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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07 묵상글 ( 사순 제5주간 목요일. - 하느님을 아는 법.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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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07. 사순 제5주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하느님을 아는 법
사순 5주 목요일-2016
“당신은 누구라고 자처하는 것이오?”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누구신지 밝히라고 이렇게 요구하자
예수께서는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한 다음,
그러니까 당신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한 다음,
하느님을 아는 분이라고도 하십니다.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하지만 나는 그분을 안다.”
그런데 이 말씀이 하느님을 당신만 아신다는 얘기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는 말씀인지 생각게 합니다.
헌데 그렇습니까? 우리도 하느님을 알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도 이제 하느님을 알기는 합니다.
그러나 들어서 아는 것이고 소개로 아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이 전체적으로 하는 얘기는 이런 것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계셨기에 하느님을 눈으로 보고
경험적으로 아는 분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고,
우리는 그 분이 알려주셔서 아는 것이고 알려주신 정도만 아는 겁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아는 것도 전부를 아는 것은 그리스도뿐이시고,
우리는 장님이 코끼리 다리 만지듯 일부를 신비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렇게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아프리카에서 살다가 돌아와 거기서 자기가 만난
아프리카 사람과 아프리카 문화에 대해서 들려줍니다.
그래서 그것을 들은 사람도 자기가 들은 아프리카 사람과 문화를
알기는 알고 결코 모른다고 할 수 없지만 들려준 만큼 알고
결코 경험적으로, 다시 말해서 내가 직접 보고 아는 게 아니지요.
저는 가보고 싶은 곳이 있습니다. 청산도입니다.
제가 아는 사람이 청산도가 참 좋다고도 했고,
옛날 제가 감명 깊게 봤던 서편제의 장면이 청산도 장면이었기에
가보고 싶은 곳입니다.
그런데 <가보다>는 것은 가서+보다는 말입니다.
청산도는 제가 영화 화면으로는 본 곳이지만 가서 직접 본 곳이 아니고,
그곳의 바람을 제 뺨으로 맞고, 그곳의 보리를 제 발바닥으로 밟아보고,
그곳의 골목길과 담장길을 제가 직접 걸어본 것은 아니지요.
우리가 하느님을 아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직접 보신 그리스도만 완전히 아시고
우리는 그분이 들려주신 것만큼만 알고 불완전하게 압니다.
그러면 정말 그렇게 알고, 그 정도만 아는 것입니까?
우리가 하느님을 경험적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겁니까?
아닙니다.
우리 머리로는 다 알 수 없어도 경험적으로는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은 사랑이시니 사랑을 하면 하느님을 경험하는 것이고,
사랑하는 것만큼 하느님을 알게 됩니다.
욕심 없이 사랑하면 더 순수하게 하느님을 알고,
원수까지 사랑하면 더 깊이 하느님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안다는 것은 경험적으로 아는 것이고,
안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이때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의 감성에 젖어있는,
그런 것이 아니라 실천적으로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것을 알려주신 분이 바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께로 가는 길 또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심에 대해 깊이 감사하고,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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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07. 사순 제5주간 목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1오늘의 에페소 평화기도 다락방 말씀 기도와 지향✝️
2022년 4월 7일 목요일
✝️ 1교부들의 말씀 묵상✝️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이제 우리는 당신이 마귀 들렸다는 것을 알았소.”(요한 8,52)
죽음에 매달리는 적대자들
선한 이들은 나쁜 일을 당하면 더 나은 이가 되고, 저주받은 이들은 호의를 입고 나면 언제나 더 나쁜 자가 되고 맙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선포를 듣고 나서, 아까 했던 것과 같은 말을 합니다.
“이제 우리는 당신이 마귀 들렸다는 것을 알았소" 그들은 이것이 그들이 매달리고 있는 죽음이라는 것을 모른 채 영원한 죽음에 매달렸습니다.
-대 그레고리우스-
✝️ 1성인 / 영적 글 묵상✝️
말씀의 불꽃(거룩한 독서(Lectio Divina)에 관한 이야기 / 프랑스와 까생제나-트레베디
대성당을 위한 돌 하나
그대는 혼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대는 성경 의미에 대한 탐구라는 이 거대한 작업에서 첫 사람도 아니요 마지막 사람도 아니기 때문에, 그대에 앞서, 그대와 동시에, 그대 뒤에. 동일한 이 거대한 책에 질문을 던지는 모든 사람과 고요히 형제같이 지내기 때문에. 그대는 자신의 거룩한 독서의 존엄성과 중대성을, 심지어는 그 필수성을 쉽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107)
✝️ 1에페소 평화기도 다락방 4월 성령 열매성월 1주간 온유 /절제✝️
금주간 성서읽기 사도 2장-6장
✝️ 1목요일 성모님의 날✝️
<파티마의 성모 마리아와 목동 / 세 바르따스>
어린 세 친구
경건하고 부지런한 두 가족
세 아이의 모습과 성품
루치아는 나이로 보아서냐 성실함에서나 세 아이들 중에서 제일 어른스러웠다. 당시 만 열 살이 되었고 건강한 체격이었으며 한 살 아래의 프란치스꼬보다 크지는 않았으나 보통 정도는 되었다.
많이 그을어 까무잡잡한 얼굴, 진한 눈썹 밑에 약간 불만을 띤 눈으로 똑바로 보는 눈길, 때때로 반쯤 열린 큰 입, 두툼한 업술, 얼핏 보기에 이 소녀는 시골뜨기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사람들을 혼동시키는 그 용모가 한몫을 하여 지니고 있지도 않은 좋지 못한 성격을 드러내는 것같이 보이게도 한다.
머리는 가운데서부터 두 갈래로 갈랐고 두건 - 소위 말하는 벨라뎃다의 피레네 두건과 비숫한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두건 - 을 쓰기도 했다.
주일에는 가로 무늬나 바둑판 무늬의 밝은 색깔의 조끼를 입었고 두툼하게 주름잡힌 플란넬의 스커트가 발목까지 덮였으며 갱을 박은 큰 구두가 보인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당신의 심부름꾼으로 무작정 짧은 옷을 입고 파마를 즐기는 현대적인 아이를 선택하지 않으셨다. 겸손과 단순은 성모님께서 제일 좋아하시고 마음에 들어하시는 옷차림이다.
루치아는 쉽게 정에 기우는 성질도 아니고 사람에게 아양떠는 성격도 아니였으니 그녀는 사촌 동생 히야친따를 너무 과민하다고 나무라기까지 했다.
그렇지만 인정이 많았고 자신을 사랑하게 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 증거로 사촌들은 그녀가 없이는 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루치아가 친히 고백한 것처럼 1917년의 발현이 그녀와 사촌들의 사이를 아주 친밀하게 하였고 떨어질 수 없게 만들었으나 그 전까지는 다른 아이들보다 프란치스꼬와 히야친따와 더 친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히야친따의 감수성이 예민하고 좀 뽐내는 듯한 성격을 싫어하였다. 루치아에게는 순종, 겸손,숙고, 과묵 등 성실한 성격이 두드러졌다.(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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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수도회 한국관구
에페소 기도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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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07. 사순 제5주간 목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순대국밥 집에 간 적이 있습니다. 메뉴판을 보는데 순대국에도 종류가 있더군요.
순대국 7,000원, 순대국(특) 8,000원, 순대국(스페셜) 12,000원.
여러분은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메뉴에도 마케팅 효과가 적용된다고 합니다. 스페셜 순대국은 원래 먹으려는 순대국보다 5,000원이나 비싸고, 순대국(특)은 1,000원밖에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조금 특별한데 5,000원이 아닌 1,000원의 차이니 대부분 일반 순대국이 아닌, 순대국(특)을 주문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미끼효과’라고 하더군요. 순대국(스페셜)을 넣음으로 인해, 순대국(특)의 판매를 늘렸던 것입니다.
대부분 사람은 스스로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논리적이지도 또 합리적이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순간의 감정에 더 크게 영향을 받습니다. 이런 심리를 이용하는 마케팅에 적용하는 예는 너무나도 많다고 하더군요. 똑똑하다고 여기고 잘난 척을 많이 해도 이런 심리 전략에 너무 쉽게 넘어가는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얼마나 부족한 존재인가요? 이러한 부족함에서도 계속해서 남을 향한 판단과 단죄를 멈추지 않는 교만으로 가득한 우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라고 강조해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께 철저히 순명하신 것 같이 사람들에게 당신의 말씀을 지키는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은 세상 사람들이 물들어 있는 죄를 없애는 해독제와 같습니다. 그런데도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서 오히려 마귀 들렸다면서 빈정대고 있습니다. 이렇게 세속적으로 생각하는 그들과 영원한 구원을 위해 말씀하시는 예수님과는 대화가 통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일들에서 충분히 하느님의 영광이 보임에도 믿지 않는 그들의 불신앙이 자기들이 정의한 신성모독이라는 이유로 돌을 집어 듭니다. 구원으로 이끌어줄 하느님께 오히려 돌을 집어 든다는 것이 오히려 더 큰 신성모독이 되고 맙니다.
부족한 존재인 인간이면서도, 다른 이를 향해 끊임없이 자기 입장으로 판단하고 단죄하는 우리입니다. 그 순간에는 정의라고 말하지만, 오히려 불의일 때가 더 많았음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잘못된 판단과 단죄가 하느님의 뜻과 정반대가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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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를 잘 살면 어제는 행복의 꿈이 되고, 내일은 희망의 비전이 된다(산스크리트 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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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0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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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07. 사순 제5주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요한 8,51)
예수님께서는 그제와 어제 복음에서, 당신의 신원과 당신의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당신께서는 ‘위에서 오신 분’으로서 당신 말씀을 지키는 이는 생명을 얻고 자유롭게 될 것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을 마귀 들렸다고 비방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요한 8,51)
여기서, “내 말을 지키는 이”란 곧 말씀을 진리로 믿고 받아들여 실천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보호를 받을 것입니다.
<잠언>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혜를 저버리지 마라. 그것이 너를 보호해 주리라.
지혜를 사랑하여라. 그것이 너를 지켜 주리라.”(잠언 4,6)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을 지키고 실행하는 것이 곧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계명을 받들어 지키는 사람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요한 14,21)
그리고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라는 말은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벗어난 ‘영원한 생명’을 말합니다. 이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뒤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오직 한분의 참된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또한 아버지께서 파견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4,3)
하지만, 완고한 유대인들은 여전히 아버지도 그리스도도 받아들이지 않고 알아보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채, 아브라함도 예언자들도 모두 죽었음을 들어 반박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말씀하십니다.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요한 8,58)
여기서, “태어나기 전”은 지나간 시간을 나타내고, “전부터 있었다.”는 현재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전에도 계셨고 후에도 계십니다.’ 곧 항상 현재로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에 있었다.”고 하지 않으시고,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곧 당신께서는 시간과 관계없는 지속적인 현존이심을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언제나 존재하시며, 언제나 우리보다 앞서 다가오시고, 먼저 건네주십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의 사랑은 언제나 앞서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펼치시는 이 사랑의 드라마, 이 구원의 드라마에서 그 어느 것도 우리를 떼어놓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 말씀을 지키게 하소서. 늘 함께 하는 당신 사랑을 지키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요한 8,51)
주님!
당신 말씀을 지키게 하소서.
뼈 속에 새겨진 말씀이 심장에 와 타는 불이 되게 하소서.
말씀의 바퀴가 제 삶을 굴리게 하소서.
저를 지키는 당신 사랑 따라 말씀을 지키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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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07. 사순 제5주간 목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의 권위 아래서
창세기를 보면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2,7).고 적고 있습니다. 사람이 있기 전에 생명의 숨이 있었고 그 숨을 통하여 우리가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사람보다 앞서신 보이지 않는 분이 생명을 불어넣지 않으면 흙의 먼지로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숨을 받아 생명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고,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습니다’(요한1,1-2). 그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요한 1,14). 그렇다면 그분은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계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완고하고 편협한 믿음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심지어 죽이려 하였습니다.
유다인들은 아브라함을 권위가 있는 분으로 존경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미지의 세계로 떠났고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있었다.’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러니 유다인들에게는 조상에 대한 모욕이고 신성모독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들은 지금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음을”(히브11,3)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사실 내가 모르는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 것을 먼저 내려놓고 가르침을 받아들이면 주님을 더 깊이 알게 되고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줄 것입니다”(필리4,6-7). 따라서 주님의 권위를 받아들임으로써 생명을 풍요롭게 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돌을 들어 던지려 할 때 그들과 맞서지 않으시고 몸을 숨겨 성전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억지를 이기는 길은 잠시 여유를 주는 것입니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입니다. 때를 기다리며 자리를 비켜주는 모습은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서로의 격한 감정을 삭이기 위해서는 때로 자리를 뜨는 것도 약입니다. 서로의 관계 안에서 서로의 다른 점을 인정한다는 것이 말같이 쉽지 않지만 그래도 끊임없이 노력해야 할 부분입니다. 마음이 흔들릴 때에는 잠시 주님과 함께 자리를 비우십시오! 예수님과 함께하는 이는 그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으며 죽음마저 극복하는 진정한 해방과 행복을 만끽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영광과 명예에 얽매여 살지 않으셨고 오직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사셨습니다. 우리도 아버지 하느님과 아들 예수님의 완전한 통교 안에 초대받고 있음을 결코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나를 만드셨으니 누구보다도 나를 잘 아십니다. 나보다 더 나를 잘 아시는 주님의 권위 앞에 머리 조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우리를 아시듯 우리도 주님을 알아야 합니다. 단순히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삶,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그분의 사랑을 아는 방법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실천하는 만큼 그분을 알게 됩니다. 그분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머리만이 아니라 가슴으로 주님을 아는 사람이 되어 그분과 더욱 친밀해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일이 때로는 인간적인 좌절과 실패를 느끼게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차지하면 결코 실패가 아닙니다. 그것은 잠깐 지나가는 세상의 성공에 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권위도 중요하지만, 하느님의 권위 앞에 순명한 아브라함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을 통하여 하느님을 보아야 하고 주님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부디 세상의 권위를 쫓지 말고 천상의 권위에 머물러 기쁨과 평화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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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07. 사순 제5주간 목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믿음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아브라함과 이벽의 경우
아브람은 칼데아 우르에서 살다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들었습니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창세 12,1). 그 고향과 집은 수메르 문명이 번성하던 곳이었고 인류 역사의 초기 문명을 대표할 만한 사회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까지 인류는 종교적인 문화양식을 갖추기는 했지만 그것이 인간의 상상력과 영감으로 고안해 낸 것이어서 하느님께서 보시기에는 당신의 거룩한 뜻을 담기에는 터무니없이 모자란 탓에 우상숭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상숭배적 종교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참된 신을 찾고 있던 아브람에게 처음으로 말을 건네셨습니다. 그것이 방금 소개해 드린 부르심의 말씀입니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은 아브람이 그 말씀을 알아 듣고 고향과 집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하느님의 역사가 이렇게 하여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독서에 보면, 그런 아브람에게 하느님께서 다시 말씀을 건네시고는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아브람과 계약을 맺으시는 하느님의 조건은 쌍무적인 것이었는데, 하느님께서는 아브람과 그 후손들을 늘어나게 해 주실 뿐만 아니라 보호해 주시겠다고 하셨고, 아브람과 그 후손들은 하느님을 섬기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그 계약의 표시로 두 가지를 명하셨는데, 하나는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꾸라는 것과 할례를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새 이름과 할례로써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이 인류 역사에서 생겨난 표시가 되었습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서 하느님과 맺은 이 계약은, 모세를 통해 하느님과 맺은 시나이 계약으로 구체화되었고, 다윗을 통해 하느님과 맺은 시온 계약으로 더욱 구체화되어 나갔습니다. 이러한 계약의 흐름은 예수님께서 세상의 죄를 없애기 위하여 열두 제자와 맺으신 성체와 성혈의 계약으로써 집대성되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신원을 일찌감치 알아본 구약의 마지막 인물이 세례자 요한인데, 예수님의 공생활이 시작되기도 전에 그는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다”(요한 1,29).
교회는 성체성사를 거행함으로써 이 계약을 상기시키고 갱신하며 계승합니다. 새롭고 영원한 이 계약을 맺으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당신 몸을 내놓으셨고 당신 피를 흘리실 각오를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계약에서는 빵을 당신 몸이라, 포도주를 당신 피라 부르시면서 앞당겨 일치를 시키셨습니다. 빵에 떼어 나누어지듯이 당신 몸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을 맞이할 것이며, 포도주가 나누어지듯이 당신 피가 창에 찔린 옆구리에서 흘러나오리라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이 성체성사는 예수님께서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세우신 계약입니다. 당신 제자들로 하여금 당신의 삶을 기억하여 계승하게 하기 위한 계약이었던 것이요, 이 제자들이 이미 저질렀던 죄를 용서해 주시는 한편 세상의 죄에 대해서도 물들지 않기를 바라는 뜻으로 세우신 계약이었던 것입니다.
이 계약을 염두에 두시고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이시요, 생명의 물이심을 밝혀주셨으며, 간음하다 끌려온 여인의 죄를 관대하게 용서해 주시는 사랑의 심판으로 하느님의 자비를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이 그 옛날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으신 흐름의 결정판이었던 겁니다. 아브라함 시대에도 하느님 곁에 계셨던 예수님께서는 그 첫 계약에서도 이 빵과 물과 자비의 은총을 베풀고 계셨으며, 때가 차자 드디어 당신이 직접 당신 백성에게 오셔서 인류가 하느님과 제대로 관계를 맺는 길을 알려주고 계시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기적을 보며, 그분의 용서를 체험하면서도 유다인들은 그분께서 천지 창조 이전부터 계신 분이라는 신성과 선재성(先在性)을 짐작할 수도 없었기에 예수님을 오해했고 돌을 던져 죽이려고 했으며, 결국 아브라함 이래의 계약을 계승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람에게 일어났던 다행스런 일이, 그리고 하느님의 섭리로 세례자 요한에게도 일어났던 은총스런 일이 일어나서 리스도 신앙의 진리가 이 땅에 오묘한 섭리로 들어오던 18세기 무렵에 예수님을 알아본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이벽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 당시 조선 사회의 무신론적 성리학 사조와 무지막지한 신분차별에 염증을 느끼던 차에 조상들로부터 천주학 서적을 물려받아 마음껏 독서하며 탐구할 수 있었던 이벽은 세례를 받기도 전에 천주교 교리에 통달함은 물론 스스로 신앙의 수련을 쌓아 나가고 있었습니다. 그가 사문난적의 사상통제를 뚫고 같은 처지에서 개혁의 열망을 품고 학문에 정진하고 있었던 구도적 선비들과 함께 한국교회는 선교사 없이 자생적으로 생겨날 수 있었습니다. 이런 기적적인 오묘한 섭리에 담긴 뜻은 분명합니다. 즉, 이스라엘 민족에게 믿음의 조상이 된 아브라함에게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한국교회의 창립 주역이 된 이벽에게 있어서도 믿음은 하느님의 부르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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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07. 사순 제5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시간을 직선으로 보는 관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관점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과거는 지나간 시간이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고, 지금은 현재입니다. 저도 직선의 시간에 익숙해져있습니다. 사무실에는 탁상용 달력이 있습니다. 달력에는 지나간 일정이 적혀있습니다. 지나간 일정을 보면서 제가 만났던 사람, 제가 했던 일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달력에는 앞으로의 일정도 적혀있습니다. 그것을 보고 해야 할 일을 준비합니다. 비행기 표를 예매하기도 하고, 서류를 준비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직선의 시간 속에서 ‘생, 노, 병, 사’의 과정을 경험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유대인들도 직선의 시간을 이야기합니다. 아브라함도 죽었고, 예언자들도 죽었다고 이야기합니다. 들판에 있는 묘지는 직선의 시간을 살다가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보여줍니다.
시간을 순환으로 보는 관점도 있습니다. 직선으로 자라는 나무에는 원으로 자라는 나이테가 있습니다. 나이테가 있기에 나무는 곧게 자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순환하는 시간을 계절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은 매년 우리를 찾아옵니다. 일출과 일몰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낮과 밤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순환도로와 순환지하철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순환하는 시간은 흘러가는 직선이 아닙니다. 순환하는 시간은 끊임없이 돌아오는 곡선입니다. 교회의 전례는 순환하는 시간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대림을 통해서 2000년 전에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립니다. 사순을 통해서 주님의 수난을 기억합니다. 주님의 십자가와 죽음은 나를 구원하기 위한 희생임을 생각하며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듯이, 주님을 믿는 우리들도 부활하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땅과 후손’을 약속하십니다. 그 땅과 후손은 직선적인 시간에서의 땅과 후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면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땅과 후손입니다.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거룩함이 드러나는 땅입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면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후손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계절이 매년 바뀌면서 우리에게 오듯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면,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면 우리가 머무는 곳은 하느님의 나라가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이야기하십니다. 그것도 직선으로 이어지는 영원한 생명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생명은 모두 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야기하시는 영원한 생명은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 하느님 집 앞에서는 하루가 천년 같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삶은 순간도 영원과 같습니다. 바로 그런 삶을 꿈꾸면서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 하신 말씀은 우리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우리의 물리법칙에 따라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과 관계의 관점에서는 가능한 일입니다. 긴 겨울을 참아내며 꽃을 피워내는 나무처럼, 신앙인들은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의 꽃을 피워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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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07. 사순 제5주간 목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수님은 누구인가?
- 아브라함 전부터 계신 “늘 봄”같은 예수님 -
예수님은 누구인가?
우리의 평생 화두와 같은 물음입니다. 요즘 계속되는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신원에 관한 내용들입니다. 적대적인 유다인들과의 대화를 통해 분명히 드러나는 예수님의 신원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지킬 때 우리는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죽음을 넘어 영원한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후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우리의 삶이 그대로 그 좋은 증거가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 못한 유다인들에 대해 예수님은 거듭 아버지와의 유일무이한 관계를 밝히십니다.
“나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하지만 나는 그분을 알고 그분의 말씀을 지킨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고 기뻐하였다.”
시공을 초월하여 아버지와 깊은 친교는 물론 아브라함과의 관계도 언급하십니다. 새삼 하느님을 알기 위해서 할 일은 그분의 말씀을 지키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의 아브라함이 내다 본 기쁨과 희망이 예수님에게 완전히 실현되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에서는 하느님과 아브라함의 친밀한 관계가 잘 드러납니다. 늘 하느님과 기도의 소통중에 살았던 아브라함이었습니다. 오늘 아브라함은 나이 아흔아홉 살이 되었을 때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바로 오늘 독서 앞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나는 전능한 하느님이시다. 너는 내 앞에서 살아가며 흠 없는 이가 되어라. 나는 나와 너 사이에 계약을 세우고,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겠다.”
‘하느님 앞에서 살아가며 흠 없는 이가 되는 일’ 역시 우리의 일임을 깨닫습니다. 아브람이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자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며 계약을 맺으십니다.
“나를 보아라. 너와 맺은 계약은 이것이다. 너는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 너는 더 이상 아브람이라 불리지 않을 것이다. 이제 너의 이름은 아브라함이다. 내가 너를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아브라함과 계약을 통한 약속이 오늘 복음의 예수님을 통해서 결정적으로 실현되었음을 봅니다. 믿는 이들 모두가 예수님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 닿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다음 유다인들과의 문답에서 예수님의 신원이 다시 결정적으로 드러납니다.
“당신은 아직 쉰 살도 되지 않았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다는 말이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영어로 하면 예수님이 신원을 단박 알아챌 수 있습니다. “Before Abraham came to be, I AM”, 바로 예수님이 태어나기 전에 있었던 하느님과 같은 신적 존재 하느님의 이름 “나는 있다(I AM)”를 지닌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성자 예수님께서 창조 이전부터 존재하심을 드러내는 말씀으로 그리스도의 신적 선재先在가 시사된 셈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시간의 지배속에 두지 않고 하느님의 영원, 곧 영원한 현재 속에 두고 표현합니다. 현재에서 영원을 사신 예수님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시공을 초월하여 맨처음부터 지금까지 꿰뚫어 바라보고 계신 ‘영원한 현재’의 하느님 같는 분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유다인들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이라 하며 예수님께 돌을 던지려 하였고 예수님은 성전 밖으로 피신합니다.
대부분 학자들은 이런 예수님의 신적 신원이 부활후에야 이뤄진 일이라는 데 동의합니다. 그러니 오늘 복음은 당시 요한 교회 공동체의 믿음을, 즉 하느님과 같은 신적 존재인 파스카 예수님의 신원을 반영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유다 회당으로부터 쫓겨난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믿고 따르는 파스카의 예수님은 아브라함 이전에 선재했던 하느님과 같은 하느님 이름, “나는 있다(I AM)” 같은 분임을 깨닫게 됩니다. 마태복음 마지막 주님의 말씀도 이를 분명히 합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And behold, I AM with you always, untill the end of the age).”(마태28,20ㄴ)
늘 하느님의 현존으로 우리와 함께, 우리를 위해 계시겠다는 파스카의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이런 파스카 예수님과의 관계가 우리의 영성생활에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아브라함과 하느님과의 한없는 깊이의 사랑과 신뢰의 관계, 예수님과 하느님 아버지와의 한없는 깊이와 사랑과 신뢰의 관계를 우리는 파스카 예수님과의 관계를 통해 성취하게 됩니다.
며칠 전 주문했던 새책을 받고 참 행복했습니다. 새책을 받을 때마다 느끼는 행복감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이렇게 설레는 기쁨으로 새날을 선물받는 행복한 느낌이라면, 심지어 죽음의 날도 새날을 선물받는 행복한 느낌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묵상을 했습니다. 바로 파스카의 예수님과 늘 함께 일치의 삶을 살 때 가능한 일이 겠습니다.
저는 요즘 이런 분들을 만났습니다. 나이에 관계 없이 영원한 젊음을, 영원한 현재를 사는 분들입니다. 바로 86세 고령의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그런 분이고, 83세 고령에도 왕성한 활동에 “당신을 생각합니다”라는 책을 출간하신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의 노트커 볼프 아빠스님이 그런 분이고, 또 78세 고령에 수술후의 불편한 몸에도 왕성한 활동에 “꽃 잎 한 장처럼” 신간을 출간한 이해인 수녀님이 그런 분입니다. 참으로 우리를 부끄럽게 하고 부단히 분발케 하는 하느님의 사람들입니다.
이해인 수녀님의 책 서두 한 장에 씌어 있던 문구도 선명히 기억합니다.
“오늘을 처음인 듯, 마지막인 듯 살아가는 간절한 마음이 갈수록 더 필요하다.”
유명한 나태주 풀꽃 시인의 추천의 글도 좋았습니다. 더불어 얼마전 읽은 나태주 시인의 “그저 봄”이란 짧은 시도 생각납니다.
“만지지 마세요.
바라보기만 하세요.
그저 봄입니다.”
봄꽃들 만개한 파스카의 봄입니다. 계절의 “봄”이요 눈으로 가만히 응시하는 “봄”입니다. 봄의 봄입니다. 고故 문익환 선생의 호는 “늦봄”이었는데 예수님의 호는 “늘봄”으로 정해 드리고 싶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하루하루 날마다 파스카의 봄을 봄으로 하루하루 “늘봄”의 행복한 새날을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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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07. 사순 제5주간 목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허상을 좇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
우리는 눈만 뜨면 무엇인가를 찾고 성취하려고 열심히 생각하고 움직인다. 그러나 정작 찾고 있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지, 찾아야 할 것을 찾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왜 찾는지, 찾는 나 자신이 누구인지, 찾고 있는 것이 하느님 안에서 의미 있는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의식이 없이 부산하게 움직인다면 그것은 허상(虛像)을 좇는 일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유다인들의 태도를 통해 헛걸음, 헛손질하는 인생이 되지 않도록 영의 눈을 떠보도록 하자.
앞 대목에서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아브라함의 참된 자손이라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당신의 말씀 안에 머무르며, 하느님에게서 들은 진리를 말하는 당신을 받아들이고 사랑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으니 ‘악마의 자식’(8,44)이라고 선언하신다(8,31-47). 그러자 오히려 그들은 예수님을 ‘사마리아인이고 마귀 들린 자’라고 비방한다(8,48). 그들은 자기 조상이 아브라함이라는 데 근거하여 아버지는 한분이신 하느님이시며 자신들이야말로 사생아가 아닌 적자이며, 오히려 예수님이야말로 사마리아 사람이요 마귀 들렸다고 항변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마귀 들린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이요 자신의 영광을 찾지 않는다고 반박하신다.
이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8,51)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을 듣고 있던 유다인들이 아브라함도 죽고 예언자들도 그러하였는데 그런 말을 한다며 예수님을 마귀 들렸다고 비난한다(8,52). 그들은 예수님께 이미 죽은 아브라함이나 예언자들 보다 더 훌륭할 수 없다며 도대체 누구로 자처하느냐?” 하고 대들었다(8,53). 예수님께서는 이 질문에 당신의 신원을 분명히 밝히신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되었으며’(8,42), “나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분은 내 아버지, 하느님이시다.”(8,54)라고 하신다. 나아가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8,58)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에 유다인들은 더욱 더 분노한다.
유다인들의 태도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그들이 예수님께 이런 극단적인 적대감을 보인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그들의 그릇된 하느님 상에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기에 아브라함의 유일한 하느님은 곧 당연히 선택받은 민족인 자신들의 하느님이시라 믿었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했던 하느님은 자신들의 상념과 자신들의 민족적 우월감에 갇혀 있는 존재로서 말씀과 진리와 사랑이신 하느님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들은 스스로 하느님께로부터 축복받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생각했으나 아브라함과는 달리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도 않았고 그분의 계획을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그들은 실제로는 하느님을 생각만 했지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다.
유다인들과는 달리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알며, 그분의 말씀을 지키심으로써(8,55) 하느님 안에 머무셨고 온전히 일치되셨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안다는 것은 하느님과의 관계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말씀을 지켜나간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간직하고, 그 말씀의 요구를 행동하는 실천으로 채우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유다인들처럼 완고하고 굳은 마음으로 하느님을 생각 안에만 가두는 이들은 자신과 하느님 사이에 건널 수 없는 다리를 놓는 셈이어서 하느님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존재가 되고 만다. 유다인들의 문제는 하느님을 자신들의 도구화, 이기적 대상화한 것이었다.
오늘날 정보사회에서는 다양한 삶의 양식, 개별성의 존중, 다종교, 다문화가 일상적인 삶의 모습이 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하느님의 뜻을 중심에 두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하느님 중심의 삶보다는, 자신의 뜻에 하느님을 맞추고 자기 이익을 위해 하느님을 이용할 때가 적지 않다. 또한 자신의 생각대로 결과가 나타나지 않으면 모든 것을 부정해버리기도 한다. 이 사순절에 잠시 멈추어 나는 어떤 하느님상을 지니고 살아가는지 깊이 성찰해볼 필요가 있다. 나아가 일상의 삶에서 자신의 뜻과 생각을 앞세우지 말고 주님께서 나의 삶에 개입하실 여백을 마련하는 지혜가 참으로 중요한 때인 듯싶다. 유다인들이 격앙하여 예수님을 죽이려고 들었던 돌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있지는 않은지 성찰해보았으면 한다. 오늘도 유다인들처럼 하느님을 내 생각 속에서 만들어내거나 생각 속에 등장하는 가상의 하느님에 만족하면서, ‘허상(虛像)을 좇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도록 의식을 깨우는 복된 날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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