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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단지와 잔을 끌어당기며(弓壺觴)
이 문 열
저 사람이 돌아왔다고 한다. 여산(廬山) 기슭 옛 언덕 모퉁이에 축대 높고 칸살 넓은 집을 푸르르 날아가게 지어 놓고도 쉬 돌아올 것 같지 않던 저 사람이 마침내는 돌아왔다고 한다. 어느 해 질 녘 숨어들 듯 가만히 돌아와 벌써. 몇 달째 쓸쓸히 한가롭게 지내고 있다 한다. 저 사람 한번 찾아보자.
보니 저 사람, 하마 도정절(陶靖節, 도연명. 시호를 따라 정절 선생이라 불리움)을 시늉하려는가. 바깥세상과는 서로 잊어버린 듯 책과 술로 시름을 끄고 있다. 책을 읽되 반드시 다 알기를 구하지 않으나, 그 속에 마음에 드는 구절이 있으면 너무 기뻐 밥 먹기조차 잊고 읽는다. 술은 자주 마시지 못하되, 마시면 흠뻑 취하기를 반드시 함도 다섯 그루 버드나무〔五柳〕로 호를 삼은 늙은이 같다.
저 사람 읽는 것부터 다가가 살펴보자. 낮에는 공문(孔門)의 가르침을 읽는데, 젊어 한때 다 아는 듯 이리 빼 쓰고 저리 우려먹은 그 책들을 마치 새로 만난 듯하였다. 증자(曾子)가 깊이 병들어 제자들을 불러 놓고 한 말씀에 이르러서는 갑자기 눈가가 불그레해지는 게 곁에서 보기에 괴이쩍었다.
“내 발을 펴 보고 내 손을 펴 보아라.(이 몸이 성한가.) 시(詩)에 이르기를 ‘두려워하고 또 삼가기를 깊은 물가에 섰듯 하고, 얇은 얼음을 밟는 듯하라.’ 하였는데, 나는 이제야 면하게 되었구나. 얘들아.”
그런 말씀 어디에 늙어 가는 저 사람의 눈가를 적시게 할 간절한 뜻이 있었을꼬. 스스로 모든 것에서 놓여남을 믿어 드디어는 증자와 함께하게 된 정(情)인가, 아니면 그 같은 자처(自處)가 새삼 일깨워 준 고종(考終) 의 쓸쓸함 때문이던가.
자공(子責)과 공자의 문답에 이르러서는 문득 씁쓸히 웃으며 책장을 덮었는데 그것은 또 무슨 까닭이었올꼬.
“자공이 묻기를 ‘여기에 아름다운 옥(玉)이 있는데 궤에 넣어 깊이 갈무리해 두오리까? 아니면 좋은 값을 쳐주는 장사치에게 파오리까?’ 하니,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팔아야지. 팔아야 하고말고. 나는 죽은 값을 쳐줄 장사치를 기다리는 사람이다.’라고 하셨다.”
그 구절을 저 사람이 그리 덮은 것은 늙도록 팔 옥을 가졌던 저 옛사람〔古之人]을 부러워하여서인가, 또는 끝내 세상에서 놓여나지 못한 그 부질없음을 민망히 여긴 것인가.
저 사람 저녁에 백납도(栢拉圖, 풀라톤)를 읽을 때도 그러하였다. 나이 들어 새삼 배운 희랍어로 씨(氏) 의 경건설(敬虔說, 유티플론)부터 더듬더듬 읽어 나가는데 난생처음 보는 책인 양한다. 스승 소격납저(蘇格拉底,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어 사람 죽인 아비를 고발함이 온당치 못함을 깨우쳐 주는 걸 보다가, 슬며시 맹자를 펴 순(舜)임금은 죄 지은 아비를 업고 먼 바닷가로 도망쳤으리라고 한 구절을 짚으며 홀로 고개를 끄덕인다.
또 씨의 이상설(理想說, 이데아론)에 이르러서는 공문(孑L門)의 여러 경전을 펴 성(性)에 대한 옛 사람들의 풀이를 곰곰 살핀다. 앎이란 이미 받아 태어난 것을 되떠올림(想起〕에 지나지 않는다는 씨의 주장과 우리 배움이 이루고자 하는 것은 처음부터 지녔던 바의 온전함을 되찾는 것〔復初〕이라는 옛 사람의 말을 견주어 보는 듯하지만, 그러나 적지도 않고 애써 기억하려 하는 표정도 없는 걸로 보아 뒷날 어디다 다시 풀어 쓰려는 것 같지는 않다.
저 사람 술 마시는 모습도 한번 보아 두자. 세상이 아주 잊지는 않아 가끔 보내오는 술만으로도 고방의 단지가 아직 비지는 아니하였으나, 길이 멀어 벗들은 자주 오지 못한다. 밤늦어 잠든 아내 깨우지 아니하고 가만히 술 단지와 잔을 찾아 안더니, 안채 모퉁이에 덧달아낸 바람맞이 다락으로 올라가 홀로 앉는다.
권하는 이도 없이, 권할 이도 없이 스스로 술을 따라 마시는데 때로는 하늘을 쳐다보고 소리 없이 웃고 때로는 웅얼웅얼 무얼 읊조리기도 하는 게 자못 흥겨워 보인다. 떠들썩하던 장안의 봄날 아름답고 미쁜 벗들과 어울리던 때에 견주어 조금도 외롭거나 처량하지 않다. 하지만 문득 눈을 들어 멀리 희부움한 그쪽 하늘을 바라보기도 하는데, 그 눈길에 서린 것이 아직 남은 이끌림과 그리움인지 옷자락을 끊듯 하는 나뉨(袂別〕을 거듭 다짐함인지는 얼른 알 수 없다.
이제로부터 꼭 스물일곱 해 전에 내 저 사람이 떠나감을 보았다. 늙은 어머니와 어린 처자를 가형(家兄)에게 맡기고 이 언덕을 떠나는 그 모습은 저 사람을 아는 이라면 한결같이 가슴 저려 할 만하였다. 때는 오뉴월 염천인데 바지는 한겨울의 두터운 나사(羅紗) 바지였고, 새로 장만한 갖신은 값싼 기성품이라 땀이 차자 양말에 거멓게 염색이 묻어났다. 낡은 허리띠는 쇠고리의 도금이 벗겨져 얼룩얼룩한데, 소매 짧은 옥색 인견(人絹) 새 윗도리만 어울리지 않게 화사했다.
모두가 저 사람이 그 무렵 겪고 있던 곤궁 탓이었다. 늦은 수〔戌〕 자리살이 〔軍服務〕에서 돌아오고도 몇 달 가형 에게 더부살이하다 밀리고 밀려 도회로 떠나는 길이었으니, 그 채비에 어찌 두서가 있었으랴. 향리(鄕吏)로 일하는 어린 날의 벗에게서 먼 길 떠날 여비라고 몇 푼 빌린 것으로 의관(衣冠)까지 갖추려 하다 보니 그리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가까이서 저 사람을 본 이들은 그 눈길에서 적지 아니 저린 가슴을 달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들에 따르면, 때로는 울분과 한에 차서 번들거리고 때로는 술과 광기로 붉게 충혈돼 있던 저 사람의 두 눈이 그날따라 맑고 빛나기 그지없었다고 한다. 장터 정류장에서 차에 오르기 전 마지막으로 이 언덕을 둘러보고, 다시 마주쳐 떠나갈 하늘 쪽을 바라보는데, 하마 그때 예전의 호기로움과 도도함이 그대로 되살아나 있음을 보았다는 이도 있다. 저 사람 이 언덕에서 그 모진 불우(不遇)를 겪기 전에는, 아무리 크고 번쩍이는 전각(殿閣)도 회칠한 무덤 보듯 하였고, 거기 드나들며 무슨 장(局이네 관(官)이네 하는 이들마저 나나니벌이나 배추벌레인 양 여겼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날 저 사람의 윗도리 주머니에 꽂혀 있던 낡은 만년필이 벌써 유달라 보였다고 한다. 이전 좋았을 때 장만한 뒤 아끼며 지녀 왔던 미리견(美利堅, 미국)의 명품인데, 갈아입을 옷 보퉁이 하나 없고 시계며 지갑조차 없는 저 사람의 유일한 소지품이라 눈에 띄었을 법도 하다. 하지만 그게 세상을 헤쳐 가는 데 그 무엇보다 쓰임새 있는 연장이 될 줄 알았다던가, 그 이상 거기서 어떤 심상찮은 빛무리까지 느꼈다는 말은 좀 지나친 듯하다. 아마도 뒷날 저 사람의 성취에서 미루어 키워 낸 기억일 게다.
저 사람의 늙은 어머니와 어린 처자가 이 언덕을 떠나간 것은 그로부터 석 달 뒤였다. 따로 짐차를 낼 것도 없이, 이불 보퉁이와 옷보퉁이를 하나씩 맡은 고부(姑婦)가 겨우 걸음마를 하는 아이를 가운데로 하고 승합차에 오르는 모습은 이 언덕을 떠나는 저 사람의 또 다른 쓸쓸한 뒷모습이었다. 미리 떠난 저 사람이 바로 장안으로 밀고 들지 못하고 가까운 대처의 사설 학당에서 헐값으로 지식을 팔고 있다는 풍문이 있어 더욱 그리 보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이 대목에 와서도 달리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비록 맨몸이나 다름없이 타향살이를 나서는 길이지만 그날의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모두 화안하기 짝이 없는 표정들이었다고. 특히 젊은 며느리의 해맑은 얼굴에는 안도와 믿음 이외의 어떤 그늘도 어려 있지 않았으며. 아이는 혀 짧은 노래로 즐거움과 기쁨만을 드러내고 있어, 이미 그때 그들 일가의 밝은 앞날을 예감했다고. 하지만 그 또한 아주 뒷날로부터 미루어서 만들어진 기억이 아닌지 모르겠다. 그 뒤 꽤 여러 해 저 사람은 이렇다 할 성취의 소식 없이 이 언덕에서 차츰 잊혀져 가고 있었기 때문이디.
하늘은 해와 달과 뭇별로 넉넉하고
땅은 산과 물에 온갖 목숨으로 바쁘구나.
사람들은 그 사이를 뽐내며 내닫건만
이 두 손은 비어 있고 몸 둘 곳조차 없네.
아. 나는 털터리, 빈털터리.
올려 보고 내려 봐도 빈털터리.
땅끝 하늘가를 홀로 떠도는
털터리, 털터리, 빈털터리.
이는 그때 이 언덕에서 불우했던 저 사람이 무슨 주남(周南) 소남(召南, 시경(詩經)의 편명)이나 되듯 읊조리던 가락이고,
세월의 뒤안길을 서성이면서
하 많은 그 세월을 울던 그 사람
언젠가 꿈을 딛고 일어서겠지
파초의 푸른 꿈은 이뤄지겠지.
이는 역시 그때 저 사람이 술 취하면 토막 내 부르던 정풍(鄭風) 닮은 양풍(洋風)의 저잣거리 노래다. 그러하였다. 이 언덕을 떠나기 전 저 사람의 몇 해는 그 두 노래가 내비치는 바처럼 외롭고 고단하였다. 부역(附逆)의 핏줄이라 나라가 받아 줄 리도 없고, 이미 저잣거리의 잡문에 깊이 물들어 절실한 급제(及第) 의 뜻도 없으면서, 너무 오래 공령(功令)을 닦는 데 세월을 허비한 탓이었다.
세상은 점점 더 학벌을 중히 여기는데 난데없는 오기 하나로 내팽개치듯 버리고 떠난 학적(學籍)은 그사이 지워져 돌아갈 곳이 없었다. 선비라도 면할 길이 없는 이 시대의 수〔戌)자리도 발등에 떨어진 불이 되었다. 용문(龍門)의 허세로 그날까지 미루어 왔지만 더 버티다가는 추관(秋官)이 이를 판이었다. 거기다가 성가(成家)는 또 남보다 일찍 하여, 넉넉잖은 가형에게 식구대로 더부살이를 하고 있었으니 그 곤궁함이 오죽하였으랴.
그런데도 저 사람의 가슴에는 아직 스스로도 잘 모르는 야망과 자신감이 불꽃같은 열정과 더불어 타오르고 있어 황폐해진 삶을 더 황폐하게 만들고 있었다. 한때 이 언덕 사람들을 걱정하게 했던 술꾼, 노름꾼, 건달, 싸움패의 인상은 그래서 남게 된 것이리라. 갈수록 죄어 오는 절망감에 맞섬이었던지 장터거리는 대낮부터 취해 비틀거리는 저 사람을 보았고, 그 시절 자주 노름방으로 쓰였던 주막 뒷방은 노름꾼들 사이에 끼어 어울리지 않는 몰두를 보이던 저 사람을 기억한다. 또래의 건달들과 어울려 천렵(川獵)과 추렴으로 긴 날을 죽이는가 하면, 대수롭지 않은 일에 불같이 성을 내며 길바닥에서의 드잡이질조차 마다하지 않던 게 또한 그때의 저 사람이었다.
모두가 돌이켜 보기에도 참혹하여 애처로운 저 사람의 한 시절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더는 길게 그 시절의 일을 늘어놓지 않으련다. 그보다는 차라리 저 사람이 늦은 수자리를 살려 떠나던 해의 봄 어느 하루를 차분히 그려 봄으로써 그 불우했던 시절의 자잘한 기록화(記錄畵)에 갈음함이 나으리라.
그날 아침 저 사람은 근처 농군에게 서툰 율사(律士)의 지식을 빌려주고 얼마간의 사례를 받았다. 나이 들어 가형(家兄)에게 더부살이하는 곤궁한 처지이고 보면 요긴하게 쓰일 만도 한 액수였다. 거기다가 장터거리에는 대추나무에 연 걸리듯 술빚이 널려 있고, 한 지아비로 아내에게 못다 한 일도 많았으나, 저 사람은 굳이 돌아보지 않았다.
먼저 짐 질 아이놈을 하나 사고 술도가에서는 두 말들이 참나무통에 막걸리를 채웠다. 남은 돈으로는 안주 삼을 마른고기 한 두름을 사서 굽고, 장터 주막에서는 따로 나물 무침을 큰 쟁반 가득 담게 했다. 또 좋은 돗자리 한 장을 빌려 그 모든 것을 아이놈에게 지운 뒤에 그때만 해도 맑고 깊은 소를 발아래 끼고 있던 병암산(屛岩山)으로 올라갔다.
때는 봄도 깊어 산수유꽃은 시들어 가도 산벚, 진달래는 한창이었다. 한군데 흐드러지게 핀 산벚꽃 그늘 아래 돗자리를 깔고 안주를 펼쳐 마시는데 술은 참나무통에서 바로 사발에 따랐다 하늘에는 흰 구름 유유히 흐르고 산들바람에 꽃잎 날려 술잔에 떨어졌다. 안주 갖춘 데다 술 넉넉하니 그 맛 달기가 견줄 데 없었다.
막걸리 서너 사발에 취한 아이놈에게 후한 삯을 쳐주며 해 질 녘에 술통 거둬 갈 것을 당부하고 산을 내려보내니 곧 혼자가 되었다. 서둘 것 없어 쉬엄쉬엄 마시며 봄날의 흥겨움에 취해 가던 저 사람의 풍류, 경쇠와 사죽(絲竹)이 없다고 흠 되지 않았다. 미쁜 벗 고운님 따로 구하지 않았고, 산 아래 내려다보이는 저잣거리에서의 고달픈 삶은 꿈 밖의 일이었다.
비록 옛 대인 선생(大人先生, 유령(劉伶) 의 『주덕송(酒德頌)』에 나오는 인물)처럼 천지를 하루아침 일로 보며 만년을 잠깐 동안으로 여길 만큼 유유하지도 못했고, 해와 달을 문과 창으로 삼으며 온 세상을 뜰과 거리로 삼을 정도로 거침없지도 못했지만, 그 한낮 저 사람의 흥, 실로 도도한 바 있었다. 하늘을 장막으로 삼고 땅을 자리로 하여, 술통을 끌어당기고 크고 둥근 사발로 마시는데, 한나절이 지나자 가만히 귀 기울여도 우레 소리를 듣지 못하며 눈여겨보아
도 태산의 형상을 알아보지 못할 만큼이나 취하였다.
해 질 녘 아이놈이 술통과 자리를 거둬 간 뒤에도 저 사람의 취흥은 줄어들지 않았다. 만 길이나 치솟는 호기로 장진주(奬進酒)를 읊조리다 개미구멍 같고 달팽이 뿔 같은 세상을 길게 웃었다. 혹 강개(慷慨)에 젖으면 점점 글러 가는 세월을 개 꾸짖듯 하였고, 거기 빌붙어 부성한 쑥 같은 무리에게는 마치 곁에 서 있기라도 한 듯 허연 눈 흘김을 보냈다.
그런데 이 어찌 된 일인가 해 지고 날 저물면서 저 사람의 감회는 차츰 비분(悲慣)으로 옮아갔다. 끝내 자신을 써 주지 않을 것 같은 세상을 호통하다가, 어느새 그 야속함을 하소연하는가 싶더니, 다시느닷없는 통곡으로 바뀌었다. 죽어 가는 그 어떤 짐승보다 더 비통하게 울어 산 아래 밤길 걷던 이들을 공연히 섬뜩하게 하였다.
그렇게 얼마나 울었을까, 그사이 저 사람의 비분은 차츰 깊어 가는 밤처럼 고요하고 줄줄이 흐르는 눈물처럼 투명한 슬픔으로 가라앉았다. 통곡은 숨죽인 흐느낌으로 잦아들고 마음의 눈길은 오로지 외롭고 고단한 자신에게만 머물렀다. 그 밤 저 사람의 소리 없는 눈물은 어쩌면 속절없이 시들어 가는 젊음과, 그럼에도 여전히 아득하기만 한 앞날에 바쳐진 것은 아니었던지. 그리하여 마침내는 그 어떤 가치로도 채워지지 못하고 다해 버릴 것 같은 삶에, 그 지워 버릴 길 없는 실패의 예감에, 속 깊이 허물어져 내리고 있었던 것은 아닐는지.
밤이 깊어서야 조각달 어스름한 산길을 비칠거리며 내려오던 저 사람은 중턱의 물 내려다보이는 빈 정자에 나무토막처럼 쓰러졌다가, 새벽 한기에 쫓겨 더부살이 골방으로 돌아갔다.
저 사람의 돌아음이여. 그 무엇보다도 이 언덕이 저 사람의 고향이기 때문일레라. 사백 년 이어 온 성쇠와 훼예(毁譽)의 기억이 이끌었음일레라 열두 대(代)를 거듭하며 핏속에 쌓인 정한(情恨)이 불렀음일레라 이 언덕이 저 사람의 고향이 된 내력 들은 대로 풀어 보자.
저 사람의 아마득한 윗대는 계림(鷄林) 사람이었다. 그러나 계림이 송악(松嶽)에 귀부(歸附)하자 그들도 해서(海西)로 옮겨 번성하였다. 대를 이어 여조(麗朝)의 문물에 이바지함이 적지 않더니, 문하시중이던 그 중시조가 안릉(安陵)을 식읍(食邑)으로 받으면서 안릉을 관향(貫鄕)으로 쓰게 되었다.
저 사람의 윗대가 다시 남으로 내려온 것은 모은공(茅隱公) 오[李午] 이후이다. 모은공은 공민왕의 부마(駙馬)이던 상장군 소봉[李小鳳]의 셋째 아들로 일찍이 성균(成均) 진사가 되었으나, 사헌부 지평으로 포은(圃隱) 선생을 도와 정도전과 조준을 탄핵했던 형 신[李申]이 끝내 매 아래 죽자 세상에 뜻을 잃었다. 송악을 떠나 이리저리 떠돌다가 이태조의 개국 뒤에 경상도 함안 땅 모곡(茅谷)에서 숨어 살 곳을 찾았다.
그 사는 동리도 고려동(高麗洞)이요, 논을 떠도 고려답, 밭을 사도 고려전이라 이름하던 모은공은 백비(白碑)를 유언하여 죽은 뒤까지도 왕씨(王氏)에게 절의를 지켰으나 뒷사람은 그렇지가 못했다.
공의 손자 맹현(孟賢) 중현(仲賢)이 새 왕조의 대과에 나란히 급제하여 다시 출사하였고, 성종(成宗) 조에는 나라로부터 양택(陽宅)과 음택(陰宅)을 아울러 하사받을 정도로 군총(君寵)을 입었다. 그러나 조상의 유훈(遺訓)을 받들지 못한 죄가 있어 형제 모두 벼슬살이가 끝난 뒤에도 모곡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양주 덕소(德沼)에 자리 잡았다.
저 사람은 안릉 이씨 영해파(盈海派)에 속하는데 파조(派祖)는 맹현의 여섯째 아들 애(曖)가 된다. 영해 부사로 내려온 숙부 중현을 따라왔다가 토호(土豪)의 외동딸을 아내로 맞아 그 땅에 뿌리를 내리니 벌써 오백 년 전의 일이다. 그 손자에 운악 선생(雲嶽先生) 함(涵)이 있어 애써 가문을 일으키려 하더니 셋째 아들인 시명(時明)에 이르러 비로소 해동 추로(鄒魯, 맹자와 공자가 난 땅. 여기서는 안동 지방.)에 안릉씨(安陵氏) 있음을 알게 하였다.
석계(石溪) 시명의 속된 진취는 사마시(司馬試) 입격(入格)에 그쳤으되, 선비로서의 삶은 우러름과 기림을 받을 만하였다. 일찍부터 입지(立志)와 행검(行檢)으로 망우당(忘憂堂, 곽재우) 이며 우복 선생(愚伏先生, 정경세) 같은 당대의 명사들을 감탄시키더니, 성년이 되어서는 근시제(近翅齊) 김해(金垓)와 경 당(敬堂) 장흥효(張與孝)로부터 도산(陶山) 심학(心學)의 정맥(正脈)을 이어받았다 그 뒤 병자년 국치(國恥)를 당하자 대명 절의(大明節義)를 지켜 이 언덕에 숨어 살게 되었는데, 저 사람의 핏줄이 처음 여기 닿은 것은 그때였다.
석계는 뒷날 다시 일월산을 수양산(首陽山) 삼아 옮겨 살다가, 안동 땅 대명동에서 승정 처사(崇楨處士)로 삶을 마쳤으나 대를 이은 그 집안의 성취는 볼만하였다. 뒷날 영남 남인(南人)의 영수로서 전형(銓衡)까지 지낸 갈암(葛庵) 현일(玄迎)을 비롯하여 존재(存齋) 정묵재(靜默齋) 항재(恒齋) 등 일곱 아들이 모두 뛰어나고 손자 대에도 고제(顧齊)와 밀암(密庵)이 있어 세상으로부터 칠산림(七山林)이란 일컬음을 받았다.
저 사람의 집안이 대를 이어 이 언덕에 뿌리를 내리는 것은 석계의 넷째 아들인 항재(恒頰) 승일(嵩逸) 이후가 된다. 삼형(三兄) 현일과 더불어 ‘난위형 난위제(難爲兄 難爲弟)’란 평을 들으며 이조 좌랑으로 첫 부름을 받아 크게 진취를 꿈꾸던 승일은 삼형이 의리 죄인(義理罪人)으로 몰려 위리안치(圍籬安置)로 내침을 받자 그 또한 진취의 꿈을 접었다. 홀홀히 벼슬을 벗어던지고 일찍이 선친 석계가 버린 이 언덕으로 되돌아와 은거하였다.
그 뒤 다시 일곱 대(代), 노론(老論)의 엄한 배척으로 조정에 들어 높이 쓰이지는 못했으나 저 사람의 가첩(家牒) 남에게 보이기 부끄럽지 않았다. 비록 증직(贈職)이나마 삼대를 당(堂) 아래로 내려선 적 없고, 문집과 호(號)는 대를 거른 적 없었다. 특히 저 사람의 오 대조 좌해(左海) 수영(秀榮)은 학덕으로 종이품 지돈녕 부사(知敦寧府使)에 이르렀으며, 만년에는 이 언덕에 문하를 열어 사람들은 거기서 배운 이들을 따로 여산문도(廬山門徒)라 일렀다. 좌해유고(左海遺稿) 열두 권을 남겼고, 묘갈명은 허방산(許舫山, 허훈(許薰))이 썼다.
그러다가 서세동점(西勢東漸)으로 대(大) 중화 소(小) 중화가 아울러 망하면서 저 사람의 집안도 저무는 해처럼 기울어 갔다. 고조와 조부 모두 서른을 못 채우고 상명 역참(喪明逆慘,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는 참변)을 보이더니, 증조와 부친은 대를 걸러 망국(亡國)과 분단을 보았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쪼개지는데 사람의 성명(性命)이 성할 것이며, 성명이 성치 못한데 재물인들 온전할 것이랴. 저 사람의 집뿐만 아니라, 한때는 부촌(富村)이라 일컬어지던 이 언덕의 대소가(大小家) 모두 무너져 가는 고가(古家)로만 남았다.
옛부터 이르기를, 모두가 다 같이 당하는 환난〔大同之患〕은 환난이 아니라 했다. 이 시대 들어 저 사람의 집안이 겪은 쇠락(衰落)은 추로(鄒魯)의 크고 작은 여러 문중이 다 같이 한 바이니, 어찌 이 언덕의 지기(地氣)와 운세만을 탓하랴. 죽어 가는 여우가 그 머리를 제 살던 골짜기로 두듯 이 언덕을 잊지 못하는 저 사람 구태여 괴이쩍게 여길 것 없다.
그러하되 저 사람의 돌아옴이 매양 쉽고 절로 된 일만은 아니었다. 처음 몇 년 저 사람은 돌아오려야 돌아올 수가 없었고, 가까스로 돌아올 만하게 된 뒤에도 이 언덕은 다시 10여 년을 기다려야 했다. 이제 그 세월 한번 돌아보자.
이 언덕 사람들에게는 얼른 이해가 안 되는 그 성취와 이름이 홀연 요란스레 전해 온 것은 저 사람이 떠나고 5년 만이었다. 그해 정초에 장안의 어떤 큰 신문이 지면(紙面) 하나를 다 써서 저 사람의 글과 이름을 실었다. 때는 박씨 무인 정권(武人政權) 말기라 신문의 성세가 전 같지 못했지만 그래도 궁벽한 이 언덕으로 보아서는 놀라운 일이었다.
그 소문은 곧 들판을 가로지르고 골짜기를 건너 고을 전체에 퍼졌다. 하지만 저 사람의 뒷날이 어떨는지는 누구도 얼른 짐작하지 못했다. 드물게 옛 학문을 지키고 있던 이 언덕의 한 식자(識者)는 오히려 처연한 낯빛이 되어 혀를 차며 말하였다.
“태산이 울리고 흔들려 뛰쳐나온 게 겨우 쥐새끼 한 마리〔泰山鳴動鼠―匹〕 라 하더니, 그 재주로 할 짓이 이밖에 없단 말가. 오늘 하루야 요란하다만, 꼴 난 언문(諺文)으로 문장을 지은들 어디까지겠으며, 뜻을 편들 얼마이겠는가. 기껏해야 옛 패사씨(稗史氏, 패관(稗官)) 외사씨(外史氏) 의 부류이니, 잔총 소어(殘叢小語) 로 태사씨(太史氏, 사관(史官)) 수발이나 들다가, 자칫 저잣거리에 내려앉으면 원건릉(元建陵, 영정조(英正祖) 간에 수다했던 그 무명 잡배 꼴 나고 말리. 민촌 아녀자들이나 흘릴 잡스러운 얘기 언문으로 끄적거려, 그것도 글이라고 아이놈에게 주어 보내면 세책가(貰冊家)에서 술값이나 제대로 보내 줄는지.”
신학문을 배운 집안 아재비라 하여 그보다 낫게 보아주지도 않았다.
“육사(陸史)나 지훈(芝薰), 일도(一島)가 시(詩)에 그 감개를 의탁하는 것은 이웃 동리에서도 보았다만, 우리 집안에 소설가가 난 것은 또 뜻밖이네. 타락한 시대를 타락한 방법으로 그려 내는 게 요새 소설이라던데, 그게 우리 가학(家學)으로 키운 정서에 맞을까. 평생 궁하게 살 일도 그렇지만, 이 살벌한 무인 치세(武人治世)에 몸 두기는 또 얼마나 힘들꼬.”
신학문을 배워 중등학교 교원 노릇까지 했다고는 해도, 소설가는 모두 《백조(白潮)》나 《창조(創造)》 동인(同人) 들쯤으로 알고 있고, 소설은 계몽적이어야 한다고 믿는 이라 그럴 만도 했다.
그런데 뒤이은 저 사람의 성취는 멀리서 보기에도 눈부셨다. 그해를 시작으로 저 사람의 글은 터진 봇물처럼 흘러나와 신문과 잡지를 뒤덮고 또 책이 되어 세상에 뿌려졌다. 세상도 처음 한동안은 홀린 듯 어린 듯 저 사람을 받아들였고, 입을 모아 그 이름을 치켜세웠다.
새로운 무인 정권과 함께 활짝 핀 동영상(動映像) 시대가 저 사람을 한충 더 널리 알렸다. 전시(電覩)가 흑백에서 천연색으로 바뀌고 방영 시간이 배로 늘어, 저 사람이 책 속에 상상으로 빚어낸 세계를 눈앞에 살아 움직이는 듯 펼쳐 보였고, 때로는 대담(對談)으로 직접 저 사람을 끌어내 온 세상이 그 얼굴을 익히게 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무명(無名)과 마찬가지로 가난도 이미 더는 저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가을 시사(時祀) 때나 숨어들 듯 돌아와 가만히 산소의 풀을 내리고 사라지던 저 사람이 이 언덕 사람들에게 다시 얼굴을 내밀기 시작한 것은 그 뒤의 일이 된다. 축(祝, 제문)에 홀기(笏記)까지 쓰는 불천위(不遷位) 산소를 격식대로 모시게 되면서 그 제관(祭官) 을 모으기 위해 집안 대소가(大小家)에 얼굴을 내밀었고, 제사가 끝난 뒤에는 장터거리 주막에서 어려웠던 시절에 벗 삼던 이들과 술잔을 나누기도 했다. 어느 해는 여름휴가도 식구대로 이 언덕에 돌아와 보냈다.
차츰 이 언덕을 찾는 저 사람의 발길이 잦아졌다. 어떤 때는 신문기자들과 함께 오고 어떤 때는 전시(電榥) 촬영 기사들과 함께 왔다. 글 배우는 이들을 데리고 올 때도 있었으며, 글 가르치는 이들과 함께 오기도 했다. 더러는 글벗들과 무리 지어 ― 한 해에도 몇 차례나 이 언덕을 찾아왔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를 10년이 넘도록 돌아와 살 뜻은 전혀 내비치지 않았다
그러다가 저 사람이 옛집을 되찾기 위해 수소문하는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이 언덕은 저 사람에게 돌아올 마음이 있음을 읽었다. 저 사람의 옛집은 위로 아흡 대가 살아온 서른세 칸 고가(古家)로서, 곤궁했던 그 선비(先砒)께서 집안사람에게 넘긴 것이었다. 그때 저 사람이 끝내 옛집을 되찾지 못했음을 듣고, 이 언덕은 오래 지켜왔던 뒤쪽 문중 밭을 집터로 내어주어 그 돌아올 뜻을 북돋았다.
저 사람 기쁘게 그 집터를 받았으되 이 언덕으로 돌아옴은 못내 더디었다. 다시 여러 해를 미루다가 향당(鄕黨)의 공론을 이기지 못해 마침내 돌아와 머물 곳부터 먼저 일으켰다. 이름하여 ‘광려산 글 집〔廣慮文字〕’인 바, 저 사람이 손수 쓴 상량문(上樑文)을 보면 그간의 경위와 함께 그 돌아오고자 하는 뜻이 자못 절실하게 드러나 있다.
백두(白頭) 큰 줄기가 남으로 흐르다가 동쪽 바닷가에 우뚝 멈춰 선 것이 일월(日月)의 영봉(靈峰)이요, 그 한 갈래가 내륙으로 흘러 낙강(洛江) 석천(石川)에 발을 적시니 옛부터 일러 광려산(廣慮山)이다. 이제 사백 년 조상들의 숨결이 어린 그 산자락 옛 언덕에 후학들을 위한 강마(講磨)의 터를 마련하고 아울러 노후의 연거(燕居)를 곁들이려 함에, 그 감회 깊고도 별나지 않을 수 없다.
비록 안릉(安陵)의 말예(末裔)로 멀리 외진 물가에 자리 잡았으나, 우리 일문(―門) 일찍이 남에게 부끄럽지 않은 성세(聲勢)를 이어 왔더니, 항재(恒齋) 선조 둘째 집 되는 나의 가계(家系) 또한 그에 크게 벗어남이 없었다. 그러하되 현조고(顯袒考) 요수(夭壽)하시고 황고(皇考) 남만의 왜가리 소리를 내는 무리〔南蠻鳩舌之人, 허자류(許子流)〕에 휩쓸리어 북으로 떠나시매 가운(家運)이 일시에 파망(破亡)하였다. 선비(先砒) 홀로 어린 다섯 남매를 이끌고 남녘을 유리(遊離)하시니, 삼백 년 깃들여 살던 옛집마저 잃고 타향을 떠돈 지 하마 반(半)백 년이 넘었다.
장성한 가형 (家兄) 이 한때 솔가(率家)하여 돌아온 적이 있으나 이 옛 언덕은 아니었다. 장터거리에서 구차한 생업을 구하여 몇 년 문중을 민망케 하다가 다시 떠났으니, 그 돌아음을 어찌 귀향이라 일컬을 수 있으랴. 거기에 막막하고 고단한 몸을 의탁하였던 나 또한 이 땅과 사람들에게 실망과 근심만 더하였을 뿐이다.
내 일찍이 학문에 뜻 두었으나 게으르고 둔해 성취가 크지 못했고, 속된 진취(進就)를 꿈꾸었으나 그마저 볼만하게 이뤄지지 않았다. 입신(立身)에 겨우 몸을 둔 곳이 허울이 좋아 문단(文壇)이요 이름이 그럴듯해 문사(文士)이나 실은 저짓거리에 설익고 잡된 글을 내다 파는 일에 다름 아니었다. 입술을 말고 혀를 비틀어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고, 문장을 꼬고 이로(理路)를 비틀어 세상 눈치를 살폈다.
요행 세상은 어두운 데가 있어 내 어리석음을 밝게 가려내지 못했고, 사람들은 어질어 그 뜻의 비루함조차 너그럽게 보아 넘겼다. 뿐이랴, 어리석음과 비루함도 깨우침이 없으면 자라는 법이라, 나중에는 몸에 밴 천격(賤格)으로 굳어졌다. 저자 사람들이 생각 없이 던져 주는 푼돈과 분에 맞지 않은 허명(虛名)에 오히려 맛을 들이게 되었다.
성현께서 말씀하신 네 가지 죽올 죄〔四罪〕 가 따로 있고, 사문난적(斯文亂賊)이 따로 있으랴. 선비이고자 하면서 말과 뜻이 가지런하지 못하고 앎과 행함이 어우러지지 못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사람과 하늘의 베임을 받아 마땅하다.
이는 모두 타고난 천품(天稟)이 인욕(人慾)의 사(私)에 가리운 탓이니, 그래도 한 가닥 밝은 살핌이 남게 한 것은 살리기를 좋아하는 하늘의 어진 덕이라. 내 일찍부터 스스로 죄를 깨달아, 때가 되면 세상에 그 죄를 자복(自服)하고 방귀전리(放歸田里)의 가벼운 처분을 애걸할 뜻이 있었다. 아울러 그때에는 이 언덕에 후학들이 바르게 글 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고, 또 늙은 몸이 뉘우치며 죄를 닦을 누추한 방〔陋室〕도 한 칸 곁들이고자 했다.
뜻은 그같이 정녕(丁寧)하고 또한 절실한 바 있었으되 옮겨 행함이 그에 따르지 못하니 어찌하랴. 눈은 자옥한 세상 티끌에 어두워져 일의 앞뒤와 크고 작음을 못 가리고, 마음은 부질없는 정에 얽매여 나아가고 물러남을 뒤섞으며 다시 여러 해가 흘러갔다.
속절없이 미뤄지기만 하던 내 돌아올 뜻이 이 상량식(上梁式)으로 앞당겨 펼쳐지게 된 것은 먼저 향리의 사군(使君) 이여형(李麗炯) 공의 정성에 힘입었다. 공(公)은 속없이 요란스럽기만 한 내 이름을 믿어 이 언덕에 그 기릴 집을 짓고, 찾아오는 사람들로 향리의 비어 가는 산천(山川)과 묵어가는 전원(田園)을 채우고자 한다 하였으나, 실은 썩은 명리(名利)와 좀스러운 손익(損益)을 따지느라 돌아올 줄 모르는 나를 가긍(可矜)히 여겼음이라. 넉넉하지 못한 부고(府庫)를 덜고 도맥(道伯) 에게도 보태기를 청해, 사억(四億)의 금원(金員)으로 후원(後接)을 삼았다.
거기에 이 일을 들은 지인(知人)들의 성원(聲援)이 더해지고, 돌아갈 언덕 있음을 자랑과 보람으로 삼으라는 동도(同道)들의 격려가 잇따랐다. 오래 기다려 온 족당(族黨)의 재촉과 성화 또한 만만치 않았다. 이에 그 모든 지우(知遇)에 감격하고 또 물력(物力)의 근심도 크게 덜어, 먼저 돌아올 터전부터 마련하게 되었다. 조상의 옛 언덕에 강원(講院)과 누거(陋居)를 겸하여 분에 넘치는 옥우(屋宇)를 얽게 되니 오늘이 바로 그 대들보를 얹는 날이다.
옛글에 이르기를 산은 그 높음으로 귀해지는 것이 아니라 신선이 살면 이름을 얻고, 물은 깊어 칭송받는 것이 아니라 용이 살면 신령해진다 했다 이제 대들보를 얹는 이 집도 처마가 높고 방이 넓어 남의 눈과 귀를 끌지 아니하고, 여기 깃들이는 후학과 자손들의 글과 덕이 향기로워 절로 우뚝하기를 바랄 뿐이다.
이듬해 봄에 온 나라가 떠들썩하게 치러진 그 준공식에서도 저 사람은 돌아올 뜻을 한충 더 뚜렷이 하였다.
“내게 있어 부성(父性)은 일찍부터 고향으로 대치되었다. 나의 부왕(父王)은 바로 고향의 전통과 그 정서였으며, 모후(母后)는 난생처음 보아 더 고혹적이었던 서구 문화였다. 그리하여 젊은 나는 부왕을 살해하고 모후와 혼인한 일을 번민하는 이저파사왕(伊邸?斯王, 오이디푸스 왕)에 다름 아니었다.”
정성 들여 마련한 듯한 식사(式辭)에서 저 사람은 젊은 날의 글쓰기를 그렇게 규정해 놓고 다시 요즘 사람들의 말투로 선언하듯 말하였다.
“이제 나는 나를 살해하여, 정의를 구실 삼은 세상의 충동질과 내 무지 때문에 살해된 부왕을 되살리고자 한다. 부왕에게는 부왕의 정의와 진실이 있었고 그것은 곧 어떤 대의(大義)로도 죽일 수 없다. 나는 편협한 핏줄에 갇히지 않고 그의 정의와 진실을 읽어 내려한다. 또 나는 나를 살해하여, 모후와의 끔찍한 혼인 관계를 지우려 한다. 그러나 무지가 패륜을 변명해 주지 못하듯이, 어떤 엄혹한 참회도 핏줄을 지우지는 못한다. 괴롭지만 그녀가 내 어머니이며, 내 몸의 많은 것이 그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는 사실만은 죽음 너머까지 지고 가야 한다. 여지없이 죽었지만 되살려야 할 아버지와 지워야 하지만 온전히 지워 버릴 수는 없는 어머니 사이에서 피 흘리는 것이 내게 남은 운명 같다. 그리고 그때 이 집은 그 싸움터로 더할 나위 없는 지리(地利)를 줄 것이다.”
그러고는 “부귀하여 고향에 돌아가지 않음은 비단옷 입고 밤길 걷는 것(金衣夜行)과 같다.”는 옛말까지 끌어와 당장이라도 돌아올 듯하였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다음 날로 바쁘게 장안으로 올라간 저 사람은 쉬 돌아올 줄 몰랐다. 한 달에 한 번 천 리 길을 달려왔다가 하릇밤 묵기를 세 가을〔三秋] 쯤이나 여기고 온 길을 되짚어 장안으로 돌아가니 쓸데없이 크고 덩실하기만 한 새집은 비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옛집과 더불어 저 사람 이름만 듣고 찾아온 사람들에게 서운한 구경거리나 될 뿐, 이 언덕에 다시 버려진 고가(古家) 한 채를 더 보탠 것에 지나지 않았다.
비록 저 사람이 ‘은자(隱者)를 부르는 학두서(鶴頭書)가 산언덕에 이르니, 문득 얼굴은 흔들리고 넋은 흩어지며 뜻은 변하고 얼은 움직여, 마름잎과 연잎(蓮荷〕을 엮어 만든 옷을 찢어 불사르고, 먼지 낀 얼굴을 들어 세속의 명리를 찾아간’ 것도 아니고, 이 언덕도 ‘바람 구름은 구슬피 울분을 띠고, 돌샘은 흐느끼듯 흘러내리며, 산을 바라보매 무엇을 잃은 듯하고, 초목을 둘러보매 한풀 꺾인 듯 그 떠나감올 원방하지는 않았지만, 오래 저 사람을 기다려 온 이들에게는 적이 안타깝고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인용문은 공치규(孔稚珪)의 「복산이문(北山移文)」 에서 따옴.)
그런데 一 이제 저 사람이 돌아왔다. 숨어들 듯 돌아와 벌써 몇 달째 쓸쓸히 한가롭게 지내고 있다고 한다. 다시는 세상으로 되돌아가지 않을 사람처럼 책과 술로 시름을 끄며 고요함 속에 머물러 있다고 한다. 사백 년 세월과 쌓인 정한(情恨)만으로는 다 풀이할 수 없는 갑작스러움과 결연함으로 이 언덕에 돌아와 기대려 한다.
무엇이 그토록 오래 맴돌기만 하던 저 사람을 이리도 갑자기 불러들였을꼬. 무엇이 그토록 단단하고 오래된 저잣거리에의 얽매임과 이끌림과 매달림에서 저 사람을 이리도 선선하게 풀어주었을꼬.
사람의 마음속 깊고 깊은 못은 다 들여다볼 수 없지만, 그 마음이 겉으로 드러난 말이나 움직임은 앞과 뒤를 곰곰이 살피면 반드시 그 까닭을 풀어 알지 못할 것도 없다. 저 사람의 돌아옴도 그러하다. 깊이 모를 그 의식의 밑바닥을 속속들이 헤아려 볼 수는 없으되, 갑작스레 돌아오게 된 몇 가지 계기는 이 언덕 바깥에서 있었던 일들을 찬찬히 더듬어 짚어 낼 수 있을 듯도 싶다.
그중에서도 짚여 오는 것은 이 여름 저 사람이 세상과 주고받은 요란한 시비다. 정권을 맡은 신법당(新法黨)과 허영 많은 선의왕(選擬王, 미리견(美利堅) 사람들이 처음 대통령제를 만들 때는 ‘선거로 뽑은 왕’의 개념에 가까웠다고 한다.)이 세리(稅吏)를 시켜 이 시대의 언관(言官)들을 굴비 두름 얽듯 얽어 넣었는데, 저 사람이 그걸 참고 보아 넘기지 못한 게 그 발단이었다. 언관이라고 해서 세금을 포탈해도 된다는 법은 없지만, 그 빤한 이치를 내세우고 비위에 거슬리는 언관들을 모조리 잡아넣은 정권의 얄팍한 처사가 역겨워 “언관(言官) 없는 조정 (朝廷)을 원하나.”란 벽서(壁書)를 써 붙이자 큰 소동이 났다.
겉으로는 엄연한 나라의 징세권(徵稅權) 발동을 저 사람이 언로(言路)를 막고 언관을 억누르는 일로 본 데는 연유가 있었다. 이번에 가장 호되게 몰린 언관은 여러 해 전 지금의 선의왕이 재야에 있을 때 그를 위군자(僞君子)로 탄핵하여 크게 시비한 적이 있었고, 근래에도 집권 신법당의 정책을 그때마다 겁 없이 꼬집거나 비아냥거려 왔다. 또 북쪽 붉은 진나라〔赤秦〕의 참상을 자주 고발하여 폭살(爆殺) 위협을 받은 적도 있는데, 그 이 세(二世) 두령과의 화호(和好)를 일통 천하(一統天下) 의 묘계로만 여기고 있는 신법당 정권에게는 작지 않은 골칫거리였다. 거기다가 전부터 붉은 북쪽에 동조해 온 무리들이 이제는 집권 세력에 아부를 겸하여 ‘척(斥) 아무개 대동계(大同契) 안티 조선일보 모임’이라는 걸 만들고, 그 언관에게 법에 없는 사형(私刑)을 가해 오고 있는 중이었으니, 그를 향한 징세권(徵稅權)의 때늦으면서도 갑작스러운 발동이 어찌 공변되게 보일 수 있으랴.
하지만 저 사람의 글은 처음부터 오로지 언관들 쪽만을 편든 것은 아니었다. 집권 세력과 언관들을 마주 보고 달려오는 화차(火車)에 비유하고, 그 충돌의 위험을 먼저 일러 준 뒤에, 그래도 정히 싸워야 한다면 언관들을 편들 수밖에 없다고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집권당과 선의왕올 떠받드는 무리가 벌 떼같이 일어나 저 사람올 몽둥이질하듯 몰아세웠다. 대개는 언관도 세금은 내야 한다는 빤한 이치의 되풀이였지만, 개중에는 엉뚱한 시비도 있었다. 이를테면 율사(律士)에서 선의왕의 총신(寵臣)이 된 한 여류(女流)는 저 사람을 구법당(舊法黨) 비밀 당원으로 잘못 알고 난데없이 곡학아세(曲學阿世)로 몰아세우더니, 일이 잘 안 풀리자 술을 퍼마시고 아재비 뻘은 되는 저 사람에게 비가당자(非可當者, 가당찮은 놈)라며 마구잡이 욕설을 퍼부었다. 또 그러고도 분이 덜 풀렸는지 저 사람이 다른 데에 쓴 글을 단장취의(斷章取義)하여 터무니없는 혐
의를 덮어씌우기도 했다.
개는 저마다 주인을 위해 짖는 법 〔犬吠爲其主]이라 하지만, 함부로 짖고 물어 대면 주인과 그 식구들을 욕보이는 법. 저 사람 한때는 그 여류의 주인 격 되는 신법당과 선의왕을 엄히 나무람으로써 개 잘못 키운 죄를 물을 궁리도 해 보았다.
지난 시대 열심히 신법당을 따라다녔으나 끝내 한자리 얻지 못하고, 재야에서 이런저런 운동으로 민의(民意)를 사칭하며 불러 써줄 날만 기다리는 패거리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둘만 모여도 무슨 계(契)요, 다섯만 모여도 무슨 등장본청(等狀本廳, 운동 본부)이라 외고 다니는 것들이 다시 몇 개씩 모여 거창하게 무슨 만민 대동계(萬民大同契, 시민 연대)라는 결 꾸미고 연신 성토다, 벽서질이다 하며 저 사람을 헐뜯어 댔다. 그중에 ‘척(斥) 아무개 대동계’는 자신들이 그 언관 아무개에게 한 온갖 몹쓸 짓은 까맣게 잊고 거꾸로 저 사람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했으니, 정녕 이마에 쇠 절굿공이만 한 침을 한 대 맞아야〔頂門ㅡ鍼〕 정신이 들 무리였다.
그럴듯하게 싸 바르고 치장하는 기술만 일품인 신법당에 홀리거나, 수상쩍기 짝이 없는 봉화(烽火)와 사발통문에 턱없이 충성스러운 일부 젊은것들도 벌 떼같이 일어났다. 언제든 홍위병(紅衛兵)이 되어 거리를 내달릴 준비가 되어 있는 그들은 먼저 저 사람의 전자(電子) 사랑방에 몰려들어 과부하(過負荷)로 대들보가 내려앉을 때까지 별의별 욕설을 다 퍼부었다. 개중에는 고의적으로 남의 말을 오해하고, 그걸로 저희끼리 찧고 까불다가, 공연히 달아올라 저 사람의 책을 반품하자며 때아닌 분서갱유(焚書坑儒) 운동을 벌인 한심한 것들도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저 사람을 옳게 여기는 사람들도 많았다. 지면을 얻은 논객들은 글로 편들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민망스럽지만 상대와 똑같은 욕설로 맞받아쳤다. 저 사람도 잘 버티어, 시비 그 자체로 보아서는 이겼다 할만 했다. 어떤 전시(電視) 방송사는 저 사람의 글에 대한 찬반(贊反) 의견을 전화로 집계해 본 적이 있는데, 집권 신법당의 그 요란한 정책 홍보에도 불구하고 응답한 과반수가 저 사람을 옳게 여겼다.
하지만 이겼다고는 해도 그 요란스러운 한 달은 저 사람에게는 그대로 소모이고 피로였을 것이다. 겪어 본 사람은 무리 지어 표현되는 무분별한 악의가 얼마나 억압적이고 파괴적인지를 안다. 악한 자는 그르다 하고 착한 자만 옳다고 하는 사람이 곧 옳은 사람이라는 성인(聖人)의 말씀이 계시기는 하나, 눈을 부릅뜨고 이를 갈며 독한 소리를 내뱉는 무리를 마주해서 심지(心地) 평온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뜻 아니하게 떠말게 된 언관의 수호자 역할도 적지 아니 곤혹스러웠다. 저 사람이 지키고자 했던 것은 나라의 언로(言路)였지, 언관의 사적인 타락과 부패는 아니었다. 이전의 어떤 대담에서 저 사람은 오히려 아집과 집단 이기주의로 권력화된 언관들을 다음 시대의 식자(識者)들이 가장 힘들여 맞서야 할 새로운 종류의 거령(巨靈, 리바이어던)으로 예측한 적도 있다. 그런데도 언관의 사적인 부패와 타락을 옹호한 것으로 굳이 몰아대니 답답하고도 울적한 노릇이었다.
그 시비를 통하여 그동안 물밑으로 가라앉아 있던 이 사회의 갈등이 다시 분열의 형태로 솟구치는 걸 보는 일도 괴로웠다. 공방이 거듭되면서 정객과 정객, 언관과 언관이 나뉘어 싸우고 율사며 승려, 신부, 도사에 심지어는 환경미화원까지 이 나라 모든 집단이 패를 갈라 싸웠다. 특히 저 사람의 동료인 문사들까지도 찬반을 다투다가 정객들의 대리전(代理戰)으로 치닫는 데에 이르러서는 깊이 상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먼저 저 사람을 지치게 하고 몰러나 쉴 곳으로 이 언덕을 떠올리게 한 것은 틀림없이 이 여름의 소동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시 살피면 그것만으로는 저 사람의 돌아옴이 보여 주고 있는 저 결연함까지 다 설명하지는 못한다. 비록 그 충격과 상심이 컸다 해도 하루 아침에 모든 걸 내던지고 돌아오게 할 만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저 사람은 돌아온다, 돌아온다 하면서도 10년이 넘게 이 언덕을 기다리게 하지 않았던가.
거기다가 가만히 돌이켜 보면 이 여름의 시비는 결코 낯설고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다 기실 저 사람은 벌써 20년 가까이 이름이나 구실은 달라도 뿌리와 바탕을 같이하는 시비에 시달려 왔다.
이 나라에는 박씨 무인 정권 말기부터 지금까지 끌어 온 안팎 두 종류의 큰 시비가 있다. 안으로 제도와 문물에 관해서는 신법당과 구법당이 겨루고, 밖으로 북쪽 붉은 진(秦)나라에 대해서는 합종책(合縱策)과 연횡책(連橫策)이 다투어 왔다. 그 밖에 경장(更張)이나 혁파가 아니라 근원적인 혁명을 주장하거나, 종횡가(縱橫家)를 위장한 북의 간세(奸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시끄러운 것은 그 두 가지 다툼에 세대 차와 지역감정이 끼어들어 여러 가지 이름을 붙이고 구실을 갖춘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저 사람이 세상에 얼굴을 내민 게 불행히도 그 두 시비가 한창 불붙어 오를 때였다. 박씨 교정별감(敎定別監, 고려 무인 정권시절의 최고위직)이 막장(幕將)의 변심으로 쓰러지고, 새 무인정권이 들어서는 과정에서 오래 억눌려 왔던 불만과 욕구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 탓이었다. 비록 체육관 선거일 망정 전씨 교정별감이 선의왕(選擬王)으로 옷을 갈아입은 이상 양(洋) 공맹의 왕도(王道) 민주와 자유를 온전히 무시할 수 없었던 것도 그 시비가 공공연히 불붙을 수 있는 환경이 되었다.
저 사람 원래 그 시비에 무심하려 하였으나 잡글 몇 권 팔아 얻은 것도 이름이라고 세상이 가만히 버려두지 않았다. 동조를 구하다가 거절당한 신법당 연횡책의 무리가 먼저 저 사람을 구법당 합종파로 몰아세운 게 그 시작이었다. 뒤이은 그들의 적(敵) 개념 확대와 강화는 저 사람을 보수 반동으로 규정하더니 마침내는 난데없는 극우 왕당파에 법서사분자(法西斯分子, 파시스트)까지 덮어씌웠다.
달구어지고 두들겨 맞아 단련되는 것은 강철만이 아니다. 소수인 신법당 연횡책의 무리가 억압과 박해를 통해 단련되었듯이, 저 사람은 그들의 언어적 폭력과 악의에 단련되어 끝내는 이 땅의 동파(東坡, 사마광과 더불어 구법당을 영도한 소식)와 소진(蘇秦, 합종책의 주창자) 됨을 마다하지 않게 되었다. 여러 해 전 저 사람은 그 과정을 엮어 『보수는 어떻게 단련되는가』란 잡문집(雜文集)을 낸 적도 있다.
하지만 그 뒤 변해 온 세상을 보면 저 사람이 겪어야 했을 피로와 소모가 어떠하였을지 짐작이 간다. 특히 신법당이 끝내 정권을 잡고 연횡책을 강행해 온 이 몇 년 그 마음이 받은 상처는 얼마이고 흘린 피는 또 얼마나 될꼬. 따라서 이번의 돌아옴을 보다 깊이 있고 충실하게 풀어 볼 수 있는 실마리는 오히려 이 여름에 앞선 그 20년에서 찾아보는 게 옳을지도 모르겠다.
저 사람이 멀리서 온 광견(狂猖)의 선비를 맞이함을 보아라. 숨어 사는 이의 차림으로 나와 어눌(語訥)을 꾸미나, 그 드러내는 뜻은 소부(巢父)를 비웃고 허유(許由)를 얕본다. 세상일을 말함에 백세(百歲)를 내려 보고 왕후(王侯)를 업신여기며, 본성을 논함에는 흰 비단을 보면 묵적(墨翟)의 슬픔을 눈물짓고 갈래길에 다다라서는 양주(楊朱)의 울음을 울 줄 안다. 초연해져 인간을 나서면 노장(老莊)의 허무에 노닐고, 내처 불가(佛家)의 적멸(寂滅)에 머물러 보기도 한다.
그러다가 풍류의 정〔風情〕이 햇살처럼 퍼지고 서리 같은 기운〔霜氣〕이 가을에 빗기듯 하면, 혹은 그윽하게 숨어 사는 이〔幽人〕 오래 전에 사라졌음을 탄식하고 혹은 왕손(王孫)이 돌아오지 않음을 원망한다. 때에 나물 무쳐 흐린 술 냄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손과 함께 취해 자리에 쓰러지면 따로 침상과 이불을 찾지 않는다.
해 질 녘 저 사람이 이 언덕을 거닒을 보아라. 높은 문간채를 해진 사립처럼 나와 시절 따라 번듯해진 마을길을 벗어나니 옛 돌길이 나온다. 아무도 걷지 않아 거친 돌길을 흰 구름 어깨에 이고 걷는데, 한 그루 푸른 소나무 곁을 지남에 그림자가 둘이라 외롭지 않다. 뒷 등성 너르고 고른 금잔디 벌에 오르니 오래 비어 있던 그곳이 가득 찬 듯하고, 눈을 들어 서편 하늘을 바라보니 노을이 저 사람을 알아본 듯 아름답게 번진다.
옛 바람을 되불러 쏘이고 잃은 새소리를 돌이켜 듣다가 그마저 잊기를 저물도록 한다. 이끼 낀 바위처럼, 뿌리 삭은 나뭇등걸처럼 앉았다가 달 뜨기를 기다려서야 등성이를 내려온다. 이른 밤이슬에 옷깃 적시며 달과 더불어 휘적휘적 내려오는 저 사람 겉으로 보아서는 옛사람〔仲長統〕의 낙지(樂志)에서 멀지 않다.
그러하되 돌아와 호젓이 받는 늦은 저녁 상머리는 홀연 정회가 다르구나. 바라보는 아내의 눈길에는 장안의 정든 이들 떠나온 외로움이 한결 깊어져 있고, 곱게 잡혀 가는 이마의 주름에는 멀리 두고 온 자식들에 대한 그리움이 감추어져 더 애틋하다. 아으, 살아 있음의 비어 있고 쓸쓸함이여. 뉘라서 다 채워 주고 달래 줄 수 있으리오.
닳아 너털거리는 말로 몇 마디 아내를 다독이고 죄지은 사람처럼 사랑으로 쫓겨 나온다. 읽다 둔 책을 펴나 하마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세상 밖을 노닒이 무엇이며 성명(性命)의 한가로움을 보존함이 무엇이뇨. 책을 바꾸어 석씨(釋氏)의 공공(空空)을 엿보고 도가(道家)의 현현(玄玄)을 뒤적여도 헝클어진 심사는 쉬 가지런해지지 않는다. 마침내 책을 덮고 팔베개해 누우니 긴 휘파람〔長嘯〕 짧은 한숨이 절로 새 나온다.
저 사람의 한숨과 휘파람이여. 삼태기 진 이〔荷簧者〕의 비웃음을 산 그 경쇠 소리로구나. 아직 세상을 잊지 못했음이로다. 혹 공덕장(孔德璋, 공치규)이 꾸짖은 거짓 산사람〔隱者〕을 이제 와 다시 보는 것은 아닌가. “동로(東魯)의 달아남을 배우고 남곽(南郭)의 숨음을 익히어, 가만히 초당(草堂)의 이름을 도둑질하고 함부로 북악(北岳)의 두건을 둘러쓰고는, 이 언덕과 돌길을 속이고 소나무와 풀숲을 꾀되” 몸뚱이는 강호(江湖)에 두었으면서도 정은 멀리 저잣거리의 썩은 명리(名利)에 붙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저 사람이 끝내 그 정을 따라 이 언덕을 버리고 떠나가면 너른 금잔디 벌은 한층 쓸쓸하게 빌 것이고, 높은 노을은 다시 외로이 번져야 하리라. 저 바람 불러 주는 이 없고, 밝은 달 또한 홀로 떠야하리. 푸른 소나무는 누구와 그림자를 나란히 하며 흰 구름은 누구의 어깨에 드리우랴. 거미줄 친 문간채는 더불어 돌아올 사람 없고, 돌길은 마냥 우두커니 기다리며 잡초로 다시 거칠어지리라.
뿐이랴. 뒷날 그렇게 떠나는 날에는 남산이 조롱을 보내고, 북산이 비웃음을 날리며, 골짜기들이 다투어 놀리고, 모든 봉우리가 무섭게 꾸짖을 것이니, 저 사람이여. 광간(狂簡)의 뜻이 굳지 못하고 견개(猖介)의 얼이 맵지 못하거든 여기서 어서 그만두라. 오기를 숨어들 듯 했던 것처럼, 부끄러움으로 슬며시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라. 가서 등뼈가 휘고 머리가 세도록 다투고 우기면서 분에 넘치는 『석두기(石頭記, 홍루몽)」나 기약하라.
(2001년)
2016년 12월 6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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