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도의 봄(칼럼) | |||||
* 살러리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 봄은 남쪽바다로부터 오고 있었다. 굽이치는 파도는 흡착흡착 해안가의 겨울기운을 온몸으로 빨아들이고 물결 위로는 눈부신 봄 햇살이 부서졌다. 봄소식은 바다로부터 상륙하여 푸른 보리밭을 일렁이며 갯바람을 앞세워 논두렁 밭두렁을 따라 기지개를 펴는 색색의 들꽃 길을 지나 동그만 산등성이에서 동백꽃으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렇게 청산도의 봄은 오고 있었다. 청산도의 ‘청산(靑山)’은 하늘, 바다, 산이 모두 푸르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런 빼어난 자태 때문에 고려 때는 청산도를 일러 ‘선산(仙山)’, ‘선원(仙原)’이라도 불렀다. 어쩜 “머루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어리랏다 얄리얄리 얄라셩 얄리얄리 얄라셩”이라는 ‘가시리’도 이런 청산에서 자지러지고 싶었는지 모른다. 청록파 시인 박두진이 노래했던 이상향의 ‘청산도’ 역시 “산아, 우뚝 솟은 푸른 산아. 철철철 흐르듯 짙푸른 산아. 숱한 나무들, 무성히 무성히 우거진 산마루에 금빛 기름진 햇살은 내려오고, 둥둥 산을 넘어, 흰구름 건넌 자리 씻기는 하늘”라고 노래하고 있다. 온 산하가 푸르러서 그저 가슴 쥐어짜게 하는 이상향의 ‘청산도’였다. *서편제 촬영지 청산도의 들길을 따라 오래 전부터 청산도는 낚시꾼들의 천국으로 알려져 왔다. 그만큼 깊고 맑은 청정해역을 자랑한다. 특히 ‘감성돔의 1번지’로 통한다. 사계절 낚시가 가능하고 어느 갯바위에서나 낚싯줄을 던져 놓고 나면 바로 씨알 좋은 물고기와의 만남이 가능한 섬이다. 청산도는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울퉁불퉁 귀가 튀어 나온 소라를 닮았다. 그 모양새만큼이나 유난히 섬모롱이와 물 속에 잠긴 바위인 ‘여’가 많고 어장이 풍부한 곳이다. 바위에서 바닷물을 바라보노라면 망망대해를 향한 바다 빛깔이 아주 독특한 색깔을 우려내고 있다. 사색의 공간으로서 푹 빠져 들게 만드는 에머말드빛이다. 고대 로마 보석 연마공들은 이 빛깔이 마음을 평온하게 하고 눈의 피로를 덜어준다 하여 에머랄드 보석을 앞에 두고 일을 했다고 하지 않던가. 그 짙푸른 신록의 결정체가 마치 햇살에 부딪쳐 부서지는 이슬방울처럼 바다에서 반짝인다. 참으로 환상적인 청정해역의 풍경이다. 이런 바다가 일반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최근의 일이다. 영화 서편제 때문이었다. 서편제의 압권이던 그 장면, 진도아리랑을 불러제끼던 그 언덕배기가 바로 청산도 들판이다. 등짐 울러 멘 아버지(김명곤)가 돌담길에 싸여 있는 황톳길을 내려오며 아리랑을 선창하자 딸(오정해)이 이에 화답하고 아들(김규철)이 북채를 힘 있게 두들기며 서러움의 절창을 연출해 관객의 가슴을 쥐어짜게 만들었다. 영화 속에서는 멀리 산자락을 비추다가 다시 푸른 들판을 클로즈업하며 앵글을 맞춘다. 그 화면에 세 가족들이 들어서고 마침내 애잔한 서편제 가락이 깔리며 척박한 황톳길에서 끈끈하게 살아오던 남도인의 구슬픈 정서를 솟구치게 한다. 그렇게 한없이 가락을 퍼 올리고 나면 이내 그 가락은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했다. * 들판에서 만난 칠순의 농부 청산도는 해적과 외침이 잦았던 곳이다. 이순신 장군이 전략요충지로서 진을 설치했던 곳이기도 하다. 이런 역사의 굽이를 타고 오늘에 이르는 청산도는 푸른 들판과 푸른 산자락이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면서 산과 들 그리고 하늘이 서로 닮아 사는 사람들 또한 강인하고 정서적으로 풍부한 구석이 있다. 봄이 오는 길목에서 열심히 씨를 뿌리는 아낙을 만났다. 그이는 청산도에서 태어나 열아홉에 시집왔다고 했다. 이름은 양생김씨(71). 서편제 촬영 장소의 밭주인이기도 했는데, 8남매를 키워 모두 출가시키고 막둥이가 부천에서 단칸방에서 조금 어렵게 살고 있어 여태 눈에 밟힌다고 털어놨다. 홀로 논 5마지기, 밭 10마지기를 일구며 청산도에 살고 있단다. 바다와 논밭을 오고가면서 생계를 이어갔는데 7년 전 남편이 먼저 이승을 떠나면서 바다 농사를 그만두고 논밭 일에만 매달린다고 했다. 마침 사위가 같은 동네에서 살고 있어 힘든 일은 이따금 찾아와 도와준단다. 세상 살다보니 인생은 잡초를 뽑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는 그이. 설득력 있는 표현이었다. 인생은 잡초를 뽑으면서 성숙해 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버리고 비우는 일 말이다. 열정과 욕망이 다르듯이 포기와 버리는 일은 다르다. 집중하는 삶은 신념의 또 다른 표현이다. 욕망은 버리고 비우는 일보다 자기 자신만을 위해 채워가는 일이다. 포기는 절망이지만 버리는 일은 더 의미 있는 삶을 위해 우선의 자기의 결점과 눈 앞의 이기주의를 버리는 일이다. 칠순의 농부는 그런 속내를 짧게 표현했을 터이다. 중부 이남으로는 아직 눈발이 날리고 있었는데 이곳은 이미 봄이 당도해 한해 농사가 시작되고 있었다. * 육지가 그립던 그 시절, 목선에 의지해 오고가던 섬 생활 청산도 이름값이라도 하듯이 유난히 보리밭이 많아 산자락을 타고 내린 벌판은 푸르렀다. 그 옛날에는 먹고 살기 위해 황부지 산을 개간했다고 한다. 일명 화전농이다. 오로지 땅을 일구는 일에 매달렸다고 한다. 시집 와서 뭍에 있는 사람들은 상상 속에서만 그려질 정도로 교류 또한 드물었다. 뭍으로 나가는 배편이 막히었으니 그도 그럴 것이었다. 교육자였던 필자의 부친도 이곳 청산도 분교에서 근무하던 시절이 있었다. 근 25년 전의 일이다. 외딴 섬 청산도는 목포를 거쳐 완도로 가던 배가 일주일에 한 차례 거쳐 가던 섬이었다. 이 항로에서 고래 떼를 만나기도 했다는 그런 시절이었다. 이 외딴 섬들을 47년째 운행 중이라는 이정남 철부선 선장은 “당시에는 기상특보나 기상예보도 없었고 낡은 목선을 타고 그저 바다에 운명을 맡긴 채로 운항했다”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새벽에 완도항을 출발해 오로지 감으로 파도를 헤쳐 모도, 소안도, 청산도, 넙도 등 외딴 섬들을 모두 거치고 나면 11시간 만인 밤에 목포에 당도했다”는 것. 또한 “하루에 한척의 목선이 육지로 나가는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던 탓에 섬을 다 거쳐야 했고 섬사람들은 가능한 많은 보따리를 들고 승선해 76톤짜리 여객선 정원은 80명을 훌쩍 넘겨 200명 정도가 타고나면 배 하중에 무리가 따라 흔들리며 목숨 건 항해를 반복해야 했다”고 전했다. 지금은 완도항에서 45분 만에 닿는 뱃길 20km 해상에 떠 있는 섬 청산도. 세월과 함께 주민들의 생활도 많이 변했다. 썰물이면 바다에 나가 조개를 캐고 낙지를 잡아 팔 수 있으며 밀물 때는 밭과 논일을 하며 농사와 바다 농사를 겸한다. 그 덕에 입에 풀칠하던 시대를 잊을 수 있어 다행이란다. 칠순의 아낙은 낙천주의적 성격 탓인지 미소가 아름다워 보였다. 다행이었다. 요즈음 저마다 힘들다고 아우성인데 밝은 표정을 만날 수 있는 일 자체만으로 행복했다. 물론 쓰디쓴 세월일랑 서편제 가락으로 녹이면서 부서지는 파도 같은 삶을 살아왔을 터이지만 말이다. * 방파제 등대에 어리는 그 시절 섬사람들의 애환 어쨌든 푸른 보리밭에서 만난 봄 햇살이 아낙의 주름살에 봄바람과 함께 스쳐 지났고 보리밭길에는 곰부레라는 들꽃이 밭두렁의 겨드랑이를 간질이며 겨울을 뚫고 연분홍 꽃을 피우고 있었다. 이 마을 사람들은 곰부레 들꽃이 많이 피면 풍년이 온다고 믿었고 병아리를 키우면서 설사를 할 경우 이를 삶아서 먹이면 멎는다고 했다. 갑자기 김을 매는 아낙의 위로 꿩 한 마리가 파~다~닥 나래를 털며 허공으로 날아갔다. 그 언덕배기에서 내려다본 청산도 앞바다는 한 폭의 수채화였다. 청산도 관문 도청항 등대 주위로 어선들이 똑딱이고 있었다. 어선을 따라 갈매기 떼들도 동행했다. 등대 주위로는 각종 양식장임을 일러주는 색색의 부표와 깃발이 나부꼈다. 이 방파제 등대는 청산도 사람들의 삶의 등불이다. 특히 1960년대에는 어업전진기지로서, 그리고 70년대에는 해마다 고등어와 삼치 파시가 열리던 황금어장의 상징이었다. 그 시절 물량에 비할 수는 없지만 지금도 철따라 멸치, 갈치어장이 형성되고, 바다를 이용한 공동양식장에서 소라, 전복, 미역 등 해산물을 채취한다. 그런 어부들이 만선의 깃발을 휘날리며 돌아오는 곳, 거센 비바람이 불면 정박의 닺을 내리던 삶의 기항지이다. 지금도 항구에는 위판장 건물이 있고 이들 어선에서 바로 구입해 파는 활어 횟집과 어부들과 나그네들이 잠시 쉬었다 가는 다방이 바다로 창을 내고 아담하게 자라잡고 있다. 다방에 들어서자 아가씨가 잠옷 바람에 나와 나그네 일행을 맞을 정도로 오고 가는 사람들을 경계하지 않고 따뜻하고 아름다운 시선이 도드라져 청산도 사람들의 정서를 엿볼 수 있었다. 어느 다방을 가나 동양화 몇 점과 풍란 몇 그루, 수석 몇 점을 기본 장식품으로 내 놓고 있을 정도로 남도인의 예술적인 정서도 읽어낼 수 있었다. * 봄을 준비하는 어미 소와 들판의 기지개 항구에서 언덕배기를 따라 오르다보면 읍리에 고인돌이 있다. 청동기 시대 유물로 60년대 중반 이곳에서 석검이 발견되기도 했다. 바닷가 쪽으로 조금 더 나가면 당리인데 음력 정월 초사흘에는 마을의 안녕과 만선의 꿈을 비는 풍어제를 올리는 마을이다. 다시 잘 닦인 도로를 따라 달리자 풀 먹이는 암소 한 마리가 눈을 크게 뜨고 나그네를 쳐다보았다. 긴 겨울을 그렇게 외양간에서 자란 어미 소는 이제 저 푸른 밭을 갈게 될 것이다. 그렇게 농부는 뿌린 대로 거들 것이다. 그림으로 그려놓은 듯 꼬불꼬불 들길이 유난히 많은 벌판. 저 어미 소가 갈았을 들녘. 언덕 아래는 돌담길이 이어졌다. 바람이 많은 섬마을인지라 집집마다 거의 돌담을 쌓고 있었다. 담쟁이 넝쿨이 돌담을 꽉 동여매고 있었다. 모든 것이 조화이며 서로 어깨동무하며 삶을 지탱하고 있다. 그 아래로 고양이가 한적한 골목길을 걷고 있었다. 서편제 촬영장소에서 내려다본 마을은 길을 따라 울긋불긋 이국적인 지붕의 모습을 하고 있고 마을 포구는 그림으로 그려놓은 듯 동그란 호수를 닮았다. 살아있는 영화의 한 장면으로 다가섰다. 그렇게 청산도의 봄은 오고 있었다. ● 청산도로 가는 길 1.대중교통 · 서울 강남터미널→완도행 고속버스(1일 4회 운행. 5시간 30분 소요) · 서울 강남고속버스터미널→광주행 고속버스(10분 단위 운행. 3시간30분 소요)→광주 종합터미널에서 완도행 직행버스(10분 단위 운행. 1시간 30분 소요) · 부산 버스터미널→완도행 고속버스(1일 7회 운행. 6시간 소요) 2. 승용차 · 서울→서해안고속도로(목포. 5시간 소요)→(해남 또는 강진방면)→완도(1시간 30분 소요) · 서울→천안(공주·논산고속도로)→호남고속도로(광주톨게이트 지나 비아I.C 5시간 소요)→나주→(해남 또는 강진)→완도(1시간 30분 소요) 3. 배편 · 완도여객선터미널→청산도(4회 운행. 45분 소요) 4. 자세한 문의 서울고속버스터미널(02-535-4151)/광주고속버스터미널(062-360-8114) 완도군청 문화관광과(061-554-3708)/항만터미널(061-552-0116) 청산면사무소(061-550-5608)/청산농협(061-552-93889) 글·사진: 박상건(시인. 농림부 공보자문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