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영주 근대역사문화거리 및 부용공원 부용대
<경북 영주시 영주동 466-39>
영주 근대역사문화거리는 경북 영주시 영주동에 있는 영주의 근대 생활사를 보여주는 역사 문화공간으로
2018년 8월 6일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 제720호로 지정되어 영주의 근대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영주 근대역사문화거리는 영주 1동 행정복지센터와 영광여중이 위치한 시내 북쪽 일대의 구도심지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구 영주 역사의 철도 관사, 근대한옥, 교회, 정미소, 이발소 등 영주지역의 근대 생활과 거리 경관을 보여주는 건축물이 보존되어 있는 거리로
이 건축물들은 모두 문화재청 등록문화재이며 경상북도가 산업유산, 노포기업으로 관리하는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들이다.
영주는 1930년대 중앙선 철도가 개통하면서 교통의 요충지로 급부상했는데 이 시기에 영주역을 중심으로
상업과 교통이 발달하면서 도시가 급격히 성장하였다.
과거 일제시대 300여개의 정미소가 있을 정도로 경북지역 미곡유통의 중심지로
1940년부터 운영되던 풍곡정미소는 지금은 운영하고 있지 않지만 방아와 관련된 옛 도정 기계들이 있어 세월의 흔적을 볼 수 있고
풍국정미소에서 북쪽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걸으면 1909년 지어진 고딕양식 건축물 영주제일교회가 있다.
노포 영광이발관과 영주의 철도 역사와 역무원이 머물렀던 구 영주역 5호 관사, 7호 관사와 인근 근대한옥 마을로 이어지는
영주 근대역사거리를 둘러 보면 근대시기의 서민의 삶과 생활상을 볼 수 있다.
2025.12.28(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영주 부석사 및 소수서원, 선비촌, 소수박물관, 단종복위운동 성지 금성대군 신단,
성혈사 탐방후 오늘의 마지막 일정으로 영주 근대역사문화거리 및 부용대를 방문하여 약 1시간 동안 탐방시간을 갖는다(16:10~17:20)
<영주 제일교회 안내도>
<첫 번째 만나는 영주제일교회>
영주 제일교회는 경북 지역에서 비교적 이른 시기인 1909년에 설립된 영주교회에서 시작하였다.
강명서숙을 건립하여 신문물을 가르쳤으며 영주 기독 청년회를 조직하여 계몽운동을 전개하는 등 영주 지역의 근대화에 기여하였다.
또한 일제의 신사 참배 강요에 저항하기도 하였다.
영주 제일교회 건물은 영주 지역의 유일한 고딕 양식 건축물이다.
1954년 5월 1일부터 한국전쟁 당시 소실된 예배당을 신도들이 노역 봉사로 짓기 시작하여, 1958년 7월 25일에 현재의 모습으로 완성하였다.
건물의 형태는 남북으로 대칭을 이루는 긴 직사각형 모양으로 정면은 광복로 방향으로 나 있고 그 왼쪽에 종탑이 설치되어 있다.
영주 제일교회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근대 산업 시기를 거쳐 온 지역주민들과 신도들의 삶과 역사적 흔적이 남아 있는 문화유산이다.
<영광 이발관>
영광이발관은 1930년대 '국제이발관'으로 영업을 시작하여 '시온이발관', 그리고 현재 '영광이발관'에 이르기까지 긴 역사가 있는 이발소이다.
영광이발관이 있는 광복로 일대는 과거 군청, 경찰서 등의 관청과 학교가 모여 있었고, 옛 영주역과 가까워 이발업이 성행했던 지역이었다.
이후 두발 자유화와 대중문화의 영향으로 다양한 헤어스타일이 유행하면서, 사람들은 점차 이발소보다는 미장원을 찾게 되었다.
현재는 광복로 일대에서 영업 중인 이발소는 않지 않다.
1970년대 광복로 도로 확장으로 당시 시온이발관을 현재 위치로 옮겨왔다.
근대 산업 시기에 건축된 목조와 슬레이트 구조로 건축 완성도는 낮지만
80여 년 동안 지속되어 온 장인의 이발업 생활사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생활사적 가치가 높다.
<영주동 근대 한옥>
1920년대에 지어진 영주동 근대한옥은 조선 명종 때의 유의선비 의사 이석간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지는 가옥이다.
이석간이 명나라 황제의 어머니가 알던 불치병을 고치자 황제가 그를 위해 99칸 집을 지어 주었다고 한다.
이후 99칸의 본체는 모두 사라졌고 현재는 1929년에 다시 고쳐 지은 별채만 남아 있다.
별채는 앞면 7칸, 옆면 6칸 규모의 ㅁ자형 한옥 주택이다.
이 가옥은 한때 한의원, 하숙집 등으로 사용되어 일제강점기와 근대 산업시기의 생활상이 남아 있다.
이번 탐방에서 영주동 근대 한옥인 이석간 고택은 찾지 못한다.
<옛 정미소 모습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 풍국 정미소>
1930년대에 지어진 정미소로 당시 산업시설의 모습을 보여주는 건축물이다.
정미소는 벼나 보리 등 곡식의 껍질을 벗겨 내는 도정 작업을 하는 곳이다.
영주는 일제강점기 경북 북부 지역 미곡 유통의 중심지로서 광복로 일대에는 30여 개의 정미소가 있었을 만큼 이곳은 지역 양곡 유통의 중심지였다.
1940년경에 설립된 풍국정미소는 해방 후 영암선 철도 개통을 계기로 경북 북부와 강원도 남부 탄광 지대에 식량을 공급하는 거점이 되었고
정부미 도정 공장의 역할을 하는 등 큰 규모의 정미소였으나 현재는 영업하지 않는다.
이곳은 양곡 가공업의 형성과 양곡 유통의 역사뿐 아니라 정미소의 건축 형식과 설비 구조, 각종 도정기기 등
당시 정미소의 흔적이 잘 남아 있어 산업사적 가치가 높다.
<구 영주역 관사>
두서마을은 일제 말 중앙선 개통과정에서 철도관사가 생기면서 관사골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관사는 27호 정도가 있었고 직원들의 직급에 따라 크기가 달랐다.
실내에 화장실과 목욕탕을 갖추고 있어 당시 영주에서 가장 좋은 집이었다고 한다.
해방 전후 철도관사 부근 산 위쪽으로 40여 호가 살았으며 일제시기에 만든 방공호가 있었는데
한 가족이 다 들어갈 정도의 크기였으며 6.25전쟁 때 주민들이 피신했다고 한다.
1960년대 철도교통의 발달과 함께 관사골의 인구가 급증했다.
인근 농촌에서 몰려든 사람들이 하룻밤 사이에 집을 짓기도 했으며 골목마다 우물이 있었다.
또한 영광여중·고가 들어서면서 자취하는 학생들의 수도 늘어났다고 한다.
대상 건축물은 이전 모습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는 5호, 7호 2동의 관사동이며
2동의 건물 사이에 보도가 있으나 내부 마당은 벽으로 구획되어 폐쇄적인 건물형태를 띄고있으며 이후 부속시설물들이 증축되어 있다.
주택은 당시 철도국에서 공급한 표준형 주택으로 외관은 철, 유리, 시멘트 등 신 재료를 사용하여 건축된 목조건축물로 박공지붕의 단순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구 영주역 5 관사>
영주역 철도 관사로 지어진 건물로 일제강점기 철도 관사의 모습을 보여주는 건축물이다.
5호 관사와 7호 관사는 1935년 중앙선 철도 개설공사에 공병대 기술자들 숙소로 사용하기 위해 지어졌다.
<구 영주역 7호 관사>
우국충정 오십오현 비각
부용계 기적비
공주이씨 대종회에서 세운 비
경림정
부용대 (芙容臺, 경북 영주시 영주동 150-11)
고청산 남쪽 절벽을 부용대라 한다. 옛날 서천의 물길이 이 절벽 아래를 휘감아 구성공원 쪽으로 흘렸다.
조선 명종 때 풍기군수로 있던 이황이 이곳을 지나다가 주변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 부용대라고 지었다.
옛 선비들은 화용월태(花容月態)인 부용을 선비들의 표상이라 생각하며 정원에 심어 완상했다.
그리고 무궁화가 대한민국의 꽃이라고 말살정챇을 폈던 일제강점기 때에 독립운동가들은 무궁화와 닮은 이 꽃으로 애국심을 달랬다고 한다.
부용대(芙容臺) 소공원
부용대 붕래정
부용공원의 정자 붕래정(朋來亭)에도 김대현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붕래정은 옛 선비들이 학업을 닦고, 봄가을에 주민들이 계를 했다는 부용대 자리에 세운 정자인데
김대현이 퇴계로부터 이름을 받아다가 직접 정자에 건 것이라고 전한다.
부용대 정상의 기차 조형물과 일몰
관사골 벽화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