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이 20일(현지시간) 키예프(키이우)에서 우크라이나에 최대 350억 유로(약 52조원)의 신규 대출 지원을 약속했다. EU 역내에 동결된 러시아 자산(중앙은행의 외환보유고, 약 3천억 달러)에서 발생한 이자 등 투자 수익금으로 이 대출을 상환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G7과 EU는 지난 6월 서방 측에 동결된 러시아 자산을 담보로 우크라이나에 450억 유로(약 67조원)의 대출을 지원하고, 이중 78%(약 350억 유로)를 EU가 부담하기로 한 바 있다.
키예프를 방문한 폰데어라이언 EU집행위원장이 젤렌스키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사진출처:우크라 대통령실
지난 13일 우크라이나 최고라다(의회)를 통과한 2025년 예산은 세수 2조 흐리브냐(약 445억 달러, 달러당 45흐리브냐 기준), 세출은 3조 6천억 흐리브냐로, 재정적자는 1조 6천억 흐리브냐(약 356억 달러)에 이른다. 우크라이나는 새해 세수 부족을 메꾸기 위해 EU의 350억 유로의 대출이 꼭 필요한 상황이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우크라이나의 2025년 국방예산은 2조 2천200억 흐리브냐로, 이 중 거의 절반인 1조 1천억 흐리브냐는 군인들의 인건비(급여)로 나간다. 올해(2024년)의 경우, 국방예산이 1조 7천억 흐리브냐가 책정됐지만, 군인들의 급여가 모자라 5천억 흐리브냐를 추가하기로 했다. 데니스 슈미갈 총리는 "키예프가 2024년 여름에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판단, 충분한 국방예산을 확보하지 못했다"고 실토했다. 2024년 국방예산에 추가로 5천억 흐리브냐가 할당됐으니, 2025년 새해 예산과 그 규모는 거의 동일하다.
누구나 인정하듯이, 전쟁은 전쟁터에서 무기로만 승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국가 전체의 경제력(국력)이 뒷받침돼야 한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지지 않을 것이라고 보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제1, 2차 세계대전과 달라진 것은, 전쟁터에서 싸우는 군인들의 인건비가 승패를 좌우할 만큼 중요해졌다는 사실이다.
우크라이나군/사진출처:우크라 합참 페북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는 22일 "우크라이나 전쟁은 인류 역사상 다른 모든 전쟁과 구별되는 중요한 포인트가 하나 있다"며 "모든 전쟁에는 돈이 필요했지만, 이번에는 전쟁터에 동원된 군인들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할 것 없디) 모두 큰 돈을 받고 있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이 매체에 따르면 러-우크라 양측의 최전방 군인들은 (평균 임금보다 몇배나 높은) 월 2천 이상을 받는다. 저투 지역에 투입된 병력은 모두 최대 100만 명에 이르고, 전쟁은 2년 반 넘게 계속되고 있다. 이들에게 지급되는 인건비는 상상을 초월한다.
스트라나.ua는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미국 군대는 약 130만 명이고, 1991년 이라크를 겨냥한 '사막의 폭풍 작전'에는 미군 45만명이 참여했지만, 작전 기간은 2개월도 못미쳤다"고 우크라이나 전쟁 규모와 비교했다. 또 2001년 아프가니스탄, 2002년 이라크 전쟁에 투입된 미군은 27만명을 넘지 않았다고 한다.
유럽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군을 보유한 로마제국의 병력은 45만 명으로, 이를 유지하기 위해 세금을 계속 올리다가 제국 자체가 쇠퇴했다는 분석도 있다. 이후 그같은 규모의 군대는 유럽에 나타나지 않았다. 15~17세기 용병들의 전성시대에도 군의 규모는 크지 않았다. '30년 전쟁'(1618년~1648년, 로마 가톨릭 지지 국가들과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지지하는 국가들 간의 종교전쟁)에서 가장 큰 군대를 동원했던 보헤미아 왕국의 알브레히트 발렌슈타인 장군의 병력도 5만명을 넘지 못했다. 모두 돈 때문이었다. 대규모 용병 부대를 유지하는 것은 재정적으로 파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상황이 달라진 것은 17, 18세기 유럽의 주요 강대국들이 군대를 징집제로 바꾸면서부터. 값싼 인건비로 동원할 수 있게 되면서 유럽의 주요 국가들은 수백만 명의 규모의 군대를 보유했고,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치를 수 있었다. 러-우크라에서 “왜 우리는 할아버지 시절처럼 수백만 명을 동원해 전쟁 흐름을 바꿀 수 없느냐”고 반문하는 일부 전문가들이 생각하는 모델이다.
그들이 놓친 것은 '할아버지 시대'의 군인들은 우크라이나 전쟁에 참전한 '손자'들 처럼 많은 돈을 받지도, 요구하지도 못했다. 만약,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군인들이 (지금처럼 평균 임금보다) 3~5배 높은 봉급을 받고, 유족들에게 집을 마련할 수 있을 만큼의 보상금(위로금)이 주어졌다면, 세계대전은 길어야 1년 안에 끝났을 것이라고 스트라나.ua는 지적했다. 참전국들의 재정이 완전히 바닥날 것이기 때문이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군인들은 동전 한 푼 값에 목숨을 걸었다. 제정 러시아 군인들은 월 75-90 코페이카를 받고 전쟁에 나갔다. 당시 공장 근로자의 평균 임금은 월 20-30 루블이었다고 한다.
잘루즈니 주영대사가 젤렌스키 대통령을 영접하는 모습/사진출처:페북@ukraine.in.uk
젤렌스키 대통령도 지난해 말 예비군의 대대적인 동원과 관련해 재정 문제를 제기한 바 있다. 그는 발레리 잘루즈니 전 군총참모장 등 군지휘부가 군 동원을 50만명으로 늘려야 한다는 주장에 그같은 병력 유지에 필요한 5천억 흐리브냐를 어디서 충당할 것이냐며 난색을 표명했다.
러시아는 현재 군동원령 대신 '계약병' 모집을 통해 필요한 병력을 확보하고 있다.
러시아의 계약병 입영 조건에 따르면 2024년 기준 특수 군사작전에 참여하는 병사는 최소 월 20만 루블(소총수)에서 24만 루블(분대장급)을 받는다. 새로 입대하는 계약병(최소 1년)에게는 계약과 동시에 20만 루블 정도가 예금 통장에 꼽힌다.
또 공격작전에 투입될 경우, 별도 수당과 다양한 보상금이 기다린다. 예컨대 미국산 다연장로켓발사대(하이마스·Himars)를 파괴할 경우, 100만 루블을 성과금으로 받을 수 있다.
전사자에게는 500만 루블이, 부상병에게는 300만 루블이 유족에게 전달된다. 유족은 또 민간 보험사로부터 사망 보험금으로 300만 루블 가까이를, 부상병은 부상 정도에 따라 7만4천 루블~30만 루블을 받을 수 있다. 또 가장이 전쟁터로 나가고 남은 가족들에게는 공공 주택및 주택 모기지 우선 배정이나 임대료 보상 등 주거 부담을 없애주는 등 각종 지원 조치가 취해진다.
서방 측 추산에 따르면 러시아군 사망자와 부상자에 안겨주는 비용만 연 250억 달러가 넘는다고 한다.
러시아는 이같이 돈을 쏟아붓는 바람에 50만명을 전선으로 동원할 수 있었다고 보면 된다.
재정적자에 시달리는 우크라이나나, 매년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내야 하는 러시아가 언제까지 이 돈을 감당할 수 있을까? 에너지 판매 수입(러시아)과 외부 지원(우크라이나), 세금 인상, (국방비로) 예산 전용, 환율 조정(달러당 루블, 흐리브냐의 가치를 낮춰 겉으로는 예전과 같은 금액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깎은 방식/편집자) 등 다양한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지만, 전쟁이 길어질 수록 힘이 들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할아버지 시대'로 돌아가 군인들에게 큰 돈을 주지 않고 싸우라고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대안은 두가지다. 군인을 로봇으로 대체하고 드론 수를 늘려 활용도를 높이는 것이다. 또 소모전이다. 적이 손실을 만회할 수 없어 전선이 무너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누구에게 더 유리할까? 젤렌스키 대통령이 최근들어 '11월에는(제2차 평화정상회의) 전쟁을 끝내야 한다"고 강조하는 의도를 짐작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