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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은 군사 반란 계획에서 핵심 역할을 맡고 있었다. 해군 소속 선박들은 아프리카 주둔 육군을 이베리아 반도 본토로 이송하는데 필수불가결한 수단이었다. 병력 수송은 해군이 카나리아 제도 인근에서 함대 기동 훈련을 수행할 때 이미 프랑코 장군과 해군 고위 장교들이 합의한 일이었다.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곧바로 전함들이 전속력으로 스페인령 모로코로 달려오기로 한 것이다.
7월 18일 케이포 데 야노 장군은 세비야 라디오 방송을 통해 여러 차례 장황한 연설을 내보냈다. 첫 번째 연설에서 그는 이 작전에 대한 확신을 다음과 같이 드러냈는데, 한편으로 그것은 자신들의 계획을 누설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우둔한 행동이었다.
조국의 심장 박동소리에 언제나 충실했던 해군이 한꺼번에 우리 진영에 합류했습니다. 그들의 도움에 힘입어 모로코로부터 반도로 병력을 신속하게 실어 나를 것이고, 우리는 곧 카디스, 말라가, 알헤시라스에서 우리 아프리카 군대의 보무도 당당한 행렬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군대는 쉬지 않고 곧장 그라나다, 코르도바, 하엔, 에스트레마두라, 톨레도, 마드리드로 진격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파죽지세 같은 점령 계획은 성급한 판단으로 드러났다. 해군 장교들은 압도적 다수가 반란을 지지했다. 대부분의 라틴 국가처럼 스페인에서도 해군 장교들이 육군 장교들보다 더 귀족적이었다. 육군에는 소수이긴 하지만 자유주의 성향인 집단이 있었고, 19세기에는 사회적 신분 상승을 꾀하는 중간계급에 사다리 역할을 하기도 했다. 반면에 해군에서 중령 이하 대위 이상 장교들인 상급 사관들은 왕당파 성향이 강했으며, 하급 수병을 대하는 장교들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7월 18일 아침 마드리드의 해군부는 카르타헤나에 있는 세 척의 구축함에 멜리아로 이동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구축함들은 라디오를 통해 반란자들이 점령한 멜리야를 폭격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구축함 장교들은 이 지시를 통해 반란이 시작된 것을 알게 되었다. 두 척의 구축함에서 함장들은 병사들을 모두 갑판에 집합시킨 다음 반란의 목적을 설명했다. 여기에서 장교들이 병사들의 환호성을 기대했다면 그들은 곧 실망을 맛보아야 했다.
해군 병사들은 육군 병사들보다 훨씬 더 잘 조직되어 있었다. 그들은 7월 13일 엘페롤에서 비밀 회합을 열고 만일 장교들이 정부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다면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이미 태도를 정리해 두었다. 마드리드에서 벤하민 발보아(Benjamin Balboa)라는 전신 기사가 프랑코 장군이 보내는 메시지를 엿들었다. 그는 그것을 즉시 해군부에 전달했고, 공모자로 라디오부 책임자였던 카스토르 이바네스(Castor Ibanez) 소령을 체포했다. 발보아는 해군부의 명령을 받고 즉각 승선 중인 모든 무전병들과 연락하여 사태의 추이를 잘 지켜보고 ‘파시스트 깡패 집단인 장교들의 행동’을 잘 감시하라고 지시했다. 발보아가 신속히 대처한 덕분에 승선 중인 수병들 다수는 사태를 잘 파악하고 있었고, 장교들의 거짓말에 속지 않았다. 이때까지도 해군부 장관직을 유지하고 있던 히랄은 정부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 모든 장교들을 파면한다는 지시를 내려보냈다.
벤하민 발보아
호세 히랄
멜리야로 출항한 세 척의 구축함 가운데 추루카호만 장교들이 지휘권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그 배의 라디오가 고장나서 연락이 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알미란테 발데스(Almirante Valdes)호와 산체스 바르카이스테기(Sanchez Barcaiztegui)호에서는 통신병들로부터 지시를 받은 수병들이 재빨리 장교들을 무력화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선상(船上)위원회를 구성하고, 멜리야와 세우타를 폭격한 다음 정부군 수중에 있는 카르타헤나 해군기지로 귀환했다. 반란 세력은 단지 한 척의 구축함과 한 척의 포함만으로 화급을 다투는 아프리카 주둔군의 스페인 본토 이송을 시작해야 했다.
알미란테 발데스 호
산체스 바르카이스테기 호
7월 19일 아침, 정부는 아프리카 주둔군의 지브롤터 해협 횡단을 막기 위해 모든 전함에 명령을 내려 서둘러 해협으로 집결하도록 했다. 장교들은 반란에 가담하기를 원했지만 그 소식이 하급 수병들에게 전달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순양함 미겔 데 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호에서는 장교들이 끝까지 저항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선박에서는 수병들이 선박 내 무기고를 장악하자 장교들은 항복했다. 유일하게 해전에 적합한 전함 하이메 1세(Jaime Ⅰ)호와 순양함 리베르타드(Libertad)호는 얼마 안 가 수병들이 탈취했다. 구축함 추루카호도 모로코인 레굴라르 반개 대대 병력을 카디스에 상륙시키고 나서 곧바로 정부군에 넘어갔다. 국민 진영은 후에 수병들이 ‘폭동을 일으켜’ 장교들을 살해했다고 주장하면서 그 책임자로서 히랄을 고발했다.
공화파 수병들에게 장악된 미겔 데 세르반테스호
하이메 1세호
순양함 리베르타드호
해군부가 반란에 동조한 장교들의 지휘권을 박탈한다는 지시를 내려보낸 뒤 다음과 같은 유명한 전문이 오갔다. “하이메 1세호 승무원들이 해군 사령부에게. 우리는 승선한 지휘관과 장교들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혔으나 무력으로 그들을 제압했다. 이들의 신병을 어떻게 할 것인지 속히 지시를 내려주기 바람.” “해군 사령부가 하이메 1세호 승무원들에게. 그들의 신병은 예를 갖추어 바닷물 속에 처넣기 바람. 그대들의 지금 위치는 어디인가?”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공화파 수병
영국 해군 장교들은 지브롤터에서 사태를 주의 깊게 지켜보았다. 하급 수병들이 한 행동은 생각만 해도 모골이 송연했다. 비록 단순한 파업에 불과했지만 1931년의 인버고든 폭동(1931년 영국 해군 수병들이 임금 삭감에 항의하여 일으킨 파업. 이 때문에 영국 대서양 함대의 발이 묶였다)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했고, 그보다 훨씬 심각했던 프랑스 함대의 흑해 반란이 일어난 지 17년밖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1919년 프랑스는 러시아 내전 기간 동안 백군을 지원하기 위해 흑해에 함대를 파견했는데, 전함 프랑스호와 장 바르(Jean Bart)호의 수병들은 오히려 볼셰비키들을 지지하며 폭동을 일으켰다. 당시 프랑스 코민테른의 대표로서 스페인에 체류하고 있던 앙드레 마르티는 그 사건에서 지도적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거의 신화적인 명성을 얻었었다. 영국 해군 장교들이 마음속으로 어느 쪽을 지지했는지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고, 그 점은 여러 지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 스페인 주재 독일 대리 대사 푈커스(Voelckers)는 그해 10월 빌헬름 슈트라세에 다음과 같은 소식을 전했다. “영국의 경우, 우리는 영국이 지브롤터를 통해 백군(반란군)에게 군수물자를 제공하고 있다는 흥미로운 사실을 알았으며, 이곳 영국군 순양함 지휘관은 최근 러시아의 무기가 좌파 정부에 인도되었다는 정보를 우리에게 전해주었습니다. 확신컨대 그가 상부의 지시 없이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1919년 장 바르호의 반란을 진압한 후의 모습
대부분의 전함들에서 반란 세력이 제압되자 반란 가담자 다수는 아프리카 군대가 본토로 건너올 수 없으므로 자신들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갔다고 생각했다. 몰라 장군도 계획이 실패했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달리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하던 일을 멈추지 않았을 뿐이다. 독일 대리 대사도 빌헬름 슈트라세에 함대의 전열 이탈로 프랑코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갈 것 같다고 보고했다. 그것은 주요 도시에서 수비대들의 희생을 의미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 위기가 국민 진영의 재난으로 끝나지는 않았는데, 그것은 그들이 역사상 처음으로 대규모 병력을 공중 수송하는 데 성공한 덕분이었다. 소규모 병력 공수는 1932년 영국 병사들을 키프로스에서 이라크로 공수한 것을 비롯하여 그 전에도 있었다. 그러나 프랑코의 아프리카 군대를 비행기로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이송한 것을 일반적으로 최초의 대규모 병력 공수로 본다. 병력의 공수는 얼마 되지 않은 스페인 공군의 브레게트(Breguets)기, 니에우포르트(Nieuports)기, 이탈리아의 사보이아기들이 반란 시작과 함께 즉각적으로 시작했지만 히틀러가 보낸 융커스 52기들이 도착하고 나서부터 본격화했다. 히틀러는 후에 프랑코가 승리하는 데 비행기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에 프랑코에게 그 비행기들을 위해 기념물을 세워야 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국민 진영은 그밖에도 새로 구성된 공화 진영 선상위원회들 간의 협력 부재와 그에 따른 공화국 해군의 심각한 효율성 약화의 덕을 보았다. 공화국 해군은 또한 독일의 소형 전함 도이칠란트호와 아드미랄 셰어(Admiral Scheer)호의 방해로 아프리카 육군을 수송하는 선박을 효과적으로 공격하지 못했다. 이렇게 해서 반란군은 2,500명의 병력(외인군단병과 모로코인 레굴라르)과 중화기 등 많은 군수물자, 즉 ‘승리의 호위대’를 해협을 건너 본토로 들여올 수 있었다.
1936년 7월, 국민 진영의 중요한 전력이었던 아프리카 군대는 독일과 이탈리아가 보내준 수송기 덕분에 본토에 빨리 도착할 수 있었다. 사진은 모로코에서 안달루시아의 세비야로 공수 작전을 펼친 독일 융커52기와 모로코 레굴라르들의 모습.
브레게트 Br 470기
니에우포르트 Ni-D 62
포켓 전함 도이칠란트. 1937년 5월 29일, 네 번째 스페인 파견 작전에서 2기의 공화당 정부군 폭격기의 공격을 받은 도이칠란트는 대파되며 승조원 31명이 전사하고 101명이 부상당하는 피해를 입었으며, 2차대전 중 영국 공군의 폭격으로 침몰된다.
포켓 전함 어드미랄 셰어. 역시 2차 대전 중 영국 공군의 폭격으로 침몰한다.
해군에서 가장 치열한 사움은 바다가 아니라 스페인 북서쪽 끝 엘페롤 항에서 벌어졌다. 7월 19일 전국노동연합과 노동자총동맹은 주지사에게 달려가 무기를 나누어주라는 정부의 명령에 따를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해군 병기고 책임자는 무기 인도를 거부했고, 쿠데타 동조자들은 전시 상태를 선언했다. 제29해병대와 해안 포병대 제3연대 파견 부대가 반란자들을 위해 도시 내 장애물을 제거해주었다. 그러만 많은 노동자들이 선원들과 합세하여 병기고 장악에 나섰다.
공화 정부를 지지하는 선원들은 또한 드라이 도크에 정박 중인 순양함 알미란테 세르베라(Almirante Cervera)호와 이동이 불가능한 전함 에스파냐호에 승선했다. 두 선박은 반란에 가담하려는 장교들이 확보한 구축함 벨라스코호를 어렵게 격퇴했으나 도크 시설물 때문에 중포를 해안 포대 쪽으로 돌릴 수가 없었다. 그런 제한된 지역에서 대규모 해전을 벌인 결과로 엄청난 파괴가 초래되었다. 결국 7월 21일에 국민 진영 장교들은 해군부의 전보를 조작하여, 선박들에게 항복해서 무의미한 인명 피해를 막으라는 명령을 내려보냈다. 이 명령에 따라 공화 정부를 지지하는 알미란테 세르베라호의 함장 산체스 페라구트(Sanchez Ferragut)와 해군 소장 아사롤라(Azarola)는 목숨을 보전해준다는 조건으로 항복했다. 그러나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순양함 알미란테 세르베라
해군 소장 안토니오 아사롤라
갈리시아와 다른 지역에서도 얼마 동안 지체된 다음 7월 20일에 군사 반란이 시작되었다. 라코루냐에서는 카사레스 키로가의 친구였던 민간인 지사 프란시스코 페레스 카르바요(Francisco Perez Carballo)가 노동자총동맹과 전국노동연합에게 무기 인도를 거부했다. 지사는 노동자총동맹과 전국노동연합 조합원들에게 그 지역 군사령관이 휘하 장교들로부터 반란에 가담하지 않겠다는 엄중한 약속을 받았다고 보장해주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피타 로메로(Pita Romero) 장군이 체포되어 총살당한 뒤였다. 사단장 엔리케 살세도(Enrique Salcedo) 장군도, 페레스 카르바요도 얼마 뒤에 총살되었다. 당시 임신중이었던 엔리케 살세도 장군의 부인 후아나 카프데비에예의 운명은 비참했다. 그녀는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남편이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유산을 했으며, 나중에 출옥했으나 8월에 팔랑헤당원들에게 겁탈을 당한 뒤 살해되었다.
프란시스코 페레스 카르바요
엔리케 살세도 장군(중앙)과 페레스 카르바요(오른쪽 끝), 후아나 카프데비에예
일단의 노동자들이 얼마 안 되는 무기를 들고 군대와 마누엘 에디야(Manuel Hedilla)가 이끄는 다수의 팔랑헤당 분견대에 맞서 저항했다. 그들은 소총으로 무장하고 노야에서 달려온 다이너마이트병들과 광부들로 구성된 지원군이 도착하기 직전에 최후의 거점이었던 존 무어 경(Sir John Moore)의 무덤 근처에서 결국 몰살당했다. 지원군은 자신들이 너무 늦게 왔다는 것을 깨달았고, 강력한 적의 반격을 받고는 언덕 쪽으로 물러났다. 그중 일부는 흩어져 게릴라 부대가 되었으며, 나머지 일부는 동쪽 빌바오 쪽으로 진출했다.
마누엘 에디야
웰링턴 이전에 반도 원정 영국군의 사령관이었던 존 무어 경. 그는 코루나에서 전사하여 그곳에 묻혔다.
역시 국민 진영의 수중에 들어간 비고(Vigo)에서는 병사들에게 술이 넉넉하게 제공되었으며, 병사들은 술에 취한 상태로 시내 중심가로 행진해 들어갔다. ‘태양의 문’에서 지휘 장교가 전시 상태를 선언했고, 저항하는 비무장 민간인들에게 발포 명령이 떨어졌으며, 병사들은 사방으로 총을 쏘기 시작했다.
7월 20일 아침 일찍이 몬타냐 병영 주변에서 빈약한 무장을 갖추고 머물던 마드리드 시민들에게 많은 다른 시민들이 합류했는데 더러 여성들도 있었다. 75mm 슈나이더 포 두 문이 그곳으로 견인되어 왔다. 오라드 데 라 토레라는 퇴역 포병 중대장이 그 대포들을 병영에서 500미터 떨어진 바일렌 가(Calle Bailen)에 설치했다. 조금 뒤에는 155mm 대포 한 문이 비달(Vidal) 중위의 지휘로 목표물에서 200미터쯤 떨어진 곳에 설치되었다.
권총 사격 훈련을 받는 공화파 자원 여성
수천 명의 사람들이 노르테(Norte) 역에서부터 로살레스 거리를 따라 병영을 포위했다. 그들은 누구의 명령도 없이 전진하고 후퇴도 하는 군중이었다. 당시 그들과 행동을 같이 했던 한 변호사는 당시 장면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병영이 있는 쪽에서 라이플 소총을 쏘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에스파냐 광장 한 구석과 페라스 가에서 한 무리의 돌격대 대원이 벽 뒤로 몸을 숨긴 채 총에 실탄을 장전하고 있었다. 그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정원 안 나무들과 의자들 사이에서 웅크리거나 엎드려 있었다.
몇 대의 공화 정부 비행기들이 인근 콰트로비엔토스(Cuatro Vientos) 비행장에서 이륙하여 그곳에 도착했다. 그 비행장은 그 전날 반란 세력에게 제압된 상태였다. 비행기들은 처음에 병영 내 병사들에게 항복을 권유하는 전단지를 뿌렸다. 이어 비행기들이 병영에 폭탄을 떨어뜨리자 수천 명의 민간인들이 함성을 지르며 환호하였다. 그러나 병영에서 다시 기관총을 발사하여 민간인 몇 명이 쓰러졌다. 영국의 젊은 시인 잭 린제이(Jack Lindsay)는 그날의 일을 회상하며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이상하게 생긴 대포 한 문을 발견했다.
우리는 그것을 맥주 공장 트럭에 실어 가져왔다.
몇 정의 구식 권총과 맨주먹으로 무장한 채
빗발치는 기관총 총알들을 뚫고
몬타냐 병영으로 질주했다.
나는 거기에 있었다.
나는 보았다. 장교들이 잔뜩 움츠려 있는 것을
그들의 안색이 공포로 하얗게 질려 있는 것을.
잭 린제이
때론 감정이 상식보다 강하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무기를 소지할 수 있는 특권을 지닌 사람들이 두꺼운 돌벽을 향해 구식 연발 권총을 발사했다. 마라뇬 병영 공격은 혼란이 얼마나 소름끼치는 행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병영 내 많은 병사들이 항복하겠다는 표시로 창문에서 흰색 깃발을 흔들었다. 이에 군중들이 환호하며 병영 쪽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병영 내에서 기관총을 장악하고 있던 장교들이 다시 포문을 열어 광장에 모인 많은 사람들을 쓰러뜨렸다. 이런 일이 몇 차례 반복되었으므로 병영을 탈취했을 때 군중들의 분노는 극에 달해 있었다. 병영은 공화정을 지지하는 공병 하사관이 죽음을 무릎쓰고 병영의 대문을 열어젖힌 덕분에 탈취할 수 있었다. 그 하사관은 곧바로 한 장교에게 피살되었다. 뒤이은 학살은 처참했다.
그라나다에서는 미겔 캄핀스(Miguel Campins) 장군이 공화 정부 편이어서 지사에게 부하 장교들을 믿어도 된다고 장담했다. 그러나 무뇨즈(Munoz) 대령과 레온 마에스트레(Leon Maestre) 대령이 반란군에 가담했다. 캄핀스 장군은 7월 20일 체포되었고, 후에 케이포 데 야노 장군의 명에 따라 ‘스페인 해방 운동’에 반대했다는 죄목으로 총살당했다. 수비대와 돌격대가 반란에 가담하지 않을 것이라 믿었던 노동자들은 뒤늦게야 그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되었다. 해질 무렵에는 반란 군인들이 도시 중심부를 장악하였다. 정부군은 알바이신 지역으로 철수해서 바리케이드를 치고 사흘 동안 그곳을 사수했다. 그러나 반란 군인들이 대포로 집중 공격하자 수십 가구의 가족들이 집 파편 더미 속에 파묻혔다.
무뇨즈 대령. 사진은 2차대전 때 청색사단을 지휘하여 독일군에 가담하였을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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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보고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