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들은 '법과 상식이 최고 권력'이라는 말을 자주 한다고 합니다. 법을 만들고 이를 매개로 정쟁을 벌이기도 하지만 최종심판은 법과 상식에 맡기자는 일종의 합의인 셈입니다.
한동훈 법무장관도 장관 후보자 시절부터 "법과 상식에 맞게 나쁜 놈들을 잘 잡으면 된다"라는 말을 자주 했는데 그런 나쁜 놈을 최종적으로 벌하는 것은 사법부입니다. 따라서 사법부에게 최고 가치는 당연히 법이고 상식이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법은 상식이 되지만 상식이 반드시 법이 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곽상도 전 의원의 50억 원이 무죄 판결을 받은 것은 법과 상식의 괴리를 잘 보여준 사례일 겁니다.
첫 월급 15만원을 시작으로 매달 200만 원대의 월급을 받았던 20대 청년에게 주어진 50억 원의 퇴직금은 어떤 경우를 들이대더라도 납득할 국민은 없을 것 같습니다. 누가 봐도 청와대 민정수석인 아버지를 보고 준 돈이라고 생각하는 게 상식입니다.
그러나 재판부는 아버지와 아들은 독립생계이기 때문에 뇌물죄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판결했고, 새로운 뇌물 통로의 지평을 열어준 50억 원 무죄 판결은 대법원 확정판결이 날 때까지 국민들 상식의 돋보기를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별장 성접대 의혹을 받은 김학의 전 법무차관의 해외 출국을 막은 문재인 정부 인사들에게 내려진 법원의 판결도 상식적이지 않습니다.
재판부는 "출국금지 조치는 위법하지만 직권남용은 아니다"라고 밝히면서 "출국금지 조치가 위법하지만 출국 때 수사가 난항에 빠져 필요성과 상당성이 인정된다"고 설명했습니다.
'필요성이 있으면 위법하더라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논리인데, 법을 어겼는데 무죄라는 결정은 ‘술을 마시고 운전했지만 사고를 낸 것이 아니니 음주운전이 아니다’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사법의 역사는 인권과 절차를 중시하며 발전해왔다.
미국 대법원이 흑인과 백인 강제 분리가 합법이라는 원칙을 깨고 ‘흑백의 생활 터전을 분리하는 것은 위헌’이라고 판결한 것이 1954년이다. 그로부터 12년 뒤 경찰이 조사 과정에서 묵비권 등을 미리 고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미국 대법원이 연쇄 성폭행범 어니스트 미란다에게 무죄를 선고한 ‘미란다 판결’이 나왔다.
적법 절차를 강조한 이 판결은 당시 큰 논란을 불렀다. 앞으로 수사가 어려워지고 흉악범들이 처벌받지 않고 풀려날 것이란 비난이 들끓었다. 하지만 그것이 기우였다는 걸 역사는 입증했다.
실제 미란다부터 풀려나지 못했다. 대법원 판결 후 검찰은 목격자 진술 등을 증거로 미란다를 다시 기소했고, 결국 그는 유죄 판결을 받아 10년을 복역했다. 성폭행범이 역설적으로 위대한 판결을 이끌어내 적법 절차를 지키면서도 사법 정의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셈이다.
사법에서 적법 절차를 중시하는 것은 흉악범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강력한 국가권력에 정의라는 명목으로 위법 수단까지 허용하면 언제든 절차를 무시하고 평범한 시민들의 인권을 짓밟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법치주의 핵심은 권선징악이 아니라 적법 절차라고 하는 것이다.
체포나 구속 같은 강제 처분은 반드시 법관의 영장을 받도록 하고(영장주의), 악인을 처벌할 수 있는 유일한 증거라도 위법한 절차를 통해 얻은 것이라면 증거능력을 배제하는 것(위법수집증거배제법칙)도 그런 이유에서다.
그 점에서 얼마 전 ‘김학의 전 법무차관 불법 출금’에 관여한 이들에게 1심 법원이 무죄 판결을 내린 것은 역사적 퇴행이다. 성 접대 등의 혐의를 받던 김 전 차관은 출국하려다 불법적인 방법으로 긴급 출금됐다.
그런데 1심 법원은 긴급 출금의 위법성을 인정하면서도 김씨에 대한 재수사가 임박한 상황이어서 목적의 정당성이 인정돼 직권남용이 아니라고 했다. 목적이 정당하면 어느 정도의 절차적 위법은 눈감아줄 수 있다는 논리다.
그러면서 “김 전 차관 경우는 무고한 일반인의 출국을 저지한 것과 달리 봐야 한다”고 했다. 아무리 흉악범이라도 단죄하는 과정에 적법 절차를 지켜야 한다는 법의 대원칙과 배치되는 판결이다. 사법의 시계를 미란다 판결이 나온 1966년 이전으로 되돌려버린 것이다.
이 판결은 항소심에서 바로잡을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생각을 가진 판사가 한 사람뿐이냐는 것이다. 문재인 정권 초반인 2018년 ‘김명수 사법부’가 구성한 조사위원회는 전임 사법부의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을 조사한다며 법원행정처 판사들의 컴퓨터를 당사자 동의 없이 강제로 개봉했다.
영장 없이 판사 사무실 서랍을 뒤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검찰도 검사 비위를 감찰하다 컴퓨터 등을 조사할 필요가 있으면 수사로 전환해 영장을 받는데 판사들이 그런 절차를 무시한 것이다. 선의로 해석하면 그들도 ‘정당한 목적’을 위해선 그래도 된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기소된 전·현직 법관 대부분이 무죄 판결을 받았으니 이젠 정당한 목적이라고 우길 명분도 사라졌다.
당시 조사위원회 주축 판사들은 진보 성향 판사 모임이라는 국제인권법연구회 출신이었다. 김명수 대법원장도 이 연구회 회장 출신이고, 이 연구회 출신들이 김명수 사법부에서 요직을 독차지했다.
‘불법 출금 무죄’ 판결을 한 판사가 이 연구회 출신은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절차를 깃털처럼 여기는 김명수 사법부 주류들의 인식이 그 판사에게 영향을 미친 것 아니냐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이번 판결을 그냥 넘기기 어려운 이유가 거기에 있다.>조선일보. 최원규 논설위원.
출처 : 조선일보. 57년을 퇴행한 판결, 그 판사만의 생각인가
무슨 일이든 절차를 어기면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든 후유증을 남기기 마련입니다. 예전에 이재명 대표가 허위사실을 공표한 걸로 재판을 받았을 적에 권순일 대법관이 ‘허위사실을 공표한 것은 맞지만 과도하게 얘기한 것이 아니니 무죄’라고 판결하여 한동안 말이 많았었습니다.
이번 김학의 사건에 관한 피의자들에게 내린 판결과 비슷한 맥락일 것 같습니다. 흔히 하는 말로 교회에 헌금하기 위해 남의 돈을 훔쳤다는 것인데 교회에 헌금하기 위한 것이라면 도둑질도 허용이 된다는 얘기 같아 씁쓸하고 걱정입니다. 이제 1심에서 판결이 나온 것이라 앞으로 고등법원, 대법원까지 갈 일이고 최종 판결이 나온 뒤에 다시 얘기가 나오겠지만 법과 상식이 시류에 따라 달라진다면 우리 사회의 정의 자체가 무너지는 것임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초록은 동색'이고 '가재는 게편'이라는 말이 있지만 문재인 정권이 우리 사회에 끼친 해악이 언제 다 해소가 될 수 있을 것인지 걱정일 뿐입니다.
時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