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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과 제자
나디아 블랑제와 피아졸라
[클랙식 음악 이야기]"음악 창조하려면 배웠던 법칙 잊어야"
“탱고는 발보다 귀를 위한 음악이다.” (피아졸라)
“음악을 공부하려면 법칙을 배워야 한다. 그러나 음악을 창조하려면 그 법칙을 몽땅 잊어야 한다.” (블랑제)
1953년 32세의 음악 만학도 피아졸라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심포니 콩쿠르에서 입상했다. 이 일을 계기로 다음 해 프랑스 정부 장학금을 받아 자신이 작곡한 모든 작품을 가지고 클래식 작곡가가 되기 위해 파리로 떠난다.
그리고 자신이 심혈을 가지고 썼던 자신의 작품들을 스승에게 내놓는다. 그런데 스승에게서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듣게 된다.
“…이 부분은 스트라빈스키 같고 이 부분은 바르톡, 그리고 여기는 라벨 같다. 그러나 피아졸라는 보이지 않는다.”
“다른 작곡가를 따라 해서는 너 자신의 것이 없다. 네가 가장 너답게 할 수 있는 음악을 해야 한다.“
스승은 피아졸라의 작품들이 유명 작곡가들을 모방했다고 일축한다. 그러니까 “표절”과 유사하며 자신만의 빛깔 혹은 색깔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었다. 실의에 빠진 피아졸라는 반노네온(Bandoneón: 아르헨티나에서 탱고에 사용하는 손풍금)을 연주하며 마음을 달랬다. 우연히 제자의 연주를 들은 스승은 “네가 클래식 곡을 잘 쓰긴 하지만 진정한 피아졸라는 탱고에 있으니 절대 버리지 말라”고 했다.
탱고 애호가였던 피아졸라의 아버지 덕에 그는 어릴 때부터 탱고를 자연히 접할 기회를 가졌다. 러시아 작곡가, 피아니스트, 지휘자 라흐마니노프(Sergei Rachmaninoff, 1873-1943) 의 수제자였던 헝가리 출신의 세계적 피아니스트 벨라 윌다(Bela Wilda)를 만나 클래식 음악에 입문하여 바흐의 음악에 매료되었고 당시 뉴욕에서 예술로서 승화하기 시작했던 다양한 재즈 음악도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어린 시절 경험한 클래식 음악과 재즈 음악 그리고 탱고 음악은 그가 훗날 위대한 작곡가가 되기 위한 중요한 자양분이 된다.
이제 피아졸라는 그의 음악 인생의 기로에 섰다. 그는 탱고를 클럽에서 연주되는 곡이 아닌 클래식이나 재즈처럼 독립된 하나의 예술 장르로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바로 “음악으로서의 탱고”였다.(원래 조국의 탱고는 부에노스아이레스 항구에서 1870년경 부두 노동자들이 외로움을 달래기 위한 남자들끼리 추던 구슬프고 애절한 가락의 춤곡이었다고 한다.)
그는 그 때부터 탱고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자신이 연마해 온 클래식의 바탕 위에 아르헨티나 탱고를 입혔다. “스타일이 없으면, 음악은 없다.”라는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만들어 낸 것이 곧 ‘누에보 탱고'(Nuevo Tango)(춤을 위한 탱고가 아닌 듣기 위한 탱고)이다.
이는 아르헨티나 탱고의 뿌리에 클래식 특히 그가 존경했던 스트라빈스키와 바르톡의 음악과 미국 재즈의 접목을 시도하여 5가지 악기(피아노, 반도네온, 바이올린, 베이스, 기타)로 연주된다. 보수적인 아르헨티나가 이를 반길 리가 없었다. 전통적인 탱고를 오염시키고 있다는 비난이 거세어지자 피아졸라는 다른 나라에서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자신의 탱고를 만 천하에 알리는 전화위복의 기회였다. 아르헨티나를 제외한 모든 나라에서는 그의 신선하고 참신한 리듬과 선율에 매료되었다.
탱고를 너무나 사랑했고 자신에게 탱고를 물려주었던 아버지가 사망하자 피아졸라는 <아디오스 노니노, Adios Nonino> (“안녕 할아버지.”) (여기서 “노니노”는 피아졸라 아들의 입을 빌려 할아버지를 부르던 호칭이었다.)를 발표하게 되고 그 후 새로운 작품 <리베르 탱고> (Libertango)(1974)와 <탱고 제로아워> (Tango Jero Hour) (1986)를 세상에 내놓는다.
피아졸라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 프랑스인 스승과 공부하면서 “이전에 습득한 내가 알거나 공부한 것이 하나도 없었던 것처럼 느껴졌으며 10년 간 자신이 작곡한 모든 음악을 2초 만에 버렸다고 고백했다. 오랜 시간동안 애지중지하게 자신의 분신처럼 사랑했을 작품들을 하루아침에 버리고 새로운 작품을 쓸 결심을 했던 피아졸라도 대단하지만 그에게 새로운 독립된 장르로서의 제자의 재능을 발견하고 그만이 만들 수 있는 탱고를 발견한 스승조차도 대단하다. 그녀의 이름인즉 여제 ‘나디아 블랑제’이다.
피아졸라의 스승인 블랑제는 어려서부터 소방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리면 그 소리를 피아노로 표현할 정도로 모든 소리의 음계를 섬세히 구별하는 예민한 귀를 지녔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작곡가로, 지휘자로 명성을 얻었다. 런던 로열 교향악단, 뉴욕 교향악단, 보스턴 교향악단에서 최초의 여성지휘자로 활약을 했다.
그녀는 동료였던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을 극찬했으며, 그의 실내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인 <덤바턴 오크스(Dumbarton Oaks)를 위한 협주곡>을 1938년 워싱턴에서 초연했다. 또한 루마니아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디누 리파티(Dinu Lapatti, 1917-1950)와 함께 브람스의 <사랑의 노래>를 듀엣으로 연주했다.
나디아 블랑제 1925년(위키피디아)
지휘자로서 연주자로서 나디아 불랑제가 20세기 음악사에 가장 두드러지게 기여한 것은 무엇보다 교육자로서의 역할이다. 1920년 프랑스 에콜 노르말에서 화성학을 가르친 것을 시작으로, 퐁텐블로(Fountainebleau)의 미국 음악원과 몇몇 다른 음악학교에서 그녀의 가르침은 60대까지 계속됐다. 선생으로서 불랑제는 각 제자들에게는 그들에게 맞는 스타일과 개성을 추구하도록 부추겼다.
“선생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제자가 여러 도구들을 자유자재로 만질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거예요. 제자가 그 도구로 무엇을 하건, 선생은 그 부분에 대해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요. 제자에게 발명의 힘을 줄 수도 없고, 또 제자가 지닌 발명 능력을 빼앗을 수도 없습니다. 다만 제자에게 읽고, 듣고, 보고, 이해할 자유를 줄 수 있을 뿐이죠.”
블랑제는 미국의 조지 거쉰에게 2등의 블랑제가 되지 말고, 1등의 거쉰이 되라고 충고해 그를 세계적 음악가로 만드는 데 도움을 준 사람이다. 1920년대 코플런드(Aaron Copland, 1900-1990)가 블랑제의 첫 미국인 제자가 될 때만 해도 이민자들로 구성된 미국에서는 자국 음악의 정체성이 극히 희박했었다. 이 시기에 유학 온 코플런드에게 스승은 ‘진지하고 두려움이 없을 것’과 ‘자기 자신을 찾을 것’을 강조했다고 한다.
레너드 번스타인(Leonard Bernstein,1918-1990), 아론 코플런드(Aaron Copland,1900-1990, 미국작곡가), 조지 거쉰(George Gershwin,1898-1937), 엘리엇 카터(Elliot Carter, 1908-2012,미국작곡가), 버질 톰슨(Virgil Thompson, 1896-1989, 오페라 작곡가), 필립 글래스(Philip Glass, 1937- ), 월터 피스턴(Walter Piston, 1894-1989, 미국작곡가), 다니엘 바렌보임(Daniel Barenboim, 1942- , 아르헨티나 피아니스트, 지휘자), 퀸시 존스(Quincy Johns, 1933- , 프로듀서, 재즈 뮤지션), 예후디 메뉴인(Jehudi Menuhin,1916-1999, 영국 바이올리니스트, 지휘자), 프랑시스 풀랑크(Francis Poulenc,1899-1963, 프랑스작곡가, 피아니스트), 디누 리파티(Dinu Lapatti, 1917-1950, 루마니아 피아니스트, 작곡가), 머리 페라이어(Murray Perahia, 1947- 미국피아니스트, 지휘자), 피에르 쉐퍼(Pierre Schaffer, 1910-1995, 프랑스 작곡가, 이론가), 존 엘리엇 가드너(John Eliot Gardner, 1943- 영국지휘자, 고음악의 대가), 이고르 마르케비치(Igor Markevitch,1912-1983,우크라이나 작곡가, 지휘자), 레녹스 버클리(Lennox Berkeley,1903-1989, 영국작곡가), 마르크 블리츠슈타인(Marc Blitzstein, 1905-1964, 미국작곡가, 서정시인, 대본가), 데이비드 다이아몬드(David Diamond,1915-2005, 미국작곡가), 장 프랑세(Jean Francaix, 1912-1997, 프랑스 작곡가, 피아니스트), 로이 해리스(Roy Harris,1898-1979, 미국작곡가), 더글라스 무어(Douglas Moore,1895-1969, 미국작곡가, 교육자, 저자), 해럴드 샤페로(Harold Shapero,1920-2013, 미국 작곡가), 다리우스 미요(Darius Mihlaud,1892-1974, 프랑스 작곡가, 교육자), 헨리크 셰링 (Henryk Szeryng, 1918-1988, 폴란드 태생 바이올리니스트), 제러미 메뉴인(Jeremy Menuhin, 1951- , 영국 피아니스트), 이딜 비레트(Idil Biret, 1941- , 터키 피아니스트), 위그 퀴에노(Hughes Cuéno,1902-2010, 스위스 테너 가수, 오페라, 오페레타), 지그문트 미치엘스키(Zygmunt Mycielski, 1907-1987 폴란드 작곡가, 비평가)
이 수백여 명의 위대한 현대 음악가들을 길러낸 ‘스승’ 또한 나디아 불랑제이다. 그의 제자들은 세계 각지(터키, 우크라이나, 루마니아, 프랑스, 스위스, 폴란드, 미국, 영국 등지)에서 몰려온 재능 있는 음악가들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들을 클래식에서 대중음악까지 다양한 음악 분야의 창의적인 예술가들(작곡가, 피아니스트, 바이올리니스트, 프로듀서, 지휘자, 비평가, 교육자, 대본가, 가수, 재즈 뮤지션 등)로 키워냈다.
그러나 사실 블랑제는 20세기 음악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그들은 모두 언젠가 모차르트로 되돌아갈 것”이라고 믿었다. 그녀는 특히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Claudio Monteverdi, 1567-1643)의 마드리갈과 하인리히 슈츠(Heinrich Schütz, 1585-1672, 독일 작곡가, 오르가니스트)의 잘 연주되지 않는 작품들을 즐겨 다루었으며, 샤르팡티에(Marc-Antoine Charpentier, 1643-1704) 음악을 녹음하여 프랑스의 초기 음악을 진흥하는 데도 앞장섰다.
또한 장 필립 라모(Jean-Philippe Rameau, 1683-1764 프랑스 작곡가, 이론가)의 오페라를 지휘 녹음하기도 했다. 라모의 화성이론은 오늘날 서양 조성음악의 기본 틀을 이루는 중요한 이론이다.
이렇듯 나디아 블랑제는 수많은 음악가들의 개성과 재능을 발견하는데 특별한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다양성이 공존하는 포스트모더니즘시대에 서유럽의 클래식은 물론 재즈, 팝뮤직, 월드 뮤직까지 섭렵한 후 자신만의 색깔을 각 제자들에게서 찾아내는 혜안이 있었던 것이다.
한편 그녀의 음악철학에는 다시 고전으로 돌아가리라는 예언 아닌 예언을 했다. 즉 현대 음악의 기저에는 고전이 있고 그 이전에는 바로크와 르네상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러한 흐름을 알지 못하면 미래의 음악을 창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장르, 모든 역사, 모든 양식과 스타일을 소화해야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불랑제는 학생들에게 독보법과 화성법 등의 기초를 철저하게 지도했으며 수업 중에도 절대로 ‘틀렸다’라는 말을 하지 않았고 학생이 스스로 깨달을 때까지 참고 기다려주었다고 한다.
“음악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법칙을 배워야만 합니다. 그러나 음악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그 법칙을 몽땅 잊어야 하지요.”
평생 독신으로 살며 모든 열정을 교육에 쏟아 부었던 나디아 블랑제. ‘원칙’과 ‘변화'(생성)을 동시에 추구한 이 ‘20세기 음악의 대모’는 1979년 10월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의 음악은 제자들을 통해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필립 글래스, 다니엘 바렌보임, 머리 페라이어…, 특히 제러미 메뉴인과 그의 아버지 예후디 메뉴인은 2대에 걸친 블랑제의 제자들이다.
월드뮤직계에도 ‘엄마 말 안 들어’ 성공한 스토리가 넘쳐난다.
세상 눈치 안 보고 제 안의 질문과 답만으로 길을 찾고 행복한 음악가가 된 극적 드라마 말이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이가 아르헨티나의 탱고 거장 아스토르 피아졸라(Astor Piazzola 1921-1992).
생전의 피아졸라는 자신이 ‘지킬 박사와 하이드처럼 탱고와 심포니 둘을 오갔던 존재’라고 한적이 있다. 술집 음악이었던 탱고를 클래식 반열로 끌어올리기까지 한 음악가의 전쟁사(戰爭史)를 드러낸 말이지만 유럽 유학 시기의 지독했던 혼란과 갈등 시기를 떠올리게도 한다. 과거 우리가 음악인을 딴따라라며 무시했듯 아르헨티나에서도 탱고를 즐기는 이를 천민 취급하던 시기가 있었다.
1880년대, 유럽의 이민자들이 몰려든 신대륙이었던 아르헨티나의 항구도시 보카(BOCA).
가난한 이민자들이 고독을 달래기 위해 가던 싸구려 술집, 그들에 기댄 사창가에서 악보도 없이 만들어진 길거리 음악이 탱고의 시작이었다. 여자 파트너를 구할 수 없어 남자들끼리 부둥켜 안고 춤출 때, 깨진 술병에서 흘린 술처럼 나오던 음악이었다.
빈민가에서 태어나 탱고의 리듬을 몸에 감으며 성장했던 피아졸라.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이민 간 부모는 그의 음악 재능을 알아보고 클래식을 접하게 한다.
작곡 콩쿠르에서 1등을 거머쥔 피아졸라는 프랑스 유학 기회를 얻어 스승 나디아 블랑제와 운명적으로 만난다. 나디아 블랑제는 조지 거슈인, 레너드 번스타인, 다니엘 바렌보임 등 걸출한 음악가를 이끈 위대한 음악 교육자. 고국에서는 유망주였으나 유럽 각국에서 온 천재들 사이에서 열등감에 시달리던 피아졸라. 그의 작곡 숙제를 본 스승의 질책은 더 기를 죽였다.
‘이게 뭐야? 이 부분은 스트라빈스키, 여기는 바르토크, 여기는 라벨, 도대체 피아졸라는 어디 있는 거야?’
다 포기하고 돌아가야겠다 생각한 피아졸라가 막가는 심정으로 피아노를 퉁탕댄 것이 탱고선율이었고 이 소리가 스승의 귀에 닿는다.
‘어떤 음악인가’ 묻는 스승의 질문에 피아졸라는 또 한 번의 질책을 예상하며 답한다.
‘고국에 있을 때 생계 때문에 나이트 클럽에서 연주하던 탱고’라고.
스승 나디아 블랑제가 소리친다.
‘그게 바로 너야! 탱고가 바로 너야! 그걸 해!’
길거리 싸구려 음악 탱고가 세계인의 월드뮤직으로 탄생하게 될 것을 예고하는 순간이었다.
첫댓글 탱고에 관한 자세한 글
감사드림니다 ~
오랫만에 여인의 향기의 리베르탱고를 들으며 감상에 젖네요~~
음악이든 , 미술이든 어느 경지에 오르면
예술적 재능이나 사람에 대한 평가를 할수 있는 직관이 생기나 봅니다
도를 깨친 사람이 제자의 공부를 가름해주는 불교 수행의 한과정처럼 ,
모든 분야가 정확하게 가치의 평가를 해줍니다. 우연한 천재는 없는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