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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聞慶]새재[鳥嶺] 642m 경북 문경 / 충북 괴산
산줄기 : 백두대간
들머리 : 문경읍 하초리 문경새재도립공원입구
위 치 경북 문경시 문경읍 / 충북 괴산군
높 이 642m
새재 또는 문경새재라고도 하고, 해발고도는642m이다. 이화령(梨花嶺) 북쪽 약 7km 지점, 신선봉(神仙峰:967m)과 조령산(1,017m)의 사이에 있다. 예로부터 중부지방과 영남지방을 잇는 교통의 요지였고, 또한 험난한 지세에 바탕을 둔 군사상의 요충이기도 하였다. 이화령에서 수안보(水安堡)로 통하는 3번 국도가 뚫린 후 새재길은 사적지로 남게 되었는데, 최근에 이 일대가 관광지로 개발되었다. 옛날에는 우거진 송림과 박달나무로 유명했던 곳이다. 1981년 6월 4일, 이 고개를 중심으로 한 지역을 문경새재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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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산행기[사네드레]
과거 보러 가던 영남대로의 관문... 문경새재
환갑쯤 돼보이는 아주머니 한분이 성벽에 기대 앉아 봄볕을 쬐고 있었다. 경칩이야 지났지만 아직 바람 속에는 이따금 가시가 느껴지는 날씨. 햇볕이 있다한들 하염없이 앉아 있기란 무리일 터인데 그녀는 졸기까지 한다.
"한 시간은 가야한다면서요?"
1관문에서 3관문까지 걸어가야 하는 새재(鳥嶺) 오솔길을 두고 말함이었다. 누군가 시간을 줄여 한 시간이라 얘기한모양인데 남도끝 고흥에서 큰 맘 먹고 구경길에 나섰다는 여인은 겨우 1관문에 와서는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평지나 다름없는 새재길 두어 시간의 도보가 고된 농삿일의 10분의 1에 비하겠냐마는 모처럼 '관광' 길에 오른 여인은 들뜬 기분을 만끽하기도 전에 기운부터 빠져 버린 것이다.
주흘관의 성문에 강력한 흡입기라도 달린 양 관광객들이 연신 스 곳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주흘관이 바야흐로 21세기를 맞아 새재 관광지의 첫관문으로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영남의 길손들이 한양으로 가기 위해 문경땅에서 맨 먼저 당도한 것은 문경온천 근처의 하리였다.
문경의 비석거리였다는 그곳은 하리2리의 마을회관 앞 공터. 멀리 주흘산이 바라뵈는 이곳에는 길손들이 안녕과 소원을 빌던 당나무와 성혈바위가 남아 있어 옛 문경의 입구였으을 알려주고 있다.
일선에는 하리가 '양반길' 과 '서민길' 이 갈라지던 곳이라는 얘기도 있었다. 양반길이라 함은 조선 태조(혹은 태종이라는 애기도 분분하다) 때 열린 새재를 말함이고, 서민길은 하리의 동북쪽에 있는 156년인 신라 아달라니사금때 열린 하늘재길을 가리키는 것이다. 하늘재나 새재나 모두 백두대간 고개로 양반 서민할 것 없이 영나지방에서는 서울 가는 길로 이용되던 길인데 굳이 새재길을 양반길로 지칭 한 것은 조선시대에 들어 생긴 과거제 때문이었으리라.
그런데 하늘재가 오히려 허준한 새재길에 밀려 곁길로 쇠퇴하고 만 이유는 무엇일까. 새재에 비하면 하늘재가 훨씬 유순하고 수월할텐데 말이다. 이 궁금증에 대해 문경새재박물관에 근무하는 학예연구사 안태현씨는 "조선시대에 들어와 행정구역을 정비하면서 상주가 경상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자 한양 가는 길 역시 상주를 거쳐가는 더 빠른 길로 새재를 택했을 것이다" 고 추측하고 있다. 도보가 거의 유일한 이동 수단이었던 만큼 '빠른 길'에의 필요성이 힘든 길의 곤란함을 충분히 극복하고도 남았던 시절이었다.
주흘문을 통과한 사람들은 앞다투어 눈 앞에 나타난 태조 왕건 촬영 세트장으로 몰려 들어갔다. 간만에 꺼내입은 빛바랜 양복을 걸친 촌로도, 찬 바람을 대비해 양털 달린 빨간 가죽 장갑을 끼고 갓난아이를 껴안은 젊은 주부들도 제일 먼저 달려가는 곳이 이 세트장이었다. 그러니까 이들이 새재도립공원을 찾아 온 목적이 바로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세트장을 구경하고 정작 2관문 쪽을 향하는 사람은 드물었으니까.
"본디 옛길 산행은 호젓해야 제맛이야" 라며 앞장서는 김부래 기자 뒤로 태백에서 온 정이호씨(62세, 태백한마음산악회)가 맞장구를 치며 따라나선다. 이번 엣길 산행에는 평택 주재 장익진(53세, 맥산악회) 기자와 천안주재 류재호(49세, 충남산악연맹부회장) 기자가 합세해 활기를 불어 넣어준다.
왕건 촬영장 너머로 바라뵈는 조령산의 바위 정수리들은 아직 흰눈을 뒤집어 썼고 옛길도 무채색이다. 허나 분명 어디에선가 봄이 감지되고 있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겨울 내내 듣지 못했던, 콸콸흐르는 조령천의 힘찬 물소리 때문이었다. 언 몸을 푸는, 조령천이 내는 상쾌한 리드은 마치 문경의 옛 이름처럼 기쁜소식(聞喜)을 전해주는 듯하다.
새재 옛길에는 민가가 없다. 하지만 3관문까지 이어지는 이곳 상초리는 30리 새재길을 넘던 길손들이 쉬어가던 곳으로 과거에는 사람들이 제법 많이 살았다. 왕건 촬영장에서 얼마 가지 않아 있는 선정비들도 상초리가 새재 아래 제법 번성했던 고을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관문을 넘어온 한양의 기쁜 소식은 상초리에 맨 먼저 도착했다. 조선초에 한양을 중심으로 전국에 9개 주요 간선도로가 정비되었는데 이중 가장 짧은 것이 새재를 허리에 두고 한양과 동래를 연결한 영남대로이다. 영남대로는 한강과 낙동강의 수계를 따라 들어섰으며 외적으로부터 가장 안전한 내륙에 자리잡아 정치 군사적으로 사회 경제적으로도 중요한 통로였다. 길이도 영남대로를 모체로 건설된 경부고속도로가 428km인 것에 비해 이는 384km밖에 되지 않았으니 가까운 길을 찾으려는700여년 전 지혜의 응집에 놀라울 따름이다. 더욱이 파발제를 운영하고 있어서 비상시에 한양의 소식이 동래까지 가는 데는 불과 이틀밖에 걸리지 않았다.
새재길은 차 두어 대가 지나갈 만하게 다듬어져 옛길의 맛을 느끼기란 아무래도 좀 무리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차량통행이 금지되어 있다는 점이다. 얼음이 풀려 보드라워진 흙길을 따라 당도한 곳은 조령원터였다. 영남대로가 열리면서 관리들의 여행길과 도로를 관장하는 관리소인 역이 30개 있었고 이것의 보조시설로 숙식장소인 원이 165개가 있었다.점촌의 유곡역은 새재 이남에서 가장 컸으며 전국에서도 최대규모 중의 하나였다. 역과 마찬가지로 원은 훗날 쇠퇴하면서 스무개 정도로 줄어들었는데 조령원이 그중 하나이다.
조령산성 안에는 조령원을 비롯해 동화원이 있었고 인근으로는 화령과 지릅재 쪽에도 원이 있었다. 조령원에는 떡이나 쌀을 가져다 놓으면 이곳을 지나던 길손들이 음식을 해먹고 돈을 두고 갈 정도로 인심이 좋았다고 전해온다. 150평 남짓한 조령원터는 사진에서 느껴지는 한가로운 정취는 온데 간데 없고, 촬영용으로 설치해 놓은 움막이 널려 있어 어수선했다.
탄탄대로지만 초입께에서 본 남도의 여인처럼 길 떠나면 이내 피곤해지는 법이다. 중천에 오른 햇볕을 받으며 몸이 노곤해질 무렵 주막에 닿았다. 정이호씨가 호탕하게 "주모 없소!" 라며 외친다. 93년 전까지만 해도 장사를 했던 이 주막집은 비어 있다. 마루에 걸터앉아 이곳에서 탁족을 즐기며 여행길의 고단함을 한잔의 술로 씻어 버리곤 했을 옛 길손들을 상상해본다.
서민들이 자유롭게 드나들었던 주막이나 객주는 역이나 원이 점차 쇠퇴한 조선 시대 후기에 와서 생겨나기 시작했다. 사람이 많이 몰려드니 사연 또한 많았을 곳이 주막집이다. 또 잠깐이나마 양반과 서민이 한 지붕아래 의식을 함께 해결했는가 하면 또 목숨을 부지하려면 양반이든 서민이든 하나의 대열에 묶여 험한 새재를 넘던 신분을 초월한 인간적인 교분의 장소가 역시 이 주막집이었다. 그런 주막집의 서정을 지금의 여행길에서 상상할 수 있으랴.
한창 해동중인 조령천에는 개울물이 홍수가 날 듯 흘러넘친다. 조령천을 따라 발길을 옮기니 암반이 넓게 퍼진 수려한 계곡이 나타났다. 주막에서 몇 걸음 간 그곳은 조령천의 백미라 할 용추다. 용추 앞에는 경상도 관찰사가 관인을 인계하던 곳이라는 교구정터도 있다. 아르다운 계곡에 바쳐지는 이름인 용추는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곳이다. 용추 앞에 정자가 생긴 것은 문경 관문이 들어서기 200여년 전이라니 변하지 않는 것도 자연의 아름다움이다.
하늘재 길이 사방으로 환히 트인 것과는 달리 새재길은 깊은 골짜기를 타고 이어진다. 주흘산과 조령산, 부봉 등 험준한 산세의 틈바구니를 타고 난 이 길을 넘을 때는 사람들은 꼭 수십 명씩 무리지어 다녔다. 도둑떼가 무섭기도 했겠지만 한밤중이 아니더라도 계곡 길은 혼자 오르기에는 너무 깊다. 산불됴심비를 지나 고도가 서서히 높아질수록 길은 한겨울로 회귀하기 시작했다. 조곡관을 지나서는 아예 눈밭이다.
조령산성 가운데 맨 먼저 축조된 것이 2관문인 조곡관이다. 나라에서 새재 일대에 성 축조 여부를 검토하고 있을 무렵인 1708년(숙종 34년)에 충주의 수문장이던 신충원이란 장수는 스스로 지금의 2관문 자리에 성을 쌓고 있었다. 조곡관을 중심으로 나라에서는 남쪽과 북쪽에 각각 주흘관과 조령관을 축조했는데, 최근 규장각이 공개한 1872년에 제작된 <조령진산도>를 보면 당시에는 세 관문의 이름을 상문, 중문, 하문으로 부르고 있었다.
이 조령성 축조는 새재를 간과해 임진왜란이라는 큰 고통을 겪고도 116년 후에야 비로소 이뤄진 일이었다. 2관문 앞의 조곡약수로 목을 축인 일행은 이제 답사의 하이라이트가 될 3관문으로 향한다.
임진년 왜군의 침입때 신립장군이 제2진의 본부를 설치했다는 이진터를 지나며 일행의 화제는 불운의 장군 신립에게로 옮아간다. 그가 불운아였다면 새재의 중요성을 간과해 왜군이 한양까지 진격하는 길을 열어줌으로써 대국난으로 확대되었고 달천변의 탄그대 배수진이 실패하자 자신의 삶도 결국 종지부를 찍는 비극으로 점철됐기 때문이다.
권율장군의 사위였던 신립장군은 문경 출신으로 전공이 뛰어나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임금이 삼도도순변사로 임명하고 친히 칼까지 내려 격려했던 인물이다. 그런데 새재에 전해오는 전설 가운데는 승승장구하던 신립의 신하들의 간언을 곧이 듣지 않은 것은 순전히 신립장군에게 목매어 자살한 처녀 원혼 때문이라는 얘기가 전한다.
이야기인즉 북한산으로 사냥 갔던 신립장군이 귀가길에 어느 처녀의 목숨을 구해주는데 처녀는 자신을 데려가 달라 애원하지만 신립이 거절하자 그녀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원혼이 되어 신립장군의 꿈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중요한 전투마다 나타난 처녀는 작전을 일러주어 그 결과 매번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자 신립은 처녀의 말을 곧이듣게 된다. 그러나 일생의 가장 큰 중책을 맡았던 임진왜란에서 처녀원혼은 거짓작전을 애기해줌으로써 자신을 박대한 신립에게 복수를 했다는 것이다. 어쩌면 사람들은 불운하게 끝난 이 고장 출신의 명장 신립장군을 마지막에는 보듬어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원터로 추정되는 동화원을 지나니 고갯길은 막바지로 이어진다. 장원급제길과 금의환향길 갈림길에서 옛길인 장원급제길을 따라 20여분 오르니 하오의 햇살을 받고 있는 조령관이 다가선다. 산세가 험해 새도 날아너기 힘들었다는 고개, 신립장군이 새재에 세워놓은 허수아비에 내려앉은 새를 보고 왜장이 마음놓고 넘어갔다는 곳. 새재는 1952년 이화령으로 국도가 생기면서 더 이상 영남대로의 관문으로서 쓸모가 없어졌다. 눈길을 헤치고 웬 여자 하나가 새재 산신각으로 다가간 후 주문을 외기 시작한다. 사방이 눈밭이고 인적이 없는 새재 꼭대기에서 그녀는 누구의 원혼을 위로하고 있는 것일까.
*산행길잡이
백두대간을 뚫고 난 오솔길, 걸음걸음마다 명소
문경 새재길에서 비포장길 답사가 가능한 구간은 제1관문에서 제3관문까지 약 6.5km, 문경을 기점으로 당일산행으로 여유있다.
영남 최대의 관문 문경 새재길 답사는 1관문에서 거슬러 오르는 편이 좋다. 조령산, 주흘산, 부봉 등의 웅장하고 험준한 산세가 시선을 압도하며 주변 산세와는 달리 트새를 비집고 난 새재길은 유순하기 그지없다.
옛길 산행은 새재도립공원 주차장을 지나 관리사무소 앞에 설치된 매표소부터 시작된다. 새재박물관을 지나 1관문을 나서면서 비포장 흙길이 시작된다. 1관문에 들어서자마자 왼쪽으로 보이는 것이 태조 왕건 촬영세트장. 세트장은 연일 찾아오는 관광객들로 번잡한 편. 그러나 세트장을 지나서부터는 의외로 옛길 답사객은 적어 조용한 산행을 즐길 수 있다.
1관문에서 2관문 가는 길이 새재길에서 볼거리가 가장 많은 구간. 조령원터, 주막, 교구정, 용추, 산불됴심비, 조곡폭포 등 눈을 팔지 못하게 한다. 2관문에 들어서서 조곡약수로 목을 축이고 나면 이제 3관문으로 이어지는 막바지 고갯길이 시작된다.
2관문부터 문경새재민요비, 이진터, 동화원을 지나면 예길이 서서히 경사를 높여가기 시작한다. 장원급제길과 금의환향길이 갈라지는 길목에서는 장원급제길이 옛길. 골짜기를 오르며 숨이 가빠지기 시작할 때쯤이면 3관문이 모습을 드러낸다. 바로 그 유명한 문경새재다.
3관문의 군막터와 산신각을 둘러보고 문을 나서면 충북 괴산땅이다. 3관문에서 10여분 내려가면 조령산휴양림식당휴게소가 나오며 이어 대중교통편을 이용하는 수옥까지 약 4km는 승용차를 이용하거나 걸어가야 한다.
*교통
문경읍이 기점이다. 문경시외버스터미널(054-571-0343)에서 관문행 시내버스(완행, 직행)가 07:15~18:50까지 수시로 다닌다. 요금은 완행이 700원, 직행이 1,500원이며 10분 걸린다.
3관문쪽은 대중교통편이 불편하다. 3관문에서 소조령 부근의 수옥까지 약 4km를 내려가야 괴산과 수안보를 왕복하는 시내버스를 이용할 수 있다. 괴산에서 수옥을 경유하는 수안보행 버스가 06:15~18:00까지 하루 8번 다닌다. 괴산에서 수옥까지는 45분, 수옥에서 수안보까지는 15분 거리다.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새재도립공원은 이화령터널과 문경읍 사이의 3번 국도에서 들어간다. 새재길 산행이 목적이라면 이화령 옛 국도를 택하는 게 산세를 감상하기 좋다. 이화령터널의 경우 통행료가 1,300원이다.
*잘 데
새재도립공원 입구 집단시설지구에 숙식할 곳이 많다. 도립공원주차장 근처에 새재모텔(054-571-1818), 태화관(571-3044), 문명장(571-7775), 산행중에는 산불됴심비를 지나 2관문 직전의 제2관문휴게소(572-0077, 방 1개)와 2관문과 3관문 중간쯤의 동화원휴게소(572-0793, 방 2개)에서 숙식이 가능하다. 3관문에서 충북 괴산쪽으로 10분 내려간 곳에 있는 조령산휴양림식당휴게소(043-833-5689, 방 3개)나 조령산자연휴양림(833-7994)에서도 숙박이 가능하다.
*먹을 데
도립공원 주차장을 지나자마자 있는 산머루식당 음식이 맛있기로 유명하다. 이 고장에서 '담북장' 이라 부르는 청국장(5,000원)과 봄이면 향긋한 맛이 일품인 산채비빔밥(5,000원)이 별미로 특히 태조 왕건 촬영팀이 애용한다고. 좁쌀술, 산머루즙, 동동주 등 직접 담근 술과 더덕구이(10,000원), 파전(5,000원) 등도 준비해 놓고 있다.(054-572-2400/ 011-9983-3564).
참고: 월간<사람과산> 2001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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