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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쉼터 스크랩 과식, 쌀밥과 쇠고기 / 송 기 호 (Ki-Ho Song)
ysoo 추천 0 조회 63 18.11.26 11:1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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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식, 쌀밥과 쇠고기
Overeating, Rice and Beef


송 기 호 (Ki-Ho Song)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 약 력 |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졸업
서울대학교 문학 박사
한림대학교 사학과 교수 역임



중국을 여행한 사람이면 각종 요리가 엄청나게 나오는 것을 보고 놀란 일이 있을 것이다. 식탁에 모두 얹지도 못해서 2층, 3층으로 쌓기도 한다. 종전에는 잔뜩 배불리 먹고 남는 것을 그냥 버리고 나왔는데, 이제는 남은 음식을 집에 싸가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반면에 보통 때는 아주 적게 먹기도 한다. 2007년 노동절에 중국의 원자바오 총리가 노동자들과 함께 한 점심은 쌀죽 한 공기와 만두 두 개였다고 한다(사진 1 참조).

우리도 진수성찬을 차릴 때가 있는가 하면 아주 소식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다이어트한다면 몰라도 평상시에 이처럼 적게 먹지는 않는다.


사진 1. 중국 총리의 점심식사


그런데 옛날 기록에는 우리가 대식가였다고 한다.


" 조선사람들의 또 하나의 큰 결점은 폭식(暴食)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 양반과 상민 사이에 조그마한 차이도 없다. 많이 먹는 것은 영예스러운 일이고, 식사의 큰 공은 회식자에게 내는 요리의 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양에 있다. 그러므로 식사 중에는 거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말 한 마디 하면 그 때마다 한 두 술씩 잃어 버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밥통에 할 수 있는 한의 모든 탄력성을 주는데 전심한다. 흔히 어머니들이 무릎 위에 어린아이를 올려 놓고 밥이나 그 밖의 음식을 마구 먹이고, 배가 넉넉히 팽팽한가 보기 위하여 때때로 숟가락 자루로 배를 두드려 보고, 그 이상 부풀게 하는 것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게 되어야만 먹이는 것을 그친다(샤를르 달레, 『한국 천주교회사』상, 분도출판사, 234쪽)."


중국 사람은 혀로 먹고, 일본 사람은 눈으로 먹고, 한국 사람은 배로 먹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한국인은 자타가 공인하는 대식가였다(정연식, 『일상으로 본 조선시대 이야기』1, 84쪽). 우리는 배가 불러야만 다 먹은 것이다.


조선후기 이덕무(1741~1793)의 기록에는 남자 한끼의 식사량이 쌀 7홉이고, 일생동안 평균은 5홉이라고 하였다.


"한 사람이 아침과 저녁에 각각 5홉씩을 먹는다면 합해서 1되가 된다. 1개월이 30일이니 3말이 되고, 1년 12개월이면 36말이 되는데 석(石: 15말)으로 계산하면 2섬 6말이 된다. … 우리나라 남자가 먹는 것은 7홉을 기준으로 한다. 그러나 어렸을 때와 아주 늙었을 때에는 7홉을 다 먹지 못한다. 그러므로 지금 평균해서 한 끼에 5홉을 기준으로 삼는다( 『청장관전서』앙엽기 5)."


7홉은 약 420cc로 지금 먹는 양의 세 배 정도가 된다고 하니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샤를르 달레는 “노동자 한 사람의 보통 식사 분량은 쌀 약 1리터인데, 그것을 익히면 한 사발이 잔뜩 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그러나 그것이 그들을 배부르게 하기에는 넉넉지 못하고, 그들 중의 많은 사람이 그렇게 할 수 있는 때에는 쉽사리 서너 사람 몫을 먹는다. 어떤 사람들은 아홉이나 열 사람 몫까지 먹어도 아무탈이 없다고 한다.”고도 하였다. 옛날 밥 그릇은 무척 큰 데다가 일꾼들은 여기에 고봉으로 수북하게 퍼담았던 기억이 있는데, 심지어 그것을 몇 그릇씩 먹었다고 한다.


조선 후기 이익(1681~1763)은 과식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이 먹기에 힘쓰는 것은 천하에서 으뜸이다. 근래에 표류하여 유구국(琉球國, 오키나와)에 간 사람이 있었는데, 그곳 백성들이 웃으면서 “너희 풍속은 항상 큰 사발과 쇠숟갈로 밥을 떠서 잔뜩 먹으니 어찌 가난하지 않겠는가?”고 말하였다. 대개 전에 우리나라에 표류해온 적이 있어 우리 풍속을 이미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성호사설』 인사문, 식소(食少))."


조선 선조 때에 조헌이 왕에게 상소한 글에서도 중국보다 음식을 풍성하게 장만한다는 지적이 있다.


"넷째, 음식과 연회에 관한 일입니다. 신이 저으기 보건대 중원 사람은 절약하지 않는 경우가 없었습니다. 집에서 마련하는 관리의 음식은 그릇 몇 개에 불과하였고, 개인집의 음식은 더욱 검소하였습니다.
… 그런데 우리나라 풍속은 오로지 풍성한 음식과 과도한 음주에 힘써서, 재물이 바닥나도 걱정할 줄 모르고 백성이 곤궁해도 구제할 줄 모릅니다. 또 위에서 명령해도 따를 줄 모른 채 자연물산을 쓸데없이 소모하고 나라의 근본인 백성을 해치는 일이 끝이 없습니다(선조수정실록 7년<1574> 11월 1일)."


현실 비판을 위해 언급한 것이어서 과장이 있겠지만, 중국과 다른 우리나라의 과식과 과음을 상상할 수 있다. 일본에서 돌아온 사신이 왕에게 보고한 대화를 통해서도 우리가 일본보다 많이 먹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임금이 이르기를 “사람은 많고 땅이 좁으면 백성 가운데 반드시 빌어 먹는 자가 많을 것이다.”고 하니, 윤순지가 아뢰기를, “연로에서 보니 쌀로 밥을 짓는 자가 없고, 가마를 메는 왜인까지도 하루종일먹는 것이라곤 삶은 토란 서너 개뿐이었습니다.”고 하였다(인조실록 21년<1643> 11월 21일)."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신라의 태종무열왕이 자타가 공인하는 대식가였다.


" 왕은 하루에 쌀 3말과 꿩 9마리를 들었는데, 경신년(660)에 백제를 멸망시킨 후로 점심은 그만두고 조석만 들었다. 그러나 하루를 계산해보면 쌀 6말, 술 6말, 꿩 10마리였다( 『삼국유사』태종춘추공)."


서양 역사를 보면, 그리스와 로마 문화에서는 절제가 최상의 미덕이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게르만 문화와 켈트 문화에서는‘대식가’를 긍정적으로 보았으며, 엄청난 폭식과 폭음의 태도야말로 동료들에 비해 ‘동물적인’ 우월성을 부여하는 것으로 여겨졌다고 한다(맛시모몬타나리지음, 주경철옮김,『 유럽의 음식문화』45~47쪽). 무열왕의 이미지도 그런 관념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샤를르 달레가 우리나라에서 목격한 과식과 과음 현상은 산물이 풍부했기 때문이 결코 아니었다. 정반대로 언제 굶어죽을지 모르는 절박한 상황이 많아서 기회가 되면 잔뜩 먹어두었다. 기아에 굶주리는 것은 중국이나 우리나 별반 차이가 없을 터인데, 음식 문화의 모습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어 흥미롭다.중국에서는 음식이 다양하게 개발되었던 데에 비해서 우리는 밥 위주로 전개되었던 것이다.


"중국 요리의 종류가 많고 훌륭한 이유는 다른 것에도 있다. 영양부족, 한발, 기근을 자주 만나는 오랜 전통의 향촌농민의 식사가 그 기반으로 되었기 때문에 여러가지 야채나 먹을 수 있는 곤충 또는 내장에 이르기까지 먹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나 교묘하게 머리를 짜내 식사에 이용하였다.

… 또 식사에 대한 종교적 금기사항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자크 제르네, 『전통중국인의 일상생활』신서원, 140쪽)."


이러한 중국과 다르게 우리는 유독 밥에 집착하였다. 조선시대 그림을 보면 커다란 밥그릇에 반찬은 불과 1, 2개에 불과하였던 것을 볼 수 있다(그림 1 참조). 유구국 사람이 지적한 큰 사발은 아마 이런 것일 듯하다.


그림 1. 커다란 밥 그릇이 특징인 서민 식사.  김홍도, 《단원풍속화첩》 중 새참


우리 식사는 밥, 국, 김치로 이루어진 3첩 반상이 가장 기본적이었다. 우리 식단에서 밥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중국인은 요리를 먹고 나중에 요깃 거리로 밥을 약간 먹는 데에 비해서, 우리는 밥을 먹기 위해서 반찬이 있는 셈이다. 반찬은 그야말로 부차적이며, 그나마 아주 짜서 그 자체를 먹기 위한 것이기 보다는 밥의 간을 맞추기 위한 것이었다.


시장기는 밥으로 때우는 것이다. 밥도 보리밥이나 잡곡밥이 아니라 쌀밥이면 금상첨화가 된다. 이것저것 배불리 먹어도 곡기가 들어가야 먹은 것 같다는 사람들이 많다. 이처럼 우리가 주식에 집착하다보니 다양한 요리 개발이 되지 않았다.


조선시대에는 밀가루마저 귀해서 쉽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었다. 그 역할을 하였던 것이 메밀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우리나라는 음식 재료마저 다양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미 언급하였듯이 ‘쌀밥과 생선국’ 또는 ‘쌀밥과 고깃국’이 한국 음식을 대표하게 되었다.


쌀밥과 함께 유난히 집착한 것이 쇠고기이다. 한국인의 외곬 성향을 여기서도 읽을 수 있다. 미국과 FTA 협상을 벌일 때에도 쌀 시장 개방과 함께 크게 논란이 되었던 것이 쇠고기 수입이었다. 미국에 가면 쇠고기와 돼지고기 가격이 비슷하다. 최근 뉴스를 보니 쇠고기값이 한국의 1/5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러니 한국에서는 비싸서 사먹지 못하던 쇠고기만 사먹게 되고, 돼지고기는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그런데 이런 습관은 조선 초기에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명 황제가 내시 구아(狗兒)를 불러 말하기를, “조선인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으니, 광록시로 하여금 쇠고기와 양고기를 공급하도록 하라.”고 하였다(태종실록 17년<1417> 윤5월 8일)."


"도승지 조서강이 왕을 모시고 온 대신들과 함께 의논하여 아뢰기를, “우리나라 사람은 돼지고기를 즐기지 않습니다. 보통 사람도 그러한데 어찌 궁궐안에서 쓸 수가 있겠습니까. …”고 하였다(세종실록 25년<1443> 3월 4일)."


우리나라 사람이 돼지고기를 즐기지 않는 사실은 명나라 황제도 알고 있을 정도였다. 중국을 여행해 보면 쇠고기보다는 돼지고기가 주된 음식 재료인 것을 알 수 있다. 중국 송나라 때에 항주 시내에서 대량으로 소비된 2대 식품은 쌀과 돼지고기였고, 그 다음으로 소금에 절인 물고기였다고 한다.

몇 년 전에 중국학자를 안내하면서 서울에서 설렁탕으로 유명한 집으로 안내했다가 낭패를 본 일이 있었다. 알고보니 쇠고기를 전혀 들지 않았다. 이처럼 쇠고기를 먹지않는 중국인이 있으니 식성을 미리 알아야 한다는 말
을 나중에야 들었다.


집을 의미하는“가(家)”자를 잘 보면 지붕[宀] 아래에 돼지[豕]가 들어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집과 돼지가 밀접하였음을 의미한다. 돼지는 비계가 두터워 뱀이 물어뜯어도 죽지 않고, 오히려 돼지가 뱀을 잡아먹는다고 한다. 그래서 돼지를 집 둘레에 키우면서 그 가운데에서 잠을 자는 주거 형태를 이루었다. 이처럼 돼지는 정착 농경민에게 친숙한 동물이었다.


2000년 가을에 고구려 수도인 중국 환인(桓仁)을 방문했을 때에 담장 한 가운데에 건물을 세우고 마당은 돼지우리로 삼은 집을 목격하였다. 건물은 마당에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도록 되어 있었다. 돼지우리 안에 건물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고대 집의 모습이었기에 사진을 찍으려 했으나 다른 일행의 독촉으로 이루지 못한 것을 지금도 아쉽게 생각하고 있다.


역사 기록을 보면 유목민은 양과 말, 농경민은 소와 말이 주된 재산이었다. 통일신라시대에 작성된 촌락문서를 보면 집집마다 숫자를 파악했던 가축은 소와 말이었다. 고구려 벽화에도 마굿간과 외양간이 그려져 있는데, 말은 주로 타는 데에 이용했고 소는 수레를 끄는 데에 이용하였다. 말은 이동수단이요 군사력이 되었기에 유목민과 농경민 모두에게 중요하였다. 따라서 유목민의 특색은 양에서 찾을 수 있고, 농경민의 특색은 소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에 돼지가 농경민의 중요한 특징으로 추가할 수 있다.


농경민도 양을 키우고 고기를 먹고 유목민도 소를 키웠던 데에 비해서, 돼지는 유목민과 상극이었다.
수백만의 유태인과 수억의 회교도들은 지금도 돼지를 불결한 동물로 여긴다. 성경이나 코란에 공통적으로 돼지를 금기식품으로 삼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예수가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나오게 한 귀신이 들어간 곳도 돼지떼이다. 이집트에서도 돼지는 부정한 짐승으로 생각한다. 반면에 뉴기니아와 남태평양 멜라네시아 군도는 돼지를 숭배하는 대표적인 곳이다. 이것은 유목지역과 농경지역의 차이를 보여준다.
중국을 여행하면서 쇠고기 만두를 먹을 수 있는 음식점은 회족(回族) 반점이라고 한다. 회족은 아라비아계통이므로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


이렇게 문화적 차이가 나타나게 된 원인은 인류학 연구가 잘 설명해준다.


"돼지는 원래 숲지대와 그늘진 강둑에서 사는 동물이다. … 특히 곡식을 주로 먹기 때문에 인간과 직접 경쟁하는 경쟁자일 수밖에 없다. … 더 큰 약점은 실용될 수 있는 젖이 없고 원거리를 몰고 다니기가 무척 어렵다는 점이다. … 덥고 건조한 기후에는 신체구조적으로 잘 견뎌내지 못한다. … 보호막 역할을 하는 털도 없고, 땀을 흘려 체온조절도 할 수 없는 까닭에, 돼지는 외부의 습기를 이용하여 피부를 습하게 하여야 한다.

그래서 돼지는 깨끗한 진흙속에 뒹굴어 체온을 조절한다. 그러나 깨끗한 진흙이 없을 경우 자기의 배설물로라도 피부를 습하게 하려 한다. 섭씨 29도 이하일 경우, 돼지는 우리 안의 잠자리와 식사자리에는 배설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온이 섭씨 29도를 넘어가면 어디나 가리지 않고 배설을 한다(마빈 해리스 지음, 박종렬 옮김, 문화의 수수께끼』한길사, 1997, 49~50쪽)."


털이 성긴 돼지가죽은 태양광선을 거의 막아주지 못한다. 그래서 돼지에게는 인공적인 그늘을 만들어 주어야 하고, 뒹굴 수 있도록 따로 물을 준비해주어야 한다. 또 인간 자신이 먹을 수 있는 곡식이나 다른 식물성 식품을 먹여야만 한다. 돼지는 쟁기를 끌지도 못하고, 그 털로 옷감을 만들기에도 적당하지 않고, 젖을 짜서 쓸 수도 없다. 그러니 살아 있을 때에는 경제적 쓸모가 없다. 기생충 때문에 고기를 날로 먹을 수 없고, 쉽게 상해서 보존성도 떨어진다. 또 무리를 이루어 데리고 다니기도 어렵고, 다리가 짧아서 원거리 이동도 하기 힘들다. 그러니 한 가지로 다양한 것을 얻어야 하는 유목민의 습성에는 맞지 않는다.


유목민에게는 풀을 뜯어먹고 살아 있을 때에나 죽었을 때에 각종 재료를 제공해주는 소, 양, 염소와 같은 되새김동물이 적격이다. 성경에도 발굽이 갈라지고 되새김질 하는 짐승을 먹으라고 하면서, 돼지는 굽이 갈라져 있으나 되새김질을 하지 못하기에 먹지 말라고 하였다.


따라서 유적지에서 돼지 사육과 관련된 증거가 발굴되면, 그 주인공들은 농경정착민이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우리 역사서에도 초기부터 돼지가 많이 등장한다. 먼저 고구려 주몽전설에 돼지가 나온다. 어머니 유화가 알을 낳아 개와 돼지에게 주니 먹지 않았고 길에 버리니 소와 말이 피해갔다고 하였다. 부여국에서는 가축 이름으로 관직명을 삼아서 마가(馬加), 우가(牛加), 저가( 加), 구가(狗加) 등이 있었다.
이 두 자료를 보아도 말과 소, 돼지와 개를 주로 사육하였음을 알 수 있다. 우리 고유의 놀이인 윷놀이에서 사용되는 도·개·걸·윳·모란 말도 본래 가축이름을 딴 것으로서, 도는 돼지, 개는 개, 걸은 양, 윷은 소, 모는 말을 가리킨다고 한다. 삼한의 하나인 마한 사람들도 소와 돼지를 잘 기른다고 하였다. 지금도 고사를 지낼 때에 돼지머리를 사용하고, 돼지꿈은 복의 상징으로 간주되는 것은 아마 이런 전통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 역사시대 유적에서 발굴된 동물뼈를 분석한 결과를 보면, 통일신라시대까지 집에서 기르는 동물은 소와 말이었고, 사슴과 멧돼지를 사냥해서 식량원을 보충하였다고 한다. 고대에 집돼지 뼈가 발견된 사례는 아주 적다. 이렇게 되면 돼지는 훨씬 나중에 기르기 시작한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문헌과 고고의 증거가 상충되지만, 우선은 문헌기록을 따라야 할 것 같다. 고고 자료가 아직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돼지의 고기 생산성은 다음 언급처럼 소보다 훨씬 높다.


"돼지는 모든 포유류 가축 중에서 가장 신속하고도 효과적으로 식물을 고기로 전환시키는 능력을 갖고 있다. 한 마리의 돼지는 일생 동안 그 먹이 속의 에너지 가운데 35퍼센트를 고기로 전환시킬 수 있다.
이에 비해 양은 13퍼센트, 소는 겨우 6.5퍼센트이다. 새끼돼지가 살이 1파운드 찌는 데 먹이가 3파운드 내지 5파운드 드는 데 비해, 송아지는 1파운드가 늘려면 먹이를 10파운드나 먹어야 한다.
소는 한 마리의 송아지를 낳는 데 아홉 달이 걸리고 현대의 조건 아래서도 생후 4개월이 지나야 400파운드가 나간다. 그러나 암퇘지는 4개월도 채 안되는 수태기간이 지나면 여덟 마리 이상의 새끼를 낳고 이 돼지새끼는 6개월이 지나면 400파운드가 나간다(마빈 해리스 지음, 서진영 옮김, 『음식문화의 수수께끼』한길사, 1992, 77쪽)."


자연히 소가 돼지보다 귀할 수 밖에 없다. 동네 잔치에서 보통은 돼지를 잡았고 아주 특별한 경우에는 소를 잡았다. 이처럼 다산성과 생산성의 상징이요 농경민족의 지표인 돼지가 서유기에 나오는 저팔계처럼 중국에서는 우대를 받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선호하지 않았던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추측건대 중국에서는 경제성이 높은 돼지를 좋아한 데에 비해서, 우리는 먹기 어려운 식료품에 더욱 더 집착한 결과가 아닌가 생각된다. 과거에 금서로 지목되면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것과 비슷하다. 다양한 부식을 개발하기보다 쌀밥에 집착했던 것과 같은 원리이기도 하다.


신라 지증왕 때에 처음으로 소를 사용하여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이리하여 소는 농경의 주요 수단이 되었다. 수레를 끄는 일뿐 아니라 밭 갈고 논 가는 일에도 동원되었다. 이에 따라 소는 살아 있을 때에도 귀하신 몸이었다. 죽어야만 쓸모가 있는 돼지와는 달랐다. 그래서 소는 함부로 도살하지 못하게 했었다. 더구나 고려는 불교 국가였으니 살생을 금지하였다. 농경을 중시했던 조선에서도 소 도살은 금기사항이었다.


"첨지중추부사 정술조가 상소하기를, “… 소·술·소나무 세 가지에 대한 금지법은 국가에 항상 있는 법입니다. …”고 하였다(정조실록 6년<1782>6월 2일)."


이렇게 되니 아주 특별한 기회가 아니면 쇠고기를 먹기 어려웠다. 그러면 그럴수록 쇠고기에 대한 열망은 더욱 커졌던 것이 아닌가 한다. 지금 불고기가 한국 고유의 음식문화가 된 것도 이러한 쇠고기 편애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일본에는 전통적으로 쇠고기를 구워먹지 않았는데, 우리 식생활의 영향을 받아서 지금 야키니쿠(燒肉)가 유행한다.


근래까지도 손님 접대에는 수북히 담은 흰 쌀밥에 쇠고깃국을 내오면 그만이었다. 이처럼 우리 민족은 쌀밥과 쇠고기에 강한 애착을 보여왔던 게 사실이다.
우리 음식문화의 한 특징을 여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기획 : 남경필 편집간사




대한토목학회

THE MAGAZINE OF THE KOREAN SOCIETY OF CIVIL ENGINE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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