고 그가 두 발이 다 절뚝발이라고 하였는데도 자기 상에서 같이 먹으라고 하였으며 왕자 중의 하나처럼 대하였던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인정이 있는 행위입니까? 우리가 선을 베푼 것이 남에게 알려지지 않고 그냥 묻혀버린다 할지라도 우리는 계속해서 선을 베풀어야 합니다. 선만 베푸는 것이 아니라 받은 선에 대해서도 잊지 않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갚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2. 선을 악으로 갚았습니다.
다윗의 호의는 진정한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그 호의를 받는 편에서는 교활한 사람들에 의하여 그 호의가 의심스러운 것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호의는 오히려 악으로 가득찬 앙갚음을 받게 되었고 멸시를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그런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울로부터 계속해서 오해를 받았고 백성들이 다윗을 따르는 것을 시기하여 죽이고자까지 했던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도 많은 사랑으로 우리 인간들을 대하셨지만 오히려 그 사랑하신 사람들에 의하여 십자가에 달리게 되셨던 것을 성경을 통하여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선한 사람들만 사는 곳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탄의 세력이 더 강하기 때문에 어두워져 있습니다. 그래서 선이라는 것을 알려고 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위에서 다윗을 모함한다고 하여 거기 솔깃하여 다윗의 신복들에게 모욕을 준 하눈은 진실 된 것을 보지 못하는 무지한 자였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 가슴에는 상대편 사람들을 불신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본능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온전한 지식이 결여되어 있을 때 상상은 어떤 가능한 동기들을 바라보게 되고 그것은 좋은 쪽보다는 나쁜 면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하눈과 암몬 사람들의 거짓되고 악한 의도는 다윗의 행동을 잘못 판단하여서 우호적인 행위를 그들 자신을 스스로 파멸의 자리에 몰아넣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각 개인들에게 가장 비참한 저주의 상황으로 나타날 것이기도 합니다. 또 그리스도의 호의에 대한 방자한 배척이기도 합니다. 선을 악으로 갚음은 최고의 손실을 수반하는 법입니다. 곧 그리스도의 호의에 대한 배척은 그의 위대성과 영광에 비례하는 손실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3. 악을 악으로 갚지 않았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편의 사람이 남에게 억울하게 멸시를 당하였거나 모욕을 받으면 기분이 상하게 됩니다. 기분만 상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으로 원한을 품게 됩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심리인 것입니다. 다윗은 자기의 신복들을 좋은 뜻을 가지고 암몬 땅에 들어가게 하였던 것인데, 그 좋은 뜻은 이루지도 못하고 신복들이 온갖 수치를 다 당하고 돌아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보게 됩니다. 다윗은 자기의 신복들이 하눈에게 많은 수치를 당했지만 결코 하눈을 나쁘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원망하는 마음을 갖지도 않고 자기의 신복들을 여리고로 보내어 수염이 자랄 때까지 그 곳에 머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조용하게 처리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다윗은 악을 악으로 갚지 아니하고 오히려 덮어 주려고 한 것으로 보입니다. 자신의 호의가 그렇게 무참히 거부당하였다는 것은 다윗에게 있어서 고통스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악을 악으로 갚지 않았기에 오히려 다윗에게는 더 많은 영토를 확장하게 되었고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선한 일들이 남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지고 오히려 분쟁의 원인이 되는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모든 어렵고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건져내시며 오히려 그것을 통하여 우리에게 보다 나은 삶을 영위하도록 하실 것입니다.
거부당한 은총
사무엘하 10:1-5
본문의 내용은 앞의 9장과는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9장에서 살펴본 내용은 므비보셋에게 은총을 베푸는 다윗과 베풀어진 은총에 대해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라는 말로서 크게 감사하는 므비보셋의 반응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도 이와 같은 얘기가 등장합니다. 2절에 “다윗이 가로되 내가 나하스의 아들 하눈에게 은총을 베풀되 그 아비가 내게 은총을 베푼 것 같이 하리라 하고 그 신복들을 명하여 그 아비 죽은 것을 조상하라 하니라 다윗의 신복들이 암몬 자손의 땅에 이르매”라고 말하는 내용을 보면 다윗이 요나단을 인하여 그 아들 므비보셋에게 은총을 베푼 것처럼 역시 하눈의 아비 나하스로 인해 하눈에게 은총을 베푸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하스란 사람이 다윗에게 어떤 은총을 베풀었는지는 성경이 언급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다윗이 이방인으로부터 어떤 은총을 받아야 했다면 그것은 사울에게 쫓겨 다닐 시기가 가장 가능성이 큼으로 그때 도움을 받았던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볼 뿐입니다.
그런데 이 두 내용은 므비보셋이 베풀어진 은총에 대해 감사하고 기뻐하는 반응을 보인데 반해 하눈은 다윗의 은총에 대해 의심하고 다윗의 신복들을 조롱한 것에서 서로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다윗의 은총이 므비보셋에게는 감사와 기쁨으로 받아들여진 반면 하눈에게는 거부당한 것입니다.
다윗의 은총을 거부한 것은 죽은 나하스를 신하를 보내어 조상하는 다윗의 호의에 대한 의심 때문입니다. 3절의 “암몬 자손의 방백들이 그 주 하눈에게 고하되 왕은 다윗이 조객을 보낸 것이 왕의 부친을 공경함인 줄로 여기시나이까 다윗이 그 신복을 보내어 이 성을 엿보고 탐지하여 함락시키고자 함이 아니니이까”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다윗이 조객을 보낸 호의를 자기들의 성을 엿보고 탐지하기 위한 것으로 의심했던 것입니다. 결국 하눈은 다윗의 신복들의 수염 절반을 깎고 의복의 중동볼기까기 자르고 돌려 보냄으로서 다윗의 은총에 대해 조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내용에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할 수 있습니까? 베풀어진 은총에 대해 므비보셋처럼 감사와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눈처럼 거부하고 오히려 은총을 모욕하는 사람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쉽게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을 거부하지 말고 감사와 기쁨으로 받아들이자’라는 다짐 아닌 다짐으로 끝내 버릴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사실 베풀어진 은총에 대해 므비보셋처럼 감사와 기쁨의 반응을 보이는 것에 대해 여러분은 쉽게 생각하고 넘어갈 것입니다. 즉 ‘나는 절대로 하눈처럼 하나님의 은총을 거부하지 않겠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지 않겠습니까? 하긴 하나님의 은총을 거부하겠다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은 모두가 은총을 오매불망 원할 것인데 베풀어진 은총에 대해 감히 누가 거부한단 말입니까? 또 누가 그런 생각을 갖고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역시 하눈처럼 하나님의 은총을 거부하는 자로 살아가고 있을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본문이 바로 그것을 경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에 대해 감사와 기쁨으로 반응한다는 것은 어느 한순간의 감상적 생각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한순간의 감상적 생각으로 인해 스스로 속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말씀을 들을 때 ‘감사하다. 기쁘다’라는 생각과 느낌이 있다고 해서 ‘나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해 감사와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라고 단정 짓는 것에 대해 주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느낌과 생각만으로는 신앙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리에서 신자 아닌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다들 말씀으로 인해 감동을 받고, 예수님에 대해 생각을 하고, 은혜를 느끼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신앙의 전부가 아니며, 그것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로 산다고도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생각하고 느끼게 된 것에 내 마음과 삶이 다스림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삶에 개입되지 못하는 것은 그 생각과 느낌이 아무리 신앙적이라고 하더라도 죽은 것이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가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은 생각과 느낌으로는 은총을 감사하고 기뻐하면서도 정작 삶에서는 은총을 거부하는 자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삶은 보지를 못하고 단지 생각이 있고 느낌이 있다는 것으로 자신을 정당화 한다면 결국 자기 문제를 보지 못하는 자로 살아갈 것입니다. 사실은 은총을 거부하는 자로 사는데도 자신은 은총에 대해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으로 착각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에 대해 본문이 경계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의 은총을 거부하게 된 원인은 다윗에 대한 의심 때문이었습니다. 조문객을 보낸 다윗의 호의를 자기들의 성을 탐지하여 함락시키고자 하는 계략으로 의심한 것입니다. 이들이 이러한 의심을 갖게 된 것은 전쟁에서 승승장구하는 다윗에 대한 경계심 때문이었을 수도 있으며, 다윗과 친한 관계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조문객을 보낸 것에 대한 의심 때문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사실 친하지도 않은 사람이 호의를 보인다면 그 의도를 의심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다윗이 나하스의 죽음에 대해 조객을 보낸 것은 하눈과의 관계 때문이 아니라 나하스가 다윗에게 베푼 은총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다윗과 자기들과의 관계에서만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다윗이 자신들에게 그러한 호의를 보일 이유가 없다고 판단하게 될 것이고, 그런데도 불구하고 조객을 보낸 호의를 베푼 것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으로 의심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바로 이 부분입니다. 다윗이 므비보셋에게 은총을 베푼 것은 그 아비 요나단을 인해서였습니다. 하눈에게 은총을 베푼 것도 하눈과의 관계 때문이 아니라 그 아비 나하스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처럼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신 것은 우리와의 관계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주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계산하면서 은총을 평가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제대로 살지 않는데 하나님이 나를 은총으로 대할 리가 없다’는 생각을 갖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것을 하나님이 베푸신 은총으로 여기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에 있지 않는데 그런 나에게 은총을 베푼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마태복음 5:45절에서 말씀하는 바와 같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는 분이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시는 분입니다.
단적으로 우리가 아무것도 한 것이 없어도 복은 내려집니다. 심지어 십일조를 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복은 내려집니다. 아마도 한국교회 분위기 상 이런 말은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십일조 등의 행위로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탱을 하고 있고, 그런 관계를 내세우며 복은 자신의 몫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분통이 터질 말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중심사상이며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오셔야 할 이유이며, 왜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가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어떻게 복이 내려지는가?’라는 생각에 머물게 된다면 그것이 곧 그리스도로 인해서 베풀어지는 은총을 거부한 것이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은총에 대해 의심을 갖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그리스도로 인해서 무조건 베풀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무조건이라는 것이 생리에 맞지 않습니다. 항상 조건을 앞세우는 것이 인간입니다. 사랑을 한다면 사랑할 만한 조건이 있기 때문이고, 친절을 베푼다면 친절을 베풀만한 이유와 조건이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서도 조건적 관계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은총도 받을 만한 사람이 받게 되는 것으로 복도 받을 만한 사람이 받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고 생각할 때 주어져 있는 은총에 대해서도 조차 의심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악인들은 다른 사람들도 자신들처럼 악하다는 생각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남을 속이고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자신을 속이려고 하고 거짓말을 할 것으로 여기는 것이고, 내가 다른 사람에 대해 악의를 갖고 있을 때 그들이 나에게 선한 의도를 갖고 있다고 믿지 않으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호의도, 사랑도 조건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은총에 대해서도 조건적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은총에 대해 의심하게 하고 거부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께 은총을 베푸신 것은 여러분이 하나님께 잘한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입니다. 은총을 받을 자격이 없는 우리가 은총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총 앞에서는 우리의 그 어떤 행위도 돌아볼 이유가 없습니다. 다만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감사하고 기뻐하면 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설명을 잘 들으셨습니까? 그리고 이 모든 말에 대해 인정하고 받아들이십니까? 그렇다면 다 된 것일까요? 앞서 말씀드리기를 신앙은 느낌과 생각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시간의 말씀에 대한 생각과 느낌이 여러분의 삶에 개입하여 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느낌과 생각이 삶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총 앞에서 우리가 취할 태도가 무엇인가는 므비보셋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무엇이관대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십니까?’ 이것이야 말로 은총에 대한 최고의 반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과 느낌은 쉽게 가질 수 있습니다. 문제는 누군가와의 관계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반응이 드러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것은 죽은 개 같은 자가 누리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총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신자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겠습니까?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겠습니까? 자신에게 있는 어떤 것으로도 누군가를 판단하거나 비교하고 무시하는 도구로 사용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은총을 믿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은총을 말하면서도 자신에게 있는 것으로 누군가를 판단하고 무시하고 자신의 자랑거리로 삼는다면 그것이 곧 은총을 거부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또 한가지는 하나님의 은총은 우리의 부끄러움을 가려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린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부끄러움을 드러내시는 것이 아니라 가려주심으로써 은총에 거하게 하셨고, 이 은총을 아는 자로 산다면 누군가의 부끄러움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은혜의 속성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즉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가려주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눈은 다윗과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하눈은 다윗의 신복들을 모욕하고 조롱하였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 사람들이 크게 부끄러워하므로 수염이 자라기까지 여리고에 머물다가 돌아오라고 지시합니다. 이러한 다윗의 배려는 부끄러움을 가려주는 하나님의 은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이 이러한 하나님의 배려로 인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이웃을 조롱하고 모욕하고 욕하지 않게 됩니다. 부끄러운 자신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은총을 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여러분께 베풀어진 은총이 무엇이며 무엇을 근거로 하여 베풀어졌는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생각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생각으로 삶이 다스림 받는 자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하나님이 은총을 받은 자로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느낌과 생각이 있으니 신자로 살고 있다는 생각은 스스로의 느낌과 생각에 속는 것입니다. 은총을 거부하는지 아니면 진심으로 은총으로 사는지는 삶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삶에서 여러분의 실체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거절당한 은총
삼하 10:1-5
1927년 여름 충북 청주군에 사는 양반집 며느리 최 아무개 씨가 자살한 일이 신문에 보도된 적이 있다고 합니다. 이 사건의 전말은 이렇습니다. 최 씨의 딸이 같은 동네에 사는 김 씨의 딸과 말다툼을 하게 되었데요. 나중에 최 씨의 딸이 자기 엄마에게 이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최 씨의 엄마가 “상년의 딸은 어쩔 수 없다”라고 말했다고 해요. 그런데 이 말이 돌고 돌아, 김 씨에게로 흘러갔습니다. 이 말을 들은 김 씨는 화가 나서 최 씨를 찾아가서 따졌다고 합니다. “당신이 무슨 양반이라고 우리더라 상년이라고 해! 당신이 우리를 먹여주고 입혀줬어! 하면서 삿대질을 하면서 한바탕 소동을 벌였다고 합니다. 이게 사건의 전부인데, 이 일 후에, 최 아무개 씨는 “상년”에게 이런 치욕을 당해 남부끄러워 살 수 없다면서 화가 나서 자살을 했다는 겁니다. (김 찬호 – 모멸감 중에서).
이런 상황이 이해가 되시나요? 현대를 사는 저희들에게는 많이 황당하게 들릴 수 있는 이야기지만, 이 때 당시의 상황을 알게 되면 조금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1927년은 조선시대가 끝나고 신분제도도 사라지고 있던 시점입니다. 그렇지만 양반집 며느리 였던 최 아무개 씨에게는 여전히 양반 의식이 남아 있었던 것이지요. 아무리 가난해도 나는 양반집 며느리라는 자존심을 가지고 살아가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가 보기에 보잘 것 없는 아랫 것으로부터 삿대질을 당하자, 양반의 권위가 떨어졌다면서 화가 나서 자살을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최 아무개씨는 양반이 아랫 것으로부터 수치를 당했다고 여기고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인데요.
‘인간다움의 조건’이라는 책에 “수치심”이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고 합니다. ‘자신의 처신이나 상황에서 불명예스럽거나 우스꽝스럽거나 불미스러운 것을 의식할 때, 혹은 자신의 품위나 체통을 훼손시키는 상황 속에 있다는 것을 의식할 때 생기는 고통스러운 감정’이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즉, 사람이 느끼는 수치감 또는 모멸감은 죽음에 이르게 할 만큼 고통스럽다는 것입니다.
‘창피하다’라는 말이 있지요. 제가 어릴 적에 창피해 했던 일이 있습니다. 구멍난 양말을 신고 학교 가는 일이었는데요. 그 때는 그게 죽기보다 싫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양말에 구멍이 날 수도 있지만, 혹시 다른 아이들이 보고 놀릴까봐 안절부절했던 것 같아요.
원래 “창피”라는 말은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리고 옷 매무새를 단정하지 못하게 흩뜨린 모습’이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즉, 옷 차림에 최소한의 격식을 갖춰야 부끄럽지 않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남들 보기에 ‘괜찮은 옷’을 입어야 된다는 부끄럽지 않다는 감정을 드러낸 것입니다. 옷이 권력이나 지위 또는 경제 수준을 함축하고 있는 셈인데요.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이렇게 ‘창피하다, 또는 수치스럽다’라는 것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을 드리는 이유는 오늘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윗이 암몬 사람의 왕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조문단을 꾸려서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런 다윗의 행동을 암만 사람들이 오해합니다. 다윗이 조문단을 보낸 이유가 고인에 대한 조의를 표하려는 것이 아니라, 도성을 두루 살피고 정탐하러 왔다고 많은 사람들이 동일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한 일은, 조문단으로 온 신하들의 한쪽 수염을 깍고, 입은 옷 가운데를 도려내어 양쪽 엉덩이가 드러나게 해서 다윗에게 돌려 보냈습니다. 암몬 사람들이 이렇게 한 것은 다윗의 신하들을 욕보이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이 일을 당한 신하들이 얼마나 수치스러워했을지, 이해가 되시지요? 신하들에게 수치심을 주는 일은, 매로 심하게 때린 것보다 더 큰 상처를 줍니다. 어디에요? 신하들의 자존심에, 그리고 마음에 큰 흠집을 내고, 죽음에 이르는 고통을 준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을 읽고 묵상하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암몬 사람들이 다윗의 신하에게 수치심을 안겨 주었을 때 어떻게 했을까요? 제가 암몬 사람이라면 이 상황을 보면서 ‘껄껄 거리며 웃었을 것입니다’ 한 쪽 밖에 없는 수염과 엉덩이가 드러난 옷을 입은 신하들의 꼴이라니, 그것은 보는 것만으로도 매우 재미있는 구경거리니까요. 많은 암몬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을 거예요. 이렇게 우스운 광경은 쉽게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영원히 자기들의 눈에 담아두려고 했을 것입니다.
암몬 사람들이 다윗의 신하들을 놀려대면서 미래를 걱정했을까요? 아니요! 그들은 미래를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그런 생각을 못했어요. 그들에게 이 일은 그저 재미있는 일입니다. 집단 최면이라도 걸린듯이 다윗의 신하들에게 수치심을 주면서, 그들은 모종의 쾌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암몬 사람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또 한 가지가 있어요. 이 일을 하는 자신이 대단한 힘을 가진 것 같은 착각에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 쯤이야 상대도 안된다는 것이지요. 한 마디로 말하면, 암몬 사람들이 제 정신을 잃어 버린 것입니다.
이런 광경은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도 발견됩니다. 마가복음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군인들이 예수를 끌고 브라이도리온이라는 뜰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모으고, 예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씌우고 경례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고 갈대로 그의 머리를 치며 침을 뱉으며 꿇어 절하더라. 희롱을 다 한 후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마 15:16-20)”
군인들은 상관의 명령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로마 군인들에게 떨어진 명령은 예수를 끌고가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한 일 중에는 상관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임의대로 알아서 한 일이 있습니다. 바로, ‘갈대로 그의 머리를 치며 침을 뱉으며 꿇어 절하더라’ 라고 한 부분입니다.
로마 군인들이 사용했던 회초리에는 납이 달려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 매로 놔두고, 갈대로 예수의 머리를 칩니다. 예수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려면 칼로 찌르면 되는데, 로마 군인들은 예수께 침을 뱉습니다. 갈대와 침은 에수에게, 아무런 물리적인 상처를 낼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런데도 왜 사람들은 이런 행동을 하지요? 바로 나약하고 지쳐 있는 예수님께 수치심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에게도 다른 사람들에게 의도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수치심을 안겨주고 싶은 마음이 있지는 않나요? 다른 사람들의 약점을 들추거나, 그들의 허물을 반복해서 끄집어내서 이야기하는 이유도 어쩌면 그들에게 부끄러움을 선사하고, 이로 인하여, “나의 우월함과 선함”을 나타내고자 하는 마음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남에게 수치심을 주면서, 깔깔 거리며 웃는 암몬 사람들의 모습과 로마 군인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모습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맥스 루케이도 목사님의 책에 자신의 이야기를 적어놓은 부분이 있습니다. 맥스 목사님이 운전하면서 있었던 아주 평범한 이야기입니다. 아마도 여러분도 한 번쯤은 경험해 보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분이 운전을 하고 있었는데, 두 개의 차선이 하나로 좁아지려던 참이었다고 합니다. 목사님이 운전하는 차선은 없어지고, 옆 차선에는 한 여자가 운전을 하고 있었습니다. 맥스 목사님처럼 유명한 목사님의 스케쥴이 중요하잖아요. 사랑의 전달자요 평화의 대사가 목사이니까 하는 생각에 들면서 맥스 목사님은 자동차의 속도를 올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왠걸요. 옆 차선에 있던 여자도 속도를 올리더라랍니다. 문제는 두 차선이 하나로 줄어들 때, 그 여자분의 차가 맥스 목사님의 차보다 아주 조금 앞서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맥스 목사님은 속도를 줄여야 했습니다. 그러자 옆 차선에 있던 여자가 어깨 너머로 잘 가라고 손짓하면서 약을 올리더랍니다. 그 순간 목사님이 열이 받으셨나 봅니다. 젠장! (참고로 저는 이렇게 말 안합니다.ㅎㅎ). 그리고 맥스 목사님 마음에 이런 말소리가 들리더랍니다. ‘잠깐만, 어두운 곳에 빛을 비추는 것이 내 사명이 아니던가?’ 그래서 여자의 백미러를 향해 하이빔을 살짝 쏘아 줬다고 합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여자가 속력을 엄청 줄여서 복수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열 받은 맥스 목사님은 계속해서 하이빔을 쏘고, 열 받은 여자는 거북이처럼 더 느리게 운전하다가, 길이 다시 넓어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맥스 목사님은 차를 추월해서 갔는데, 이번에는 빨간 불에 걸려 두 차가 교차로에서 나란히 서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자 분께서 창문을 내리시더니, 손을 들어 절대로 흉내서는 안되는 신호로 맥스 목사님께 한 방을 먹이시더랍니다. 맥스 목사님께 수치심을 안겨드린 것이지요.
이 일 후에 맥스 목사님은 죄책감이 들었다고 합니다. ‘내가 왜 그랬지?”라고 말입니다.
맥스 목사님은 사람들 내면에 야수가 살고 있다고 은유적으로 말합니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사람들 마음에 악한 모습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괴롭히고, 수치심을 주는 행동 속에는 “나는 강하다”는 의식이 깔려 있습니다. 한국에서 큰 사회적인 이슈가 되고 있는 ‘갑질’이라고 하는 것도 같은 것입니다. 재력이 좀 있다고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업신 여기는 태도 속에는 ‘너 처럼 약한 것이 별 수 있겠어’하는 마음이 그들 안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종주의도 사실은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제가 목회를 시작할 때 선배 목사님들이 해 주셨던 권면이 있는데요.그래서 제가 그 동안 하지 않았던 두 가지가 있는데요. 첫째는 교인들이 얼마나 헌금하는지 알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게 왜 중요한지 나중에 정확하게 알게 되었는데요. 그것은 교인들이 헌금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게 참으로 두려운 이야기 아닌가요.
두번째는 정치 이야기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정치 이야기는 사실 재미 있어요. 잘하는 정치인들을 칭찬하는 것은 조금 재미있지만, 잘 못하는 정치인 욕하는 것은 정말 재미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치와 관련된 이야기 하다보면,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욕하면서 스트레스도 풀고 이게 일거양득인 셈이지요. 그런데도 선배 목사님들이 제게 “정치이야기” 하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목회자가 정치색깔을 나타내면, 그 순간 교회가 둘로, 또는 그 이상으로 갈라질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제가 빨간색일까요? 파란색일까요? 아마도 여러분이 짐작은 하실지 모르지만, 여러분이 알 길이 없는 이유는 제가 공개적으로, 사석에서 정치적인 색깔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입니다. 그리고 목회자에게 그건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교회에 오는 이유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을 알아가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기 위해서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제가 정치 이야기를 하지 않는 이유는, 많은 경우 자기가 싫어하는 정치인들을 이야기할 때 모욕적인 말들을 하기 때문입니다. 인터넷에 나오는 기사의 댓글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나와 똑같이 그 정치인을 싫어하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되지만, 반대로 그 정치인을 좋아하고 있다면, 모욕을 당했거나 수치심을 받았다고 여길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 때문에 교회에서는 될 수 있는 한 정치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하시더라도 너무 모욕적인 말씀은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서로에 대한 배려이기 때문입니다. 서로 배려해 주세요. 교회에 상한 마음을 고치려 왔다가 더 마음이 상해 버릴 수 있으니 말입니다.
수치심을 주고 받는 사람들 사이에는 복잡한 감정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한 예로, 골리앗이 이스라엘 사람들, 그리고 다윗과의 대화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골리앗이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오서 전열을 벌였느냐 나는 블레셋 사람이 아니며 너희는 사울의 신복이 아니냐 너희는 한 사람을 택하여 내게로 내려 보내라. 그가 나와 싸워서 나를 죽이면 우리가 너희의 종이 되겠고 만일 내가 이겨 그를 죽이면 너희가 우리의 종이 되어 우리를 섬길 것이니라. 그 블레셋 사람이 또 이르되 내가 오늘 이스라엘 군대를 모욕하였으니, 사람을 보내어 나와 더불어 싸우게 하라 한지라”
골리앗이 이스라엘 군대를 모욕했습니다. 암몬 사람들이 다윗을 모욕했습니다. 이렇게 사람이 모욕을 주는 이유는 상대방의 영혼에 치명상을 주기 위해서 라고 있습니다. 또한 이렇게 모욕감은 전쟁에서 사용되는 전략이라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수치심을 당한 사람들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 집니다.
첫번째 반응은 사울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두려워 떠는 것입니다. 골리앗의 말을 듣고 그들의 영혼이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경우입니다. 이게 골리앗이 원하는 것입니다. 칼로 싸우지 않아도, 모욕감을 주는 것만으로도 적군의 사기를 떨어뜨릴 수 있습니다.
두번째 반응은 다윗처럼 분노한다는 것입니다. ‘이 할례받지 못한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라고 말하면서 그에게 달려 갑니다. 수치심응 당한 사람들 안에 생기는 분노가 얼마나 강렬한지 우리도 잘 알고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 당하는 것에 대한 거룩한 분노가 있었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울 왕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생긴 분노가 아닙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정치인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생긴 분노가 아닙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연예인들에 대한 모욕으로 생긴 분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윗에게는 하나님의 이름이, 예수의 이름이 모욕 당하는 것에 대한 분노가 있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이런 분노가 있으신가요?
다윗은 암몬 사람들의 모욕에 분노했습니다. 다윗은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었는데, 이것에 대한 답으로 모욕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은혜가 거절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6절을 보면 조금 이상한 부분이 있습니다. ‘암몬 사람들이 자기들이 다윗에게 미움을 사게 된 줄을 알았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암몬 사람들이 다윗의 신하들에게 수치심을 주면서, 전쟁이 날지 몰랐다는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 군인들도 예수의 머리를 갈대로 때리면서, 또한 침을 뱉으면서 왜 자기들이 그런 일을 하고 있는지 몰랐을 것입니다. 약간의 쾌감을 느껴보려고 그런 것인데, 그것이 은혜를 악으로 갚고 있는지 미쳐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암몬 사람들을 악한 사람들이라고 부를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로마 군인들을 악한 사람들이라고 부를 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안에도 그들과 같은 모습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렇게 고백했지요.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여러분도 이렇게 말하고 싶었던 적이 있으셨나요?
정신 차리고 나니까, 큰 일이 벌어질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암몬 사람들은 자신들의 행동의 결과로 전쟁이 일어날 것을 알고 두려워 했지만, 다윗에게 사과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전쟁을 이길 수 있도록 철저히 전쟁을 준비했습니다. 은혜를 원수로 갚은 사람들이 살 길은 회개하는 것인데, 암몬 사람들은 그 길을 버리고, 어리석은 길을 택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복음의 말씀이 요한복음 3장 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요 3:16).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랑은 무궁합니다. 그 사랑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므비보셋 같은 사람에게도 임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는 암몬 사람들 같은 이들에게도 동일하게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므비보셋과 같은 사람은 주님을 믿음으로 새로운 삶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는 왕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었습니다. 황무지 같았던 그의 인생은 풍성한 인생으로 바뀌었습니다. 반면 암몬과 같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오해했고,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하나님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는 존재로 스스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하나님의 본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도 암몬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있습니다. 결국 그들은 어떻게 될까요?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심판입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고 있는 요지이기도 합니다.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 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자신들이 하나님보다 지혜롭고, 하나님보다 강하다고 믿는 사람들에 대한 정죄는 이것입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암몬 사람들의 악함은 다윗의 신하들에게 수치심을 안겨주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로마 군인들도 예수에게 침 뱉음으로 예수의 영혼을 짓밟았습니다. 그들이 빛 보다는 어둠을 더 사랑하고 있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우리도 암몬 사람처럼 행동할 때가 있지 않나요? 우리도 로마 군인처럼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희롱한 적은 있나요? 만일 그런 적이 있다면, 주님께 우리가 회개하는 시간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연약한 자들을 항상 관심을 가지고 계시며, 그들을 기억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10:40-42).
또한 여러분 중에 예수님처럼, 다윗의 신하처럼 무시를 당하거나 수치를 당해서 마음이 상한 적은 없으셨나요? 그런 분들이 있다면, 이 시간 주님의 치유하심과 위로하심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사순절이 지난 수요일 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부활절이 한 달 앞으로 다가 왔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은혜를 원수로 갚는 암몬 사람들 같은 사람을 위해서도, 우리를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씻으신 주님은, 자기 얼굴에 침을 뱉은 로마 군인들도 용서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사랑입니다. 한 없는 은혜, 감당할 수 없는 은혜, 그 은혜를 깨닫고, 주 예수를 믿어 구원에 이르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은총에 대한 오해
사무엘하 10: 1-5
인간 대 인간의 만남에서 오해가 생겼다는 내용입니다. 다윗이 호의를 베푸는데 암몬 왕인 하눈은 마치 자신의 나라를 치기 위한 스파이를 파견하는 그런 적대적 행위로 해석한 것입니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전쟁이 일어나서 17-18에 보면, 그 암몬이라는 나라가 대패를 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다윗에게 알리매 그가 온 이스라엘을 모으고 요단을 건너 헬람에 이르매 아람 사람들이 다윗을 향하여 진을 치고 더불어 싸우더니 아람 사람이 이스라엘 앞에서 도망한지라 다윗이 아람 병거 칠백 대와 마병 사만 명을 죽이고 또 그 군사령관 소박을 치매 거기서 죽으니라”
과연 사람간의 사소한 오해가 이런 파탄을 야기할 것일까요? 아닙니다. 다윗은 보통 인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인간은 다른 인간과 다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작용하게 됩니다. 이 언약 작용으로 인해 사람 대 사람의 관계에서 사람 대 하나님의 관계로 확대가 됩니다.
예를 들면, ‘개’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 그 개념에 맞는 개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냥 삽살개, 진돗개, 셰퍼드, 달마시아 같은 개들이 있을 뿐입니다. 이들을 한데 집결해서 말하기를 ‘개’라고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있습니다.
철이, 영희, 순희, 동영이든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모아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없습니다. 그냥 사람들만 있을 뿐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에 의하면 다윗이라고 하더라도 대단한 의미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언약을 내리시는 하나님 생각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그 사람이 바로 ‘아담’이라고 합니다.
즉 하나님 보시기에 아담이 행하는 모든 것은 나머지 모든 인간들에게 그대로 적용됩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적도 없는 우리 모두는 선악과 따먹은 그 벌을 다같이 받게 됩니다. 이런 관계에 있는 아담은 ‘보편적 단독성’이라고 합니다. 단독성이란 ‘한 사람’을 뜻하고, ‘보편성’이란 그 뒤에 튀는 사람없는 숱한 일반 사람들이 붙여있는 상태입니다.
하나님은 아담 뒤에 얼마나 많은 인류들이 태어났든지 상관없이 하나님은 묵묵히 아담만 상대하십니다. 인간이 아무리 훌륭하든지 간에 우리 조상되시는 아담이 저질러놓은 죄의 구조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 죄의 구조 안에 갇힌 꼴이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하눈에 의하면 다윗은 그냥 보통 사람일 뿐입니다. 결코 다윗의 끝에 아담이 있고 그 아담의 끝에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지 못합니다.
쉽게 말해서 ‘아담을 통해서만 하나님과 통한다’는 사실을 보통 인간들은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각자 자신들이 알아서 하나님과 통한다고 보는 겁니다. 이런 인식으로 인해 하눈은 다윗의 ‘보편적 단독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담 말고 다른 아담을 만드셨습니다. 그 분이 바로 ‘마지막 아담’,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이 예수님으로 인하여 비로소 아담이 갖고 있는 보편적 단독성이나 다윗이 갖고 있는 보편적 단독성의 참 내용이 그들 내부에서 펼쳐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로서 다윗이 베풀어주는 것은 단순히 사적인 동정심이나 배려 차원이 아닙니다. 다윗이 베푸는 은혜는 하나님의 은혜로서 베푸는 것이라고 효력이 있는 동시에 그 은혜를 거절하는 것은 단순히 다윗에게 징벌당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은 식이 됩니다.
쉽게 말해서, 복음을 믿는 자들의 복음 전달을 거부하는 것은 천국에 도저히 들어갈 수 있는 인물임을 확인하는 과정에 해당됩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눈이라는 작자와 지난 번에 나온 므비보셋의 존재를 비교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둘 다 다윗이 어려워했을 때에 도움을 준 집안입니다.
므비보셋의 아버지 요나단으로부터 다윗은 혜택을 입었으며 하눈의 아버지 나하스에게도 도움을 받았습니다. 사무엘상 21:10에 보면, “그 날에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도망하여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가니”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다윗은 보답을 하기 위해 찾아갔지만 사람들은 다윗의 위상을 일반인들과 같은 것처럼 오해한 것입니다.
하지만 므비보셋은 다윗의 은혜를 은혜로 받아들였습니다. “나 같은 개 같은 인간을 돌아보시나이까?” 그런데 하눈은 결코 이런 고백을 해내지를 못합니다. 자존심 때문입니다. 자기 구조, 자기 세계를 따로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내가 예수 믿고 난 뒤에 행하는 의로운 행위를 의롭다고 인정해달라”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바로 므비보셋과 같은 은혜를 아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자기만의 영역을 따로 고수하겠다는 비복음적 사고방식인 것입니다. 하눈의 이러한 은혜에 대한 배반은 출애굽기 1:8에 보면,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애굽을 다스리더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선조들이 받은 은혜를 후손들이 알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과의 대표자가 아님을 알지 못하고 선조들, 즉 보편적 단독적과 자신과의 관계를 끊어버립니다. 사람들은 다윗이 하눈을 미워서 전쟁하는 줄 알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다윗은 하눈에게 은혜를 베풀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하눈은 그 은혜를 짓밟고 모독했습니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미워합니다. 하지만 실은 그런 미움을 드러내는 그 모든 행위도 실은 예수님이 주신 은혜의 힘으로 합니다. 이런 은혜를 사람들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고 자신을 사랑하므로 모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때에 지옥에 간 그 어떤 인간도 주님을 미워하지 못하고 자신을 미워하게 됩니다. 주님에게 대드는 것이 아니라 후회합니다. 왜 그동안 받은 은혜에 대해서 예수님께 감사하지 못하고 자기 영광을 돌렸느냐 하는 식으로 후회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천국 뿐만 아니라 지옥에서도 영광을 받으십니다.
우리는 지옥에 속한 자들이 주장하는 협박이나 미움에 두려워하지 맙시다. 왜냐하면 그들과 우리 사람에는 골짜기가 있어서 우리가 저리로 건너 갈 수 없고, 저들도 우리 있는 곳으로 들어올 수 없습니다. 천국은 아무나 갈 수 없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같이 미천한 자들에게 대해 베푸시는 은혜를 우리가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선을 악으로 갚음
삼하 10:1-5
본 장에서는 선을 악으로 갚은 암몬의 왕인 하눈에 대해서 언급되어 있습니다. 암몬 자손의 왕인 나하스가 죽었기 때문에 그의 아들 하눈에 왕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언제 어떻게 다윗이 나하스에게 도움을 받았는지는 몰라도 2절에 보면 “내가 나하스의 아들 하눈에게 은총을 베풀되 그 아비가 내게 은총을 베푼 것 같이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나하스라는 이름은 뱀을 의미하며 몇몇 암몬 족의 왕들에 의하여 취해진 이름이던 것 같습니다. 나하스는 사울의 원수일 가능성이 많은 것으로 보이는데 사울의 세력으로 인하여 당했던 패배의 상처가 오히려 결과적으로는 다윗에게 은총을 베풀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기가 받은 은총을 생각하여 조문객을 암몬 땅에 파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땅에 사는 방백들은 하눈을 충돌질 하였습니다. 3절에 보면 “왕은 다윗이 조객을 보낸 것이 왕의 부친을 공경함인 줄로 여기시나이까 다윗이 그 신복을 보내어 이 성을 엿보고 탐지하여 함락시키고자 함이 아니니까”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 방백들이 이렇게 말함은 전쟁에서 다윗이 승리하자 시기하는 마음이 생겨서 그랬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의 나라를 불신하는 눈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암몬의 새 왕인 하눈은 귀가 옅은 사람인 듯 합니다. 생각도 해 보지도 않고 그냥 다윗의 신복을 잡아서 수염을 절반을 깎아버렸습니다. 동양인에게 수염은 자신이 자유인이라는 표시이며, 이렇게 함은 단순한 모욕이 아니라 노예로 취급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수염만 깎은 것이 아니라 그 의복의 중동볼기까지 잘랐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제사장만이 속옷을 입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의 평상복은 윗옷과 그 위에 헐렁하게 걸치는 겉옷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동불기까지 잘랐다는 것은 엉덩이 바로 위까지 자른 것으로 하반신을 다 드러내기 때문에 이것은 대단히 이스라엘 사람에게 있어서 수치스럽고도 지독스러운 모욕이었던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볼 수 있지만 노아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벌거벗은 채로 있었는데 노아의 아들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하자 두 형제는 옷을 취하여 뒷걸음질쳐서 아비의 하체를 덮었다고 하였습니다(창 9:20-23). 그 결과 아비의 하체를 본 가나안의 아비 함은 자기 형제들을 섬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만큼 하체를 드러내는 것은 커다란 수치였던 것입니다. 하눈이 이렇게 행한 것은 다윗에게 전쟁의 선전포고를 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어떻게 했습니까? 자기의 신복들이 그런 모욕을 당하고 돌아온 것은 다윗 자신을 모욕한 것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 신복들이 그런 일을 당하고 부끄러워하자 다윗은 그들을 여리고로 가서 수염이 자라기까지 머물러 있으라고 하였던 것입니다(5절). 여기에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몇 가지 사실들이 있습니다. 1. 선을 선으로 갚은 것입니다 성경에는 전에 다윗이 나하스에게 도움 받은 사실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다윗은 그 사실을 깊이 간직 하였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기에 나하스가 죽자 자신이 받은 친절을 생각하여 조문객을 보내었던 것입니다. 요즈음의 시대에서는 우리에게 주어졌던 많은 친절들이 복잡한 사회 속에서, 또 삶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사라지게 되었고, 받은 친절에 대하여 거의 잊어버리거나 당연한 것으로만 생각해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다윗은 암몬 왕의 호의에 대해서만 은혜를 갚은 것이 아니라 삼하 9장에도 기록되었지만, 자신이 요나단의 도움을 받은 것을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았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래서 그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에게 사울과 그 온 집의 재산을 다 돌려주고 그가 두 발이 다 절뚝발이라고 하였는데도 자기 상에서 같이 먹으라고 하였으며 왕자 중의 하나처럼 대하였던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인정이 있는 행위입니까? 우리가 선을 베푼 것이 남에게 알려지지 않고 그냥 묻혀버린다 할지라도 우리는 계속해서 선을 베풀어야 합니다. 선만 베푸는 것이 아니라 받은 선에 대해서도 잊지 않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갚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2. 선을 악으로 갚았습니다 다윗의 호의는 진정한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그 호의를 받는 편에서는 교활한 사람들에 의하여 그 호의가 의심스러운 것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호의는 오히려 악으로 가득찬 앙갚음을 받게 되었고 멸시를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그런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울로부터 계속해서 오해를 받았고 백성들이 다윗을 따르는 것을 시기하여 죽이고자까지 했던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도 많은 사랑으로 우리 인간들을 대하셨지만 오히려 그 사랑하신 사람들에 의하여 십자가에 달리게 되셨던 것을 성경을 통하여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선한 사람들만 사는 곳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탄의 세력이 더 강하기 때문에 어두워져 있습니다. 그래서 선이라는 것을 알려고 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위에서 다윗을 모함한다고 하여 거기 솔깃하여 다윗의 신복들에게 모욕을 준 하눈은 진실 된 것을 보지 못하는 무지한 자였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 가슴에는 상대편 사람들을 불신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본능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온전한 지식이 결여되어 있을 때 상상은 어떤 가능한 동기들을 바라보게 되고 그것은 좋은 쪽보다는 나쁜 면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하눈과 암몬 사람들의 거짓되고 악한 의도는 다윗의 행동을 잘못 판단하여서 우호적인 행위를 그들 자신을 스스로 파멸의 자리에 몰아넣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각 개인들에게 가장 비참한 저주의 상황으로 나타날 것이기도 합니다. 또 그리스도의 호의에 대한 방자한 배척이기도 합니다. 선을 악으로 갚음은 최고의 손실을 수반하는 법입니다. 곧 그리스도의호의에 대한 배척은 그의 위대성과 영광에 비례하는 손실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3. 악을 악으로 갚지 않았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편의 사람이 남에게 억울하게 멸시를 당하였거나 모욕을 받으면 기분이 상하게 됩니다. 기분만 상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으로 원한을 품게 됩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심리인 것입니다. 다윗은 자기의 신복들을 좋은 뜻을 가지고 암몬 땅에 들어가게 하였던 것인데, 그 좋은 뜻은 이루지도 못하고 신복들이 온갖 수치를 다 당하고 돌아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보게 됩니다. 다윗은 자기의 신복들이 하눈에게 많은 수치를 당했지만 결코 하눈을 나쁘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원망하는 마음을 갖지도 않고 자기의 신복들을 여리고로 보내어 수염이 자랄 때까지 그 곳에 머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조용하게 처리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다윗은 악을 악으로 갚지 아니하고 오히려 덮어 주려고 한 것으로 보입니다. 자신의 호의가 그렇게 무참히 거부당하였다는 것은 다윗에게 있어서 고통스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악을 악으로 갚지 않았기에 오히려 다윗에게는 더 많은 영토를 확장하게 되었고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선한 일들이 남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지고 오히려 분쟁의 원인이 되는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모든 어렵고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건져내시며 오히려 그것을 통하여 우리에게 보다 나은 삶을 영위하도록 하실 것입니다.
스펄전의 아침 묵상
므비보셋이 항상 왕의 상에서 먹으므로 예루살렘에 거하니라 그는 두 발이 다 절뚝이더라[삼하 9:13]
므비보셋은 결코 왕실 식탁을 빛내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식탁에서 계속 식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왕이 그의 얼굴에서 사랑하던 친구 요나단의 모습을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므비보셋과 마찬가지로 영광의 왕께 “이 종이 무엇이관대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삼하 9:8)라고 부르짖을지 모릅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와 가장 친밀한 교제를 나누심으로써 우리를 만족시켜 주십니다. 왠지 아십니까? 우리 얼굴 속에서 그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여호와의 백성은 다른 사람 때문에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독생자에 대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그를 위해 그의 비천한 형제들을 빈곤과 유배지로부터 일으켜 하나님의 자녀로 삼은 다음 그들을 천국 왕실로 데리고 들어가 그곳에서 교제를 나누며 필요한 것들을 공급받게 하실 정도로 강하고 깊습니다. 그들의 몰골이 흉하다고 해서 그 특권을 빼앗기는 것은 아닙니다. 절뚝발이라고 해서 하나님의 양자가 되는 데 지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절뚝발이라도 아사헬과 같이 달릴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유업을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절뚝발이기 때문에 혹시 우리의 힘이 약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로 인해 우리의 권리가 약화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왕의 식탁은 다리를 저는 사람들에게 아주 훌륭한 피난처입니다. 우리는 그 복음의 잔칫상에서 질고 속에서도 기뻐하는 법을 배웁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우리 위에 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주 심한 질고는 가장 사랑받는 성도가 되는 데 해를 끼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므비보셋이 다윗의 상에 앉아 식사를 하지만, 두 다리를 심하게 저는 그는 왕이 그 성을 떠나 도망칠 때 왕을 배웅하러 나갈 수 없었던 관계로 그의 종 시바의 중상 모략과 해를 당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이 약한 성도들이나 지식이 짧은 성도들은 원수에게 크게 당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많은 적들에게 노출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왕이 가는 곳으로 따라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같이 다리를 절게 되는 것은 어디서 떨어져서 그렇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영적으로 아직 어릴 때 양육을 잘못 받으면 회복이 어려운 낙심에 빠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죄로 인해 뼈가 부러지기도 합니다.
주님, 절름발이가 사슴처럼 뛸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주의 모든 백성들을 주님 상에 있는 빵으로 배불리 먹여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