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만 따라 붙는 복잡한 기억들을 밀어내며 정빈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그녀의 고의적인 폭언에 밀리던 그는 어린 날 체험했던 가증스런 분노를 벼르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이지.봉숭아 물 한번 쯤 안들여 본 년도 있나?/
이미 통념의 굴레를 벗어버린 그녀는 지금 자신이 구사하는 언어 속의 분방함을 마음껏 누리고 있었다. 그녀의 심층을 들여다 본 정빈은 순간 맹수의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그거 말이야. 그거 여성의 리비도 말이야./
/뭐야, 정빈씨 지금 리비도라는 거야?/
/그렇지.성기를 밖으로 노출시키지 못한 동물로서의 억제된 욕망 말이지./
/야, 정빈씨 유치하다. 그렇게 밖에 말 못하니? 응/
/그래.깊이 숨겨 둔 내 비수(匕首)를 꺼내라고 욱박지른 건 민희씨 아니었나?/
/그래.좋아 그 말이 “내가 오르지 못할 나무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야?/
/그래민희씨. 난 두려운 거야. 남성의 충동이 가학적 취향의 실제라면 여성의 리비도는 숨겨진 계략의 이면이겠지./
/뭐야, 이런. 정빈씨. 어디서부터 그렇게 비뚤어진 거야. 마음이라는 건 없니?/
/마음이라는게 왜 없겠어. 그러나 마음이 순수본질이라 해도 그 순수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토양은 결국 욕구라는 텃밭이야./
/야, 정빈아. 그렇게 냉혹한 이론 위에 나를 올려놓고 내 인격을 모독하고 내 여성을 모독하고 내 진정을 모독해도 좋은 것이야/?
그녀는상 위에 널려있는 안주접시들을 무차별 그에게 내 던졌다. 그는 그것들을 피하지 않았다 피하지 않고 고스란히 받아들이면서 그는 속으로 외치고 있었다.
/그래.나는 너무 세상에게 시달려 무분별해져 있고 너무 시달려 비겁해진 나머지 이토록 교활해져있는 거야. 민희씨 미안해./
7.
졸업을 앞두고 그녀의 결혼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캠퍼스의 풀밭에 앉아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 세상에 수많은 커플들이 결혼하지만 훌륭한 결혼은 참으로 드물다는 어느 보고서를 생각하며 그러나 훌륭하지 않은 결혼도 드물다고 생각했다.
결국 훌륭한 결혼이 드물다는 비관론은 결혼 자체를 모든 것의 완성이라고 보는 쪽의 생각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특히 한국적 사회 풍토에서의 결혼은 여성에게 있어 모든 가능성이나 잠재력의 상실을 의미하는 몹시 부조리한 제도인데도 불구하고 그런 것이 일반화된 삶이라고 인정하는 길들여진 절대다수의 인식인 것이고 그런 와중에서도 민희처럼 너무 많은 가능성을 지닌 여성은 오히려 자신을 가름해 볼 기회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다가 그는 깜짝 놀랐다.
/내가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그는 머리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결혼이 정신적인 불균형의 요소를 가졌다 하더라도 그 이상의 결합요소들이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사람이란 대상에 대해 익숙해지는 천성을 지녀 결합요소들이 제안하는 실생활의 희노애락에 길들여지며 푸성귀가 소금기에 숨이 들듯 적응하는 것이 아니던가. 그런 점을 인정해야 한다는 결론을 다다르며 그러나 그는 폐엽 한쪽이 잘려나가는 듯한 아릿한 통증을 느끼고 있었다.
/어머, 정빈씨. 오랜만이야./
언제 나타났는지 백색 미들바지에 연두색 셔츠를 입은 민희가 바로 앞에 서있었다.
/응. 어서와 그렇지 않아도 지금 누나를 생각하고 있었어./
/피이.거짓말. 그런데 정빈씨. 이제 누나라는 호칭 그만 썼으면 해./
/그래? 누나, 아니 민희씨의 결혼에 대해서 말이야./
그의그 말이 그녀에게 힐책으로 들렸을까보다. 그녀는 멋쩍은 웃음을 흘리며
/소문 들었어?/
/응.며칠 전 점심 먹으면서 누군가 지껄이는 말을 들었어. 그거 루머 아니지?/
/응.그럴까봐./
/민희씨.왜 그리 피동적이야. 결혼은 당사자의 결정 아닌가?/
/정빈씨.우리 또 싸우는 거니?/
/아니.축하해./
/너무 표피적이다. 정빈씨 뭐 다른 말 없어?/
/결국 나는 이런 불유쾌한 결말을 설정한 혐오스런 존재다. 라는 통탄 같은 것 말이야?/
/피-여전해. 그런데 말이야 정빈씨./
/응/
/난 그동안 내가 왜 정빈씨에게 몰두하고 있는 걸까를 정리해봤어./
/그랬더니?/
/응.분노를 감추고 있는 듯한 정빈씨의 눈빛과 어법에서 어떤 운명의 중량을 느끼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어. 나는 그런 내 감정을 젊음의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했던 거야./
/그런데그 생각이 바뀌었다?/
/아니야그 생각은 여전해. 다만./
그녀는고개를 숙이고 생각을 정리하는 것 같았다. 정빈은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세상과의 타협이야. 정빈씨. 정빈씨의 그런 장점이 과연 세상과의 타협에 장애가 되지 않겠느냐에 대한 의문인거야./
/그렇군.민희씨가 나에 대해서 거기까지 생각했다는 것은 역시 내가 민희씨의 의중에 상당한 중량으로 위치하고 있었다는 말로 들어도 괜찮겠지?/
/정빈씨. 제발 그러지 마. 왜 자꾸 빈정거리면서 내 마음을 잡아 찢는 거야. 정빈씨 그거 병적인거 알아?/
/응.정상이 아니라는 거 알아. 그렇지만 민희씨 말고 다른 사람에게는 그러지 않는다는 것도 알아./
/그럼 결국 우리는 동일한 배분의 인력에 끌리며 원의 테두리를 맴돌고 있었던 거야?/
/그걸 정리하면 이성으로서의 상대에게 끌리면서도 견제당하고 있었다는 말이기도 하겠지./
한동안 말이 끊겼다. 두 사람은 각자가 놓아버릴 수 없는 기호증(fetishism)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절감하면서도 그것을 서로 숨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 자신을 빠르게 정리하는 기능은 역시 여성이었다.
/정빈씨.졸업 후 어떻게 할 거야?/
/나? 직장을 구해놨어./
/어머그래. 어딘데?/
/와클이야.와클본부. 더 이상은 말 못해./
/와클이라면? 세계반공연맹?/
/응.졸업하면 스위스로 가야해./
/뭐.스위스로? 그럼 난 어떻게?/
그녀는 불현듯 마음을 꺼내보였다. 정빈은 씁쓸했다. 그는 그녀와 자신 사이를 막아놓은 서로의 기호증에 대해, 그것을 제거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서로의 성격에 대해, 그 심층에 대해 불가해한 곤혹을 느끼고 있었다.
/민희씨 걱정하지 마. 오래 있지는 않을 거야. 한 2년 아니면 1년 반./
그는그렇게 말하면서 자신이 왜 그런 말을 함부로 하는지 알지 못했다. 결혼을 앞둔 여성과의 적절한 대화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으며 그는 민희를 바라보았다. 민희는 한층 더 간절해지는 것 같았다.
/그래도 싫어. 결혼한다 해도 정빈씨는 한국에 있어야 돼. 그래야 내가 안정할 수 있단 말이야./
/그럼 스위스 와클본부를 우리나라로 끌어다 줘. 하하하/
그는 유쾌한 듯 커다란 소리로 웃었다. 그러나 그의 웃음소리는 무척 허탈했다. 그리고 계속했다.
/민희씨.행복해줘. 그래야만 우리가 시달리던 기호증으로부터 어느 한쪽이라도 해방되는 거니까. 응. 부탁해./
/싫어. 불행할거야./
그녀는말을 채 끝내지고 않고 서둘러 일어나더니 인사도 없이 가버리고 말았다.
8.
그리고 18년이 지난 금년 봄 그가 불편한 다리를 겨우 지탱하며 대한극장 건너편 MH출판사에 원고를 넘기고 나오는데 느닷없이 그를 붙드는 손이 있었다. 돌아보니 연극을 함께 만들던 그때의 선배였다.
어찌나 반가웠든지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선배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을 못하고 멍해서 서로를 바라만 보고 있다가 선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정빈아.살아있긴 있었구나./ 선배는 끓어오르는 격정을 누르는 듯 몸을 잠시 구부렸다 폈다. 그가 병원에서 사경을 해매고 있을 때 하루가 멀다 하고 병원을 찾던 선배였는데 그것이 커다란 마음의 짐이었던 그는 선배에게 퇴원날짜를 속이고 슬그머니 잠적을 해버렸던 것이다.
/선배님죄송합니다./
정빈은 목이 메어왔다.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그의 삼년 선배인 그는 여전히 물들인 검정색 군복에 야전점퍼 차림이었다.
/가자. 나도 이제 집으로 들어 가려든 참이었어. 가서 얘기하자./
선배는 정빈의 대답을 기다리지 못했다. 놓치면 날아가 버릴 새의 날개 죽지를 틀어쥐듯 그의 겨드랑이를 끼더니 대한극장 옆 골목으로 꺾어들었다.
대한극장 옆 골목으로 들어서서 남산을 바라보며 10분여 걸리는 곳에 선배의 집이 있었다. 스물 대여섯 평 남짓해 보이는 동향의 2층 양옥이었다. 선배는 대문에 들어서며 고함을 치듯 아내를 불렀다.
/여보,여보 누가 왔는지 나와 봐. 응. 어서 아. 어서.//
/아이, 누가 오셨는데 호들갑...../
방에서나오든 선배의 아내 성희는 거기서 말을 잇지 못하고 죽었든 사람을 다시 보는 듯 순간 몸이 굳어져 버렸다. 그러다가 한참 뒤에야 겨우 갈라지는 목소리로
/어머.어머 어머 정빈씨./ 하더니 막무가네로 달려들어 정빈의 손을 붙들었다.
/형수님.죄송합니다./ 정빈 역시 갈라지는 듯한 목소리로 겨우 인사치레를 하고는 기어이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이런법은 없답니다. 정빈씨 이런 법은 없답니다./
극렬한 슬픔이 반동되어 뒤섞이는 맹렬한 기쁨은 설명이 불가능한 것일까. 세 사람은 방으로 들어와 한동안 멍해져 있었다. 그러나 역시 그런 분위기에를 수습하는 쪽은 여성이었다.
/여보.식사 어떻게 했어요. 아니 정빈씨 점심이요?/
한때 연극계에서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아 영화계까지 진출했던 그녀는 상당한 집안의 고명딸이었다. 한양대학 영연과를 졸업한 그녀는 그러나 여성의 性을 상납 받는 영화계의 추악한 뒷거래에 침을 뱉고 연극계로 되돌아와 연극에 전념하다가 선배와 결혼한 강단 있는 여성이었다.
선배와 동갑인 그녀는 정빈의 열렬한 팬이자 동지요 동조자였다. 그녀는 정빈의 대본으로 연기도 했거니와 그의 철학적 이론에 공감했고 특히 그의 시를 좋아했다.
그가/반탄 시/를 발표했을 때 그녀는 몸이 오그라드는 느낌이라며 무섭기까지 하다고 했을 만치 그의 시에 감동을 받곤 했었는데 그가 갑자기 증발해 버리고 남편이 술에 취하면 헛소리처럼 그를 찾을 때마다 속으로는 남편 못지않게 비통해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뮐러의 /아르고 선원이 있는 풍경/을 끝으로 무대생활을 접은 것이 그가 사고를 당하던 해였다. 물론 /아르고/도 그의 번역이었다.
/형수님저 점심 했습니다./
/여보.그럼/
그녀는 남편의 의중을 묻고 있었다.
/아무래도그렇지?/
남편의 반응에 선명하게 행동할 줄 아는 그녀는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얼마 후 살뜰한 술상이 차려졌다.
/정빈아.잔 받아라./
선배는술잔을 내밀며 한손으로 정빈의 손을 끌어 잔을 쥐어주었다.
/아니지요.선배님이 먼저 제 잔을 받으세요./
/아니야.아니야. 네가 먼저 받아. 어서 응./
서로 먼저 받으라고 권하고 있을 때
/정빈씨시간 아까워요. 먼저 받아요. 응/
그녀가 호기롭게 끼어들었다. 선배보다 술 실력이 더 짭짤하다고 호기를 부리던 그녀였다. 그 실력이 그때까지 이어지는 모양이었다. 얼마 안가서 세 사람이 앉은 사이사이에서 출렁거림이 일기 시작했다. 그들이 마시는 술은 향기로웠고 출렁거림은 감미로웠다.
그자리에서의 술은 술로서의 기능을 훨씬 능가하고 있었다. 달콤한 분노가 과거라는 시간을 적절히 달래서 돌려보내고 있었다. 과거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아가고 나자 세 사람은 이제 옛날의 대학생이 되어 있었다. 선배의 아내 성희가 도저히 차분할 수가 없다는 듯 건너 방으로 가더니 정빈의 첫 시집 /불새의 늪/을 찾아들고 돌아와
/여보.이거 봐/하며 선배 앞에 디밀었다.
/그래.그래 그거야. 암 그거지./
/형수님.그걸 여태 가지고 계셨네요./ 정빈은 몹시 반가웠다. 사고를 당하고 난 후 다시는 문학을 하지 않겠다는 작정을 하고 내다버린 책이 두 트럭분. 그 속에는 그의 시집들도 끼어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것들을 잊으려 무척이나 애를 써왔다. 그런데 출간한지 25년여가 지난 이 자리에 그의 첫 시집이 유령처럼 나타난 것이다.
/정빈씨. 정빈씨가 갑자기 증발을 해버린 후 나는 차마 이 책을 펼치지 못했답니다. 왠지 정빈씨의 영혼을 훔치는 것 같아서 도저히 펼칠 용기가 나질 않았어요. 그런데 오늘은 맘껏 펼쳐도 좋을 것 같네요./
그러나 그녀는 손수 책을 펴지 못하고 선배에게 펼쳐달라고 부탁하고 있었다.
/그래. 성희야 내가 펼쳐주마. 우리 성희야./
선배는그녀를 쓸어 안듯 책을 펼쳐 그녀와 볼을 부비며 한 줄씩 읽어 내려갔다.
시 제목을 생략한 그의 반탄 시였다.
“내바다에 닻을 내리지 마라
저멀리 은하에서부터 끌고 온 하얀 절망
그묽은 피톨을 아프게 씻어내고도
나는출혈을 멈추지 못하는 것이니
잠시비워 둔 혈맥을 애타게 두드리며
지칠만큼 지쳐 돌아오는 숨소리들이다.
비분할동기가 어찌
분석하고가름하여 규명되어지는 것이랴
세상은너무 깨끗하여
보잘것없는내 고통에도 오염되고
버린자의 영혼만 깊어지는 이 찰나에는
빈혈에헐떡이는 가느다란 언어들이
쓰러진채라도 안식을 찾아야 하는 내 바다에
어느누구도 닻을 내리고 후회하지 말라.
그때대문이 떨어져 나갈 듯 거칠게 열렸다. 그리고 민희 그녀가 거기에 서 있었다.
9.
굳건했다.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공기는 참으로 굳건했다. 자칫 파열하기 쉬운 상황을 끌어안은 그들이건만 그들의 지적인 고집으로 인해 그들이 숨쉬고 있는 공기는 굳건했다. 그 굳건함에 힘입으며 그들은 서로의 감정을 견제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굳건한 공기 속에서 어느 정도 버티고 있는 것이다.
/선배님안녕하셨어요./
민희, 그녀도 그러한 공기에 편승하여 감정의 줄을 팽팽하게 당겨 가슴에 묶으며 조용히 방안으로 들어왔다. 대문을 열 때까지의 그녀는 거의 히스테리 현상이었을 것이나 지금의 그녀는 검증된 인격을 갖춘 여성이었다. 그것이 비록 동해원칙(同害原則)의 간접적 동기에서 오는 조심스러움이긴 할지라도 그녀는 격정의 위험수위를 잘 조절하고 있었다.
/응.어떻게 알고 왔어./
선배도격해지지 않으려는 듯 목소리를 한껏 낮추고 있었다. 정빈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볼 용기가 없었다. 그는 아직 그렇게 뻔뻔스러워지지 못했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정빈은 민희를 맞아들이기 위한 어떤 준비가 되어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감지하고 있었다. 그 준비된다는 것에 대한 명료한 도출에 서툰 그는 방바닥에 시선을 떨군 채 무엇? 그녀의 그 어떤 것이 간섭해 올 때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것은 몹시 더디었다. 마지못한 그는
/민희씨잘 지냈어?/ 하는 어처구니없는 인사를 보내고 말았다. 이십년 만에 만나 사람에게 할 수 있는 인사는 아니었다. 그만큼 그는 경직되어 있었다.
/아니./
저돌적인 민희의 대답을 들으며 정빈은 그녀가 행복하지 못하다는 걸 직감했다. 그녀가 행복하다면 그녀의 대답은 훨씬 너그러울 것이었다. 그녀의 잘라먹는 듯한 대답은 좋게 말하면 인내심이라 하겠고 꼬집어 말한다면 자학취인 것인데 그녀는 자신이 곤경에 처했을 때나 피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을 때면 어김없이 그런 투의 말을 하곤 하던 것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그의 어색한 인사가 그의 서툰 처세결과라는 것을 알면서도 민희는 연민이나 더 깊은 감정으로 인해 타협을 완강하게 거부하고 자신의 격정에 지배하고 있으리라는 짐작이었다.. 왼 만하면 이 팽팽하게 긴장된 분위기를 감안하여 무덤덤하게 지나칠 수도 있을 터였지만 그녀는 그런 분위기에 압도당하기를 싫다는 듯 /아니/ 라는 대답으로 분명하게 타협을 거부했다.
누가봐도 20여년 만에 만난 사람들의 인사라고 할 수 없는 파격된 형태의 인사치레는 어색한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켰다. 그는 민희 그녀가 짊어진 감정의 무게를 간파하려 고심하고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민희씨.그 짐 나눠지자./ 하고 가볍게 풀어갈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었으되 이 상황에서는 그렇게 가벼운 위트가 오히려 그녀에 대한 모욕이 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그럴만한 상황의 그럴만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그런 분위기에 언제까지나 짓눌려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럴 때는 역시 여성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는 듯 선배의 부인 성희가 민희에게 말을 걸었다.
/민희씨. 오늘 강의 벌써 끝났어요?/
/아니요 언니. 안 그래도 오늘 쯤 언니한테 전화를 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또 언니한테 선수를 뺏겼어요./
/언제까지예요.강의?/
/3주만 더 하면 끝나요. 참 언니 쪽 여성회관은 어떻게 됐어요?/
/이곳이요? 얘기 다 끝냈어요. 민희씨가 강의 일정표를 나한테 주세요. 그쪽은 민희씨 시간에 맞춘다고 했어요./
그러면서 성희는 민희에게 잔을 내밀며
/민희씨 나 한 잔 따라줘요./ 한다. 민희는 너무 급하지 않게 그러나 느리지도 않게 성희의 잔을 채웠다. 성희는 술상에 두 팔굽을 받치고 앉은 자세 그대로 술을 핥듯 마시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안가서 또 다시 민희에게 잔을 내밀었다.
/민희씨나 한 잔 따라줘요./ 한다. 민희는 다시 그녀의 잔에 술을 따랐다. 성희는 그 자세 그대로 술잔을 비우더니
/민희씨나 한 잔 따라줘요./ 한다. 그렇게 반복되는 동안 그녀들은 무의식적으로 감정교환을 서로 인정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것은 매우 사려가 깊은 성희의 심리전술이었다.
성희는 민희가 술을 따르는 동작을 통해 도발적인 자학취를 해소하고 자신을 정리하도록 돕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정빈과 민희의 서먹한 분위기를 제거해 보자는 의도인 것 같았다.
정빈은 그러한 성희의 노력을 주의 깊게 관찰하며 선배와 잔을 나누고 있었다. 민희가 성희의 그런 계략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민희는 자발적으로 성희의 의도에 끌려들어가는 듯했다. 그것만이 자신의 힘으로 처리하기 어려운 이 혼란을 정리할 수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까?
성희가 네 번째 잔을 내밀었을 때 민희는 술잔에 술을 채워 자신이 자연스럽게 마시고 있었다. 한동안 응고됐던 그녀의 감정이 돌파구를 찾아 졸졸 흐르기 시작했다.
/선배님.제 술 한잔 받으세요./
민희가 활기를 찾아가자 방안 분위기가 풀리기 시작했다.
/응, 민희씨하고 술마셔본 게 꾀 되지?/
/그럼요.아마 서너 달은 족히 될걸요./
/벌써그렇게 됐나? 우리 성희 생일날이었으니까 그렇군. 그렇게 됐군./
선배는부인을 항상 우리 성희라 호칭했다. 그만큼 소중히 여긴다는 애정표시일 것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 그들이 자주 만나고 있었다는 게 자연스럽게 설명이 되었고 오늘 이 자리에 민희가 참석하게 된 까닭도 더불어 해명되는 샘이었다.
몇 잔 술로 한결 기분이 풀린 민희는 서서히 분위기를 리드하기 시작했다. 그래야만 자리가 부드러워진다는 것을 민희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정빈씨. 어디 있다가 불쑥 나타났어.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 나중에야 선배님한테 들었어./
그녀가 야멸차게 타협을 거부한 동기는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할 정빈이라는 걸 잘 아는 민희로서는 굳이 사과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듯했다.
/응.여기 저기. 지금은 공주에 내려가 있어./
/그렇다고 선배님에게 조차 연락을 끊을 일이 뭐야./
/할 말 없어./
그러나 민희는 몸이 어떠냐고 묻는 우둔함은 저지르지 않았다. 그런 질문이야 말로 상대의 가장 아픈 곳을 찌르는 잔인한 짓임을 모를 그녀가 아니었다.
/한 잔 받아./
/응./
그는 민희가 내미는 잔을 애써 담담하게 받아 마시며 20여년이 지나도록 조금도 개선되지 못한 관계에 대해, 개선할 생각을 못하는 민희와의 운명적인 그 무엇에 대하여 의문을 점검해 보고 있었다. 그때 선배가 입을 열었다.
/정빈아.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거야./
/예. MH출판사에 한 코너를 채우고 또 J대학에 강의자리를 하나 얻어 살아가고 있어요./
/그 수입으로 돼?/
/혼자 있으니 돈 쓸 일이 별로 없고-/
그는 말끝을 흐렸다. 살아가는 데 불편을 느끼지는 않지만 그가 계획하고 있는 일에는 상당한 돈이 들어가야 한다. 허지만 그의 능력으로는 그 자금을 마련할 길이 요원했다. 그러나 그것이 이 자리에서 설명해야할 이유는 없었다. 그때 민희가 끼어들었다.
/혼자 있다니. 그동안 결혼 안?/
그 순간 성희가 민희에게 눈짓을 하며 끼어들었다. 민희도 성희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말을 꺾어버렸다. 몸을 심하게 다쳐 결혼을 못했을 수도 있는 그의 아픈 곳을 건드리지 말자는 뜻이었다.
10.
/정빈씨.우리 나가요. 나 지금 출근해야 하거든./
선배가 부인의 말을 이어주었다.
/그래.정빈아 나가자. 우리 성희가 스카라 건너편에 손바닥만한 카페를 하고 있거든./
/그래요. 형수님이 고생하시네요./하면서 정빈이 성희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나 성희의 표정에는 어떤 그늘도 없었다. 성희의 밝은 표정을 보며 정빈은 그 표정에 안도했다.
/그래요 .저도 한번 보고 싶네요./ 그렇게 말하며 그는 민희를 돌아봤다. 동의를 구하는 것인가? 그는 스스로에게 놀라며 그러나 민희와 이렇게 헤어질 수는 없다는 강한 연대감에 끌려가고 있었다.
/언니.?/
민희는얼른 결정을 못 내리고 성희를 쳐다보았다. 성희는 두 사람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민희를 이렇게 빨리 보낼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무슨. 함께 가야지. 여보. 안 그래요?/
/아.그럼 당연히 함께 가야하는 거 아닌가?/ 선배는 민희를 고무시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더 있다 갈까./ 민희는 혼잣말처럼 중얼대면서 정빈을 보며 동의를 재촉하고 있었다.
/그래.민희씨 함께 가./
정빈 은얼른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불편한 다리를 추스렸다. 여태까지 정빈의 앉은 자세만 봤던 민희는 정빈이 얼른 일어나지 못하고 몸을 추스르자 아연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접한 것이 20여년 저쪽인데도 불편한 몸을 추스르는 정빈을 바라보는 순간 민희는 정빈이 지금 막 사고를 당하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며 아득해졌던 것이었다. 그녀는 사고라는 개념에 대한 자신의 헐거운 판단이 오늘처럼 황당할 때가 없었다는 걸 통감하고 있었다.
그녀는정빈의 손을 잡아 일으킬 때 가슴 한쪽이 와르르 무너지며 눈물이 고여 오는 것을 어쩌지 못했다.
카페는 스카라극장을 가로질러간 좁은 골목에 아담하게 웅크리고 있었다. 작지만 깨끗하리라는 정빈의 기대에 부응하듯 안으로 들어가자 이십여 평 정도의 실내는 상쾌한 공기처럼 잘 정돈되어 있었다. 카운터 옆에 피아노가 얌전히 놓인 것 외에 특별한 치장을 하지 않은 것이 마치 지금 막 세안을 끝낸 여인의 피부 같다는 느낌이었다. 실내를 다루는 성희의 손길은 퍽 익숙해 있었다. 아마 상당기간동안 운영한 것 같았다.
우선 창을 열어 환기를 시키고 공기 청정기를 가동하고 재떨이를 점검하고 냉장고를 열어 확인하는 것으로 준비가 완료되는 듯 그녀는 경쾌한 몸놀림으로 일을 마치고 그들이 앉은 테이블로 돌아오기 전에 오디오를 작동시켰다.
음악은알 비노니였다. 이탈리아 사람들이 한국인의 의식구조와 거의 동일한 정서를 가졌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었지만 알비노니의 신포니에 에 콘체르티를 듣다보면 그 화려한 음색이나 흐름이 한국의 창법 가운데 중모리와 자진모리가 중복되며 넘나드는 듯한 변화를 느끼게 했다. 그것은 바로크음악의 특징이었지만 듣기에 따라서는 복잡함을 체념적 기법으로 일거에 묶어 넘기는 소리의 통로가 분명하면서도 쉽게 단정할 수 없는 박절(拍節)은 빠르게 꺾이는 그들의 언어와 맞물려 떨어진다고 정빈은 느꼈다.
그들에게 돌아온 성희는 민희와 그들을 구석 조용한 룸으로 안내하고 카운터로 돌아갔고 선배는 극장에 볼 일이 있어 갔다 오겠다며 나갔다. 실로 20년만의 독대였다. 20년 전 졸업과 함께 결혼하여 정비의 곁을 떠났던 민희는 20년이 지난 오늘 다시 그의 곁으로 돌아온 셈이었다. 아니, 끔찍한 교통사고로 인해 인간의 테두리에서 찢겨나갔던 정빈이 사람의 무리 속으로 돌아온 시간이라는 설명이 옳을 것이다. 두 사람만 남게 되자 민희의 표정이 아련해지며
/정빈씨,난항이었지?/
어느 사이 민희는 가볍게 정빈의 손을 잡고 있었다. 정빈은 민희가 많이 변해있다고 생각했다. 예전의 민희는 절대 편하지 않은 상대였는데 20년이 지나 만난 이 자리에서 민희는 자신에게나 남에게 퍽 너그러워졌음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렇게 변한 민희에게 이끌리듯 자신도 이제 어른스럽게 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며 느긋해지고 있었다.
/응.민희씨는 어땠어?/
/나? 힘들었어. 정빈씨 우리 생략법을 쓰면 어떨까 해. 이미 우리들의 젊음을 할퀴고 지나간 시간이라는 한 패지 넘기고 미래라는 새로운 패지부터 시작하자. 응/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간절해져 있었다. 옛날 같으면 자신의 그늘을 없애려고 대낮이라도 태양보다 밝은 등을 켜들고 그림자를 지우며 스스로를 가장하기 여념이 없었을 그녀였다는 걸 정빈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수용해가는 그녀의 따뜻한 성숙이 그의 가슴으로 스미고 있었다.
/민희씨. 따뜻하게 익어 있어줘서 고마워./
/무슨 소리야. 정빈씨가 오늘 나한테 건넌 인사 한마디가 나를 그렇게 변화시켰다는 거 알잖아. 아까 그 인사 마치 어제 헤어졌다 만나는 사람 인사 같았어./
/나, 말주변 없기는 지금도 마찬가진가 봐. 그런데 민희씨. 그런 상황에서의 적절한 인사말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어. 좀 가르쳐줄테야. 허허허/
/아니야. 정빈씨. 그런 인사가 쉽지 않았을 거라는 거 알아. 오히려 내 반응이 너무 서툴렀지?/
/민희씨 다운 대답이었어./
/뭐야./ 민희는 말하면서 들고 있던 넾킨으로 정빈의 이마를 툭 건드리며
/정빈씨. 우리 뭐 좀 마시자. 언니, 언니/ 민희가 부르는 소리를 들은 성희가
/예. 민희씨 알았어요./ 대답과 함께 맥주 3병과 안주를 챙겨 든 성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들어오며 성희는 오른손 검지로 허공에 동그라미를 그리며 싱그럽게 웃고 있었다.
/민희씨 기분이 어때요./물론 20년 만에 정빈을 만난 소감을 묻는 것은 아니었다. 성희는 센스가 그렇게 둔한 여성이 아니었다. 그녀는 민희의 감정흐름을 묻고 있는 것이었다. 민희도 성희의 그런 의도를 충분히 읽고 있었다.
/응. 언니. 정빈씨가 글쎄, 나보고 따뜻하게 익어있데요. 그래서 고맙다고요. 호호/
/와, 민희씨 좋겠다. 나도 그런 프로포즈 한번 받아봤으면 원이 없겠다./
/아이,언 니 그게 어디 프로포즈에요. 정빈씨가 뇌물을 쓴 거지./
/아니에요. 민희씨 그렇게 폭넓고 여유로운 프로포즈를 뇌물로 치부하다니요. 민희씨가 그렇게 펌하하면 그 프로포즈 몰수해서 내가 가질 거 에요. 정빈씨 그래도 되요?/
/형수님에게 드릴 프로포즈는 훗날 따로 준비를 하겠습니다. 하하/
/나는 20년 전에 이미 받았습니다. 그렇더라도 놀라워요. 20년 만에 만난 여성에게 따뜻하게 익어줘서 고맙다 라니. 눈물이 날 지경이네요. 민희씨 안 그래요?/
/그렇긴해요. 언니. 정빈씨의 그 한마디는 시들어가는 내 젊음을 보상하고도 남음이 있다고 느꼈어요. 그리고 날 그렇게 볼 수 있는 정빈씨의 마음도 넉넉하게 익어있다는 반증이니 그게 더 고맙기도 하고요. 근데 언니. 정빈씨가 20년 전에 언니한테 프로포즈했다니요?/
/후후훗. 민희씨 그건 비밀이에요. 정빈씨 어쩌면 그렇게 맛있는 말을 만들어내요? 우리 그이는 정빈씨가 생각나면 혼자 늘 언어의 마술사라고 중얼거리곤 했으니까요./
그때 왁자지껄하며 한패의 술손님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들어오면서 성희를 찾았다.
/누님.우리성희 누님/
그들은 연극계의 후배들이었다. 선배의 말투를 흉내 내 /우리성희 누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들으며 정빈과 민희는 힘차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난다는 정감으로 포근해지는 것을 느꼈다. 성희가 그들을 반갑게 맞으며 밖으로 나가고 나자 정빈은 독백처럼 중얼거렸다.
/민희씨.누님이라는 호칭 참 정감 있지?/
그는 흘러간 20년의 시간 가운데 일점을 꺼내 민희에게 불쑥 내민 것이었다. 그의 어미에는 덧없이 놓쳐버린 젊음과 절반의 불구가 된 자신에 대한 우수가 짙게 어려 있었다.
/그래도 이젠 정말로 안돼./
그녀는 정빈이 자신을 누나라고 부르고 싶어 한다는 걸 알고 당혹스러워 했다. 그 호칭을 편하게 들어 넘길 자신이 없는 나이가 되어버린 절망을 숨기며 그녀는 손가락으로 정민의 이마를 툭 건드렸다.
/알았어. 민희씨./
/그런데 정빈씨, 아까 무슨 말이야?/
민희는 바깥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러자 정빈의 눈이 가늘어지며 웃음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랬었다. 20년 전의 성희, 그녀는 패기만만하고 다소 충동적인 연극 배우였다. 그러던 그녀가 발탁되어 영화계로 진출한 것까지는 좋았다. 헌데 그때만 해도 영화계는 제작자와 여배우, 감독과 여배우의 관계가 선명치 못했었다. 성 상납이 비일비재하다는 루머가 떠도는가 했더니 그것이 메스콤에 포착되어 물의를 일으키고 연예일간지 등에 폭로되기 시작할 무렵 성희에게도 그런 시련이 닥쳤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성희는 여니 배우들과는 또 다른 입장이었다. 대학에서 정상적으로 연기수업을 했고 연극계에서 이미 인정을 받았다는 자긍심, 그리고 영화계의 스카웃라는 형식으로 영화를 시작한 성희이고 보니 자기처세의 헤게모니를 자신이 거머쥐고 있다고 자부했다. 더구나 영화에 인생을 걸어야할 만큼 절박한 가정형편도 아니었다. 그런 성희가 영화계의 비뚤어진 관행에 응할 리가 없었다. 장희빈이라는 사극의 주연을 맡은 성희를 제작자는 사냥감으로 점찍고 감독을 통해 압력을 가해왔다. 촬영이 진행되는 동안 감독을 통해 노골적으로 요구해 오는 제작자의 추태에 비위가 상한 성희는 처음에는 감독의 입장을 고려하여 얌전하게 거절했다. 그러나 제작자는 쉽사리 포기하지 않았다. 급기야 일을 성사시키지 못하는 감독을 교체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게까지 되었을 때 성희는 제작자와 담판을 벌였다.
/제작자님. 감독님을 통해 제작자님의 뜨거운 애정을 확인했습니다. 허지만 저는 제작자님의 애정이 너무 뜨거워 감당하기가 난감하네요. 이쯤해서 하차하고 연극계로 돌아가겠습니다./
당돌하리만치 선명한 그녀의 반격에 치명타를 입은 제작자는 이를 갈며 그녀의 앞길을 막아버리겠다고 으르렁댔지만 그렇거나 말거나 그녀는 훌훌 털어버리고 연극계로 돌아와 있었다. 그리고 선배와 만나 연극을 다시 시작할 무렵 선배를 통해 어렵지 않게 연극대본을 써내는 대학생 정빈과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
그러나 성희를 바라보는 정빈의 눈은 냉철했다. 풍족한 가정에서 아쉬움을 모르고 자란 여성의 무절제와 우월감이 단원들에게 끼치는 영향을 우려해야했다. 그러던 정빈이 하루는 성희에게 테이트를 청했고 그날 정빈은 그녀에게 평생을 잊을 수 없는 선물을 주었었다.
/성희씨.내가 이만큼 살아오면서 성희씨처럼 선명하게 자기감정을 절제하는 여성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형편이 어려운 단원들의 처지를 일일이 보살피는 넉넉한 마음에 감격하고 있습니다. 성희씨의 그런 장점은 축복받을만 한 지혜고 삶의 은혜입니다. 참으로 아름다워요./
그날부터 성희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영민한 그녀는 정빈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확실하게 꿰뚫어 보았다. 그리고 정빈의 은밀한 질책이 타당하다는 결론에 도달하는데 많은 시간을 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공손해져 갔고 조심스러워져 갔다. 돈을 아껴 단원들의 자잘한 어려움을 어루만져주는 누나로서 언니로서의 역할을 착실히 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과 타인의 존재실상을 도적으로 관조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그렇게 변할 수 있었던 것은 다만 정빈의 주문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녀의 내면에는 그런 요소들이 잠재해 있었다. 정빈은 그것을 슬그머니 꺼내서 그녀에게 보여준 것에 불과했던 것이나 그것을 발견한 그녀는 그것을 소중하게 길러낼 토양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민희씨. 형수님은 그때 그 일을 진정한 인간애라고 몇 차례나 얘기를 하곤 했었어./
정빈의 설명을 들으며 민희는 등골이 싸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정빈의 요구에 부응하는 자기를 만들어야 하나? 하고 의문하면서도 그러나 자신이 알고 있는 정빈의 성격으로 보아 정빈이 오늘 자기에게 하던 말이 절대 상투적이 아니라는 것도 함께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아름답게 익어있다는 칭송은 그렇게 되어발라는 정빈의 요구일 것이고 그런 요구가 이미 제시되었다면 수용하든지 거부하든지 결정해야하는 문제다.
기왕에그렇다면 유익한 쪽으로 결정하여 수용하는 편이 서로를 위해 타당하다는 결론을 굳혀갔다. 정빈은 대화를 통해 그것이 지혜라고 말하고 있지 않았던가. 그녀는 이제 치기어린 처녀가 아니었다. 이미 결혼과 이혼이라는 인생의 격랑을 넘으며 성숙된 정신세계를 가진 그녀였다. 그리고 정빈이 아니고서 어느 누가 자신에게 이처럼 과단성 있는 요구를 해올 수 있을까 생각을 아우르기에 이르렀다.
/정빈씨.아까 말이야./
/응.아까 뭐?/
정빈은 의도적이었다. 민희가 이 순간에 겪고 있는 작은 혼란의 파문을 자기의 말을 통해 스스로 수용할 기분이 들게 하려는 마음이었다.
/응.내가 따뜻하게 익어 있다든 그 말./
/응. 그 말. 왜 기분이 언짢았어? 그렇더라도 이해해줘. 더 적절한 말은 찾지 못했어./
/아니. 그런 뜻 아니야. 나 정빈씨의 그 주문 고스란히 수용할래./
/민희씨.미안해. 나 아직도 내 멋 대로지?/
/괜찮아. 그것이 정빈씨가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이라는 거 알아. 사실 얘기를 듣는 도중에 울컥 치미는 게 아주 없진 않았어. 그런데 말이야. 정빈씨 삶의 은혜라는 대목에서 거북한 감정을 꿀꺽 삼킬 수 있었거든./
/민희씨. 고마워. 자 한 잔/
/그래/
그렇게해서 그들의 남루하던 소통은 강물처럼 도도해지기 시작했다. 주말이면 그들은 거의 정빈의 집을 찾았다. 대게 성희가 정성들여 만든 반찬과 소주 몇 병을 가지고 와 격의 없이 놀다가 가곤 하던 것인데 오늘은 민희 혼자 온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