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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가해 6월16일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청주] 간 빼고 쓸개 빼고 살아야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빈영억 라파엘 신부
† 제1독서 1열왕 21,1ㄴ-16
† 복음 마태 5,38-42
★ 아합 임금은 나봇의 포도밭을 빼앗으려고 하지만 나봇은 이를 거절한다.
식음을 전폐한 임금의 모습을 본 왕비 이제벨은 음모를 꾸민다. 나봇은
왕비가 사주한 거짓 증인으로 말미암아 억울하게 돌에 맞아 죽고, 결국
포도밭을 빼앗기고 만다(제1독서).
★ 폭력을 포기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예수님께서는 폭력을 폭력으로
갚는 대신에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고, 재판을 걸어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마저 내주라고 이르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제1독서와 복음을 차례로 듣고 난 뒤 우리는 깊은 고민을 할 수도
있습니다.
‘나봇의 포도밭에 대한 아합 임금의 탈취’는 구약에서 불의와 폭력을
가리키는 대표적인 사건입니다. 성경은 권력자의 탐욕과, 자신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힘과 자격이 있다는 오만함의 불의를 숨김없이 보여
줍니다. 그러한 불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합법’의 겉모습으로
치장하려고 합니다. 불의한 자의 탐욕은 억울한 이들에 대한 폭력으로
이어집니다. 나봇의 피가 상징하는 것은 불의로 말미암아 희생된 역사 속의
모든 이의 고통과 탄원입니다.
불의가 있는 사회에는 진정한 평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비록 겉으로 평온한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이미 그 사회는 안에서부터 곪습니다. 많이 가진
자와 힘 있는 자들의 폭력을 통해 평화가 깨어지는 비극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계속됩니다. 합법과 발전이라는 허울 속에 얼마나 집요하게 그들의
욕망이 관철되고 있는지 우리는 답답한 마음으로 목격합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현대의 불의와 폭력은 ‘경제적 살인’의 모습으로 자주
나타난다고 경고하십니다. 이러한 불의와 폭력의 현실 속에서 우리는
주님의 도움을 간절히 기다립니다. 내일 제1독서에서 엘리야 예언자가
전언해 주듯, 가난한 이들의 피를 흘리게 한 자들이 똑같이 피를 흘리고
응징되어야 정의가 이루어질까요?
이렇게 생각하는 우리에게 오늘 복음의 예수님 말씀은 당혹스럽기까지
합니다. 과연 이러한 비폭력과 용서가 불의한 자들의 마음을 돌리게 할 수
있을지, 그리고 그것으로 억울한 이들의 마음이 풀릴 수 있을지 의문시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방법은 결코 현실의 변화를 포기한 무력함도,
불의를 저지른 자들의 행위에 대한 추인도 아닙니다. 폭력의 악순환을 끊고
평화를 가져다주는 유일한 길이 바로 폭력 대신에 용서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정의를 위해 애쓰지 않는 사람이
‘덮어 두고 조용히 하자.’라고 한다면 우리는 당연히 의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 정의의 길을 추구하는 이라면 평화의 길을 향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참행복 선언(마태 5,3-12 참조)에서 정의를 위하여 애쓰는 이와
평화를 위해 일하는 이를 주님께서 축복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서 우리 각자에게도 정의와 용서, 평화의
길을 선택해야 하는 소명이 있음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간 빼고 쓸개 빼고 살아야|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가해 6월16일 연중 제11주간 월요일(마태5,38-42)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 마태 5,38-42
간 빼고 쓸개 빼고 살아야
예수님께서는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발 더 나아가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대고.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고 하십니다. 천 걸음을 걷기도 힘들거늘 이천 걸음을
걸어야 하고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말라.’고 하시니
‘간 빼고 쓸개 빼고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자기를 버리고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라는 권고이신데 그것은 예수님과 하나가 되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그분이 내 안에 사셔야 가능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
(갈라2,20).을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러저러한 의견을 접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이익이 되면 좋아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반박할 생각을 하며 심지어는
골탕을 먹일 때도 있습니다. 남에게는 ‘넉넉한 마음으로 품고 살아야 한다.’
고 말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마음은 ‘바늘 하나 들어갈 틈 없이 냉정’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네가 그런 식으로 하면 내가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협박하기도 합니다. 정말 불이익을 당하며 살 수는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보복하지 말고 남을 위해 헌신하라고 하십니다.
악을 선으로 갚으라고 하십니다. 악의 고리를 끊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 친히 갖은 조롱과 모욕을 안고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셨으니 오늘도 여전히 그 방법이 유효합니다. 자신이 입은 상처는
상처로 되갚을 때 극복되는 것이 아니라 인내로운 사랑으로 흡수될 때 그
악은 힘을 잃게 됩니다. 우리는 악이 스스로 설 자리를 잃을 때까지
사랑으로 채워야 합니다. 버릇없는 행동에는 보복이 아니라 모범으로
맞서야 합니다.
혹시라도 누군가와 맞서려거든 사랑으로 맞서십시오. 주님의 사랑으로
대결하십시오. 사랑은 악을 이겨내는 능력입니다. 불의를 크게 앙갚음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겁이 나서, 마음이 약해서 피한다면, 심지어는 상대방과
같은 부류의 인간이 되기 싫어서 맞서지 않는 것은 악을 이기는 방법이
아닙니다. 우리는 한 차원 높아져야 합니다. 적극적인 사랑의 행동을 통해서
악을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이들을 위해 아버지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도 그
마음을 간직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악에 굴복 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12,21).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사람은 사랑의 대상
2014년 가해 6월16일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 마태 5,38-42
먼저 공지사항 한 가지 말씀드립니다. 제가 오늘부터 자리를 비웁니다.
오늘부터 19일까지 인천교구 사제연수를 참석하고, 19일부터 21일까지는
인천교구 대신학생 연수에 참석해야 합니다. 따라서 새벽 묵상 글은
21일까지 쉬고, 22일인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부터 다시 뵐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쩔 수 없는 시간인 것 이해해 주시리라 믿으면서, 한 주일
동안 모두들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그럼 오늘의 묵상입니다.
어떤 책에서 이런 구절을 보았습니다.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다.’
조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사랑의 대상이라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당연하죠?), 왜 믿음의 대상은 되지 않을까요? 요즘 부모 형제도 믿을 수
없는 세상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믿지 말라는 것일까요? 그런데 이 책에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렇다고 불신을 갖고 살자는 얘기는 아니고, 사람을 멀리하자는 말도
아니다. 사람을 대할 때 지나치게 믿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자는 뜻이다.
그에게 배신당했다고 너무 서러워하거나 분노하지도 말자는 것이다. 인간
자체가 믿음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믿음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충분히 배신할 수 있음을 인정하라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거리를 두라는 것이 아니죠. 왜냐하면 사람은 사랑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오늘 복음말씀이 쉽게 이해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악인에게 맞서지 말라고 하시지요. 사실 악과 맞서 싸워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내게 악한 일을 하면 나 역시 똑같이 악한 일로
맞서려고 하는 것이 당연히 해야 할 몫인 것처럼 보입니다. 문제는 이 악을
똑같이 악으로 맞설 때, 하느님께서 설 자리가 없어진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사람을 믿음의 대상으로써 생각하다가 배반당했다고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으로 생각하면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대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너무하다 싶을 정도의 말씀을
하시지요. 즉, 오른뺨을 치면 다른 뺨마저 돌려 대고, 속옷을 가져가려는
사람에게 겉옷까지 내주고, 천 걸음을 가자는 사람에게 이천 걸음을
가주라고 하십니다.
물론 악을 멀리하고 싸우는 것은 당연히 우리들이 해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의 관점을 가지고서 악을 악으로 맞서 싸우면 안 됩니다. 그 모범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서 보여주셨지요. 결국 억울하다고
할 수 있는 고통을 참아 냄으로써 악과 싸우는 것이며, 이를 통해 악을
진정으로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금 ‘사람은 사랑의 대상’임을 기억하면서, 사람 안에 깃들여 있는 악을
주님의 뜨거운 사랑으로 맞서 싸울 수 있는 진정으로 용기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공포가 노크할 때 믿음으로 문을 열면 문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마틴 루서 킹).
어느 쪽이든(‘좋은생각’ 중에서)
비행기가 1만 미터 상공에서 고장을 일으켰다. 다급해진 승무원들은
승객에게 위급 상황을 알리고 재빨리 구호 장비를 착용하라고 당부했다.
기내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승객들은 몹시 당황하며 무서워했다.
그런데 한 할머니만 큰 동요 없이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할머니
얼굴에서는 공포나 두려움을 느낄 수 없었다.
다행히 비행기는 안전하게 착륙했다. 식은땀을 닦던 한 승객이 할머니에게
다가가 물었다.
“위급한 상황에서 어쩜 그렇게 차분할 수 있었나요?”
그러자 할머니가 대답했다.
“내겐 두 딸이 있어요. 큰딸은 몇 년 전 세상을 떠났고, 둘째 딸은 이곳
텍사스에 살지요. 저는 지금 둘째 딸을 만나러 온 거랍니다. 비행기가 고장
났다는 방송을 듣고 이렇게 생각했지요. 안전하게 도착한다면 예정대로
둘째 딸을 만나러 가고, 만약 큰 사고가 나면 하늘나라에 간 큰딸을 만나러
가는 거라고요. 그렇게 마음먹으니 무섭지도, 두렵지도 않더군요. 어차피
어느 쪽이든 사랑하는 내 딸을 만나는 거니까요.”
내 마음만 바로 잡으면 어떤 상황도 두려움 없이 감사함을 간직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항상 좋은 것을 주시는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잃지 마세요.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지킬 수 있으면 지켜봐라!
2014년 가해 6월16일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
복음 : 마태오 5,38-42
< 지킬 수 있으면 지켜봐라! >
성녀 소화 데레사는 많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를 알리는 선교를 하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리스도만을 위해 봉쇄 수도원에서 자신을
봉헌하는 것도 소원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를 어떻게 동시에 이룰 수
있었을까요?
우선 그녀는 14살의 어린 나이에 교회의 특별한 허락으로 갈멜회에
입회하게 됩니다. 그리고 선교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들을 합니다. 즉
기침을 자주 해서 남들이 옆에 앉지 않으려는 수녀님 옆에 앉는 것, 앉을 때
등을 의자에 기대지 않는 것, 빨래할 때 다른 수녀님 때문에 물이 튈 때
피하지 않고 맞는 것 등이었습니다. 이런 작은 희생들 외에, 선교를 위해
다른 일은 하지 못했고 할 수도 없었습니다.
교회는 10년의 짧은 삶을 봉쇄수도원에서 산 소화 데레사에게 ‘선교의
주보성인’이란 칭호를 내렸습니다. 직접 발로 뛰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님이 선교의 주보성인이셨지만, 이젠 소화 데레사도 대등한 선교의
주보성인이 되신 것입니다.
게다가 소화 데레사를 ‘교회학자’로 임명합니다. 여자 성인들 중에 교회
학자로 임명된 분들은 시에나의 카타리나, 아빌라의 데레사, 에디트 슈타인
정도가 전부입니다. 이분들처럼 신학서적이나 사적계시 같은 책을 쓴 것도
아닌데 어떻게 교회학자라는 칭호까지 부여받게 되었을까요?
바로 소화 데레사의 ‘지혜’ 때문입니다. 참 지혜란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서 모든 것을 주님께 의탁하면 그분께서 대신 다 해주신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하려고
하다가 그분의 도움을 약화시키게 됩니다.
소화 데레사가 가장 보잘 것 없고 힘없는 자신의 처지를 비유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신은 아기와 같아서 계단 하나도 오를 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공로를 드리기 위해서 많은 이들이 최선을 다해 계단을 오릅니다.
그러나 자신은 한 계단도 오르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구릅니다. 하느님께서
소화 데레사가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아시고는 그를 집어
가장 높은 곳에 가장 먼저 올려주신다는 것입니다. 다른 이들이 자신들의
힘으로는 절대 오를 수 없는 그런 곳으로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참 지혜인
것입니다.
며칠 전에 어떤 신자분으로부터 “그 사람이 평판도 안 좋고 돈도 갚지 않을
것 같은데도 꾸어달라면 다 꾸어주어야 하는 건가요?”란 질문을 받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무엇이라 말합니까?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그러니 달라는 사람에게는 무엇이든 주고 꾸어 달라고 하는 사람에게는 다
꾸어주어야 예수님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께
불순종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분과의 관계가 단절되게 됩니다.
또, 오른 뺨을 맞거든 기꺼이 왼 뺨도 대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누가
우리에게 속옷을 빼앗아가기 위해 재판을 걸어오면 그냥 겉옷까지 몽땅
주라고 하십니다. 원수도 사랑해야 하고, 불경한 눈으로 사람을 보아서도
안 되며, 화를 내서도 안 됩니다. 그것이 간음하는 것이고 살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 그러면 이 말씀을 모두 지켜 구원받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의도를 잘 파악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이런 계명을 지키려 한다면 결국 잘 지키지 못해서 구원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율법을 통해서는 구원받을 수 없음을 계속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복음말씀이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고, 진주를 돼지에게
주지마라.”라고 하신 말씀에 이어지고 있음을 알아야합니다. 즉, 율법을 잘
지켜 구약을 성취하여 구원받으려는 이들이 개와 돼지입니다. 그 개와
돼지에게는 거룩한 것, 진주, 즉 그리스도가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
힘으로 율법을 지키고 보속을 해서 죄가 용서받고 구원받는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과 피는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고해성사 때 보속을 하지 않아도
죄는 바로 용서받습니다. 왜냐하면 죄를 용서받는 것은 우리 행위나 노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보속을 하는 이유는 마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조금
나누어 졌던 키레네 사람 시몬처럼 자신이 그 십자가를 절대 질 수 없음을
깨달으라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율법의 역할은 ‘우리가 율법을 지킬 수 없음을 알게 하는 것’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율법을 말씀하시면서 지킬 수 있으면 지켜보라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가 이 율법을 지킬 수 있다고 모든 것을 다 지키려고
한다면 예수님의 뜻과는 반대로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다 지키는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이 아닌 세리와 창녀들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이들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자비에만
의지해야 하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하시는 것들도 바로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인 것입니다. 바오로는 율법이 존재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어떠한 인간도 율법에 따른 행위로 하느님 앞에서 의롭게 되지 못합니다.
율법을 통해서는 죄를 알게 될 따름입니다.”(로마 3,20)
즉, 우리는 예수님께서 계속 말씀하시는 이 어려운 계명들을 지킬 수 없는
인간임을 겸손하게 고백해야 하는 것이지, 이 계명들을 열심히 지키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고 착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 계명들을
지킨다면 자신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지, 모든 것을 거저 주시는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참된 지혜는 바로 내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세리처럼 모든 것을 그분 자비에 맡기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행동을 잘
해서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한다면 하느님의 자비가 들어갈 자리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분께서 들어오시면 그분의 힘으로 우리는 이런
어려운 것들까지 저절로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마치 고정원씨처럼
자신의 가족을 죽인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스스로의
힘이 아니라 나 자신도 엄청난 죄인임을 고백할 때 하느님께서 내 안에서
이루어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 힘으로 지킬 수 있으면 한 번 지켜봐라.”라고 말씀하시고
계신데, “예, 해 보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 담당 전삼용 요셉신부 -
◈ [수도회] 존엄한 품위의 고결하고 거룩한 삶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 요셉 수도원)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6월16일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열왕기 상21,1ㄴ-16 마태5,38-42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 마태 5,38-42
존엄한 품위의 고결하고 거룩한 삶
사람으로 살기 참 힘든 세상입니다. 존엄한 품위의 고결한 인간으로는 더욱
그러합니다. 생각 없이, 영혼 없이 사는 이들도 참 많아 보입니다.
예전에 박시백 화백의 조선 실록 20권의 만화를 보면서 인간에 대해
실망했던 기억이 새롭게 떠오릅니다.
한마디로 무자비한 악순환의 살육의 역사라 할 만 합니다. 1권의 이야기가
20권으로 반복된 조선 왕조 500년 역사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권이면
족할 것을 20권 까지 읽을 필요가 있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죄한 이들이 너무 많이 피를 흘리고 죽어 간 살육의 인류 역사입니다.
요즘 한국 천주교회사를 읽으면서도 똑같은 느낌입니다.
19세기 얼마나 많은 무죄한 가톨릭 신자들이 잔인하게, 억울하게
순교당했는지요. 광주 민주화 운동, 세월호 사건 등 무죄한 이들의 죽음을
통해 살육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음을 봅니다.
오늘 1독서 열왕기 상권의 아합과 이제벨의 공모를 통해 나봇의 어이 없는
무죄한 죽음을 통해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꼭 다윗에 의해 감쪽같이 살해된 바세바의 남편 우리야의 운명과 흡사한
나봇입니다.
전자가 탐욕(재물)에 의한 결과라면 후자는 음욕(여자)에 의해 야기된
문제입니다. 사람이 욕망의 노예가 되면 얼마나 악해져 망가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나봇과 우리야의 죽음을 통해, 이들을 죽음으로 이끈 다윗과 아합, 이제벨을
통해 인간은 무엇이며, 인간의 운명은 무엇인지, 인간이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 지, 또 하느님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됩니다.
하느님 앞에 완전 범죄는 없습니다. 예언자의 등장에 이어 다윗과 아합과
이제벨이 후에 겪은 끔찍한 고통과 죽음을 보면 분명 깨닫게 됩니다.
이런 모두는 우리의 영역을 벗어나는 일입니다.
이런 경우를 통해 우리 자신의 처신을 생각하게 됩니다.
구체적으로 내 삶의 현장 지금 여기에서 어떻게 하면 존엄한 품위의
고결하고 거룩한 인간으로 살 수 있겠나 하는 문제입니다.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은 이상 사실 이보다 더 중요한 일도 없습니다.
바로 복음의 예수님께서 답을 주십니다.
당대의 제자들은 물론 오늘의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확신에 넘쳐 존엄한 품위의
고결하고 거룩한 영혼으로 살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져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마태5,39-42).
지는 것이 이기는 것입니다. 이런 이들이 정말 내적으로 강한 이들입니다.
인간의 심연을 깊이 통찰한 존엄한 품위의 고결한 영혼들입니다.
보복의 악순환을 끊어 버릴 수 있는 악에 대한 유일한 처방입니다.
그대로 하느님께 대한 깊은 신뢰와 사랑, 희망의 반영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신망애의 깊은 덕없이
이런 비폭력적 사랑의 자세는, 내적 힘은 애당초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비폭력적 사랑의 저항에 항구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주님과 사랑의 일치를 위한 끊임없는 기도와 말씀 공부입니다.
기도와 말씀 묵상을 통해 하느님의 은총으로 내 마음과 말과 행동을
끊임없이 정화하고 성화하는 것입니다.
특히 혼자 있을 때 하느님 앞에 자신을 살피는 신독(愼獨:홀로 있을 때에도
도리에 어긋남이 없도록 언행을 삼감)에 각별 유념하는 것입니다.
인성이 가장 적나라하게 들어나는 것은 혼자 있을 때입니다. 아합도, 다윗도
혼자 있을 때 이런 악한 탐욕의 유혹에 넘어가 속절없이 무너졌습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비폭력의 사랑에
항구함으로 존엄한 품위의 고결하고 거룩한 영혼으로 살 수 있게 하십니다.
"주님 말씀은 제 발에 등불, 저의 길을 밝히는 빛이옵니다."
(시편119.105참조).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 -
◈ [기타]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서울]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2014년 가해 6월16일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 마태 5,38-42
신앙의 법
‘왔다 장보리’라는 드라마를 보고 있습니다. ‘비슬채’라는 전통 한복집에는
며느리가 둘 있습니다. 둘째 며느리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가지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첫째 며느리는 그런 둘째 며느리의 잘못을
알면서도 이해하려 하고, 용서해 주려 합니다. 아직 드라마가 끝난 것은
아니지만 드라마는 둘째 며느리가 원하는 것을 얻는 것처럼 흘러갑니다.
첫째 며느리는 사고로 남편을 잃었고, 아이는 유산 되었고, 집에서 나와서
외롭게 살아갑니다. 드라마의 끝은 어떻게 될지 생각해 봅니다. 둘째
며느리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자신이 부당한 방법으로 얻은 것들을
돌려 줄 수 있을지, 첫째 며느리가 모진 고생을 했지만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고 그에 합당한 자리를 차지할지,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사람이
위로를 얻고, 행복한 삶을 살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잠시 현실의 세계로 돌아옵니다. ‘총리’로 지명된 분이 과거에 했던
발언들이 드러나면서 여론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정부와 여당은 전체의
맥락을 보지 않고 극히 일부의 발언으로 총리 후보자를 매도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야당과 일부 언론들은 총리 후보자의 국가관, 역사관이 왜곡되어
있다고 비판합니다. 단편적인 이야기이고, 교회에서 한 발언이라고 하지만
분명 그분의 말씀은 평범한 상식과는 다른 것 같습니다. ‘한국 전쟁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하고, 위안부 문제는 일본이 사과할 필요가 없다고 하고,
한국 민족은 게으르다고 하고, 일본의 식민 통치는 우리 민족에게는
필요했다.’고 합니다. 한 개인의 의견일 수는 있지만 한 나라의 총리 후보의
인식이라면 어떨까요?
신앙인들은 세상의 법과 하느님의 법 사이에서 살고 있습니다. 세상의 법은
물질, 명예, 권력을 추구합니다. 경쟁과 싸움에서 승리를 해야만 많은 것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법은 1등은 기억하지만 2등은 별로 기억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법은 멀리 떨어져있는 가난한 사람, 굶주린 사람, 아픈
사람들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나의 가족, 나의 직장, 나의
나라가 우선입니다. 세상의 법은 많은 능력과 자격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행복은 성적순, 능력순, 명예순, 권력순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의 법에는
낙오자가 생기고, 밀려나는 사람들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하느님의 법은 양보, 겸손, 희생, 사랑을 이야기 합니다. 행복은 물질, 명예,
권력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고 말을 합니다. 적자생존, 자연도태와
같은 방식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서로 나누기만
한다면 우리가 모두 풍요롭게 살 수 있다고 말을 합니다.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굶주린 사람은 그들의 죄가 아니라고 이야기 합니다. 우리의 몸은
여러 지체로 이루어져있듯이, 우리의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가듯이 사람들
모두는 하느님의 중심으로 한 몸을 이룬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난한 사람, 아픈 사람, 병든 사람을 내 몸처럼 돌보아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하느님의 법을, 신앙의 법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아직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세상의 법을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신앙인들도
있습니다. 세례를 받고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신앙인이라는 이름을 갖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느님의 법을 따라서 사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신앙의 법을 말씀해 주십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물론 힘든 길입니다.
그러나 가야할 길이기도 합니다.
- 서울 대 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지는 게 이기는 거
2014년 가해 6월16일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 마태 5,38-42
지는 게 이기는 거
손벽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는 옛 말을 생각해 봅니다.
맞서는 사람이 없으면 싸움이 되지 않는다는 뜻인데 좋은 말입니다.
그러나 요즘 그게 잘 안 통하는 때가 많죠. 바보나 왕따로 보니까요.
그래도 억울할 때가 많더라고요. 그래서 같이 큰 소리로 덤벼도 봤습니다.
화도 내 보고 따지기도 해보고 주먹도 쥐어가며 싸워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지는 게 이기는 거라는 옛말의 깊이와 진가가 있더군요.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마태오 5,39)”
-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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