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朝鮮)의 이오(伊吾) 토벌(討伐)과 소륵(疏勒) 수비(守備) (제1편)
○ 왜곡(歪曲)되고 조작(造作)된 조선사(朝鮮史)는, 어떤 사료(史料)를 선택(選擇)할까 하는 고민(苦悶)은 필요(必要)하지 않는다. 대부분(大部分)의 것들이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논자(論者)들의 손때가 묻혀 있기 때문이다. 즉(卽) 왜곡(歪曲)된 것들이 십중팔구(十中八九)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배경(背景)은, 서력(西曆) 1,910년 그 이전(以前)부터 치밀(緻密)하게 준비(準備)된 것들이다.
특히 〈고지도(古地圖)나 스케치, 그림〉 등을 갖고, 사실(史實)인 냥 하는 호들갑은 어이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을 가지고, 자신(自身)의 주장(主張)을 합리화(合理化)하려 한다면, 그에 맞는 고증자료(考證資料)를 하나하나 논거(論據)로써 증거(證據)하여, 그에 따르는 해석(解釋)과 설명(說明)이 뒤 따라야 하는 것이다. 이건 도리(道理)다.
「고지도(古地圖)」가 사실(史實)을 근거(根據)로 만들어졌다는 증거(證據)가 없다. 무엇으로 그것을 증명(證明)한다거나 고증(考證)할 수 있는가? 이게 문제(問題)인 거다.
「스케치(sketch)나 삽화(揷畫)」등 역시 똑같은 사안(事案)이다. 이건 그림을 그리는 자(者)의 주관(主觀)이 크게 개입(介入)될 여지(餘地)가 많다. 보지도 않고, 경험(經驗)하지도 않은 것들을, 설명(說明)을 들었다거나 몇 사람 건너 들었다거나 하는 것만으로 그린 그림을 가지고 사실(史實)인 냥 한다면…그건 왜곡(歪曲)과 조작(造作)이 개입(介入)될 여지(餘地)가 그만큼 큰 것이다.
특히 ‘고종(高宗)이나 명성황후(明成皇后)’등처럼 근대(近代)의 중요인물(重要人物)들의 스케치(sketch)나 삽화(揷畫) 등을 가지고, 가불가(可不可)를 따지지만, 우선(于先) 따져 볼 것이 “스케치(sketch)나 그림” 등의 “출처(出處)와 고증(考證)” 일 것이다.
글 내용(內容)을 보면 대략(大略) 알 수 있다. 조선사(朝鮮史)를 판타지(Fantasy)화한다거나, 욕보이려는 하는 행동(行動)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될 일이 없다. 이런 사람을 우린 경계(警戒)해야 한다. 역사통설(歷史通說)논자(論者)들의 악의적(惡意的) 행태(行態)일 수 있기 때문이다.
○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기록(記錄)되어 있는 이오(伊吾)【오늘날의 신강성(新疆省) 합밀(哈密)이다. ‘하미’라고도 한다.】토벌(討伐)은 사실(史實)일 수 있을까?
➠ ‘이오(伊吾’는 곧 ‘합밀(哈密)’이고, 오늘날의 ‘하미’ 이다. 옥문관(玉門關)의 북(北)쪽에 있다.
-----------------------------------------------------------------------------------
(1)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6년 경진(1460, 천순 4) 10월 23일 (을축) :
《御製諭咸吉道都節制使朴烱曰 : 어제(御製)로 함길도도절제사(咸吉道都節制使) 박형(朴炯)에게 유시(諭示)하기를 : 旣委卿以大任,卿本知予心,待時而用者也.申政丞平戎之後,虜必更生心,此勢之必然也. : 이미 경에게 대임(大任)을 맡기었으니, 경은 본디 내 마음을 알아서 때를 기다려 쓰는 자이다. 신 정승(申政丞)이 오랑캐를 평정한 뒤에 오랑캐가 반드시 다시 마음을 낼 것이니, 이것은 필연(必然)한 형세(形勢)이다. 今聞虜有欲侵之志,予料以我兵力何足慮哉?但未知卿意如何.卿若有勇志,則予有一言,卿其審聽. : 지금 듣건대, 오랑개가 침노하고자 하는 뜻이 있다고 하니, 내가 우리 병력을 헤아리면 어찌 족히 염려할까마는 다만 경의 뜻이 어떠한지 알지 못하겠다. 경이 만일 용감한 뜻이 있다면 내가 한 마디 하겠으니, 경은 살펴 들으라. 可選精兵數百數千,迭入侵突,或擊東西,或軼南北,使敵莫知所備,期殲凶類漠北無人,然後乃已. : 정병(精兵) 수백 수천을 뽑아서 번갈아 들어가 침공하여 혹은 동서를 치고 혹은 남북을 침노하여 적(敵)으로 하여금 방비할 바를 알지 못하게 하여, 기어코, 흉한 무리를 섬멸하여 막북(漠北)에 사람이 없게 한 연후에야 그치라. 其間用兵節目,予豈遙授?卿可出氣力任意而行.大抵善保爲上,成功次之,生事最下. : 그 사이에 군사 쓰는 절목(節目)은 내가 어찌 멀리서 지휘하겠는가? 경이 기력(氣力)을 내어 임의대로 행하라. 대저 잘 보전하는 것이 상(上)이 되고 성공하는 것이 다음이며, 일을 내는 것이 최하이다.》라고 하였다.
➊ 조선(朝鮮)의 세조대왕(世祖大王)께서 유시(諭示)한 내용(內容)에 따르면 : 신(申) 정승(政丞)이 평정(平定)한 오랑캐는 북적(北狄)이 아닌 「되놈(戎)」이라고 하였는데, 이들이 다시 배반(背反)하여 노략질하려는 마음을 갖고 있으니, 이를 어떻게 대처(對處)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융(戎)이란 : 지금의 해석(解釋)은 북(北)쪽 오랑캐 또는 서(西)쪽 오랑캐라고 한다. 그러나 북쪽의 오랑캐는 적(狄)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사이(四夷)는, 서융(西戎)·동이(東夷)·남만(南蠻)·북적(北狄)이라고 한 것을 상기(想起)하면 이해가 쉽다.
➠ 예전의 융(戎)이란 : 해석(解釋)은, ⓐ 중국(中國)의 서쪽에 있던 야만(野蠻)의 종족(種族) [출처(出處) : 네이버한자사전] ⓑ 서쪽 오랑캐(戎)[출처(出處) : 존 한자사전]라고 하였다. ⓒ 홍자옥편(弘字玉篇)에서는, 서이(西夷) 오랑캐 융(戎)이라 했고, ⓓ 백년옥편(百年玉篇)에서는, 서(西)쪽 오랑캐를 말한다고 하였다. 【일부(一部)에서는 북쪽오랑캐를 말한다고도 한다.】
➋ 막북(漠北)이란, 21세기 현재(現在)의 해석(解釋) :〈고비 사막의 북방(北方)지방(地方). 현재(現在)의 외몽고(外蒙古)지방〉이라고 한다.
➠ 20세기 이전(以前) 및 역사서(歷史書)에서는, 〈막북(漠北)이란 : 사막(沙漠)의 북(北)쪽을 말한다.〉고 하였다. 고비사막(Gobi沙漠)의 북방지대(北方地帶)로부터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북방지대(北方地帶)까지를 아우르는 말이다.
➌ 세조대왕(世祖大王)의 어명(御命)으로 신(申) 정승(政丞)이 평정(平定)한 막북지대(漠北地帶)란 : 〈고비사막(Gobi沙漠)의 북방지대(北方地帶)로부터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북방지대(北方地帶)까지의 어느 지방을 말하는 것이다.〉 이곳에 있던 오랑캐(戎)들을 정복(征服)했으나, 또 다시 이들이 준동(蠢動)할 기미(幾微)가 보이자, 함길도도절제사(咸吉道都節制使) 박형(朴炯)에게 유시(諭示)를 하고 있는 것이, 위의 글 내용(內容)이다.
➍〈可選精兵數百數千,迭入侵突,或擊東西,或軼南北,使敵莫知所備,期殲凶類漠北無人,然後乃已. : 정병(精兵) 수백 수천을 뽑아서, 번갈아 들어가 침공하여, 혹은 동서를 치고, 혹은 남북을 침노하여, 적(敵)으로 하여금 방비할 바를 알지 못하게 하여, 기어코 흉한 무리를 섬멸하여 막북(漠北)에 사람이 없게 한 연후에야 그치라.〉한 것이다.
위 글에서 중요(重要)한 것은 지명(地名)인 “막북(漠北)”이다. “막북(漠北)”이란 말 그대로 “사막(沙漠)의 북(北)쪽”을 말하는 것으로, 대륙의 영하성(寧夏省) 서(西)쪽의 동북(東北)방향으로 걸쳐있는 하란산맥(賀蘭山脈)을 한계(限界)하여【황하(黃河)가 동북(東北)으로 흐르는 곳과 겹치는 곳이다.】, 그 동(東)쪽에는 사막지대(沙漠地帶)가 없었다.
그렇다면 세조대왕(世祖大王)의 어명(御命)이 있을 당시(當時)【서력 1,460년】의 막북(漠北)이란 : 고비사막(Gobi沙漠)의 북방지대(北方地帶)로부터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북방지대(北方地帶)를 말하는 것이 된다.
➎ 그렇다면 당시(當時)의 조선왕조(朝鮮王朝)는 어디에 있었는가? 반도(半島) 땅에… 아니면 대륙(大陸)의 요충지(要衝地) 땅인 중원(中原) 한복판에… 따지고, 시시비비(是是非非)를 가릴 필요(必要)조차 없는 이야기다. 「반도조선(半島朝鮮)이란 존재(存在)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
(2)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 세조(世祖) 10년 갑신(1464, 천순 8) 9월 6일(병진) / 평안도 강변 구자 중에 단약한 것을 철거하는 것에 대해 논의하게 하다
《時,議以平安道江邊口子單弱不能禦賊,欲撤之以合於諸鎭. : 그때 평안도(平安道) 강변구자(江邊口子) 가운데 단약(單弱)하여 적(賊)을 능히 방어(防禦)할 수 없는 것을 의논하여 이를 철거(撤去)하여 여러 진(鎭)에 합치려고 하였다. 下御札云:平安道當賊初而兵事尤急,常以南兵入戍,無故自疲,沿邊之民,日耗於逃擄.諸將未聞逐賊,其故何也? : 어찰(御札)을 내려 이르기를 : 평안도(平安道)는 적(賊)을 맞는 전초지(前哨地)인데 군사 일이 아주 위급하면 항상 남도(南道)의 병사(兵士)들이 들어가 수자리 살지만, 까닭 없이 스스로 피폐(疲弊)하여지고, 연변(沿邊)의 백성들이 도망하거나 피로(被撈)되어 날로 줄어든다. 제장(諸將)들이 아직 적(賊)을 쫓았다는 소문을 듣지 못하였으니, 그 까닭이 무엇인가? 不務實邊,不恤邊民,多設口子故也.夫所以置鎭列成,欲以相援也.冬則入保,夏則出農,軍兵守護,江外不礙耳,口子實無所用. : 변방(邊方)을 실(實)하게 하기에 힘쓰지 않고 변방의 백성들을 흠휼(欽恤)히 여기지 않고서 구자(口子)만을 많이 설치하였기 때문이다. 대저 진(鎭)을 설치하여 열(列)을 이루게 하는 까닭은 서로 구원하게 하려는 것이다. 겨울에는 입보(入 保)하였다가 여름에는 나가서 농사를 짓고, 군병(軍兵)이 지키고 보호하면 강 밖의 땅도 거리낄 바가 없고 구자(口子)는 실로 아무 소용(所用)이 없을 것이다. 假如江界千兵設百口子,則賊十一人一擧盡擄矣.節制使雖曰,吾有千兵.實有十兵而已. : 가령 강계(江界)의 1천 명 군사가 1백 개 구자(口子)를 설치한다면 적(賊) 11인이 일거(一擧)에 다 노략질할 것이다. 節制使가 비록 ‘내가 1천 명 군사가 있다.’고 말하더라도 실제로는 10명의 군사가 있을 뿐이다. 是故移南民以實之,撤口子以强之,觀兵,田獵,征伐不休,以鍊士卒,宣威沙漠,何可自疲日耗,臨敵昏惰,罔知所措乎? : 이러한 까닭으로 남도(南道)의 백성들을 옮겨다 여기에 채우고 구자(口子)를 철거(撤去)하도록 강요하는 것이다. 관병(觀兵)·사냥[田獵]·정벌(征伐)을 쉬지 않는 것은 사졸을 훈련시켜, 위엄을 사막(沙漠)에 펴려는 것인데, 어찌 스스로 피폐하고 날로 줄어들게 하여, 적(賊)에 임(臨)하여 혼미(昏迷)하고 나태(懶 怠)하여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할 수가 있겠는가?” 하고, 仍示崔恒等曰:昨僉議紛紜,予撮其大旨而書之,以定其議耳.卿等詳覽焉. : 이어서 최항(崔恒)에게 유시(諭示)하기를, “어제 여러 사람들의 의논이 분분(紛紛)하였는데, 나는 그 대의(大義)를 모아서 이를 써서 의논을 정(定)할 뿐이다. 경(卿) 등이 상세히 읽어 보라.” 하고, 又示儒臣曰: 予之所以示汝輩者,以汝輩皆予所養育者也.又命講論邊事及經史,縱橫出入,以觀其氣象. : 또 유신(儒臣)들에게 유시(諭示)하기를, “내가 너희들에게 보이는 까닭은, 너희들은 모두 내가 기르고 키우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하고, 또 명하여 변방(邊方)의 일과 경사(經史)를 강론(講論)하게 하고 종횡(縱橫)으로 의견을 내고 받아들이게 하여 그 기상(氣象)을 엿보았다. 又召李永垠曰:汝居諸儒之首,每事輒先論對,可用人也. : 또 이영은(李永垠)을 불러서 말하기를 : 네가 여러 유신(儒臣)의 우두머리에 있으면서 매사(每事)에 먼저 논하고 대답하니, 쓸 만한 사람이로다.” 하였다.》고 하였다.
➊ 위의 본문(本文) 내용(內容)도 (1)의 것과 대동소이(大同小異)한 것이다. 곧 〈조선(朝鮮)의 영토(領土)안에 있는 함경도(咸鏡道)와 평안도(平安道)에는, 사막지대(沙漠地帶)가 있으며, 사막(沙漠)의 북(北)쪽에는 막북지대(漠北地帶)가 펼쳐져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무려(無慮) 오백(五百)오십(五十) 여년(餘年) 전(前)의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을 기록(記錄)한 왕조실록(王朝實錄)이라면, 오늘날 이러한 사실(史實)을 부정(否定)할 수 있는 증거(證據)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➋ 천자(天子) 세조대왕(世祖大王)께서는,〈觀兵,田獵,征伐不休,以鍊士卒,宣威沙漠 : 관병(觀兵), 사냥(田獵), 정벌(征伐)을 쉬지 않는 것은 사졸을 훈련시켜, 위엄을 사막(沙漠)에 펴려는 것이다.〉라고 그 이유(理由)를 신하(臣下)들에게 설명(說明)하고 있다. 도대체 반도(半島) 북방지대(北方地帶)인 평안도(平安道)나 함경도(咸鏡道) 이북(以北)지방에 어떤 사막지대(沙漠地帶)가 펼쳐져 있었기에, 이런 어명(御命)이 내려질 수 있었을까?
【관병(觀兵) : 군대(軍隊)의 위세(威勢)를 보이며, 군사(軍士)를 벌려 세우고, 검열(檢閱)하는 것을 말한다.】
당시(當時)의 조선(朝鮮) 영토(領土)는, 이러한 지형지세(地形地勢)가 펼쳐져 있는 곳에 있었다는 것이 올바른 역사해설(歷史解說)이다. 특이(特異) 지형지세(地形地勢)인 사막지대(沙漠地帶)는 그것이 형성(形成)되어진지 수천(數千), 수만(數萬)년 전(前)의 일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급격(急激)한 자연환경(自然環境) 변화(變化)로 인하여, 새롭게 만들어지는 사막지대(沙漠地帶)는, 인간(人間)의 자연파괴(自然破壞)로 인해, 인위적(人爲的)으로 만들어진 것들이다.】
------------------------------------------------------------------------------------------
(3) 택당집(澤堂集)【이식(李植) 1584년(선조17)~1647년(인조25)집】 제3권 / 시(詩) : 용골산성(龍骨山城)의 총진대(摠鎭臺)에서 노닐며 18운(韻). 이희건(李希建)이 쌓은 것임.
《산으로 둘러싸인 용골(龍骨)산 저 보루(堡壘)에 : 龍 骨 環 山 壘 / 총진대 마치도 낭아봉(狼牙棒)처럼 우뚝 : 狼 牙 摠 鎭 臺 / 중략(中略) / 압강(鴨江) 물줄기 허리띠처럼 둘러 있고 : 鴨 水 縈 爲 帶 / 중략(中略) / 서쪽 문은 말갈과 서로들 대치하고 : 西 門 當 靺 鞨 / 동쪽 길은 등·래의 벌판 제어하도다. : 東 道 控 登 萊 / 중략(中略) / 높다란 누대에 칼 짚고서 서 있노라 : 倚 劍 立 崔 嵬 / 요동(遼東) 들판 자욱한 오랑캐 모래 먼지 : 鶴 野 胡 沙 漲 / 막부(幕府)에 급한 격문(檄文) 빗발치는데 : 燕 臺 羽 檄 催 / 소륵을 고수(固守)한단 소문만 들려올 뿐 : 但 聞 疏 勒 守 / 삭방 평정할 계책 올리는 이 하나 없네. : 誰 策 朔 方 恢 / 중략(中略) / 장한 그 뜻 절대로 꺾이지 마시라. : 壯 志 莫 低 摧 》
위의 글은 17세기 초(初)에 지어진 것으로 판단(判斷)되는데, 이 글속에서도 반도(半島) 땅과 어우러지는 지형지세(地形地勢)는 찾아볼 수가 없다. 저자(著者)인 이식(李植)이란 분은, 어렸을 때 임진왜란(壬辰倭亂)을 겪었고, 장년(長年)의 나이에 병자호란(丙子胡亂)을 겪었을 것이다.
➊ 이러한 시대(時代)에 맞춰보면 : 당시(當時)에도 조선왕조(朝鮮王朝)는 반도(半島)땅에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더불어 「왜란(倭亂)이나 호란(胡亂)」등 역시(亦是), 반도(半島) 땅과는 전혀 관계(關係)없는 사건(事件)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➋〈서쪽 문은 말갈과 서로들 대치하고 : 西 門 當 靺 鞨〉: 말갈(靺鞨)은 누군가? 이들의 선대(先代)는 물길(勿吉)이고, 물길(勿吉)의 선대(先代)는 읍루(挹婁)고, 읍루(挹婁)의 선대(先代)는 숙신(肅愼)이라고 전해오고 있는 종족(種族)의 이름이며, 수천(數千)년 전(前)의 숙신(肅愼)은, 단군(檀君)의 통치(統治)를 받았다고 한다.
이들 종족(種族)에 대해서 : 역사통설(歷史通說 : 半島史觀·植民史觀)에서 중국(中國)의 동북방(東北方)에 있다고 하고, 또 반도조선(半島朝鮮)의 동북방(東北方)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고전(古典)인 산해경(山海經)·회남자(淮南子)등에서는 서(西)쪽과 북(北)쪽 사이에 있었다고 전한다.
오늘날의 반도(半島) 땅에서 이를 바라보면 :「서(西)쪽 문(門)은 말갈(靺鞨)과 서로 대치한다.」고 하였다. 반도(半島)라는 특이(特異)지형(地形)은, 서(西)·남(南)·동(東)의 삼면(三面)이 바다(海)에 임해 있어, 말갈(靺鞨)이란 종족(種族)이 ‘아가미(gill)와 부레(air bladder)’가 달려 바다(海)속에서 살아가는 인간(人間)집단(集團)이 아니라면, 서(西)쪽에 있을 수가 없다.
고전(古典)인 〈산해경(山海經)·회남자(淮南子)등에서는 서(西)쪽과 북(北)쪽 사이에 있었다.〉고 전한다. 이 자(者)들이 바로 말갈(靺鞨)의 후손(後孫)인 당시(當時)의 여진족(女眞族)이며, 청(淸)이다.
◆〈서(西)쪽 문(門)은 말갈(靺鞨)과 서로 대치한다.〉는 말은, 대륙(大陸)의 서(西)쪽 땅에서나 가능(可能)한 말일 뿐, 반도(半島) 땅에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존재(存在)할 수 없는 이야기일 뿐이다.
➌〈동쪽 길은 등·래를 제어하도다. : 東 道 控 登 萊〉: 오늘날의 ‘등주(登州)와 래주(萊州)’는 대륙(大陸)의 땅, 산동성(山東省) 동(東)쪽 산동반도(山東半島)에 있었다고 하는 지명(地名)이다. 산동반도(山東半島)의 북(北)쪽은 발해(渤海)와 접해 있고, 래산(萊山)의 동(東)쪽에 래주(萊州)가 있고, 그 동(東)쪽에 등주(登州)가 있다.
래주(萊州)와 등주(登州)의 북(北)쪽은 발해(渤海)이고, 등주(登州)의 동(東)쪽은 황해(黃海)에 닿는다. 서(西)쪽은 내륙(內陸)이고, 남(南)쪽은 산동반도(山東半島) 내륙(內陸)이다. 특히 래주(萊州)는 래주만(萊州灣)에 있으며, 래산(萊山)이 있어, 그 이름을 취해 래주(萊州)라는 지명(地名)이 생겼다는 것을 유추(類推)해 볼 수 있다.
반도(半島) 땅은, 반도(半島)라는 특이(特異)지형(地形)으로 인하여, ‘서(西)·남(南)·동(東)의 삼면(三面)이 바다(海)’에 임해 있어, 동(東)쪽에 등주(登州)와 래주(萊州)가 자리 잡을 곳이 없다. 땅이 없는데, 어떻게 지명(地名)이 생길 수 있겠는가?
➍〈소륵을 고수(固守)한단 소문만 들려올 뿐 : 但 聞 疏 勒 守〉: 이 구절(句節)에 대해서는 〈역사통설(歷史通說 : 반도사관과 식민사관) 논자(論者)들은, 비유법(比喩法) 곧 은유법 (metaphor, 隱喩法)을 사용(使用), 차용(借用)한 구절(句節)이다.〉라고 말할 것임은 100%다.
그 주석(注釋)을 보자. 소륵(疏勒)에 대한 표현(表現)은, 《외로운 산성(山城)을 뜻하는 것이고, 바로 용골산성(龍骨山城)을 말하는 것인데, 동한(東漢)의 경공(耿恭)이, 단약(單弱)한 병사로, 소륵성(疏勒城)을 고수하면서, 흉노의 수만 군사를 상대로 온갖 고초를 겪는 속에서, 수년 동안이나 절의를 지키며 끝내 사명을 완수한 고사가 있다. 後漢書 卷19 耿邯列傳 附 耿恭傳》라고 말한다. 바로 이것을 비유(比喩)한 것이라는 이야기다.
➎ 소륵(疏勒) : 소륵(疏勒)은 중국(中國) 신강성(新疆省) 서(西)쪽에 있는 도시(都市)로 “카시가르(Kashgar)·카스(喀什)”라고 하는데, 북위(北魏) 때는 유연(柔然)의 땅도 되었던 곳이다.
이것은 타림분지(盆地)의 서(西)쪽에 있는데, 천산남로(天山南路)와 북로(北路)가 합쳐지는 길목이다. 카슈가르강(江) 상류(上流), 파미르고원의 북동(北東)쪽 기슭에 있다. 이곳은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및 구라파(歐羅巴)로 가는 길목이라고 하였다. 옛 부터 말하기를, 장안(長安)까지 9,300리 떨어져 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왕조실록(王朝實錄)이나 대신(大臣), 학자(學者)들이 남겨 놓은 문집(文集)에서 말하는 〈“소륵(疏勒)에 대한 것들은 모두 은유(隱喩) 또는 비유(比喩)”법을 적당히 사용(使用)하여, 붓대를 놀린 것에 지나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 그렇다면 세조대왕(世祖大王)께서 〈무엇 때문에 사막(沙漠)과 막북지대(漠北地帶)에, 조선왕조(朝鮮王朝)의 위엄(威嚴)을 펼치려 한 것이냐?〉하는 것에 답(答)해야 한다. (제 2편으로 계속)
2018년 05월 12일 〈글쓴이 : 문무(文武)〉
|
첫댓글 조선사의' 원상복구' 가능성은 있을까?
<힘들 것이다>라는 대답이 주류를 이룬다.
현재의 미국이나 중국을 능가하는 '초강대국'으로 우뚝 서지 않는 한 말이다.
이런 '초강대국'이 가능할까?
현실적으론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어떻게 초강대국으로 발돋음 할 수 있겠는가? 지들끼리 싸우기도 바쁜 판에 말이다.
이런 이야기는 꿈속에서나 가능한 얘기다.
그래도 조선사 연구는 계속되어야 한다. 스스로 자신들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국민들의 자존심이 걸린 일이니까.......정말 그렇다고 생각하는 국민들이 얼마나 될까?
이렇게 하나 하나 따져보면.....그래도 좋다고 틈만 있으면 공부하는 분들은 가슴속에 무엇을 담고 있는 걸까?
가능 하다 봅니다만은요...
세계의 모든 나라가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 된다면 주위를 돌아볼 여유가 생기죠.
지금은 역사가 아닌 언어의 뿌리를 연구 하시는 분들이 조선반도의 허구를 입증하죠.
갑골문자와 가림토 문자와 산스크라트어와 한자와 한글만을 가지고도요.촤근에는 탄이라 불리우는 국가들에게서도 한민족과의 연관성을 밝히고 있는 듯 합니다. 지구조선사는 우리만에 문제가 아닌 듯 합니다. 희망이 외부에서 보입니다.
안녕하세요. <바보9>님!
관심과 성원에 우선 감사드립니다.
님께서 말씀하신대로 가능한 일이라면 얼마나 좋은 일이겠습니까.
많은 분들이 음지에서 조선사를 위해 노력하시니 분명 좋은 현상이며, 좋은 일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찾고, 왜곡과 조작된 것들을 찾아내어 바르게, 올바른 역사를 찾아 놓는 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인정하느냐 하는 문제는 별개입니다. 결코 인정하지 않으리란 것이죠.
다만 우리가 초강대국으로 소위 강대국들을 압도할 수 있다면, 그나마 가능한 일이라고 봅니다.
그런 날이 올 수 있을까요?
그런 날이 온다면.....기다리며, 논거를 만들어 놓아야 겠습니다.
감사드리며, 늘 건강하시길 빕니다.
우리의 불경은 크게 산스크리트어를 한자로 옮겨 기록한 것이라 합니다.불경을 제대로 해석을 못했던 이유가 한자만을 가지고 풀이를 해서 엉뚱한 해석이 나온다고 합니다.
산스크리트어가 한글과 거의 비슷 하다고 합니다.한자와 함께 우리 한민족 언어라고 합니다.그지역이 삼한의 한곳과 신라와 백제의 연결고리를 찾는 지역 같아서 저는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터키나 카자흐스탄등이 과거의 역사에 우리민족의 연관성 및 같은 계열의 뿌리로 보는 역사시도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러시아에서 독립된 많은 탄이라 불리우는 국가들과 티벳 몽골 인도 동남아 아랍등이 가지고 있는 기록을 더 하면 조작된 역사왜곡이 허구라는 것이 증명 되리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