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손님
2012. 3. 26
큰 딸애가 음력 설에 남자 친구를 시골 집에 인사시킨다더니 드디어 그 애가 집에 온다고 한다.
딸 가진 엄마가 으레 그렇듯 나도 마음이 분주해진다. 음식은 뭘하지? 집안 청소는 어떻게 하지? 며칠 전부터 그냥 설레어서 동생이나 옆 직원들에게 물어보느라 부산했다.
사윗감을 처음 보는 건 아니고 지난 가을에 서울에서 한번 만나본 적이 있다. 내 생일겸 서울에 갔을 때 제 남자친구를 인사시킨다고 하는데 눈치를 보니 제 동생하고는 벌써 몇번 만나 본 눈치다. 약속된 장소로 가기 전 시간이 있어서 근처 어린이 대공원을 먼저 들렀다.
노오란 은행이파리 날리는 공원에는 가을을 만끽하러 온 사람들로 붐볐고, 특히 아기를 목마태우고 또는 유모차를 끌고 가는 아빠가 많았다. 단란하게 유모차를 끌고 가는 아빠들을 보며 우리 사위도 저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훤칠하고 가족을 아끼는 그런 젊은 아빠들......
막연히 "우리 사윗감도 저렇겠지........." 하는 나에게
작은 딸이 일침을 놓는다. " 엄마, 미안하지만 엄마 큰 사윗감은 키는 안 커요, 너무 기대하지 마세요"
그래도 내 기대는 요즘 주말 드라마 "오작교 농원"에서 나오는 그런 아들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잘 생기고 훤칠하고 유머러스하고 또 능력도 있고, 가족을 끔찍히도 아끼는 그런 아들중에 하나겠지 하고 기대했다.
예약해 놓은 레스토랑에서 딸애가 " 여기예요, 빨리 와요" 하며 한 청년에게 신호를 보내는데 우선은 작은 키에 실망했다. 아니 아주 작은 키는 아니지만 내가 기대했던 훤칠한 키는 아니었다. 또 멋진 양복을 빼 입지 않아서 서운했다. 딸애는 나중에 왜 양복을 입지 않았느냐는 말에 그냥 인사만 드리는 자리라 편하게 하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도 내 생각엔 어른을 만나는 자리인데 정장을 입어야 하는거 아닌가라고 서운했다.
우리는 딸만 둘이라 남자애를 대하는데 익숙하지 못해서 어색하기도 해서 자꾸 말이 끊겼다. 또 처음보는 자리에서 아빠는 뭐 하시냐, 연봉은 얼마냐 묻기도 어려웠다. 그는 키는 별로 안 컸지만 우선 인상이 순해보여서 좋았다. 남편은 남자애를 만나니 아들을 만나는 듯 좋은지 여러가지를 묻는데 집안의 원래 고향이 당진이라고 해서 더 좋았다. 아주 먼데도 아니고 그러니 비슷한 생각과 가치관을 갖고 있을 것이다.
큰 아버지가 당진 고대면에 살고 계셔서 명절은 고대에서 지낸다고 한다. 나는 고대면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지만 아마 바닷가 근처인 것 같다. 큰 아버지가 배농사를 짓고 계신다는 말에 함자를 물어 본 남편은 비료를 쓰는 고객이라고 한다. 능금조합이 예산 당진을 아우르고 있고 남편은 능급조합에 비료를 납품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쨋든 첫 대면은 그리 큰 성공이 아니었다. 출신대학이 일류대도 아니고 직장이 대기업도 아니니 서운한 점이 많은 것이다.
그리고 이제 두번째 만남이다.
아침부터 괜히 마음이 급해서 동생보고 몇시에 준비한 음식을 갖고 올거냐, 빨리오라고 다그쳤다. 딸과는 어제부터 점심을 먹을거냐 저녁을 먹을거냐로 의견이 달라서 다투었다. 나는 두시쯤에 오면 점심을 먹고 들어와서 이른 저녁을 먹자는 것이었고, 딸은 처음 오는데 점심을 굶게 할 수는 없쟎느냐였다. 그래서 그럼 늦은 점심을 집에서 먹는 것으로 했다. 그랬더니 이번엔 또 그냥 나가서 식당에서 먹으면 됐지, 왜 이모네까지 부르냐는 것이었다. 큰 딸은 성격이 똑 떨어지고, 정확한 것을 좋아해서 자꾸 부딪히게 된다. 그러니 처음 왔을때는 반갑고 간다면 더 반갑게 된다. 아이도 크니까 품안에 자식이라더니 내 마음과 같지 않다.
아침부터 나와 동생은 음식을 준비하고 아이들은 청소하고 분주하다가 버스 도착 시간에 맞춰 남편과 큰애가 터미날로 갔다가 같이 들어온다. 현관에서 사윗감을 처음 본 동생이 " 잘왔어, 근데 둘이 참 닮았네" 하며 웃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고보니 자그마한게 둘이 닮은 것 같다. 둘이 닮으면 잘 산다는 옛말이 있어서 우선 안심이다. 그애는 명동에서 특별히 장인이 만든 한과를 사왔다고 선물로 내어 놓는다.
서로 인사를 하고는 차려놓은 상앞에 들러 앉아서 늦은 점심밥을 먹기 시작한다. 사윗감이 온다고 어제 광시 한우정육점에서 일등급으로 고기를 사왔는데 고기가 아주 맛이 있는지 그애도 잘 먹는다. 밥먹으면서 동생은 제가 더 좋은지 이것저것 챙겨주고 가족관계등을 묻느라 바쁘다. 나중에 저도 사위보는데 참고한단다. 우리집은 작년에 이사왔고 47평 아파트라 누가 와도 편안해서 좋은데 밥을 먹고 나서는 제방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정답게 얘기를 한다. 저런 사랑이 없다면 인류가 이어져 내려갈까? 하고 생각해 본다. 제 방에는 저희들 어렸을 때 사진이 있으니 보면서 웃을 것이다.
예산에 두집 계시는 큰 아버지댁에 가자고 하니 "당연히 인사드려야죠" 한다. 우선 읍내 둘째 큰아버지댁인 시장입구 가게로 가니 두분이 반갑게 맞아주신다. 큰댁은 하나있는 딸이 독일에 살고 있어서 특히 우리 애들을 이뻐하신다. 그 집에도 막내 아들이 장가를 안가서 걱정인데, 조카딸래미 사윗감이 왔다고 기뻐하시며 명절전에 들어 온 과줄등 먹을 것을 내 놓으신다. 가만히 보니 남편은 그 애가 가져온 전통 약과를 큰 아버지께 드리도록 하고있다.
다음엔 창소리에 사시는 큰댁에 인사드리러 갔다. 큰댁엔 할머니도 계셔서 손주 사윗감이 왔다고 좋아 하신다. 할머니는 95세로 그동안 많은 자손들이 있지만 또 손주사위 보시는게 너무 좋으신가보다. 큰 아버지께서는 나중에 "사람이 선해보여요, 사람이 선하고 자기 가족 위할 줄 알면 돼요" 하신다. 어른들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나도 서운한 마음이 조금씩 풀리는 것 같다. 저희들 서로 사랑하고, 위하고 살면 됐지, 내가 뭐 키가 크니, 작으니 할게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이번엔 자기 집으로 내가 준비한 선물을 가져 갈거냐 하는게 문제였다. 나는 처음 인사오는 사윗감을 위하여 광시 한우집에서 특등급으로 선물을 준비했는데, 그애는 집에다 말하고 공식적으로 인사온게 아니니 안 가져가는게 좋다고 한다. 아마 결혼 안한 누나가 있어서 엄마는 결혼을 서두르지 않는것 같다. 나는 속이 부글거렸지만 남편과 둘이 결정하는 대로 따르기로 했다. 아이들을 터미널에서 내려놓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냠편은 시키지도 않은 짓 해서 그렇다고 핀잔을 준다. 배웅을 하고 돌아온 큰 딸애는 명동까지 가서 어렵게 준비해서 아버지께 드리려고 사온 선물을 왜 큰 아버지께 드렸나고 또 짜증이다. 사위는 백년 손님이라더니 이래저래 사윗감과의 첫 인사는 너무 피곤하다.
나중에 친구들한테 이래서 내가 속상했다고 하니, 친구들은 이구동성 이제 우리 의견을 너무 내새우면 안된다고 조언해 준다. 아이들하고 거의 삼십년의 세대차가 있어, 내 고집을 내세우다가는 가족간 트러블만 생기고 불화만 생길수가 있어서 그냥 젊은 애들 따르는게 가장 상책이라고 한다. 옛날에 엄마하고 사사건건이 의견이 부딪혔었는데, 이제 내가 그때가 된 것 같다.
아! 엄마, 미안해요.............
첫댓글 언제나 깍듯하게 대해야하는 어려운 사람
사위를 맞이하는 장모님의 심경을 담담한 필체로 그려내셨네요.
백년지객은 장모님의 사랑, 이제 흉허물 없는 가족이지요.
사위 맞이하는 좋은 일,경사에 축하 드립니다.
ㅇㅇ오이 반가운 소식이네요.
고운 백년손님 맞으시느라 애쓰셨어요..후일에 조언을 부탁 드릴께요
글이 깔끔해서 좋네요. 다른 글(전에 본 글)에 비해 꼭 필요하지 않은, 설명적인 부분들이 많이 줄어서 읽는 재미가 커졌어요.
축하드려요. 형님 모습이 눈에 보이는듯 합니다.
축하드려요. 지금은 피곤하고 힘들지만 큰일 치루고 나면 시원하답니다. 하지만 맞벌이하는 애들 아이봐주기까지 해줘야 끝이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