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으로 시련. 고통 이겨내자
-배광하신부-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
지난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신학자로 일컬어지는 ‘칼 라너’(1904-1984) 신부는 <영을 체험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를 변명하고 싶은데도, 부당한 취급을 받았는데도 침묵을 지킨 적이 있는가? 우리는 아무런 보상을 못받고 남들은 오히려 나의 침묵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는데도 남을 용서해 준 적이 있는가? 우리는 하느님과 그분의 뜻이라고 부르는 저 신비롭고, 소리 없고, 헤아릴 수 없는 분 때문에 순명한 적이 있는가? 우리는 아무런 감사도 인정도 받지 못하면서, 내적인 만족마저 못 느끼면서도 희생을 한 적이 있는가? 하느님을 사랑하면 죽을 것만 같은데도 하느님을 사랑한 적이 있는가?… 그와 같은 일이 내게 있었다면 영을 체험한 것이다.”
이어서 칼 라너 신부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영을 체험한다는 것은 곧 영원의 체험이다. 영은 이 시간적 세계의 일부 이상이라는 경험, 현세적 인간의 의의란, 행복으로는 다할 수 없다는 경험, 세상적 성공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아무 근거도 없이 그저믿고 뛰어드는 모험의 경험이다.”
그래서 천상의 성인 성녀들은 이 같은 영의 체험으로 용서와 희생, 가난과 순명, 겸손의 삶, 낮은 자리에서의 만족, 고독과 하느님을 향한 갈망, 죽음의 고통을 뛰어넘는 사랑, 순교의 강한 열망이 가득차 있었던 것입니다. 그분들에게는 살아 숨쉬는 나날이 인간적 눈으로는 환난이었고 역경이었던 것입니다. 단 하루도 쉬운 날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같은 역경을 이겨냈기에 불멸의 희망 속에 영원한 기쁨을 살고 계시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두려워하지 않고 그것을 일상의 삶에서 이겨 내셨기에 오늘 천상의 영복을 누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묵시록의 저자는 천상 성인들의 삶을 이렇게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이다. 저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묵시 7,14)
천상의 성인들은 어린양이신 예수님께서 겪으신 시련과 고통을 알고 있었고, 그 길을 자신들도 그대로 따라 살았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어린양이 계시는 옥좌에 그들 또한 자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주님을 뵙게 될 희망
티벳 불교의 뛰어난 스승인 ‘소걀 린포체’는 이렇게 말합니다. “가끔 나는 사람들에게 묻는다. ‘무엇이 당신으로 하여금 죽은 뒤에는 생이 없다고 그토록 철석같이 믿게 하는가? 그렇게 주장할 무슨 증거라도 있는가? 내세 따위는 없다고 계속 부인하다가 죽어서 그런 것이 있음을 알게 되면 어쩔 셈인가?’ 마음 수련을 계속한 사람은, 자기 마음에 관하여 전에 모르던 것들을 많이 알게 된다. 마음이 제 참 본성을 향해 활짝 열리면서 그동안 자기 자신에 대하여 안다고 생각했던 지식들이 깨어지고 이번 생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생들이 있었음을 전혀 다른 차원에서 흘낏 볼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때 우리는 스승들이 들려준 삶과 죽음, 죽은 뒤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모두 진실임을 깨닫기 시작한다.”
죽은 뒤 내세가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슬프게 생을 마감한 인류 역사의 수많은 죽음들, 때론 전쟁 중에, 때론 갖가지 질병으로, 때론 여러 자연재앙으로, 때론 억울하게 죽음으로 생을 끝마친 가엾은 이들에게 내세가 없다는 것은 너무도 잔인한 처사가 아닌가? 나아가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라면 어느 누구가 자신을 희생하여 보다 나은 세상, 사람 살만한 세상을 위하여 투신하겠는가? 만약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라면 세상은 모두가 저만의 영욕을 위하여 살게 될 생지옥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살이에서 겪게 되는 여러 시련과 고통을 이겨낼 필요도 없이 극단적인 선택을 내리게 될 것이고, 세상은 대혼란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때문에 이 아름다운 세상을 위해서도, 가엾은 인간의 짧은 생을 위해서도 내세는 반드시 존재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정의로운 심판에 의해서 선과 악의 구분, 상과 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악이 아니라 선을 택하게 됩니다. 그 같은 희망이 있어야 우리는 진정 최선을 다하여 사랑할 수 있고, 의로움을 향하여 정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자신을 투신할 수 있고 희망을 향한 숭고한 죽음을 잘 준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뵙게 될 이들은 오늘 예수님의 말씀처럼 마음이 가난해야 합니다. 그들이 간직하고 있는 희망을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1요한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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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같은 성인이 한국에서 탄생하려면"
-이기양신부-
성인전이나 천주교 사전을 아무리 찾아봐도 자신의 축일이 나와 있지 않다고 축일을 묻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세월이 오래 지나면 조상들이 후손들한테 잊혀지듯 성인들 축일도 사라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렇게 사라져서 날짜를 찾아볼 수 없는 성인들의 축일이 바로 오늘 모든 성인 대축일입니다.
모든 성인 대축일을 지내는 이유는 세월의 흐름 속에 성인들 수가 많이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한국 천주교회 역시 1984년 여의도광장에서의 시성식을 통해 자랑스러운 103위 성인을 모신 나라가 됐습니다. 이렇게 새로운 성인들이 탄생하고, 오랜 세월 축일을 지내온 성인들은 기념일에서 사라짐에 따라 잊혀져가는 성인들을 모아 모든 성인 대축일을 지내게 된 것입니다.
새로운 변화 속에 영광스러운 순교 성인들을 모시게 된 한국 천주교회이지만 이제는 또 다른 욕심을 가져봅니다. 우리 교회에도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같은 성인과 성녀 데레사, 본당신부들의 수호자인 아르스의 비안네 신부 같은 성인들이 계신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는 생각입니다.
급속한 과학문명 발달과 물질만능 사회는 수 백 년 이어온 기존 권위와 질서를 혼돈에 빠뜨리고 새로운 질서를 잉태하지 못했기에 세상과 교회 역시 깊은 혼란 속에 빠질 수밖에 없게 됐습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모습일까요? 수도생활과 본당신부 생활에서 또 신자생활에서 살아가야할 길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분들이 우리 교회에 계신다면 수도자와 성직자는 물론 모든 신자들은 행복해질 것입니다.
프란치스코와 데레사 같은 성인이 계신다면 제일 행복해질 분들은 아마 수도자들일 것입니다. 수도자들은 어떻게 수도생활을 하는 것이 옳은 길인지 가까이서 지켜 볼 수 있고, 어려움이 닥치면 면담을 통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세상의 피로에 지친 신자들은 하느님 현존을 깊이 체험하는 고해성사와 미사 은총을 통해 한 순간에 지상에서 천국을 맛보는 주님 은총을 깊이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서울 어느 본당에 비안네 신부 같은 분이 계신다면 우리 신자들의 열심을 고려하건대, 그분께 고해성사를 받으려고 수백 미터 줄은 물론이고 몇날 며칠의 기다림을 마다않는 신자들이 부지기수일 것입니다.
미사참례는 또 어떠하겠습니까? 성인 신부가 계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그분께서 집전하는 미사에 참례하려는 신자들로 북새통을 이룰 것입니다. 또 그 미사의 은총으로 세상과 교회생활 속에 받은 상처도 한순간에 치유되는 기적을 체험하는 은총의 장이 만들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은 한낱 꿈이 아니라 혼란스러운 시기에는 하느님 은총으로 어김없이 있어왔던 2000년 천주교회의 생생한 역사입니다.
불가에서도 이삼백 년에 한 번씩 큰스님이 나와 혼란스러운 교계를 정화하고 새로운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역사가 있어왔다고 합니다. 혼란이 극심해 교계 전체가 권위를 잃고 비틀거리면 스님들과 신도들은 더욱 수행정진하고 정성된 기도를 그치지 않는다고 합니다. 큰스님이 나오지 않는 것은 자신들의 정성과 기도가 부족해서라고 신도들은 제 탓을 하며 정성을 더하게 되고, 수행자들은 그 염원에 화답하기 위해 더욱 수련에 정진한다고 합니다. 이런 서로간의 정성과 노력으로 모두에게 희망과 위로가 될 큰스님이 탄생함으로써 왜곡되고 혼란에 빠졌던 교계가 정화되고 성장의 계기를 찾는다는 것이지요.
오늘 모든 성인 대축일을 지내며 한국천주교회 미래와 신자들 행복을 위해 전 세계가 부러워할 훌륭한 성인이 탄생하기를 기원해봅니다. 그것은 성직자와 수도자, 그리고 신자들 삶이 복음화되고 또 무엇보다도 그러한 삶을 지향하는 노력이 강해질 때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복음적 공동체를 위해 노력하며 훌륭한 성인들이 이 땅에 많이 나오도록 주님께 간절히 기도합시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
-허영엽신부-
한 신자분이 중병에 걸려 몇 번이나 죽음의 고비를 넘
기며 위험한 수술을 받았습니다. 다행히 수술 결
과가 좋아 기적적으로 조금씩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병문안을 간 사람들에게 말했
습니다.
“며칠 전 병원 옥상에 간신히 한 걸음씩 올라가 보았습니
다. 가을 하늘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었습니다. 여태껏
보아온 하늘이었지만 그렇게 아름다운 하늘은 여태까지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 하늘이 너무 고마워 그만 눈물을
펑펑 쏟았습니다.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온 저는 이제 사랑
만 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제 주위의 모든 것이 더없이 감
사합니다.”
그는 두 발로 걷고 하늘을 볼 수 있는 것, 일상적인 모든
것이 행복이라고 느꼈습니다. 사람들은 무언가를 잃었을
때 비로소 그 가치를 새롭게 알게 됩니다. 우리는 주변의
모든 것이 영원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항상 자신의 처
지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야말로 행복한 사람이
아닐까요.
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원합니다. 어쩌면 인생은 평생 행
복을 찾아 헤매는 나그넷길인지도 모릅니다. 문제는 행복
이 아닌 것을 진정한 행복이라고 잘못 생각하는 경우가 많
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행복하여라, 마
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고 선언
하십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겸손
한 자세로 하느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사람, 세상 어떤 것
에도 애착을 갖지 않고 온전히 하느님의 뜻을 위해 자신을
비운 사람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많이 소유해야 행복
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히려 버려야 행복
해진다고 가르치십니다.
우리는 인간의 나약함을 체험하고, 자신의 힘으로는 아
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그때 비로소 눈을
들어 이웃과 주님을 찾게 됩니다. 마음으로 가난한 이가 진
정 행복하다는 예수님의 가르침, 이 역설적인 진리를 빨리
깨닫는 사람이야말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행복은 조건으
로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자세로 느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캘커타의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행복해지는 방법을 이
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가는 곳마다 사랑을 알려주세요. 그리고 먼저
당신 자신의 집에서 그 일을 실천하세요. 당신의 자녀와 남
편을 사랑하세요. 어떤 사람이든 당신을 만나고 나면 더 나
아지고 더 행복해지게 하세요. 하느님의 사랑이 당신을 통
해 표현되도록 하세요. 당신의 얼굴에, 당신의 눈에, 당신
의 미소 속에, 그리고 당신의 따뜻한 말 한마디 속에 하느
님의 사랑을 표현하세요.”
과연 나는 행복한 사람입니까? 나는 어디에서 행복을 찾
고 있습니까?
이국땅에서 만났던 한 걸인
-오철환신부-
잊지못할한‘외제거지’
저는 제 기억 속에서 결코 지울 수 없는 한‘걸인’을 자주
떠올리곤 합니다. 하지만 그때와 마찬가지로 그의 이름을 모
릅니다. 다만 그때 형편없었던 그의 행색 그리고 마지막에 던
진 그의 한 마디 말만 생생하게 기억날 뿐입니다. 이렇게 내
기억 속에 자리 잡았던 이유는 우리에게 그가 던진 한마디의
말과 함께 우리 일행에게 보여준 그의 따사로운 행동 때문입
니다.
그 걸인과 마주쳤던 이야기는 대충 이렇습니다.
한 인기(?) 좋은 외국인 기숙사에 모여 살던 우리 한국 신부
중 네다섯 명이 함께 외출을 했었습니다. 목적지를 향해서 걸
어가는데 보행자를 위한 인도는 어른 두 사람이 함께 나란히
겨우 걸을 정도로 좁았습니다. 때는 해질 무렵이라 시야가 그
리 밝은 편은 아니었습니다. 그 길 또한 학교와 성당, 수도원
담으로 이어지는 길이라 행인이 뜸했었습니다. 한마디로 차
는 많이 지나다녔지만 인적이 드문 그런 길이었습니다.
누가 보아도 행색이 형편없는 그리고 비교적 큰 덩치를 한
사람이 우리 무리 뒤를 쫓다시피 성큼 성큼 큰 걸음으로 걸어
왔습니다. 한 눈에 보아도 틀림없는 걸인임에 분명했습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조심하라고 주의를 주면서 역시 빠른 걸음
으로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힘차게 큰 걸음으로 빠르게 뒤를 쫓던 그 걸인
은 우리 무리를 피해 찻길로 내려가 단 숨에 우리를 앞질렀습
니다. 그리고 다시 보행자 길로 오른 그 걸인은 우리를 향해
돌아보면서 한 마디를 던졌습니다. 그 한 마디가 저는 지금도
무척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우리를 향해 그가 던진 한 마디는 대략 이런 내용입니다.
“외국인인 내가 계속 너희 뒤쪽에서 가면 너희가 무서워할까
봐 내가 먼저 너희를 앞질러 간다.”저는 개인적으로 제 자신
에게 무척 실망했었습니다. 그 걸인의 깊은 배려와 달리 선입
견에다 필요 이상의 경계심으로 한 사람과 담을 쌓았었기 때
문입니다. 비록 겉모습이 무뢰하고 보잘 것 없어 보였지만,
그는 분명 남을 배려하는 넉넉하면서도 부드러운 마음을 지
닌 평범한 한‘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겉모습에 잔뜩 선입견
을 가졌던 속 좁은 제 자신과 무척 비교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도 이를 떠올리면, 그 때 나의 생각과
행동에 스스로 부끄러움을 감출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남을 배려할 줄 아는 그의 여유로움이 부럽고 닮고 싶을 뿐입
니다.
그 사건 뒤로 무척 실례되는 말이지만, 저는“거지도 우리
나라 거지보다 외제 거지가 훨씬 났다.”고 말하곤 합니다. 혹
자는이렇게말할지도모릅니다.“ 선진국에사는혹은잘사
는 나라의 거지니까 그렇지…”라고… 그래도 저는 이렇게 말
하고 싶습니다. 이는 그의 정서에서 비롯된 말과 행동이고,
오랜 그들의 그리스도교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입
니다.
그리고성인
(聖人)
우리 교회에서는 오래 전부터 시성식을 통해서 성인을 공
표했고 그들을 공경해 왔습니다. 그렇게 한 이유는 성인들의
생각과 행동을 오늘날 우리가 본받기 위해서입니다. 어떻게
생각하고 살아야 하는지, 우리 곁에 닮고 싶은 모델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로 입성하는 분명한 표지판입니
다. 한자 성(聖)을 재미삼아 풀어본다면, 자신의 귀(耳)와 입
(口)을 임금(王)(사실 북방壬)처럼 다스리면 거룩해질 수 있
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우리 공동체에서 성인(聖人)
으로 충분히 거듭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자녀들
에게 충분히 선명한 표지판이 될 것입니다. 모든 성인의 날을
맞아 모든 분께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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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우리 본당에서는 추수감사미사와 함께 본당 단합 운동회가 열렸습니다. 특별히 본당의 청년들이 주축이 되어서 진행하는 운동회에 많은 분들이 함께 하면서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승부욕이 발생되는 것입니다. 이 운동회 자체가 일치와 화합을 목적으로 이루어진 것인데도 불구하고, 언성이 높아지면서 서로 얼굴 붉힐 일들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사실 이 운동회에서 일등을 한다고 해서 특별한 상을 받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또한 그 상을 받지 않아도 내가 살아가는데 엄청난 지장을 받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상대방을 물리칠 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부끄러웠습니다. 그리고 이럴 바에는 차라리 하지 않는 편이 더 낫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물론 최선을 다하는 것이 좋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들의 핵심은 ‘사랑’임을 기억한다면, 이기는 것보다는 ‘사랑’을 먼저 생각하고 실천했어야 하지 않을까요?
하긴 별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목숨 걸 듯이 싸우는 것이 우리의 일상적인 모습입니다. 내 것은 내 것이고, 남의 것도 내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들은 예수님이 생각이 아니라, 이 세상의 생각이라는 것임을 다시금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생각은 오늘 복음에 분명히 나타나지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행복선언’의 첫 시작은 이렇습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루카복음과 달리 마태오 복음에서는 ‘마음이 가난한’이라는 말이 붙어서 나옵니다. 그렇다면 무슨 뜻일까요?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힘든 것이 아님을 표현하기 위해 이렇게 ‘마음이 가난한’이란 말을 붙인 것일까요? 아니면 부자라 할지라도 가난한 체하면서 살라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돈 많고 높은 지위를 가진 부자를 바라보면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부와 지배 권력을 차지한 사람은 물론, 부와 지배 권력을 가지려고 욕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 모두를 향한 말씀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 앞에서는 텅 빈 마음을, 아무 것에도 매어 있지 않는 마음을 간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내가 어떤 승부에서 저 사람을 누르고 그 자리에 올라가려 한다면 그것은 가난한 마음이 아닙니다. 지금 너무나도 가난해서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서라도 꼭 부자가 되겠다고 다짐한다면 그것 역시 가난한 마음이 아닙니다. 욕심과 이기심 등, 사랑과 정반대의 가치를 선호하는 사람은 절대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에 이어서 나오는 행복한 사람들도 이런 입장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 외에는 그 어떤 것에도 매어 있지 않는 마음, 그래서 주님의 사랑을 이 세상에 적극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사람만이 행복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행복한 사람일까요?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욕심들, 또한 가지려고 하는 욕심 가득한 마음이 나를 불행한 사람으로 만들어간다는 것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내가 가진 것을 남에게 나누어 줄 때는 반드시 함께 주어야 하는 게 있다. 바로 따뜻한 마음이다. 그래야 받는 사람의 마음도 따뜻하게 만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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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성인들!
-김찬선신부-
All Saints Day.
모든 성인의 날.
어렸을 때 천당과 연옥과 지옥에 대한 교리를 배웠습니다.
대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고 죽으면 지옥에 가 영원한 벌을 받고
회개하고 죽으면 연옥에 가 잔 벌을 받으며
연옥의 단련을 통해 모든 죄가 다 사해지면 천당에 가는데
지옥에 가면
뜨거운 불과 무시무시한 악귀들 사이에서 고통을 당하고
천당에 가면
아름다운 꽃과 음악이 있는 곳에서 행복을 누린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옥은 물리적인 어떤 상태가 아니고 어떤 곳도 아닙니다.
지옥은 하느님과의 영원한 단절의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성인들이 산다는 천당은
당연히 하느님과의 영원한 친교를 누리는 상태이고,
하느님과의 영원한 친교를 누리는 상태가 천당이라면
천당은 꼭 죽고 난 다음에 가는 저 곳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도 가능한 것이며
하느님과의 영원한 친교를 나누는 천국은
진정 지금, 여기서부터 가능합니다.
그런데 하느님과의 영원한 친교를 나눈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천국은 하느님과 密會를 나누는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그런 면이 있습니다.
천국은 하느님과의 은밀한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다른 사람은 끼어들 수 없는 은밀한 구석이 있고,
은밀한 공간에서 은밀히 나누는 密語도 있습니다.
사랑은 까발리면 안 되는
둘만의 특전적이고 호사스러운 공간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과 사랑을 나누는 천국에는 다른 차원도 있습니다.
하느님은 개똥이가 아닌 쇠똥이가 아니시고,
개똥이도 쇠똥이도 아닌 영희도 아니십니다.
하느님은 여럿 중의 한 존재일 뿐인 분이 아니시고
여럿이 하나이신, 즉 모든 것인 분이십니다.
그러니 내가 하느님과 친교와 사랑을 나눔은
여럿 중의 한 분이신 하느님과 친교와 사랑을 나누는 것이 아니고
모든 존재의 하느님과 친교와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하느님과의 밀애를 나눌 뿐 아니라
모든 것이신 하느님 안에서 모든 이와 사랑을 나눕니다.
하느님과 함께 모든 이를 사랑합니다.
하느님 안에서 아내를 사랑합니다.
하느님과 함께 아내를 사랑합니다.
하느님 안에서 자녀를 사랑합니다.
하느님과 함께 자녀를 사랑합니다.
하느님 안에서 개똥이를 사랑합니다.
하느님과 함께 개똥이를 사랑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천국의 삶이요 성인들의 삶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
하느님 사랑의 확장이 이웃 사랑이요,
이웃 사랑이 하느님 사랑의 표시이요 顯現인 삶.
이것이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진정한 천국의 삶이요,
지금, 여기서부터 천국을 사는 성인들의 삶입니다.
언젠가 모 수녀원에 가서 그 수녀원의 창설자를 제가 성인이라고 하니
수녀님들이 깜짝 놀라고 몇몇 수녀님들은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아직 성인품에 오르지 않은 분을 제가 성인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러면 당신의 창설자는
사랑을 살지 않은 분이시냐고 되물었습니다.
우리에겐 교회가 공식적으로 성인품에 올리지 않은 수많은 성인이 있고
오늘 우리가 모든 성인의 날을 기념하는 것은
바로 이런 성인들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지금, 여기서부터 사랑을 우리는 모두 성인들,
하늘의 성도들입니다.
그러니 이제 같이 사는 옆의 사람에게
성인 형제님, 성인 자매님하고 부르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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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 정애경 수녀-
한 소녀가 산길을 걷다가 나비 한 마리가 거미줄에 걸려 버둥거리는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불쌍한 마음이 든 소녀는 가시덤불을 헤치고 나비를 구해 주었지만 소녀의 팔과 다리는 가시에 긁혀 피가 흘렀습니다. 그런데 멀리 날아간 줄 알았던 나비가 순식간에 천사로 변하더니 소녀에게 다가와 자기를 구해 준 은혜에 감사하며 무슨 소원이든 한 가지를 들어주겠다고 했습니다. 소녀는 망설임 없이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어 살게 해주세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천사는 알았다며 소녀의 귀에 무슨 말인가 소곤거리고 사라졌습니다.
소녀에겐 늘 행복이 떠나지 않았지만 어느새 백발의 할머니가 되어 임종을 눈앞에 두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입을 모아 할머니가 죽기 전에 그 행복의 비결이 무엇인지 물어보기로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할머니는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습니다. “내가 소녀였을 때 나비 천사를 구해 준 적이 있지. 그 대가로 나비천사가 나를 평생 행복한 사람이 되게 해주었어. 그때 천사가 내게 다가와 내 귀에 대고 ‘나를 구해 줘서 고마워요. 지금 나를 구해 준 것처럼 어려운 사람들을 만나면 꼭 도와주세요. 그럴 때마다 행복 에너지를 많이 보내드릴게요.’라고 속삭이고 떠나갔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한 삶을 살고 싶어하지만 실제로 행복한 삶을 사는 사람은 그리 흔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참된 행복의 비결은 누군가에게 사랑이나 물질을 받음으로 오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행복은 내가 가진 소중한 것을 누군가를 위해 베풂으로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애써 일하며 약한 이들을 거두어 주고,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 (사도 20,?35)라고 했습니다.
복중의 복, 최고의 행복은 마음에 들어앉은 세상의 찌든 죄악을 비우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산상 설교 여덟 가지 중에서 가장 먼저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인가 채우기 위해서는 먼저 비워야 합니다. 비운 후에 하느님의 복 일곱 가지를 채우는 것이 ‘진복팔단’입니다. 이 여덟 가지 행복은 하나하나가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로 꿰어진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하느님 없이도 얼마든지 살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하느님을 경외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은총에 의지하여 살아갑니다. 다윗은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시편 23,?1) 하고 자기를 하느님의 양에 비유했는데, 이는 다윗이 하느님의 은총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임을 표명한 것입니다.
우리는 다윗처럼 하느님의 은총 가운데서 살아가기를 원한다면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하느님 한 분으로 만족합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 한 분으로 만족한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하느님 섬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세상살이에 중요한 일이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을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눈에 주님은 보이지 않고 세상만 보이면 곤란합니다. 주님은 보이지 않고 돈만 보이면 큰일입니다. “우리 믿음의 영도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히브 12,?2)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마음을 잘 지켜야 합니다. 잠언에 “무엇보다도 네 마음을 지켜라. 거기에서 생명의 샘이 흘러나온다.”(잠언 4,?23)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도 마태오는 우리 마음을 밭에 비유합니다.(마태 13,?24) 밭에서 곡식과 채소와 같은 농작물을 재배하듯이 우리 마음 밭도 생명의 근원이 될 수 있습니다.
밭을 지키는 것은 밭에 곡식이나 채소 종자를 뿌려 가꾸는 것을 의미합니다. 밭에 작물을 재배하지 않고 그대로 방치하면 잡초가 무성하거나 쓰레기장이 되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을 돌보지 않으면 온갖 잡초가 자라고 쓰레기 같은 생각이 자리를 잡게 됩니다. 사도 바오로는 “육을 따르는 자들은 육에 속한 것을 생각하고, 성령을 따르는 이들은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합니다.”(로마 8,?5)라고 했습니다.
마음을 방치하면 온갖 육신에 속한 생각이 생겨나 결국 죽음의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그러나 가난한 마음은 하느님으로 채워지려고, 날마다 자신을 깨끗하게 비우는 마음입니다. 세상의 여러 유혹에 더럽혀진 마음을 회개를 통해 정화해야 합니다. 말씀의 거울 앞에 자신을 비추어 보며, 날마다 마음을 깨끗하게 비워야 합니다. 성령의 생각을 우리 생각으로 받아들임으로 늘 겸손한 마음 상태를 지켜 나가야 하겠습니다. 마음을 지키지 못하면 낙심·좌절·증오·살인·악한 생각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납니다. 이 같은 육신의 생각은 죽음으로 귀결되고 맙니다.
반면에 성령의 생각은 생명과 평화를 가져다줍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시면 우리 마음에서 긍정적이고 건강한 생각, 믿음의 생각이 샘솟듯 일어나게 됩니다. 주인을 맞이하려고 집안을 깨끗하게 청소하는 하인처럼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자신을 비워야 합니다.
그래서 내 생각이 아니라 하느님의 생각으로 채워지고 내 향기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향기로 채워, 세상 사람들과 다른 그리스도인의 가치관을 가져야 합니다. 바로 이 가치관이 수록된 것이 산상설교이고 그 가운데서도 ‘진복팔단’의 가르침입니다. 여덟 개의 행복으로 이루어진 천국 사다리를 올라가려면 첫 계단인 마음이 가난한 이가 받는 행복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되어 천국을 선물로 받아 누릴 수 있도록 주님의 도우심을 청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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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운 하루>
-양승국신부-
오늘은 참으로 부끄러운 하루를 보냈습니다. 자나깨나 저희 아이들 생각만 하시는 분들, 자신들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흔쾌히 자신들이 가진 바를 나눠주시는 분들의 말씀을 들으면서 참으로 많은 반성을 하게 되었습니다.
늘 받는 데만 익숙해있던 저였기에 그저 "넉넉하니 도와주시겠지" 하고 생각했었습니다. 언제나 밥 때만 되면 밥이 늘 차려져있으니, 아무 생각 없이 먹기만 했었습니다.
부끄럽게도 월급이란 것이 월말만 되면 자동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한동안 잊고 살았습니다. 남의 돈 벌기가 어디 쉬운가요? 얼마나 쓰라린 고생과 각고의 노력과 인내와 마음 상함의 결과가 턱없이 작은 월급이란 사실을 잊고 살았습니다.
오늘 모든 성인(聖人)의 날을 맞아, 이 세상 안에 숨어있는 많은 살아있는 성인 후보자들을 기억합니다.
하루 온종일 허리가 휘도록 일해서 번 피 같은 돈을 한푼도 헛되게 쓰지 않고, 자신을 위해서는 최대한 아끼면서 기쁘게 부모님을 모시고 가족들을 부양하는 분들, 또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아낌없이 내어놓는 분들, 그들은 진정 첫째가는 성인 후보자들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 찬 임종환자들, 쌀쌀한 눈길로 방문을 거부하는 말기암 환자들의 마음을 한번 열어보겠다고 끊임없이 다가서는 호스피스 봉사자들 역시 둘째가라면 서러워 성인후보자들입니다. 계속 문전박대를 당하면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하느님을 선포하는 말씀 선포자들 역시 성인 후보자들 대열에서 제외시킬 수 없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 성인이 되는 길의 폭이 아주 넓어졌습니다. 성화의 길이 보편화되었습니다. 성인(聖人)이란 이제 쳐다보지 못할 나무가 아니라 누구든 쉽게 접근 할 수 있는 대상이 되었습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처지가 어떠하든, 펼쳐지는 상황이 어떠하든 매일 기쁘게 살아가는 일이 성인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도 소중히 여기지만 이 세상 너머에 있는 삶은 더욱 소중히 여기는 자세가 성성에로의 길을 걷는 데 기본적인 마음자세입니다.
이 땅 위에서의 한평생을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모든 사건들이나 만남들도 큰 의미를 두지만, 이 세상 너머에 펼쳐질 하느님과 성인들과의 만남에 더 큰 기대를 갖는 자세야말로 성인에게 필요한 기본 바탕입니다.
매일 자기를 죽이는 사람, 자신의 욕심대로 살지 않는 사람, 남들이 다 귀찮아하는 그 일을 하는 사람, 그 사람이야말로 진정 살아있는 성인입니다.
이런 의인들의 이름은 밤하늘의 별처럼 길이 빛날 것이며, 하느님 나라에 길이 기록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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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만두 가게의 주인은 매일 세 번, 한 번에 딱 120개의 만두를 찐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 100개는 팔고, 20개는 가난한 노인과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항상 손님이 일정한 것은 아니겠지요. 어떤 때에는 손님들이 없어서 만두가 남는 경우도 있겠지만, 때로는 손님이 많아서 만두가 모자라는 경우도 종종 생겼습니다. 이렇게 손님이 많아서 만두가 모자라도 주인은 예외 없이 20개의 만두는 절대로 팔지 않았습니다.
손님들은 ‘손님은 왕이다.’라는 말을 외치면서 만두를 달라고 했지만, 주인은 오히려 정색을 하면서 “이것은 팔지 않아요.”라면서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그럴 때 주인의 얼굴에는 광채까지 났다고 하네요.
더 팔아서 자신의 수익을 더 올릴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가난한 노인과 아이들을 위한 만두라는 이유로 팔지 않는 이 만두 가게 주인은 과연 어리석은 사람일까요? 물질적인 수익의 증가만을 목적으로 하는 이 세상의 눈으로 볼 때는 어리석고 바보 같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오히려 더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 만두 가게에는 불황이 없었거든요. 사람들은 항상 변함없이 100개의 만두를 선착순으로 사기 위해서 줄을 섰고, 가계가 열리자마자 순식간에 100개의 만두는 모두 팔렸지요. 그는 남는 시간에 봉사활동을 했으며, 여가활동을 즐기면서 행복을 간직할 수 있었습니다.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인간이 겪는 고통의 근원은 바로 욕심에 있다고 말을 했습니다. 욕심은 욕심으로만 이행될 뿐, 만족함으로 연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이 욕심이라는 것은 끝이 없기 때문에, 욕심을 간직하면 간직할수록 더욱 더 만족이라는 행복과 멀어집니다. 그리고 그 결과 불행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그에 반해서 단순하고 소박하게 사는 가운데 만족을 깨달으면 항상 즐거울 수 있으며, 이것이 바로 행복인 것입니다.
우리는 날씨를 내 마음대로 바꿀 수 없지만 내 기분은 바꿀 수 있습니다. 또한 나의 이 못난 외모를 바꿀 수도 없지만, 스스로 연출하여 보기 좋게 만들 수 있습니다. 항상 이길 수는 없지만 항상 최선을 다해서 생활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렇게 스스로 나를 변화시킴으로 인해 즐거움과 행복을 체험하며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천상의 모든 성인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하늘나라의 행복 속에서 사시는 분들이지요. 그런데 그들이 간직하게 된 그 행복은 과연 이 세상에서 어떻게 얻으신 것일까요?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욕심을 끊임없이 추구해서 하늘나라의 행복을 얻은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짧은 이 세상에서의 행복이 아닌 영원한 하늘나라에서의 행복을 위해서 하느님의 뜻에 맞게 최선을 다해 사셨기에 얻은 것입니다.
이제 나의 생활을 다시금 변화시켜야 할 때입니다. 모든 성인들의 모범을 본받아, 세상의 모든 욕심을 내려놓고 주님을 향해서 걸어가는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행복이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욕심을 버려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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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마음
-이재성 수사-
프란치스코 성인은 미래에 대한 걱정이 없는 사람을 마음이 가난한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가난을 최우선으로 앞세우는 프란치스코 성인이 가장
측은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바로 근심과 걱정에 싸여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자신의 미래가 어떻게 펼쳐지든간에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길 수 있지만 믿음이 없는 사람은 늘 근심과 걱정에 싸여 살 수밖에
없기에 프란치스코 성인은 믿음이 없는 사람을 가장 측은하게 여겼습니다.
대개의 경우 자신이나 가족의 미래가 확실하게 보장되면 그때에 가서야
근심과 걱정을 내려놓으려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람은 아마 평생 동안
근심과 걱정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걱정하고 초조해하면서 일생을
보낼 것인가, 아니면 어려운 세상살이를 살면서도 가난한 마음으로
선이신 하느님께 의지하면서 편안히 복을 누리며 일생을 보낼 것인가는 오직
하느님을 믿느냐 마느냐, 그리고 그 믿음에 따라 살고자 결단을 내릴 것이냐
아니냐에 달려 있습니다. 믿음만 있다면 자연스럽게 결단을
내리게 될 것입니다. 가난한 마음이야말로 모든 성인들의 공통된 특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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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곳에서
-김은배 수녀-
6·25 때 월남한 그분은 가족 없이 살아 오셨습니다. 그동안 실버타운에서 생활하시다가 간암 말기 진단을 받고 난 후 저희 병원으로 오셨습니다. 그분의 배는 복수로 차 있고 눈빛은 불안했으며 사람을 잘 믿지 못하셨습니다. 그러나 봉사자를 소개해 드리고 관심을 보이며 끊임없이 대화하는 가운데 통증도 조절되자 그분은 많이 부드러워졌고 저희를 믿기 시작했습니다.
가족의 따뜻한 사랑을 모르는 분이어서 가장 안타깝고 마음이 쓰였는데, 마침 봉사자 한 분이 가족 이상으로 가깝게 지내며 자녀들까지 데리고 와서 그분과 함께 지내다 가시곤 했습니다. 또한 통증이 조절되자 음식도 잘 드셨는데, 정말 놀라운 것은 어느 날 오징어 회를 두 마리나 드시고 나서 매운탕은 바닷가에 나가서 바다를 보며 맛나게 드신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봉사자가 와서 그분이 하느님께 대해 물어오셨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했습니다. 강요는 하지 말고 본인이 원하는 만큼 가르쳐 드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후에 본인이 원하는 대로 ‘안젤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분은 세례 받은 것뿐만 아니라 영성체할 수 있어 행복해했고 많이 기뻐하셨습니다. 일주일 후, 그분의 임종을 지켜보는 저희의 마음에 행복한 무언가가 느껴졌습니다. 그분도 만족해하셨습니다. 가족이 없어서 다른 사람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려우셨지만 봉사자의 도움과 간호사들의 따뜻한 돌봄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마음으로 받아들인 분이시기에 우리는 고민 끝에 수녀원 뒷동산 오동나무에 수목장을 해드렸습니다.
제가 만난 예수님을 한 분 한 분 기억하면서 저는 하느님의 참행복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이분들의 삶을 통해 하느님은 저에게 하느님의 나라는 지금 이곳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체험하게 해주십니다. 새로운 예수님을 만날 때마다 저는 새로운 삶으로 초대되고 그 초대에 응답하면서 예수님과 길고도 짧은 여행을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합니다. 지금 이곳이 바로 천국의 삶이고 예수님이 함께하시기에 저는 오늘 위령성월을 시작하면서 제가 만난 모든 예수님의 영혼이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영원한 안식을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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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을 열며
지난 토요일이었습니다. 고해성사를 위해 미사 전 30분인 6시 30분쯤 고해소를 향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중학생 2명이 미사를 안 하고 집으로 가려는 것을 볼 수가 있었지요. 저는 이 학생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 딱 걸렸어~~~ 미사 안 하고 어디를 가려고 해?”
“신부님, 집에서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어서요. 죄송해요~~~”
“아니 미사보다 중요한 일이 어디 있는데? 도대체 뭘 하려고 그러는데?”
“무한도전 봐야 해요.”
무한도전이란 텔레비전에서 하는 오락 프로그램이지요. 그런데 이 오락 프로그램을 보기 위해서 미사를 땡땡이 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다시 물어보았지요.
“미사가 중요해? 아니면 무한도전이 중요해?”
아이들은 ‘무한도전’이 더 중요하다는 말을 남기고 집으로 가버렸습니다. 고해소에 들어가서 이 학생들과의 대화를 곰곰이 생각해보았습니다. 어떻게 무한도전이 예수님보다도 더 중요할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하면서, 우리도 이 아이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선택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선택을 하는데 있어서, 예수님께서 원하시고 명령하셨던 사랑의 길과 물질과 명예가 존중시되는 세속의 길 사이에 서 있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이 선택의 순간에서 많은 이들이 세속의 길로 나아가더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 모습과 앞서 말씀드렸던 중학생들의 ‘무한도전’ 선택이 무엇이 다를까요? 주님을 선택하지 않는 똑 같은 모습이고, 이 모습이 결코 주님께 좋게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은 모든 성인 대축일입니다. 성인들의 모범을 따르고자 다짐하는 날인 오늘, 성인들은 과연 어떻게 사셨는지를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그들은 결코 세속의 길로 걸어가시지 않지요. 그보다는 주님께서 제시하고 명령했던 사랑의 길로만 가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던 분들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살았다고 해서 불행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이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해주지요.
“행복하여라.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자비로운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평화를 이루는 사람,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는 사람. 이런 사람이 행복하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실 세상의 관점에서는 이들이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지요. 가난하고, 슬퍼하는 나에 대해서 어떻게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 받을 상을 언급함으로 인해서 이 세상 안에서의 짧은 삶보다는 하느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삶을 지향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들은 많은 선택을 할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이제는 주님을 선택하면 안 될까요?
빠다킹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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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가능한 성인의 삶
-서현승 신부-
위령 성월의 첫날이자 하느님과 천상의 일치를 누리는 모든 성인 대축일인 오늘,
‘나도 성인들처럼 하느님과 일치를 이룰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품어봅니다.
그러면서 몇 달 전, 마더 데레사 성녀의 편지 일부가 공개되자 전 인류에게
추앙받던 위대한 삶을 사신 분의 커다란 비밀이 밝혀지기라도 한 것처럼
세상이 떠들썩했던 해프닝이 생각납니다. 신앙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이라면
하느님의 현존에 대해 의문을 가졌던 그분의 내적인 고뇌와 치열했을 영적 싸움의 흔적에 대해 공감했을 내용이었죠. 오히려 그 편지의 내용 안에서 성녀의 순수한 신앙이 보석처럼 빛나게 느껴졌던 것은 저만의 느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은 우리 삶의 참된 행복에 관해 말씀하시며,
인간적인 행복의 잣대를 벗어나 새로운 눈으로 보고들으며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마치 내세의 행복에 대한 약속이나 보증의 말씀으로 들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간절한 초대의 말씀으로
들리는 것은, 내세에서 누리게 될 행복만이 아닌, 비참하고 보잘것없는 듯 보이는 우리의 삶 한가운데에서도 성인의 삶을 살 수 있는 희망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께서 스스로에게 하셨다는 말씀, ‘성인 성녀가 사람이라면,
나도 사람이다. 그들이 할 수 있었다면, 나는 왜 못하는가?’ 하느님과의 일치를
이룬 모든 성인들의 전구를 구하며 우리의 삶이 성화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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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행복의 조건
-김광태 신부-
초등학교 1학년생한테 숙제를 내줄 때는 선생님이 공책에 번호를 붙여가며 적어주지만, 대학생쯤 되면 아예 숙제란 것도 없다. 그러나 좋은 평점을 받아서 취직을 잘 하려면 알아서 공부해야 하는 더 무거운 책임감이 주어진다.
모세는 아직 초등학생 수준이라고 할 수 있는 백성들한테 맞춰 돌판에 새겨진 하느님의 계명을 전해 주었지만, 예수님은 대학생 수준으로 성장한 새로운 이스라엘을 향해 하느님과 성숙한 관계를 맺도록 초대하신다.
마태오복음 57장의 산상설교는 듣기는 아름다운 말씀이지만 실천하기가 너무 어렵다 보니 도대체 누구를 위한 말씀인가를 놓고 학자들 사이에 많은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단순하게 보면 그 대상은 분명해진다.
예수께서는 군중을 보고 산으로 오르셨고, 제자들이 그분께 가까이 다가왔다. 이 장면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구도가 선명해진다. 맨 아래쪽에는 군중, 그 위에 제자들, 그리고 맨 위에 예수님이 앉아 계신다. 예수께서 모두를 향해 말씀하시지만, 군중과 제자들이 이해하는 수준은 각기 다를 수밖에 없다. 마이크가 없던 시절이었으니 멀리 있을수록 예수님의 목소리가 작게 들렸을 것이고, 또 옆 사람의 작은 움직임도 예수님의 말씀을 방해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상의 것들을 그대로 지닌 군중의 ‘무거운 몸’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선 제자들처럼 가뿐히 산 위로 오를 수 없게 만들었을 것이다.
결국 오늘 예수께서 선포하신 참행복은 모두에게 열려 있지만, 제자들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께 가까이 가려는 사람들에게 더 생생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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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그리스도로서 살아간 성인들
-경규봉 신부 -
모든 성인 대축일은 교회력에 축일이 지정되지 않은 모든 성인들을 기념하는 날이다.
이 축일은 원래 4세기경 안티오키아에서 성령 강림 후 첫 번째 주일에 기념되었다. 609년 5월 13일, 교황 보니파시오 4세가 고대 로마 올림포스의 신들에게 바쳐진 로마 판테온 신전을 교회에서 사용하기 위해 축성한 다음 성모 마리아와 모든 성인들에게 봉헌하면서 제정하였다.
그 후 교황 그레고리오 3세(재위 731-741)가 성 베드로 대성당 안의 부속성당을 특별히 모든 성인들을 위해 봉헌하면서 추수기와 일치하도록 11월 1일로 날짜를 변경하였다. 이 시기는 여름 노동을 끝내고 성지를 순례하는 순례자들이 쉽게 음식을 구할 수 있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이후 835년, 교황 그레고리오 4세(재위 827-844)에 의하여 전 교회에 보급되었다.
신약성서에서는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성도(聖徒)’ 또는 ‘성스러운 사람’이라고 불렀다(사도 9,13; 골로 1,2). 즉, 넓은 의미에서 하느님의 은총 아래 사는 사람은 거룩한 사람(성인)이다. 그러나 초대 교회에서부터 성인이란 칭호는 성덕(聖德)이 뛰어난 분들에게만 사용했다.
즉, 엄밀한 의미에서 성인이란 살아 있는 동안 영웅적인 덕행으로 모든 사람의 모범이 되어 교회가 교도권(敎導權: 교회의 가르치는 권한)에 의해 성인으로 선포한 사람이나, ‘성인록’에 올라 장엄한 선언에 의하여 성인으로 선포된 분들을 가리킨다. 교회가 성인으로 공인한 이들은 하느님 나라에서 영광스러운 자리에 올라 전세계의 사람들이 그 성인에게 전구(轉求)해도 되며, 그분의 생존시 덕행이나 순교가 그리스도교 신앙의 증언이요 본보기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인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먼저 성인들은 하느님만으로 만족한 분들이고 하느님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던 분들이다. 그들은 결코 자신의 영광과 영예를 구하지 않았고, 성령의 내적인 활동에 귀를 기울이고 성령이 요구하는 삶을 추구하였다. 또한 성인들은 그리스도를 본받고 살아간 분들이다. 그리스도처럼 자기를 버리고 자신의 십자가를 충실히 지고 살았으며, 그리스도처럼 하느님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바친 사람들이다. 즉, 또 하나의 그리스도로서 살아간 분들이다.
나아가 성인들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마태 5, 48)는 주님의 말씀을 목표로 삼고,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또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여러분이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1테살 4,3)라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실제로 실천한 분들이다. 뿐만 아니라 성인들은 기도하는 분들이다. 그들은 사도직 활동이나 봉사 활동으로 인하여 바쁜 생활을 했지만, 바쁜 가운데서도 틈을 내어 밤낮으로 그 날을 반성하며 자기 안에 현존하는 하느님을 생각하고 그 날에 한 일을 하느님께 봉헌하며 기도했다.
기도는 성령께서 역사하는 길이다. 기도는 성령의 역사를 내 안에서 체험하는 길이며 하느님과 예수님을 만나는 장소이다. 기도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께서는 기도 안에서 우리와 친밀한 친교를 나누기를 간절히 바라신다. 성인들이 어려움 속에서도 영웅적인 삶을 살 수 있었던 비결은 곧 기도이다.
성인들은 기도를 통하여 힘을 얻고 그 힘을 바탕으로 모든 어려움을 극복했다. 마지막으로 성인들은 시대를 비추는 빛이다. 성인들은 항상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모든 신자들의 모범이 되었다. 그래서 성인들은 ‘살아 있는 복음’이라고 불려지기도 한다. 그들은 복음의 말씀을 몸소 행동으로 보여 준 증거자들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거룩해지고 당신을 닮은 완전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완전한 인간의 모범으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고 우리를 예수님처럼 변화시키도록 성령을 보내셨다. 그러므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영적인 것에 마음을 쓰며 우리의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자. 성인들을 본받아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 되고 성인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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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행복의 길을, 성인이 되는 길
-서진영 신부-
찬미 예수님!
오늘 기분 어떠십니까? 마음이 화창하십니까? 아니면 조금 흐리십니까? 사람이 살다보면 언제나 맑은 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지금은 맑더라도 조금 있다가 집에 들어가보면 눈살을 찌푸리게도 되고, 지금은 조금 어둡더라도 내일 아침이면 다시 밝아 질수 있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언제나 충만하게 사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뭘 해도 조금은 부족하게, 혹은 너무나 부족해 보이는 것이 자기의 모습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재력, 건강, 자식복 등의 능력을 고루 갖춘 사람, 뭐 하나 빠진 것 없이 다 성취한 사람도 있어 보이지만, 지극히 평범한 우리는 내 옆 사람들 모두가 나보다 잘나 보이는 날이 있게 마련입니다. 자식 자랑하기 바쁜 이웃집 아주머니 앞에서, 이번에 횡재했다고 떠벌이는 직장 동료 앞에서, 시험 망쳤다고 속 상해 하지만 그래도 나보다는 성적이 좋은 친구 앞에서 기가 죽습니다.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행복의 조건들조차 나에게는 과분해 보일 때가 있습니다. ‘나는 왜 이리 부족할까’하고 자문해 봅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는 평균적인 행복의 요소들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게 주어진 것은 아닌 듯 합니다. 나보다 더 잘 나 보이는 절대 다수와 나보다 못해 보이는 절대 소수의 사람들을 더해서 나눈 값이 행복의 평균값일 수 있습니다. 단 이것도 우리가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나의 눈에는 못나 보이는 사람들은 들어오지도 않고 더 잘나 보이는 사람들만 들어옵니다. 그렇게 잘난 사람의 잘난 부분과 비교하면 나는 한없이 부족한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내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이 넘칠 수도 있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합니다.
오늘 모든 성인의 대축일에 신앙적으로 나보다 잘난 사람들만 생각하면 나는 성인이 아니라 죄인에 가깝습니다. 기도도 부족하고, 나눔도 부족하고, 사랑도 부족해 보입니다. 내세울 것이 변변찮습니다. 세상의 그 무수한 성인들 앞에서 나만 죄인입니다. 그러나 모든 성인의 대축일이 있는 것은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이가 성인이 될 자질이 있다는 교회의 권고입니다. 복음이 전하고 있는 한계와 부족함 속에서도 이웃들에게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모두 성인이 될 수 있다고 전하는 희망의 날입니다.
주님 때문에, 이웃 때문에 마음이 가난한 사람,
주님 때문에, 이웃 때문에 슬퍼하는 사람,
주님 때문에, 이웃 때문에 참고 견디는 온유한 사람,
주님 때문에, 이웃 때문에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주님 때문에, 이웃 때문에 자비를 베푸는 사람,
주님 때문에, 이웃 때문에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
주님 때문에, 이웃 때문에 옳은 일 하다가 박해를 받은 사람들은
그렇게 실행하는 순간부터,
부족한 마음의 빈자리가 하느님의 은총으로 채워지고 행복해진다는 말이 됩니다.
항상 부족해 보이고, 내 뜻대로만 되는 세상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 세상에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부족한 가운데서도 사랑을 실천하고,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힘 닫는데까지 도울 때, 내가 한 부족한 일들이 세상에 쌓아 올린 공로가 됩니다. 내가 온 힘을 다해 내민 손으로 얼마나 많은 이들을 도울 수 있을지 모릅니다.
새로운 달의 시작에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참 행복의 길을, 성인이 되는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이번 한 달, 나로 인해 다른 사람이 성인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그들이 행복해 질 수 있도록 노력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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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가난
-변수운 수녀 -
처음 매일성서묵상을 부탁받고는 그동안 말씀을 맛들이는 것에 소홀히 한 저를 위한 하느님의 초대인 것 같아 쾌히 승낙을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마감날짜가 다가오면서 뒤돌아보니 말씀을 맛들이지도 못했고, 급기야는 제가 쓸 묵상 내용이 어떤 반응을 가져올까? 행여 별볼일 없는 내용이라고 뭐라고 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생겼습니다. 예수께서 오늘 복음에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고 하셨는데 지금 이 순간 나는 행복한가? 내 안에 하늘나라가 있음을 느끼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아니올시다’인 것은 하느님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체면이나 차리려고 하고 내가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비춰질까 염려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란 자신이 잘나고 못나고, 잘하고 잘못하고를 떠나 하느님의 조건 없는 사랑에 믿음을 가진 사람이며 하느님의 돌보심을 믿는 사람이라는 생각입니다. 지금 이 순간 두려움과 걱정, 부담과 고통을 함께 나누시고 참 평화를 바라시는, 그래서 당신 사랑으로 돌보시고 영적·물적 필요를 안배하시는 그분을 신뢰하는 태도라는 생각인 것입니다. 다시 한번 하느님의 지식과 지혜를 청하며 당신의 말씀을 깨닫고 맛들일 수 있는 은혜를 청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만납니다. 이제 저는 당신의 사랑과 돌보심으로 두려움을 넘어 자신의 한계와 허물조차도 진솔하게 나누며 이런 저에게 내리시는 당신의 평화와 사랑을 체험하기에 하늘나라가 여기에 있음을 느낄 수 있어 감사드릴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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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성서 [작은 거인들] 중에서-
오늘은 모든 성인 대축일이다. 4세기 초부터 교회에는 모든 순교자들을 함께 기념하는 날이 있었다. 그리고 서기 800년경에는 성인들의 축일이 전례력에 기록되었다. 이 책에는 십수 세기에 걸쳐서 존경을 받아 온 성인들 중에서 일부만을 기록했다. 만약 당신이 좋아하는 성인을 이 책에서 찾을 수 없다고 해서 그분이 성인이 아니라는 뜻은 아니다. 대개는 성인들이 돌아가신 날을 축일로 삼기 때문에 같은 날 여러 명의 성인이 기념될 수도 있다. 그런 경우에는 한 명의 성인만 살펴보고 다른 성인들은 다음 기회로 미루었다. 또는 성 크리스토퍼처럼 전설적인 인물들은 공식적인 성인으로 선포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책에 기록하지 않았다. 어쨌든 오늘은 모든 성인들을 함께 기념하는 날이다. 성인뿐 아니라 내 인생에 영향을 끼친 분들, 예를 들어 할아버지, 할머니, 부모님, 은인과 친구도 함께 기억하면 좋겠다. 지금은 천국에 계시지만 나를 사랑했던 분들과 아직도 나를 사랑하고 계신 분들에게 감사의 표현을 하자. 당신의 수호 성인은 누구인가? 성인들이 행진할 때 나도 그 대열에 함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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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희망 ‘행복선언’
-장재봉 신부 -
그날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군중들은 과연 그 말씀을 그대로 살았을까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가난한 사람들의 기쁨은 찌들린 일상으로
희석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부자들 또한 좋은 말씀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자신이 살아오던 방식대로 떵떵거리며 살았을 것입니다. 우리 삶에 큰 변화가
생기지 않을 것을 알고 계셨을 예수님께서 굳이 이러한 선포를 하신 까닭이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오늘은 모든 성인의 축일입니다. 우리들은 무수한
성인들이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아서 성인이 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어느 누구도 그분들이 살아내신 가난 희생 고통을 불행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행복선언은 내 안에서 하느님이 차지하시는
비율입니다. 가진 것이 적은 사람은 그만큼 하느님의 자리가 넓을 것이고,
자신의 것으로 꽉 찬 사람은 하느님께 내드릴 자리가 좁을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마음이 가난하고 슬프고 온유해야 하며, 자비로운데다가
마음까지 깨끗하여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 될 때에만 하느님의 자녀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내 것을 사랑으로 나누는 마음이 있다면, 이웃의 아픔에 연민을
가진다면, 주어진 삶에서 하느님의 뜻을 헤아려 순명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틀림없는 그분의 자녀라는 기쁜 소식입니다. 위령성월의 첫 날에
이 특별한 축복으로 우리에게 힘을 주신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와 함께
아버지의 나라에서 영원히 살아가게 되기를 꿈꾸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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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이런 이야 당신의 얼굴을 찾는 족속이니이다
- 이기양 신부-
우리 주위에는 책을 봐도 또 달력을 봐도 자신의 축일이 나와 있지 않다고 축일을 묻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세월이 오래 지나면 마치 조상들이 후손들한테 잊혀지듯이 성인들의 축일도 없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렇게 날짜를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의 축일이 있습니다. 바로 오늘 모든 성인 대축일입니다.
우리가 모든 성인 대축일을 지내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 정말 오래 기억될 사람이 아니면 역사 속에서 사라집니다. 옛 성인들이 잊혀지면 새로운 성인들이 기억되고 이런 과정이 되풀이되면서 교회 역사는 이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성인 대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모든 성인 대축일을 지내는 이유는 우리가 사도신경에서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하는 신앙 고백과 맥을 같이 합니다.
그럼 성인의 통공이란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교회를 지상의 교회라고 이야기하고, 천사와 성인 성녀들이 사는 교회를 천상의 교회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또 한 교회가 있지요. 연옥 영혼들을 위한 연옥 영혼들의 교회, 이렇게 우리는 세 교회를 알고 있습니다. 물론 천상의 교회는 성인 성녀들과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산 사람들이 하느님과 영복을 누리는 교회를 말하지요.
천상의 교회는 우리 지상의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고 또 지상의 교회는 연옥에서 보속할 것이 남아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며, 이렇게 기도를 받아서 천상의 교회로 간 연옥 영혼들은 지상의 교회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이와 같이 천상과 지상과 연옥 영혼들이 함께 기도하고 서로 도움을 받는 것을 우리는 ??통공??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는다는 것은 천상에 있는 교회와 지상에 있는 교회가 서로를 위해서 기도해주는 것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모든 성인의 날, 또 위령의 날 그리고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 이 모든 것은 함께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통공??이라고 신앙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은 사람과 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천상의 교회와 지상의 교회가 연결이 되어서 서로 기도해준다는 것을 믿고 또 체험하기도 합니다.
오늘 제 1독서는 요한 묵시록입니다. 환시를 통해서 지상의 교회를 살던 사람들이 박해와 고난을 이기고 승리하여 마침내 천상의 교회에 머무르게 된 것을 이야기하고 있지요. 독서는 십 사만 사천 명이 하느님 소유의 도장을 받았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정말 십 사만 사천 명이라는 한정된 사람만이 하느님의 사람이 되는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지요. 일반적으로 십 사만 사천 명은 12×12×1000을 의미하는데 열둘은 구약의 백성들을, 또 열둘은 신약의 백성들 그리고 천은 매우 많은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구약과 신약의 많은 사람들과 천상의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에 있다는 것을 숫자로 십 사만 사천 명이라고 표현을 한 것입니다. 묵시록은 하느님께 뽑힌 사람들을 십 사만 사천 명이라고 표현하면서도 또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다음에 내가 보니,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권에서 나온 그들은, 희고 긴 겉옷을 입고 손에는 야자나무 가지를 들고서 어좌 앞에 또 어린양 앞에 서 있었습니다.??(묵시7,9)
그렇습니다. 이와 같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십 사만 사천 명이라는 제한된 인원이 아니라 하느님께 인정받은 모든 민족과 겨레라고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대로 살다가 뽑힌 사람들이 바로 천상의 교회의 구성원들이 되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셔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들은 행복하며 하늘나라를 차지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행복한 사람, 그리고 하느님께 인정받는 사람은 세상의 기준으로 뽑힌 사람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대로 생각하고 하느님 중심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소유를 통해서 행복을 추구합니다. 재산과 건강과 자녀들의 성공만을 바라보지요. 그런데 그러한 것에 행복이 있다는 말씀은 오늘 복음에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재산이 많으면 행복하다, 자식이 성공하면 행복하다, 몸이 건강하면 행복하다??는 이야기가 나와 있습니까? 찾아볼 수 없지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거기에는 참된 행복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에서 참된 행복을 기대하는 그 자체가 무리라는 것이지요. 우리가 얼마나 불안정한 곳에서 행복을 찾고 있는지를 바로 알아들을 수가 있습니다.
하느님께 의지하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재물이나 자식의 성공, 또 건강한 몸에서 행복을 얻으려고 합니다. 불안할 수밖에 없지요. 재물은 언제 날아갈지 모르고, 자식은 언제 떠날지 모르며 건강은 언젠가는 시들게 마련입니다. 그런 것에서는 참된 행복을 얻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진복팔단의 말씀을 가슴에 담을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산 사람은 지상의 교회를 마치고 천상의 교회에 몸담게 될 것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성인의 통공을 믿는다는 모든 성인의 축일의 의미를 우리에게 고스란히 전해주고 있습니다.
특히 오늘 시작되는 11월은 ??위령 성월??입니다. 우리보다 먼저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달로써 성인의 통공을 그대로 드러내주는 달이지요. 우리는 돌아가신 분들이 모두 천상의 교회에 들어가기를 기도합니다. 열심히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분들은 또한 우리가 죽었을 때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줄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영원히 살 곳은 이 세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로 하느님 나라라는 것을 모든 성인의 통공을 통해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 모든 성인의 대축일을 맞아서 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기억하고 특히 연옥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한 달, 또 앞서 돌아가신 분들을 기억하는 오늘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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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덕 신부 -
제 방의 한쪽 벽에는 우리나라 103위 성인의 성화가 걸려 있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을 중심으로 성인들이 둘러 서있고 하늘에는 천사들이 날아다니며,
승리의 종려나무 가지를 흔드는 그림입니다.
마치 오늘 1독서 요한 묵시록에서 환시로 계시되어진
‘희고 긴 옷을 입고 야자나무가지를 손에든’ 성인들의 모습을 떠오르게 합니다.
그런데 이 성화에 드러나는 성인들의 모습에는 하나의 공통된 특징이 발견됩니다.
손을 모으거나 무릎을 꿇고 평화로운 얼굴로 하늘을 우러러 바라보는 등의 모습인데요.
그것은 모두가 기도하는 자세라는 것입니다.
바로 성화는 하느님을 향한 성인들의 마음과 기도의 자세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모든 성인 대축일입니다.
특별히 성인들의 공덕을 기리며 그들의 삶을 본받고자 교회가 제정한 축일이지요.
우리들은 평소에 사도신경을 통해서 ‘성인들의 통공(通功)’을 자주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그 통공의 내용은 바로 성화에서도 드러나듯이
하느님에 대한 찬미와 지상의 우리를 향한 기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즉 지상의 순례자인 우리들은 천상영광중에 있는 모든 성인들과
하느님 안에서 연결되고 사랑의 친교를 나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앞서간 성인들의 삶이 오늘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 까요?
성인들이 지상에서 살다간 모습은 우리의 지상여정에 큰 이정표가 됩니다.
여행을 떠나게 될 때 우리는 여러 갈개의 길을 만나게 되지요.
목적지를 향한 올바른 길을 잘 선택하기 위해서는 지도도 챙기고, 이정표를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엉뚱한 곳에서 길을 잃고 헤매거나 목적지에 갈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내비게이션(navigation)이라는 기계의 도움을 받기도 합니다.
이것은 길을 잃지 않고 올바로 목적지를 찾아가기 위한 노력의 일환입니다.
바로 성인들은 하느님 나라를 향한 우리 삶의 여정에 있어서
내비게이션과 같은 안내자이며 올바른 방향을 잡게 도와주는 이정표와도 같은 분들입니다.
즉 이들은 지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삶으로 구현하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산에서 선포하신 진복팔단, 여덟 가지 참 행복의 길을 담고 있습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실제로 성인들은 말씀처럼 이 지상에서 슬퍼하였고, 온유하였으며,
의로움에 주리고 목말라 하였습니다. 자비로운 삶을 살았고,
마음이 깨끗하였으며, 그리스도의 평화를 이루고,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인들은 지금 천상의 참된 행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를 기도로 도와 초대하고 계십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성인들은 복음에 충실한 삶으로 우리에게 하느님 나라를 향한 올바른 길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또한 우리를 위해 오늘도 천국에서 아낌없는 기도의 응원을 보내주고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도 성인들의 공덕을 기억하며 우리가 겪는 온갖 시련과 박해들을 용감히 이겨냅니다.
오늘도 목적지인 하느님 나라를 향해 우리의 지상 여정을 더욱 힘내어 살아갑시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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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사람
-김희자 수녀-
예수님이 말씀하신 참 행복은 성령께서 주신 새로운 은총의 선물이다. 신학자 로마노 과르디니는 ‘산상설교는 하늘로부터 일으켜진 땅의 진동’이라고 했다. 순전히 인간적인 면으로 보면 참 행복을 따라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참 행복은 불합리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더 큰 부자가 되고 더 중요한 사람이 되는 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행복은 오직 미래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느님은 시련과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 과 함께하시며 그들을 사랑하신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는 말씀은 기쁨과 구원에 대한 이야기다. 마음의 가난은 마치 돈이나 소유물에 행복이 달려 있기라도 하듯 그것들을 우상처럼 섬기는 우리 자신을 해방시켜 준다. 하느님만이 절대적인 분이시며, 모든 창조물은 우리가 창조된 목적에 도달하는 데 도움을 주는 한에서만 선한 것이다.
행복을 주제로 한 동화가 생각난다. 한스는 일한 대가로 금덩어리 하나를 받고 행복했다. 그러나 그는 금을 말 한 마리와 바꾸었고, 그 다음에는 소·돼지·거위와 바꾸었고 마침내 돌덩이와 바꾸었다. 새로운 것을 바꿀 때마다 그는 행복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바꾼 돌을 낑낑거리며 들고 가다가 그만 물속에 빠뜨리게 된다. 그러자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었다.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난 다음에 그는 자유를 느꼈다.
오늘은 이 지상에서 순례길을 걷고 있는 우리와 천국과 연옥에 있는 이들의 통공을 고백하며, 우리보다 앞서 성화의 길을 간 성인들을 본받고 자신의 성화를 생각하는 날이다. 성인들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예수님 외에는 모든 것을 버린 자유로운 분들이었다. 오늘 우리도 ‘마음이 가난한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첫걸음을 내디디며 행복한 순례를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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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강영구 신부 -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11월의 첫날입니다. 11월은 위령(慰靈)의 달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위령(慰靈)의 달인 11월의 첫날을 ‘모든 성인의 날’로 기념합니다.
성인(聖人)이란 거룩한 사람을 말합니다.
누가 거룩합니까?
천상에 머무는 사람이 거룩합니까? 천사가 거룩합니까?
흠도 티도 없는 완벽(完璧)하고 완전무결(完全無缺)한 사람이 거룩합니까?
한마디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를 닮은 사람이 거룩합니다.
예수님은 하늘을 버리고 땅으로 오신 분입니다.
땅에서도 가장 낮은 자리를 차지하셨습니다.
손수 목수 일을 하시면서 생계를 꾸려가셨고
이웃들의 가재도구도 고치거나 손보아 주었습니다.
출가(出家)하신 이후로는 머리 둘 곳조차 없는 무소유(無所有)의 떠돌이로 사셨지만,
병들고 상처 받은 사람들을 따뜻한 가슴으로 품어주시고
자비로운 손길로 쓰다듬어주셨습니다.
세리와 창녀, 죄인과 나병환자들과 불구자들이 그분 안에서 안식(安息)할 수 있었습니다.
그분은 이 세상을 정화(淨化)하시기 위해 단죄(斷罪)하거나 판단하시지 않았습니다.
그 반대입니다. 용서하시고 치유하셔서 함께 걸으셨습니다.
그분은 욕망의 소리보다 하늘의 소리(天命)에 귀를 기울이시고자 늘 기도(祈禱)하셨습니다.
당신도 예수가 되십시오.
당신은 성인(聖人)이 되기 위해서 이 땅에 왔습니다.
성인(聖人)이 되셔서 이 땅에 살지만 하늘나라를 누리시기 바랍니다.(一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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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양승국신부-
<성인(聖人)이 되는 비결>
성인(聖人) 하면 우선 드는 느낌이 무엇입니까? 저 같은 경우 일단 거리감부터 느껴집니다. 나와는 전혀 별개의 영역이나 세계에서 살아가신 분들,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도달할 수 없는 특별하고 비범한 인물들.
성인 하면 떠오르는 단어들은 또 어떤 단어들입니까? 기도, 침묵, 관상, 탈혼, 고행, 극기, 오상, 단식, 거룩함, 엄숙함, 진지함, 기적, 치유, 제7궁방...
책을 많이 읽는 편이지만 제 개인적으로 손이 별로 가지 않는 책들이 성인전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인지 도서관에 꽂혀있는 성인전들은 대체로 빛이 바래고 책장을 넘기면 케케묵은 먼지가 날립니다.
그러나 최근 시성된 성인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더 이상 성인품에 오르는 일은 성직자나 수도자들의 전유물도 아닙니다. 특히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에 따르면 성인의 길은 누구에게나 다 활짝 열려있습니다.
성성(聖性)은 우리에게도 도달 가능한 보편적인 길이기에 어찌 보면 부족한 우리 모두도 다 시성시복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예비 성인들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 성인들이 지닌 특성이 한 가지 있는데 그 특성을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그 특성은 다름 아닌 살아있을 때부터 성성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이승에서의 삶이 전혀 아니었던 사람, ‘이건 아닌데’ 하는 사람이 죽어서 성인품에 오를 가능성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돈보스코 같은 분, 마더 데레사 수녀님 같은 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 같은 분, 세상을 떠나기 전부터 이미 세상 사람들은 그들에게서 성성(聖性)을 확인했습니다. 살아계실 때부터 사람들은 그분들을 성인(聖人) 대하듯이 대했습니다.
성인(聖人)이 되기를 꿈꾸는 사람은 죽고 나서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부터 성인(聖人) 소리를 들어야만 합니다.
저 분은 정말 법 없이도 살 사람이네, 성가정이 따로 없네, 날개만 없다뿐이지 천사가 분명해, 혹시 바보 아냐, 이 세상에 살 때부터 이런 소리를 듣는 사람들은 성인후보자가 확실합니다.
오늘 모든 성인 대축일을 맞아 저는 확신합니다. 성인이란 우리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별세계에서 살다간 유별난 사람이 절대로 아니었습니다. 우리보다 한 3분 정도 더 인내한 사람, 우리보다 조금 더 친절했던 사람, 우리보다 조금 더 사랑했던 사람들이 분명합니다.
우리보다 조금 더 따뜻함을 지녔던 사람들, 우리보다 조금 더 인간미를 풍겼던 사람들, 우리보다 조금 더 영적 생활에 투자했던 사람들이 성인들이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머무는 빛인 사람들, 이제는 어둠의 세력과 결연히 단절하고 떳떳하고 당당한 빛의 자녀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확실한 성인 후보자들입니다.
어렵고도 어려운 길이 성화의 길이지만, 어떻게 보면 조금도 어렵지 않은 길이 성화의 길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를 충실히 함을 통해서, 좀 더 기쁘게 살아감을 통해서, 조금만 더 기도함을 통해서, 조금만 더 양보하고 물러섬을 통해서 우리 역시 충분히 성인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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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들의 후광(後光)
-박상대신부-
오늘 전세계 교회는 오직 하느님의 영광 속에 자신과 자신의 삶을 봉헌한 모든 성인(聖人)들의 축일을 기념한다. 모든 성인 대축일은 "강림하신 성령의 공현(Epiphania)"이라고도 한다. 이는 성인들 자신이 하느님 성령 안에서 마치 밀알이 되어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써 많은 열매를 맺은 것이기 때문이다.(요한 12,24) 이는 아직도 지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목적이기도 하며, 그 목적을 향한 우리의 여정 또한 계속된다.
오늘 모든 성인 대축일의 진정한 의미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오늘은 일년의 달력 안에서 기념하는 모든 성인들을 한꺼번에 모아서 다시 한번 축하하고 기리자는 날은 아니다. 마치 한 편의 성공한 연극에서 배우들이 관객들로부터 여러 번 박수갈채를 받고 난 뒤, 무대, 조명, 안무, 음악 등의 연출자들과 모두가 함께 앞으로 나와 마지막 박수를 받는 그런 일과 다르다는 것이다. 비록 성인들이 세상의 삶을 마치고 떠난 훨씬 뒤에 교회에 의해 시성(諡聖)하여 공식적으로 성인대열에 올림을 받은 사람들이라 하지만, 이미 세상에서 성인의 삶을 살았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공경하는 성인들은 이미 이 땅에 살 때 성인이었다는 말이다.
옛날 아주 먼 옛날에 정말 성인(聖人)처럼 거룩하게 사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주위의 다른 사람들은 그가 거룩하게 산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만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니까 자신은 거룩한 줄 모르고 거룩하게 살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람이 지니고 있는 특징은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그 사람들의 과거에 대한 어떤 것에도 상관없이 항상 처음처럼 새롭게 대하는 것이었다. 하느님께서도 그를 사람들 중에 가장 거룩한 사람이라고 인정하여, 한번은 수호천사를 불러 그에게 모습을 보이고 소원을 하나 꼭 들어주도록 시켰다. 하느님의 명을 받은 수호천사가 그에게 모습을 보이고 소원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그런데 그는 소원이라고는 없다고 하였다. 글쎄 소원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그는 한사코 소원이 없다고 하였다. 할 수 없이 천사가 "너에게 사람의 병을 치유하는 기적의 은사를 줄까?" 하고 묻자, 병자를 치유하는 일은 하느님께서 직접 하시는 일이라면 거절하였다. 그러자 천사가 "죄인들을 회개시켜 바른 삶을 살도록 하는 힘을 줄까?" 하고 묻자, 그런 일이라면 당신들 천사들이 해야 할 일이라며 거절하였다. 마지막으로 천사가 "그러면 너의 거룩한 삶을 사람들이 모범으로 삼아 존경할 수 있도록 해 줄까?" 하고 묻자, 그는 펄쩍 뛰면서 절대 안 된다고 하였다. 그렇게 되면 자신이 교만해져서 사람들에게 오히려 해가 될 것이라고 하였다. 무슨 소원이든 한 가지는 꼭 들어주어야 한다는 명을 받은 천사가 빈손으로 돌아갈 수 없다며 난처해하자, 그가 말했다. "사람들이 저를 통해 착한 마음을 가지고 살도록 해 주시되, 그 사실을 내가 모르도록 해 주십시오." 그랬다. 천사는 하느님께 가서 그대로 고하였다. 하느님께서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해줄 수 있을까 하고 곰곰이 생각하시더니, 천사를 시켜 그 착한 사람에게 후광(後光)을 걸어 주도록 하였다.
이것이 성인들의 후광(後光)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것이 앞도 옆도 아닌 성인의 머리 뒤에 빛나는 광테이다. 자신만 볼 수 없고, 다른 사람만 볼 수 있는 후광인 것이다. 물론 살아 있는 우리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함께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이 후광을 빛내고 있으리라. 그들은 바로 오늘 복음의 아홉 가지 참된 행복의 길 중에서 하나의 길을 택하여 꿋꿋이 가고 있는 사람들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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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여라(마태 5, 1-12)
-유 광수신부-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이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니.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이들! 그들이 위로를 받으리니. 행복하여라, 온유한 이들! 그들이 땅을 차지하리니.
성 아우구스티노의 신학에 따르면, 원죄는 세 가지 결과를 가져왔다고 한다.
그 첫째는 우리가 어디에서 행복을 찾아야 하는지 모르는 무지함이고, 둘째는 잘못된 곳에서 행복을 찾고 있는 탐욕이고, 셋째는 비록 행복이 찾아지는 곳을 알면서도 그것을 추구하지 못하는 나약함이다. 이것이 원죄 이후의 인간의 상태이고 조건이라는 것이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찾아 나서지만 잘못된 곳 즉 탐욕을 쫓아가고 있으며 비록 행복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을 알면서도 우리의 의지가 나약하기 때문에 작심 삼일이라는 말이 있듯이 자주 넘어진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행복을 인간에게 되찾아 주러 오셨다.
오늘 복음을 보면 우리가 행복으로 가는 길이 어떤 길인지를 제시하셨고 그리고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며 어떻게 살면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 되는가를 가르쳐 주셨다. 즉 오늘 복음은 행복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지 모르는 인간에게 행복을 찾아주는 약도로서 행복의 대헌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행복에로 초대받은 이들이며 진정으로 행복해 질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가를 예수님 한테 배우는 사람이고 그래서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이다. 나는 행복한가? 행복하지 못하다면 예수님이 제시하신 행복의 비결을 모르거나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한번 예수님이 제시해주신 행복의 비결을 배우고 그렇게 생활하도록 노력하자. 예수님이 제시해주신 행복의 비결은 즉 행복에 이르는 길은 여덟 개의 길이 있다. 그 중에 어느 한가지 길만이라도 제대로 간다면 행복에 이를 것이다. 왜냐하면 여덟가지 길은 서로 통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첫째,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이들! 이란 말은 한 마디로 예수님의 자서전과도 같은 말이다. 즉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분의 얼굴을 보여주신 것이다. 예수님은 마음이 가난하신 분이시다. 마음이 가난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실 수 있었다. "그분은 부요하셨지만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분이 가난해지심으로써 여러분은 오히려 부요하게 되었습니다."(코전 8,9) 그래서 바오로는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여러분의 마음으로 간직하십시오.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 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tu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필립 2,5-7) 마음이 가난한 이들이란 예수님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둘째, 슬퍼하는 이들이란 하느님이 누구이신가?를 드러내시는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와 똑같이 우리의 죄 때문에 슬퍼하시는 분이시다. 인간의 불행을 보시고 마음 아파하시고, 인간이 지은 죄를 보시고 우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 슬퍼해야 한다. 많은 죄를 지었으면서도 아무런 슬픔이 없는 사람이야 말로 가장 불행하고 불쌍한 사람이다.
셋째, 온유한 이들이란 인간의 모습을 취하신 하느님의 얼굴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온유한 그분의 모습이 하느님의 아드님의 모습이며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들의 모습이어야 한다. 온유한 마음만이 하느님이 주시는 선물을 받아들일 수 있고 그 은총으로 온유한 마음을 유지하고 발전시켜 나갈 수 있다. 가장 큰 불행은 완고한 마음이다.
넷째,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이들만이 거짓과 불의에서 빠져 나올 수 있다. 의로움이란 하느님의 것에 대한 주림과 목마름이다. 하느님의 것에 대한 주림과 목마른 사람만이 하느님을 찾아 나선다. 예수님이 인간에 대한 사랑의 주림과 목마름 때문에 인간을 찾아 나섰듯이.
다섯째, 자비로운 이들이란 하느님의 공동체에서 사는 이들의 모습이다.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가 6,36)고 말씀하신 것 같이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자녀요, 하느님의 공동체이다.
여섯째, 마음이 깨끗한 이들이란 현실의 진리를 밝히신다. 즉 이 세상 종말에 가면 현재의 것들은 어떻게 되는가에 대한 해답이다. 마지막 날에 승리하는 자는 마음이 깨끗한 이들이다. 그들만이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다."더러운 것은 아무것도 그 도성으로 들어 가지 몫하고 흉칙한 짓과 거짓을 일삼은 자도 결코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 도성에 들어갈 수 있는 자는 다만 어린 양의 생명의 책에 이름이 올라 있는 사람들뿐입니다."(묵시 21, 27)
일곱 번째,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란 자기 신원에 맞는 생활을 하라는 것이다. 즉 하느님의 자녀라면 하느님의 자녀로서 해야할 일을 실천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것은 이 세상의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것이다. 사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평화를 가져다 주러 오셨다. 이 세상이 주는 평화가 아닌 하느님이 주시는 평화는 폭력적인 방법으로가 아닌 사랑의 방법이다. 따라서 사랑으로 평화를 건설하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자녀들이다.
산 위에서 가르쳐주신 산상설교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요약한 것이다. 즉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어떤 생활이어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신 것이다.
진복팔단은 병들어 있는 우리의 영혼을 치유시켜주는 약이며 거짓과 탐욕과 불의로 병든 우리의 마음을 낫게 해주는 진리이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이 행복관을 생활하는만큼 우리는 행복해질 것이며 우리 자신이 될 것이며 잃어버렸던 우리의 참 모습을 되찾게 될 것이다.
칸트에 의하면 행복한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행복을 누리기에 합당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행복을 직접 목적으로 삼지 말고 행복을 누릴 만한 자격이 있는 행동을 하고 또 그러한 인간이 되라는 것이다. 행복의 길은 행복에 해당하는 행동을 하는 것이요, 행복을 누릴 자격이 있는 사람이 되려고 애쓰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