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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앙인은 세상에 보여지는 하나님 나라의 샘플입니다.(삼상 6:10-16)
2026, 5/17 설교문
오늘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시는 말씀은 삼상 6:10-16절 말씀으로“신앙인은 세상에 보여지는 하나님 나라의 샘플입니다.”이런 제목으로 말씀 전할 때 주의 크신 은혜와 사랑이 이곳에 함께하길 원합니다.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정부가 가정의 소중함을 날로 정해 기념합니다. 가정은 나와 부모와 자녀 3대가 함께 이루는데 그 중에 핵심 코어는 부부입니다.
부부가 흔들리면 가정도 흔들리고 자녀도 흔들립니다. 부부가 건강하면 가정이 천국입니다. 그래서 두 부부의 화합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때문에 부부는 서로 존중하고 양보하고, 희생하고 섬김으로 가정을 세워가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온 집안이 행복해지는 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신앙인은 그런 가정을 만들기 위해 힘쓰고 애써야 합니다. 그런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는지요? 우리 인사 나누겠습니다. 사랑합니다. 반갑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2가지로 은혜를 주셨습니다.
첫째로, 신앙인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세상에 보여지는 샘플입니다.(12절)
둘째로, 신앙에는 진정한 자기 고백이 필요합니다.(15절)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신앙인으로 이 땅을 살아갈 때 불신자들을 의식하며 사는 사람이 있고, 의식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전자는 나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도 있고, 영광을 가리고 욕을 먹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매사에 조심하고, 차라리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양보하고 손해 보는 쪽을 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는 그런 것 의식하지 않고 그냥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생각과 마음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경우가 있는데, 여러분은 어디에 속하시는지요?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믿고 하나님을 섬길 때 진정한 신앙고백이 필요합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신앙고백을 바탕으로 신앙생활이 이뤄진다면 전자의 가능성이 높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무늬만 예수쟁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신앙은 진정한 자기 고백의 기초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그래서 진정한 신앙인이 되어 날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말씀을 따라가면서 우리가 왜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는 샘플이 되는지 성령께서 들려주시는 하나님 음성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신앙인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세상에 보여지는 샘플입니다.(12절)
본문 12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선까지 따라 가니라." 아멘.
블레셋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임한 재앙을 피하기 위해 젖을 먹이는 암소 2마리에 수레를 지우고, 그 수레에 하나님의 법궤와 블레셋의 5개 도시국가를 상징하는 금으로 만든 독종 5개와 금 쥐 5개를 실어 벧세메스로 돌려보냅니다.
그런데 두 암소가 어떻게 수레를 끌고 가는지 관찰하기 위해 국경까지 따라갔던 무리가 있었는데 바로 블레셋의 방백들입니다.
이들은 젖 먹는 새끼가 딸린 어미 소가 동물의 본능을 거슬려 수레를 끌고 목적지로 갈 수 없을거라 생각하고 일부러 새끼가 딸린 어미 소에게 수레를 끌게 합니다. 그래서 곧장 가면 자신들에게 임한 징계가 하나님께로부터 왔고, 못 가면 우연이라고 생각하려 했는데, 어미 소들이 날 뛰거나 울지도 않고,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도 않고 그대로 곧장 목적지인 벧세메스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이들은 지금까지 이스라엘의 신이 자신들의 신인‘다곤’보다 못한 신으로 생각해 왔는데, 이스라엘의 신이 자신들에게 저주를 내리고 당당하게 당신의 나라로 돌아가는 것을 죽을 만큼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러분!!! 언약궤가 블레셋으로부터 돌아올 때 사람들이 골짜기에서 밀을 수확하다가 그 광경을 보았다고 13절에 말씀하는데, 이때가 보리 수확을 하는 초실절을 보내고 50일 있다가 시작되는 밀 수확 철인 맥추절 어간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두 암소가 끌고 오는 수레를 바라보는 또 한 무리가 있었는데, 바로 벧세메스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두 암소가 법궤를 싣고 오자 수레를 보면서 기뻐합니다.
법궤가 여호수아의 밭, 큰 돌이 있는 곳에 이르자 일단의 선지자들이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암소들을 잡아 번제로 하나님께 드렸고, 또 벧세메스 사람들이 하나님께 번제와 다른 제사들을 드립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상징인 법궤를 둘러싸고 보이는 두 가지 반응을 보게 되는데, 하나는 두 암소가 법궤를 싣고 벧세메스에 도착한 것을 보고 블레셋 방백들이 실의와 절망으로 코가 석 자나 빠져 블레셋으로 돌아간 것과, 또 하나는 돌아오는 법궤를 보면서 벧세메스 사람들이 그 암소를 잡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고 또 다른 제사를 드리며 기뻐하고 좋아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런 모습이 비단 그때만 있었던 게 아니라, 지금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세상과 신자들 간에 계속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블레셋 방백들이 누구일까요? 저들은 지금의 믿지 않는 이웃과 주변 사람들이고, 다른 무리는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믿음의 형제와 이웃입니다.
그런데 오늘 블레셋 방백들이 어떤 마음으로 수레의 뒤를 따라 벧세메스까지 올라왔습니까?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저들은 암소가 실패하고 일을 엉망으로 망쳐줄 것을 기대하며 수레를 따랐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별볼일 없는 신이고, 재앙 또한 우연히 어쩌다 임한 것이라고 믿기 위해, 그렇게 되어주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또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 두 암소의 생각과 행동까지 주관하여 저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도록 역사하셨고, 이를 확인한 백성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며 축제의 장으로 만들었습니다.
이처럼 지금도 불신의 이웃들은 우리가 신앙에 실패하고 잘못되기를 원한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지가 교회 나가면 얼마나 나가겠어? 조금 다니다 말겠지.’이렇게 조롱하거나, 어떻게든지 교회를 비방하고 잘못되기를 바랍니다.
코로나 때는 교회가 코로나의 진원지처럼 몰아가더니 이제는 교회가 정치적 발언을 하면 교회를 폐쇄하고 교회 재산은 국고로 귀속시키겠다고 법안까지 발의했다가 미국의 강력한 압박으로 주춤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입니다. 그것이 정치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나 잘못된 길로 간다면 간섭받아야 합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왕과 지도자들의 불신앙과 부도덕을 질타했는데, 그 질타들이 모아진 게 바로 선지서입니다. 그럼에도 교회가 정치에 개입하면 안 된다는 논리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천주교와 불교의 시국선언 등 정치 개입은 괜찮은 것입니까?
어쨌든 세상은 교회을 부정적으로 보며 꼬투리 잡는데, 그래서 더 조심해야 합니다. 이걸 볼 때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평가하는 일종의 시험지, 제품의 샘플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여러분!!! 샘플이 무엇입니까? 샘플은 사람들이 제품을 사기 전에 먼저 시제품을 써보고 구입하는데, 그 시제품이 바로 샘플입니다.
이처럼 세상은 먼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행실을 보면서 하나님의 존재 여부와, 믿을지 말 것인지를 결정하게 되는데, 그런 점에서 우리는 저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시제품, 바로 샘플과 같은 것입니다. 샘플이 좋으면 모든 제품을 좋게 보고, 샘플이 나쁘면 모든 제품은 신뢰도 잃고 구매도 하지 않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가 하나님 나라 샘플이란 걸 생각하면 우리 믿음의 사람들의 행실 하나하나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데, 그래서 마5:16절은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의 백성으로서 세상을 허투루, 막 살 수는 없습니다. 매사에 신앙인의 품격을 지키고, 본이 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불신자들이 막 살면 도덕적 비난은 받을지언정 큰 문제가 없지만, 우리 신앙인은 하나님의 영광과 직결되기 때문에 나중에 그것이 올무가 될 수 있습니다.
보십시오. 안 믿는 자들은 뭔 짓을 해도 괜찮지만, 우리가 잘못하면 꼭 따라붙는 수식어가‘예수 믿는 것들’입니다.‘예수 믿는 것들이’이말 나오면 비난은 나 하나로 끝나는 게 아니라, 하나님과 신앙인 전체로 확대되기 때문에 모욕과 수치는 물론이고, 하나님과 모든 형제들 앞에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어제 수목원 주차장에서 일방통행로인 줄도 모르고 나왔는데, 만약에 차에 교회 이름이 붙어 있고, 그걸 누가 봤다면 교회와 하나님이 욕 바가지로 먹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 생각은 실수도 안 하고, 완벽하게 준법 운전이 어렵다면 차라리 차에 교회 이름을 테는 것도 괜찮다 싶습니다.
어쨌든 갈수록 세상 사람들이 교회에 대해 갈수록 평가가 엄정해지고 있는 현실을 볼 때 주를 따르는 우리는 자신의 믿음의 행보를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올바른 생각과 신앙적 행동으로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나 같은 믿음의 형제에게도 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실 그렇게 사는 것은 힘들고 어렵습니다. 그래도 꿋꿋이 해내야 하는 것은 내 작은 행실 하나하나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그렇게 안 하면 교회와 형제들에게까지 피해를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샘플의 삶이 어려운데, 힘들고 외로워도 셈플의 삶을 통해 복된 순례자가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둘째로, 신앙에는 진정한 자기 고백이 필요합니다.(15절)
본문 15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레위인은 여호와의 궤와 그 궤와 함께 있는 금 보물 담긴 상자를 내려다가 큰 돌 위에 두매 그 날에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께 번제와 다른 제사를 드리니라." 아멘.
오늘 벧세메스 사람들이 법궤를 싣고 온 두 암소를 잡아 하나님께 번제로 태워 제사를 드린 것 외에 다시 번제와 다른 제사를 드렸다고 말씀하신 것을 볼 때 벧세메스 사람들이 얼마나 하나님께 진정한 자기 고백을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벧세메스 사람들이 제사만 너무 과하다고 푸념할 수 있고, 또 법궤를 싣고 온 두 암소에게 고생했다고 최상의 대우를 해주지는 못할망정 소를 잡고 수레를 부수어 제사 드린 것이 너무 잔인하고 몰인정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암소를 잡아 제물로 드린 제사는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데, 두 암소와 수레는 하나님의 언약궤를 운반하는 거룩한 일에 사용된 성물입니다. 이렇게 거룩한 일에 사용된 물건이든 소든 이것이 다시 세속적인 일에 사용되면 안 되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거룩성이 훼손되기 때문입니다. 웃사를 보십시오. 하나님의 법궤를 운반하던 소가 날뛰자 수레에 실린 법궤가 떨어질 위기에 처했고, 이를 붙잡은 웃사가 하나님께 죽임을 당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의 법궤는 너무도 거룩해서 죄인인 인간이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웃사가 이를 만져 하나님의 거룩성이 훼손되었는데, 같은 의미로 벧세메스 사람들이 법궤 안을 쳐다보다가 70명이 죽임당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하여 이 수레와 암소는 다시 세속적인 용도를 쓰여지지 않도록 그걸 온전히 태워 하나님께 번제로 드려지는 것이 맞습니다.
오히려 이 암소와 수레는 마지막까지 자신이 하나님께 쓰임 받았으니 영광입니다. 여러분에게 인간적 세속적 발상이 아니라, 신적 영적 발상이 필요합니다.
그런 다음 벧세메스 사람들은 오늘 하나님의 언약궤가 무사히 귀환한 데 따른 감사와 기쁨의 표시로 이제 자신들의 제물로 다시 제사를 드렸는데, 그것이 바로 번제와 다른 제사입니다. 이것을 오늘날 신앙의 개별화, 또는 개인의 신앙고백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신앙은 반드시 예수를 그리스도로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것은 물론이고, 일상에서 구속의 은혜에 감사하는 개인적 관계가 반드시 형성되어야 합니다.
오늘 벧세메스 사람들은 낮에 두 암소를 잡아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음에도 별도로 자신들의 제물을 가져와 하나님께 다시 예배함으로 각자의 신앙을 하나님께 보여드렸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나에게 신앙이 있고, 내가 주님 사랑한다는 것을 하나님 앞과 사람들 앞에서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민족은 민족 전체가 선민으로 선택받아 민족 전체가 복을 받거나 화를 받기도 했지만, 각 개개인의 잘, 잘못에 대해서도 개인적으로 복과 화를 받기도 했는데, 이게 바로 신앙은 전체이면서 개인적이란 걸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예배당에서 공동으로 함께 예배하고, 예배를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공동으로 공유하지만, 동시에 예배 가운데 여러분이 얼마나 마음과 중심을 다해 예배했느냐에 따라 개별적으로 하나님께 평가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큰 교회는 여러 좋은 점이 많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관계 형성이 잘 안되는 문제도 있는데, 개인적인 신앙고백이 사라진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많은 이들이 다중이 드리는 예배와 헌신 뒤에 숨어간다는 것이지요.
교회 예배에는 나오지만 교제는 없고, 봉사나 헌신이나 섬김도 없이 그냥 예배만 드리고 가면서 하나님과의 일대일의 관계가 느슨해지는 것을 말합니다.
신앙은 철저히 하나님과 나, 일대일의 관계입니다. 이 일대일의 관계가 무너지면 공동으로 드리는 예배의 의미가 없어집니다.
많은 이들이 예배에 참석하는 것으로 자기의 의무를 다한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 앞에 자신을 깊이 통찰하고, 그 과정에서 회개할 것이 있다면 회개하고 돌이킴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만들어가야 합니다.
이런 개별적인 신앙에 실패하면 다 실패하게 됩니다. 실패하면 예배를 비롯한 모든 신앙의 행위에 진실함이 빠지고, 대중에 묻혀서 적당히 지나가게 됩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대중 속에 묻혀서 신앙의 개별화가 잘 된 것처럼 사람을 속일 수는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속일 수가 없습니다.
어떤 분이 자기는 교회 안 다녀도 자기 아내가 교회를 다니니 나중에 아내 치맛자락 붙잡고 천국에 간다고 말한다지만 절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벧엘의 야곱처럼 하나님과 긴밀히 개인적인 만남을 가지십시오. 진심으로 신앙을 고백하고 그 고백이 헌신과 봉사, 희생으로 나타나도록 하십시오. 혹시 공동체에 묻혀서 내가 감당해야 할 신앙의 여러 의무들을 피하며 살아오지는 않았는지 돌아보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런 여러분에게 큰 복과 은혜를 부어주실 것입니다. 그런 복을 받아 풍성히 누리는 여러분 되시길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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