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장군의 죽음에 관한 새로운 사실 2003/06/10 이양훈
민족의 성웅으로 만고에 추앙받는 이순신 장군의 전사과정에 대해 소개한다.
일본측 자료인 『島津戰記』를 참조해 다음과 같이 노량해전(이순신 장군이순국하신 해전)을 재구성했다.
정유재란의 끝인 노량해전은 1598년 11월19일 일어났는데 순천왜성에 갇힌 소서행장(고니시 유키나가)을 탈출시키기 위해 펼쳐진 전투이다.
소서행장 구출을 앞두고 왜장들은 회의를 했는데 "조선땅에 자국군을 죽게 내버려 두는 것은 일본 역사의 흠이 된다"는 주장을 한 시마즈 요시히로의 뜻을 왜장들이 따랐고 그가 구출의 주역을 맡는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당시 64세로 풍신수길이나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두려워한 걸출한 왜장으로 큐우슈우 남부지역인 사쯔마(현 가고시마현)의 다이묘오(大名 호족)였다.
그는 칠천량 전투에서 이순신 장군을 대신한 원균을 잡아 죽이기도 했다.
전단은 11월 18일 새벽 4시부터 노량에서 열렸는데 먼저 명나라 장수 등자룡이 왜적에게 달려들었다가 왜의 집중사격에 의해 전사한다.
500척의 왜선은 10개 선단으로 구성되었는데 나열하면 제1 시마즈 요시히로 본대, 제2 시라노부 선대, 제3 카바야마 쿠다카 중군 선단(50척), 제4 타치바나 선단, 제5 데라자와 히로타카 선단, 제6 타네가 시마시 선단, 제7 야마다 아리노부 선단(50척), 제8 후진의 데라자와 히로타카 선단, 제9 다카하시 선단이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노회한 장수로서 이 선단중에 계략용 선단을 숨겨둔다.
선단들중 세번째 카바야마 쿠다카의 중군 선단 50척이 조선수군에 불의의 일격을 가하는 숨겨논 선단이 된다.
전투는 주로 노량해협과 관음포 (남해섬 서쪽 이락사 일원의 만으로 '가칭이'지협地峽앞 ※혹자는 가칭이 지협을 수로로 착각해 왜선들이 몰렸다지만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필자는 본다. 지형숙지는 군인의 기본이다) 일원에서 주로 펼쳐졌는데 조선수군이 있던 관음포 만에 돌격한 선봉대 카바야마 쿠다카는 조금 싸우다가 군선들을 바닷가 여울에 버리고 상륙하여산으로 달아난다. 남해섬에 상륙하여 배를 포기한 것이다.
이를 멀리서 지켜본 이순신 장군은 '못난 겁장이 왜인들!' 생각했을 것이다.
그들 왜선단이 싸움을 포기한 것으로 생각하고 뱃머리를 돌려 시마즈 요시히로의 다른 선단들과 접전한다.
날이 밝으면서 전투는 치열의 도를 더한다. 우리 측에 가리포첨사 이영남이 전사하는 등 피해가 나면서 왜선들은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는다. 시마즈가 탄 배도 뱃머리가 접히고 돛대가 꺾어지고 너덜너덜한 상태로 해면에 떠 있는것이 불가사의일 정도가 되었다(일본측 島津戰記기록). 이 위기의 순간에 7선단의 야마다 아리노부가 목숨을 걸고 조선수군들 속에 뛰어 들어가 뱃전을 잇대어 시마즈 요시히로를 구해내자 배는 가라앉는다.
왜 선단이 큰 피해를 입는 것은 생소한 조류가 큰 몫을 했다.
島津戰記에는조류때문에 선단의 선회가 불가능했다 기록했다.
250척이던 시마즈 요시히로 직할 선단은 200척이 가라앉고 50척으로 감소했다.
오후가 되어 조선수군의 승리가 확실해졌을 때였다.
"저 왜선들은?"
이순신 장군의 뒤에 한무리의 새 왜선단이 나타나 기습해 왔다. 예상치 못했던 공격이었다.
"모두 가라 앉혔는데 어디서 온 왜선들인가?"
그 왜선들은 관음포 만에서 나왔는데 아침에 바로 배를 버리고 산으로 달아났던 카바야마 쿠다카의 3번대 50척이었다. 그들은 배를 버린 것이 아니었다.
다시 배를 몰아 나와 조선수군의 허를 찌른 것이었다.
왜군들은 기세를 올렸고 그들이 그 동안 노심초사하며 겨우 알아낸 이순신 장군의 판옥선에 집중사격을 가했다. 앞뒤로 협공된 이순신 장군의 판옥선은하늘을 뚫을 정도의 총포의 일제 포화를 받아 판옥선 선상이 피바다가 되었다 (이 표현은 시마즈 요시히로의 기록인 島津戰記를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이순신 장군의 사살을 노렸는데 이 계략이 맞아 떨어진 것이다. 함정 전법에 관한한 100여년 전국시대를 겪은 왜장들이 한 수 위였다.
유탄이 아닌 일제사격에 의한 총탄이 가슴을 관통하였고 이 선상 피바다에서 이순신 장군은 최후를 맞은 것이다.
이순신 장군은 자신의 죽음을 숨기도록 엄명했지만 곧 전선의 적과 아군 모두에게 '희세의 명장 이순신 장군이 죽었다!'는 것이 널리 알려졌다.(시마즈요시히로의 島津戰記 기록입니다)
다음날 새벽이 되자 1만명이 넘는 익사시체와 400척의 배를 가라앉힌 채 왜군들이 철수했다. 소서행장 구출에 성공했고 이순신 장군 저격에 성공했지만 그들도 패배로 인정한 노량해전이 끝난 것이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노량해전후 『그가 머문 사천성과 영지인 사쯔마에 왜군과 조선군 모두를 위한 분향소를 설치했다』고 하는데 그도 이순신 장군을 존경하여 적장의 명복을 빈 것으로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