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러 상인들과 인맥 형성 富 축적 기반 마련
지신허에서 얀치혜로 이주한 가족과 재회
집 새로 짓고 가축도 사서 집 다시 일으켜
軍과 치안 당국서 통역 일하며 신뢰 쌓아
낮은 임금 차별받는 한인들 처우도 개선
열한 살에 집을 나온 최재형이 10년 만에 다시 가족을 만나러 갔던 얀치혜(현 크라스키노) 전경. |
6년의 선원 생활로 다져진 경험을 바탕으로 최재형은 선장 친구 회사인 모르스키 상사에서
4년 동안 일하면서 러시아 상인들과 돈독한 인맥을 형성한다. 최재형에겐 이때의 경험이 동양의 카네기라 부를 정도로 부를 쌓게 되는 발판이
마련되는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스무 살을 넘긴 최재형은 4년 동안 번 돈을 가지고 드디어 아버지를 찾아간다. 열한 살에 집을
나와 10년 만에 가족을 찾아가는 최재형은 그동안 가족이 얼마나 그리웠을지 상상이 되고도 남는다. 아버지와 형은 물론 자기를 심하게 구박했던
형수도 그리웠을 것이다.
최재형이 가출한 후 자신을 구해준 선장을 만났던 곳, 포시에트 항구에 가서 말을 빌려 타고 지신허를
찾아갔다.
필자의 청소년 소설 『독립운동가 최재형』에서 가족을 찾아가는 최재형을 다음과 같이 풀어냈다.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 |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의 저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 |
재형은 눈길을 걸어 학교에 다니던 길을 말을
타고 달리니 온갖 감회가 새로웠다. 재형이 말을 타고 달리는 길은 겨울에 눈이 발목까지 쌓였을 때 버선은커녕 신발도 없이 맨발로 걷던 길이었다.
짚단을 들고 발을 녹이며 걸었던 그 길을, 말을 타고 달리며 재형은 그런 환경에서도 얼어 죽지 않고 살아났다는 게 꿈만 같았다.
이윽고 지신허 마을에 도착했다. 그러나 동네는 썰렁하고 집들도 보이지 않았다. 옛 토굴 터에는 깨진 세간들이 나뒹굴었다. 재형은
아버지와 식구들이 잘못됐을까 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가난을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신 것은 아닐까. 재형은 인적을 찾아 다시 말을 몰았다.
다행스럽게도 한인들은 대부분 얀치혜라는 곳으로 이주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재형은 다시 말을 타고 얀치혜로 달렸다. 끝없는 평원을
한참 동안 달려 얀치혜에 도착하니 제법 너른 밭에 옥수수와 수수 잎이 검푸른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이곳은 지신허보다 땅이 기름져 보였다. 집들도
제법 모양새를 갖춰서 지신허에서 살던 움집이 아니었다. 밭에서 일하고 있던 노인이 말을 타고 나타난 재형을 보고 밭둑으로 걸어 나왔다. 아버지는
어디 살고 계실까. 오랜만에 한인들을 보니 재형은 아버지를 만난 것처럼 가슴이 뛰었다. ―중략―
최재형은 얀치혜에서
아버지를, 형과 형수를, 그리고 조카들을 만난다. 최재형은 소년에서 청년으로 외모뿐만 아니라 정신까지도 완전히 환골탈태한 상태였다.
최재형은 그동안 번 돈으로 집을 새로 짓고, 가축을 사서 집안을 부흥시킨다.
영국의 왕립지리학협회 여행가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는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이란 책에서 얀치혜가 비옥한 검은 흙으로 모든 곡식과 식물들이 잘 자라는 곳이며, 땅은 깨끗하게 경작돼
있고, 한인들의 촌락은 당시 조선과 비교하면 매우 강력한 지배층의 저택 같은 집들이 많다고 쓰고 있다. 큰 촌락은 보통 92만 평의 비옥한
농지를 갖고 있으며, 약 140여 가구가 거주한다고 밝히고 있다.
비숍 여사가 얀치혜를 방문했던 때가 1890년이니 최재형이
대저택을 짓고 개인농장을 만들어 농사일에 전념하여 마을이 부흥했던 때였음을 알 수 있다.
한인 노동자들 |
한인 노동자들 |
그 후 최재형은 본격적으로 통역관으로 일하게 된다. 최재형은 얀치혜에서 최초로 러시아 정교회 학교를 다녔고, 그 후 6년 동안 선장
부인에게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을 정도로 배운 데다, 블라디보스토크에 돌아와 상사원 생활을 하면서 직접 러시아 사람들을 상대했으니
최재형만큼 러시아어를 잘하는 사람은 아마도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러시아 문화까지 익혔기 때문에 누구보다 유능한 통역원이 될 수
있었다.
때마침 러시아의 동방정책으로 블라디보스토크에 많은 군대가 주둔하게 되면서 최재형은 해군소위와 경무관의 통역 등 러시아
군부와 치안 당국의 통역으로 활동하게 된다. 덕분에 최재형은 러시아인들로부터 더욱더 신뢰를 얻게 되었다.
박환 교수는 자신의 저서
『시베리아 한인 민족운동의 대부 최재형』에서 “최재형은 러시아 문물에 익숙하여 러시아 관원의 신임을 얻었으므로 우리 겨레의 노동자를 많이
비호하였다. 두 번이나 러시아의 수도 페테르부르크에 가서 러시아 황제를 뵙고 훈장을 받았으며”라고 박은식 선생이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최재형에 관해 언급한 내용을 인용하고 있다.
한인들은 러시아의 동방정책에 주요한 노동력을 제공했는데 똑같은 일을 해도 한인들은
러시아의 노동자들에 비해 턱없이 낮은 임금을 받고 있었다. 최재형은 이런 사정을 헤아리고 한인들을 차별하는 러시아인들에게 항의해 한인들의 처우를
개선해 준다. 그 후부터 한인들은 당연히 최재형을 의지하게 되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최재형을 찾아와 의논했다고 한다. 그 후 최재형은
얀치혜 남도소의 서기로 뽑혀 러시아의 공적인 업무를 보게 되는데, 최재형은 3년 동안 문서정리와 사무처리를 하면서 러시아의 공무를 담당하는
중요한 인물이 된다.
-참고도서: 박환 교수의 『시베리아 한인 민족운동의 대부 최재형』 사진=필자 제공
<문영숙
작가/안중근 홍보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