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데살로니가전서 강해(8) 2021. 07.04
오직 깨어서 근신할지라
지난 시간에는- 우리의 소망인 부활과 휴거에 대해서 살펴보았는데, 오늘은 그 소망 가운데서 오직 깨어서 근신하라는 말씀을 더 하고 있음을 봅니다. 이는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진 자라면- 당연히 이 소망으로 위로를 받는 것만이 아니라- 깨어서 근신할 것을 말씀해 줍니다. 그러니까, 이 서신이 만일 4장으로 끝나서- 오늘 살펴볼 5장 1-11절의 말씀이 없었다면, 아마 많은 이들이 믿는 자로써 부활과 휴거에 대한 진리의 지식을 가지고도- 성령으로 영생을 취하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소홀히 할 수도 있었을 것으로 봅니다.
5장 1~3절을 보시면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주의 날이 밤에 도둑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때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
바로 앞에서 바울은 주님의 재림이 확실하므로- 이것으로 서로 위로하라고- 주의 재림의 확실성을 제시해 주었다면, 여기 5장에서는 그 시기의 불확실성을 말씀하면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언제인지 아무도 모른다는 겁니다. 주님 자신도 언제 오실지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2절에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에- 그러므로 ‘깨어 있어야 한다’라고 경각심을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의 날의 성격이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는 마지막 시점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결산하는 그리스도의 심판대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13절에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했고,
고린도후서 5장 10절에는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말씀하셨으며,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4:8)라고 말씀했습니다. 이는 주의 날에 성도들이 자신들의 삶을 어떻게 살았는지를 결산하는 성격을 띠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임한다고 말씀하신 것은- 도적은 예상하지 못한 시기에 비밀스럽게 갑자기온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이는 우리가 주의 날이 언제 임할는지 아무도 모르기때문에- 늘 깨어서 그날을충실히 준비함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이제 3절을 보시면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그때,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하신 말씀을 보면
3절은- 4절과 대조를 이룬 구절입니다. 여기서 ‘저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는 불신 세계의 사람들을 지칭한다고 봅니다만, 의외로 어떤신자는 세상 사람들과 별로 다르지 않기때문에 ‘저희’를 불신자로만보지 않고 주의 날을 기다리지 않고 사는 사람들로 보는 게 좋습니다.
주님은 마지막 때의 모습을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그때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한 사람은 버려둠을당할 것이요”(마24:37-40)라고 하신 말씀을 보면, 마지막 날이 가깝게 되면 믿는 그리스도인들도 세상일에 골몰하다 보면, 주님이 언제 오시는지 감각이 무뎌져서- 밭(일터)에서 한 사람은 데려가고(휴거 되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라고 경고하신 말씀대로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유념하셔야 합니다.
여기서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때,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 하셨는데,
이 말은- 실제로 마지막 날에 있게 될 이야기로 보는 분들도 많습니다. 종말론에 관한 강의를 들어보면, 주님 강림하시기 직전에 온 세상이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하나가 되어- 세계 정부가 세워지면서 잠시 전 세계에 전쟁이 없는- 평화 시대가 온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평화가 얼마 가지 못하고 깨어지면서- 온 세상에 임하는 대 환난 시대로 접어든다고 말씀하는데- 그때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라고 말할 때에 홀연히 임신한 여자가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닥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주의 날을 생각하지 않고 그저 안일 무사하게 방심하여 살아간다면, 갑작스럽게 그날이 닥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멸망은 신자들에게 약속한 구원과 대조를 이루는 반의어로 보시면 됩니다. 그러니까 노아의 시대에 방주에 들어가 구원을 얻은 노아의 식구들과 방주 밖에서 아무런 준비도 없이 홍수심판을 맞이한 사람의 멸망을 생각하면 그 의미가 명백해질 것입니다.
이제 4절과5절을 보겠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날이 도둑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여기서 ‘형제들아’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과 대조를 이룸으로써 어둠에 있지 않고 빛의 아들이요 낯의 아들임을 강조해 줍니다. 여기서 ‘어둠’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영적으로 무지한 자를 지칭하므로- 임박한 심판 곧, 환란이 닥친 것을 알지 못하고 아무런 대비를 하지 않은 채, 파멸하는 자들을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구주와주님으로 믿는 형제들은- (P18) 골로새서 1장 13, 14절 말씀대로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라고 말씀해 줍니다. 여기서 옮겨졌다는 것은 신분의 변화가 일어났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어둠의 자녀가 아니고 빛의 아들이고 낯의 아들이 되었으므로 죄가 더 이상 그를 지배할 수 없습니다. 이는 한 마디로- 빛의 아들이고 낯의 아들이기 때문에- 성도의 기업을 누릴 수 있는 거룩한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낯의 아들로서 주의 날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알기 때문에, 어둠에 있는 자처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환란 전에 휴거 되기를 갈망하는 자들은- 당연히- 깨어 주의 날을 준비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이제 6~8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라고 말씀해 줍니다.
그렇습니다. 낮의 아들이므로 ‘자지 말고 깨어 정신을 차리라’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자지 말고’라고 한 것은- 잠에 취한 상태로 있지 말라는 뜻입니다. 7절에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는 밤에 취하되”라고 한 걸 보시면 취한다는 것은 정신없이 마비 상태에 들어간 것을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는 말은 단지 잠자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먹고사는 문제로마음이분주하거나 생활의 염려로 영적 감각이 무디어지지 않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영적으로 깨어서 사는 것이 우선순위에 밀리거나- 도덕적으로도 나태하지 않도록 말씀과 성령으로 살 것을 촉구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21장 34절에서도 주님은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라고 경고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깨어서 근신하라는 말씀은 8절 말씀과 연결됩니다.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라고 권고해 줍니다. 여기서 깨어 근신하라는 말은 우리가 영적인 전쟁 상태에 있음을 알려줍니다. 흉배와 투구는 전쟁 시 입고 쓰는 장비들입니다.
흉배는 가슴을 보호해 주는 것으로- 우리의 마음과 영을 지켜주는 것입니다. 특히 믿음과 사랑의 흉배라고 말씀한 것은- 우리의 믿음과 사랑이 하나님의 의로움으로 지켜진다는 겁니다.
에베소서 6장 14절에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라고- 우리의 마음과 영은 하나님의 의로움에서 나오는 믿음과 사랑으로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투구는 머리를 보호하는 것으로써- 구원의 소망의 투구라고 말씀한 것을 보면, 우리 구원의 소망을 지켜주는 것은 우리의 생각이 진리의 지식으로 무장되어 있어야만- 우리가 구원의 소망을 잃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해 줍니다. 이렇게,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우리가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고서 영적 전쟁을 잘 감당하는 것이 곧 깨어 근신하는 모습입니다.
그렇습니다,믿음과사랑과 소망은 데살로니가전서 1장 3절에서 말씀한 바대로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세 가지 중요한 요소입니다. 영적으로 깨어 근신하는 삶은 바로 이 세 가지 요소가 삶에 잘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9절을 보시면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심이라” 하셨는데- (P29) 여기서 말씀하는 구원은 우리가 복음을 처음 듣고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사함을 받아 영원한 형벌로부터 구원을 얻은 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구원은 3절에서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때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 하신 이 말씀과 연관된 구원입니다. 그러니까 이 구원은 죄 사함을 받고 영원한 형벌로부터의 구원이 아닌 지난주에 말씀했던- 주 예수님의 다시 오시는 그날에 우리 몸의 구속이 이뤄짐으로써- 우리가 영광의 몸으로 변화되는 부활과 휴거와 연관된 소망의 구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자들이 받게 되는 영원한 멸망은 이미 구원 얻은 성도들에게는 영원히 안전합니다. 이 구원은 결코 잃어버릴 수 없는 구원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씀하는, 주님 다시 오실 때 받는 멸망으로부터의 구원은 그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곧 몸의 구속이 이뤄짐으로써 우리가 영광의 몸으로 변화되는 영화로운 구원입니다.
로마서 8장 21~25절을 보시면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하신 이 말씀을 보면
이 구원은 옛 창조의 썩어짐의 종노릇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아담의 타락으로 죄가 이 세상에 들어왔고, 그 죄로 인해 모든 피조물이 사망의 권세 아래 놓여 썩어짐에 종노릇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육체의 몸도 날로 늙어가며 죽음에 다가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 예수께서 다시 오셔서 우리가 휴거 될 때, 우리는 옛 창조의 썩어짐에서 벗어나는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지금은 주님이 오시기 전이므로 썩어짐의 종노릇 하는 것에서 아직은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이 싸움은 진행 중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 하고 우리의 몸은 이것들을 원합니다.
로마서 8장 13절에서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 하시며 우리로 이 싸움을 멈추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이 싸움은 주님 오시는 그날 끝이 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6절에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하셨고 이어지는 51~52절을 보시면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하신 것입니다. 이와같이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우리가 썩지 않음을 입고 다시 살아나는사망을 이기는 구원입니다. 그래서 8절에서 구원의 소망으로 말씀하셨고, 9절에서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구원되는 것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8절에 의하면, 우리의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지키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의의 흉배와 구원의 소망의 투구가 필요하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우리가 거룩한 교회 생활의 기본구조인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 계속 유지되어 깨어 근신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다시 오심 안에서 우리의 구원의 소망이 이뤄지도록 늘 깨어 근신하는 생활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깨어 있다는 것은 지금 우리가 전쟁 가운데 있다는 의미입니다. 전쟁 중인 병사는 깨어서 경계합니다. 우리도 의의 흉배와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이 가까이 올수록 세상은 더욱더 힘들어질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을 보시면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부인하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3:1,2,5)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도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 경각심을 가지고 깨어 근신해야 합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확실한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셔야 합니다. 구원의 소망에 대한 진리의 지식을 갖춰야 합니다. 즉 우리가 이미 얻었고 또 얻어야 할 구원에 대한 바른 진리의 지식을 가지지 못하면, 우리 믿음과 사랑과 소망에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복음 진리는, 자신의 선한 행위나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모든 죄를 용서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이 복음 진리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분명한 삶의 변화가 없으므로 자신의 구원을 의심하거나, 선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부담감과 죄의식으로 고통받는 분들이 적지 않음을 봅니다.
왜, 믿음을 가졌다고 하는데도 믿음의 역사가 없고, 사랑의 수고가 나오지 않으며 소망의 인내가 따르지 않는 것입니까?
가끔, 기계에 이상이 없는데 작동되지 않을 때, 주의해보면 전원(power)이 들어와 있지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 즉 코드가 연결되어 있지 않아 전기가 들어오지 않은 것입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의 구원도 복음의 지식에 문제가 없어도 파워가 즉 하나님 생명이 영에 유입되지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
요한일서 5장 12절을 보시면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라는 이 말씀을 보시면, 우리에게 생명이 없다면 그 이유는 아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P41)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3장 5절에서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음이 있다면 그저 머리로 아는 것만으로 그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생명의 복음은 실제 삶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이 우리 안에 살아계신 것을 믿는 것이기에 늘 그분을 의식하고 살기 마련입니다. 만일 생명 되신 그리스도께서 심령 속에 살아계심을 믿지 않는다면 그 믿음을 의심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 마음에 아들이 계신 것을 모르고 살아간다면, 그가 한 번도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영접하지 않은 것은 아닌지 묻고 싶습니다. 간혹 복음을 듣고 죄 사함을 선물로 받았다고는 하나 정작 죄 사함을 주신 아들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주인으로 모시지 않은 분들을 보곤 합니다.
이분들은부자 청년처럼 말씀도 지키며 선하게 살려고 애를 쓰지만 실제로는 돈을 사랑하는 우상숭배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신앙의 참 기쁨과 만족을 누리지 못하는 겁니다. 이 사람이 진정으로 거듭나려면, 그에게 성령으로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하여 깊은 책망을 들고 십자가를 통해 이미 다 이뤄진 구원을 보셔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 의(義)의 무익함을 깨닫고- 그 중심에 그리스도의 의(義)를 믿는 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자신이 철저한 죄인임을 아는 사람은 육신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없음을 아는 자입니다. 그래서 내가 아니고 내 안에 오신 그리스도가 생명임을 믿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3장 8, 9절을 보시면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라고 고백하는 자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생명임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6:63)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일러준 말씀을 믿음으로 그분의 영을 받고, 그의 의(義)를 생명으로 얻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본질이 바뀌는 거듭난 심령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내면으로부터 죄인을 완벽하게 변화시키는 생명의 의를 가진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와 상관없이 모든 죄인을 불러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의(義)에 참여케 하셨습니다. 이 의는 인간의 영에 전이되며, 사람은 이의(義)를 받음으로써- 의롭게 된 것입니다(be justified). 이 의는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올바름(rightness)을 만들어내며, 이로 인해 무엇이 옳은지를 알고,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의(義)는 우리의 영에 선물로 주어져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롬5:17)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이진리를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깨어 있으라는 것은 우리가 받은 이 구원을,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지키고 싸우라(유3)는 말씀입니다. 이는 우리가 이 믿음의 선한 싸움을 중지하게 되면 졸거나 잠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넘어질까조심하라”(고전10:12) 한 것입니다. 우리가 자전거를 탈 때, 페달을 계속 밟지 않으면 넘어지는 것처럼 우리가 믿음의 선한 싸움을 멈추고 중지하게 되면 사망의 잠을 잘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6장 12절에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영생을취하라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거듭날 때, 곧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얻은 영원한 생명을 끝까지 붙잡으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장차 주어질 면류관을 예비해 주는 길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4:8)라고 말씀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면류관은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자들이 영광을 바라보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기 위해 인내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7-9)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주의 날에 우리가 받는 소망의 구원은 우리가 깨어서 육체로 살지 않고 성령으로 주님과 함께하는 삶을 산만큼 영광스런 면류관을 얻을 것입니다.
이제 10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라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이 구절이 오늘 말씀의 결론을 내려주는 핵심 구절이라고 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이유는- 단지 우리의 죄를 위한 영원한 형벌만을 위해서 죽으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분명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라고 말씀해 주신 것을 봅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주님의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이 목표는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가시적으로 이루어질 것을 4장 17절에 보여주셨습니다.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로 영원히 주님과 함께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주님처럼 영화로운 몸으로 변화시킬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영화로운 구원을 받아야만- 주님이 강림하실 때, 우리도 공중에서 주님을 뵐 수 있고, 주님이 어디에 가시든 우리도 함께 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소망의 구원이 이루어질 때까지 이 소망을 붙잡고 인내하시며 깨어 근신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온전히 영생을 얻게 될 때, 주님의 궁극적인 목표가 이뤄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든 주님이 원하시는 곳에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 날에 이뤄질 이 영광의 소망이 우리에게 이뤄지도록 우리 모두가 깨어서 근신하는 거룩한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