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變化)는 자재(自在)함이라. / 회일 스님
제행(諸行)은 무상(無常)이라, 모든 것이 무상하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무상하다는 것은 그래서 허무하다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모든 것이 실체가 없고 항상 변하는 것이니
너 자신 또한 어디에 묶여있지 말고 무너뜨리고 변화하라는 말입니다.
변화가 뭐예요? 창조죠. 변화함으로써 창조가 가능합니다.
여름이 감으로써 가을이 창조되는 것이고.
가을이 감으로써 겨울이 창조되는 것이고.
겨울이 감으로써 봄이 창조되는 거예요.
늙음으로써 새로운 생명이라는 것이 존재가 가능하지.
늙지 않고 그대로 머물러 있다면 새로운 존재가 가능하지 못해.
그래서 변화는 창조라는 거야.
깨달음의 눈으로 보면 일체 모두가 다 완전함을 가지고 있다,
일체 모두 장엄함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이 세계가 바로 불국토(佛國土)라고 애기해요.
우리가 보기엔 중생의 세계로 보이는데
부처님의 깨달음으로 보면 불국토다. 그대로 완전한 세계다.
생각을 해보세요. 불완전한 것은 우리 마음뿐이지
사실 다 완전하게 되어있어.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쫄딱 망했다.
망하는 것이 불완전하기 때문인 것 같지만
망하는 것이 사실은 완전한 것이여. 왜 그렇겠어요?
돈은 돌고 돌아야 하는 것이니까. 망하는 놈이 있어야 흥하는 놈이 있지.
죽는 놈이 있어야 사는 놈이 있지. 그죠?
만나니깐 헤어지지 태어났으니깐 죽는 거지. 그러잖아요.
이 모든 것이 서로 아귀가 맞아 돌아가는 것이다.
우리 입장, 각자 입장에서 보면
망하는 것이 굉장히 불행스럽게 생각됩니다마는
전체적인 시각에서 보면 부증불감(不增不減)이다.
부증불감, 늘어남도 없고 줄어듦도 없다는 거야. 그래 완전함이라는 것이죠.
불완전한 것은 단지 ‘나’ 자신이야, 나. 내 돈이 없어졌다.
근데 사실은 돌이켜 보면 내 돈이라는 게 없어요. 내 돈이 어디 있어요.
한국은행에서 나올 때 내 돈이라고 찍혀 나옵니까.
뱃속에서 태어날 때 내 돈이라고 갖고 나와요.
죽는 놈이 돈 갖고 가는 놈 봤어요. 본래 내 돈이란 게 없는 거야.
그래서 망할 것도 흥할 것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 여여(如如)하고 적정(寂靜)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를 못해요.
진짜 쫄딱 망하는 것은 뭡니까?
우리 모두 다 결국에는 쫄딱 망하게 돼있어요.
모두 죽게 되어있다는 말이에요.
죽는 것처럼 쫄딱 망하는 게 어디 있어. 그지?
죽는 것처럼 쫄딱 망하는 것은 없어요.
사업하다 실패해서 망했다고 해도
자식새끼 남고, 서방 남고, 빚이라도 남어.
죽는 놈한테는 빚도 추궁 안 해. 빚도 추궁 않는다니까.
죽는 놈한테 빚 내놓으라고, 돈 내놓으라고 하는 것 봤어요?
경찰에 고발하는 것 봤어요?
그걸로 끝이여. 진짜 망한다는 것은 죽는 거여.
우리는 전부 망하게 되어 있어요.
근데 우리는 망할 줄 모르고 망하지 않을 것처럼 살아요.
망하지 않을 것처럼 그렇게 착각을 하고 살아.
진리에 부합하여 살아야 하는데,
적정하고 여여하게 살아야 하는데,
오면 오는가보다 가면 가는가보다 이래야 하는데,
오면 좋다고 막 그냥….
어떻게 해서 좀 공돈이 생겼다.
이번 추석에 갔더니 시어머니, 시아버지가 그냥 웬일로
꿈쳐 놨던 돈을 내놓으면서, 힘드니까 좀 써라 그러니깐,
이게 웬 꽁돈이여, 그냥 좋다고 입이 귀에 걸려가지고….
이렇게 좋다고 한다면, 조금 뭐해서 잃어버렸다,
빚이 떼였다, 곗돈이 떼였다, 그러면 그냥 죽네, 사네,
식음을 전폐하고 머리띠를 두르고 누워가지고,
아구~ 아구~ 하고, 내팔자야~ 내팔자야~ 그러죠.
근데 진짜 망하는 것은, 생각해보세요.
진짜 망하는 것은 내 육신, 내 것이라고 믿었던
이 육신마저도 놓고 가야하는 거야.
이걸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는 거야.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는 거야.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집착하는 거기서 괴로움이 잉태된다는 거야.
모든 게 변하기 때문에 사실은 괴로움, 고(苦)의 실체도 없는 거야.
예를 든다면 여러분들의 과거를 돌이켜 보세요.
과거에 정말로 사네 못사네 하는 그런 사건들을 많이 겪었을 거란 말이야.
인생 파노라마, 천일야화야.
자신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쓰라고 한다면
열두 질로 해도 다 표현을 못할 거야. 그지?
그런데 이렇게 많은 사건들을 겪은 뒤에 무엇이 약이였냐, 라고
돌이켜본다면 세월이 약이였어.
다시 세월이 약이었다는 것은 변화가 약이었다는 거야.
변화가. 변화가 약이었다는 것은 무상이 약이었다는 거야.
명심하여 들으세요. 무상이 약이었다는 거야. 무상이.
세월 앞에서, 시간의 흐름 속에서 모든 문제는
전부 마치 거품이 꺼지듯이 사라진다, 라는 거지요.
정말 죽네 사네 했던 그런 문제들도 세월 앞에서는
전부 사라지고 과거의 추억 속에 자리 잡고 있더라.
그러니깐 명약이 뭐냐면 변화야, 무상이야.
삶이 무엇이냐. 태어남과 죽음사이다.
그런데 실상 삶은 영원한 거예요. 삶은 영원한 거야.
다만 일어났다 사라지고 다시 일어났다 사라지는
변화의 과정만 있는 것이다.
죽고 사는 것도 변화의 한 과정일 뿐이다.
근데 우리 중생은 전부 집착해서 변하지 않기를 바라잖아요.
늙지 않기를 바라고, 죽지 않기를 바라고,
헤어지지 않기를 바라고, 만나지 않기를 바라고,
또 마음이 변하지 않기를 바라며 막 손가락을 걸고
우리 평생 변치말자고 약속을 했샀고….
여러분들은 인생 쓴맛 단맛 다 겪어서
이런 말 이제 다 받아들이지마는,
막 결혼하려는 청춘남녀들이 인사를 와서
이런 이야기하면은 못 받아들여. 안 받아들여. 와가지고
내가, 야야 그렇게 좋냐? 좋아요, 흐흐…
손을 꼭 잡고 쭈물딱 쭈물딱 거리면서 그냥 한시도 안 놔.
그렇게 좋냐? 좋아요. 근데 너 살면서
이 좋은 마음이라는 것이 꼭 변하게 되어있는 것이다.
그때를 잘 넘겨야 된다.
지금은 콩깍지가 쓰인 것이고.
지금은 약을 먹은 것이고. 맛이 간 것이다.
맛이 간 때는 지 정신이 아니기 때문에 다 좋게 보이는 것이다.
이 약기운이 떨어졌을 때 그때 좋아야 진짜 좋은 것이다.
근데 진짜 좋기가, 그렇게 약기운이 떨어졌을 때
좋게 보이는 경우가 별반 없다. 별반 없어.
그런데 그 애들은 절대 마음이 안변한다는 거야.
변화의 실체를 인정하는 놈은 잘 살수가 있어요.
근데 변화의 실체를 인정 못하는 놈은 깨지게 돼있어.
주례사에 그런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이 마음 변치 않고 살 것이며… 그러잖아요.
어떻게 안 변하냐고, 가능한 걸 얘기해야지.
부부는 일심동체? 어떻게 일심동체냐고. 가능한 걸 이야기를 해야지.
니 마음 다르고 내 마음 다르고 각자 업(業)이 다른데
어떻게 일심동체라고 애기해. 몸뚱아리도 둘인데….
같이 될 때도 있겠지, 하루 중에 갈이 될 때가 있것지.
그렇지만 어떻게 동체同體)냐고. 안되지, 그것이. 아닌 거예요.
인정해야 되요. 일심동체가 아니라 이심각체(二心各體)예요.
내가 주례설 때마다 하는 말이 부부는 이심각체니라,
꼭 인정해야 되느니라…. 다름을 인정해야 된다는 거여,
다름을. 다름이 같음을 낳는 거예요. 중요한 이야깁니다.
다름이 같음을 낳는 거예요.
다르니깐 서로 조화롭게 하나라는 같음 속에 살수가 있는 거야.
중생들은 변하지 않는 것을 바라는 데 그것은 그렇지 않다.
일체가 모두 변하는 것이니 변화에 순응하면서 살아라.
그 변화를 관하여라. 그러면 집착할 바가 없다.
일체 모든 것이 집착할 바가 없는 것이니
집착하지 않으면 괴로움이 거기서 나오지 않는 것이요.
재앙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집착하는 것 중에 ‘나’, ‘내 것’이라는 것이 가장 큰 집착을 낳으니
나, 내 것이란 것을 벗어나면, 나, 내 것이란 것을 벗어 던지고
오로지 부처님께 향하면 그 가운데 자유가 있고,
그 가운데 창조가 있고, 그 가운데 미래가 있다.
무엇에 집착한다는 것은 그것에 묶여있는 것이니
꼼짝달싹 못하고 그 다음으로 나가지 못한다.
확연히 나에 대한 집착을 끊고 오로지 부처님께 다가갔을 때,
그때에 좀 더 낳은 삶이, 미래가 보장될 수 있는 것이다, 라는 겁니다.
모든 무상게((無常偈)는 열반으로 가는 문이요.
고해(苦海)를 벗어나는 자비의 뱃길이다.
모든 부처님도 이 게로써 열반에 드시었고
일체 중생도 이 게로써 고해를 벗어났다.
영가(靈駕])야, 세월 흐르면 이 사바(娑婆)도 불타 무너져서
수미산(우주)도, 큰 바다도 닳아 없어지니
이 육신도 나고,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것이다.
뼈와 살은 흙으로
피와 침 따위는 물로
따뜻한 기운은 불로
움직이는 기운은 바람으로
사대(四大)는 허망한 모음이니 무엇에 집착하리요
집착할 바 없으니 걸림이 없고 고(苦)가 없고
‘나’라 할 바 없으니 갇히지 않고
무한히 부처로 자재(自在)할 것이다.
성불하십시오.
출처 : 참 좋은 우리 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