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16일 연중 제1주간 수요일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 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마르코 1,29-39) He cured many who were sick with various diseases, and he drove out many demons,
Rising very early before dawn, he left and went off to a deserted place,
where he prayed.

말씀의 초대
예수님께서 인간과 얼마나 가까운 분이신지는 그분의 강생, 특히 수난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분께서는 인간을 진정으로 사랑하시고 보살피시고자 여느 인간들과 같이 피와 살을 취하셨고, 고난을 겪으셨으며, 유혹을 받으셨고, 죽음까지도 겪으셨다.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그 죽음을 이기신 것이다(제1독서). 예수님의 하루가 그려진다. 회당에서 가르치신 뒤 오후에는 시몬의 집에서 그의 장모를 치유해 주신다. 해가 지고 밤이 되어서는 온갖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일일이 고쳐 주신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에는 외딴곳에서 기도하신 뒤 다시 다른 이웃 고을로 떠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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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고해성사를 주다 보면 많은 사람이 형식적으로 죄를 고백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게 자꾸 반복되다 보면 문득 이런 유혹이 찾아옵니다. ‘어차피 형식적으로 죄를 고백하는 사람이 많으니, 한꺼번에 사죄경을 하면 안 될까?’ 아닌 게 아니라, 성사를 보는 사람들의 절반 이상이 그저 “주일 미사 빠졌습니다.”라고 하니, 그러한 사람들만 따로 모아 사죄경을 하면 되겠다는 상상까지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치유하시는 모습을 보면 제 상상이 틀린 생각임을 깨닫게 해 줍니다. “저녁이 되고 해가 지자, 사람들이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려왔다.” 여기서 ‘데려왔다’는 표현은 신약 성경의 원어에서 미완료 동사로, 반복적이고 지속적인 행위를 나타냅니다. 곧 한꺼번에 많은 사람이 왔다가 한꺼번에 썰물처럼 빠져나간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밀려오고 나가는 일이 계속되는 것이지요. 이는 예수님께서 그들을 한꺼번에 고쳐 주신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 일일이 대해 주신 것을 암시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병자들과 마귀 들린 사람들 전체를 한꺼번에 불러 놓고서 일순간에 그들을 치유하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만큼의 능력을 지니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대할 때마다 마치 이 세상 전부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신 것입니다. 한 사람을 여러 명 가운데 하나로 보신 것이 아니라, 마치 세상에 그 사람밖에 없는 것처럼 대하시며 치유하신 것입니다. 사랑은 이처럼 바로 자기 앞에 있는 이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전에 신학생 때 지방에서 인천으로 올라오는 버스를 탔다가 아주 고생했던 적이 기억납니다. 동료 신학생들과 함께 산에 갔다가 올라오는 차편이었지요. 그런데 차를 타기 전에 맥주 마신 것이 문제가 되었는지 화장실을 가고 싶은 것입니다. 저는 아무런 움직임도 갖지 않고 고속버스가 잠시 정차해서 쉬는 휴게소까지 참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버스기사 분께 가서 어렵게 부탁을 했지요.
“제가 화장실이 너무나 급한데 잠깐만 서면 안 될까요? 정말로 잠깐이면 됩니다.”
그러나 너무나 매정하게 저의 부탁을 거절하시더군요.
“버스 시간 때문에 중간에 설 수 없어요. 30분만 더 가면 휴게소에서 쉴 테니까 조금만 참으세요.”
그때의 경험 때문인지 저는 먼 거리를 이동할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전에는 절대로 물이나 맥주를 마시지 않습니다. 혹시나 그때의 상황이 또다시 반복될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지요. 그런데 기차나 비행기를 이용할 때는 그러한 두려움이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차나 비행기 안에는 화장실이 반드시 있기 때문이지요.
이처럼 나를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드는 것,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이 내게 두려움을 가져옵니다. 그러나 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있다면 또 가질 수 있게 해 준다는 믿음만 있다면 그 두려움은 말끔히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내 자신을 위해서도 주님을 선택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을 더 잘 할 수 있도록, 또한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갖게 함으로 인해 이 세상 안에서의 두려움을 없애주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엉뚱한 곳을 선택하곤 합니다. 마치 세상이 내게 풍요함을 주는 것처럼, 물질의 만족만이 행복을 가져오는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등장하는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과 같은 말을 자주 하지요.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주님의 말씀이 마치 커다란 구속을 가져오는 것이라고 생각하지요. 분명히 나를 위해 함께 하시는 분, 나의 발전을 위해 더 좋은 것을 주시는 분, 나의 온갖 두려움을 없애주시는 분인데도 주님이 아닌 세상과 물질을 선택하면서 주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지려고만 합니다. 주님은 고리타분하신 분이고, 주님은 뜬구름 잡는 이상한 말씀만 하시는 분으로만 여깁니다. 그러나 세상과 물질이 과연 내게 어떤 것을 주었는지를 잘 생각해보십시오. 순간의 만족을 가져다주었을지는 몰라도 영원한 행복을 주지는 않습니다.
주님이 우리와 상관없는 분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과 함께 할 때에만 모든 두려움에서 벗어나 진정한 행복 안에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타인의 것으로 시작해서 당신의 것으로 끝내라(발타자르 그라시안).

정제천 신부와 함께하는 수요묵상
예수님의 하루 일정을 알려주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회당에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신 다음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으로 가신다. 거기서 열병으로 누워 있는 시몬의 장모를 낫게 하시고 사람들이 데려오는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밤늦게까지 모두 고쳐주셨다. 예수님은 자신의 안녕을 먼저 챙기는 분이 아니시다. 예수님은 남을 위한 삶을 사신 분이다.
새벽에는 일찍 일어나시어 외딴곳에 가서 혼자 기도하셨다. 어떤 기도를 하셨을까? 자기 완성을 위한 초조감에서 나온 기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하셨으니, 나도 예수님이 하신 기도를 바칠 수 있기를 빈다.
예수님은 자신을 먼저 도모하지 않고 남을 향해 나아가는 마음, 눈앞에 보이는 사람만이 아니라 더 넓은 지평과 시야를 간직하는 넓은 마음을 지니셨다. 오늘 하루 이런 마음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일을 처리하고 싶다. 그러면 오늘 하루 나도 예수님이 된다.
자신을 위해 시간을 내라
-오기백 신부-
근래 텔레비전 뉴스를 통해 주식시장의 거래하는 사람들과 외환 거래업자들의 모습을 자주 봅니다. 그런데 그 장면에서 등장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고민이 많고 불안하고 정신없어 보였습니다. 그런 모습은 현 사회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쁘다’, ‘시간이 없어’, ‘다음에 하자’라는 말을 또한 흔히 들을 수 있지요. 저는 최근에 새로 출판된 어느 책에 대한 소개를 읽게 되었는데, 한 영국 기업인이 쓴 책으로, 성공적인 CEO였다가 100일밖에 못 산다는 암 선고를 받은 사람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는 그때 남은 삶 동안 가장 중요한 것만을 위해 살겠다고 결심하면서 다음과 같은 네 가지를 우선순위로 정했다고 합니다. 첫째 매 순간마다 의식적으로 살 것, 둘째 자연스럽게 인간관계를 맺고 자기의 마음을 표현할 것, 셋째 생활은 간소하게 할 것, 넷째 자주 죽음에 대해서 깊이 생각할 것. 그는 몇 개월밖에 살지 못했지만 죽기 전에 이 책을 썼다고 합니다. 책을 내면서 그는 지난 몇 개월 동안 너무 유익한 시간이었다고 회상하면서 일찍부터 그런 삶을 살지 못한 게 아쉬운 점이라고 했습니다.

유혹을 받으시기까지 -김찬선신부-
“그분께서는 모든 점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 했습니다. 자비로울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충실한 대사제가 되시어, 백성의 죄를 속죄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 수가 있습니다.”(히브리서2, 17-18)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과 똑같이 되시는 것은 어디까지인가?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셨지만 하느님이신 분이 우리 인간과 똑같은 고통을 당하지는 않으셨으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생각에 대해 어제 히브리서는 우리와 똑같은 고난을 받으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더 나아가 오늘 히브리서는 유혹까지도 받으셨다고 합니다.
유혹이란 무엇인가? 싫어하는 것에 유혹을 받을까? 아무도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좋아하는 것에 유혹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유혹까지 받으셨다는 것은 우리 인간과 똑같이 싫고 좋은 것이 있으셨다는 뜻입니다. 우리 인간과 똑같이 싫어하는 것은 회피하고 싶고 좋아하는 것은 취하고 싶으셨다는 뜻입니다. 향기로운 술잔은 마시고 싶으셨고 고난의 술잔은 피하고 싶으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난을 받으시기 전 날 게세마니에 가시어 기도하실 때 제자들에게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시오.”하시고 아버지께는 “아버지, 원하신다면 이 잔을 거두어 주소서.”하고 빌으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도 아버지 뜻만 있고 당신 뜻이 없었던 것이 아니고 아버지만 좋으시면 되고 자기 좋은 것은 없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의 싫고 좋은 것이 없이 아버지께서 좋으시다면 당신은 다 좋은 그런 높은 영적 초월의 경지에 애초부터 있으셨던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좋으시다면 나는 어째도 다 좋은, 그래서 어떤 수난까지도 다 받아들이는 그런 강함이 애초부터 있으셨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는 주님께서 애초부터 Super man이 아니셨고 그렇기에 우리의 연약함을 이해하시고 유혹을 받는 우리 인간을 도와주실 수 있으셨다고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은 우리와 똑같이 유혹에 연약한 분이셨지만 유혹으로부터 선으로 나아가고 연약함으로부터 순종과 사랑으로 나아가는 모범을 보이시며 우리에게 용기를 주시고 힘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조용히 흘러가는 사랑
-조정희 수녀-
어느 날 한 선생님이 메시지를 보내왔다. “정신없이 살다 보면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지 않나 여겨질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마음 있는 분들이 모여 기도 모임을 했으면 합니다.” 나는 선생님 중에 나와 비슷한 목마름을 지니고 있는 분이 계시다는 느낌에 놀랍기도 하고 반갑기도 했다. 그 뒤 목요일 아침 7시 20분부터 학교 성당에서 기도 모임을 하게 되었다. 바오로 서간을 함께 읽고 나눔을 하는데, 같은 말씀을 읽어도 각자에게 꼭 필요한 말씀으로 마음을 건드려 주시고 인도해 주시는 느낌이 들었다. 지난 모임 때 한 선생님은, 새벽 5시에 아기가 깨어 울면 짜증을 내는 아빠였는데 이젠 아기를 다독거리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고 했다. 또 다른 선생님은 “이 모임에 와서 선생님들을 생각하며 기도하다 보니, 평소 별로 친하지 않던 선생님을 기억하며 기도하게 되고, 그래서 우리가 한 식구란 느낌이 들어 좋아요.” 했다. 기도 모임에 오고 싶지만 못 오는 선생님들, 부모님이나 아이가 아파 힘들어 하는 분들, 또 기도를 부탁하는 선생님들을 생각하며 마음으로 좀 더 가까워지는 것이 은혜로웠다. 하루의 첫 시간을 아버지와 깊이 만나고, 이웃에 사랑과 진리의 씨앗을 뿌리신 뒤 또 다른 이웃을 찾아 길 떠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아름답게 와 닿는다. 사랑은 머물러 있지 않고 먼저 다가가고 움직이는 것임을 새삼 느낀다. 그 님의 모습 따라 우리도 말씀 안에서 당신을 만나고 이웃에게 먼저 다가가는 삶을 살아갈 텃밭을 마련해 주심에 감사드린다.

새벽을 열며
-조명연신부-
어제 우리 본당에는 지난 9일에 사제서품을 받은 새 신부님 두 분이 오셔서 미사를 봉헌하시고 안수까지 해 주셨습니다. 사실 이 두 신부님은 제가 사제서품을 받을 당시, 본당 신학생들이었지요. 즉, 같은 본당 출신의 신부님 두 분이 선배라는 저를 찾아 왔던 것입니다. 못난 선배를 찾아와 주었다는 사실에 감사하기도 했지만, 제 자신의 모습을 다시금 반성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답니다. 왜냐하면 저의 출신 성당에서는 제가 사제서품을 받은 지 10년 만에 처음으로 새 신부님이 탄생하게 된 것이거든요. 즉, 얼마나 제가 못 살았으면 후배도 못 만들고, 또한 지금 있는 본당에도 예비신학생이 한 명도 없을까요?
바로 이쯤이면 되었다는 안일한 생각과 쉽게 포기해버리는 옹졸한 마음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일주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해 주린 두 여행객이 어느 날 외딴 산길에서 빈집을 발견했습니다. 집 안에 들어가 보니 방이 텅 비어 있는데, 이상하게도 손이 닿지 않는 높은 천장에 과일 바구니가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두 사람은 주린 배를 움켜쥐고 젖 먹던 힘까지 내서 손을 뻗어 보았지만, 아무리 해도 과일 바구니에는 손이 닿지 않았습니다.
잠시 후, 한 사람이 화를 참지 못하고 버럭 고함을 지르더니 그 집을 뛰쳐나가 버렸습니다. 하지만 나머지 한 사람은 부글부글 끓는 화를 꾹 눌러 참고 ‘분명히 무언가를 이용해서 높은 천장에 과일 바구니를 매달아 놓았을 거야.’라고 생각하면서 집 안을 샅샅이 뒤졌어요.
결국 그 사람은 방 한구석의 어둑어둑한 곳에서 사다리를 찾아냈습니다. 그러고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천장에 매달려 있는 바구니를 내려 맛있게 과일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만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정말 갖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모든 것을 동원해서 자신의 소원을 이루려고 하겠지요. 그런데 저는 제가 하고 있는 일들만 해도 남들보다 많이 하는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아무리 노력해도 성소자를 찾을 길이 없다면서 쉽게 포기하는 옹졸한 마음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삶을 따른다고 한다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포기해서는 안 되며 매 순간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얼마나 인기가 많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밤을 지나 새벽이 되어서도 사람들이 예수님을 계속해서 찾을 정도로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었지요. 따라서 마음만 먹으면 편안하게 사실 수도 있었습니다. 피곤하게 이곳저곳을 전교여행 다니실 것이 아니라, 이제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직접 찾아오게끔 할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한군데에만 머물러 썩어가는 고인 물의 삶이 아니라 썩지 않고 계속해서 흐르는 물의 삶을 선택하십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이렇게 매순간 최선을 다하시는 예수님인데, 나는 과연 얼마나 최선을 다해 살고 있었을까요? 별로 노력도 하지 않았으면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고 착각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새벽에 일어나라
-박기호 신부-
밀려드는 병자와 마귀 들린 자들을 긍휼히 맞으시고 치유와 구마의 자비를 연일토록 베푸심에 얼마나 피곤하셨을까요? 그럼에도 여명이 밝기 전 일어나 홀로 기도하셨습니다. 스승 예수님은 하루를 그렇게 시작하셨습니다. 고대 종교사회에서는 아직 캄캄할 때 일어나 태양이 떠오르도록 치성드리고, 저녁놀을 향해 감사의 예를 드리는 것이 제사장의 임무였습니다. 하루를 열고 닫는 임무는 오늘도 종교인들을 통해 전승됩니다. 범종을 치면서 삼라만상을 깨워 여명을 맞이하고 저녁이면 보금자리에 들게 합니다. 사제, 수도자는 물론 가장들도 새벽 기상으로 자신과 가족과 공동체의 평화 강령을 기원할 의무가 있습니다. 하루 첫 새벽을 주님께 봉헌하며 청정기운을 받음으로 온종일을 활력차게 만들어야 합니다. 종교인이 일찍 일어나지 않으면 그날의 해가 빛을 잃습니다. 자녀들을 일찍 깨우는 일은 가장 중요한 교육입니다. 등교와 출근 때문만이 아니고 인간이 대자연의 질서에 결합하여 천지간 영적인 교류 속에 영성적으로 살고자 함입니다. 그래서 본당 수도원마다 새벽 미사를 봉헌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본당에 새벽 미사가 사라지고 있음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주부들이 오전 미사에 보다 많이 올 수 있기 때문이겠지만 그래도 종교예식이란 다수의 편의보다 변함없는 시간과 거룩한 공간의 옹호가 더 중요한 건데….

열매를 맺고 거두는 건···
-박영대-
정말 드문 일이지만 지하철 안에서 전교하는 가톨릭 신자를 만날 때도 있다. 예외 없이 여성 신자다. 옆 사람에게 말하듯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보통 큰소리를 내며 전교하는 개신교 신자와는 좀 다르다. 나는 지하철 안 사람들이 어찌 생각할지 궁금했다. ‘역시 천주교는 전교해도 점잖게 하네’, ‘젠장, 이젠 천주교까지 나와 시끄럽게 하는군.’ 또 그 자리의 천주교 신자는 어찌 생각할지도 궁금했다. ‘뭐야, 창피하게’, ‘나는 남 앞에서 밥 먹을 때는 성호도 못 긋는데 이렇게 전교를 하다니. 정말 존경스럽네.’ 지난해 아프가니스탄에 단기 선교 갔던 개신교 신자들이 인질로 잡혔을 때 천주교·개신교·불교 단체가 함께 모여 참 선교(또는 포교)가 무언지를 되새겨 보는 자리를 가진 적이 있다. 선교지역 사람의 고통과 슬픔이 무엇인지를 살펴 그 고통과 슬픔을 함께 나누고, 또 이를 이겨내기 위해 함께 노력하는 게 참 선교라는 데 뜻을 모았다. 예수께서도 돌아다니시며 가장 먼저 병을 고쳐주셨다. 가르침은 나중이었다. 고통과 슬픔에 빠진 사람에게 그 해결을 미끼로 자기 종교의 가르침을 전하려는 건 폭력이다. 비열한 짓이다. 메리놀외방전교회 한국인 사제 손경수 신부님은 페루에서 30년 넘게 선교사로 살고 계신다. 손 신부님은 사람들한테서 칭찬 소리가 들리고 더 있으라고 붙잡을 때가 바로 떠나야 할 때라고 한다. 복음 선포가 하느님 나라를 이루는 것이라면 그 씨앗을 뿌린 것으로 충분하다. 열매를 맺고 거두는 건 복음으로 말미암아 해방된 그들의 일이다.

병마를 쫓아 내시는 예수님 -강길웅 신부-
옛날 사람들이 생각할 때 부귀와 건강은 하느님의 축복이요 가난과 질병은 하느님의 징벌이었습니다. 따라서 병에 걸린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은 그 자체의 고통보다 '하느님의 징벌'이라는 부끄러움 때문에 더 큰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욥은 자신의 고통스런 허망한 현실에 대해 인생을 슬프게 한탄하고 있습니다. 그는 본래 재산도 많았고 자녀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그 모든 것을 다 잃고는 알거지가 됩니다. 뿐만 아니라 욥 자신이 나병에 걸려 잿더미 위에서 고통의 나날을 보내게 됩니다. 구약에서는 고통의 의미에 대한 해답을 전혀 제공해 주지 못했기 때문에 욥에게 있어 인생은 실로 고역이었습니다.
과학이 발달한 오늘의 시대에도 병은 무섭습니다. 암이나 에이즈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감기에 이르기까지 의학이 정복하지 못하는 분야는 너무 많습니다. 그리고 일단 병에 걸렸다 하면 육체적인 고통은 물론 정신적인 고통도 뒤따르게 되며 또한 사회적, 경제적, 그리고 시간적인 문제에 이르기까지 막대한 손실을 가져오게 됩니다. 옛말에 '우환이 도둑'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우환이 강도'입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회당에서 설교하신 후에 시몬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셔서 베드로의 장모뿐 아니라 당신을 찾아온 온갖 병자들을 고쳐 주시고 또한 마귀들린 사람들을 모두 치유해 주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만나게 됩니다. 여기서 병이 낫고 마귀가 쫓겨난다는 것은 메시아가 보여 주는 하나의 징표로서 그 자체만으로도 사람들은 열 광을 하게 됩니다.
옛날 사람들이 생각할 때 세상은 마귀의 지배하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다시 말해 병이 들었다 하는 것은 마귀가 그 사람 안에 들어가서 훼방을 놓고 장난을 친다고 믿었습니다. 인간은 그래서 마귀의 위력 앞에 속수무책이었으며 단지 그들이 기다렸던 메시아가 오면 마귀의 모든 세력이 꺾여서 새로운 세계가 전개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인생의 새 지평선을 활짝 열어 주셨습니다. 육체적인 질병 뿐만아니라 정신적인 질병, 혹은 자기 죄로 인해서 지옥에 갇혔던 인생들에 이르기까지도 예수님은 새 세상을 열어 주셨습니다.
어떤 형제가 간질병을 남모르게 가지고 있었는데 병으로 인해서 그 인생이 점점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처음엔 우울증으로 비관하면서 고통을 겪다가 나중엔 과격한 행동으로 폭력을 휘두르게 되어 주위의 사람들을 자주 불안하게 만들었습니다. 아무도 그를 도울 수가 없었습니다. 본인도 자신의 문제를 잘 알고 있었으나 병에 마음이 묶여진 그로서는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신앙을 통해서 예수님을 믿고 나서는 새 인생을 걸어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때 그 형제가 그랬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데 자신만이 몹쓸 병을 앓고 있는 것에 대해 불만이 컸고 세상이 저주스러웠으나 예수님의 고난과 성모님의 통고를 알고 나서는 하느님께서 자신을 진실로 사랑해 주시는지를 알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고통을 축복으로 받아들이자 그는 실로 축복받는 인생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현대에도 치유의 기적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인생은 절대로 고역이 아닙니다. 불행의 대명사였던 고통은 이제 더이상 불행이 아니며 오히려 축복으로 연결되는 하나의 징검다리로서 그 자체가 하느님의 크신 사랑입니다. 예수님 친히 그 속으로 들어가셨다는 것은 고통의 의미가 그토록 크다는 것이며 죽음의 세계에까지 들어가셨다는 것은 죽음 그 자체도 새 세상을 여는 관문이 된다는 것을 스스로의 부활로써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게 새 세상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것은 질병 뿐만이 아닙니다.
마음이 병들고 생활이 부패된 사람들은 얼마든지 많습니다. 뿐만 아니라 죄의 악습에서 여전히 뉘우칠 줄을 모르고 헛되게 살아가는 가련한 인생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예수님을 찾아 나서면 모든 것을 용서받고 치유받게 됩니다.
아니, 예수님은 그들을 애정으로 항상 찾아 나서십니다. 길 잃은 양들을 찾아 나서시는 것이 그분의 임무입니다. 그래서 병자나 죄인들은 예수님의 사랑의 대상들입니다. 다만 그분은 우리도 당신을 찾아 주기를 원하십니다.
세상에 용서받지 못할 죄가 없으며 또한 치유되지 못할 병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은총과 능력은 그보다 훨씬 크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힘들고 어려울 때 예수님께 나가도록 합시다. 슬프고 괴로울 때 그분 앞에 나아가 진실을 말씀드리도록 합시다. 그러면 주님께서 여러분을 놀라운 은총으로 채워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변함없는 열정과 섬김
-이중섭 신부-
오늘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의 일과가 무척 바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회당에서 가르치신 다음,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주시고, 병자들과 마귀 들린 사람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이튿날 이른 아침에 일어나 기도하고 이어서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저는 강론을 준비하며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모습에 감명을 받았습니다. 초지일관 섬기고 노력하시는 예수님의 삶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공생활 시초부터 십자가에 못 박힐 때까지 보여주신 그 변함없는 열정과 섬김을 본받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 사제들이 자주 듣는 말은 이런 말입니다. ‘신학생 때는 안 그랬는데, 신부가 되니까 많이 변했다.’ 사실 사제생활을 한 해 두 해 하다 보니 신학생 때 가졌던 겸손과 봉사의 마음은 사라지고, 교만과 아집으로 뭉쳐진 저를 발견하게 됩니다. 사제생활을 하면 할수록 신자들에게 군림하며 가당찮은 권위를 내세우게 되고, 자신의 주장을 감히 하느님의 뜻인 듯 강요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사제들이 초심을 잃지 않도록, 그리고 하느님을 끝까지 섬기시는 예수님을 본받도록 기도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예수님의 하루 일과
-구요비 신부-
교회 역사 안에서 교부시대에 있었던 많은 이단의 출현과 신학적 논쟁의 중심은 예수님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이 어떻게 경시되지 않고 잘 보존될 수 있는지 하는 문제였다. 결국 칼체돈 공의회(451년)에 와서 이 두 본성이 분리되거나 흡수됨 없이 위격적 일치를 이룬다는 것을 선포함으로써 조화와 균형을 찾게 된다. 하지만 이 문제는 오늘날까지도 우리의 신앙생활 안에서 자주 대두되고 있으니 구체적으로는 신앙과 생활의 일치, 기도와 활동의 조화 등이 늘 우리에게 도전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이 세상 한가운데서 빛과 소금으로 살도록 부름 받은 평신도들한테는 더욱 그러하다. 이에 대하여 베네딕토 성인은 ‘기도하며 일하라(Ora et Labora)’라는 수도생활의 규칙으로 빛을 주셨다. 성인의 정신은 예수님의 삶 안에서 잘 드러나는데, 예수님은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요한 5,17-19)라고 말씀하셨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하루 일과를 잘 보여준다. 주님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생활 가운데서도 새벽 캄캄할 때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마르 1,35). 예수님 안에서는 활동과 기도의 깊은 일치가 있었다.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는 완덕의 정상에서는 기도와 활동의 일치가 이루어진다고 했다. “내 말을 믿어주십시오. 마르타와 마리아는 나란히 같이 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주님을 잘 모시고 항상 당신 곁에 있을 수 있습니다. 당신께 푸대접을 안 해드리고 잡수실 것을 바칠 수 있습니다”(「영혼의 성, 제7궁방, 제4장 No.12).
기도하시는 예수님 -이기양 신부-
제 1독서 : 히브 2,14-18 (자비로우신 그분은 모든 점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만 했습니다.) 복 음 : 마르 1,29-39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들을 고쳐 주셨다.)
예수님의 인기가 연일 최고를 기록합니다. 해가 저물었는데도 불구하고 병자와 마귀들린 사람들이 예수님께 들려오고, 온 동네 사람들이 몰려들었다고 복음은 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고, 새벽 먼동이 트기 전에 일어나 외딴 곳에서 기도를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셔서 기도를 하신 때는 인기가 상승세를 타고 사람들이 수없이 몰려들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를 하시는 장면은 성경 곳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하시기에 앞서 40주야를 단식하시며 기도하셨고, 중간 중간에도 산에 올라가(루카복음 9장), 외딴 곳(마르코복음 1장)에서 기도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신의 사명을 완수하시기 위하여 십자가 처형이 눈앞에 다가오는 어려움 속에서는 올리브산에서 번민에 싸여 기도(루카복음 22장)하셨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22,42)
이러한 기도는 예수님을 하느님과 일치시켰고, 예수님은 이 기도 중에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마치신 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마르1,38)
기도하시는 예수님은 힘과 용기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용모도 환하게 변하셨습니다. 루카복음 9장을 보면 산에서 기도를 하실 때 영광스럽게 변모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제자들이 목격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루카9,29)
기도하는 사람은 얼굴이 다릅니다. 얼굴이 빛나고, 눈은 맑고 깨끗합니다. 예전에 다른 성당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매일 성당에 와서 기도를 하는 한 자매가 있었습니다. 평일미사는 물론이고 수시로 와서 성체 조배도 열심히 하는 자매였습니다. 집안에 큰 어려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매의 얼굴은 늘 밝고 눈빛도 맑았습니다. 그런데 한 3개월 이상 그 자매가 보이지 않더니 어느 날 나타났는데 그전의 맑고 깨끗했던 모습은 사라지고 얼굴은 피곤에 지쳐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으니까 그렇게 열심히 기도를 하고 성당을 찾아도 하느님께서 자기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하느님을 멀리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자매가 성당을 매일 매일 찾아올 때 하느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았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지요! 하느님께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그 자매의 기도를 들어주셨고, 마음의 평화까지 주셨던 것입니다. 그 자매는 그것을 모르고 자기 눈앞의 바람만을 고집했던 것이지요.
우리 신자들은 언제나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셨듯이 일을 시작할 때나 일의 중간, 끝마칠 때나, 성과가 좋을 때나 나쁠 때나 언제나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우리에게 새로운 힘을 주고 용기를 주며, 우리를 거룩하게 변화시킵니다.
나의 욕심이 이루어지기만을 바라지 말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합시다. 참된 아름다움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데서 만들어집니다.
하느님의 뜻을 담고 사는 사람들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안에 살게 되고, 어떠한 환경에서도 긍정적인 사고를 하게 됩니다. 이렇게 사랑을 담고, 긍정적인 사고와 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아름다워집니다. 성인 성녀들을 헤아려 보십시오.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최상의 아름다움을 담고 있질 않습니까? 그러나 인간적인 욕심을 가득 담고 사는 사람은 흉할 수밖에 없습니다. 욕심쟁이 스크루지를 떠올려 보십시오. 얼마나 추한 모습입니까?
기도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담고 사는 아름다운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양승국신부-
<또 다시 익숙한 곳과 작별하며>
어려웠던 시절, 아시아권으로 선교를 떠난다는 것은 참으로 많은 고통이 예견되는 일이었습니다. 이 땅에 오신 많은 선교사님들을 뵐 때 마다 ‘정말 큰 십자가들을 지고 살아가시는구나’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습니다. 언어습득 문제는 그분들에게 가장 큰 스트레스지요. 다행히 언어감각이 뛰어나셔서 의사소통에 아무런 문제도 없다면 다행스런 일이겠지만, 어디 그게 쉬운 일인가요? 선교사님들 거의 한평생 언어 때문에 고생하십니다.
뿐만 아닙니다. 젊은 시절 고국을 떠나 30-40년 이 땅에 청춘을 바쳤으니, 거의 이 나라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고향에 가시면 오히려 어색하다고들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분들 삶의 무대가 아니기 때문에 별로 아는 사람도 없고 재미도 하나 없습니다.
이제 연세도 지긋하게 드시고, 이곳에 정도 많이 들고, 지인들도 많이 생기고...이제 이 땅에서 편안하게 노후를 보내시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겠지요.
그러나 그 노령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가방을 꾸리시는 선교사들을 봅니다. 늘 어제와 결별하고, 늘 익숙한 곳과 작별하고, 조금이라도 더 어려운 곳으로, 조금이라도 더 일손이 필요한 곳으로, 조금이라도 더 낮은 곳으로 떠나는 선교사 정신 때문이겠지요.
마치 오늘 복음에 등장하시는 선교사로서의 예수님을 뵙는 듯합니다.
베드로의 장모가 앓고 있던 열병을 치유하셨고, 악령 들린 사람을 구해주신 예수님에 관한 소식은 순식간에 갈릴래아 전역에 퍼져나갔습니다.
해가 떨어지고 안식일이 지나면서 ‘안식일 규정’에서 자유롭게 된 사람들은 수많은 환자들, 악령 들린 사람들을 데리고 예수님께서 머무시는 곳으로 몰려들었습니다. 밤새 대대적인 치유활동이 이루어졌습니다. 하느님 은혜가 풍성하게 내린 이 호숫가 작은 마을의 밤은 감사와 환희, 기쁨과 설렘과 함께 그렇게 깊어갔습니다.
먼동이 트기 전, 이른 새벽이었습니다. 피곤에 지친 제자들이 깊은 잠에 빠져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외딴 곳으로 가셔서 기도에 전념하고 있었습니다.
아침이 되자 어제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시몬 베드로의 집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안보이자 사람들은 그분이 어디 계시냐고 다들 아우성입니다. 어쩔 수 없이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을 찾아 나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아룁니다.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
이 순간 예수님의 태도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준비가 덜 된 복음 선포자였다면, 덕이 덜 닦인 선교사였다면 우쭐하는 마음에 사람들에게 달려갔을 것입니다. 자신을 열렬히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간절한 바람을 들어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마음껏 능력발휘를 한번 해보고도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기에 영합하지 않으십니다. 단호하십니다. 일어서셔서 홀연히 앞장서 가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온 것이다.”
가파르나움 외에도 갈릴래아 호숫가에는 많은 고을들이 있었습니다. 종려나무와 올리브 나무로 둘러싸인 조용한 마을들이 많았습니다. 그곳 사람들도 예수님께는 소중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 모든 선교사, 복음선포자들의 모범이십니다. 자신의 인기를 전혀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오직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성취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실 뿐이지 자신은 조금도 챙기지 않으십니다.
오직 죄인을 부르기 위해서, 잃어버린 양들을 찾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바쳐 많은 사람들의 몸값을 치루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며 살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의 하루 일과
-이찬홍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하루 일과를 잘 보여주는 말씀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낮 동안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나와서 시몬이 집에 갑니다.
가서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 줍니다.
그리고 저녁때가 되자 많은 병든 사람들과 마귀 들린 사람을 고쳐줍니다.
다음날 새벽에는 외딴곳에 가서 기도를 드립니다.
하루를 기도로 시작하고, 그 기도의 힘으로 많은 활동을 하시는 모습입니다.
복음의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 참 열정으로 살아가셨구나...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의 지닌 열정적인 모습과 삶은 단순히 예수님께서 활동하는 공생활이 불과 3년 밖에 안 되기에 그렇게 삶에 애착을 갖고, 열정적으로 살아가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삶 자체가 열정적이고, 적극적인 삶이었습니다.
병자를 만나고 치유해주는 그 모습이..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모습이 열정적이고 최선을 다하는 삶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당신을 찾아온 제자들에게 “다른 이웃 고을에도 찾아가자. 그 곳에도 내가 복음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종종 이런 생각이 듭니다.
좀 더 나이를 먹게 되면, 지금보다는 불타는 이 열망이 사그라지지 않을까?...
좀 더 사제 생활의 연륜이 생기면, 지금보다 더 사랑하게 되고, 더 여유로움 마음과 모습으로 살아가지 않을까?...
더 나이를 먹으면, 지금보다 기도하는 시간이 많아서 이러저런 활동보다 성당에 머무는 시간이 많지 않을까?...
이러한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었는데, 엊그제 신학교 영성 면담 신부님과 전화를 하면서 이런 생각이 참 어리석은 망상이었음을... 그저 저만의 생각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신학교 때처럼... 진정 사랑 가득한 마음으로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야고보야, 기도도 공부도 다 때가 있는 거란다. 나이가 많이 들면, 좀 더 기도하는 시간이 많을 것 같고, 더 예수님을 향하여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나의 생각은 그렇지 않단다. 물론 젊은 때가 더 유혹도 많고, 시련이 많은 것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젊을 때 기도하고, 열심해야지, 막상 늙어 버리면 기도하기가 쉽지 않단다. 기도 역시 힘이 있어야 30분, 1시간, 또는 그 이상 할 수 있는 것이지, 늙어 힘이 없으면, 기도하기보다는 더 많이, 더 자주 쉬고만 싶어진단다. 그래서 야고보도, 젊을 때 기도를 많이 하거라.”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내일, 미래는 지금, 오늘의 모여 이루어진 결실입니다.
때문에, 오늘 기도하지 않는다면, 결코 내일, 미래에 기도할 수 없습니다.
오늘, 지금 일을 하지 않고, 공부하지 않는다면, 결코 미래에 멋 훗날에 일할 수 없고, 공부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제 안에 늘 많은 욕망에 안절부절 못함에도.. 늘 기도하지 않으려는 유혹에 힘들어 하면서도, 이를 이겨내기 위해 더 자주 많이 기도하기 보다는... 그저 단순히 먼 훗날에, 좀 더 시간이 흘러 노인이 되면 사그라지겠지... 아무 문제가 되지 않겠지... 라는 그릇되고 안일한 모습이었습니다.
우리는 압니다.
지금 하지 않는 것은 결코 내일, 멋 훗날에도 하지 못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때문에, 지금, 현재의 삶에 좀 힘들어 한다 해도, 많은 시련과 유혹이 있다 하더라도, 좀 더 적극적이고 열성적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지금 행하는 이 일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행해야 하겠습니다.
성인의 이름은 생각이 나지 않지만, 우리에게 힘과 위로를 주는 좋은 말씀이 있어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오늘의 삶에 최선을 다하게 하소서. 그리하면 내일이 두렵지 않겠습니다.” 아멘
하루의 마감과 시작인 기도
-박상대신부-
오늘 복음도 아직은 ’예수님의 가파르나움에서의 하루’(마르 1,21-39)에 속한다. 아직 가파르나움에서의 하루가 끝나지 않은 것이다. 안식일에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거기 있던 악령 들린 사람을 고쳐주신 예수께서 회당을 막 나서시자 하셔야 할 일들이 태산같이 그분을 반겼다. 우선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에 들러서 열병을 앓고 있는 시몬의 장모님을 고쳐주셨고, 해가 저물어 문밖에 모여든 수많은 병자들과 마귀 들린 자들을 치유해주셨다. 늦게까지 일하신 예수께서 잠시 눈을 붙이시고 먼동이 트기 전에 외딴 곳에서 기도하신 후 복음선포의 또 다른 하루를 맞이하셨다.
회당에서의 예배, 예수님의 설교와 구마활동이 끝났을 때가 아마 늦은 점심시간쯤 되었을 것이다. 회당에서 나오신 예수께서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으로 들어가셨다. 생각에 점심을 드실 곳이 마땅치 않아 시몬의 집을 찾아가신 것 같다. 그런데 마침 시몬의 장모가 열병을 앓고 누워있다고 한다. 열병(熱病)이라면 온 몸에 열이 나서 두통, 한기, 식욕부진, 수면부족 등을 증세를 보였을 것이다. 복음을 묵상하다 보면 어떤 장면에 이르러 다음 구절로 넘어가지 못하고 그곳에서 많은 생각에 잠길 때가 있다. 이 구절이 바로 그런 경우이다. 시몬이 누구인가? 이미 결혼을 하여 처자식과 장모까지 변변찮은 어부의 직업으로 먹여 살려야 했던 자가 아닌가? 그런데 그가 동생 안드레아와 함께 갈릴래아 호수에서 그물을 던지다가 웬 낯선 사람의 "나를 따라오너라"(1,17)는 말에 즉각 모든 것을 버리고 사라졌으니, 장모의 마음을 누가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장모가 앓고 있던 열병이 화병(火病)이라는 생각이 든다. 예수께서 아무런 말씀도 없이 "그 부인 곁으로 가서 손을 잡아 일으키시자 열이 내리고 부인은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31절)고 한다.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일까? 두 사람의 마주친 시선과 짧은 접촉은 늘 많은 생각을 주는 장면이다.
해가 지고 날이 저물었을 때에 사람들이 가능한 모든 병자와 마귀 들린 사람을 시몬의 집 앞에 데려왔고, 동네 사람들까지도 모두 모여들었다.(32-33절) 해가 지고 난 뒤에 사람들이 이 일들을 한 것은 그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이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내라"(출애 20,8)는 모세의 율법은 안식일에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어야 하며, 병자들이나 짐을 들것에 실어 옮기지 못하는 등 많은 안식(安息)의 규정을 두고 있다.(예레 17,21-22; 요한 5,10) 그런데 유대인들은 해가 지고 나면 이미 다음 날이 되는 관습을 따른다. 아무튼 예수께서는 자기에게 오는 모든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신다. 우리가 두 손에 무엇을 가득 채우고 있으면 더 받을 수 없으나, 빈손으로 있다면 가득 받을 수 있는 것과 같다. 예수께 몰려온 사람들은 가진 것이 없는 ’빈손의 사람들’이었다.
가파르나움에서의 하루가 저물어간다. 그것은 해가 지고 밤이 와서 그런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하루는 새벽까지 계속된다. 바로 동이 트기도 전, 이른 새벽까지가 예수님의 하루 마감이며, 동시에 새날의 시작이다. 그 기준은 바로 기도이다. 하루종일 가르침과 치유활동으로 지친 몸은 휴식과 잠으로 풀 수 있겠지만, 복음선포의 원동력은 아버지와의 만남과 대화, 즉 기도로 회복된다. 이점을 예수는 잊지 않고 있는 것이다. 기도는 예수님의 복음선포를 견인(牽引)하는 원동력이며, 하루의 마감이자 시작이다. 시몬과 그 일행도 예수님을 찾아다니지만 말고(36절), 제자 됨의 기본인 기도를 배워야 할 것이다
열병으로 누워있었는데(마르1,29-39)
-유 광수신부-
그 무렵 예수께서 회당에서 나와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에 들어가셨다. 때마침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 사정을 예수께 알렸다. 예수께서 그 부인 곁으로 가서 손을 잡아 일으키시자 열이 내리고 부인은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은 악령 들린 사람에게 "조용히 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는 말씀 한 마디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는 놀라운 권능을 드러내셨다. 사람들은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들도 복종하는구나."하며 서로 놀라는 모습을 보았다. 권위 있는 말씀으로 치유받은 더러운 영이 들렸던 사람이 이제부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새로운 인간의 모습을 오늘 복음을 통해서 보여 주신다. 즉 "때가 차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고 말씀하신 대로 회개하고 복음을 믿고 하느님의 나라에서 사는 삶이 어떤 삶인지를 오늘 복음에서 열병으로 누워 있던 부인이 일어나 시중을 드는 모습으로 보여 주신다.
예수님이 안드레아의 집으로 가셨는데 손님을 반갑게 맞이해야할 부인이 열병으로 누워 있는 상황이었다. 일어나서 손님을 반갑게 맞이해야겠는데 몸이 말을 들어 주지 않는다. 참 안타까운 상황이다. 시몬의 장모가 무슨 병으로 열이 나서 누워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지만 분명한 것은 손님이 오셨는데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누워 있다는 것이다. 누워 있다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열병은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게 막는 하나의 악이다.
우리도 열이 나서 자리에 누워 있을 때가 있었는가? 언제 또 무엇 때문에 열병을 앓았는가? 열병이란 단순히 육체적인 병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앓고 있는 열병도 있다. 사랑하는 사람한테 배반당했을 때, 부부 싸움을 했을 때, 믿었던 사람한테 배신당했을 때, 사업에 실패했을 때, 화가 났을 때, 또는 질투심이나 이기심 등 여러 가지 이유로도 열병을 앓을 수가 있다. 아마도 우리는 육체적인 병 때문이 아니라 정신적인 이유로 열병을 앓을 때가 더 많은 지도 모른다. 복음을 보면 제자들도 심하게 열병을 앓고 있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예수님이 수난에 대한 두 번째 예고를 하신 후 제자들이 길에서 누가 제일 높은 사람인가 하는 문제로 서로 다툰 일이 있다(마르 9, 33 참조). 제자들이 높은 자리를 놓고 서로 다투었다는 것은 일종의 시기심, 질투심이요, 그것 때문에 자기들 안에 부글부글 끓고 있는 열병을 앓고 있다는 것이다. 더러운 영은 우리를 열병으로 누워있게 만든다. 정신적인 대부분의 열병은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에 의한 삶을 살지 아니하고 더러운 영의 노예가 되어 생활할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어떤 열병이든 열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은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한다. 그것 때문에 고민하고, 삶의 의미를 상실해 버리고, 만사가 귀찮아진다. 그래서 자리에 눕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악이다. 악은 사람을 점점 더 깊은 구렁텅이로 빠져들게 만들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한다. 그러기에 어떤 열병이든 그것은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가기 때문에 반드시 치유받아야 한다. 따라서 우리 자신이 열병을 앓아서도 안되고, 또 다른 사람이 열병을 앓게 원인 제공을 해서도 안 된다. 이런 모든 악은 하느님이 만들어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 또는 잘못된 주위 환경으로 인하여 생기는 것이다. 아마도 우리 모두는 나름대로 앓고 있는 열병이 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
말씀 한 마디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는 능력을 갖고 계신 예수님이 사람들의 사정 이야기를 듣고 부인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신다. 무심코 읽고 지나칠 수 있지만 그 당시 사정을 안다면 이것은 보통 일이 아닌 굉장히 개혁적인 일이다. 그 당시에 여인의 존재는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였다. 그래서 증인으로 내세울 수도 없었다. 거기에다가 늙고 열병으로 누워있는 보잘 것 없는 여인이라면 얼마든지 무시해버릴 수도 있는 여인을 하느님이신 예수님이 친히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신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이로서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세속적인 견지에서 볼 때에 여러분 중에 지혜로운 사람, 유력한 사람, 또는 가문이 좋은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었습니까?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지혜있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사람들을 택하셨으며, 강하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 또 유력한 자를 무력하게 하시려고 세상에서 보잘 것 없는 사람들과 멸시받는 사람들, 곧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코전1,26)라는 말씀대로 가장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여인을 통해서 당신의 권능을 드러내시는 하느님이심을 보여주신다. 마르코 복음이 모두 600여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100여 문장이 여인에 관한 문장이며 그것도 예수님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에 여인이 등장한다. 그마만큼 예수님은 여인의 위치를 존중해주셨고 잃어버린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성을 되찾아 주셨다. 그리고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하인이 되어야 한다. 사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10,43-35)라고 말씀하신 대로 복음의 가치를 몸소 실천하신다. "때가 차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는 말씀 무슨 뜻인지, 하느님 나라에서의 삶이 무엇인지,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직접 보여 주신다. 복음의 세계는 인간의 세계와는 다르다. 높고 화려하고 힘있는 것을 추구하는 인간의 관점과는 정 반대되는 가장 나약하고 보잘 것 없는 여인을 통해서 당신의 권능을 드러내시고 봉사받는 삶이 아니라 봉사하는 삶의 아름다움을 강조하셨다. 이렇게 인간적인 사고와 가치관에서 복음적인 사고와 가치관으로 바뀔 때 비로소 우리는 복음에 눈을 떴다라고 말 할 수 있고,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삶을 산다고 감히 말할 수 있고, 이 세상에서 우리가 실현시켜야할 하느님의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를 감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복음의 삶을 살 때 비로소 하느님의 나라를 구체적으로 증거할 수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결코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통해서 이루워 지는 것이 아니다. 복음의 삶은 힘있고 가진 이들만이 살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가장 보잘 것 없는 연약한 인간도 실현시킬 수 있고 건설할 수 있는 나라이다. 가장 작은 것이라 하더라도 복음적인 관점에서 볼 때에는 가장 위대한 일이다. 하느님의 나라와 인간의 나라, 열병으로 앓고 있는 병자들이 생활하고 있는 나라와 열병에서 치유되어 일어나 봉사하는 사람들이 사는 나라와는 같은 나라가 아니다. 이런 새로운 삶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이들에게서만이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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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