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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오디오와 컴퓨터 원문보기 글쓴이: 管韻
연경당(演慶堂)
애련지를 지나서 안쪽으로 들어서면 또 다른 작은 연못이 나오고 이곳 북쪽 터에 연경당(演慶堂)이 자리를 잡고 있다.
지금의 연경당은 순조 28년 (1828)에 당시 왕세자였던 효명세자의 청으로 사대부집을 모방하여 궁궐 안에 지은 이른바 120칸 규모에 단청을 하지 않은 집이다.
효명세자는 순조 9년에 태어나 순조 27년 왕명으로 대리청정(代理聽政)을 하다가 순조 30년(1830)에 세상을 떠났다. 그 뒤 아들이 헌종으로 즉위하자 왕으로 추증되어 익종(翼宗)으로 종묘에 봉향되었는데 연경당은 바로 익종의 대리청정 때 창덕궁 안에 지은 것이다. 창덕궁 안에 지은 유일한 민가형식의 건물로 사랑채의 당호(堂號)가 연경당(演慶堂)이다.
'동궐도(東闕圖)'를 보면 애련지(愛蓮池)와 연경당(演慶堂) 앞쪽의 작은 연못 사이에 "어수당(魚水堂)"이라는 편액을 건 정면 4칸, 측면 2칸 되는 팔작 기와집이 한 채 있었고, 또 연경당 자리에는 지금의 연경당과는 다른 'ㄷ'자 평면의 연경당과 개금재(開錦齋), 그리고 행랑에 우뚝 선 장락문(長樂門)이 있었던 것을 볼 수 있다.
이 기록을 참고해 보면, 본래의 연경당과 개금재 터에 현재의 연경당을 지으면서 당호와 문 이름을 그대로 따온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연경당의 구조
연경당은 입구에서부터 연경당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이 심상치 않은 상징성을 지니고 있을 것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연경당 행랑채와 내당(內堂)으로 통하는 수인문(修仁門) 그 가운데 우뚝 선 솟을 대문인 장락문(長樂門) 밖은 행랑 바깥 너른 마당이다.
사대부 집에서는 대개 줄행랑과 솟을 대문 밖 넓은 터에 큰 느티나무가 있어 여름철이면 매미를 불러들이고, 매미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무더운 여름철을 보냈다.
이곳 연경당에서도 그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여 큰 느티나무를 한그루 심고 주변에 도랑과 다리 그리고 석함, 대석 등의 석물들을 늘어놓았다.
월궁 항아의 화신-석분의 두꺼비
서쪽에서부터 동쪽으로 꺾이어 문 앞을 흐르는 물은 서류동 입하는 명당수이며, 이 명당수를 건너는 작은 돌다리도 놓여 있다. 장락문 앞에 있는 괴석은 받침대의 예술성이 돋보인다. 사면에 꽃무늬가 있고, 윗면 네 모서리에는 두꺼비들이 기어 다니는 조각이 들어있다
안쪽으로 들어가는 놈이 있는가 하면 바깥으로 기어 나오는 놈이 있다.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곧 가만히 그 자리에 놓여 있는 괴석과 석함에 움직임의 요소를 줌으로써 정적 공간을 동적 공간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이 두꺼비는 석수의 장난기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심오한 상징성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오경통의(五經通義)>에 의하면 달에 토끼와 두꺼비가 있는데, 토끼는 음이요 두꺼비는 양이라 하였다. 그리고 중국의 오제(五帝)전설 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태양의 어머니 신인 희화는 열 개의 태양을 낳았고 다른 부인 상희는 열두 개의 달을 낳았다. 희화는 동쪽바다 탕곡이라는 곳에 살면서 열 개의 아들인 태양을 매일 아침에 하나씩 말끔히 씻어 내보냈다.
나머지 아들인 아홉 개의 태양은 그곳에 있는 부상(扶桑)이라는 거목에 저마다 집을 짓고 순번을 기다려야 했다. 그래서 이들은 열흘에 한차례씩 집에서 벗어나 넓은 천지를 날아갈 수 있었다.
차례를 기다리는 것이 불만이었던 아들들은 어느 날 반란을 일으켜 동시에 하늘로 뜨고 말았다. 열 개의 태양이 일제히 내리비치는 햇살은 더 이상 빛이 아니었다.
그 열기는 하늘과 땅과 바다를 한 덩어리의 불기둥으로 만들어 모든 생물들을 사경에 몰아넣었다. 이를 본 천제(天帝)는 활 잘 쏘기로 이름 난 예를 불러 해를 쏘게 하였다.
화살을 맞아 떨어진 태양을 보니 세발 달린 까마귀였다. 예는 하늘에 어지럽게 뜬 많은 태양을 활로 쏘아 떨어뜨려 지상의 환란을 해소한 공으로 서왕모로 부터 불로불사약(不老不死藥)을 하사받았다. 그러나 그의 아내 항아가 그것을 몰래 훔쳐 먹고 월궁으로 도망쳤다.
그 후 항아가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전하는 말이 구구했다. 달에 도착하자마자 월신의 노여움을 받아 두꺼비로 되었다고 하고, 남편을 배반한 죄를 치루고 신선처럼 살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쨌든 옛 사람들을 달을 선궁(仙宮)으로 생각했고 , 그 속에서 신선처럼 살기를 원했다. 이밖에 해와 달에 얽힌 전설로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전하는 연오랑과 세오녀 이야기가 있고 두꺼비를 달의 화신으로 표현한 예는 고구려 벽화무늬의 일월상도(日月象圖)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대조전 뒤뜰의 굴뚝에 토끼가 새겨져 있고, 경복궁 교태전 뒤뜰의 석연지에는 두꺼비가 새겨져 있다. 연경당 안채가 그렇고, 왕비의 침전인 경복궁 교태전이나 창덕궁 대조전이 그렇듯이 두꺼비나 토끼형상을 새겨 놓은 곳은 모두 여성들의 생활공간이다.
해가 남성이라면 달은 여성이다. 달은 월궁이라 하여 거기에는 광한전이라는 궁전이 있고, 그 속에서는 모든 근심과 걱정을 잊고 사는 신선들이 있다고 믿었다.
그런 선계에 올라가 항아처럼 살고 싶은 것은 뭇 여성들의 간절한 소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월궁에 가서 산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래서 묘안을 생각해 냈다. 현재의 생활공간을 월궁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요소요소에 두꺼비와 토끼장식을 베풀어 지금 거처를 지상의 월궁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이 석함의 동북쪽에 서 있는 팔각형 단면의 석주 모양인 대석은 축우기를 받치던 석문의 하나이다.
측우기는 단면이 둥근 원통이기 때문에 이 대석의 팔각형 평면 안쪽으로 둥글게 홈을 파서 측우기를 올려놓았을 때 움직이지 않게 하였다.
서류동입하는 명당수와 금천교
연경당의 대문인 장락문(長樂門)으로 들어가려면 작은 개천에 놓여 있는 돌다리를 건너야 한다. 이 돌다리는 연경당 서북쪽 골짜기에서 흘러오는 물을 , 일단 서쪽 행랑채의 마당 밑으로 끌어들였다가, 다시 서쪽 행랑채 밑에서 작은 개천으로 끌어내어, 동쪽으로 꺾이면서 행랑채 앞을 흐르게 만들어 놓은 개천 위에 놓여 있다.
이 작은 개울은 연경당 남쪽 넓은 터로 완만한 곡선을 그으며 흘러가서, 앞서 지나온 작은 네모 연못으로 숨어 들어간다. 이렇듯 이 집의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서입동류(西入東流)의 개천은 곧 연경당의 명당수이다.
앞서 지나온 네모 연못은 그 남쪽인 주작(朱雀)인 셈으로, 집 남쪽에 연못이 있으면 집안이 길하고 부를 누리게 된다는 풍수도참설에 근거한 연못이다.
물의 흐름은 직선적이 되어서는 안된다. 물은 유연하여야 한다. 대문에 물을 흘려보내는 작은 도랑, 개천 등은 유연하게 흐르도록 하고 그 가장자리를 마감하는 장대석들도 필요한 곳에서는 휘어지게 다듬는 것이다.
연경당에서도 개천 양쪽 벽의 장대석들을 부드러운 곡선으로 마감하였다. 그리고 가장자리에 심은 나무뿌리를 보호하기 위하여 둥글게 마무리한 것도 볼 수 있다.
사대부집이나 궁궐의 정전 등에 들어갈 때 개천 위에 놓인 다리를 건너게 된 것은 어떻게 보면 적어도 고려 왕조 때부터 내려오는 공간 디자인의 한 수법이라 할 수 있다.
고려 때 개성의 궁궐터인 만월대 터를 보아도 그렇다.
곧 정문인 신봉문(神鳳門)에 이르기 전에 서쪽으로부터 물이 흘러와 동쪽으로 흘러가는 개천인 광명천(廣明川)위에 놓인 돌다리인 만월교(滿月橋)를 딛고 건너게 된다. 만월교가 놓인 광명천은 하나의 금천이고, 다리는 금천교이다.
또 조선시대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의 정문 앞에는 금천이 흐르고, 이 위에 영제교가 서 있다. 이와 같은 이치로 창덕궁에서는 금천교가, 창경궁에는 옥천교가 있다. 그리고 경복궁과 창덕궁에서는 금천이 서북쪽에서 흘러와 동남쪽으로 흘러나가는데 이때 정전은 남쪽을 향하고 있다.
연경당의 개천도 남쪽으로 향한 연경당 서북쪽에서 흘러 들어와 동남쪽으로 흘러 나가는 것은 우연의 일치만은 아니라 하겠다.
장락문(長樂門)-솟을 대문이야기
연경당의 대문인 장락문은 솟을 대문이다. 평대문(平大門)이 대문을 설치한 행랑채의 지붕과 같은 높이, 같은 지붕 속의 것이라면 솟을 대문은 행랑채 지붕보다 한층 높인 지붕을 덮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 관료직은 정과 종 각각 9품계로 총 18품계로 나누어졌다. 이 가운데 종 2품 이상의 관료는 초헌이라 부르는 외바퀴 수레를 타고 대궐에 드나들었다. 이때 이 초헌을 탄채로 대문을 드나들려면 대문의 지붕을 주변 행랑채보다 한층 높일 수밖에 없었고 또 문지방의 중앙은 홈을 파서 외바퀴가 지나가도록 한 것이다.
솟을 대문이 지체 높은 양반집에 세워지게 되자 점차 종2품 아래쪽의 양반집에서도 솟을 대문을 달기 시작 하였는데 이들은 대개 문지방의 홈이 없이 지붕만을 한층 높인 솟을 대문이었다. 결국 솟을대문은 양반집임을 말해 주는 대문이 되었고, 자연히 '솟을 대문집'하면 그 집은 곧 양반집이 되었다.
조선시대 오백여 년을 이렇게 내려오다 보니 신분제가 유명무실하게 된 갑오개혁 뒤에 중인집에서 선망의 대상이었던 솟을대문을 달자, 양반 계층에서는 오히려 양반집 체모를 손상하였다 하여 솟을대문을 헐고 평대문으로 고친 사례들이 생기게 되었다.
연경당은 순조28년(1828) 당시 왕세자였던 익종의 청으로 사대부집을 모방하여 궁궐 안에 지은 이른바 120칸 집이다. 순조의 왕세자인 익종은 순조9년에 태어나 순조 27년 왕명으로 대리청정을 하다가 순조30년(1830)에 세상을 떠났다.
그 뒤 아들이 헌종으로 즉위하자 왕으로 추종되어 익종으로 종묘에 봉향되었는데 연경당은 바로 익종의 대리청정 때 창덕궁 안에 지은 것이다. 창덕궁 안에 지은 유일한 민가형식의 건물로 사랑채의 당호(堂號)가 연경당(演慶堂)이다.
사랑채엔 안채가 이어져 있고 사방에 행랑들이 설비되어 있다. 이른바 백이십 칸 집의 구성이 완비되어 있어 당시 사대부 주택을 잘 보여주며 한국 주택사나 생활사등 여러 측면에서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연경당은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창덕궁내에서도 가장 안쪽에 위치하고 있다.
행랑채
연경당의 행랑채는 한가운데 장락문을 중심으로, 서쪽은 사고석을 쌓은 방화담 벽채이고, 동쪽은 판장벽이지만 그 동쪽 끝에서 일단 꺾여서 안쪽과 연결되면서부터는 역시 방화담 벽채로 되어 있다.
한 가운데에는 장락문 솟을대문이 높이 솟아 있고, 그 서쪽은 굳은 자재인 돌로 된 방화담 벽채인데 반하여 동쪽은 한단 낮게 부드러운 재질로 된 판장벽으로 만들어 놓은 이와 같은 변화는 기능적 조영을 했음을 의미한다.
연경당의 행랑채는 중앙의 장락문을 중심으로 동편의 판장벽은 통풍이 잘되도록 기능 위주로 설치하였고, 서편의방화장(防火墻)은 화재 예방을 위하여 벽의 하단부를 벽돌과 석재로 쌓는 바깥벽의 축조방법이다.
우뚝 선 솟을 대문을 들어서면 곧 행랑 마당이다. 이 마당을 통하여 한쪽으로는 사랑 마당으로, 다른 쪽으로는 안마당에 드나들 수 있다. 이 마당은 바깥 행랑채와 중문간 행랑채로 둘러싸인 장방형 마당이다.
솟을대문의 동쪽 바깥 행랑채 끝은 측간(厠間)이 자리잡고 , 그 다음은 기둥과 지붕으로만 구성된 마굿간이다. 측간은 연경당에 살고 있는 남자들만이 사용하는 바깥 변소로서 보통 외측(外厠)이라 부른다.
여자들의 변소는 내측(內厠)으로 '동궐도형'에 의하면 연경당 안채 서쪽 집밖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져 찾아볼 수 없다.
장락문 맞은 편에 중문간 행랑채가 있는데, 그 행랑채 동편쪽으로 사랑채의 마당으로 통하는 중문인 장양문(長陽門)이 있고, 서편쪽으로는 안채의 마당으로 드나드는 중문이 수인문(脩仁門)이 있다.
수인문은 행랑채의 지붕 높이로 꾸며져 있는데, 반하여 장양문은 솟을 대문으로 되어 있다. 중문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돌아서서 남행랑채, 즉 장락문간 행랑채를 바라다보면, 그 바깥쪽 벽은 반 칸 높이인 서쪽의 방화벽과 동쪽의 판장벽 위를 가로지른 중방에 광창을 냈는데, 안쪽은 방이고 앞에는 마루까지 달려 있다.
장양문을 들어서면 맞은 편북쪽으로 사랑채가 있고, 그 동쪽에 선향재(善香齋)가 있는데 이 사랑채의 당호(堂號)가 바로 '연경당'이다.
연경당은 정면 6간, 측면 2간의 팔작지붕 홑처마 집인데 평면의 넓이가 14간 규모로써 대략 27평쯤이 된다. 바라다 보이는 위치에서 오른쪽 끝의 2간이누마루 다락으로 높다란 돌기둥에 얹혀 있다. 누마루 다락 다음의 5간이 대청이고, 그 다음 칸이 방인데 거기에는 반 간짜리 앞퇴가 있고, 뒤로 도는 위치에 다시 1간짜리 방이 붙어 있다. 이 한 간 짜리 방이 침실이다. 그 다음 칸은 아래는 부엌이고, 위는 다락으로 되어 있다.
도리는 남자를 상징하는 굴도리인데 문과 창의 형태가 무척 다양하다. 이 연경당 사랑채만을 살펴보더라도 살대를 달리한 살무늬만 10여 가지가 된다. 기둥에는 주련을 달았고 섬돌 아래에 돌계단이 있으며, 또 그 앞에 초헌이나 말을 타고 내릴 때 딛도록 만들어 놓은 디딤돌, 즉 노둣돌이 놓여 있다.
사랑방은 이 집 주인의 일상 거처이다. 대궐에서 퇴궐하면 이방으로 찾아오는 손님을 맞이하고, 또 문객들과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는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세력 있는 대가집에는 항상 문객들이 끊이지 않았는데, 이들은 식사를 제공받는 식객으로 세상소식을 주인에게 전해 주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사랑방 옆에 붙은 작은 방은 침방이다. 조선시대는 초기부터 남녀 구별이 있어 비록 부부라도 보통 때는 남자는 사랑채에서 지냈다. 때문에 태종 때부터 벌써 부부간에 따로 잠자라는 영(令)을 내렸고, 침방을 사랑채에 만들게 되었다.
사랑방 동쪽은 대청이고, 이 옆에는 누마루를 두었다. 대청과 누마루는 무더운 여름철에 시원하게 지낼 수 있는 거처이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대청은 사랑방이나 누마루에 드나드는 전실의 역할이 더 큰 것도 사실이다. 여름이면 이곳에 돗자리를 깔고 여름용 자리 방석들이 놓여진다. 또 발도 쳐지고 때로 살평상을 들여놓기도 한다. 사랑채 앞의 사랑 마당과는 구별을 하여 사잇담 중간에 대문을 달아 드나들 수 있게 했다.
정심수와 석연지
담장 밑에는 괴석을 담아 놓은 석함들을 늘어놓았고 담 모퉁이에는 큰 나무를 심었는데 이것이 정심수이다.본래 정심수란 마당 중앙에 심는 나무라는 뜻이지만 실제로 심기는 마당 중앙을 비껴서 심는다.
그것은 마당 모양이'ㅁ'형이고 , 나무가 '木'이 되어, 곧 '困'이 되니 이 자는 '곤할 곤'자로서 그 뜻이 나쁘기 때문이다.
사랑마당 동남쪽에는 중문간 행랑채가 자리잡고 한쪽에 석련지가 놓여 있다. 중문간 행랑채에는 바깥 행랑채의 노비들보다 격이 한층 높은 아랫사람들이 거처하는데, 노비들을 부리는 우두머리인 청지기의 방이 이곳에 자리잡게 된다. 한편 석련지는 마당에 연못을 팔 수 없을 때 이곳에 물을 담고 연잎을 띄우는 정원의 한 석물이다.
선향재(善香齋)
사랑채 동쪽의 선향재는 14간짜리 건물로서 책들을 보관하고 책을 읽는 서재이다. 가운데 큰 대청을 두고 양쪽에 온돌방을 두었다. 그리고 선향재의 정면은 서쪽이 된느데, 선향재의 바로 앞에는 기둥들을 세우고 맞배지붕을 덮어 차양을 만들었다. 정자살로 짜여진 문짝을 가로로 달고 끈으로 잡아당겨 기둥에 단 고리에 매어 놓았다.
이 차양은 석양녁의 뜨거운 햇살이나 비, 바람을 막아 준다. 이런 구조가 이미 삼국시대 신라의 절이었던 황룡사 금당에도 있었음이 최근의 발굴 조사에서 입증되었다.
조선시대의 사대부나 서울의 중인집에서 사랑채 앞이나 별당채 앞에 이 차양을 한 예가 많은데 대표적인 것으로 서울 다동의 백씨 집, 경운동 민씨 집, 안국동 윤씨집, 강릉 선교장, 해남 윤고산 고택 등에 있음을 볼 수 있다.
농수정(濃繡亭)
선향재 뒤쪽 동산 언덕에는 농수정이 있는데, 층층이 깎은 돌로 가장자리를 마무리한 화계가 꾸며져 있다. 축대위로 돌난간을 두른 자리에 세워진 정자는 장대석의 기단 위에 네모 기둥을 세운 이익공집이다. 겹처마로된 네모 지붕 꼭대기에는 절병통이 꽃혀 있다. 농수정은 정면, 측면 모두 1간씩이며, 기둥 사이는 벽을 치지 않고 완자무늬의 사분합문을 달아 놓았다. 아(亞)자를 기본 삼아 완자무늬로 짠 이들 분합문만도 열 개나 되는데, 분합문을 접어서 들쇠에 매달면 사방의 경치가 한눈에 들어오게 되어 있다. 농수정의 내부 천장은 소란반자이고, 바닥은 우물마루이다. 또한 정자 기둥 밖으로는 빙둘러서 마루를 깔고 ,법수가 있는 자그마한 난간을 곁들였으며, 정면과 다른 일부의 측면에는 난간 가운데를 터놓았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장대석 아래로 경사진 지형에 기역자형으로 꺾인 화계를 꾸민 층단을 두고, 그화계에 무사석의 작은 돌들을 쌓아 우리나라 특유의 노단식 정원을 꾸며 놓은 점이다. 이러한 노단식의 정원은 이탈리아식 정원처럼 나무를 줄지어 가지런하게 심지 않고 낙엽수와 관목, 그리고 꽃나무를 자연스럽게 여기저기에 드문드문 심게 되어 있다.
한편 이곳 노단에서는 선과 색이 어울린 굴뚝을 세워 놓아서 우리나라 동산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한결 잘 나타내고 있다. 농수정 동쪽의 담장에는 일각문인 소양문이 나 있어서 이문을 나서면 제 3공간 경역에 있는 승재정으로 가는 길이 나 있다.
안채
행랑 마당에 난 평대문을 들어서면 안마당이 되고 여기에 안채가 사랑채와 연이어져 있다. 사랑채나 안채나 모두 정면 대청마루를 넓게 잡고 앞에 좁은 퇴를 둔 형식으로 지어져 있는데, 두채 사이에 앞마당 쪽으로 담장을 치고, 담 중간에 일각문을 내서 신을 신고 드나들 게 만들어 놓았지만, 뒤로는 빙둘러서 쪽마루를 깔아 버선발로 드나들 수 있게 되어 있다. 안채는 'ㄱ'자 형 평면으로 누다락과 안방이 동서로 면하고 'ㄱ'자로 꺾인 곳에 남쪽으로 면한 안대청과 건너방이 자리잡고 있다. 안방은 안주인의 거처이고, 누다락은 안주인의 여름철 거처이다.
나무시집보내기
그 아래쪽은 안방에 불을 때는 함실 아궁이다. 일반 사대부집에서는 이곳이 보통 부엌인데 특히 큰집, 예컨대 대가에서는 안채 뒤쪽에 반빗간이 자리잡고 있다. 안채 안마당에도 담 모퉁이에 정심수가 있고 이 정심수에는 괴석이 박혀 있는데, 이것은 나무를 시집보내는 것을 상징한다. 또 팔각형으로 된 대석이 있는데 화초분이나 해시계 등을 바쳐 놓는 석물이다.
연경당은 순조 28년(1828)에 사대부 집을 본떠 궁궐 안에 지은 120칸 집이다. 순조는 아들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키고는 자신은 가끔씩 이곳에 와서 지냈다고 한다.
1884년 갑신정변 때 청나라 군대에 쫓긴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의 개화파 수뇌들이 고종 임금을 모시고 잠시 연경당으로 피신한 일이 있었고, 명성황후께서 고종 32년(1895) 경복궁 안의 건청전에서 일본인들에게 암살되기 바로 2개월 전인 6월에 이곳 연경당의 넓은 앞뜰에서 내외 귀빈들에게 원유회를 베풀기도 했다.
또한 1917년에 창덕궁의 내전인 대조전이 화재를 만났을 때 순종 황제와 윤황후께서 한때 이곳으로 피신하기도 하였다.
전통주택의 바닥을 구성하고 있는 온돌과 마루는 각기 상반된 특성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다기능을 수용할 수 있는 융통성을 가진 공간으로 발전하여 전체적인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따뜻하게 불을 지필 수 있는 온돌방은 폐쇄공간이며 반대로 마루는 시원하게 트인 개방 공간이다.
대청은 조선시대 상류주택의 의식과 권위를 표현하는 상징적인 공간이며 외부와 각방을 연결하는 전이공간으로 주로 남쪽을 향해 있다.대청은 공간구성상 사랑채와 안채의 중심을 이룬다. 대청의 크기는 조선조 중반까지는 사랑대청이 안대청보다 다소 높고 컸으나 후기에 이르러 안대청이 가정의 중심이 되면서 그 용도와 크기가 확대되었다.
대청의 구조를 보면 마당에서 오르기 위한 기단이 있고 그 위에 댓돌이 있다. 댓돌에서 바로 올라서면 대청 앞 쪽으로는 대개 앞툇마루가 있다. 전통주택에 주로 사용되었던 마루에는 장마루와 우물마루가 있다. 연경당의 대청마루에는 가장 보편적으로 쓰였던 마루구조인 우물마루가 사용되었다. 우물마루는 귀틀과 청판으로 만들어지는데 귀틀은 장귀틀, 중귀틀, 동귀틀로 나뉜다.
우물마루의 구조를 보면, 우선 대들보와 같은 방향으로 앞뒤의 기둥에 장귀틀을 건너지르고 도리의 방향과 같게 중귀틀을 끼운후 거기에 직각으로 동귀틀을 걸고 그 사이에 짧고 넓은 널을 제혀쪽매로 하여 끼운다. 이 때 마루널은 막장에서 초장(初帳)에 이르기까지 조금씩 그 몸을 짧게 만든다. 마루널은 동귀틀에 파놓은 홈에 끼우는데 막장에는 문열이를 두고 못을 쳐서 고정시킨다. 대청 마루놓기가 끝나면 아교물에 주사(朱士)를 풀어서 칠하거나 또는 콩댐에 치자물을 타서 색을 일정하게 골라주고 길들여 노랗고 반질거리는 효과를 내었다.
장마루는 이층마루나, 누마루, 그리고 광이나 다락에 주로 깔았던 마루구조이다. 장마루의 구조를 보면 장선과 멍에를 만든 후 좁고 긴 널판을 나란히 붙여 깔기 때문에 평행한 선들이 많이 나타나고 중간중간 직각으로 이음선 들이 나타난다. 오늘날에는 이 장마루가 우물마루보다 널리 사용되고 있다.
2. 온돌
연경당 실내 공간의 온돌바닥은 모두 누런색 계통의 장판지 마감이다. 온돌은 아궁이에 불을 때서 방바닥 밑의 구들장을 데워 그 열이 인체에 직접 전달되거나 또는 실내의 공기를 데우는 장치로서 열의 전도, 복사, 대류를 이용한 한국고유의 난방방식이다. 온돌난방의 고구려의 장갱(長坑)으로부터 유래된 것이 온돌로 발전되어 오늘날까지 한국 고유의 난방법으로 사용되어 왔다. 특히 온돌은 감각적 자극이 큰데, 그것은 바닥면에서부터 인체에 직접 전달되는 전도열 때문이다.
온돌 내부구조의 주요부분은 아궁이와 고래이다. 온돌은 연료가 아궁이에서 연소되어 부넘기를 통해 열과 연기를 고래로 이끌어 들이는 구조로서 고래를 어떠한 형태로 만들었는가에 따라 연료의 소비량과 실내보온에 영향이 컸다
아궁이에서 불을 때면 그 화기로음식이 조리되고, 경사진 부넘기를 넘은 열과 연기는 아궁이로 내닫지 않고 개자리에 이른다. 여기에 열과 연기가 머물다가 굴뚝으로 빠져나가므로 구들의 온기를 더 오래 유지시켜 주었다.
아궁이의 내부구조를 보면 방고래로 들어가면서 급경사를 이루어 높아지다가 다시 약간 낮아지는 부넘기가 있다. 부넘기는 불길을 잘 넘어가게 하고 불을 거꾸로 내뱉지 않도록 한다. 부넘기에서 굴뚝이 있는 개자리까지는 안쪽이 높게 약간씩 경사를 두고, 경우에 따라 구들장을 놓을 때도 약간씩 경사를 두어 결과적으로 아궁이 쪽을 아랫목이라 하고 굴뚝 쪽을 윗목이라 부른다.
불길이 고래에서 굴뚝으로 연결되기 전에 고래보다 깊이 파인 골이나 웅덩이가 있어 재나 연기를 머무르게 하는 개자리가 있다. 고래의 종류에는 골을 켜지 않는 허튼고래와 일정하게 골을 켠 골고래가 있으며 골고래의 종류로는 골의 모양에 따라 줄고래, 부채고래,맞선고래, 구분고래 등이 있다.
서민주택에서는 온돌바닥에 특별한 마감을 할 경제적 능력이 없어 단지 흙바닥 위에 대자리나 삿자리등을 깔았다. 그러나 상류주택의 온돌바닥은 살기에 안전하고 편안하며 보기에도 아름답도록 하기 위해 마감을 하였는데 그 방법으로는 장판지 마감, 천마감, 솔방울마감, 은행잎마감 등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