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만난 글과 인연. 185
[평화 포럼 1]
6월 2일 아침, 나는 장00님의 초대로 화천에서 열린 평화포럼에 참가하게 되어 길을 나섰다.
장00님은 조선동포이며 연변에서 신문기자 생활을 30여년 하면서 그 신문사의 최고 경영자
의 위치에 올랐고, 현재는 논설위원으로 있으면서 남북 화해와 평화를 위한 활동으로 평화
포럼을 주관하고 있다. 이 분은 6월 10-12일 제주 여행에 함께 하게 될, 4명의 의형제 중 한
명으로 제주 여행기를 쓸 때에 다시 소개해 드리려고 한다.
그의 초청에 나는 단순하게 1박 2일 여행을 한다는 생각으로 응했고, 가벼운 마음으로 출발
했는데, 그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집결지인 안양에서 만난 분들과 인사를 나누면서 느낀 것
은 이 활동은 여행이 아니라 분명한 목적을 갖고 있는 단체의 중요한 행사라는 것이었다.
그 느낌은 내 마음을 무겁게 해 준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는 일.
전혀 다른 세상, 다른 세계, 아니 동질감을 느낄 수 없는 사람들과의 동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특히 중국 동포의 연변 어투로 대화를 나누는 것을 들으면서 그 말의 뜻과 의미를 이해하기 위
한 나름의 수고를 할 수 밖에 없는 동행이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탄 차의 일행 5명 중 3명이 동
포였고 다른 한 명은 운전을 하느라 대화에 끼어들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화천까지의
대화는 세 사람 중심일 수밖에 없는 것.
춘천 역에서 먼저 간 일행과 합류하고 그곳에서 또 다른 참가자를 태운 후 화천의 파라호 안보
전시관으로 같다. *파라호 : 1951년 5월 26일-28일까지 진행된 이 전투에서 중공군은 최소한 2
만5천명 이상의 사상자를 낳았다. 이 전투 이후 화천 저수지가 파로호로 불리게 되었는데,
이것은 이승만 대통령이 ‘오랑캐를 대파한 호수’라는 뜻으로 화천 저수지를 ‘파로호’라 이름
붙인 것에서 유래하였다(한국민족문화 대백과 사전)
안보 전시관에서 연천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보았던 여러 종류의 무기를 보았고, 특히 전단
지(항복, 자수, 귀순을 유도하는)를 보면서 몇 장 주워서 군부대나 파출소에 가지고 가서 연필
같은 선물을 받았던 기억도 난다. 잠시 안보관을 둘러본 일행은 안보관 뒤로 나 있는 가파른(적
어도 45도 이상의 급경사로 400미터 정도)의 언덕길을 올랐다. 저수지와 평화의 댐이 보이는
전망대가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의 행사를 보게 된다. 이름하여 “‘한국/조선 전쟁 휴전 70주년’ 합동 위령제.
화천 평화 포럼” 이라는 명칭의 행사였다. 올라가니 이미 제를 지낼 준비가 거의 끝나가고 있었고,
원주에서 온 풍물패(나는 그들의 정식 명칭은 모른다)와 홍천에서 온 작가(그는 철로 작품을 만드
는 작가인데 평화의 탑을 세우기 위해 참여한 작가이다) 그리고 미국 시민권자인 최00님(그는 북
한을 여러 번 다녀왔고, 북의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과 교류를 하고 있는데 그를 통해 북의 여러
정보를 듣고 보게 된다), 그리고 기독교, 불교 등 종교 지도자들 등 이 행사에 참여하고 있었다.
위령제를 지내고,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북과 꽹과리 장구의 연주에 맞춰 소리꾼이 소리를 하고 춤
꾼(여성)이 춤을 춘다. 소리에 마음이 무거워지고 춤사위에 자세를 바르게 한다. 주관자가 말하기를
이 위령제는 국군과 북한군과 중국군과 유엔군 모두의 영혼을 위하는 제라고 한다. 어느 나라 소속
인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젊은이들의 생떼 같은 목숨이 이곳에서 버림을 받았으니 그 모
든 영혼을 위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행사는 매년 휴전 일을 기준으로 시행하고 있다고 한
다. 이제 행사를 마치고 내려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