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대통령의 최근의 취임사는 미국과 대결에서 소련의 붕괴를 공산체제의 붕괴로 그린 [역사의 종말]의 후속편으로 보여진다. 글의 행간에서 한국민에 대한 응원과 지원, 그리고 북한주민들에 대한 김정일체제에 들고 일어서라는 촉구가 느껴졌다. 김정일체제가 2005년 안에 또다른 주체적 차원으로 개혁개방하거나, 늦어도 2008년 까지 완전 붕괴에 이르게 된다면, 그러한 힘으로 향후 상당 기간 미국이 세계 자유민주주의를 주도할 상징적 파워를 갖게 된다고 여겨진다. (나는 산술적으로 북한이 황장엽선생이 주장하는 스스로 개혁 개방을 할 시간은 올해가 마지막이 아닐까 조심스레 생각해 본다.)
[역사의 종말] 1편으로 미국은 국제적으로 공산체제가 붕괴되었다고 해석한 듯 하다. 그래서, 김정일 체제에 대해서는 독재체제로 설명하고 있다고 본다.
부시대통령 취임사의 ‘자유’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물질주의에 빠진 최후의 인간이 아니게 되는 차원으로서의 ‘자유’이다. 즉, 인간 본연의 본성으로 되돌아가는 차원의 자유인 것이다. 미국이 다시 2차 대전 이후 질서의 ‘초심’으로 돌아가는 이론적 바탕이기도 하다.
‘자유’에서 ‘도덕’을 뽑고 ‘도덕’으로 사회와 국제 관계의 책임을 뽑는 어법은 전형적인 [실천이성비판]의 논리진행이다. 이것은 황장엽 선생의 독재 국가 북한에 대한 미국의 인권법 제정의 분명한 입장을 표현한다. 일본 중앙대학에서 칸트 철학에 빠졌다고 고백한 황장엽 선생의, 북한에 인권 문제로 포위하는 어법은, 칸트의 세계 평화론을 논리적 기반으로 하고 있다.
나 자신도 칸트적인 차원에서의 북한에 대한 관심을 인정한다. 그리고, 미국이 공산체제가 붕괴되었다고 선언한 이후에, 김정일 체제에 대해서 ‘독재’로 규정하고 시작하는 차원을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중요하게 다가오는 것은 미국민이 미국인으로서 자부심 갖는 초심으로 돌아가듯, 한국민이 한국인으로 자부심 갖는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이지, 우리 시점의 규정을 포기하는 미국정치권의 공식의 단순적용은 아닐 것으로 본다.
부시대통령의 취임사의 ‘자유’는 김정일을 반대해야 하고 북한동포에 대한 관심을 버려서는 자기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이론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우파 학문의 자유를 주장해온 사람들을 반대하는 논거로서가 전혀 아니다. ‘자유’는 마법 걸린 상황에서 진리 독점 된 특정인사가 부여하는 것만 그러한 게 아니리라 본다.
김정일 권력과 결탁한 악마의 세력들이 어떻게 권력적으로 체계화되어 있나를 객관적으로 드러내 보이지 않는 것이 잘못이라고 여러 차례 지적했었다. ‘자유’의 행진에 걸맞을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게 중요하다. 친북좌파 교재로 가르치는 선생들에게 삿대질로 내쫓아버릴 차원의 패기와 용기와 확신이 청소년들에게 형성되는 게 중요하다. 뭐 그러한가 보지 하고 찌그러드는 한국의 젊은이들의 문제는 그 어느 것보다도 중대하다. 최후의 인간으로 남는 이들이 그러한 선택을 하지 않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 자유는 각자의 마음 속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악의 축’으로 찍어대고 시작했던 이전 취임사보다는 훨씬 철학적이고 국제적 시각이다, 아버지 부시대통령 시대이거나 그 이전의 전통적 보수 신념으로 되돌아가 있다. ‘악의 축’에서 ‘자유’로 되돌아간 것은 ‘악’을 ‘악’으로 지적하여 궐기하는 이들과 연대하여 미국이 나아가겠다는 전략적인 면을 함축하고 있다. ‘자유’를 억압하는 이들이 ‘악’으로 설정하는 방식이다.
부시대통령의 취임연설문은 칸트의 세계 평화론과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을 종합하여 발전 시킨 차원이다. 이라크전을 통해서 약간 불리한 국면에 대해서 방어를 하면서도, 김정일 정권에 대한 공격적 고삐를 늦추지 않고 몰고 갈 수 있는 이론 논리이다.
결국, 한국적 차원에서는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어느 누가 파괴하는가의 각성과 행동이 이루어지도록, 자세하게 알려주는 용기와 패기가 중요할 것이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파괴하도록 하는 거짓 지식 나부렁이를 강조하는 이들을 고립시키는 청소년들과 대학생들의 궐기가 중요하게 된다.
샤란스키도 인정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조만간에 인터넷에 콩글리쉬 동원하여 샤란스키 앞으로 우파 사이트에, 친북좌파 386을 객관화시켜서 국민들의 패기를 일으키는 데에 왜 소련붕괴 이전의 패러다임의 변용으로 바라보는 게, 자유의 확장에 이익이 있는가를 지적하고 싶어진다. 나는 서구인들의 독자적 생각을 뭐라하고 싶지 않다. 인위적으로 ‘에드워드 사이드’짓하는 게 도덕적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구체적으로 ‘일국 사회주의 공산당’을 전제해야 한국 사회 좌파들의 밑그림이 그려진다. 대다수에 얼마나 자기 자유가 침해되는 가를 알게하는 최고 최선의 방법이 있다면, 미국의 주된 논조와 다르게 가도 달리 가는게 아님을 설명할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