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은 산이요(山是山), 물은 물이로다(水是水)」
참 평이한 말이다. 초등학생도 말할 수 있는 이 평이한 말이
선가(禪家)의 법어로 회자하게 된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일까?
이 말이 처음 선가에 나오게 된 유래는 살펴보면
중국 송(宋)나라 때 선승인 청원행사(淸原行思)가 한 말로
송(宋)대에 발간된 전등서(傳燈書)인
「오등회원(五燈會元)」에서 비롯된다.
「오등회원(五燈會元)」은 중국 남송대(南宋代)의 선승(禪僧)
보제(普濟): 1178∼1253)의 지휘 아래 그의 제자들과
기존의 불조(佛祖) 전등록(傳燈錄)들을 정리 재편집하여
송나라 보우 원년(寶祐元年: 1253)에 간행된 전등서로
그 뒤 원나라 말기인 지정 2년(至正二年: 1364)에 중각된 뒤로도
여러 번 증각 되었다. 보제(普濟)의 속성은 장씨(張氏)‚
호는 대천(大川)‚ 사명(四明) 봉화(奉化) 출신으로
19세에 출가하여 천태의 선을 배웠으며
묘승선원(妙勝禪院)‚ 대자보국사(大慈報國寺)에 주(住)하신 선승이다.
그의 저술인 <오등회원>은 남송말(南宋末)에 나온 것으로
특히 북송(北宋)‚ 남송초(南宋初)에 나온
5종의 <전등록> 류를 종합한 것으로,
곧 도원(道原)의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부마도위(駙馬都尉) 이준욱(李遵勗)의 <천성광등록(天聖廣燈錄)>‚
유백(惟白)의 <건중정국속등록(建中靖國續燈錄)>‚
도명(道明)의 <연등회요(聯燈會要)>‚
정수(正受)의 <가태보등록(≪嘉泰普燈錄)>
다섯 종의 전등록(傳燈錄)에서 요지를 뽑았으므로
제명을 <오등회원(五燈會元)>이라고 한 것이다.
@청원행사(淸原行思 1067~1120))는
청원유신(靑原惟信)으로 선가에서 알려진 고승으로
청원유신은 스님의 별호이다.
원래는 淸源 이었으나 禪書에서는 靑原이라 썼다.
육조 혜능의 아래에서 청원과 남악의 2대 법통이 나왔는데
청원의 법통은 曹洞에 흘렀고,
남악의 末流는 臨濟가 되었다 한다.
성은 李 씨, 호는 龍門, 五祖(법연)法演會下에서
三佛(圓悟佛果, 太平佛鑑, 龍門佛眼)의 칭호를 받은 분이다.
宋나라 徽宗(휘종) 宣畵 2년(1120)에 입적하셨다.
<오가정종찬> 등에서는 佛眼淸遠(불안청원)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그의 삼불 칭호에서 비롯된다.
@「오등회원」에서 송(宋)대 선승(禪僧)인
청원유신(靑原惟信)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노승이 30년 전에 참선 공부를 하지 않았을 때
산을 보면 그냥 산이었고 물을 보면 그냥 물이었더니
후에 여러 선지식을 친견해 깨친 문턱에 들어서고 보니
산은 산이 아니었고 물은 물이 아니었다
마침내 깨달은 후 다시 예전의 산을 보니
전과 다름없이 산은 단지 산이고 물은 단지 물이더라
(원문)
老僧 三十年前 未參禪時 (노승 삼십년전 미참선시)
見山是山 見水是水 (견산시산 견수시수)
及至後來 親見知識 有個入處 (급지후래 친견지식 유개입처)
見山不是山 見水不是水 (견산부시산 견수부시수)
而今得個休歇處 (이금득개휴할처)
依然見山只是山 見水只是水 (의연견산지시산 견수지시수)
중생이었을 때는 눈으로 보면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일뿐이었는데
참구를 시작하니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었다.
후일 깨닫고 보니 산은 단지 산일뿐이요
물은 단지 물일뿐이라는 의미다.
모호한 말 같지만, 앞에 <只> 라는 어조사 하나가 첨가되어 있다.
달마대사의 <直指人心>이란 말의 뜻과
같은 맥락을 표현하고 있다.
이제 그 의미를 문제의식을 가지고 들어가 보자.
무엇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탐구해 들어가는 것을
선가(禪家)에서는 이를 <화두를 든다>, <참구(參究)>한다고 말한다.
산이라 무엇이며, 물은 무엇인가.
산은 흙덩이와 돌무더기 그리고 나무가 모여
숲을 이루면 이를 일러 산이라 이름하고
2개의 수소와 한 개의 산소가 모이며 이것을 물이라 부른다.
이렇게 인연으로 지어진 산과 물은 어떤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 인연이 사라지면 더 이상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더 이상 물이 아닌 것이다.
실체가 없는 이름만 있을 뿐이다.
또 다른 예를 들면 수천 개의 부속이 모인 것을
자동차라는 부르지만, 그 부속품들을 해체해 버리면
자동차는 없는 것이다. 이렇게 인연이 모여 만
들어진 것은 이름과 형상만 있을 뿐
따로 어떤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또 다른 예를 들면 꿈속에 호랑이를 만났다면
무서움에 떨지만 깨어보면 허망한 것처럼
인연으로 지어진 형상과 이름은 실체가 없는 허망한 것인데
우리가 이름과 형상에 속아 이를 실체인 양 여기게 되는 것은
우리의 허망한 의식이 지어낸 망념일 뿐이다.
여기까지 참구해 들어갔다면 산이란 실체 없는 것임을 알고
더 이상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더 이상 물이 아닌 것이다.
이는 단지 우리의 허망한 마음이 지어낸
이름과 형상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금강경>에서 이르듯
「형상을 지닌 모든 것들은 허망한 것이다
(凡所有相皆是虛妄)」라고 한 것이다.
이제 깨닫고 보니
「산은 산이고(山是山) 물은 물이다(水是水)」라는
의미를 참구해 보자
사물(事物)은 이름과 그 형상을 지니고 있다.
교학에서는 형상이 있는 것은 색신(色身)이라 하고
그 본성을 법신(法身)이라 하며 그 법신을 성(性)이라고 말한다.
이름이 있는 것 즉 모든 명자상(名字相)을 지닌 것은
인연으로 지어진 색신은 있지만 법신은 없는 것이다.
색신이란 마치 꿈속에서 보는 것은
현실처럼 느껴지지만 꿈을 깨고 나면 허망한 것과 같은 것이다.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제5 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을 보면
「凡所有相皆是 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라는 것에 대해
야보도천(冶父道川)선사는
「山是山 水是水 (산시산 수시수) 佛在甚麽處(불재심마처)」
라는 송(頌)을 달았다.
어귀를 해석하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부처는 어디에 있는가? 라는 것인데
야보도천(冶父道川)은 중국 남송(南宋: 1127~1279)대의 사람으로
속성은 적(狄), 이름은 삼(三)이다.
젊어서 군의 집방직(執方職, 군대의 궁수<弓手>)로 있다가
발심하여 출가하신 선사다.
모든 명자상(名字相)을 지닌 것은 인연으로 지어진 것이라
이름만 있을 뿐 실체가 없다.
곧 색신은 있지만 법성은 없다.
법성은 형상을 지닌 것이 아니므로 非相이다.
모든 색신을 볼 때 그 형상은 허상임을 안다면
이는 곧 법성 즉 여래를 보는 것이라고 한 것이다.
다시 말해 형상과 이름을 떠나 사물의 실체를 본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본다는 것은 곧 무루(無漏)의 지혜를 말하며
이를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야보도천 선사가 「부처가 어디 있는가?」라는 말은
곧 「處處가 도량이요, 物物이 부처인데」
어디서 부처를 찾는가라는 의미를 말하는 것이다.
선종(禪宗)에서는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이란 말이 회자하는데
이는 오도(悟道: 깨달음)을 말하는 것으로
참선하여 자기의 본성을 밝게 볼 때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나타나서 마음밖에 부처가 없고
자기 마음이 곧 부처임을 아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불과(佛果)를 이루어 부처가 된다는 의미이다.
부처가 된다는 의미는 곧 본래면목을 깨닫는다는 의미다.
일체 망상과 번뇌를 여읜 이런 경지에서 보면
형상과 이름에 속지 않고 그 실체(자성)를 보는 것이니
이 경지에 이르면 산은 단지 산이요 물은 단지 물일 뿐이다.
그 이름이 산이요 물이라는 의미이다.
꿈은 허망한 것이지만 꿈을 꾸는 자는 진실이듯
명자상의 일체 사물은 허망한 것이지만
그 법성은 허망하지 않다는 의미를
암시하는 화두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중생의 허망한 아름알이 즉 망식(妄識)으로 보지말고
실체를 바로 직시하라는 이 말.
대한불교 조계종 제6대 종정(宗正)에 추대된
성철(性澈, 93년 入寂)스님이 해인사에서
종정 취임식에서 설하신 법어(法語)를
참구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보이는 만물은 관음(觀音)이요
들리는 소리는 묘음(妙音)이라
이 외에 진리가 따로 없으니
시회대중(示會大衆)은 알겠느냐!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게제된 사진은 중국 계림의 제일 산수갑산으로 불리는 상공산 풍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