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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6년 5월 19일 화요일
[(백) 부활 제7주간 화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예루살렘으로 가면서, 하느님 은총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다 마칠 수만 있다면 목숨이야 조금도 아깝지 않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로 가시며, 제자들을 위하여 아버지께 기도하신다(복음).
제1독서
<나는 달릴 길을 다 달려 주 예수님께 받은 직무를 다 마칩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20,17-27
그 무렵 17 바오로는 밀레토스에서 에페소로 사람을 보내어
그 교회의 원로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18 그들이 자기에게 오자 바오로가 말하였다.
“여러분은 내가 아시아에 발을 들여놓은 첫날부터 여러분과 함께
그 모든 시간을 어떻게 지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19 나는 유다인들의 음모로 여러 시련을 겪고 눈물을 흘리며
아주 겸손히 주님을 섬겼습니다.
20 그리고 유익한 것이면 무엇 하나 빼놓지 않고 회중 앞에서
또 개인 집에서 여러분에게 알려 주고 가르쳤습니다.
21 나는 유다인들과 그리스인들에게,
회개하여 하느님께 돌아오고
우리 주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고 증언하였습니다.
22 그런데 이제 나는 성령께 사로잡혀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나에게 무슨 일이 닥칠지 나는 모릅니다.
23 다만 투옥과 환난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성령께서 내가 가는 고을에서마다 일러 주셨습니다.
24 그러나 내가 달릴 길을 다 달려 주 예수님께 받은 직무
곧 하느님 은총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다 마칠 수만 있다면,
내 목숨이야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25 이제, 내가 두루 돌아다니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한 여러분 가운데에서
아무도 다시는 내 얼굴을 볼 수 없으리라는 것을 나는 압니다.
26 그래서 여러분 가운데 그 누구의 멸망에 대해서도
나에게는 잘못이 없다는 것을,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엄숙히 선언합니다.
27 내가 하느님의 모든 뜻을 무엇 하나 빼놓지 않고
여러분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아버지,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7,1-11ㄴ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1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말씀하셨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도록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
2 아버지께서는 아들이 아버지께서 주신 모든 이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도록
아들에게 모든 사람에 대한 권한을 주셨습니다.
3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4 아버지께서 저에게 하라고 맡기신 일을 완수하여,
저는 땅에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였습니다.
5 아버지, 세상이 생기기 전에 제가 아버지 앞에서 누리던 그 영광으로,
이제 다시 아버지 앞에서 저를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
6 아버지께서 세상에서 뽑으시어 저에게 주신 이 사람들에게
저는 아버지의 이름을 드러냈습니다.
이들은 아버지의 사람들이었는데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켰습니다.
7 이제 이들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모든 것이
아버지에게서 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8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말씀을 제가 이들에게 주고,
이들은 또 그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이들은 제가 아버지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참으로 알고,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9 저는 이들을 위하여 빕니다.
세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을 위하여 빕니다.
이들은 아버지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10 저의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고
아버지의 것은 제 것입니다.
이 사람들을 통하여 제가 영광스럽게 되었습니다.
11 저는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않지만 이들은 세상에 있습니다.
저는 아버지께 갑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영광을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요한 17,1). 요한 복음서에 거듭 나오는 ‘하느님 아버지를 드러내고 영광스럽게 한다.’는 표현은 다름 아닌 십자가를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높이 들어 올려지시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길입니다. 우리 인간의 눈으로는 예수님의 삶에서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운 상태로 보이는 지점이 하느님 보시기에는 최고점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낮추시고 고난을 겪으신 예수님께서 구세주이심을 알아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이러한 예수님을 알아보는 사람이 나타납니다.
바로 십자가 밑에 서 있던 백인대장입니다. 그는 제자들과 수많은 군중과 달리 예수님께서 구세주의 모습을 모두 잃어버리시고 십자가 위에서 처참히 돌아가시는 모습을 바라보며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17,3). 이렇게 예수님을 알아본 백인대장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도 우리가 보는 최고점과 하느님께서 보시는 최고점은 완전히 다를 수 있습니다. 삶이 가장 바닥에 떨어져 있다고 느끼는 순간이라 할지라도 하느님의 영광을 발견할 수 있다면 참으로 큰 은총일 것입니다. 삶의 가장 힘든 순간이라 할지라도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계심을 알아보고, 하느님 앞에 머무는 것이 바로 참된 신앙입니다.(권순호 알베르토 신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이름을 알려주시는 이유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영원한 생명은 오직 한 분이신 참하느님을 알고, 또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중략) 저는 사람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드러내어 알려 주었습니다." (요한 17,3.6)
찬미 예수님! 부활 제7주간 화요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수난을 바로 코앞에 두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며 바치시는 그 유명한 '대사제의 기도'입니다. 이 거룩한 기도문 속에서 예수님은 우리 신앙의 궁극적인 목적지를 이렇게 요약하십니다. "저는 사람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아는 것이 곧 영원한 생명입니다."
우리는 매일 주님의 기도를 바치며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라고 외칩니다. 도대체 하느님의 '이름'을 안다는 것이 무엇이기에, 그것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준다는 것일까요? 하느님의 이름을 야훼라고 부르든, 엘로힘이라고 부르든 그 호칭 몇 개를 외우는 것이 구원의 조건은 아닐 것입니다. 이 깊고도 위대한 신비를 깨닫기 위해, 먼저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아주 흔하게 볼 수 있는 재미있는 일상 풍경 하나를 떠올려 보겠습니다.
요즘 공원이나 거리를 나가보면, 유모차에 아기 대신 예쁜 강아지를 태우고 산책하시는 분들을 참 많이 봅니다. 반려견을 키우시는 분들은 강아지를 향해 자신을 '엄마' 혹은 '아빠'라고 부릅니다. "우리 아기, 이리 와! 엄마가 간식 줄게! 아빠한테 뽀뽀!" 강아지에게 최고급 옷을 입히고, 유기농 간식을 먹이며, 자신의 모든 사랑을 다 쏟아붓습니다. 강아지를 정말 자기 친자식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강아지를 아무리 친자식처럼 사랑한다고 해도, 세상의 어떤 보호자도 강아지를 앞에 앉혀놓고 이렇게 말하지는 않습니다. "자, 뽀삐야, 잘 들어라. 내 진짜 이름은 김철수야. 그리고 내 주민등록번호는 이거고, 내 통장 비밀번호는 1234란다. 오늘부터 나를 김철수라고 부르렴!"
왜 강아지에게는 자신의 진짜 이름과 비밀번호를 알려주지 않을까요? 알려줘 봐야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강아지는 아무리 똑똑해도 인간의 언어로 그 이름을 부를 수 없고, 통장 비밀번호를 알아도 은행에 가서 돈을 찾을 수 없습니다. 결정적으로, 강아지는 평생을 엄마 아빠의 사랑을 받고 자란다 해도 결국 '개'일 뿐, 결코 '인간(나)'으로 성장할 수 없는 전혀 다른 본성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나와 똑같은 존재가 될 수 없는 대상에게는, 굳이 내 모든 것이 담긴 '이름'을 내어줄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자녀에게는 다릅니다. 아이가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 부모는 가장 먼저 자신의 이름과 신분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자녀를 자신의 가족관계증명서(호적)에 당당히 올려 자신의 성과 이름을 물려줍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 자녀는 내 살과 피(DNA)를 물려받아, 언젠가는 나와 똑같은 생각과 권리를 가진 완벽한 '인간'으로 자라날 것을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이름을 알려준다는 것은 "너는 나와 똑같은 본성을 가진 나의 후계자이며, 내 모든 것을 상속받을 자격이 있다"라는 가장 강력한 선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저는 사람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알려 주었습니다"라고 기도하신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과거 구약 시대에 하느님은 우리를 마치 당신이 기르시는 애완동물이나 피조물 정도로 대하시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우리는 죄악에 물든 짐승 같은 본성을 지니고 있었기에, 감히 거룩하신 하느님의 본성에 다가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의 이름인 '야훼'라는 네 글자가 성경에 나오면, 감히 그 이름을 발음조차 하지 못하고 '아도나이(나의 주님)'라고 얼버무려 읽어야만 했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은 절대로 함부로 풀 수 없는 무서운 암호(Code)로 굳게 잠겨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어 십자가의 피를 흘리심으로써, 굳게 잠겨 있던 그 영적 암호를 완벽하게 해독(Decryption)해 버리셨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이 단순히 무서운 심판관이 아니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다정한 '아빠(Abba)', 즉 무한히 내어주시는 '사랑의 본성'임을 만천하에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인 당신이 그렇게 “나는 나다”라는 하느님 이름을 당신 자신에게 붙일 수 있었던 것처럼, 실로암에서 눈이 떠진 태생소경도 “나는 나다”라고 고백하게 하셨습니다. 이것만이 구원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다 자존감대로, 정체성대로, 믿는대로 성장합니다.
이것은 IT 공학에서 암호화된 데이터를 푸는 원리와 같습니다. 아무리 엄청난 금액이 들어있는 비트코인 지갑이라도, 암호를 풀 수 있는 '개인 키(Private Key)'가 없으면 그것은 그저 의미 없는 쓰레기 데이터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사랑'이라는 해독 키를 우리 영혼에 입력해 주시자, 다시 말해 당신 살과 피를 내어주시자, 하느님의 그 무한한 능력과 생명이 우리 삶 속에서 실제로 작동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의 이름을 알게 되고 그 해독 키를 받아들인 우리는 도대체 어떤 존재로 변하게 될까요? 강아지가 주인의 이름을 알 수 없듯, 피조물은 창조주의 이름을 온전히 알 수 없습니다. 창조주의 이름을 온전히 안다는 것은, 우리 역시 창조주와 동일한 존재, 즉 '하느님'의 본성으로 끌어올려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아는 자녀가 “난 아버지처럼 될 수 없어. 감히…” 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초대 교회의 위대한 교부이신 성 아타나시우스 주교는 이 기막힌 구원의 신비를 단 한 줄의 문장으로 이렇게 요약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신 이유는, 인간을 하느님이 되게 하시기 위함이다." (출처: 성 아타나시우스, 『말씀의 강생에 관하여』).
이단 같은 소리로 들리십니까? 아닙니다. 이것이 가톨릭 교의신학의 핵심인 '신화(Deification, 하느님화)'의 교리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아빠, 아버지가 될 수 있도록 예수님을 통해 그분의 이름을 알려주신 유일한 이유는,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처럼 완전해질 수 있고, 더 나아가 하느님과 같은 신적 존재가 될 수 있다고 굳게 믿으시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 탈출기 3장을 보면 이 위대한 이름의 능력이 모세의 삶에서 어떻게 폭발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호렙산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하느님이 모세를 부르셨을 때, 모세는 두려움에 떨며 묻습니다. "제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가서 그분의 이름을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합니까?" 그러자 하느님께서 마침내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십니다. "나는 있는 나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있는 나'께서 나를 파견하셨다 하여라." (탈출 3,14).
하느님의 이름을 전수받기 전까지, 모세는 이집트에서 도망쳐 양이나 치던 겁쟁이 살인자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이름'을 가슴에 품고 이집트로 돌아가는 순간, 모세는 더 이상 찌질한 도망자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은 파라오 앞에 서는 모세에게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보아라, 나는 네가 파라오에게 하느님처럼 되게 하겠다." (탈출 7,1).
모세가 파라오 앞에서 지팡이를 들어 바다를 가르고 재앙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똑똑해서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알고 그 이름을 자신의 영혼에 장착했기에, 그는 파라오 앞에서 피조물이 아니라 하느님의 권위를 대행하는 '또 다른 하느님'으로 격상되었던 것입니다. (출처: 『주석 성경』 탈출기 7장).
우리는 세례를 통해 우주 창조주이신 하느님 아버지의 거룩한 '이름'을 물려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이라는 전쟁터에서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돈 몇 푼 손해 보았다고 잠을 못 자며 분노하고, 자존심 조금 상했다고 형제와 등을 돌리며 미워합니다. 십자가의 고통이 두려워 늘 세상의 쾌락과 타협하며 비겁하게 도망치려 합니다.
그런 우리를 향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피를 다 쏟아부어 너에게 하느님 아버지의 이름을 물려주었는데, 너는 어찌하여 아직도 길거리를 떠도는 짐승처럼 두려움에 떨며 살고 있느냐? 당장 그 위대한 하느님 자녀의 이름을 버리든가, 아니면 지금 당장 돌아서서 네 이름에 걸맞게 당당하고 사랑 넘치게 살아라!"
여러분은 아버지의 이름을 알 수 없는 강아지가 아닙니다. 우주의 상속자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알려주신 이유는, 우리가 하느님을 닮아 하느님처럼 이 세상을 자비롭게 다스리라는 위대한 파견 명령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어릴 때의 기억입니다. 작은 어머님께서 ‘사브레 과자’를 사 주셨습니다.
둥근 통을 열면 고소한 향이 퍼졌고, 하나씩 꺼내 먹으면 입에서 사르르 녹았습니다. 감자와 고구마, 옥수수를 먹던 제게는 참으로 특별한 맛이었습니다. 그런데 반쯤 먹고 나면 이상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제 곧 다 먹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남은 과자를 아껴야 한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그 맛을 온전히 느끼지 못하고 걱정 속에서 과자를 먹고 있는 저를 보게 됩니다. 아직 다 먹지도 않았는데, 이미 다 잃어버린 것처럼 마음이 허전해지는 경험이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와 비슷한 마음을 자주 경험합니다.
아직 오지도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하고, 아직 헤어지지도 않았는데 이미 이별을 슬퍼합니다. 옛사람들은 이를 두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미득선수실(未得先愁失), 당환이작비(當歡已作悲)” 아직 얻지도 않았는데 잃을 것을 먼저 걱정하고, 기뻐해야 할 순간에 이미 슬퍼한다는 뜻입니다.
저 역시 그런 마음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2024년 2월에 이곳 달라스에 왔고, 임기가 5년이니 이제 3년 정도가 남았습니다. 어떤 분은 “아직 3년이나 남았습니다.”라고 말하고, 어떤 분은 “이제 3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같은 시간을 두고도 사람마다 전혀 다르게 느낍니다.
그러나 신앙의 눈으로 보면, 이 모든 시간은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은총의 시간입니다. 오고 감도, 만남과 이별도 모두 하느님의 섭리 안에 있습니다. 문제는 시간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사랑하기 때문에 두려워합니다. 소중하기 때문에 잃을까 걱정합니다. 그 마음 자체는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그 걱정이 지금의 기쁨까지 빼앗아 버린다면,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꽃은 언젠가 지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지금 피어 있기 때문에 아름답습니다. 음악도 끝이 있기 때문에 슬픈 것이 아니라, 지금 울려 퍼지고 있기 때문에 기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계시면서 다가올 이별을 두려움으로 채우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함께 걷고, 함께 식사하시고, 함께 기도하시며 지금의 사랑을 충만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영원한 생명을 시간의 연장으로 생각합니다.
끝없이 오래 사는 것, 늙지 않는 것, 죽지 않는 것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영원한 생명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은 ‘지금 여기에서’ 시작되는 삶입니다. 하느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삶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은 과거에 대한 후회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지나간 시간 속에 머물러 있는 삶은 생명이 아니라 묶여 있는 삶입니다. 또한 영원한 생명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얻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걱정하며 사는 삶은 자유로운 삶이 아니라 불안한 삶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오직 ‘지금’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삶에서 시작됩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하느님을 알고, 지금, 이 순간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삶에서 시작됩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 삶을 보여 줍니다.
그는 앞으로 투옥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달릴 길을 다 달려 주 예수님께 받은 직무를 다 마칠 수만 있다면, 내 목숨이야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바오로 사도에게 중요한 것은 미래의 두려움이 아니라, 지금 주어진 사명을 충실히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 이미 영원한 생명의 길에 들어선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을 걱정하며 오늘을 흘려보낼 것입니까? 아니면 하느님께서 주신 오늘을 기쁘게 살아가며 사랑을 완성할 것입니까?
이 시간은 이별을 준비하는 시간이 아니라 사랑을 완성하는 시간입니다.
지금 함께 있다는 것, 지금 웃을 수 있다는 것, 지금 기도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이미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사제인 저에게도 같은 질문이 주어집니다. “나는 오늘을 어떻게 살고 있는가?” 남은 시간을 계산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하루를 충실히 살아가는 것이 사제의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교우 여러분과 함께하는 이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얼마나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과거는 지나갔기에 맡겨 드리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기에 맡겨 드리며, 오늘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삶, 그것이 바로 영원한 생명을 사는 길입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마지막 한 걸음>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요한 17,1ㄴ)
“저는 아버지께 갑니다.”(요한 17,11ㄴ)
당신께 가는
마지막 한 걸음
헤아릴 수 없는
삶의 걸음들처럼
오직 믿음이게 하소서
당신께 가는
마지막 한 걸음
헤아릴 수 없는
삶의 걸음들처럼
오직 희망이게 하소서
당신께 가는
마지막 한 걸음
헤아릴 수 없는
삶의 걸음들처럼
오직 사랑이게 하소서
당신께 가는
마지막 한 걸음
헤아릴 수 없는
삶의 걸음들처럼
오직 기쁨이게 하소서
당신께 가는
마지막 한 걸음
헤아릴 수 없는
삶의 걸음들처럼
오직 사귐이게 하소서
당신께 가는
마지막 한 걸음
헤아릴 수 없는
삶의 걸음들처럼
오직 품음이게 하소서
당신께 가는
마지막 한 걸음
헤아릴 수 없는
삶의 걸음들처럼
오직 스밈이게 하소서
당신께 가는
마지막 한 걸음
헤아릴 수 없는
삶의 걸음들처럼
오직 돌봄이게 하소서
당신께 가는
마지막 한 걸음
헤아릴 수 없는
삶의 걸음들처럼
오직 베풂이게 하소서
당신께 가는
마지막 한 걸음
헤아릴 수 없는
삶의 걸음들처럼
오직 돋움이게 하소서
당신께 가는
마지막 한 걸음
헤아릴 수 없는
삶의 걸음들처럼
오직 섬김이게 하소서
당신께 가는
마지막 한 걸음
헤아릴 수 없는
삶의 걸음들처럼
오직 살림이게 하소서
오늘의 성인
성 첼레스티노 5세(Celestine V)
신분 : 교황
활동연도 : 1209/10-1296년경
같은이름 : 셀레스틴, 첼레스띠노, 첼레스띠누스, 첼레스티누스, 켈레스티노, 켈레스티누스, 코일레스티노, 코일레스티누스
피에트로 델 모로네(Pietro del Morrone)는 이탈리아 중부 몰리세(Molise) 주에서 소작농 안젤레리오(Angelerio)와 마리아(Maria)의 열한 번째 자녀로 태어났다. 어릴 때 몬타가노(Montagano) 인근의 베네딕토회 수도원에 입회했으나, 1231년경 아브루치(Abruzzi) 광야에서 은수생활을 시작했다가 사제가 되려고 자신의 움막을 떠나 마침내 로마(Roma)에서 1234년경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몇 년 동안 술모나(Sulmona)의 모로네(Morrone) 산 동굴에서 은수생활을 계속하다가 많은 군중들을 피해 1245년경 제자들과 함께 접근하기 더 어려운 마이엘라(Maiella) 산 깊은 곳으로 가서 생활하였다. 제자들이 늘어남에 따라 그는 처음으로 은수자들의 공동체를 만들었고 당시에는 수도원이 형성된 모로네로 되돌아와야만 했다. 그는 매우 엄격한 규칙을 적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274년 그는 자신의 은수자 공동체를 첼레스티누스회라는 이름으로 승인을 받았고, 교황 니콜라우스 4세(Nicolaus IV)의 선종 후에 정치적인 알력 때문에 2년간의 교황직 공백 기간이 발생했을 때 추기경들에게 위협적인 언사로 새 교황을 즉각 선출하지 못하면 하느님의 진노를 피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추기경들은 어찌된 영문인지 당시 85세의 고령인 그를 새 교황으로 선출하였다. 더 이상 교황직을 공백으로 둘 수가 없어서 그는 선거 결과를 받아들였고, 1294년 8월 29일 카를로의 산타 마리아 디 콜마조(Santa Maria di Colmaggio) 성당에서 코일레스티누스 5세(Coelestinus V, 또는 첼레스티노)라는 이름으로 교황좌에 올라 혼란하던 교회의 방향을 바로 잡으려고 노력하였다.
성 코일레스티누스 5세는 건강과 직무의 과중함을 이유로 들어 1294년 12월 13일에 교황직을 스스로 사임하고 자기 수도원으로 돌아간 최초의 교황이 되었다. 베네데토 카에타니(Benedetto Caetani) 추기경이 그를 승계하여 보니파티우스 8세(Bonifatius VIII)로 교황좌에 올랐으나, 선임자의 높은 인기가 수많은 지지자들을 만들어 그를 복위시키려는 운동으로 번지자 그는 성 코일레스티누스 5세를 아나니(Anagni) 근교의 푸모네 성(城)에 감금하였다.
성 코일레스티누스 5세는 그 성에서 1296년 5월 19일 종기로 인한 감염으로 선종하였다. 그의 시신은 우선 페렌티노에 묻혔다가, 1317년에 그가 교황으로 즉위했던 산타 마리아 디 콜마조 성당으로 이장되었다. 그는 1313년 5월 5일 교황 클레멘스 5세(Clemens V)에 의해 증거자로 시성되었다.
성 둔스타노 (Dunstan)
활동년도 : 910-988년
신분대 : 주교,수도승
지역 : 캔터베리(Canterbury)
같은 이름 : 던스딴, 던스탄, 둔스타누스
영국 글래스턴베리(Glastonbury)의 발톤스버러(Baltonsborough)에서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난 성 둔스타누스(Dunstanus, 또는 둔스타노)는 그곳의 아일랜드계 수도자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청년이 되어서는 애덜스턴(Athelstan)의 왕궁에 들어갔으나 934년경에 베네딕토회 수도자가 되었고, 939년에는 윈체스터(Winchester)의 주교이자 자신의 아저씨인 성 알페기우스(Alphegius, 3월 12일)로부터 사제품을 받았다.
고향에서 얼마동안 은수자로 생활하던 성 둔스타누스는 국왕 에드먼드(Edmund)의 부름을 받고 궁중으로 들어갔다가 943년에 글래스턴베리 수도원의 원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이 수도원을 학문의 중심지로 발전시켰고 또 다른 많은 수도원을 활성화하는데 큰 몫을 하도록 운영하였다. 그는 에드먼드 국왕이 뜻밖에 살해되었을 때에 국왕의 형제인 에드레드(Edred)가 왕좌로 나아가는데 자문관이 되었으며, 그의 도움으로 모든 수도원들의 원대한 개혁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또 세속적인 정치 문제에도 깊이 관여하고 색슨족의 부도덕성을 들추어냄으로써 색슨 귀족들의 미움을 받기도 했고, 데인인(Danes)과의 평화 정착에도 기여하였다.
그런데 955년 국왕 에드위가 사망한 후 그의 조카인 에드위(Edwy)가 국왕직을 승계하면서부터 그 왕은 성 둔스타누스의 가장 큰 적이 되었다. 새 국왕은 성 둔스타누스의 재산을 압류하고 그를 왕국에서 추방하였다. 그래서 성 둔스타누스는 플랑드르(Flandre)의 겐트(Gent)로 갔으나 국왕의 동생인 에드가(Edgar)에 의해 에드위가 축출되면서 영국으로 되돌아왔고 곧이어 캔터베리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새 국왕과 그는 국가와 교회의 개혁을 꾀하였다.
성 둔스타누스는 교황 요한 12세(Joannes XII)에 의하여 교황대사로 임명되면서부터 성 에텔볼두스(Ethelwoldus, 8월 1일)와 성 오스왈두스(Oswaldus, 2월 28일)와 함께 교회 규율을 쇄신하기 시작하였고, 이전에 덴마크 사람들의 침입으로 폐허가 된 수많은 수도원들을 재건하였다. 성 둔스타누스는 국왕 에드가의 자문관으로 16년 동안 있으면서 그의 잘못을 발견하는 즉시 꾸짖고 진언을 올렸다. 그 후 그는 정계에서 은퇴하여 캔터베리로 돌아왔고 대성당 학교에서 교육에 임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다가 그곳에서 운명하였다. 성 둔스타누스는 영국 수도원의 재건자였다. 또한 그는 유명한 음악가로서 하프를 연주하거나 찬미가를 작곡하기도 하였고 숙련된 철공예가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갑옷 제조자, 금세공인, 자물쇠 제조자
복자 아우구스티노 노벨로 (Augustine Novello)
활동년도 : +1309년
신분 : 총장
지역 :
같은 이름 : 아오스딩, 아우구스띠노, 아우구스띠누스, 아우구스티누스, 어거스틴
이탈리아 시칠리아(Sicilia) 섬의 타오르미나(Taormina)에서 태어난 마태오(Matthaeus)는 볼로냐(Bologna)에서 수학하여 법학박사 학위를 받고 법률을 가르치는 등 화려한 경력의 소지자였다. 그는 시칠리아의 국왕 만프레드(Manfred)의 수상이 되었으나 베네벤토(Benevento) 전투에서 심한 부상을 입고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이때 한 수도자가 만일 하느님께 전적으로 자신을 봉헌한다면 완쾌되리라는 약속을 했는데, 이것이 사실로 나타나자 그는 성 아우구스티누스 은수자회에 평수사로 입회하여 아우구스티누스 노벨로(Augustinus Novello, 또는 아우구스티노 노벨로)라는 수도명을 택했다.
후일 교황 니콜라우스 4세(Nicolaus IV)는 그를 교황청의 고해신부로 임명했고, 교황 보니파티우스 8세(Bonifatius VIII)는 그를 시에나(Siena)의 교황대사로 임명하였다. 1298년 아우구스티누스 노벨로는 수도회의 총장으로 선출되었지만 2년 뒤에 은퇴하고 자신이 세운 산 레오나르도(San Leonardo) 은둔소에 숨어 여생을 마쳤다. 그에 대한 공경은 1759년 교황 클레멘스 13세(Clemens XIII)에 의해 승인되었다. 교회미술에서 그는 책을 들고 있고 천사로부터 귓속말을 듣는 아우구스티누스회 수도승으로 표현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