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비겁한 승부사 응원의 함성과 웅성거리는 소리가운동장을 들끓는 분위기로 몰아가고있었다. 미스 민은 종이모자와 짙은 색깔의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조금 전에 내앞에서 옷을 벗었던 여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당당한 모습이었다. 미스 민은오래 사귄 여인처럼 팔짱을 꼈다. "괜찮죠?" "별로 행복하진 않소." "말투를 조금 바꿔봐요. 부드럽게말이죠." "그럴 기분이 아니라는 걸 알잖소." "이해는 하겠어요." 미스 민은 대담하게 내 쪽으로 다리를노출시켰다. 쳐다보지 않으려고 하면할수록 자꾸 그녀의 가슴과 허벅지에 눈길이 주어지곤 했다. 그런 눈길을 알면서괘념치 않는 그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모르겠다. "지금 내 정신에 이따위 프로야구나 구경할 처지가 아니오." 나는 그녀가 내미는 땅콩을 한주먹 받으며 말했다. 한 개 한 개 껍질을 까서 한주먹이나 되게 내민 미스 민이 씨익 웃었다. 곱고 세련된 계집애인 것만은 아무리 보아도 부정할 수가 없었다. 우유빛 도는 살결에 화장기마저 없는 것 같았다. 운동장을 가로지르는 바람이 조금은 차가웠다. 응원부대들의 악기소리와 요란한 춤판과 기구들의 현란한 움직임이 한눈에 "하루 이틀 사이에 지구가 어떻게 되진 않아요. 이 경기를 구경하면서 세상 돌아가는 걸 생각해 보세요." "내 인생과 이 야구경기가 무슨 연관이 있소?"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일부러 나를 유인한 거요?" "아녜요. 우연이죠. 미행하는 걸 눈치 챈 우리가 당황해서 도망친 곳이 여기였어요. 사람 많은 곳으로 도망가자는 생각였죠.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니까 도망가고 피할 까닭이 없더군요. 우리가 도망치면 더 의심받기 밖에 더할까 싶었죠. 그래서 나오라고 했어요. 신문을 보니까 오늘 시합은 아마 일부러 져 줄 거라고 하더군요. 큰 승부를 위해 작은 걸 구경하면서 그걸 깨닫게 해 주고 싶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어요." "운동경기에서 져 주기 작전요? 더구나 프로야구 시합에서 말요?" "신문 안 보셨어요?" "기자들이 괜히 재미있게 쓰려고 그랬을 겁니다. 모르지요. 혹시 구단주끼리 뭔가 주고받아서 장난이 생길지는." "그게 아니고 큰 걸 쥐기 위해 상대를 고르는 거죠." "나더러 어떤 걸 깨달으라는 겁니까?" "매사가 강직할 필요는 없지 않겠어요. 좀 느슨해질 때는 느슨해지고 강할 땐 강해야지요. 상대가 누구인가도 좀 유념할 필요가 있잖을까요?" "그 정도 얘기면 짐작이 갑니다. 그러나 장총찬이가가 그리 쉽게 죽거나 자빠지진 않는다는 걸 말입니다. 더구나 왜놈들이나 양코쟁이들한테 당할 순 없지요. 그렇게 당하면 원통해서 귀신으로 재현해서라도 그냥 두진 않을 거요. 난 가능하면 자연사하고 싶소." 내 말이 끝나자 미스 민은 살포시 웃었다. 마치 만들어 넣은 이처럼 고르고 희었다. 나무랄 데 없는 이 계집애를 조종하고 있는 녀석들은 과연 누굴까? "그렇게 마음대로 짐작하는 건 간섭할 사람이 없지요. 그러나 정신위생상은 괜찮지만 본인의 일생을 위해서는 안된 일입니다. 왜 장총찬씨를 초청하는지 정확히 아셔야 합니다." "그러니까 말을 해 주면 될 거 아뇨?" "지금도 장난감 권총 가지고 있소?" "라이터 대용으로 쓰기 위해서 늘 가지고 다녀요. 왜요?" "지금 같아선 빈 총이라도 맞고 싶소." 미스 민은 내 손목을 꼭 쥐었다.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말 못하는 답답함이 있는 것 같았다. "미스 민을 누가 감시하고 있소? 우리 말을 도청하거나?" "그런 건 없어요." "그럼 왜 할 말을 못하는 거요?" "내가요?" "그렇소." "지금은 야구 구경을 하고 있을 뿐예요. 난 뭐든지 열중을 잘해요. 우선 구경이나 하세요. 라디오도 여기 있어요." 꺼내 주었다. 소형 망원경으로 야구장을 이리저리 쳐다보고 있는 그녀의 태평스런 모습을 한대 갈기고 싶었다. 잘 구슬리기만 하면 내가 궁금해 하는 것 가운데 일부쯤은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너무 시합에 열중하고 있으니까 뭐라고 자꾸 말 붙이기가 어려웠다. 그런 눈치를 챈 미스 민이 밝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구경 끝나면 우리 어디 가서 맛있게 저녁식사나 해요." 속이 없는 계집애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만큼 명랑한 표정이었다. "그럽시다." 그렇게 대꾸할 수밖에 없었다. 이 맹랑한 계집애한테 우선은 따돌림을 받지 않는 게 그렇다고 시쳇말처럼 방방 뛴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었다. 일단 호감은 가진 것 같았다. 그것이 내가 가질 수 있는 마지막 카드인지도 모른다. 표를 사놓고 대기하는 애들을 해산시킨 것도 내가 어떤 움직임을 보이든 감시받고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미 미행에 실패했기 때문에 두번 다시 미행 따위의 실수를 보일 수가 없었다. 이렇게 되면 끝까지 맞붙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경기는 점점 맥이 빠지기 시작했다. 신문을 읽지 않아 왜 일부러 져 주어야 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해설자의 설명으로 미루어 이렇게 얄팍한 경기를 하는 것은 코리안 시리즈에서 우승자가 되기 위하여라고 했다. 이런 경기를 중계할 가치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해설자도 흥분하기 시작했다. 야구에 대해 깊게 아는 게 없는 내눈에도 져 주기 위한 경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방송국은 참 줏대가 없어요. 이럴 경우엔 중계를 포기해 버리는 용기쯤은 있었으면 좋겠어요. 어린이도 보고 학생들도 이 중계를 볼 텐데...... 프로야구가 저렇게 야바위 짓을 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이런 비겁한 승부욕에 찬 경기를 왜 중계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과감히 우린 이런 비겁한 경기는 중계할 수 없습니다라고 해 버리는 배짱을 보이면 국민들이 과연 방송국답다고 칭송할 텐데 오명을 씻을 길이 없는 방송국인데 말예요. 이런 기회에 그 잘난 배짱을 보이면 얼마나 멋쟁일까." 미스 민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녀의 말이 합당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일부러 표현은 하지 않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까 맞장구를 치는 기분이 들어서였다. "동네 꼬마들이 과자 사내기 시합을 해도 저런 짓은 않을 거예요. 더구나 대재벌 이름을 걸고 하는 짓이 저러니 누가 그놈의 재벌이 정상적으로 재벌이 됐다고 믿겠어요. 분통 터져 못 보겠어요." "Z재벌하고 원수 척진 거 있소?" 나는 말대꾸를 일부러 이렇게 했다. "우리 집에 가면 그 회사 상표 붙은 거 수두록해요. 야구단 내세워서 저런 더러운 붙은 물건도 저따위로 만드는거 아닌지 모르겠어요." 흥분할 만한 일이었다. 얼마 지나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식으로 흥분했던 걸 잊어 버릴 대중 심리를 아마 터득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장난을 치는 것이리라. "이럴 때 A팀이 우린 그런식으로 이길 수는 없다고 똑같이 장난을 쳐버리면 어떨까요?" "그럼 엿 먹이는 거죠." "가뜩이나 재벌이라면 그동안 고생해서 이룬 공적은 인정하지 않고 무조건 부정부패와 손잡고 부자됐다고 막연히 인식해 버리는 국민들인데 저런 치졸한 짓까지 해대니 어떻겠어요." "돈벌레 취급을 받는 거죠 뭐." 눈이 멀어서 저러는 겁니다. 저꼴도 외국서 수입한 건지 모르겠소." "정신 좀 차리게 해 줬으면 좋겠어요." "어떻게요?" "감독하고 구단주를 잡아다 볼기를 쳐야죠. 그렇게 비겁하게 승자가 돼서 뭘 어쩌겠다는 건지 모르겠어요. 배만 부르기 위해 무슨 짓이고 해 왔던, 국민이야 뭐라고 하든 말든 별별 치사한 짓거리를 다해 왔던 재벌의 생리하고 너무 닮았어요. 일본 프로야구의 우상이라는 나가시마(長島茂雄)는 아마추어 선수인 아들이 아버지의 제자인 프로팀 코치에게 타격 지도를 받았다고 해서 논란이 일자 아버지는 아들을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잖아요. 하물며 우리 나라 최대 뭐예요." 이 세상에 영원한 승자는 없는 법이었다. 올해에 꼭 우승하지 않아도 좋다는 느긋한 배짱으로 경기를 끌고 나가면 국민들에게 얼마나 박수를 받을까를 생각할 줄 아는 안목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조급하게 커온 재벌의 생리를 정말 닮은 것인지도 모른다. "선수들도 그래요. 일부러 놓치고 일부러 엉터리로 던지지 말고 감독이나 코치나 구단주가 앙앙거려도 나는 프로선수니까 비겁할수는 없다는 배짱으로 정상적인 경기를 해 버리면 얼마나 멋져요. 그러면저 소갈머리 없는 치들이 쫓아내겠죠. 그럼 쫓겨나면서 나는 치사한 선수가 되느니차라리 굶겠다고 큰소리 칠 수 있었으면 "봐요. 지금 말한 대로라면 미스 민이나한테 비겁한 승부를 조작하고 있는 겁니다. 정정당당한 대결이 아니라 연약한 여자를 납치해 놓고 나더러 그쪽으로 와서 승부를 걸자는 것은 바로 Z그룹의 프로야구팀의 행동과 뭐가 다릅니까? 내 말이 틀렸소?" "......" 미스 민은 대꾸하지 않았다. 할 말이 없었으리라. "이 세상에 저런 비열하고 치사한 승부가 많아요. 미스 민이 지금 흥분하고 있는 것도 비열한 승부욕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나는 어찌해야 합니까? 한번 생각해 봐요." "내가 할 말이 없다고 자꾸 그쪽으로 공박하지 마세요. 그런 얘기는 나중에 할 기회가 있을 겁니다." "말하기 싫다면 안해도 좋소. 그러나 내 심정쯤은 헤아려 주쇼." 우리는 한참이나 침묵을 지켰다. 서로 말하지 않는 게 편하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좋아요. 그런 얘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마음 편하게 구경합시다." 한참 만에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 "우리가 이런 경기를 끝까지 봐야 합니까?" "악착같이 봐야죠." "왜요? 치졸한 건 봐 주는 것만도 편을 드는 거잖소." "그렇지 않아요. 얼마나 더 비열해지는지를 좀 봐야죠. 보세요. Z그룹 일부러 안 잡고 일부러 엉터리로 던져 주고 일부러 잘 때리게 던져 주는 것 좀 보세요. 이런 경기는 몇 세기에 한 번 볼까말까한 거잖아요. 아마 세계 운동경기 사상 기록되어 남게 될 경기잖아요." "처음부터 지고 들어갔으면 오늘따라 시시하게 경기를 풀어가는 구나라고 생각할 텐데 우리는 이 정도 실력이 있다는 걸 보이려고 초반에 이겨놓고 눈에 보이게 져 주고 있군요. 저 심보가 더 놀부 심보죠." "프로야구위원회인가 뭣인가 하는 사람들도 이 경기를 보고 있겠죠. 내일 아침 신문들이 적당히 깔 거고...... 그러면 보나마나 대책위원회다, 뭐다 하고 어물쩡 넘어갈 거예요. 비겁의 극치가 되겠죠. 늘 그래 온 사람들이니까 별수 "코리안 시리즈에서 A팀이 이겨 줘야지요. 그래야 그때가서 이중 창피당한 걸 후회할 겁니다. 그런 걸 두고 뜨거운 국 쏟고 따귀맞고 옷 찢기고 뛰어나가다가 똥숫간에 첨벙 빠져서 똥물 킨 거라고 하죠." 미스 민은 키들거리며 웃었다. 우리들은 궁짝이 맞았다. "처벌하게 될까요?" 미스 민이 물었다. "못하겠죠. 그럴 배짱 있는 친구들도 없고 Z그룹이라는 재벌 그룹한테 미움받아서 좋을 게 없다는 주눅든 병아리들일 테니까요. 국민 알기를 똥친 막대기로 아는 저런 치들을 그냥 두리라고 생각하면 한두 놈 볼기쳐선 안 되겠네요." 사람들이었다면 프로야구를 만들기 전에 도서관 건립을 먼저 생각했어야 했고 정이나 그들의 주장대로 국민체력을 증진할 목적이었다면 많은 사람이 부담 없이 참여할 개방된 운동장과 운동 편의를 위한 시설에 주력했어야만 했을 것이다. 프로야구보다도 우리의 전통적인 것이 먼저 붐을 이루도록 최소한의 노력쯤은 했어야 했다. "미국 애들이 열광하고 일본 애들이 열광하니까 그들 꽁무니 따라가는 게 선진국으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을 가진 얼간이들이 많은 탓일 거예요. 미국화, 일본화가 곧 선진화라고 생각하는 얼간이들 말예요. 건물들도 좀 보세요. 개성 없이 외국 어디엔가 있는 그런 건물이 미스 민은 연신 입을 가만 두지 않았다. 그녀의 말이 틀린 것 같지 않았다. 나라 걱정한다는 친구들의 머릿속에 이러한 신종 사대주의가 박혀 있는 한 우리다운 멋을 갖기는 글러먹은 노릇이었다. 더 안타까운 것은 그런 사실조차 모른다는 것과 그런 사실을 알더라도 모른 체 넘어가는 부류들의 의식이 더 큰 문제인 것이었다. "그게 어디 한두 가집니까. 외국 이름 비슷하게라도 상표를 붙여야 물건이 팔리는 세상인 걸요. 외국에다 물건 팔아야 하니까 그럴수밖에 없다고 변명을 하겠지만......" "저것 보세요. 또 일부러 져 주기 작전을 쓰네요. 저걸 구경하고 있어야 하는 우리 신세가 가엾네요." 있지......" "이럴 땐 국민들이 저런 짓을 하는 회사의 상품을 일시에 불매운동을 해서 자진 해체를 시키든가 국민을 우롱해서 죄송하다고 최고 책임자가 길바닥에 꿇어앉아 백배사죄를 하게 해야 돼요." "국민들이 그렇게는 못할 거라는 걸 알기 때문에 저러는 거 아닙니까. 언젠가 저 Z그룹이란 회사가 냉장고 팔아먹느라고 신문이다 텔레비전이다 잡지에다가 서리, 서리, 서리라고 큼지막하게 선전을 해댄 적이 있습니다. 냉장고 안에 허옇게 끼는 것이 성에라는 걸 모르고 외국책 번역해다 그냥 쓴 것일 겁니다. 그래서 몇 년 전만 해도 냉장고 안에 허옇게 끼는 것을 보통 사람들이 서리라고 했죠. 어떤 교수가, 안에 끼는 것은 서리가 아니고 성에가 맞다는 얘기를 썼습니다. 그랬더니 다음다음날인가 신문에 대문짝하게 서리, 서리, 서리라고 더 강조해서 선전을 해대더군요. 국어쯤은 재벌의 위력으로 까뭉길 수 있다 이런 배짱이죠.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니까 슬그머니 성에로 바꾸더군요. 그런 배짱 가진 재벌회사니까 저런 지랄쯤이야 못하는게 이상하죠. 저런 꼴로 봐서 국민에게 눈치 채이지 않게 별의별 짓을 다할 거 아니겠습니까." "어쩌면 좋죠?" "성질 같아서는 구단주하고 감독이란 친구를 잡아다가 청계천에다 쑤셔박아 놓고 국민우롱하고 청소년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준 죄값을 받게 해 주고 싶어요. 그 더러운 처벌받지 않을 거고 내년에 더 큰소리 쳐가며 뻔뻔스럽게 야구장에 또 나오겠죠." "국민들은 또 잊어 버릴 거구요." "저런 친구들은 개구리 뻗듯 쭉 뻗게 해 줘야 돼요. 비겁한 승부는 무엇이고를 막론하고 엄하게 다뤄야죠. 더구나 저건 명백하게 국민우롱죄죠. 밀수로 돈벌던 그놈의 근성이 아직도 있나 봐요." "말로만 그럴 게 아니라 총찬씨가 본때를 보여 줘요." "글쎄올시다." "나도 도와 드릴께요. 구단주하고 감독을 어디 수채구멍에 박아 버려요." "한번 해 봅시다." 나와 미스 민은 악수를 했다. 옆에 있던 사람들도 우리 말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요절을 내야 하는 것이었다. "지금 잡으러 갈 거예요?" "성질이 돋구어졌을 때 해치워야죠." 내가 성큼성큼 몇 발짝을 떼어놓자 미스 민이 내 팔목을 잡았다. "좀 기다려요. 작전을 짜야요." "작전은 무슨 작전입니까. 그냥 치도곤이를 내야죠." "그럼 안 돼요. 작전은 내가 짤 테니 가만 좀 기다리세요." "어떤 겁니까?" "기발한 테니까 두고 보세요." 나는 할 수 없이 자리에 앉았다. 이 여자가 어떻게 이런 일을 풀어가는지 지켜볼 필요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Z그룹의 수많은 선량하고 똑똑한 직원들 아닙니까. 그 정도 재벌 기업체의 직원이면 Z그룹 맨이라고 해서 어디나 내놓아도 인정을 받는 사람들인데 몇 사람의 승부욕 때문에 피해자가 되잖아요." "그러니까 된맛을 보여 줘야 한다는 거 아녜요. Z그룹 직원들이 무슨 죄가 있어요. 누구든 인정할 만한 엘리트들 아녜요. 그런데 몇 사람의 승부욕에 찌든 사람들 때문에 덤터기를 쓰는 거죠. 직원들에게 피해보상도 해야 해요." 미스 민은 나보다 한술 더 뜨고 있었다. 그 말은 누구라도 인정 해야 하는 사실이었다. 그 어려운 취직의 관문을 통과한 사람들은 이 땅에서 빼놓을 수 없는 실력자들임에 분명하고 오늘의 Z그룹이 존속하는 것은 경영자급의 인사들이 지닌 것이다. 한개의 재벌 그룹이 성실하게 성장하는 것이 나라 전체의 부가 그만큼 커진다는 것을 뜻한다면 비겁하지 않은 재벌은 많을수록 좋은 점이다. 그런데 덮어두면 그냥 지나쳐 버리고 말,작다면 작은 이 사건을 내가 물고 늘어지는 것은 바로 이러한 비겁한 승부욕이 국민과 학생과 소년 소녀에게 끼칠 엄청난 잠재적 충격을 생각한다면 결코 용서하고 넘어갈 일이 아닌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커다란 그룹이라면 바람 잘 날이 없을 터이지만 프로야구에서 승부를 위해 경기를 조작한다는 건 그들이 저지른 실수 가운데 뺄 수 없는 실수라는 걸 인식해야 할 것이다. 다른 재벌 그룹이라고 못된 짓을 아니한 건 아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게 보이진 않았다. 나중에 들켜서 눈치를 먹었거나 사전에 발각되어도 그놈의 돈의 위력 앞에 얼렁뚱땅 스쳐 지나가고 말았었다. 그러지 않아도 이 땅에는 한탕주의가 성행하고 있다. 새치기 잘하고 권력에서 아부 잘하고 중상모략을 물 마시듯 해온 이른바 기회주의자들이 잘 살게 되었다는 슬픈 현실을 웬만한 사람은 인식하고 있는데다가 눈에 보이는 경기, 그것도 수많은 국민이 지켜보는 앞에서 승부를 조작하는 걸 그대로 보여주는 Z재벌의 국민우롱은 어떻게든지, 무슨 방법이든 가리지 않고 한탕씩 해 먹자는 발상에 부채질을 할 것이 틀림없다. "혹시 보복하지 않을까요?" "무슨 보복요?" "누가 압니까? 돈도 있겠다, 거느린 사람 많겠다. 어떻게든 보복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장총찬씨 하나쯤은 가볍게 매장시킬 수가 있지요. 사건을 조작이라도 하면 어쩔래요? 신문에 한번 나면 국민들은 그게 모두 사실인 줄 알아 버리는데." "진실은 언제나 밝혀지는 법이죠." "말로는 그래요. 그런데 이 땅에서 진실과 정의가 얼마나 고난을 받았나요. 오랜 세월이 지나서 겨우 밝혀지면 그냥 과거의 어느 한 사건으로만 기억될 뿐이잖아요. 그게 안타까운 일이죠."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사실 이번에 다혜가 납치된 것도 그 배경엔 보복이란 것이 도사리고 있을 겁니다. 미스 채우다가 이 꼴이 된 건 아닙니다." "그 얘긴 차차 하자고 했잖아요. 갑자기 나를 몰아세우면 어떻게 해요." "말하자면 그렇다 이겁니다. 보복을 하면 당해야지 별수 없잖습니까. 한 사람 잡으려고 여러 사람이 눈에 불을 켜면 꼼짝없이 작살이 나는 법이니까요." "내가 그런 꼴을 많이 봐서 그래요. 내가 아는 사람은 연예가에서 제법 인기 상승가도를 달릴 때 어떤 주간지 기자에게 밉게 뵌 적이 있었어요. 다른 것도 아니고 그 기자가 쓴 기사 내용이 터무니없는 것이어서 항의를 한 거였죠. 다 알 만한 거여서 그 가수만 곤란하게 됐어요. 그래서 항의를 했더니 두고 보자더래요. 그리고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한 달인가를 터뜨려 매장시켜 버렸잖아요." "난 연예인이 아니잖소." "더 교묘한 방법으로 보복하겠죠." "빌어먹을...... 그렇다고 입 닥치고 살란 말요?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신문사하고 방송국하고 잡지사 기자들은 살아남은 게 이상하잖소. 내가 여태 살아 있는 건 더 이상하고요. 그렇다면 나더러 복면을 하고 두들겨 패라는 거요?" "그러니까 좀 연구를 해 보자 이거죠. 내가 나서면 조금은 부드러워질 거 아녜요." "한번 연구해 보쇼." 마음은 급하지만 이 당돌한 계집애한테서 조그만 실마리라도 잡아내기 위해선 곁에 붙어앉아 있어야만 했다. 아무리 침착한 납치되어 있다면 가장 지리하고 못 견딜 시간일 것이다. 내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해결될 가망이 없는 일이었다. 유일한 희망이라면 미스 민의 도움을 받아내는 길이었다. "사람들이 많이 꼬일 테니까 약간 한적해졌을 때 내가 으슥한 곳으로 끌어낼게요." "그런 뒤에 치도곤을 내라 이 말이죠?" "그래야 탈이 없죠." "이왕 일을 벌일 바에야 탈 좀 내는 게 어때요." "그럴 필요 없어요. 그래서 사람들한테 동정표를 받아다 바칠 필요가 없잖아요. 죄만큼 벌을 받게 둬야죠." "가장 멋진 건 상대가 구단에서 징계를 해 버리고 이차로 야구위원회인가 하는 데서 하고, 삼차로는 감독하고 책임자가 스스로 사표를 내야죠." "그 세 개를 다 믿을 수가 없죠. 그럴 친구들이라면 애초 저런 지랄은 안했을 테니까요." "그렇긴 그래요." "대충 계획은 세웠소?" "내가 하자는 대로 하세요. 내가 내려가서 감독하고 책임자하고를 납치해 올게요." "우리 납치란 말은 쓰지 맙시다. 그놈의 말만 들어도 가슴이 찡하니까." "좋아요. 그럼 데려오죠." "책임자가 왔겠소?" "안 왔으면 쳐들어 가죠 머." 보통 여자는 분명 아니었다. 아무리 뜯어봐도 곱상하게 생긴 외모처럼 단단한 구석이 있었다. 그만한 배짱이 있으니까 단신으로 나를 찾아온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내려갑시다." 우리는 통로를 빠져나왔다. 미스 민은 핸드백 속에서 아까 내게 내밀었던 권총을 꺼냈다. 벽 쪽에 몸을 숨기고 권총을 허리춤께에 감춘 뒤 불룩한 허리춤을 손으로 눌러보였다. 치마를 들추고 속옷속에 찔러넣은 것이었다. "저쪽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화장실에서 기다리란 말요?" "저런 친구들은 변기에다 박아 버려야죠." "알았소. 그나저나 당신네들 패거리가 지켜보고 있을 거 아뇨." 친구들이니까 그런 건 염려하지 않아도 돼요." "당신이 여두목요?" "그렇다고 생각해 버려요." 그러고는 성큼성큼 내려갔다. 맵시 있는 자태였다. 당장 그대로 조명만 비추어 주면 모델들 뺨 때리고도 남을 만큼 고운 자태였다. 그녀가 나를 피해 도주하기 위해 꾸민 연극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봤다. 정말 도주할 여자라면 나를 불러낼 필요도 없었고 그 사이에 얼마든지 나를 떼어놓을 수 있었을 여자라는 생각 때문에 안심은 되었다. 화장실 앞에서 담배 세 개비째를 거의 다 피웠을 때 미스 민은 감독을 앞세우고 빠른 걸음으로 올라왔다. 눈짓으로 화장실문을 화장실 문을 열었다. 감독이 질린 얼굴로 화장실 안으로 들어섰다. "밖은 내가 책임지고 망을 볼 테니까 성질대로 다뤄 버려요. 소리지르고 시끄러워도 상관 없어요. 사람들이 모두 속시원하다고 할테니까요. 구단주는 안 왔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감독이 질린 얼굴로 여기까지 끌려온 것은 미스 민의 그 가짜 권총 때문이었다. 옆구리에 권총을 대고 있어서 꼼짝 못한 채 끌려온 것이었다. 나는 화장실 문고리를 잠그고 감독의 혈을 독침 쏘듯 쥐어 버렸다. 화장실 바닥에 덜썩 주저앉았다. "왜 잡아왔는지 알겠냐?" "예." "임마, 그렇게 비열하게라도 이겨야 할 역사적 사명이 있냐?" "구단에서......" "그럼 첨부터 슬슬 할 것이지, 무슨 폼 잡겠다고 초반에 점수를 따고 후반에 장난했냐?" "......" "임마 사람 사는 건 여러 질이 있다. 너희들처럼 국민을 우롱하고 뻔뻔스럽게 대가리 들고 사는 놈은 똥물에 튀겨야 한다. 책임자하고 네놈들하고 저지른 죄과를 따지자면 석 달 열흘을 곤장질해대고 또 석 달 열흘은 거꾸로 매달려 있어야 한다. 그래도 그 죄는 못 씻는다. 알겠냐?" "예." "너를 살려두지 않아야 마땅할 것이로되 남겨두기 위해 약간의 약물만 먹여주마. 싫으면 싫다고 해라." "이러지 마시고 말로 하십시다." "이놈아, 말로 할 게 따로 있다."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뭐가 말이냐?" "승부 조작이 말입니다." "꼭 그러더라. 문제만 터지면 내 탓이오. 내 책임이오. 내가 저지른 일이니 나를 죽여주쇼 하는 놈이 왜 이리 드물단 말이냐. 명색이 네가 감독 아니냐. Z그룹을 위해 네놈 혼자라도 내가 책임지고 물러나겠소, 위에서는 이러라고 시킨 게 아니고 내 독단으로 일을 저질러서 Z그룹 맨 전체에게 미안하고 국민을 우롱한 죄는 마땅히 큰 죄이니 내가 물러나겠소라고 왜 받았잖냐? 그래, 안 그래?" 따귀를 두 대나 올려붙였다. 감독은 고개를 숙인 채 말을 못했다. "어쩔수 없다는 건 이해를 한다 치자. 국민을 우롱한 죄와 그룹의 성실한 일꾼들 낯을 깎아놓은 죄는 어떻게 할래?" "죄송합니다." "봐라. 말가지고야 안 되는 게 없다. Z그룹 직원들에게 끼친 죄는 그렇다치고 국민에게 지은 죄는 인정하냐?" "예." "그럼 사나이답게 물러나라. Z그룹에 폐를 끼지지 마라. 그렇잖아도 이리 치고 저리 쳐서 불쌍해 보이는 재벌이다. 핑계대지 말고 사나이답게 사표 좀 써라." "......" 하고 있다는 걸 모를 리 없었다. 이 사내의 입에서 그러겠다는 대답을 들어도 결국은 이 위기를 넘기려는 수작일 거라는 짐작을 하고 남았다. "할 수 없다." 나는 이 사내를 번쩍 들어 변기 속에 거꾸로 박아 버렸다. 고장난 수세식 화장실의 변기 속에 감독의 머리통을 쳐넣고 혈을 풀어 주었다. "나도 너 같은 친구들에게 질렸다. 인간적인 부탁 좀 하자. 잘못 했으면 잘못했다는 시인을 하고 후다닥 물러나는 정신 좀 가져다구. 제발 그놈의 자리에 연연하지 마라." 나는 거꾸로 변기에 처박아 놓고 손을 털고 나왔다. 누군가 금방 발견하고 꺼내 저런 얄팍하고 비겁한 친구들을 상대하기도 이젠 진력이 났다. 미스 민은 우르르 몰려 있는 사람들에게 화장실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었다. 내가 문을 열고 나오자 사람들이 한꺼번에 밀어닥쳐 감독을 걷어차기 시작했다. 오물이 묻지 않았으면 아마 밟혀서 병원으로 끌려갔을지도 모른다. 감독은 엉망진창인 모습으로 정신 없이 도망가고 있었다. 젊은 사람들은 끝까지 쫓아가 주먹질을 하기도 했다. 얼마나 분했으면 그럴까 싶어서 말리지도 않았다. "이젠 책임자를 잡으러 가요." "갑시다 까짓 거." 우리는 기분 좋은 웃음 뒤에 안타까움을 책임자는 만날 재간이 없을 만큼 복잡한 절차를 겪었다. 나는 비서실에다 솔직하게 조금 전에 일 저지르고 온 사실, 화가 나서 감독을 화장실 변기에다 박아 버린 얘기며 책임자도 한대 갈겨 주려고 찾아온 거라는 사실을 그래도 말했다. 비서실 직원이 제발 돌아가 달라고 사정을 했지만 우리는 일부러 큰소리로 떠들었다. 안에서 우리가 떠드는 소리를 들었는지 문이 열리고, 책임자가 묵직한 톤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당황한 비서들이 그래도 버티고 서자 책임자는 비서들을 나무라더니 나와 미스 민이 들어설 수 있도록 문을 열어 주었다. "다 들었습니다. 우리 감독을 그렇게 했고, 나도 그렇게 하고 싶다는 소리를 "우리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나를 어쩌시겠소?" 책임자의 입가엔 고운 미소가 있었다. 당황하거나 놀라는 기색도 없었다. 오히려 그의 포근한 표정에 우리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성질대로 했으면 싶지만 당당한 모습을 보니까 조금 기가 죽습니다. 그렇다고 그냥 갈 순 없잖습니까? 경기를 보셔서 알겠지만 세상에 이럴 수가 있습니까?" "정말 죄송합니다. 분명히 잘못 됐습니다. 원하시는 대로 어떤 벌이라도 감수하겠습니다." "내 주먹은 맵죠. 마음 먹고 한방이면 황천으로 보낼 거고 적당히 봐 줘도 한 달은 입원해야 할 겁니다." "아직 죽을 나이는 아니니까 적당히 때려 주쇼." "그럽시다." "저 여자도 때리게 됩니까?" "물론이죠." 미스 민이 흔쾌하게 말했다. "가능하면 살려두쇼. 잘못했으면 죄 값도 받아야죠. 자, 성질대로 하시죠." 책임자는 양복을 벗고 넥타이를 풀었다. 그리고 카피트가 깔린 바닥 위에 섰다. "맘 놓고 쳐도 됩니까?" 내가 물었다. "좋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잘못한 죄는 씻어지지 않겠지만 내가 책임자로서 이만한 책임은 지겠소이다." "그만한 멋쟁이가 왜 이런 사태를 짐작 못했는지 모르겠습니다." ? "할 말이 없소." 나는 세워놓고 한방을 갈겼다. 카피트 바닥으로 서너 번이나 뒹굴었다. 겨우 몸을 가누어 일어섰지만 비틀거렸다. 미스 민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가 씨익 웃었다. 책임자가 빨리 때리라고 눈짓을 하자 미스 민은 가볍게 등을 쳤다. 한참 만에 책임자는 소파에 몸을 기대고 숨을 몰아쉬었다. "병원에 가서 며칠이나 누워 있으면 되겠소?" 여유만만하게 물었다. "일주일쯤으로 봐 줬습니다." "이럴 때 고맙다고 하는 거요, 아니면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하는거요?" "둘 다죠." "이름이나 압시다." "장총찬이라고 합니다." "아......" "왜요?" "김갑산 회장님께 몇 번인가 얘길 들었습니다. 바로 그 친구군요." "나도 뭔가 배웠습니다. 역시 뭔가 해 내는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과 다른 데가 있다는 걸, 특별한 게 있기에 정상에 군림한다는 걸 말입니다. 비틀비틀 손바닥 비벼대서 출세하는 정치가들이나 벼락감투 쓴 친구들과 벼락부자가 된 친구들 말고 말입니다." "그렇게 봐 줘소 고맙소. 가끔 만납시다. 내가 맞을 짓하면 좀 갈겨 주러 오쇼." "그러죠." 그리고 한참 만에 우리는 책임자 사무실을 나왔다. 찬바람이 시원스러웠다. "이제 나하고 얘기 좀 합시다." 바람을 안고 한참 동안 말없이 걷던 내가 이렇게 말했다. 말없이 걷던 사이에 우리는 덕수궁 돌담길을 끼고 돌았다. 그쪽으로 가자는 약속도 없었고 누가 먼저 말을 꺼낸 것도 아니었다. 낙엽이 몇잎씩 뒹구는 돌담길에 드문드문 데이트하는 사람들의 여유만만한 발걸음이 있었다. "내가 왜 이렇게 마음 약해졌는지 모르겠어요. 처음엔 용건만 말하고 사라지려고 했어요." 미스 민은 야구경기와 감독의 행위 그리고 책임자의 배짱에 마음이 흔들린 것 같았다. 더구나 내 행동이나 내가 다혜를 걱정하는 모습이 안타까웠는지 모른다. "아까도 말했지만 다혜한테 무슨 일이 황천까지라도 쫓아가서 복수를 할 거요. 지금 나는 안정된 상태가 아니오. 그러면서도 평온한 체하려니까 몸살날 것 같소. 내 마음을 좀 알아 주쇼. 정말 죽겠소." "그렇게 다혜씨를 사랑하세요?" "한마디로 그렇소." "나도 한번 태어났는데 살아야죠. 내 목숨도 소중하게 생각해 주셔야죠." "난 미스 민을 어떻게 할 생각은 없소. 물론 마음으론 밉소, 죽이고 싶을 만큼. 그러나 이렇게 종일 매달려 따라 다니는 건 어떻게든 잘 보이고 동정심을 얻어내 사건의 빌미라도 잡고 눈치라도 채고 싶은 거요. 내가 장총찬이란 놈이오. 아직 누구에게 무릎을 꿇어본 적이 없지만 일이라면 그렇게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오. 길바닥에 꿇어 앉으라면 꿇어 앉겠소." 미스 민이 우뚝 섰다. 그리고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가로등 불빛 속에서지만 그녀의 눈빛은 야릇한 빛을 띠고 있었다. 나는 말 없이 미스 민의 어깨를 으스러질 만큼 끌어안았다. "나를 한번만 봐 주쇼." "장총찬씨 마음 알아요. 그러나 나도 목숨을 걸어야 돼요. 내겐 아직도 펼쳐야 할 꿈도 많고 하나밖에 생명이 없어요. 인간에게 생명이 두 개쯤 있다면 정말 이때 과감히 하나쯤은 버릴 거예요." "당신 목숨은 내가 책임지겠소. 내 목숨을 걸면 되잖소." "안 돼요." 그녀는 잘라 말했다. 고뇌하고 있었다. 어떤 조직인지 알 수 없지만 그녀를 배반할 수 없게 묶어두었을 것이고 그녀가 배반할 경우에는 목숨을 바치도록 얽어놓았던 것 같았다. "내가 그렇게 의리 없는 놈은 아닙니다. 당신 목숨 하나 보장 못할 위인은 아니오. 믿어보십쇼." "그건 알죠. 그러나 내 목숨을 보호할 힘이 장총찬씨에겐 없어요. 내가 더 잘 알지 않겠어요?" "그럴 수는 있죠. 그러나 방법을 같이 연구하면 되잖소. 내가 마음만 먹으면 웬만한 조직과 맞설 힘은 가질 수 있소. 한번만 믿어봐요." "내 목숨은 하나예요. 총찬씨는 다혜씨 목숨이 중요하겠지만 나는 내 목숨이 더 중요해요." "그러니까 방법을 연구하자는 거 아니오." 안타까웠다. 미스 민의 마음을 돌리기가 쉽지 않으리라는 건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그녀의 목숨과 관계가 있기 때문에 쉽사리 입을 열지 않으리라는 조바심이 생겼다. "내가 도와 줄 수 있는 건 파리까지 동행해 주고 통역해 주는 정도일 거예요. 그 이상은 사실 나도 몰라요." "내가 지금 미스 민을 다부지게 다루어서 입을 열게 할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소. 다혜 구하는 일을 제쳐두고 성질대로 하고 싶소." "끝까지 현명해야 해요. 경솔하게 굴면 여러 사람이 죽어요." "나도 말입니까?" "난 죽는 건 상관 없소." "거짓말 마세요. 다혜씨하고 총찬씨 가운데 한 사람은 반드시 죽어야 할 운명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총찬씨가 선택권을 가졌다면 어떻게 하겠어요?" "......" 대답할 수가 없었다. 치기로 말하자면 선뜻 다혜라고 대답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고 엄중하게 내 양심에게 묻는다면 나 먼저 살 생각을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목숨 따위는 아깝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가능하면 같이 살 수 있는 생각이지 어느 한쪽이 죽는 문제를 생각하지 않는 것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심리일지 모른다. 목숨만 빼놓고 무엇이든지라면 쉽게 대답을 할 수 있었을 사랑한다는 것이 자신의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는 것이어야 할지 모른다. 그런데 나는 그렇지 못했다. 그렇다고 내 목숨만큼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자신만만하게 다혜를 내 목숨처럼 사랑한다고 자부해 왔으면서도 미스 민 말에 대답할 수가 없었다. "대답 못하는 게 당연한 것인지도 몰라요. 내가 무리한 질문을 한 탓이죠. 어쨌거나 나는 살고 싶어요." "그렇다 칩시다. 조금만 도와 줄 수 있잖소. 어느 집단이라든지 어떻게 하라든지 말이오." "그러면 다 알려 준 셈이죠." "그럼 당신은 죽게 됩니까?" "그래요." "비밀을 지키는데도 말이오?" "지켜질 수가 없어요." "어째서 그렇소?" "그 두가지를 알면 다 아는 거니까 말이죠." "내 짐작엔 외국인이 개입된 것 같소. 말하자면 일본 애들이라든지......" "난 아무 말도 못해요." "끄떡이거나 저어 버릴 수도 없단 말이오?" "그래요." 매몰찬 대꾸였다. 이런 걸 두고 오리무중이라고 하는 것인지 모른다. 미스 민은 한치의 틈도 없었다. 그녀에겐 그럴 만한 사정이 있는지 모른다. 내 가슴은 서걱서걱 타들어갈 것 같았다. 이 여자를 매섭게 다스려서 해결될 일은 분명 "그렇다면 하루라도 빨리 보내 주쇼. 죽든 살든 끝내고 싶소." "내가 결정할 문제가 아녜요. 원하는 대로 연락해서 빨리 가도록 해 드릴 수는 있어요. 그러나 한 가지 조언을 하고 싶어요. 가지 않는 게 현명하다는 거죠. 한 여자 때문에 장총찬씨까지 죽는다는 건 비극이잖아요?" "이미 비극은 시작됐소." "따끈한 커피 한 잔 사 주시겠어요?" "그래요." 광화문 근처의 어둑한 경양식집으로 들어섰다. 마주 앉자마자 미스 민은 핸드백을 열어 라이터 한 개를 내밀었다. "전혀 고맙지가 않소." "필요할 때가 있을 거예요. 그래보여도 손톱깍이, 열쇠 푸는 꼬챙이를 만들 수 있는 비상용 라이터거든요." "나더러 이걸 어따 써먹으라는 겁니까? 그럴 기회도 없을 거 아뇨. 내가 죽거든 쓸 만한 사내 하나가 그렇게 쉽게 사라졌다고 묵념이나 해 주쇼." "미안해요. 내가 하필 이런 역할을 맡게 돼서 그렇지, 다른 곳에서 좋은 인연으로 만날 수 있었다면 멋진 인연이 됐을 거예요." 한 시간 가까이 우리는 쉬지 않고 지껄였지만 한치도 진전된 것은 없었다. 그녀의 닫혀진 가슴이 열리지 않으리라는 건 자명해졌다. 그녀 말마따나 그녀도 살아 있어야 했고 나는 그녀의 생명을 위해서가 아니라 알 수 없는 인물들의 조종에 의해 처지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운명은 기구한 것 같았다. 나 살기 위해 다혜를 버려둘 수는 없었다. 증오심이 머리끝까지 치밀어도 미스 민 앞에 얌전한 체 앉아 있어야만 했다. 앉은 자리에서 간단하게 저녁을 먹고 그녀는 일어섰다. "나를 이렇게 놔두고 갈 거요?" "어떻게 하면 되겠어요?" 그녀의 반문이었다. "나 좀 살려놓고 가쇼." "살아 있잖아요." "무릎 꿇고 빌겠소. 하라는 대로 다하겠소. 무엇이든지 말이오. 내 목숨과 다혜를 구해 내지 말라는 일만 빼고 뭐든지 말이오." 아까도 말했지만 동행자로서 도와 주는 일이 지금으로선 최상이죠." "한 사내의 진정이오. 무슨 짓이라도 하겠소." "난 장총찬씨를 좋아해요. 어떤 남자라는 것도 환히 알아요. 어떻게 살고 어떤 힘이 있고 왜 그렇게 사는지도 알아요. 한 가지 미운 게 있다면 둥글게 살지 못한다는 것과 한 여자를 미련하게 좋아하는 거죠. 그 나머지는 다 좋아요." "지금 좋고 나쁜 걸 따질 때가 아니잖소." "내 심정을 얘기하는 거예요. 알고 보면 내가 장총찬씨한테 이렇게 함부로 얘기할 처지가 아녜요. 나중에 죽을 때쯤에나 알게 될지 모르지만 우린 좋은 인연이 있었어요. 서로 얼굴을 모른 채 말이죠." "그건 나중에 따집시다. 우선 내 말에 대답 좀 해 주쇼." "지금은 아무 말도 못해요." "감시받고 있나요?" "아녜요. 자유로워요." "그럼 한마디만 해 주쇼. 나를 믿어 주겠다고." "이렇게는 말할 수 있어요. 장총찬씨를 좋아하기 때문에 도와 주고 싶은 마음은 내면에 있다고요. 그러나 지금 결정하거나 말할 수는 없는 처지라는 것두요. 이해를 해 주세요." "난 이대로 돌아가 잘 수도 없고 살아 있을 수도 없소." "그건 나도 그래요." "그러니 해결 방법을 찾읍시다." 해서요." "그렇게라도 해 주쇼. 제발." 어린애처럼 보채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미스 민은 일어서다 말고 다시 앉았다. 그녀의 얼굴엔 짙은 연민의 정이 서려 있었다. 내가 이렇게 간절하게 매달리리라는 생각은 미처 못했던 것 같았다. "내가 하자는 대로 할 거예요?" "그래요." "그럼 따라오세요." 계산을 하고 빠른 걸음으로 그녀를 따라나섰다. 택시를 잡은 그녀가 나를 먼저 들어가라고 했다. "K 호텔로 가세요." 미스 민은 명령하듯 말했다. 그리고 이내 "내가 임시로 기거하는 곳예요." 나는 대꾸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로소 그녀가 집이나 어떤 아지트를 갖지 않고 호텔에 머물고 있다는 걸 알 수가 있었다. 택시는 밤거리를 무섭게 달렸다. 우리는 침묵을 지켰다. 운전사가 이상하게 생각하리란 생각도 들었다. 호텔 정문 앞에 내리자 안내원이 정중하게 문을 열어 주었다. 뭐라고 인사하는 것 같았다. "당분간 머물고 있어요. 곧 떠날 테니까 자연 호텔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죠." "서울에 집이 있나요?" "떠돌이죠." 뭐든 속시원하게 대꾸해 주지 않았다. 그만큼 치밀한 여자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내려 긴 복도를 따라 걸었다. 방이었다. 깔끔한 그녀의 성격을 엿볼 수 있을 만큼 정돈되어 있었다. "샤워할래요?" "먼저 해요. 또 전화 좀 쓰겠소." "명심하세요. 일을 그르치면 안 돼요." "걱정 마쇼. 집에 못 들어간다는 연락을 할 테니까." "안 들어갈 작정예요?" "재워 준다고 했잖소." "맘대로 하세요." 그녀는 욕탕으로 들어가며 텔리비전 스위치를 올려 주었다. 나는 집에 못 들어가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은 채 무조건 내일 아침에 들어간다는 말만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욕탕의 물 튀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낮에 보았던 그녀의 세련된 호텔까지 끌어들였는지 모르지만 못 이기는 체 그녀의 계획대로 따라 주는 게 상책이란 생각을 했다. 이번 사건의 열쇠는 그녀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그녀가 입을 열기만 하면 의외로 빨리 매듭이 풀릴 일이었다. 물기를 말끔하게 닦은 미스 민이 수건 한 장으로 몸을 가린 채 나왔다. "샤워해요." "그러죠." 웃옷을 벗고 바지 바람에 욕탕으로 들어갔다. 샤워기 물을 조금 뜨겁게 해서 비누거품을 잔뜩 만들었다. 다혜가 이 광경을 목격한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무리 다혜를 구하려는 마음에서라지만 이 낯선 여자의 방에서 내 자신이 샤워를 하고 있는 것이 이상해 "무기는 치워두는 게 좋겠죠?" 내가 들고 나온 바지의 허리띠를가리키며 말했다. 그녀는 내가 표창을 지니고 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나이트가운 한 장뿐인 미스 민의 몸매는 은은한 불빛에 퍽 요염해 보였다. 나는 예전의나답지 않게 엉거주춤 침대 모서리에 앉았다. "잠옷 준비는 안 했어요. 이 방에 들어온 최초의 남자예요." 그 말의 진위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내 뇌리 속에는 오직 이 여자로부터 단서를 잡아내는 일뿐이었다. "이젠 이름이나 좀 압시다." 담뱃불을 붙이며 말했다. "혜라. 민혜라예요." "그렇겠죠. 난 다혜일 수 없으니까."만만치 않게 말대꾸를 했다. "누워요. 약속대로 재워 줄 테니까." "이대로 있어도 좋아요. 얘기나 합시다. 난 밤새라도 좋아요." "낮에 내가 그랬죠. 언젠가는 내가 장총찬씨 옷을 벗겨 놓겠다고." "그랬소." "난 약속 하나는 철저하게 지키는 여자예요." "난 아직 벗지 않았소." "벗게 될 거예요." 그러고는 냉장고를 열어 맥주 두 병을 꺼내 놓았다.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그녀의 자태가 그렇게 선정적일 수가 없었다. 다혜 문제만 아니면 달겨들어 자태였다. 술잔 가득 맥주를 따르더니 잔을 들었다. "우리 이 밤을 위해 축배해요." 나는 마지 못한 듯 따라 술잔을 들었다. 우리는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내가 먼저 얘기하죠. 밤새 시달리긴 싫어요. 이 이상 현재로선 아무 말도 할 수 없어요. 그러나 한 가지 희망이 있다면 내가 당신을, 당신이라고 불러도 괜찮겠죠? 당신을 아직도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예요. 그것만이 내 희망예요. 모레쯤 출발하겠어요. 내가 동행하는 건 그런 내 희망을 실험해 보고 싶은 것 때문예요. 됐어요? 더 이상 말 시키면 내쫓겠어요." "쉽게 쫓겨날 놈도 아니오." "이만큼 얘기하면 제발 알아들어요." "이거 간에 기별도 안 갑니다. 양주 한 병 꺼내 주쇼." "그거야 쉽죠." 나는 양주병을 받아 병째 꿀꺽꿀꺽 마셔댔다. 그녀는 말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취할 수도 없었다. 비밀의 열쇠를 쥐고 있는 이 여자의 마음이 움직이도록 하는 수밖에 없었다. 불이 꺼졌다. 그리고 분홍 빛깔의 작은 불꽃이 구석에서부터 은은하게 비치기 시작했다. 그녀도 두어 잔을 받아마셨다. 속살이 드러나 보이는 가운 한 장으로 몸을 가린 그녀는 불빛에 음영이 져서 그런지 낮에 본 그녀의 날씬한 몸매와는대조적으로 풍만해 보였다. 여러 가지 눈치로 혜라는 나를 원하고 있는 걸 알 수 그녀의 입을 열게 하기 위하여 그녀가 필요로 하는 만큼 나는 따라갈 각오였다. "난 당신을 좋아해요." 그녀가 술잔을 입에서 떼며 이렇게 말했다. "난 아직도 당신을 좋아할 수 없소." "알아요." 그러면서 몸을 감싼 가운을 침대 바닥에 떨어뜨렸다. 나는 그녀를 안아 침대 위에 던졌다. 눈부신 육체였다. 수건 한 장이나 얇은 옷 한 장으로 가리기에는 너무나 알맞게 빠진 육체였다. 꿈틀거렸다. 모든 걸 내맡긴 여인의 숨결은 자꾸만 높아갔다. 내 몸 속에서도 계산된 뜨거움 말고 이상스런 뜨거움이 살아났다. 그녀는 나를 힘주어 끌어안았다. 탄력 있는 몸매였다. 누가 누구의 사슬에 얽매여 가는지 알 수 없는 뜨거운 시간이었다. 그녀는 마치 선녀춤을 추듯 보드랍게 움직였고 나는 씨름판에 나선 선수처럼 격렬한 몸짓을 했다. 그리고 뜨거움은 마지막 지점에서 두 사람의 숨을 멈추게 했다. 참으로 뜨거운 밤이었다. 그녀는 흐느끼듯 목청을 떨었다. 밤은 그렇게 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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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소설방
[김홍신] 인간시장(9권) 87. 비겁한 승부사
하 얀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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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6.18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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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리아리
08.06.18 12:00
첫댓글
잘봤어요^^
미혜
08.06.18 12:25
고맙게 잘읽었읍니다~!
새처럼
12.09.18 12:56
좋은글 감사,,^^^^^
그리운남촌
14.08.29 21:59
잘 읽고갑니다~~
김성갑
18.06.24 12:24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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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게 잘읽었읍니다~!
좋은글 감사,,^^^^^
잘 읽고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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