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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주신 잔
요18:1~27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두고 자신과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신 후 그들과 함께 예루살렘 성 밖으로 나가셔서 어두운 밤, 비탈진 성벽을 따라 기드론 시내로 내려가는 길을 걷고 계셨습니다.
기드론 시내는 예루살렘과 감람산 사이를 가로지르는 조그만 개천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곳으로 내려가신 예수님은 서편 비탈에 자리 잡은 겟세마네 동산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겟세마네= 기름 짜는 틀 이란 뜻)
본문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이곳은 자주 모여 쉬기도 하시고 기도하시던 곳입니다.
눅22:39/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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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 기드론 시내를 건너신 것은 아주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날은 유월절을 하루 앞둔 곧 유월절 양을 잡는 날이었습니다.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세계 곳곳에서 몰려 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불과 몇 시간 전에는 어린 양을 끌고 와 그 양을 잡아 피로써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어떤 기록에는 그날 한 번에 약 256,000마리의 어린 양이 희생제물로서 죽임을 당했다고 합니다.
양을 잡은 피는 하수구를 통해 이 기드론 시내로 흘러들었고 예수께서 이 기드론 시내를 건너실 때에는 양의 피가 흘러내려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 나리 새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될 것이고 그의 흘리신 의로운 피가 그림자 제사, 상징적인 제사의 형식을 끝내고 짐승의 피를 대신한 온존한 희생제물로서의 산제사로서의 출발이 될 것입니다. 그 의의 제사를 불과 몇 시간 앞두고 예수님은 지금 기드론 시내를 건너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십자가의 그 고난 아니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의 확증을 위한 그 거룩한 제물로서의 길을 걷고 계신 것입니다.
그 참혹한 죽음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그 고난의 그 길을 주님은 “잔”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11/하)/ “~~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했습니다.
“주신”이란 말은 “디도미/ ~~을 ~~에게 주다, 맡기다, 위탁하다, 넘겨주다, 희생을 드리다”라는 뜻입니다.
“잔을”이란 말은 “포테리온/ 고난, 죽음, 순교”를 가리키며,
“마시지”란 “피노/ 잔을 마시다”라는 뜻입니다.
“아니하겠느냐”라는 말은 강력한 부정으로서 “우 메/ 결코 ~~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즉 그 고난의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주께 맡기신 잔이요 그 뜻의 성취를 위해서는 결코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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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여러분!
이 잔은 우리의 잔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단지 고난이나 고통으로 끝남이 아니라 죄를 위한 동물제사의 종식이요 실제적인 산제사로서의 출발로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이었습니다. 결과 다시 사셨고 하늘에 오르사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 또한 이 잔을 마셔야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 십자가의ㅐ 사랑의 삶을 우리도 가치 삼고 살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그날 그 영광의 구원, 상급구원, 완성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주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 하심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즉 이 사랑의 삶을 좇는 십자가의 삶이 있어야 부활의 영광에 나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삶이 십자가를 지는 삶이요, 십자가에 죽는 삶이요, 십자가를 좇는 삶이요, 십자가를 붙드는 삶이요, 십자가를 바라보는 오직 예수의 삶이요, 그 밑에 내려놓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주님께서도
마16:24~27/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십자가에 죽으면 곧 그 사랑의 삶을 가치 삼고 좇아 행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했습니다.
또
요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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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많은 기도와 금식, 철야를 하고 많은 성경을 읽고 그 지식이 상당하다고 할지라도 이 삶이 없으면 모든 것이 자기 의요 자기자랑이요 자기영광이 되어버리고 하나님의 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헛수고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게 종교적인 열심을 좇았던 유대인들, 외식하는 저들에게 주님 무어라 하셨습니까?
요5:22~4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죄는 반드시 희생 제사를 통해 사함을 얻어! 따라서 예수님을 그 희생 제물로 삼으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그 뜻을 성취하신 주님의 그 길을 좇아 살아 낸 곧 성화, 두렵고 떨림으로 이루어가는 구원의 삶의 사람, 그 십자가 사랑의 삶의 결과로써 심판하는 권세를 주심/ 왜 구속 그 자체가 완성구원이 아니요 잃었던 천국영생의 기회를 다시 주신 은혜요 사랑이었기 때문/ 따라서 그 관계로서의 (사단의 종에서 그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됨) 요구하시는 방향으로서의 삶이 반드시 있어야 함)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함이니라.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많이들 오해하고 혼돈 하는 것 하나를 꼭 집고 넘어가십시다.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하시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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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이란 말은 “피스튜오/ 미완료 동사입니다. 아직 완성구원에 이르지 못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구속 받은 그것을 믿음이요 그 것으로 영생을 얻는 줄 오해합니다. ”의뢰하다, 확신하다“라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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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란 “피스티스/ 신뢰를 가지고 의뢰하다, 합의하다, 동의하다, 삶에 법을 삼아 따르다”라는 뜻입니다.
최고한 법이 무엇입니까?
약2:8/ “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했습니다.
즉 예수 십자가의 그 사랑의 삶을 우리 삼의 가치요 법을 삼아 좇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삶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 결과 주어지는 영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활구원, 현재구원, 두렵고 떨림으로 이루어가는 구원, 성화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는”이란 “호/ 이 사람”이란 뜻입니다. 각자의 행한 대로 받게 됨을 가리킵니다.
“영생을”이란 말은 “아이오니오스 조에/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천국영생의 영광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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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얻었고” 이 말을 오해하거나 잘 못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혼란스러워하는 것입니다. 삶이 없는 종교인으로 전락한 것입니다.
이는 미완료 동사 능동태입니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의 삶의 결과로서 주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뜻은 “에코/ 가지다, 소유하다, 이루다”라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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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하신 말씀도 오해를 많이 하는 말씀입니다.
이 또한 미래 동사입니다. “메타 바이노/ 옮아가다, 건너가다”라는 뜻입니다.
옮아가게 하시고 건너가게 하심에는 그 근거가 있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새벽기도, 금식기도, 철야기도를 많이 하고 성경을 몇 독을 하고 박사 학위가 있다고 할지라도 그 십자가의 삶,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십자가를 지고 주를 좇는 삶이 없으면 헛수고라는 말입니다.
곧 기도는 하나님의 일을 장 감당하기 위하여 곧 사단의 훼방을 이기고 이루기 위하여 하는 것입니다. 아니면 자기 의요 자랑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것 많이 스펙 쌓은 것이 믿음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언제나 그렇지만 하나님의 사역을 앞에 두고 반드시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약2:17, 26/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했습니다.
그래서 또
약2:20~20~25/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 이로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믿음과 행함은 하나이니라/ 속의 믿음이 현재의 사랑의 삶으로 증거 되어 나타나느니라)”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많은 기도와 금식, 철야를 하고 많은 성경을 읽고 그 지식이 상당하다고 할지라도 이 삶이 없으면 모든 것이 자기 의요 자기자랑이요 자기영광이 되어버리고 하나님의 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헛수고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게 종교적인 열심을 좇았던 유대인들, 외식하는 저들에게 주님 무어라 하셨습니까?
요5:22~4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죄는 반드시 희생 제사를 통해 사함을 얻어! 따라서 예수님을 그 희생 제물로 삼으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그 뜻을 성취하신 주님의 그 길을 좇아 살아 낸 곧 성화, 두렵고 떨림으로 이루어가는 구원의 삶의 사람, 그 십자가 사랑의 삶의 결과로써 심판하는 권세를 주심/ 왜 구속 그 자체가 완성구원이 아니요 잃었던 천국영생의 기회를 다시 주신 은혜요 사랑이었기 때문/ 따라서 그 관계로서의 (사단의 종에서 그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됨) 요구하시는 방향으로서의 삶이 반드시 있어야 함)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함이니라.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많이들 오해하고 혼돈 하는 것 하나를 꼭 집고 넘어가십시다.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하시는 말씀입니다.
“믿는”이란 말은 “피스튜오/ 미완료 동사입니다. 아직 완성구원에 이르지 못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구속 받은 그것을 믿음이요 그 것으로 영생을 얻는 줄 오해합니다. ”의뢰하다, 확신하다“라는 뜻입니다.
“믿음”이란 “피스티스/ 신뢰를 가지고 의뢰하다, 합의하다, 동의하다, 삶에 법을 삼아 따르다”라는 뜻입니다.
최고한 법이 무엇입니까?
약2:8/ “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했습니다.
즉 예수 십자가의 그 사랑의 삶을 우리 삼의 가치요 법을 삼아 좇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삶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 결과 주어지는 영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활구원, 현재구원, 두렵고 떨림으로 이루어가는 구원, 성화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는”이란 “호/ 이 사람”이란 뜻입니다. 각자의 행한 대로 받게 됨을 가리킵니다.
“영생을”이란 말은 “아이오니오스 조에/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천국영생의 영광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얻었고” 이 말을 오해하거나 잘 못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혼란스러워하는 것입니다. 삶이 없는 종교인으로 전락한 것입니다.
이는 미완료 동사 능동태입니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의 삶의 결과로서 주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뜻은 “에코/ 가지다, 소유하다, 이루다”라는 뜻입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하신 말씀도 오해를 많이 하는 말씀입니다.
이 또한 미래 동사입니다. “메타 바이노/ 옮아가다, 건너가다”라는 뜻입니다.
옮아가게 하시고 건너가게 하심에는 그 근거가 있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새벽기도, 금식기도, 철야기도를 많이 하고 성경을 몇 독을 하고 박사 학위가 있다고 할지라도 그 십자가의 삶,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십자가를 지고 주를 좇는 삶이 없으면 헛수고라는 말입니다.
곧 기도는 하나님의 일을 장 감당하기 위하여 곧 사단의 훼방을 이기고 이루기 위하여 하는 것입니다. 아니면 자기 의요 자랑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것 많이 스펙 쌓은 것이 믿음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언제나 그렇지만 하나님의 사역을 앞에 두고 반드시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약2:17, 26/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했습니다.
그래서 또
약2:20~20~25/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 이로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믿음과 행함은 하나이니라/ 속의 믿음이 현재의 사랑의 삶으로 증거 되어 나타나느니라)”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주님은 그 십자가! 하나님의 뜻을 담당하시고 (테텔레스타이/ 빚이 다 갚아지다, 완불되다) 이루시기 위하여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기 위하여 오르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 요한복음에는 기록하지 않지만
마태, 마가, 누가를 통해 어떻게 하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눅22:42/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했습니다.
아버지의 잔을 받는 자세는 내 원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그 원하시는 대로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때!
눅22:43/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이 뜻, 이 원하심의 일을 앞에 두고 더욱 기도하셨습니다.
눅22: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했습니다.
진액을 쏟아내는 기도를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십자가를 담당한다는 것은 고통이요 영적인 처참한 싸움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자기 사랑의 뜻을 반드시 담당해야만 했습니다.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아”했습니다. (은혜구원, 과거구원/ 말미암아 의 구원)
우리도 이 싸움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십자가의 군사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피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이 십자가를 지는 삶을 인하여 완성구원, 상급구원, 영광구원을 얻고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한 영생천국을 얻게 됨을 바울은 교훈합니다.
롬5:9~11/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이제는 의 삶으로써 이루어가는 구원이니/ 생활구원, 현재구원, 두렵고 떨림으로 이루어가는 구원)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즉 (구속/ 은혜구원, 말미암아 의 구원) 화목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주님의 그 십자가를 지시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심으로 약속대로 다시 사신 것처럼 생명의 부활로 나아오고 그 천국영생을 유업으로 받을 것이니라)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로 인하여 원수 되어 끊어졌던, 그래서 잃어버린 천국을 다시 얻을 기회를 얻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를 우리도 지고 좇음으로써)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느니라” (천국영생의 복락을 누리게 되느니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더욱 간곡히 권면하는데
롬8:17~18/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의 삶을 함께 살아내야 주어지는 천국영광이니) 우리가 (그 삶을 살아가는 주체가 바로 나라는 것입니다. 각자의 삶으로써!)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돨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마11:27~30/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니라”했습니다.
또 누구든지 자기십자가를 지고 좇는 삶 외에는 제 목숨을 구할 수 있는 길, 곧 천국영생을 얻을 수 있는 다른 길이 없음을 분명히 천명하셨습니다.
마16:24~27/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눅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인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대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인정함을 받아 그 구속하심의 은혜로 사단의 종이요 소유에서, 심판의 대상이요 지옥의 대상에서 하나님의 소유요 백성이요 하나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군사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르기를
딤후1:7~10/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한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구래서 구속은 과거구원이요 은혜구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완성구원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영생과 천국) 드러내신지라” (그 십자가와 부활로써 증거 하신지라) 했습니다.
또한 이르기를
딤후2:3~15/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약2:8/ “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이 사랑을 좇는 하나님사랑, 이웃사랑의 삶이 없으면 면류관, 곧 그 영광나라를 상속받는 후사의 자리에 서지 못할 것이며)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그 삶을 살아낸 사람이 그 영광의 상을 얻음은 마땅하니라) ~~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운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 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반드시 주와 함께 죽어야, 곧 주님의 그 보이시고 명하신 새 계명 적인 삶인 서로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생명의 부활과 주와 함께 영원토록 살게 되는 영생으로 나아가게 됨을 이르시고 힘써 행할 것을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뜻, 곧 하나님의 기쁘심을 위하여 경주하는 경주자요, 군사로 모집 된 자들로서 그날까지 이 십자가를 지고 좇는 삶으로 영광을 돌려드려야 합니다. 그 결과 영광구원의 즐거움의 그 혼인잔치에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이르기를
고전15:2~4. 17~20/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그리스도가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분명히 다시 사셨다. 이는 하나님의 뜻인 십자가를 담당하심으로써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기 때문이다. 고로 너희도 그 삶을 살아야 부활에 나아간다는 것, 그러므로 그 십자가의 삶이 없으므로 생명의 부활에 나아가지 못하는 종교인의 신앙은 헛것이다 하는 것)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구속함을 구원으로 알고 여전히 옛 사람의 가치를 좇는 완성구원과는 상관없는 가운데 있을 것이요) ~~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죽은 자 곧 지옥심판을 피할 수 없던 우리에게 첫 열매, 그 삶을 사는 자에게도 주어지는 씨, 소망의 생명이 되어주셨도다) 했습니다.
사도 야고보도 이르기를
약1:18, 22, 25/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예수)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복음을 깨닫고 이를 아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했습니다.
또한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선언하고 (약2:17, 26)
약2:20~25/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카탈티조/찢어진 그물을 깁다, 위골 난 뼈를 제자리에 맞추다, 맑게 하다/ 즉 부족하고 모자라지만, 우리의 행함이나 의지, 노력으로 안 되지만 그 작은 십자가를 지는 우리의 삶, 그것을 의로 여겨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입니다. 고로 구속함을 완성구원으로 알고 거저 새벽기도 하고 금식하고 철야하고 성경 많이 읽고 그것이 믿음이요 그것으로 완성구원을 받는 줄 아는 것은 속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믿음, 그 마음을 우리 삶 가운데 증거 하여 나타내는 이 십자가의 사랑의 행함의 삶은 필수인 것입니다! 이는 완성구원을 위한 온전함의 믿음으로 나아가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믿음과 삶은 하나이니라)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했습니다. (믿음이 있다면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좇아 사랑의 행함으로 나타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이 쓴 잔을 기꺼이 담당하심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시고 약속대로 다시 사셨고 승천하사 영광보좌에 앉으셨습니다. 우리 도한 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십자가를 지고 주를 좇는 삶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그 영광을 받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홀로 하나님의 그 잔을 마셨습니다.
우리가 베드로처럼 온갖 주님의 기적을 다 보았고 공생애 내내 따라 다녔지만
내가 직접 행하지 아니하면 결정적일 때 베드로처럼 주를 부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마나지 못하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려면 반드시 십자가의 죽음이 있어야 합니다. 부활은 죽음을 전제로 하는 까닭입니다!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합니다.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주신 잔은 각자가 마시는 것입니다. 홀로 마시는 잔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한 것입니다. 누가 보든지 아니든지 생활 가운데 그렇게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가치변화의 삶인 것입니다.
주님은 억울한 죽음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세상은 몰라도 사람들은 알아주지 아니해도 하나님의 뜻이기에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할렐루야!
주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고 죽으실 것을 말씀하실 때 베드로가 무어라 했습니까?
눅22:33/ “저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했습니다.
그런데 주께서 안나스의 위법한 법정에 섰을 때 따라간 베드로를 보십시오!
(16~17)/ “베드로는 문밖에 섰는지라. 대제사장과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왔더니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
(25)/ “시몬 베드로가 서서 불을 죄더니 사람들이 묻되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베드로가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아니라 하니”
(2~276)/ “대제사장의 종 하나는 베드로에게 귀를 베어 버리운 사람의 일가라. 가로되 네가 그 사람들과 함께 동산에 있던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 이에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 곧 닭이 울더라”했습니다.
마26:56/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지는 십자가는 주님이 지신 십자가에 비하면 쉽고 가벼운 것 아닙니까?
그런데 왜 행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이는 여전히 내가 이 세상의 것을 좇고 있다는 증거요, 아직 구속받은 그것에 머물고 있는 이스라엘로 만족하는 오해 때문입니다. 돌이켜야 합니다. 그래야 삽니다. 천하를 다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으로 바꾸겠느냐 하심이 이 말씀입니다.
법정에 서신 주님 말씀하셨습니다.
마26:64/ “대제사장이 가로되 내가 너로 살아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이는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너희가 죽일 것이나 부활하여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을 것이다!
그리고 심판의 주로 다시 올 것이다! 하신 말씀입니다.
여러분! 곧 주님 다시 오십니다!
그날을 소망 중에 바라볼 수 있도록 주신 잔을 기꺼이 받아 마시는 저와 여러분 되어서 그 영광을 주와 함께 누리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
주님은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그 참혹한 심판의 쓴 잔을 대신 받으셨고 우리에게 다시 한 번의 영생의 잔을 돌려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로 그 삶을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신 새 계명입니다.
요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하시고
요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과 믿음이 이 십자가의 사랑으로 녹아져서, 감격과 기쁨으로 이 잔을 기꺼이 마셔야 그 영광을 보게 됩니다. 구속함의 은혜를 오해하여 그날의 영광나라를 보게 되는 완성구원으로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의 교훈을 따갑게 긴장함으로 받으시고 그날을 준비하는 곧 주님 주신 잔을 기꺼이 받아 마심으로 그 영광나라를 소유하는 우리 모두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고후13:4~5/ “그리스도께서 약하시므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이신 분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확증하시기 위하여 친히 사람, 곧 죄인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그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죽으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그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자기 사랑의 확증의 뜻을 성취하신 그 십자가의 사랑을 기꺼이 행하심으로 약속대로 다시 일으키심, 부활의 영광을 얻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우리도 빚진 자로서 기꺼이 그 자리에 나아가 사랑함으로 섬기는 자가 되었으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 (그 사랑의 삶을 인하여 주님처럼 다시 사는 부활의 영광을 보리라) (그러므로)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알지 못하느냐 (주께서 그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래서 사랑의 삶을 좇지 않고 행치 않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했습니다. (너희의 그 종교적인 모든 열심히 헛것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