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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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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고시집 [☆잎사귀 오도송☆]의 앞표지(우)와 뒤표지(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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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잎사귀오도송]
최명길 유고시집 / 서정시학시인선 117 / 서정시학(2016.04.20) / 값 9,9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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잎사귀 오도송
최명길
드문드문 구멍 난 잎사귀
벌레가 한 평생 얻어먹고 남은 양식
그 입 자리 참 까치랗다.
휑뎅그렁한 구멍으로는
금풍동자가 놋좆에 노를 꿰어놓고
빈 배를 젓고 있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똑딱거리는 잎사귀배
암만 가도 제자리 뜨기지만
깊은 산 산그림자가 종일 타고 논다.
껍데기는 등이 찢어지고 말라
당체가 사라지고 없다.
적송 숲에 누워
최명길
아름드리 적송 숲에 누었다.
야간산행 중에
솔가지 일렁거리는 사이로 산별들 많다.
그 건너가 장엄 무등등계인가
애총에서 나온 해골 같은 별이, 별 때문에
솔잎에 광채가 서려 있다.
수만 개의 은못뭉치가
일시에 날아 들어가 박힌 밤하늘 천장
솔가지 사이 그 흔적,
간간히 딱, 하고
나무삭다리가 부러졌다.
어쩌다 지하철에서
최명길
저어기 대천 칠성뱀장어 무리
미끄러지듯 헤엄쳐 오네.
붉은 휘황한 흡입구
나는 그리로 빨려 들어가네.
이놈이 내가 먹이인 줄 아나보아
한꺼번에 통째로 꿀꺽하고도
눈도 깜박거리지 않고
다시 미끄러지듯 헤엄쳐 가네.
북두칠성 은하가 흔들거리네.
아찔거려 겨우 나오자 또 다른 흡입구
세상의 구절양장 속으로
나는 다시 빨려 들어가네.
휘적휘적 이 삶의 녹원으로
대문 밖
최명길
대문 밖 바스락거려
문틈에 귀 대고 들었다.
동해 수평선 달뜨는 소리
돌아 나오다 다시 바스락거려 몸을 돌렸다.
그 사이 벌써 해 지고
서산 아래 절벽으로
한 생애가 떨어진다.
산정에 홀로 앉아
최명길
누가 나를 발로 차고 돌로 쳐
두 팔 모두 뽑아가도 미소 지으리
고요로이 산정에 홀로 앉아
진눈깨비 칼바람 불벼락 퍼부어도
두 발 모두 뽑아가도 두 눈 두 귀
혓바닥까지 모두 뽑아가도
지으리, 인욕선인*처럼
숨마저 내어주며 미소 지으리
*인욕선인忍辱仙人: 석가의 전생 혹은 수행 중의 모습. 이후 완벽으로 나아가 지혜와 자비를 구족하였다.
어스름 한 잎
최명길
누가 떨어뜨렸는지 나풀나풀
대청봉 작은 나뭇잎 하나가 날아와
온 동해를 다 덮어버렸다.
저녁쌀을 이느라
파도아가들은 싸르락거리고
바다가 먹을 양식 모래쌀을 이느라
짜장게들이 먹을 쌀을 이느라
나뭇잎 보자기 그 은밀한 틈새마다
파도 손가락들 쉴 새 없다.
한가히 그러나 늘 고만큼만하게
저무는 산
최명길
저물어 산에 들었다.
어스름 낀 서녘 산봉우리에
사람인 듯 두엇
봉황촛대처럼 서 있다.
힘을다 써버린 나
오늘은 저이들 불빛에 기대어
밤 산경이나 읽으리라.
노을 봉우리가 탄다.
겨울 신선대
최명길
하리까지 차오르는 숫눈길이었다.
사투 서너 시간 후에야
겨우 오른 신선대,
기다렸다는 듯 강풍 눈보라가 몰아쳐
나는 그만 두 무릎을 꿇고야 말았다.
내가 내 몸뚱어리를 어쩔 수 없었다.
단칼로 후려 도려낸 듯한 칼능선
칼능선 지나자 또 칼능선
그 가멸찬 횡포 앞에 처참히 굴복당하면서
그러나 얼핏 보았다, 한 자루 하얀
하얗고 하얘서 더 이상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성결한 흰빛의 정수리 같은 것이
꿇어앉아야만 볼 수 있는 그 무엇이
바로 그 자리에서 요동쳤다.
지난 가을 우리 집 감나무 홍시를
자주 찾던 나그네 박새의 두 뺩을
감싸 쥔 고요 같은 흰빛결의
눈꽃산
최명길
눈 온 산은 눈꽃산
눈산 보러 간다.
여태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아
천연 맑은 눈길
눈을 받들고 앉았던 어린 관목들이
흰 가지를 갑자기 놓는다.
반짝이며 쏟아지는 부신 편린들
고요의 정수박이를 낚아채는
갑작스런 소요
인기척이 너무 컸었나
틈에 숨었던 고라니 새끼가
놀라 화들짝 뛴다.
풀잎 단칸집
최명길
방아깨비가 풀잎에 내려앉았다.
순간 풀잎이 조금 흔들렸다.
흔들리다 제자리로 돌아가다 생각났다.
방아깨비에게는 이게 집이었을 거라
단 칸 집, 단칸집이 흔들렸다.
흔들리다 제자리로 돌아갔다.
갉아 먹힐 때에도 조금 흔들렸다.
기둥이 부러져도 불평 없이
갉아 먹힌 자국이 게 집게다리처럼 벌어지자
허공이 올라앉아 크게 한 번 웃었다.
허공을 따라 어스름도 크게 한 번 웃었다.
주인이 오그라든 집 한 켠에
쪼그리고 앉았다가 휙, 하고 뛰었다.
오그라든 곡선과 늘ㅈ어진 곡선이
춤을 추듯 휘청하고
느닷없이 알록한 아욱꽃이 떨어졌다.
우주 비밀을 엿듣는 이 순간
손가락으로 집어먹은 보름달
최명길
바닷가를 거닐다가
바다 쟁반에 동그랗게
올라와 앉은 보름달
깨끗하기가 속배기 배추 잎 같아
손가락으로 집어먹었다.
아삭아삭 달 부서지는 소리
내 사랑아 그 후
갯메꽃이
예순 번 넘게 졌다.
실험실
최명길
내 마음과 몸은 실험실이다.
몸 눈 문 열고
단 몇 발자국만 안으로 걸러 들어가도
클로로포름 내음 코를 찌른다.
그 어슬어슬한 숲을 들여다보는 일에 평생을 건 이
그 무지랭이
그가 바로 나다.
그 어슬어슬한 돌팍 가슴에서
너덜거리는 피걸레를 헹구는 일에나
평생을 내어 건
이 멀뚱한 물건
들노래
최명길
참깨꽃 피어 하얗고
참깨꽃 떨어져 하얗고
그 옆에 콩잎파리
그 옆에 머리를 하늘로 틀어올린 민 홍당무
그 한쪽에 불개미집
발갛게 불개미들이 달라붙어 떠메고 가는
풍뎅이 날개
새벽산 상여행렬 같네.
그 날개 그늘을 따라 살랑거리는 처서 바람
녹음 든 밭이랑
그 옆에 막 땅 문을 밀친 조선무 싹
대지를 향해 빳빳이 선 고추
그 옆에 개울물
개울물 따라
낮게 흘러드는 고라니 울음
오지 달항아리
최명길
내 총각 시절
처음 맞아들여 함께 지내던
배불뚝 오지 달항아리
금 가 엎어놓아 거꾸로 섰다.
그런데 어찌된 일일까?
는 밑에 있던 밑동이 위로 올라가자
물받이로 변했다.
소나기 내린 다음날 물 잠시 고인 그리로
얼른 하늘이 내려와 담기고
앞마당 개살구알이 발가숭이로
뛰어내려 노랗게 담기고
잠깐 후 다시 보니
느릿느릿 백로가 날아가며
까무르륵
한마디 하고 있다.
도선사 적묵당
최명길
삼각산 올랐다가
도선사에 들렸네.
무심히 적묵당 앞에 섰다가
적묵당 추녀에 살짝 매어달린
삼각산 능선과 마주쳤네.
방금 돌아 나온 바로 그 능선이었네.
벌레 하나가 꼬물대며
얕은 걸음을 치는 것 같았네.
마당에는 돌배나무가 한 그루 있었네.
수행한 지 몇 백 년은 된 듯
잎눈들이 모두 개안을 하고 있었다네.
대웅전 앞문 왼쪽 주련에는 이런 글귀가 보였네.
‘착득심두잘막망着得心頭切莫忘’
하지만 이 사내 아직
애가 끓어 애가 끓어
대웅전 기둥 붙잡고
생뜨꺼지처럼 서서
못 들은 체했네.
딴전을 피웠네.
연꽃받침대가 감로잔을 밭쳐들고
나는 삼각산 어스름을 받쳐들고
아가야
최명길
아가 이 맑은 벌판으로 오너라
강물 굽이쳐 흐르고 새들 날고
나른히 수양버들이 연두로 휘청거리고.
물ㄹ오른 다리로 아장아장
들길을 걸어서 아가야
네 첫 걸음이 우주를 걷는구나
우주가 우주를 걷는구나
그걸 네가 알 때쯤이면
저 산은 또 몇 차례나 옷을 갈아입을까?
아가야 갈매기가 날갯짓 할 적마다
흰 구름이 푸드덕거린다.
흰구름 부서진 부서져 사라진 하늘자리가
네 엄마 얼굴처럼 말갛다.
아가야 아가야 수평선은 아직 멀다.
강어귀에 닿으면 파도소리를 따라 걸어라
소리가 별이 되고 별이 이슬이 되고
그리고 어느 날 호수가 되고 눈물이 되고
아가야 음양 따라 세상은 달라질 것
벌레들이 앞다투어 날아오른다.
풀잎과 나무들과 산하대지가 흔들린다.
어쩌다 쓰러지면 그 큰 가슴이
너를 안아 일으키리라. 가거라 아가
참 사람 기척하는 흙밭으로
얼음 경상
최명길
새봄 천화대 천길 바위틈에
경상 한 틀 놓였다.
눈발로 짓이겨진 얼음 경상
상 위에는 단풍 잎사귀 하나가
경전인 듯 반듯이 펼쳐져 있다.
너무 많이 누가 들춰 보았다는 건가
낡아 뒤가 휘황하다.
샛별이 앉아 읽어 본 듯
주위가 별자리처럼 파여 들어갔다.
물까마귀도 읽다 만 듯
발자국에 온기가 스며있다.
독대
최명길
나는 어느 누구와 독대하리오,
아무도 독대할 이 없기에
나는 허공이요 갈피리라오,
독대할 이 없는 이 가슴은
외로움도 원망도 사라졌다오,
메마르고 뒤틀린 협곡이라오.
간밤에는 내 묵은 귓바퀴에
무슨 소리 스치는가 싶었으나
신의 목소리는 아니었다오.
분명 그러했으므로 없다오.
아무도 독대해 기릴 이 없기에
나를 지킬 이 나일 뿐이라오.
뼈 울음
최명길
그 해 그믐날 해 질 녘에
설악산 그림자를 끌어안고
풍뎅이처럼 다소곳해진
나
몸을 버리올 제 천지의 말들이 들려왔다.
구와 눈으로서가 아니라 뼈가 소리 내어 울면서
시늉하옵기를
우주를 받아들고 뼈가 울면서
마지막으로 잎사귀 하나를 떼어 내거라
네 본성을 떼어 내거라
라고 하는 것이었다.
날개 하나를 떼어 내거라
죽어가는 처참한 몸으로
들어서는 안 될 말씀을 듣고야 말아
더 죽지 못한 이 나의
썩은 관짝 같은 몸뚱어리이지만
그래도 어떻게 무얼 좀 해보려고
정려의 순간을 매만지기도 하는
마음은 왜 이리 뭉툭한지
숟가락을 막 놓을 순간
최명길
숟가락을 막 놓은 순간
그 반짝하는 찰나
숟가락 볼록한 얼굴 속으로
내 얼굴이 들어간다
숟가락 얼굴 속으로 무작정 뛰어든 내 생애
조금 길쭉하고 이마에 주름 깊게 파인
좀 희한한 나
그 나가 쭈거러들어 볼이 볼록해진 채로
갸름하고 반듯한 숟가락 잘 생긴 얼굴에
거꾸로 들어가 매달린다.
이 두 개의 얼굴 앞에 언뜻 앉은 나
늘 혼자인 줄 알았으나
얼굴 셋을 함께 대하니 묘하다.
밥을 시작할 때에는 몰랐지만
밥숟가락을 놓을 때에야 문득 본
이 미묘경
물무늬 한 잎
최명길
흘러가는 붓도랑 물 위에
꽃잎 떨어져 누웠다.
가장자리에 물무늬도 한 잎 떴다.
작으나 꽃잎보다 조금 큰 게
실금 테두리를 그었다.
그러나 그건 꽃잎이 아니었다.
꽃잎 아닌 물무늬 한 잎
꽃잎이 온몸을 던져 새겨놓은
고요의 마지막 쪼가리
물결치는 고요 한 잎사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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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말
이런 조금 알록한 시를 한데 모아 보았다. 실은 나는 이런 시를 향해 몸부림쳤으며, 이런 시에 묻혀 살아온 것 같다. 나는 무위와 유위의 사잇길을 아슬아슬하게 걸어왔다.
직시해 내가 직관적으로 얻었던 내면의 목소리를 듣고 문득 어수룩한 마음자리를 엿보았던, 매 순간의 울림은 시의 몸짓에 굴절 용해되어 찔레 가시덤불처럼 웅크려 있다. 어스름 · 물까마귀 · 얼음 · 사유 · 잎사귀 · 명멸(…) 등의 말은 지극히 아꼈다.
하지만 어디 까치발 한쪽이나마 적기에 제대로 읊조렸는지 모를 일이다. 이 못난이들이 깜깜한 미망의 절벽 구렁텅이에서 제대로 깨어나지 못하고 그저 허우적거릴 뿐일지라도 묘오의 맑은 흔적이 다소 묻어난다면 좋으련만, 내 안팎은 왜 이리 암담한가.
말해다오, 시여. 너가 나인가. 내가 너인가.
2013년 8월 1일
설악산 곁에서
최명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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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길 遺稿詩集 [※잎사귀 오도송※]
[ 해설 ] -
자연에 대한 연기론적 인식
-『잎사귀 오도송』의 시세계
박호영(시인, 문학평론가)
1. 들어가며
최명길(1940~2014)은 불교와 깊은 인연이 있는 시인이다. 숙명적인 관계라는 생각조차 든다. “평생 절간 주위를 맴돈 것 같다”는 시인의 언급도 있지만 그가 만 스물 되던 해에 무작정 머리를 깎고 대승사란 절을 찾아갔던 일이나, 원효사상의 대가인 이기영 선생을 만나 그를 따라 산천을 유람하며 많은 깨우침을 얻고 ‘해운’
이란 법명을 받은 것은 결코 우연이라고 할 수 없는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시집은 제목부터 불교적 체취가 물씬 풍긴다. 특히 그의 삶의 후반부에 펴낸 시집들이 그렇다.『콧구멍 없는 소(2006)』,『하늘 불탱(2012)』, 그리고 이번시집『잎사귀 오도송』모두 제목만 보더라도 불교와의 연관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잎사귀 오도송』은 그의 사후 2주년 되는 해에 나오게 되어 유고시집이 되었지만, 사실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은『잎사귀 오도송』서두의 ‘시인의 말’에 적시된 날짜 ‘2013년 8월 1일’만 보더라도 알 수 있듯이 그의 생전에 쓰여진 것들이다.
‘시인의 말’에는 주목할 만한 구절이 있다. “나는 무위와 유위의 사잇길을 아슬아슬하게 걸어왔다”가 그것이다. 유위는 인간이기에 겪지 않으면 안 될 모든 현상이다. 모든 사물이 생기고, 머물고, 변화하고, 소멸하게 마련이거늘 이것을 어찌 평범한 인간이 벗어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시인은 이에 얽매어 있으면서도 한편으로 생주이멸生住異滅의 변천이 없는 진리를 탐구해 왔다. 만유의 본체가 무엇인가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했고, 현상의 허망함을 깨달아 진실을 궁구했으며, 번뇌의 속박에서 해탈하고자 노력했다. 시인의 말대로 무위와 유위의 사잇길을 걸어온 것이다. 그러면서 그가 귀기울여 들은 것은 ‘울림’이다. 울림에는 그를 사방에서 둘러싼 사물들의 울림도 있고, 내면의 울림도 있다. 그 울림을 그는 시에 담고자 했다. 그것은 그에 의하면 ‘묘오의 맑은 흔적’이다. 이 흔적을 몇 갈래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
2. ‘잎사귀’를 통해 본 연기론적 세계관
우주의 삼라만상은 모두 기氣를 포함하고 있다. 생명체만이 아니라 바위와 같은 무생명체까지 기를 지니고 있다. 무생물이 지각이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다만 지각이 ‘잠자고’ 있을 뿐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자연의 두두물물은 각각의 존재가 타자의 존재를 존재케 하는 기의 욕망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모든 사물들은 서로 의존하여 존재하는 것이고, 어떤 존재도 주위의 다른 존재 없이 단독으로 존재할 수 없다. 거대한 바위나 나무를 <우주적 일심一心의 한 가족>이라 함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자연과 달리 인간은 존재론적 욕망만이 아니라 소유론적 욕망에 사로잡혀 있기에 타자에 대한 배려가 없고 이기주의에 함몰되어 있다. 주위의 사물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런 연유로 그들로부터 나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한다.
자연의 사물들은 저마다의 말을 하고 있다. 어떻게 해서 그들이 우주의 섭리를 받아들이고 살아나가는가를 표정이나 태도로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가장 적절하게 우주를 살아가는 법을 알고 있다. 그들의 존재론적 욕망은 소박하고 진지하다. 우리가 그들을 주시해야 하는 것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말을 건네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일깨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물들을 눈여겨보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우주와 함께 할 수 있다. 바람직한 우주의 일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최명길 시인은 일찍이 자연과 더불어 살며 그들로부터 가르침을 얻었다. 그가 “이슬 한 알갱이에서 천둥과 번개를 동반하고 지축을 찢던 굉음”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자연을 나의 분신으로 생각했던 결과이다. 이미 삼십여 년 전에『바람 속의 작은 집』‘자서’에서 “나는 내 속 깊은 곳을 향해 계속 눈을 뜨고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곳의 등불, 별, 바람소리, 새, 나무, 달, 풀잎, 황혼, 이슬 등은 이런 나를 중심으로 가까이 다가왔고, 나는 이들과 더불어 시의 길을 걸었다”라고 말했다. 이번 시집의 첫 머리에 실린「잎사귀 오도송」도 벌레가 갉아먹은 잎사귀로부터 깨달음을 얻어 지은 시이다. 시 전문은 다음과 같다.
드문드문 구멍 난 잎사귀
벌레가 한 평생 얻어먹고 남은 양식
그 입 자리 참 까치랗다
휑뎅그렁한 구멍으로는
금풍동자가 놋좆에 노를 꿰어놓고
빈 배를 젓고 있다
똑딱거리는 잎사귀배
암만 가도 제자리 뜨기지만
깊은 산 산그림자가 종일 타고 논다
난간에는 등이 찢긴 껍데기
마른 안을 기웃해 들여다보면
당체가 사라지고 없다
-「잎사귀 오도송」전문
시인이 시적 대상으로 삼은 것은 늦가을에 땅에 떨어진 마른 잎사귀이다. 그 잎사귀는 온전치를 못하다. ‘드문드문 구멍’이 나 있고, 가장자리는 찢겨져 있다. 잎사귀로서의 본체라고 할 수 있는 ‘당체가 사라지고 없’는 것이다. 그런 잎사귀를 ‘빈 배’로 비유함은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무욕의 상징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잎사귀를 ‘빈 배’로 보는 시인의 환치의 수준은 이 정도에서 그치지 않는다. 가을바람에 이리 저리 뒹구는 잎사귀를 보고 “금풍동자가 놋좆에 노를 꿰어놓고/빈 배를 젓고 있다”고 표현한 것이다. 뛰어난 아날로지요, 시적 상상력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시인은 이 잎사귀로부터 무엇을 깨달았을까. 자기 한 몸을 희생하여 벌레의 한 평생 양식을 제공한 보시의 공덕이다. 벌레는 그 잎사귀가 있음으로 해서 생명을 유지하고 살 수 있었다. 이제 잎사귀는 희생적인 보시 탓에 몸이 망가진 채 죽음을 향하고 있지만, 이 모습 자체가 교훈적이다. 하이데거에 기대어 말한다면 <자연의 자연성>으로 세계의 비밀스러움을 드러내면서 우리에게 깨달음의 말을 건네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오도송’이다. 「어스름 한 잎」도 같은 범주에 드는 시이다.
누가 떨어뜨렸는지 나풀나풀
대청봉 작은 나뭇잎 하나가 날아와
온 동해를 다 덮어버렸다
저녁쌀을 이느라
파도아가들은 싸르락거리고
바다가 먹을 양식 모래쌀을 이느라
짜장게들이 먹을 쌀을 이느라
나뭇잎 보자기 그 은밀한 틈새마다
파도 손가락들 쉴 새 없다
한가히 그러나 늘 고만큼하게
-「어스름 한 잎」전문
이 시는 첫 연부터 우리의 상식을 벗어나 읽는 이를 당황스럽게 한다. “대청봉 작은 나뭇잎 하나가 온 동해를 다 덮어버렸다”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나뭇잎은 지극히 작고, 동해는 엄청나게 크다는 것은 세간에서 설정해 놓은 분별에 지나지 않는다. 이 무명에 지나지 않는 분별을 초탈하면 얼마든지 나뭇잎이 동해를, 아니 동해보다 더 큰 대양도 덮을 수가 있다. 서로 의지해서 존재하는 출세간의 세계에서는 거대한 나뭇잎과 조그마한 동해가 존재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다. 그 나뭇잎은 동해를 덮을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감쌀 수 있는 ‘보자기’가 된다. 보자기 밑의 ‘은밀한 틈새’에서 파도는 ‘바다’와 ‘짜장게’들을 공양하기 위해 쉴 새 없이 ‘손가락들’을 놀린다. 계속 해안으로 밀려 왔다 밀려 가는 것이다. 그러나 결코 분수없이 행동하지 않는다. ‘한가히’ ‘고만큼하게’ 절도 있는 공양을 한다. 결국 대청봉과 나뭇잎, 그리고 동해와 파도는 산과 바다의 사물들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섭리 안에서 서로 융통하고 배려하며 존재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최명길 시인의 연기론적 세계관을 간파한다. 연기론의 골자는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다는 것이다. 서로는 의지해서 존재하며, 모든 현상은 인과 연의 상호 관계 속에 성립한다. 이 시는 그 세계관을 잘 보여주고 있다. 연기론이 주는 교훈은 내가 나 아닌 것들에 의지해서 존재하니 나 아닌 것들에 대해 무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다음 시는 이 세계관의 정수를 보여준다.
방아깨비가 풀잎에 내려앉았다
순간 풀잎이 조금 흔들렸다
흔들리다 제자리로 돌아가다 생각났다
방아깨비에게는 이게 집이었을 거라
단칸 집, 단칸집이 흔들렸다
흔들리다 제 자리로 돌아갔다
갉아 먹힐 때에도 조금 흔들렸다
기둥이 부러져도 불평 없이
갉아 먹힌 자국이 게 집게다리처럼 벌어지자
허공이 올라앉아 크게 한 번 웃었다
허공을 따라 어스름도 크게 한 번 웃었다
주인이 오그라든 집 한 켠에
쪼그리고 앉았다가 휙, 하고 뛰었다
오그라든 곡선과 늘어진 곡선이
춤을 추듯 휘청하고
느닷없이 알록한 아욱꽃이 떨어졌다
우주 비밀을 엿듣는 이 순간
-「풀잎 단칸 집」전문
방아깨비와 풀잎의 관계는 어떠한가. 방아깨비의 집을 제공해주는 것이 풀잎이다. 하지만 엄밀히 따져 방아깨비에게 풀잎은 큰 집이 되지 못한다. ‘단칸’이라는 좁은 공간의 집이다. 그러나 ‘단칸집’은 엄연히 집의 기능을 한다. 여기서 우리는 왜 시인이 ‘단칸 집’과 ‘단칸집’을 연이어 늘어놓았는가를 깨닫는다. 그것은 결코 띄어쓰기를 잘못한 것이 아니라, 그 나름의 시인의 의장意匠이다. ‘단칸 집’과 ‘단칸집’은 다르다. ‘단칸 집’이 ‘단칸’에 강조를 둔 시어라면, ‘단칸집’은 ‘집’에 강조를 둔 시어이다. 그러니까 비록 좁지만 집으로서의 아늑함과 편안함을 제공한다는 의미에서 “단칸 집, 단칸집”이라고 한 것이다. 또 하나 우리가 유의해야 할 시어는 ‘제 자리’와 ‘제자리’다. ‘제 자리’는 ‘자기의 자리’요, ‘제자리’는 “본디 있던 자리”이다. 방아깨비가 내려앉음으로써 풀잎이 흔들릴 때, 풀잎은 본디 있던 자리인 ‘제자리’로 돌아가려 했다. 그러다 생각이 났다. 방아깨비에게는 자신의 존재인 풀잎이 집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하여 자기의 자리로 돌아갔다. ‘제자리’가 아닌, 자기의 자리인 ‘제 자리’를 찾았다. ‘제자리’만의 고집은 풀잎이 방아깨비의 집이 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것은 풀잎이 주위의 사물들에 대한 배려 없이 홀로 존재하겠다는 것과 다름이 없다. 하지만 상호 의존 관계에 있는 자연의 사물들은 소유론적 욕망이 없기에 그러질 않는다. 그래서 단지 자기의 자리만인 ‘제 자리’로 돌아갔다. 뿐만 아니라 방아깨비에게 갉아 먹혀도, 갉아 먹혀 그 자국이 게 집게다리처럼 벌어져도, 방아깨비의 삶을 위해 그 고통을 감내한다. 허공과 어스름은 웃음으로써 풀잎의 공덕에 호응한다. 그런데 그 찰나 뜻하지 않은 일이 발생한다. 방아깨비의 움직임에 아욱꽃이 떨어진 것이다. 그 떨어짐은 우연이 아니다. 모두가 연결망 속에 있다. 그러므로 방아깨비로 말미암아 아욱꽃은 떨어졌지만, 아욱꽃은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또 다른 사물과 인연을 맺고 있는지 모른다. 그것이 바로 우주의 섭리요, 연기론적 세계이다.
3.‘허공’과‘고요’에 대한 사유
또 하나 ‘묘오의 맑은 흔적’은 ‘허공’과 ‘고요’이다. ‘허공’과 ‘고요’란 시어는 최명길 시에서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허공’은 “무한한 우주 공간의 비어 있음”을 말한다. 비어 있으면서,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하고 순수하다. 설사 더러운 것에 물들었다 하더라도 일시적일 뿐 다시 청정해진다. 이런 허공의 특성은 수용의 가능성을 예측케 한다. 어느 것도 허공 속에 수용될 수 있다. 그것은 허공의 무한함이요, 넉넉함이기도 하다. 그러나 결코 허공이 절대자의 위치에 있지 않다. 허공 속에 있는 다른 것들과 분별없이 상응한다. 이것이 허공에 대한 시인의 인식이다. 그의 시「달마봉 묵밭 매고 돌아오던 날」을 보면 이 사실을 쉽게 감지하게 된다.
그 밤 달은 이미 중천에 떠 한가했다
아니, 달이 하늘을 반이나 뒤덮었다
그보다는 달이 허공을 먹어치우고 있었다
달이 후루룩하자
잔치국수가락처럼 허공이 빨려 들어갔다
그게 아니라 달이 허공을 먹었는지
허공이 달을 먹었는지 아무튼
도무지 모호한 경계에 걸려들어
한 동안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누가 어깨를 툭 치며 중얼거렸다
절대 알리지 말게나 오늘 보았던 걸
한 백년쯤 입을 다물게나 그리고(…)
그 사이 달은 산등성이에 기대앉고
허공 반쪽이 벌린 석류알처럼 붉어졌다
나는 무릎을 꺾어 대문턱에 괴었다
-「달마봉 묵밭 매고 돌아오던 날」전문
허공이 달과 융화를 한다. 그러나 그 융화를 쉽게 수긍할 수 없다. 어떻게 달이 허공을 먹어치우고, 허공이 잔치국수처럼 빨려들 수 있는가. 원래 허공을 바탕으로 하여 달이 있는 것이다. 달뿐만 아니라 해와 별, 구름까지도 그렇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하게 되는 것은 허공은 과연 구체적으로 존재하는가이다. 알다시피 허공은 무이다.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있는 것이 허공이다. 허공이 있으려면 달, 해, 별, 구름이 존재하여야 한다. 그 전제 하에서만 허공은 있을 수 있다. 이른바 진공묘유眞空妙有이다. 그런데 지금 시인은 허공이 달을 먹었는지, 달이 허공을 먹었는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허공 속에 달이 있고, 달 속에 허공이 있기 때문이다. 허공 반쪽이 붉어진 것을 보면 허공이 달을 먹은 것이요, 달이 허공 없이 산등성이에 기대앉은 것을 보면 달 속에 허공이 있는 것이다. 이런 교융을 통해 시인이 얘기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달과 허공 간에는 분별이 없다는 것이다. 달과 허공 중 어느 것이 더 큰지, 어느 것이 더 가치가 있는지 둘은 우위를 논할 수 없을 만큼 평등하다. 둘은 상의相依한다. 달과 허공은 자아 중심의 소유론적 발상을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얼마든지 달이 허공에 먹힐 수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가능한 것이다. 원효가 말한 ‘융이이불일融二而不一’의 경지라고 볼 수 있다. 시인은 지금 그 경지를 ‘달마봉 묵밭 매고 돌아오던 날’ 밤에 외경의 태도로 지켜보고 있다. 다음 시에서는 ‘말끔한 허공’이 등장한다.
길에서 삶을 시작해
길에서 삶을 접었다
몇 시절 쓰디쓴 소태꽃이 피었다 졌다
길이 끝나는 곳에
돌무덤이 하나 생겼다
말끔한 허공이 하나
모로 누워 잠들었다
-「쓰디쓴 소태꽃」전문
이 시의 주체는 ‘소태꽃’이다. 오뉴월이 되면 황록색을 띠며 피는 소태꽃, 그러나 소태꽃은 태생적으로 ‘쓰디쓴’ 존재이다. 쓰디쓴 삶이 몸에 배어 있다. 업고를 지고 태어난 것이다. 전생에 어떤 카르마가 그에게 있었던 것일까. 심지어 그 쓰디쓴 삶이 한 생에 그치지 않는다. 피었다 지기를 몇 시절한다. 길에서 태어난 ‘쓰디쓴’ 존재가 소외되어 있으면서 아무런 불평 없이 자신의 삶을 몇 차례 반복하다가 길에서 죽은 것이다. 소태꽃은 겸허히 우주의 원리에 대한 순응을 했다. 이제 그 소태꽃이 죽어 돌무덤이 되었다. 시인은 그것을 ‘말끔한 허공’이라고 부른다. 사사로움이 없이 무의 세계로 돌아갔으니 ‘허공’이 아니고 무엇이랴. 살아 있을 때 속세에서는 쓰디쓴 존재로 차별을 받았지만, 죽어서 해탈하여 번뇌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허공이 된 것이다. 비로소 무애자재하며, 모든 것이 평등한 세계로 돌아왔다. 여기서 우리가 묻게 되는 것은 시인이 왜 다른 꽃들도 많은데 소태꽃에 눈길을 주게 되었을까이다. 아마도 그것은 자신의 삶이 소태꽃과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설사 아닐지라도 소태꽃처럼 업고를 벗어나 죽어서는 ‘말끔한 허공’이 되고 싶은 것은 아닐까. 소태꽃에 대한 동일화의 지향이다. 지금 시인은 그 소태꽃과 같은 삶의 마무리를 꿈꾸고 있는지 모른다.
‘허공’과 더불어 이번 최명길 시에서 눈길을 주게 되는 시어는 ‘고요’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고요는 모든 것이 잠자는 듯이 정지된 상태, 시끄러움이 배제된 정적의 분위기이지만, 시인의 ‘고요’는 반드시 그렇지 않다. 한마디로 잠재성을 지닌 고요이다. 하이데거가 말한 <모든 운동들보다도 끊임없이 더 운동하고 있으며, 개개의 모든 운동보다 언제나 더 활동적>인 고요로 볼 수 있다. 그 고요는 결코 ‘묘지의 적막’같은 고요는 아니다. ‘울림’이 있는 적막이다. 그러므로 눈여겨보고, 귀 기울려 들을 필요가 있다.
꽃과 잎사귀 사이에서
노니는 공간, 길 아닌 길이 하나
거기 놓여 있다
잎사귀가 끌어들이는 고요
여명이 트이는 길
때로는 물총새의
깃 파닥임 소리가 들려오고
산푸른꼬마부전나비가 기웃거리기도 하고
얼핏 모시 치맛자락이 스치기도 하는
아래 허공 절벽
잎사귀 위
알 수 없는 그 높이와 깊이가
어쩌다 잠깐 내 눈을 어지럽혀
곰곰이 다시 들여다보는
무한 정막 안
사라져 그림자만 기우뚱 남아
빈 터에 어른대는
백공천창 황룡사 목탑
-「청달개비 잎사귀에 놓인 절벽」전문
시인이 여기서 얘기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먼저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은 그가 설정해 놓은 ‘허공 절벽’이란 공간이다. ‘허공 절벽’은 허무와 절체절명의 상징이라 볼 수 있다. 그곳에서 떨어지면 만사휴의 만사휴의萬事休矣이다. 그런데 잎사귀 위는 ‘노니는 공간’이요, 잎사귀 아래가 바로 허공 절벽이다. 잎사귀 위에서는 물총새와 산푸른꼬마부전나비의 움직임이 있다. 얼핏 모시 치맛자락이 스치기도 한다. 모두 세간에서 대할 수 있는 미혹적인 현상이다. 그들로 말미암아 잠깐 ‘나’의 눈은 어지럽다. 그러나 곧 깨닫는다. 세간의 현상이 얼마나 의미 없고, 허무한가를. 그 깨달음은 잎사귀가 끌어들인 ‘고요’로부터 얻어진 것이다. 고요는 ‘노니는 공간’으로부터 거리를 두게 했고, 고요가 조성한 ‘무한 정막 안’을 ‘나’로 하여금 곰곰이 다시 들여다보게 했다. 그 결과 화려하고 웅장하던 황룡사 목탑조차도 ‘백공천창’처럼 엉망이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야말로 재행무상이요, 제상비상이다. 그러므로 ‘노니는 공간’은 ‘길아 닌 길’이다. ‘고요’의 철학을 펼치고 있는 또 다른 시「굼벵이의 무금선원」을 보도록 하자.
한철 걸림 없는 삶이란
실로 저런 고요 후에 온다는 듯
한번 꼼지락했을 뿐 더는 다른 동요가 없다
하지만 그를 보는 나는 송연했다
벽암 부러지는 소리라도 들렸던가
-「굼벵이의 무금선원」중
‘무금선원’이란 시간이 멈추어 선 곳을 말한다. 굼벵이를 보면 움직이는 건지 움직이지 않는 건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그에게도 분명 하루 일과가 있고, 먹이 활동이 있을 터인데 얼핏 보면 꼼짝을 하지 않는 것 같다. 그를 보면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의 구분이 아무 의미가 없다. 시간에 구애 받지 않는 ‘걸림 없는 삶’을 그는 살고 있다. 한마디로 ‘무금선원’이다. 시인은 그러한 굼벵이의 모습을 ‘고요’라고 했다. 그러나 그 고요는 그에게 “벽암 부러지는 소리”로 인식될 만큼 충격적이다. 함묵 속에 담긴 사자후와 같다. 그것은 곧 고요의 부름이요, 적막의 울림이다. 이 울림이 ‘걸림 없는 삶’을 살지 못한 시인을 깨우쳐 존재의 자각을 하게끔 하기에 그는 두려워 몸을 웅크리게 된 것이다.
4. 자아의 완성을 위한 두타행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유난히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고 있다. ‘자기 자신에 대한 물음’이 많은 것이다. 이 물음은 존재자로서의 자신에 대한 진지한 태도로부터 발생한다. 더구나 앞서 살아온 삶의 시간보다 죽음의 시간이 더 가까운 나이가 되고 보면 현존재의 유한성을 생각하기 마련이어서 이 물음을 번번히 하게 된다. 그는 물음 속에서 자신이 무언가 부족하고 불만족스럽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다음처럼 자신에 대해 엄중한 질책을 한다. “탐욕덩어리 한 사발 남아/괴괴한 악취를 풍길 뿐”(「괴괴한 악취」) “나는 한 평생/쓸모없는 짓만 골라 하다 말았구나”(「아무 짝에도 쓸데없는 짓」) “그무지랭이/그가 바로 나다”(「실험실」) “썩은 관짝 같은 몸뚱어리이지만/그래도 어떻게 무얼 좀 해 보려고”(「뼈 울음」) “쓰디쓴 소태 물굽이에 휩쓸려/어디 붙잡을 손잡이 하나 없이/어설프게 살아온 나”(「명멸」) 등등. 어떻게 보면 너무 가혹하다 할 정도로 자신을 꾸짖는 것 같다. 그는 끊임없이 구도와 명상의 태도로 자아의 완성을 꾀한 시인인데, 그런 기준에서 자신을 돌아보기 때문이다.
자아의 완성을 꿈꾼다는 것은 불가와 연관지어 본다면 성불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나는 이전에 그의 시세계를 논하면서 그가 바라는 바는 “홀로 있으면서 세상 모든 일에 집착을 버리고 묵묵히 자기 길을 가는 뿔무소가 되는 것”(「자연을 향한 외로운 존재의 사유」,『문학청춘』22호, 2014 겨울)임을 밝힌 바 있다. 그는 아무런 구애 없이 자유롭기를 바라 “나는 콧구멍 없는 소다”(「콧구멍 없는 소」)라고 외치기도 했다.『잎사귀 오도송』에서는 ‘인욕선인’이 그가 바라는 존재이다.
누가 나를 발로 차고 돌로 쳐
두 팔 모두 뽑아가도 미소 지으리
고요로이 산정에 홀로 앉아
진눈깨비 칼바람 불벼락 퍼부어도
두 발 모두 뽑아가도 두 눈 두 귀
혓바닥까지 모두 뽑아가도
지으리, 인욕선인처럼
숨마저 내어주며 미소 지으리
-「산정에 홀로 앉아」전문
‘인욕선인’이란 어떤 존재인가? 이 시 말미에 있는 각주에 따르면 인욕선인은 “석가의 전생 혹은 수행 중의 모습이요, 이후 완벽으로 나아가 지혜와 자비를 구족”한 존재이다. 원래 인욕이란 이상理想의 경지에 이르고자 하는 보살 수행, 즉 바리밀의 하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 쉬운 수행인가. 온갖 모욕과 번뇌를 참고 원한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은 평범한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시인은 그런 존재가 되고자 한다. 이렇게 그는 끊임없이 무애, 자재한 존재가 되기 위해 수행에 힘쓴다. 그는 칠십이 넘은 나이에 “뼈만 남은 알거지”가 되었다고 고백할 만큼 어려웠던 사십일 간의 백두대간 종주를 했는데, 그의 이러한 두타행도 사실 수행의 한 방편이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대로 최명길 시인과 자연은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관계 속에 있다. 그가 곧 자연이요, 자연이 곧 그다. 그는 자연의 미물조차 그대로 보아 넘기지 않았다. 그를 줄곧 옆에서 지켜본 시인의 말에 따르면 산길에 떨어진 마른 잎사귀 하나를 주워 들고서도 그는 사색에 잠기고, 잎맥의 모양새를 살피고, 그 마른 모습을 보며 잎사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가를 그 나름으로 주위 사람에게 설명하려고 했다고 한다. 시인의 이러한 태도는 앞서 언급했듯이 연기론적 세계 인식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그는 자연의 모든 사물들이 서로 얽히고 의지하며, 서로를 비춘다는 사실을 일찍이 간파했다. 삼라만상이 중중무진한 연기의 세계 속에 놓임을 체득한 것이다. 현대인들이 눈앞에 보이는 현상에만 집착할 뿐 본질을 망각하여 그로 인한 비극이 끊이지 않는 현실에서, 자연의 사물을 통해 내가 나 아닌 것들에 의해 존재한다는 연기론적 진리를 일깨워주는 이번 시집은 삶의 正道를 걷고자 하는 이에게 많은 도움을 주리라 믿는다.(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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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4의 글 ◆
시인은 산길에 떨어진 마른 잎사귀 하나를 주워 들고서도 사색에 잠기고, 잎맥의 모양새를 살피고, 그 마른 모습을 보며 잎사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가를 그 나름으로 주위 사람에게 설명하려고 했다고 한다. 시인의 이러한 태도는 연기론적 세계 인식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그는 자연의 모든 사물들이 서로 얽히고 의지하며, 서로를 비춘다는 사실을 일찍이 간파했다. 삼라만상이 중중무진한 연기의 세계 속에 놓임을 체득한 것이다. 현대인들이 눈앞에 보이는 현상에만 집착할 뿐 본질을 망각하여 그로 인한 비극이 끊이지 않는 현실에서, 자연의 사물을 통해 내가 나 아닌 것들에 의해 존재한다는 연기론적 진리를 일깨워주는 이번 시집은 삶의 正道를 걷고자 하는 이에게 많은 도움을 주리라 믿는다.
― 박호영(시인·문학평론가)
이런 조금 알록한 시를 한데 모아 보았다. 실은 나는 이런 시를 향해 몸부림쳤으며, 이런 시에 묻혀 살아온 것 같다. 나는 무위와 유위의 사잇길을 아슬아슬하게 걸어왔다.
― 시인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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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명길 시인∥
∙ 1940년 강릉에서 출생했다.
∙ 경희대학교 교육대학원 졸업.
∙ 1975년『현대문학』에 시「해역에 서서」「자연서경」「은유의 숲」 등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 시집으로『화접사』『풀피리 하나만으로』『반만 울리는 피리』『은자, 물을 건너다』『콧구멍 없는 소』『하늘 불탱』이 있고, 109편의 명상시집『바람 속의 작은 집』과 디지털영상시선집 『투구 모과』가 있다.
∙ 1969년 설악문우회 발기인으로 참가하여 동인지『갈뫼』를 창간했고, 1981년 이성선, 이상국, 고형렬 시인들과 더불어 ‘물소리시낭송회’를 시작하여 18년 동안 상임시인으로 활동했다.
∙ 만해 ‘님’ 시인상, 한국예술상, 강원도문화상(문학부문)을 수상했으며, 40년간 교육계에 헌신한 공로로 홍조근정훈장을 받았다.
∙ 2002년 40일간 백두대간을 종주했고, 2003년 아프리카 킬리만자로를, 2005년 히말라야 안나푸르나를 포행했다.
∙ 유고시집으로 타계 전까지 원고를 손본 시집『산시 백두대간』이 있다. 2014년 5월 4일 향년 75세를 일기로 영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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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명길 시인이 우리 곁을 떠난 지 2년의 세월이 지난 2016년 5월 7일(토요일), 그의 시 근간을 이룬 백두대간 설악산을 바라보는 강원도 속초시 영랑호 영랑호반길 습지 생태공원 영랑호변에 최명길 시비詩碑 가 건립되었습니다. 아래의 사진은 한국문인협회 강원지회(http://cafe.daum.net/kwmunin/) 및 시인 최명길(http://cafe.daum.net/myyng/)에서 가져왔습니다. 삼가 최명길 시인님의 명복을 빌어올립니다. - 카페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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