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에 갇힌 이들을 여러분도 함께 갇힌 것처럼 기억해 주고, 학대받는 이들을 여러분 자신이 몸으로 겪는 것처럼 기억해 주십시오(히브 13,3).
7월 28일 아침도 거르고 일찍 베로니카와 함께 경기도 화성 마도에 있는 화성직업훈련교도소를 찾아 나섰습니다. 혹시라도 길이 막히면 오후 2시에 신청해 놓은 장소외 접견 시간을 놓칠까 싶어서입니다.
길이 막히지 않았습니다. 제부도로 가는 차들은 많지만 우리처럼 교도소로 가는 차량은 거의 없습니다. 11시에 교도소 근처에 도착해서 짜장면을 하나 시켜 먹었습니다.
장소외 접견은 일반 접견과 달리 가림막도 없습니다. 교도관의 입회 하에 조금은 자유롭게 면회를 할 수 있습니다. 시간도 30분 정도로 조금의 여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좀 까다롭습니다. 각서도 써야합니다. 그리고 교도소 내부로 들어갈 때는 소지품을 맡기고 검신대를 통과해서 들어갑니다.
오늘 만나는 형제는 이곳에서 자동차 판금 훈련을 받고 있습니다. 청송 1교도소에서 천주교 회장을 하다가 이곳으로 왔습니다. 열여덟 년형을 받아는데 9년째 살고 있습니다. 아내와 딸 셋이 고향에서 살고 있습니다. 면회도 자주 옵니다.
접견실은 에어컨이 나와서 시원합니다. 열대야로 밤에 잠 자는 것이 힘들지만 다른 것은 괜찮다고 합니다.
7월 29일에는 서울구치소로 갔습니다.
최고수 프란치스코를 면회했습니다.
최고수란 사형선고를 받은 사형수를 일컫는 말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서른 즈음에 잡혀 들어왔습니다. 사형선고를 받고 사형수로 어느새 스물두 해가 지났습니다. 이제 오십이 넘었습니다. 우리가 만난지도 벌써 이십년이 흘렀습니다. 처음의 무서운 표정은 이제 모두 다 사라지고 얼굴이 말갛게 변했습니다. 욕심도 거의 내려놓았습니다. 무엇인가 필요한 것이 있는지 물어보다 없다고 합니다. 충분하다고 합니다. 금새 십여분의 짧디짧은 면회 시간이 지나갔습니다. 내년에 다시 만날 기약을 하고 면회실을 나왔습니다. 밖에는 비가 부슬부슬 내립니다.
7월 30일에는 베로니카와 모니카와 함께 남부교도소를 찾아갔습니다.
오늘은 세 명의 형제들을 만나야 하기에 온가족이 함께 갑니다.
베로니카는 무기수인 제노비오 형제를,
모니카는 민성이를 만나고,
나는 무기수인 덕일 씨를 만나기로 했습니다.
먼저 민원봉사실에서 영치금을 넣고 간식거리를 구매해서 넣어주었습니다.
덕일 씨는 무기징역을 확정받은지 28년이 넘었습니다. 아무래도 30년을 채워야 가석방이 될 듯 합니다. 내년이면 육십입니다. 몇년 전에 25년만에 휴가를 받아서 민들레국수집을 찾아오기도 했습니다.
제노비오 형제는 20대에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어느새 20여년이 흘렀습니다. 1급 모범수형자가 되었습니다. 고입, 대입, 독학사를 마쳤습니다. 몇개의 기술 자격증도 취득했습니다. 부처님 얼굴처럼 편안한 얼굴이 되었습니다.
민승이는 모니카보다도 어립니다. 운동선수였는데 12년형을 받고 십년을 살았습니다. 청송에서 만났습니다. 이곳 남부교도소에서는 합창단 활동도 합니다. 민승이의 어머니 아버지가 직극정성으로 아들을 돌봅니다. 이제 조금만 더 지나면 출소해서 새출발을 할 수 있을 거십니다.
거의 같은 시간에 세 사람을 면회한 덕분에 모두의 얼굴을 보고 눈인사를 나눌 수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8월 1일 새벽 세 시 반에 일어나서 준비하고 네 시 반에 청송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고속도로가 새벽인데도 불구하고 차들이 무지무지 많습니다. 작년에 도로에서 고생한 기억 때문에 일찍 출발했는데 여주휴게소 지나서 원주로 가는 길은 아무래도 막힐 것 같아서 충주쪽 고속도로에 들어서서 점촌 함창을 거쳐서 안동을 거쳐 진보로 왔습니다.
경북 북부 3교도소에는 형기를 마친 사람들이 있는데 감옥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감호를 살고 있습니다. 현재 감호법은 폐지가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감호법이 폐지될 때의 단서 조항. 이 법에 의해 감호 선고를 받은 사람에게는 유효하다고 해서 7년 미만의 감호 처분을 받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바오로 형제를 면회하고,
베로니카는 프란치스코 형제를 면회했습니다. 프란치스코 형제도 본 징역 형기를 모두 살고 감호를 6년째 살고 있습니다. 가석방이 되면 민들레국수집 근처에 있는 겨자씨의 집에서 함께 살기로 했습니다.
바오로 형제는 십년 징역을 모두 살고 이곳 3교도소에서 감호를 삼년 째 살고 있습니다. 지금껏 징벌만 스물 몇 번을 받았습니다. 교도소에서 규칙을 어기면 징벌 처분을 받게 되고 징벌방에서 두 달에서 며칠 사이의 처분을 받게 됩니다. 십삼 년 동안 스물 몇 번의 징벌 처분은 무지무지 많이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가석방을 간절히 원합니다. 얼마나 세상으로 나오고 싶으면 저에게도 탄원서를 써서 법무부에 좀 내어 달라고 합니다.
바오로 형제는 별명이 "아까도라"입니다. 아까 돌아서 싸우곤 또 싸운다고 붙여진 별명입니다. 어릴 때 아버지로부터 받은 상처가 큽니다. 오십이 넘은 나이인데도 참 아픈 사연입니다.
진보에 나와서 점심으로 국수를 먹고, 떡과 케이크 그리고 팥빙수와 냉장고 수박과 과자를 사서 경북북부 1교도소로 갔습니다. 오늘은 자매상담이기 때문입니다. 열여덟 명의 형제들이 모임 장소에 나왔습니다. 시작기도를 하고 안부 인사를 나누고 두 병의 형제들을 위한 생일축하 노래를 한 다음에 케이크를 나누어 먹었습니다. 그리고 팥빙수와 수박도 나누었습니다. 팥빙수를 얼마나 맛있게 먹는지요.
형제들과 함께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했습니다. 어느새 헤어질 시간입니다. 교도소를 나와서 민원봉사실로 가서 영치금을 넣어주고 치솔도 넣어드렸습니다.
청주로 떠났습니다.
8월 2일에는 오전에 청주교도소 베드로 형제를 만나러 갔습니다.
베드로 형제는 옛날 광산에서 일하다가 매몰이 되었는데 구사일생으로 살아나기도 했습니다. 20년형을 받았는데 이제 17년째 징역을 살고 있습니다. 3년을 더 살아야 하고요. 감호 취소가 있어서 1년 정도 더 살아야 합니다. 베드로 형제는 붓글씨를 아주 잘 씁니다. 교도소에서 출품도 자주합니다. 민들레국수집에 접는 부채에 성모송과 주기도문을 붓글씨로 써서 아주 많이 선물로 보내줍니다.
청주 교도소에서 전일 공장에서 일을 합니다. 교도소 내의 일반공장에 출력하는 것 보다 상여금이 많습니다. 그렇게 벌면 모두 서예 하는 데에 씁니다. 욕심도 모두 내려 놓았습니다. 필요한 것이 있는지 물어보면 아무 것도 없다고 합니다. 이제는 출소해서 살 곳이 있어서 참 좋다고 합니다. 민들레국수집 근처에서 함께 살기로 했습니다. 이제 세 번만 더 면회하면 베드로 형제는 세상으로 나옵니다.
면회를 한 후에 곧바로 공주로 갔습니다.
공주교도소 근처에서 칼국수를 먹었습니다. 아주 맛있게 보여서 칼국수를 시켰는데 땀을 흠뻑 흘리면서 맛있게 먹었습니다. 더위를 식히느라 고생했습니다.
공주교도소 들어가는 길은 아주 멋집니다. 은행나무 가로수길입니다. 가을에 노랗게 물들면....
공주교도소에 있는 안드레아 형제는 1993년 사형수로 갇혔다가 무기로 감형이 되어 이곳 공주교도소로 이송을 왔습니다. 사형수로 있을 떄는 특별 대접을 받다가 무기로 감형되니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서 적응하는데 아주 힘들었다고 합니다. 안드레아 형제는 작년에 독학사 자격을 땄습니다. 그래서 2급이 되었는데 그만 동료와 싸우고 3급으로 강등이 되었습니다. 전일공장에서 일을 하기 때문에 오후 3시가 지나야 면회를 할 수 있습니다. 덕분에 민원실에서 눈을 좀 붙쳤습니다.
오후 3시에 장소외 접견을 했습니다. 안드레아 형제도 어느새 쉰이 넘었습니다. 흰머리도 많이 생겼고, 머리도 조금 벗겨졌습니다. 얼굴도 편안해졌습니다. 세월이 흐르면 세월이 사람을 순하게 해 주는 것 같습니다.
요즘은 교도소마다 전일공장을 많이 운영합니다. 전일공장에 출력하는 사람은 집회나 면회를 오후 3시 이후에 하겠다는 약속을 해야합니다. 그래서 거의 많은 교도소들이 종교 집회를 오후 3시로 변경했습니다. 이곳 공주교도소는 개신교와 불교 집회는 오래전에 오후 3시 집회로 변경되었답니다. 천주교만 전일공장에 출력하는 사람들은 참석할 수 없게 시간 변경을 해 주지 않고 있답니다. 천주교 신자 재소자들과 교도관들이 신부님께 사정해도 들은체 만체 한답니다. 세상에...
안드레아 형제와 내년에 다시 만날 기약을 하고 교도소를 나왔습니다.
광주로 출발했습니다.
광주에서 참 맛있는 저녁을 먹었습니다.
오전에 무기수인 보니파시오 형제를 면회하기 위해 광주교도소로 갔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곳으로 이전을 했다고 합니다. 겨우겨우 11시 직전에 새로 지은 광주교도소에 도착했습니다.
보니파시오 형제는 청송에서 이곳 광주로 이감을 왔습니다. 잘 적응해서 천주교 회장을 하고 있습니다.
무기징역이 확정되고 벌써 열여덟 해가 흘렀습니다.
내년에 만날 기약을 하고 순천으로 출발했습니다.
순천에서 맛있는 점심을 먹을 수 있겠다 싶어서 전에 갔었던 식당을 찾았는데 문을 닫았습니다. 몇 군데를 더 돌아보다 결국 김밥 한 줄에 라면으로 끼니를 때웠습니다.
순천교도소에는 광주교도소에서 사형수로 있다가 무기로 감형되어 미곳에서 옷 만드는 일을 하는 요한 형제입니다. 장소외 접견을 했습니다. 그리고 군산으로 출발했습니다.
군산교도소에서는 재균 형제를 장소외 접견으로 만났습니다. 재균 형제도 어느새 쉰이 넘었습니다. 머리카락도 희끗거립니다. 앞으로 오년만 더 살면 출소할 수 있습니다.
베로니카가 임요한 형제를 만나지 못하고 가는 것이 안타까워 용감하게 민원실 계장님께 면회 부탁을 했습니다. 놀랍게도 허락을 받았습니다. 교도소에서는 두 번 면회하는 것은 아주 어렵기 때문입니다.
임요한 형제는 무기수입니다. 무기로 확정되고 28년을 살았습니다. 저와 나이가 같습니다. 예순 둘입니다. 청송에서 이곳 군산에 전문 기술인 귀금속을 배우러 왔습니다. 이제 2년 안에는 가석방이 될 것입니다.
욕심을 부리다가 인생을 교도소 안에서 보냈는데 아직도 정신 못차리고 욕심을 부리면 안 될 것 같아서 이제는 모든 욕심을 내려 놓았다고 합니다. 욕심없는 얼굴.... 부럽습니다.
이제 대구로 출발했습니다. 88 고속도로가 이제는 다른 고속도로처럼 도로가 넓어졌습니다. 밤 늦게 대구에 도착했습니다. 늦은 저녁을 먹었습니다.
대구교도소에는 최고수 형제가 있습니다. 39살입니다. 26살 때인 2003년에 최고수가 되어서 서울구치소에 있다가 이곳 대구교도소로 이감을 왔습니다. 대구로 이감오기 전까지는 최고수들은 미결수 방에 있었고, 공장으로 출력해서 일을 할 수 없었고. 학위를 딸 수 있는 공부도 하지 못했습니다. 대구로 이감 오고부터는 사형수도 공장에 출력햇 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곳 대구에서 인쇄공장에서 일을 합니다. 독학사로 공부도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제 3단계 과정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최고수라서 장소외 접견을 못하고 일반면회로 두 몫을 했습니다. 20분이나 면회할 수 있었습니다.
대구는 수은주가 37도나 올랐습니다. 무척 덥습니다.
마지막 일정으로 대구역 근처 교동에 있는 "요셉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원잔 수녀님께서 점심을 사 주셨습니다. 낙영갈비찜에서 배가 터지도록 맛있는 갈비찜을 먹었습니다. 수녀님께서 사 주시는 갈비찜 정말 맛있습니다. 수녀님께서 꽁꽁 얼린 돼지고기와 된장과 간장을 듬뿍 차에 실어주셨습니다. 고맙고 고맙습니다.
2016년 여름 민들레국수집 교도소 여행이었습니다.
선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세상이면 얼마나 좋을까요.
인성여고 학생 여섯 명이 오늘 자원봉사 왔습니다. 얼마나 예쁜지... 손님 대접도 참 잘 합니다.
손님들이 참 많이 오십니다.
그리고 맛있게 드십니다.
미역 오이 냉국, 열무김치, 어묵볶음, 오이무침, 생선조림, 수박과 바나나 등등.
날씨가 너무 너무 덥습니다.
당뇨로 쓰러졌다가 인천의료원에 입원해서 치료를 받고 나서 가족들 곁으로 가길 거부하고 민들레국수집 금처에서 살겠다는 흥식 씨는 서산 여인숙에 방을 얻어주었습니다. 당뇨약을 먹으면서 식사하러 오곤 했습니다. 기초생활수급 신청을 했는데 호적에 가족이 있습니다. 오래 전에 이혼하고 혼자 살아왔는데 딸들이 있어서 부양의무 포기각서를 받아야 했는데 겨우 받았어요. 이제 동구청에 흥식씨가 가서 서류에 싸인만 하면 기초생활수급자가 됩니다. 이제는 거리로 나가지 않아도 됩니다. 병원 치료는 의료급여로 받을 수 있습니다. 베로니카와 민들레 식구들이 흥식 씨를 돕느라 고생했습니다. 고맙습니다.
문 선생은 인천의료원에 갔다가 노숙인이라 쫓겨났다가, 방을 얻고 주민등록을 이전하고 다시 인천의료원에 가서 진료를 받았는데 악성 골수염으로 절단해야 할 수도 있고, 아무래도 대학병원에 가야 치료할 수 있다고 해서 인하대학병원으로 갔습니다.
젊은 사람의 다리를 절단하기는 너무 안타깝다는 의사 선생님의 배려로 치료기간이 길지만 다리를 살리는 쪽으로 치료하기로 했습니다.
민들레진료소 조순구 교수님과 민들레진료소 봉사하시는 의사 선생님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열흘 간의 입원 후에 퇴원했습니다.
문선생은 서산여인숙에서 겨자씨의 집으로 방을 옮겼습니다. 민들레 식구들이 병구완을 할 것입니다.
감염치료 진료와 정형외과 외래 진료를 계속 받을 것입니다.
사랑병원으로 옮기려 했지만 사랑병원에서는 드레싱만 할 수 있어서 병원 옮기는 것은 포기하고 겨자씨의 집에서 드레싱을 하고 인하대병원으로 외래 치료를 다니기로 했답니다.
인하대병원 복지재단과 셀트리온 재단의 도움으로 약 450만원 상당의 의료비를 지원 받았습니다.
고맙습니다.
베로니카와 민들레 식구들이 문선생 병문안도 자주 했습니다. 이제는 집에서 드레싱 치료를 도와주고 격주로 병원에 가서 감염치료와 정형외과 치료를 계속 할 예정입니다.
그라고 기초생활수급자 신청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잘 되면 앞으로 문선생은 민들레국수집을 떠나더라도 최소한 노숙을 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문 선생이 치료 받을 때 고마운 분들이 관심을 가져 주시고 기도해 주셔서 참 고맙습니다. 덕분에 문 선생이 살았습니다.
고맙고 고맙습니다.
감동으로 읽었습니다.
서영남 선생님이 보여주신 나눔의 삶이 나를 성숙하게 했음을 절실히 느낍니다.
가슴 속에 가난한 이웃을 사랑하고자 하는 열정을 길러주셔서 감사합니다.
감동! 또 감동입니다.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이기적인 삶을 살아서 부끄럽습니다.
앞으로 조금씩이라도 나누며 살겠습니다.
민들레 국수집을 통해 VIP손님들은 절망을 딛고 새로운 희망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감사와 사랑의 마음이 우리 안에 흘러넘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