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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삼일광장 원문보기 글쓴이: 유래영
임관 45주년을 앞두고 추억의 영천시절을 회상해봅니다,,,
들어가면서
과거에 좋은일들을 회상하면 엔돌핀과 잔잔한미소가 번진다고 생각한다, 톨스토이는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때는 지금 현제이며,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하는일이며,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만나고
있는 사람이다, 라고 하셨는데 백번 맞는 말씀이다, 나는 지금 만나고 있는 동기생들이 45년전에 영천에서
같이 뒹글고 뛰어다녔는데 그분들과의 젊을때 추억은 모두가 같을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어렵고 힘들었던
그시절을 되집어보면서 추억의 장면을 회상한다면 충구회 동기님 모두가 행복할것같은 생각이듭니다
우리 충구회는 72년 1월4일에 입교하여 73년 12월21일에 약 1,187명이 임관하였는데 나는 당시에 3사를
지원한것은 최선의 선택이였으며 3사는 내인생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임관 45주년이
금년 12월21일이고, 기념식은 12월9일 대전에서 정기총회를 겸하여 실시 하기에 나의 관점에서 청년기에
영천에서 혹독히 교육받은 내용을 가감없이 그대로 글을 한번 써보는것도 의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젊은이는 꿈을 먹고 살고 나이먹은 사람은 추억을 간직하며 산다고 하는데 벌써 늙었나요 ㅋ,,,
매일 일석점호전 수양록 쓰는 시간에 나오는 단포빵
사실 70년대 시절에는 가정형편상 제과점빵을 먹는다는것이 쉽지 않았으며 먹을기회는 소풍갈때에 삼립빵에
계란삶은거와 칠성사이다가 전부였던시절에 사관학교시절에 매일 매일 바로 구워져나오는 달콤한 단포빵은
크기도 엄청커서 우리 얼굴만했으며 아주 맛있어서 먹을때만큼은 우리 얼굴이 환해진 기억이 나기에 다시한번
먹어보고싶은 욕망이 넘치는데 그럴수가 없어서 아쉬우며 석식시간에 사과 1개와 우유가 지급되였으며, 식당
메뉴도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좋은조건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도 생도들에게 단포빵을 주는지 모르겠다
- 인터넷이나 선, 후배님 카페를 뒤져봐도 그옛날 추억의 단포빵의 사진을 구할수없기에 대단히 아쉽다,,,,
휴일날 단포강에서 빨래하던 추억
당시에 세탁기는 생각도 못했던 시기이기에 속옷과 군복은 개인이 시간나는대로 빨아서 말렸으며 휴일에는
그동안 밀린 빨래를 손에들고 학교정문을 지나서 우체국을 건너 단포강에서 빨래를 하는데 특히 겨울철에는
동내의와 야전쟘바를 포함하여 양이 많았는데 남자가 빨래를 제대로 될리가 없으며 그저 물에 담구었다가
행구는수준이였다, 빨래비누는 개인지급품으로 단포강에서 대충 빨래를 하고서 자갈밭에 말리는동안에
당직사관은 소대별 노래자랑을 시켰으며 이런일은 졸업때까지 계속 이어졌기에 지금도 아련한 추억이다
- 지금은 금호강 단포천지류 상류에 영천땜이 건설되여 지금은 단포강의 수량이 아주 적다고 한다,
악몽같았던 고경사격장의 얼차려
인터넷을 뒤져보니 학교에서 고경사격장까지는 약 8km 된다고 하며 지금은 차량으로 이동한다고 하는데
우리때는 항상 구보나 걸어다녔다, 72년 1월4일 입소하여 선임중대인 19중대는 1월에 얼음구덩이에서 PRI
훈련을 마치고 고경사격장에 도착하여 6,25전쟁때 쓰던 M1소총으로 영점사격을 하는 도중에 교관은 갑자기
훈련을 중단시키고 집합시켜서 하는말이 " 3사 창립이래 귀관들의 사격성적이 가장 안좋다 " 하면서 사격장
하단의 얼음냇가에 낮은포복을 시켰는데 이빨이 떨릴정도로 몸서리치도록 추웠던 기억이 생각난다
- 1월의 살얼음이낀 하천에서 포복을 시키고 추위에 덜덜 떨게한 교관의 심정은 새디즘(sadism)인가요 ?
교관은 9기생 군기를 잡을려고 선임중대인 우리를 가혹하게 굴렸는대 지금 생각하면 그것도 지휘통솔법에
일환이지만 너무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다음에 고경에서 사격성적이 안좋아서 비오는데 학교까지 구보로
와서 늦은 저녁을 먹었는대 반찬은 김치찌게였는데 차가운 돼지비계을 정신없이 먹은후에 배탈이 나서
빔새도록 고생을 해서 그런지 돼지비게 트라우마로 지금도 허연 비계를 먹지않는 아픔을 가지고 있다
- PRI훈련중에 알철모구보, 철모에 머리박어, 선착순, 풋샆, 소총머리위로하고 오리걸음 등등의 기압 ㅠ
하절기에 눈물의 자갈밭을 걸어다녔다
지금의 생도대건물 뒤편이 우리중대가 있었고 식당은 충성관옆에 있었는데 거리가 800m 이상의 거리로
생각된다, 하절기 휴일에 식당에 갈데마다 곰발바닥을 만든다고 항상 맨발로 자갈길을 걸어다녔는데
그아픔은 이루 표현 할수 없었지만 사람은 환경의 동물이라고 누가 말했는지 모르지만 걸어다니다 보니
걸을만했다, 얄미운것은 7기(빨간펜티), 8기(노란펜티) 선배님들이 식당에 갈때는 어느분이 불러세워서
귀관들의 자세가 틀렸다 라고 하면서 자갈밭에서 엎드려뻗처등 기압을 주는데는 정말 환장할지경이였다,
- 자갈밭을 걷다보면 자세가 제대로 안나오기 마련인데 선배님들은 그것을 트집잡아서 사정없이 돌렸다
- 하절기에는 펜티바람으로 식당과 영화관과 PX를 걸어다녔는데 안해보신분은 저고통을 모를것이다 ㅠㅠ
군화 대신 통일화 신고 훈련받았다
당시에는 국가경제가 형편없어서 우리는 군화보다는 통일화를 많이 신었는데 구보시에는 군화는 얌전히
모셔두고 통일화만 신고 다녔으며, 체육시간이나 일반훈련에도 신었다, 구조가 고무와 천으로 되여있어서
쉽게 마모되여 미끄러지기 일쑤였으며 보급도 제대로 되지않아서 항상 떨어진 통일화만 신고 훈련을
받은 생각이나고 발뒤꿈치는 까져서 많이 고생한것으로 기억하며 그때의 한이서린통일화를 다시 신고싶다
- 선배님들이 졸업할때면 아는분에게 통일화를 물려받는일은 다반사였으니 할말이 없다,,,
철모 쓰고 군화 신고 25m 전투수영장
학교 충성관(영화관)뒤편에 있는 야외전투수영장으로 수영훈련이 끝난후에 철모에 군화를 신고 전투수영을
해서 25m를 건너지못하면 퇴교를 시킨다고해서 죽고살기로 전투수영을 해서 건넌 기억이난다, 생각해보라
군화와철모를 쓰고 수영이 되겠는가 ? 그러나 우리는 죽기살기로 25m전투수영을 합격한사람들은 행운아
이고 불합격한 생도는 합격할때까지 반복해서 수없이수영을 해서 모두가 합격한것으로 기억이난다
수영이 끝나서 올라갈려고하면 조교들은 대나무끝에 솜방망이로 감싸서 우리를 올라오지 못하게 악랄하게
했는데, 교관은 이것은 전시에 극한상황에서 적군의 방해로 생존의 전투수영이라고 말한것으로 기억하는데
나같은 맥주병은 전투수영이 어느훈련보다도 힘들다고 생각하면서 지금 다시 생각해도 끔찍하다,,,
얼음밭에서의 각개전투교장
민간인에서 멋도모르고 군대에 들어와서 제일처음 받는훈련이 제식훈련과 각개전투라고 생각이 되는데
특히나 각개전투훈련은 2월에 바닥이 얼음구덩이에서 처음받아보는 훈련의 그 혹독함이란 뭐라 말로
표현할수 없을것 같으며 조교들은 처음에는 한단계씩 설명을 하고 훈련을 하지만 그후에는 통과 통과를
연발하여 LD선부터 목표탈취까지 연속으로 돌리므로 입에 단내가나도록 뛰어다니던 기억이난다
- 지금은 각개전투훈련장이 다른장소로 옮기고 그곳에는 골프장이 신설되여 있다고 한다
사동 훈련장은 학교후문을 지나서 사동훈련장의 오른쪽에 있는 눈물의 각개전투교장이며 각종 소부대
전술은 사동훈련장에서 받았는데 특히 야간 독도법에서 일부 생도들이 좌표를 잘못 선정하여 늦게들어
오기에 거기서도 수업성적이 좋지 못하다고 하면서 야간에 올빼미기합을 받았는데 그때 현역출신
생도들은 민가에 들어가서 닭백숙을 해먹었다고 자랑을 하는데 사실인지는 알수없는 노릇이다,,, ㅋ
생도시절에 생도복은 없었고 장교복을 착용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멋진 생도복은 없어서 장교복장에 육군모표대신 3사모표를 부착하고 외투도 없었다
면회도 몇달에 한번정도 있었으며, 개인외출은 내기억으로 3번정도이고 단체외출은 옃차타고 경주에 한번
다녀왔으며 외출이나 면회시는 위의 복장을 착용했으며 당시에 유행이 바지단이 짧아서 우리복장이 어색
한것으로 생각하며 대구 외출시에는 내무반끼리 몰려다니면서 대구시내를 구경했는데 당시에 나는 택시로
동대구- 대구시내- 앞산 -팔공산입구를 다닌것으로 기억을 하는데, 귀가후 기압은 당연한 절차였었다 ㅋ
- 대학교육과정인 교양학 교육을 받을때도 장교복장을 하고 교육을 받는데 더워서 참으로 힘들었다
야외훈련시 두번 밥먹기
당시에는 혈기왕성한 젊은이래서 그런지 먹어도 먹어도 배고풀시기로 요즘처럼 자율배식도 아니기에
항상 양이차지 않았다, 야외훈련시에는 훈련장으로 배달되는데 우리는 식판으로 먹거나 항고에 밥을
타서 먹었으며 배식할때에는 누구나 맨앞줄에 설려고 경쟁이 치열했는데 그이유는 최대한 밥을 빨리
먹고나서 맨뒤에 줄을 서면 한그릇을 더먹을수있기에 맨앞줄에 서는것인데 나뿐만 아니라 다른생도
들도 마찬가지로 10번이내로 밥을 먼저먹으면 다시한번 줄서서 짬밥을 먹는 행운을 누릴수 있었다
징그러운 화산 유격훈련
1학년 10월말로 기억하는데 학교에 화산유격장 까지 오랜시간을 걸어서 어두운 상태에서 화산 정상에
도착하니 신기하게도 분지로 정상은 푹 꺼져있는가운데 구)막사와 연병장이 있었는데 초장부터 집합하여
유격 PT체조로 돌리는데 정신이 하나도 없었으며 빨간모자의 조교들은 저승사자와 다르지 않았다
- 화산은 다시 지도를 보니 영천과 군위군에 걸처있는데 과거는 화전민터였었다고 한다
도피및 탈출훈련시에 너무 배거고파서 일행 3명이 돈을 걷으니 400원뿐이 없어서 그돈으로 민가에 들어가
사정이야기를 하니 어르신은 우리들을 한참 처다본후에 약 70~80개의 감을 주셨는데 모두가 허겁지겁
먹고나니 그후에 대변이 안나와서 유격훈련중에 곤혹을 치른바있다, 나는 그때의 트라우마로 지금도 감이
나오면 그때 생각이나서 감을 먹지못한다, 화산유격장의 뢰펠훈련과 외줄타기는 공포 그이상이였다
대창 중화기 사격장의 야영과 모기회식
대창훈련장에서는 거리가 멀기에 아래사진에서와 같이 통상 A형 텐트를 치고 훈련을 받았으며 빨래도
훈련장주변 냇가에서 했으며 특히나 고통스러운것은 모기약 같은것이 지급되지않기에 한여름의 더운날씨
에도 모포를 뒤집어쓰고 자야하는데 오죽하면 대창모기의 유효사거리는 모포 3장이라는 말까지 나왔으며
여름철 야외훈련은 훈련보다 힘든것은 모기와 열대야로 인한 무더위로 그고생은 이루말할수없었다
당시의 교훈탑과 군복이야기
당시의 교훈탑은 정문을 지나 생도대, 충성관과 연병장가는 사거리에 조국, 명예, 충용의 교훈탑이 있었
는데 지금은 생도대 뒤편에 쓸쓸이 자리를 잡고있다고 하는데 언제 어떤이유로 옮겨졌는지는 모르지만
많이 아쉬운 생각이 든다, 그리고 당시의 군복은 밖으로 나왔으며 하의에 주머니도 좌,우측옆으로 있어서
건빵주머니라고 했으며 상의도 목 부분까지 채워서 지금과는 많이 다르며 모자에 1,2학년으로 표기를 했다
- 당시에 군복을 빨면 색갈이 변해서 거지복장이였는데 앞으로 군수부정자는 사형에 처해야 한다
단포강 유격 자유낙하훈련
인간이 공포를 가장 많이느끼는높이는 33피트(약10,5m) 라고 하는데 당시에 10월로 기억하며 단포강의
유격장으로 약 10m 를 기어가서 거기서 손을 놓고 떨어지는 훈련인데 공포감은 극에 달했다,
내 생각에 3사에서 가장어려운 훈련을 꼽으라고 하면 바로 자유낙하훈련이라고 말할수있다
나는 위 10 m 자신력테스트 훈련이 3 사 훈련중에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코스라고 생각한다
얼음위에 10m 를 기어가서 로프를 잡고 복명 복창을 한후에 뛰어 내렸는데 불과 1~2초가 10년 같았다,,,
툭하면 옥상으로 불려가서 모기회식과 한겨울 펜티바람
당시에 훈육관들은 저승사자와도 같은 느낌이였으며 한여름에 옥상에 펜티바람으로 모기회식을 했으며,
한겨울에는 펜티바람에 집합시켜서 구대장은 찬물을 끼언져서 죽을지경이였으며 거짓말을 보태서
하루에 기압을 받지않거나 옥상으로 불려올려가지 않으면 잠이 오지않았던것도 엄연한 현실로서
상당히 고달푼 나날이였으며 지금도 왜그리 비인간적으로 기압만능주의로 교육을 했는지가 의문이다
매주 일요일 점심으로 나오는 라면먹는날
당시에는 궁핍하기에 혼합곡식이였고 매주 일요일 점심은 라면이 나오는데 계란은 생각지도 못했다
입교해서 처음으로 라면을 먹는날 젓가락을 안주기에 의아했는데 현역으로 들어온분이 야 ~ 그냥
숟가락으로 먹는다고 했는데 막상 식판에 받아보니 라면이 아니라 너무 퍼져서 개밥정도였다,,,
처음에는 일개중대 150명분을 그냥 한번에 삶으니 라면이 아니였다, 그후에 라면은 밥솥에 찌고
국물은 스프로 따로 끓였는데 정말 맛이 없었다, 그이후에 라먄먹는것에 실증났지만 배고푼데
안먹을 도리가 없었으며 내가 대위때 라면급식이 폐지되고 일반밥이 나왔다
나는 당시에 퍼진라면만을 먹었기에 그것이 입맛에 배서 그런지 지금도 당시에 입맛대로 퍼진라면만
먹는다, 그래서 가족과 아이들은 꼬들꼬들한것을 좋아하지만 나는 퍼진것을 고집해서 마찰이 많다 ㅋ
김일성 생일날 눈물의 산악구보대회
아마도 김일성생일은 4월 15일로 생각이 나는데 그놈의 김일성때문에 우리는 적개심을 고취시킨다는
명목하에9 기생 모두는 완전군장을 꾸려서 정문을 출발하여 사동 山을 돌아서 약 6km정도의 산악구보를
하고 나서 원점회귀구보대회를 했는데 당시에 날이 무척이나 더워서 결승점에 골인후에 쓰러져서 탈진
하여 군의관진찰후에 후송병원으로 실려가는인원도 많았으며 소문에는 몇명이 죽었다고 하는데 알수
없는일이지만 승부욕에 다리에 쥐가나면 대검으로 허벅지를 찌르고 어느생도는 군장을 2개나 메고
어느생도는 M1소총 2개를메고 뛰였는데 지금 생각해도 그때 학교당국자는 너무한것으로 생각이된다
당시에는 구보를 너무많이해서 그런지 대부분의 생도들이 구보병에 걸려서 고생이 많았는데 구보병
이란것은 다리 정갱이부분이 아파서 절뚝거리는데 구보를 몇일안하면 신기하게도 아프지 않았는데
구보병 때문에 매월 실시되는 체력대회에 중대와 대대의 명예를 위하여 아파도 뛸수뿐이 없었다,,,ㅠ
입교하여 6개월은 구)막사에서 생활했다
72년도 1,4일에 입교를 하니 정문 좌측으로 지금 생도대장 뒷건물이 19중대 건물이였는데 1개 내무반은
20명이였고 1개소대는 2개내무반으로 구성되였고 1개중대는 4개소대와 8개 내무반으로 구성되였고
화장실은 별도의 건물에 있었으며 그야말로 냄새나는 공동화장실은 중대당 1곳이 있었다, 그후 6개월
정도 지나니 신막사가 준공되여 내무반단 10명으로 총 16개 내무반이 있었으며 신막사에 들어가서
생활해보니 천당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지금은 내무반당 4명이고 침대생활을 한다고 하니 할말이 없다
호칭도 처음에는 후보생이란 명칭부터 들어야 했으며 생도란 명칭은 한참후에나 불려졌으며, 어느중대는
정기적으로 돈을 걷어서 소대장에게 전달했다고 하는데 수치스러운일이며 자질이 떨어진 소대장도
있었고 또한 교양학과정의 교관도 중, 대위로 수준이 떨어지는 교관도 많이 있었다고 생각을 한다
교양학교육을 6개월정도 받은것으로 생각한다
당시에 초급대학교과정이수를 위하여 영어,수학,전쟁사,심리학등을 배웠는데 성적이 미달되면 퇴교를
당하기에 열심히 공부를 했는데 심지어 화장실이마 모포를 뒤집어쓰고 후라쉬를 켜고 공부를 하신분도
많았으며 실제로 성적미달로 퇴교를 당한 동기도 있었다, 그리고 정복을 입고 교육을 받았으며 교관은
현역 중,대위였으며 강의실은 뜨거운 여름에도 달랑 선풍기 두대뿐이 없고 강의시간에 졸면 교관의
불호령과 벌점이 부여되였기에 졸음과의 전쟁을 치르면서 교육을 받은것으로 기억된다
- 당시에 수업이 끝나면 5분 쪽지시험에 상당히 시달렸고 교관은 엄청난 예상문제를 주어 고달펐다
결론적으로 다시한번 생각해보면
3사 태동이 김신조일당의 영향으로 박정희대통령이 북한의 124군부대에 대응하기 위하여 만들어
졌다고 하지만 사상 유래없는 혹독한훈련으로 장교의 명예나 자긍심의 교육보다는 무조건 절대복종과
국가충성이라는 숙명을 안고 태어났지만 우리는 너무도 힘들게 훈련을 받았는데 그래도 가만히
생각해보면 당시의 어려운 국가경제하에서는 우리는 3사에 들어간것이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돌이켜생각해보면 3사를 들어갔기에 격변기에도, IMF 하에서도 평생 밥 걱정없이 편안한 인생을
즐길수있었다는것에 감사하고 다시 생각해보아도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는 말을 나의 좌우명
처럼 숙명처럼 느낀다는 사실이다, 위글은 비록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의 이야기지만 그래도 그때가
인생의 가장 추억이 많이남는 장면이였기에 그때를 회상하면서 타임머신을 타보았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우리 충구회는 12월 9일이면 임관 45주년 행사및 정기총회를 하는데 나는 동기님들
에게 추억거리를 되새겨볼수있는 기회를 서로가 공감하면서 대전 계룡스파텔에서 만나기를 기원
하면서 이글을 마치고자 합니다, 동기님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충 ~~~~~ 성
PS
19중대 총무님을 하고 계신 남경헌(예 대령)님은 우리가 3사를 들어갔기에 평생 행복하다고 하면서
그러기에 예비역들이 모여서 충구회를 죽을때까지 같이 가야하며 앞으로 어려움이 있어도 영천의
초심으로 돌아가서 다시한번 생각하는 마음을 갖자고 하면서 행사에 참여를 독려하는것을 보고서
가슴이 뭉클했으며 이런분들이 계시기에 충구회가 유지되는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2018년 11월 18일 柳來榮 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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