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二十三章 의혈파망(義血破網)
①
산중의 새벽은 부지런한 새들의 노랫소리와 함께 찾아왔다.
어제 내린 비로 한결 청량한 대기를 호흡하는 것만으로도 지친 심신이 힘을
얻을 것만 같았다.
아직 채 어둠이 가시지 않은 시간, 출발을 서두르는 일행의 몸놀림은 조심스
러운 중에도 활기에 넘쳤다.
비록 어제 하루를 악전고투 속에 죽음의 위협을 느끼며 지냈지만 부상의 흔적
이 남아있는 몸일망정 생생히 살아있고 또 다른 하루를 시작한다는 것 그 자
체만으로도 가슴 벅찬 희망인 것이다.
왕성한 식욕이 생명력의 상징이라면 다섯 명의 사내와 두 명의 여인은 모두
팔팔한 생명력을 지닌 것이 분명했다.
주먹만한 크기로 잘라 밤새 연기에 그을린 멧돼지고기를 눈뜨기 무섭게 양껏
먹고도 모자라 각기 넉넉하게 갈무리 한 것이다.
오늘 하루 행낭 속의 고기를 먹을 여유가 있을지, 어쩌면 오늘이 지나기 전에
목숨을 잃어 영원히 먹지 못하게 될지 누구도 장담 못하는 상황임에도 그들
은 하루면 변해서 먹지 못할 고기를 단단히 챙겼다.
반드시 살고야 말리라는 결의라면 더욱 좋았고, 앞날을 예측 못하는 어리석은
인간들의 욕심이라 해도 관계없었다.
지금 이 순간 밝고 힘찬 모습이면 족한 것이다.
뿌옇게 밝아오는 동녘하늘을 응시하던 사군명이 서수림과 구태열을 먼저 출발
시켰다.
"방심해선 안됩니다. 혹, 적을 발견하면 싸우지 말고 속히 연락부터 취하십시
오."
동북에서 서남으로 길쭉하게 뻗은 산세는 한나절이면 벗어날 수 있을 규모였
다. 지난밤을 무사히 넘긴 것으로 보아 놈들이 아직 그들의 행적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하나 날이 밝는 대로 산을 뒤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고, 산을 벗어나면
십중팔구 또 다시 힘겨운 싸움이 시작될 터였다.
굳은 눈길로 인사를 대신하고 숲 속을 헤치며 발걸음을 옮기는 두 사람의 그
림자가 이내 숲 그늘로 사라졌다.
말에 재갈을 물려 울지 못하게 하고 옷자락을 단단히 여민 일행이 약 반각의
시간차를 두고 정찰조의 뒤를 따랐다.
그들이 전진함에 따라 흠뻑 물기를 머금은 나무들에서 후두둑 물방울을 떨어
져 살갗에 닿는 차가움만큼이나 긴장감이 더했다.
나무꾼들이나 가끔 다니는가.
유심히 살피지 않으면 눈에 뜨이지도 않을 소로를 따라 걸음을 옮긴지 한 시
진쯤.
약간 폭이 넓어진 길목에서 일행은 잠시 휴식을 취했다.
순간, 전면의 수풀이 움직이는가 싶더니 서수림이 산짐승처럼 영활한 몸놀림
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전방 오리쯤 앞에 적들이 있습니다."
삽시간에 일행은 팽팽한 긴장에 휩싸였다.
"몇 명이나 됩니까?"
"대략 오십 명쯤 되는 것으로 보입니다만……."
말끝을 흐리며 굳어지는 서수림의 얼굴.
아마도 불길한 소식은 그뿐이 아닌 듯 했다.
"괜찮습니다. 말해 보십시오."
사군명의 태도는 담담했다.
어차피 최악의 상황까지 각오하지 않았던가.
"놈들이 떠드는 소리를 멀리서 들어 확실친 않지만 이미 산 곳곳에 놈들이 깔
린 것 같습니다."
"이런 제길……!"
"지겨운 놈들, 끈질기게 따라붙는구먼."
왕충삼과 팽상문의 안색이 무거워졌다.
그리 크지 않은 안남산.
흑마방에서 마음먹고 뒤지기 시작했다면 발각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사군명은 지체없이 명령을 내렸다.
"구선배를 데리고 돌아오십시오. 시간을 끌수록 포위망은 좁혀질 것이고 피할
기회는 사라집니다."
"알겠습니다."
서수림이 날다람쥐같이 재빠르게 숲 속으로 사라지자 왕충삼이 조심스럽게 물
었다.
"어떻게 할 계획입니까?"
"……."
사군명은 대답대신 말들을 바라보았다.
"말을 이용합니까?"
"그렇습니다. 놈들은 산 전체를 둘러싸고 조여올 겁니다. 한 곳을 골라 말을
달리게 하고 포위망이 흐트러지는 틈을 노려 산을 벗어날 계획입니다."
"글쎄요……."
직업의 특성상 표사들은 말의 습성에 관해 아는 바가 적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팽상문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문제점을 제기했다.
"넓은 들판이라면 모를까, 길도 없는 산중에서 말들이 제대로 달릴지 모르겠
습니다."
맞는 소리였고 사군명도 익히 아는 사실이었다.
사군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제비를 뽑을 생각입니다."
"제비요?"
"한 사람이라도 말을 몰고 달리는 사람이 있어야 놈들을 오래 붙잡을 수 있을
겁니다."
"흐으음……."
말없이 돌아가는 상황만 살피던 설운경과 해연의 얼굴에 먹구름이 깔렸고, 왕
충삼과 팽상문은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어떤 입장이든 살아남으리라는 보장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 하나 혼자서 말을 몰고 놈들의 주목을 끌어야 하는 일이라면 그나마 살아날
가능성은 아예 없다는 것이 옳았다.
가능한 많은 적을 유도해야 하는 표적.
또 한사람의 희생이 강요되는 순간이었다.
의리를 내세운다면 죽든 살든 모두 함께 움직이는 것이 옳은 방법일지 몰랐다
하나 통쾌한 죽음보다 동료를 사지로 내모는 일이 훨씬 어렵고 힘든 결정이라
는 것을 알기에 일행은 사군명의 뜻을 거역하지 못하는 것이다.
무겁게 내려앉은 좌중의 침묵 속에서 사군명이 안장에 얹은 깔개에서 몇 가닥
실을 풀어 제비를 만들었다.
제비를 만드는 것이 마치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인 양 실을 꼬는 사군명의
태도는 진지하기만 했다.
잠시 후, 함게 나타난 서수림과 구태열에게 사군명이 자신의 결정을 얘기할
때, 해연이 결연한 표정으로 나섰다.
"나도 제비를 뽑겠어요."
"무슨 뜻이오?"
"모두가 군주님의 안전을 위한 일. 누군가 죽어야 한다면 나라고 예외일 수
없다는 말이에요."
사군명은 고개를 저었다.
"이건 우리들이 해야할 일이오."
"또 그 얘기군요. 군주님과 나는 표물이고, 당신들은 표사이니 모든 일은 당
신들이 해야한다는 소리……!"
해연의 말은 거침없이 쏟아졌다.
폭포수처럼 거센, 그러나 더 없이 맑은 격정의 토로.
"하나 나에게도 군주님을 모셔야할 책임이 있어요. 그리고, 당신 말대로 내가
단지 표물일 뿐이라 해도 당신들의 희생을 그저 당연한 일로 여기기에는 너
무도 가슴 아픈, 살아있는 표물이란 말이에요!"
"해연아……."
이제껏 일행에게 닥친 모든 시련이 자신의 죄인 것만 같은 자책을 억눌러 가
슴깊이 삭이며 애써 의연한 태도를 유지해온 설운경이 마침내 서럽게 해연을
불렀다.
"군주님, 만일 끝까지 모시지 못하게 되더라도 용서하세요."
진실의 힘은 원칙보다 강한 법.
사군명은 해연의 뜻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해연이 나서는 것이 원칙에 위배되긴 하나 북경의 무적세가까지 설운경을 무
사히 호송해야한다는 지상과제에 우선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사군명은 일행 앞에 손을 내밀었다.
"제비는 다섯 개. 짧은 것을 뽑는 사람이 혼자 갈 사람이오."
설운경을 제외한 일행은 여섯.
제비가 다섯 개면 사군명 자신은 빠진다는 의미였다.
누구나 당연한 일이라고 공감하긴 하나 어쩐지 섭섭한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
다. 혹, 사군명이 자신도 제비를 뽑겠다고 한들 그러라고 동의할 사람도 없지
않은가.
특히, 구태열이 불만이 큰지 뭔가 얘기를 꺼내려 할 때, 사군명이 눈짓으로
제지하고 빠르게 말을 이었다.
"저는 표행을 책임진 입장이니 제비에서 열외가 됩니다. 단, 지금은 저도 제
비를 뽑고 제 대신 팽선배를 제외시키겠습니다."
가장 당황한 사람은 팽상문 본인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표행의 책임자가 누구인지 잊었단 말이오?"
하나 사군명은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압니다. 여러분의 생사여탈권이 나에게 있다는 것도 압니다. 명령대로 따르
십시오!"
의외이긴 하나 거부할 수 없는 명령.
그 순간, 사군명의 전신에서 풍기는 위엄에 떠오르는 의혹을 드러내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감정에 휩싸인 두 사람이 있었다.
감격 혹은, 감동에 몸을 떠는 구태열.
그리고, 한겨울 삭풍(朔風)을 막아주던 장막이 날아가 버린 듯 갑자기 몰아닥
친 가슴 시린 상실감에 사로잡힌 설운경.
그들의 심중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군명은 담담하게 제비뽑기를 재촉했다.
"서둘러야 합니다."
하나 일은 사군명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뽑을 필요 없소이다."
왕충삼이었다.
"나도 좀 삽시다. 내가 안 그래도 제일 자신 없는 게 경공인데 다리까지 다쳤
으니 행여 놈들과 마주치면 뛰지도 못하고 개죽음 당할게 뻔합니다. 하나 말
타는 솜씨는 남 못지 않으니 그나마 내가 살길은 따로 있는 것 같소……."
왕충삼이 깊은 검상으로 아직도 핏물이 배나오는 오른쪽 허벅지를 가리키며
천연덕스럽게 주절거리는 순간, 팽상문이 서둘러 말을 막았다.
"쓸데없는 소리 말아! 어젯밤 쳐 마신 술이 아직 안 깬 모양인데 주정하지 말
란 말이야!"
"야, 이 사람아! 내 주량이 얼만데 어제 마신 화주 몇 잔에 헛소리할 사람으
로 보이는가? 나대로는 다 살자고 하는 짓이니 자네야말로 입 닥치고 가만있
어."
"지랄, 누가 재상 가의 뼈다귀 아니랄까봐 잘난척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구나!
"아무렴! 지체 높은 집안의 후손이 자네하고 하는 짓이 같아서야 조상 볼 면
목이 없지."
결코 곱지 않은 대거리 속에 흐르는 비단보다 고운 마음결.
아무리 악다구니를 쓴다해도 두 사람의 심중에 가득한 각별한 우정을 모를 사
람이 없었다.
사군명은 난감했다.
사실 왕충삼의 부상은 가볍지 않았다.
적과 마주치는 일없이 그냥 길을 가는 것이라면 몰라도 언제 어디서 마주칠지
모르는 적과 싸우며 삼엄한 포위망을 뚫고 나가기에는 아무래도 부담이 되는
것이다.
"뭘 망설이시오. 이러다가 놈들이 들이닥치겠소이다!"
왕충삼이 사람들에게서 말고삐를 빼앗듯이 잡아챘다.
두 필의 대완구와 세 필의 쾌재풍.
자기들의 운명을 알 리 없는 말들은 재갈이 답답한지 연신 고개짓을 해대며
땅을 찼다.
"좋습니다. 왕선배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어렵게 입을 연 사군명에게 왕충삼은 흔쾌히 인사를 건넸다.
"허허허, 고맙습니다. 진작 그러실 일이지……."
지체없이 말 등에 오른 왕충삼이 일행을 돌아보았다.
"부디 멋지게 표행을 성공시키시오. 내 저승에서 먼저간 동료들과 함께 지켜
보리다!"
천천히 말을 몰아 전진하는 왕충삼의 등 너머로 마지막 인사가 들려왔다.
"팽가야! 행여 나 보고싶다고 만용부리지 말고 질기게 오래오래 살거라……."
"미친 놈……."
다섯 필의 말을 끌고 숲 속으로 사라지는 왕충삼의 귀에 들릴 듯 말 듯 내뱉
은 팽상문의 목소리가 촉촉이 젖어있었다.
첫댓글 즐독합니다
즐독합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즐~~~감!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즐독입니더
감사...
즐감합니다.
즐감하고 감니다
감사합니다
즐독 입니다
고맙습니다
즐독 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즐감
즐독입니다
재미이습니다 감사합니다
잘읽었습니다
감동적입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즐감하고 깁니다~~~
즐독 입니다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