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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하마(허승호)님
주 안에서
잘 지내시지요.
늘 시간과 기회와 여건이 주어질 때마다
복음이 주는 진리에 가까이 있고자
계시의 사색과 그 의존에 있으시는
님을 대하며
주께 감사드립니다.
님께서
질문하신 내용 잘 보았습니다.
님은 그동안 의식하고 있었던 것인
누가복음 16장 1-15절에 나오는
'불의한 청지기 비유'에 대해
질문해 주셨습니다.
님은 이것에 대해 질문을 하게 된 것이
이 비유는
일반적인 세상의 기준에 의한 논리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으며,
이 비유는
우리에게 하늘나라의 비밀을 알게 해주시려는데 있다고
알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님이 잘 본 것입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이에,
님이 알고자 하는
‘불의한 청지기 비유’에 대하여
답글을 드립니다.
‘불의한 청지기 비유’로 말해지는
본 비유에서 말씀해 주시고 있는 내용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
먼저 성경 본문을 보도록 합니다.
1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2주인이 그를 불러 이르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찌 됨이냐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3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4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사람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5주인에게 빚진 자를 일일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빚졌느냐 6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7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빚졌느냐 이르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8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9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10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11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12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13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14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15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눅 16:1-15).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죄인된 우리 대신에 죽임을 당하셔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죄 사함의 의를 입히시고, 죽은 자 가운데 있었으나 삼일 만에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다시 일으키셔서 생명의 주가 되게 하심으로써 우리를 죽음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로 옮기심에 따라 하나님의 의가 지배하는 새 생명에 있게 하신 삶을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죽으시고 또한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며, 그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죄 사함의 구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있으며 하나님의 참된 생명을 얻은 자로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입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의해서 우리 몸도 부활할 것과 이 부활이 있은 후에 있을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삶을 가질 것의 소망에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에 있는 삶을 삽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주로 모시고 살 것입니다. 이렇게 그분의 나라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섬기는 신실함에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서 예수 그리스도께 가진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항상 있을 것입니다.
본문은 설교하시는 분에 의해서 ‘불의한 청지기 비유’라고 불리워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제목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불의한 청지기’를 가지고 비유를 들거나, ‘불의한 청지기의 삶’을 가지고 비유를 들거나, ‘불의한 청지기 비유’에서 보는 대로 불의한 청지기의 지혜를 따라서 살아야 할 것을 가르치시는 것에서 하시고 있는 말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는 ‘청지기’가 불의의 재물을 가지고 어떻게 지혜를 발휘했는가에 대한 내용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주시는 가르침입니다. 그러기에 저는 ‘불의한 청지기 비유’에서 ‘불의한’이라는 말을 빼고 ‘청지기 비유’라고 말하고자 합니다.
‘청지기 비유’에 의한 가르침은 하나님을 사랑하여 열심을 갖고 율법을 준행한다면서 사실은 하나님을 멸시하고 돈을 사랑하는 바리새인을 염두에 두고서 이들이 하나님과 함께 돈을 사랑하는 두 주인의 섬김에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한편을 사랑하면 다른 한편은 미워하고, 한편을 미워하면 다른 한편은 사랑할 것이기 때문에 돈을 사랑하는 바리새인은 결코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을 주로 섬김에 있지 못할 것임을 암시적으로 말씀하심으로써 그들의 불신앙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어느 누구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고 오직 한 분만을 주로 섬김에 있을 것이란 것에서 예수님을 따름에 있는 제자들은 그 누구도 하나님과 함께 돈을 사랑하는 두 주인을 섬김에 있지 않고 한 분 하나님만을 섬김에 있는 하나님께 참으로 신실한 자일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예수께서 말씀하신 ‘청지기 비유’의 내용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부자가 있는데, 그는 청지기를 한 사람 두었다. 이 청지기가 재산을 낭비한다는 고발이 들어왔다. 그러자 주인이 그를 불러놓고 말하였다. ’자네를 두고 말하는 것이 들리는데, 어찌된 일인가? 자네가 맡아 보던 청지기 일을 정리하게. 이제부터 자네는 청지기 일을 볼 수 없을 것이네.‘ 그러자 그 청지기는 속으로 말하였다. ’주인이 내게서 청지기 직분을 빼앗으려 하니 어떻게 하면 좋을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 옳지, 좋은 수가 있다. 내가 청지기의 자리에서 떨려 날 때에 나를 자기네 집으로 맞이해 줄 사람들을 미리 마련해야 하겠다.‘ 그래서 그는 자기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하나씩 불러다가 첫째 사람에게 ’당신이 내 주인에게 진 빚이 얼마요?‘ 하고 물었다. 그 사람이 ’기름 백 말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청지기는 그에게 ’자, 이것이 당신의 빚 문서요, 어서 앉아서 여기에다가 쉰 말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당신의 빚은 얼마요?‘ 하고 물었다. 그 사람이 ’밀 백 섬입니다.‘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이번에도 청지기는 그에게 ’자, 이것이 당신의 빚 문서요. 그러니 얼른 받아서 여기에다가 여든 섬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말하였다. 주인은 그 청지기가 지혜롭게 하는 일을 보고 칭찬하였다. 그것은 그가 슬기롭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아들들이 자기네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아들보다 더 슬기롭다.’ ”
예수님은 이와 같이 청지기 비유를 말씀하시고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라. 그래서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처소로 맞아들이게 하여라. 가장 작은 일에 충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충실하고 가장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 일에도 불의하다. 너희가 불의한 재물에 충실하지 못하다면 누가 참된 것을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또 너희가 남의 것에 충실하지 못하다면 누가 너희의 몫을 너희에게 내주겠느냐?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그가 한 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쪽을 떠받들고 다른 쪽을 업신여길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그러자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 모든 말씀을 듣고서 예수를 비웃었습니다.”
이 내용을 보면, 1-8절에서 ‘청지기 비유’를 말씀하신 예수님은 9-13절에서는 앞에서 말씀하신 청지기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게 해주시기 위해서 이것을 가지고 말씀하신 의미를 설명해 주십니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9절에서 세상의 재물을 가리켜 '불의의 재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어떤 특정한 일에 대해 불법을 저지르며 온당치 못한 방법으로 취득한 재물, 곧 부당한 재물, 또는 정직하지 못한 재물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여기서 말씀하시는 것에서 '불의의 재물'이라는 것은,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공통되게 재물에 갖고 있는 생각을 잘 알고 계시는 것에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불의한 청지기’에서의 ‘불의의 재물’은 온 세상에 있는 재물 전체를 의도하는 것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는 사람들이 재물을 벌기 위해서 불의를 행해야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때에는 사람들이 재물을 불의한 것으로 간주하였습니다. 사실, 재물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원리 원칙에 따르기만 해서는, 그래서 사람이 착하게만 살아서는 결코 재물을 모을 수 없다는 것이 재물에 대해 갖는 보편적인 인식입니다. 따라서 예수께서도 이런 의미에서 재물을 가리켜 '불의의 재물'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이 ‘불의의 재물’로 “친구들을 사귀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자기가 가진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사람이 자기가 갖고 있는 재물로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을 도와주라는 말입니다. 특별히 여기서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이란, 도움을 받았으되 그것을 되갚을 수조차 없는 그런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어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친구를 사귀면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라고 하신 대로 이렇게 하면,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9절)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가난한 사람들이 자기들을 도와 준 사람들을 천국으로 인도한다는 말일까요? 이 말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저희가…영접하리라.'는 ‘받다, 영접하다, 취하다’(to receive)라는 동사가 가정법 과거 3인칭 복수형으로 쓰여 ‘영접하는 일을 하는 그들’을 염두에 두고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일(너희가 재물이 없어질 때/너희가 죽을 때)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처소로/영원한 집으로)영접할 것이다.” 또는 “(너희가 죽을 때) 너희는 영접을 받을 것이다. (그래서 영원한 처소로/영원한 집으로 들어갈 것이다).”라고 하는 의미로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의 ‘저희’는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귄 자의 재물이 없어질 때, 곧 그가 죽을 때, 그를 그가 머물 영원한 처소인 하나님의 나라/하늘나라로 맞아들일 분을 의미하는 것으로, 일차적으로는 그 일을 하여 하나님을 수종드는 '천사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만, 이 일을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기에 ‘저희’가 뜻하는 본의는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는 말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갖습니다. “만일 너희가 재물로 가난한 자들을 도우면 하나님께서 너희를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실 것이다.”
그러면 어째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왔는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천국으로 인도하신다고 하셨을까요? 가난한 사람들을 도운 것이 천국에 들어가는 의가 되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요? 여기서 예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가난한 사람들을 도운 것을 예수님과의 관계성에서 보시는 것에서 하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어린 소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라는 관계에서 하신 말씀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과 상관없는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도왔는데 그게 천국에 들어가는 의가 된다는 것이 아니라, 13절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재물은 미워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즉 예수님에게만 마음을 빼앗겨 이분을 사랑하는 것에다만 마음을 두고 그 마음을 쓰면서 사는 주님을 믿고 섬기는 사람,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에게 하시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는 한 부자 청년에게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마 19:21)고 하신 말씀과 같은 맥락입니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이 자비로운 행위가 말해지는 것은 주님을 좇는 것에 대한 상대적인 개념의 관계에서 가르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사랑하면 재물은 미워함에 있습니다. 즉, 재물을 주인으로 섬기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고 재물을 사랑하는 자는 주님을 미워하기 마련입니다. 그 이유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두 주인을 함께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두 주인이 모두 다 그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거든요. 재물은 재물을 사랑하는 자를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시는 분은 한 주인뿐이시니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두 주인을 같이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해서 예수님은 13절에서 하셨던 말씀을 산상설교에서 이미 이러한 이야기를 했었었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한 분을 주인으로 섬겨 그분을 사랑함에 있는 것은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입고 있는데 따른 것이며, 그런 그에게 불의의 재물이란 하나님의 자비를 힘입어야 할 자들에게 공급되어질 그가 입은 하나님의 자비의 베품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비로우신 분이심을 드러냄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예수께서‘청지기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은 그 의도가 단지 불의의 재물로 가난한 자들에게 자선을 행하는 것에서 하나님의 자비를 베풀어 보이는 선행을 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지금 청지기가 불의의 재물로 어떻게 지혜롭게 사용하여서 빚 많은 사람들의 빚을 탕감하여 주었는가에 비유의 초점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을 청지기에게 그가 하늘에서 맡을 일과 관련을 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청지기 비유’의 핵심은 하나님의 자비가 베풀어지는‘탕감’과‘하나님 나라’의 관련성입니다.
11절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지극히 작은 것에도 충성치 않는 자에게 어찌 참된 것을 맡기겠느냐?”는 것에서 ‘참된 것’이란 '복된 것, '하늘에 속한 것', '영원한 것' 등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주님으로 섬기면서도 또한 재물을 사랑함으로써 두 주인을 섬기는 듯한 태도를 갖는 것은, 그래서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지 않는다면 그러한 자에게 하늘의 참된 것을 맡는 청지기로 있게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즉, 하늘에 네가 영원히 있겠느냐는 것이죠. 그러니까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는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되지 못하다면 하늘의 참된 것이 맡겨지는 지극히 큰 일에 충성되지 못할 것이라는 것으로 그렇게 불의의 재물(세상 재물)에 신실하지 못하다면 또한 그가 하늘에서 차지할 몫도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결국은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역설적으로 표현하면, 불의의 재물로 많이 탕감하는 일을 하여 주인[하나님]의 자비를 크게 드러내는 일을 한 그는 하나님의 나라에 있다는 것이요, 그런 그는 하나님의 자비를 많이 입을 것에 있을 것을 의미합니다. 어떻게인지요. 하늘의 신령한 복으로 충만한, 곧 하나님의 나라가 영원히 그의 소유가 되는 것에서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영원히 그의 소유가 됨은 곧 하나님의 나라를 영원히 맡음에 있는 것과 다름 아닙니다.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는 것이 이와 같을진대, 과연 그리함에 있어야 하지 않겠는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왜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지 못하는 것이겠습니까? 그 이유는 영생의 가치와 그 영생을 주는 예수님의 존재 가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을 비롯해서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인물들에게서 “세상이 이들을 감당치 못한다.”는 것은 이미 이들은 하늘의 세계의 참된 생명을 소유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 그 마음은 이미 자신들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통해서 하늘의 세계에서의 생명을 얻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는 일조차 하지 못하는 것은 그 가치를 알지 못하고 오직 재물을 자신의 생명을 지켜주는 힘으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나 한 부자에게 가난한 사람들에게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재물을 부패한 더러운 것으로 취급하여서 버리라는 부정(不淨)의 뜻으로서가 아니라, 영생을 원하는 사람에게서 예수님은 영생을 주시는 분이시며 그래서 예수님은 영생을 주고자 하시는데 그렇게 영생을 얻게 될 예수님 한 분의 사랑을 입게 된 데서 나오는 ‘사랑의 빚’으로서 말씀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13장 8-10절에 보면,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찌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라고 하시고 있습니다. 영생을 얻을 자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제공받게 되는 것이 사랑의 빚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그리고 또한 이웃을 사랑해서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율법의 제1계명 제2계명 해서 제10계명에 이르는 계명을 지키는 사랑의 행위를 위선으로 할 수는 있어도, 가난한 자를 돕는 행위를 갖는 사랑이란 것이 진정 천국의 의로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서는 자기 소유를 다 팔아서 나눠주고 자신은 예수님에게서 생명을 보고 주로 따르는 것으로는 행해지지를 못합니다. 이 사랑의 행위는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입음으로써 사랑의 빚을 진 자에게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예수님은 마태복음 18장 23-35절에서 ‘자비로운 왕의 비유’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비유는 일만 달란트나 되는 거액을 빚진 사람이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밖에 안되는 빚을 진 사람의 어려움을 외면하여 탕감해 주지 않고 빚진 돈을 다 갚을 때가지 감옥에 가둔 것을 보고 왕이 크게 노하여 그를 잡아다가 “이 악독하고 뻔뻔한 놈아!, 네가 애걸하기에 불쌍히 여겨 내가 그 많은 빚을 탕감해 주지 않았느냐? 그렇다면 내가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자비를 베풀어 너에게 빚진 사람의 빚을 탕감해주었어야 할 것 아니냐?”하면서 그를 감옥에 보내고 마지막 한 푼까지 다 갚게 하였다는 내용을 다루고 있는 ‘탕감 비유’로도 잘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이 비유를 말씀하신 의도는 “만일 너희가 진심으로 네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실 것이다.”라는 사실을 가르치시기 위해서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을 ‘복음에 빚진 자’라고 규정한 것은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 것도 짊어지지 않은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19장에서의 어리석은 부자는 재물을 인하여 근심하다가 결국은 예수님을 좇는 일을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그에게는 재물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고, 그래서 주님은 미워하였습니다. 그렇게 재물을 주인으로 섬겨 사랑하는 그에게 주님께서는 그의 섬김과 사랑을 받고자 해서 그에게 주님을 주인으로 섬길 수 있는 사랑을 결코 베풀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재물이라는 두 주인을 함께 섬길 수 없다며 재물을 사랑하는 자는 주님은 업신여길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마 7:24).
그러니 말입니다. 님이여,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십시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자비를 공급받고 있는 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비에 신실하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는 10절에서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 하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충성되다'라는 말은 ‘신실하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지극히 작은 것에 신실한 자는 큰 것에도 신실하다.”라는 말이 됩니다. ‘청지기 비유’에서 하나님의 자비에 신실함을 불의의 재물을 가지고 비유적으로 말씀하셨는데, 이것에 신실한 것은 그야말로 ‘지극히 작은 것’에 신실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지극히 작은 것’에서의 신실함을 주께서는 하나님 앞에서 ‘큰 것에도 신실함’으로 인정하십니다. 그러니 말입니다. 불의의 재물을 비롯하여서 님이 주께로부터 공급받고 있는 사랑을 님이 유여[부유]하게 가지고 있다면 주님의 사랑을 받는 자들의 믿음을 보호하고 지키는 일에 선용하여 힘쓰시기 바랍니다. 불의의 재물이란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을 드러내는 그 어떤 일중에서도 ‘지극히 작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만, 이것이 ‘하늘에서는 지극히 큰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말입니다. 님에게서 불의의 재물보다 더 나은 것이 있는지요. 만일 그렇다면 불의의 재물에 신실한 님은 그것으로도 신실할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신실한 자’는 그보다 큰 것에도 신실하는 것에 어려움을 갖지 않습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서 신실은 시작되어 그에게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그와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온 계명을 이룸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으로 님이 하나님의 자비를 드러내어 그 자비를 입는 자의 기쁨에 기뻐하는지요. 님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온전히 기뻐하시는 그 기쁨에 참여된 자입니다. 그래서 말이죠. 하늘의 기쁨으로 기뻐하는 님에게서 데살로니가전서 5장에서 복음의 진보로 말미암은 “항상 기뻐하라.”(16절)는 주님의 뜻의 성취를 늘 보게 됩니다. 이러한 님은 ‘청지기 비유’에서 보게 되는 ‘참으로 지혜로운 청지기’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청지기 비유’를 말씀하신 본심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비유를 통해서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귐에 있는 신실함에 있지 않고, 불의의 재물에 욕심이 많은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청지기 비유’를 말씀하신 예수께서 13절에서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라고 말씀하실 때, 곁에서 예수님이 하시는 이 말씀을 들은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돈을 사랑하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혹 이를 중히 여기고’란 말은 ‘돈에 가치를 부여한다’는 것으로 돈에 마음이 빼앗겨 있는 바리새인들의 심중을 예수께서 꿰뚫어 보시며 잘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들의 관심은 온통 불의의 돈에만 집중되어 있어 가난한 자들의 재물까지도 탐내는 악에 있었지, 가난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비를 베푸는 의로운 일에는 마음은 전혀 없었습니다. 이런 그들이 백성들에게 율법을 준수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위선이며, 이런 그들은 자신들의 의로움을 사람들에게 보여 칭찬을 듣고 존경을 받기 위하여 행하는 것인 율법에 외식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도 이웃도 마음에 없었습니다. 단지 자신의 부요를 위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들이 다만 사람들 앞에서 의로운 척 할 뿐이며,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그들의 외식과 그 위선을 잘 알고 계시기에 비록 그들이 사람들에게서는 존경을 받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행위가 참으로 가증히 여기실 것임을 경고의 말씀으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 가증히 여김이 그들에게 어떤 결과에 있게 할 것인지를 세례 요한의 때부터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거부하고 배척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오지 못하고(눅 16:16-17), 끝까지 불의의 재물에 의지하여 사는 악함에 있는 악한 태도를 경고하기 위해 그들의 마지막이 어떤 것인지를 아브라함의 품에 있는 나사로와는 달리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눅 16:19-31).
결론적으로, ‘청지기 비유’와 그리고 이것에 이어지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의 연결에서 주시는 말씀의 진의는 앞서에서 말씀해 주시고 있는 가깝게는 누가복음 14장, 15장에서의 ‘하나님의 자비’에 누가 있는지를 알게 해주시면서, 불의의 재물을 사랑함에 있는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자비를 거부함으로써 실상은 하나님을 배척하는 악함에 있는 그들이 받을 화가 무엇으로 그들에게 미칠 것인지를 알게 해주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비유들에 이어지는 그 뒤에는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용서와 그 믿음에 있는 하나님의 권능이 전개가 되고 있습니다.
님이여,
하오니 님이 궁금해 하시며 내용의 의미를 알고자 하시는 누가복음 16장 1-15절에서의 ‘청지기 비유’에 바른 이해를 가져야 할 것이며, 이는 이것의 전후 문맥을 살펴서 더욱 그리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네 교회 주변에서 본문을 ‘불의한 청지기 비유’로 삼고서 흔히 듣는 설교인 마치 개처럼 돈을 벌어서 정승처럼 돈을 쓰면 된다는 식의 사고를 심어주어 성도들이 돈을 부정하게 벌지라도 이 돈으로 친구를 사귀라고 했으니 선행을 베풀고 하나님을 위해서 쓰면 된다며, 땅에서 불의하게 번 돈으로 하늘의 창고에 쌓으면 그것이 자신에게 하늘의 보물이 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교회에 연보하면 불의하게 번 돈도 의로운 행위가 되는 것인양 하는 따위로 신앙생활을 하게 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큰 악행인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이러한 설교나 이것에 의한 신앙은 참으로 얼토당토 않은 것입니다. 참으로 가당치 않습니다.
님이여.
이상으로 답글을 마칩니다. 본 답글이 님이 그동안 늘 ‘불의한 청지기 비유’로 의식해 오고 있었던 것에서 가진 궁금함을 해소해 줄 수 있는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습니다. 누가복음 16장 1-15절에서의 ‘청지기 비유’는 님이 질문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일반적인 세상 기준의 논리에서 말씀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그러한 식으로 풀어 해석하고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님이 질문에서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하늘나라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게 해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님이여,
답글을 쓰다 보니 어느덧
새벽 2시 20분에 이르고 있습니다.
해가 떠오르고 아침이 되면
언제든 님이 볼 수 있도록
어서 이 답글을 올리고
눈을 붙여야겠습니다.
주 안에서
평안을 빕니다.

첫댓글 아! 역시 탁월하고 깊이있는 목사님의 해석을 보니 가슴속이 시원합니다.
아마, 이 질문하기를 기다리셨던건 아니었는지요^^
마치 그런것이 느껴지도록 열정있고 확신있는 답글에 저도 힘이 솟아나는것을 느낍니다.
감사합니다.
하마집사님~^^ 이렇게 긴글 우째 읽으셨을까요? ㅋㅋ
짧은거좋아하시잖아유~~ㅎ
어제 조금 읽고, 오늘도 조금 읽고...^^*
저도 오늘까지 세번읽었는데 아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