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식, 쌀밥과 쇠고기 송 기 호 (Ki-Ho Song) | 약 력 | 중국을 여행한 사람이면 각종 요리가 엄청나게 나오는 것을 보고 놀란 일이 있을 것이다. 식탁에 모두 얹지도 못해서 2층, 3층으로 쌓기도 한다. 종전에는 잔뜩 배불리 먹고 남는 것을 그냥 버리고 나왔는데, 이제는 남은 음식을 집에 싸가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우리도 진수성찬을 차릴 때가 있는가 하면 아주 소식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다이어트한다면 몰라도 평상시에 이처럼 적게 먹지는 않는다. 사진 1. 중국 총리의 점심식사 그런데 옛날 기록에는 우리가 대식가였다고 한다. " 조선사람들의 또 하나의 큰 결점은 폭식(暴食)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 양반과 상민 사이에 조그마한 차이도 없다. 많이 먹는 것은 영예스러운 일이고, 식사의 큰 공은 회식자에게 내는 요리의 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양에 있다. 그러므로 식사 중에는 거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말 한 마디 하면 그 때마다 한 두 술씩 잃어 버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밥통에 할 수 있는 한의 모든 탄력성을 주는데 전심한다. 흔히 어머니들이 무릎 위에 어린아이를 올려 놓고 밥이나 그 밖의 음식을 마구 먹이고, 배가 넉넉히 팽팽한가 보기 위하여 때때로 숟가락 자루로 배를 두드려 보고, 그 이상 부풀게 하는 것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게 되어야만 먹이는 것을 그친다(샤를르 달레, 『한국 천주교회사』상, 분도출판사, 234쪽)." 중국 사람은 혀로 먹고, 일본 사람은 눈으로 먹고, 한국 사람은 배로 먹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한국인은 자타가 공인하는 대식가였다(정연식, 『일상으로 본 조선시대 이야기』1, 84쪽). 우리는 배가 불러야만 다 먹은 것이다.
"한 사람이 아침과 저녁에 각각 5홉씩을 먹는다면 합해서 1되가 된다. 1개월이 30일이니 3말이 되고, 1년 12개월이면 36말이 되는데 석(石: 15말)으로 계산하면 2섬 6말이 된다. … 우리나라 남자가 먹는 것은 7홉을 기준으로 한다. 그러나 어렸을 때와 아주 늙었을 때에는 7홉을 다 먹지 못한다. 그러므로 지금 평균해서 한 끼에 5홉을 기준으로 삼는다( 『청장관전서』앙엽기 5)." 7홉은 약 420cc로 지금 먹는 양의 세 배 정도가 된다고 하니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샤를르 달레는 “노동자 한 사람의 보통 식사 분량은 쌀 약 1리터인데, 그것을 익히면 한 사발이 잔뜩 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그러나 그것이 그들을 배부르게 하기에는 넉넉지 못하고, 그들 중의 많은 사람이 그렇게 할 수 있는 때에는 쉽사리 서너 사람 몫을 먹는다. 어떤 사람들은 아홉이나 열 사람 몫까지 먹어도 아무탈이 없다고 한다.”고도 하였다. 옛날 밥 그릇은 무척 큰 데다가 일꾼들은 여기에 고봉으로 수북하게 퍼담았던 기억이 있는데, 심지어 그것을 몇 그릇씩 먹었다고 한다.
"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이 먹기에 힘쓰는 것은 천하에서 으뜸이다. 근래에 표류하여 유구국(琉球國, 오키나와)에 간 사람이 있었는데, 그곳 백성들이 웃으면서 “너희 풍속은 항상 큰 사발과 쇠숟갈로 밥을 떠서 잔뜩 먹으니 어찌 가난하지 않겠는가?”고 말하였다. 대개 전에 우리나라에 표류해온 적이 있어 우리 풍속을 이미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성호사설』 인사문, 식소(食少))." 조선 선조 때에 조헌이 왕에게 상소한 글에서도 중국보다 음식을 풍성하게 장만한다는 지적이 있다. "넷째, 음식과 연회에 관한 일입니다. 신이 저으기 보건대 중원 사람은 절약하지 않는 경우가 없었습니다. 집에서 마련하는 관리의 음식은 그릇 몇 개에 불과하였고, 개인집의 음식은 더욱 검소하였습니다. 현실 비판을 위해 언급한 것이어서 과장이 있겠지만, 중국과 다른 우리나라의 과식과 과음을 상상할 수 있다. 일본에서 돌아온 사신이 왕에게 보고한 대화를 통해서도 우리가 일본보다 많이 먹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임금이 이르기를 “사람은 많고 땅이 좁으면 백성 가운데 반드시 빌어 먹는 자가 많을 것이다.”고 하니, 윤순지가 아뢰기를, “연로에서 보니 쌀로 밥을 짓는 자가 없고, 가마를 메는 왜인까지도 하루종일먹는 것이라곤 삶은 토란 서너 개뿐이었습니다.”고 하였다(인조실록 21년<1643> 11월 21일)."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신라의 태종무열왕이 자타가 공인하는 대식가였다. " 왕은 하루에 쌀 3말과 꿩 9마리를 들었는데, 경신년(660)에 백제를 멸망시킨 후로 점심은 그만두고 조석만 들었다. 그러나 하루를 계산해보면 쌀 6말, 술 6말, 꿩 10마리였다( 『삼국유사』태종춘추공)." 서양 역사를 보면, 그리스와 로마 문화에서는 절제가 최상의 미덕이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게르만 문화와 켈트 문화에서는‘대식가’를 긍정적으로 보았으며, 엄청난 폭식과 폭음의 태도야말로 동료들에 비해 ‘동물적인’ 우월성을 부여하는 것으로 여겨졌다고 한다(맛시모몬타나리지음, 주경철옮김,『 유럽의 음식문화』45~47쪽). 무열왕의 이미지도 그런 관념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중국 요리의 종류가 많고 훌륭한 이유는 다른 것에도 있다. 영양부족, 한발, 기근을 자주 만나는 오랜 전통의 향촌농민의 식사가 그 기반으로 되었기 때문에 여러가지 야채나 먹을 수 있는 곤충 또는 내장에 이르기까지 먹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나 교묘하게 머리를 짜내 식사에 이용하였다. … 또 식사에 대한 종교적 금기사항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자크 제르네, 『전통중국인의 일상생활』신서원, 140쪽)." 이러한 중국과 다르게 우리는 유독 밥에 집착하였다. 조선시대 그림을 보면 커다란 밥그릇에 반찬은 불과 1, 2개에 불과하였던 것을 볼 수 있다(그림 1 참조). 유구국 사람이 지적한 큰 사발은 아마 이런 것일 듯하다. 그림 1. 커다란 밥 그릇이 특징인 서민 식사. 김홍도, 《단원풍속화첩》 중 새참 우리 식사는 밥, 국, 김치로 이루어진 3첩 반상이 가장 기본적이었다. 우리 식단에서 밥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중국인은 요리를 먹고 나중에 요깃 거리로 밥을 약간 먹는 데에 비해서, 우리는 밥을 먹기 위해서 반찬이 있는 셈이다. 반찬은 그야말로 부차적이며, 그나마 아주 짜서 그 자체를 먹기 위한 것이기 보다는 밥의 간을 맞추기 위한 것이었다.
"명 황제가 내시 구아(狗兒)를 불러 말하기를, “조선인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으니, 광록시로 하여금 쇠고기와 양고기를 공급하도록 하라.”고 하였다(태종실록 17년<1417> 윤5월 8일)." "도승지 조서강이 왕을 모시고 온 대신들과 함께 의논하여 아뢰기를, “우리나라 사람은 돼지고기를 즐기지 않습니다. 보통 사람도 그러한데 어찌 궁궐안에서 쓸 수가 있겠습니까. …”고 하였다(세종실록 25년<1443> 3월 4일)." 우리나라 사람이 돼지고기를 즐기지 않는 사실은 명나라 황제도 알고 있을 정도였다. 중국을 여행해 보면 쇠고기보다는 돼지고기가 주된 음식 재료인 것을 알 수 있다. 중국 송나라 때에 항주 시내에서 대량으로 소비된 2대 식품은 쌀과 돼지고기였고, 그 다음으로 소금에 절인 물고기였다고 한다. 몇 년 전에 중국학자를 안내하면서 서울에서 설렁탕으로 유명한 집으로 안내했다가 낭패를 본 일이 있었다. 알고보니 쇠고기를 전혀 들지 않았다. 이처럼 쇠고기를 먹지않는 중국인이 있으니 식성을 미리 알아야 한다는 말
2000년 가을에 고구려 수도인 중국 환인(桓仁)을 방문했을 때에 담장 한 가운데에 건물을 세우고 마당은 돼지우리로 삼은 집을 목격하였다. 건물은 마당에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도록 되어 있었다. 돼지우리 안에 건물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고대 집의 모습이었기에 사진을 찍으려 했으나 다른 일행의 독촉으로 이루지 못한 것을 지금도 아쉽게 생각하고 있다.
"돼지는 원래 숲지대와 그늘진 강둑에서 사는 동물이다. … 특히 곡식을 주로 먹기 때문에 인간과 직접 경쟁하는 경쟁자일 수밖에 없다. … 더 큰 약점은 실용될 수 있는 젖이 없고 원거리를 몰고 다니기가 무척 어렵다는 점이다. … 덥고 건조한 기후에는 신체구조적으로 잘 견뎌내지 못한다. … 보호막 역할을 하는 털도 없고, 땀을 흘려 체온조절도 할 수 없는 까닭에, 돼지는 외부의 습기를 이용하여 피부를 습하게 하여야 한다. 그래서 돼지는 깨끗한 진흙속에 뒹굴어 체온을 조절한다. 그러나 깨끗한 진흙이 없을 경우 자기의 배설물로라도 피부를 습하게 하려 한다. 섭씨 29도 이하일 경우, 돼지는 우리 안의 잠자리와 식사자리에는 배설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온이 섭씨 29도를 넘어가면 어디나 가리지 않고 배설을 한다(마빈 해리스 지음, 박종렬 옮김, 문화의 수수께끼』한길사, 1997, 49~50쪽)." 털이 성긴 돼지가죽은 태양광선을 거의 막아주지 못한다. 그래서 돼지에게는 인공적인 그늘을 만들어 주어야 하고, 뒹굴 수 있도록 따로 물을 준비해주어야 한다. 또 인간 자신이 먹을 수 있는 곡식이나 다른 식물성 식품을 먹여야만 한다. 돼지는 쟁기를 끌지도 못하고, 그 털로 옷감을 만들기에도 적당하지 않고, 젖을 짜서 쓸 수도 없다. 그러니 살아 있을 때에는 경제적 쓸모가 없다. 기생충 때문에 고기를 날로 먹을 수 없고, 쉽게 상해서 보존성도 떨어진다. 또 무리를 이루어 데리고 다니기도 어렵고, 다리가 짧아서 원거리 이동도 하기 힘들다. 그러니 한 가지로 다양한 것을 얻어야 하는 유목민의 습성에는 맞지 않는다.
"돼지는 모든 포유류 가축 중에서 가장 신속하고도 효과적으로 식물을 고기로 전환시키는 능력을 갖고 있다. 한 마리의 돼지는 일생 동안 그 먹이 속의 에너지 가운데 35퍼센트를 고기로 전환시킬 수 있다. 자연히 소가 돼지보다 귀할 수 밖에 없다. 동네 잔치에서 보통은 돼지를 잡았고 아주 특별한 경우에는 소를 잡았다. 이처럼 다산성과 생산성의 상징이요 농경민족의 지표인 돼지가 서유기에 나오는 저팔계처럼 중국에서는 우대를 받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선호하지 않았던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추측건대 중국에서는 경제성이 높은 돼지를 좋아한 데에 비해서, 우리는 먹기 어려운 식료품에 더욱 더 집착한 결과가 아닌가 생각된다. 과거에 금서로 지목되면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것과 비슷하다. 다양한 부식을 개발하기보다 쌀밥에 집착했던 것과 같은 원리이기도 하다.
"첨지중추부사 정술조가 상소하기를, “… 소·술·소나무 세 가지에 대한 금지법은 국가에 항상 있는 법입니다. …”고 하였다(정조실록 6년<1782>6월 2일)." 이렇게 되니 아주 특별한 기회가 아니면 쇠고기를 먹기 어려웠다. 그러면 그럴수록 쇠고기에 대한 열망은 더욱 커졌던 것이 아닌가 한다. 지금 불고기가 한국 고유의 음식문화가 된 것도 이러한 쇠고기 편애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일본에는 전통적으로 쇠고기를 구워먹지 않았는데, 우리 식생활의 영향을 받아서 지금 야키니쿠(燒肉)가 유행한다.
기획 : 남경필 편집간사 대한토목학회 THE MAGAZINE OF THE KOREAN SOCIETY OF CIVIL ENGINEERS |
출처: 마음의 정원 원문보기 글쓴이: 마음의 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