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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길재 기자의 성경에 빠지다] (30) 창세기
하느님의 약속과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다
지금까지 가톨릭 성경에 드러난 구세사를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가톨릭 신ㆍ구약 성경 각 권의 주요 내용과 구조, 문학 유형을 살펴보겠습니다.
책이나 문서의 시작 말 첫 단어를 그 책과 문서의 이름으로 하는 방식은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유래된 관습입니다. 창세기의 첫 낱말인 “한처음에”는 히브리어로 ‘브레쉬트’입니다. 「70인 역본」에는 이를 헬라어로 ‘게네시스’(Γενεσιs)라 번역했습니다. 창세기는 세상(우주)과 인류의 생성에 관해 상세히 묘사하고 있어 라틴어 대중 성경인 「불가타」는 ‘Liber Genesis’(생성의 책)라 했고, 한국 교회는 ‘창세기’(創世記)라 옮겼습니다.
창세기 구조
창세기 구조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전반부(1-11장)는 원역사(元歷史)로 세상과 인간 창조, 죄의 시작과 인류의 타락, 홍수, 민족들의 분열, 하느님께서 인간을 용서하시고 구원을 약속하심을 다룹니다. 후반부(12-50장)는 성조사(聖祖史)로 아브라함(12-25장), 이사악과 야곱(25-36장), 요셉(37-50장)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축복 약속(후손과 땅을 주겠다, 항상 함께 계시겠다)과 구원의 역사를 다룹니다. 이처럼 창세기는 천지 창조부터 성조들의 역사가 끝나기까지 인간의 구원을 갈망하시는 하느님과 인간이 펼치는 드라마를 기록해 놓은 책입니다.
아울러 창세기는 하느님의 약속과 구원을 위한 서막입니다. 창세기는 모세오경을 거쳐 여호수아기에 이르러 약속의 땅에 정착할 때까지 진행되는 대장정의 출발점이며, 신약 성경까지 연장되는 구원 역사의 시작입니다.(박요한 영식, 성서와함께 총서 구약 6 「창세기 1」, 15쪽 참조)
하느님
창세기에는 하느님의 고유한 이름(고유 명사)인 ‘야훼’와 일반 명칭(보통 명사)인 ‘엘로힘’이 등장합니다. 창세 1,1-2,4a의 창조 이야기에는 시종일관 ‘엘로힘’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창세 2,4b-3,24의 낙원 이야기에는 ‘야훼 엘로힘’을 표기합니다. 또 창세기 4장 카인과 아벨 이야기에는 ‘야훼’가 등장하고, 창세기 5장 족보에는 1절에서 ‘엘로힘’으로 시작한 다음 29절에선 ‘야훼’로 바뀝니다.
야훼는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직접 알려주신 당신 이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흠숭할 이름을 감히 함부로 입에 담을 수 없어서 히브리어 모음만으로 ‘아도나이’라고 불렀습니다. 야훼는 우리말로 “나는 있는 나다”(Ego sum qui sum, 탈출 3,13-15)라는 뜻입니다. 창세기는 야훼 하느님께서는 살아계시며 활동하시고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 역사에 깊이 개입하시어 주관하시는 능력의 하느님이라고 밝힙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알려 주심으로써, 과거에도 그랬고, 미래에도 그러할, 변함없고 영원한 당신의 성실함도 동시에 알려 주신다. 당신의 이름을 “나다”라고 알려 주시는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의 구원을 위하여 그들 곁에 늘 계시는 하느님이심을 알려 주신다.”(「가톨릭교회 교리서」 207)
인간
창세기는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됐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제외한 우주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만은 직접 ‘빚으시고’, 당신 ‘숨을 불어넣으시어’ 생명체가 되게 하셨습니다.(창세 2,5-7 참조) 하느님의 숨은 ‘생명의 숨’입니다. 이 생명의 숨은 인간을 다른 피조물과 근본으로 구별 짓습니다. 하느님의 숨을 받아들여 생명을 얻은 인간은 하느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다른 모든 피조물과 조화롭게 살고 책임을 지는 신분이 됩니다.
원죄
창세기 2-3장은 원죄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내용은 원래 독립된 이야기로 작성됐으나, 나중에 모세 오경 전체를 편집할 때 창세기의 이 부분에 들어오게 됐다고 성경학자들은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동산에 데려다 놓으시고 모든 열매를 따 먹을 수 있게 하십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동산 한가운데 있는 나무의 열매만은 절대로 따 먹지 말라고 금지령을 내리십니다. 그 나무 열매를 따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는 경고까지 하십니다. 이는 창조주께 속해 있는 인간은 창조 질서와 자유의 사용을 규제하는 윤리적 규범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을 알려주는 대목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자유 의지’로 그 열매를 따 먹습니다. 인간 스스로 하느님께 불순종해 하느님께서 세우신 질서를 파괴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인간의 죄와 죽음이 비롯됩니다.
창세기에서 원죄란 아담과 하와가 지은 첫 죄를 가리키며, 이 죄로 인해 인간은 하느님과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유혹자에게 굴복함으로써 지은 죄는 ‘개인의 죄’이지만, 그 죄가 타락한 상태로 전달될 ‘인간 본성’에 영향을 미칩니다. 인류는 하나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아담의 죄와 연관돼 있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이가 죄인이 되었다”고 지적합니다.(로마 5,19)
“이 죄는 인간 번식을 통해, 곧 원초적인 거룩함과 의로움을 상실한 인간 본성의 전달을 통해 모든 인류에게 전해질 것입니다. 이 때문에 원죄를 유비적으로 ‘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원죄는 ‘범한’ 죄가 아니라 ‘짊어진 죄’이며 ‘행위’가 아니라 ‘상태’입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404)
[성지에서 만나는 성경 말씀] 엘리사, 부농에서 예언자로
사람은 누구나 성격대로 한세상을 살아갑니다. 성격과 기질이 그의 삶을 좌우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성격 때문에 이런저런 삶을 산다고 평을 들을 이유는 없지만, 특정 기질을 발휘해 세상에 업적을 남긴 이가 있다면 존경받아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 인물들 가운데 성경에서는 기원전 9세기 북왕국에서 활동한 엘리사가 떠오릅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후계자입니다. 원래 겨릿소를 열두 마리 부리는 농부였으니(1열왕 19,16) 윤택한 집안 출신으로 추측됩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부르자 미련 없이 따라 나섭니다. 마치 예수님의 부르심에 제자들이 그물을 버리고 따라 나섰듯이 말입니다. 엘리사는 밭을 갈던 쟁기로 불을 피우고 소를 죄다 잡아 잔치를 베풉니다. 이로써 과거를 청산하겠다는 결심을 행동으로 보여주지요. 아마도 이런 결단력 때문에, 당시 이스라엘에는 전문 예언자들이 많았음에도(1열왕 20,35; 2열왕 2,3) 하느님께서 엘리사를 엘리야의 후계자로 지목하신 것 같습니다. 웬만한 강단으로는 최고 권력자와의 갈등도 감수해야 하는 예언자의 소명을 맡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엘리사가 지닌 근성과 결단력은 당시 예언자에게 가장 필요한 자질이었습니다.
엘리사의 근성은 엘리야과 함께 길갈에서 예리코로 가던 여정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엘리야는 승천하기 직전 자신을 따라오지 말고 남아 있으라고 만류하지만, 엘리사는 ‘당신을 떠나지 않겠다.’며 끝까지 따라갑니다(2열왕 2,2.4.6). 그래서 결국 엘리야의 승천을 보고, 자기 스승의 갑절이 되는 큰 능력도 받게 됩니다(2,9-10). 그 뒤 그는 기적을 행하며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예리코 성읍의 샘물에 소금을 뿌려 수질을 좋게 해주고(2,19-22), 과부의 두 아들이 가난 때문에 종으로 팔릴 위기에 놓이자 기름 한 병으로 그릇마다 채우는 기적도 일으킵니다(4,1-7). 불임이던 수넴 여인은 아이를 낳게 도와주고, 아이가 죽었을 때 살려 내기도 합니다(4,8-37). 심지어 그는 죽어서도 기적을 일으켜, 어떤 이의 주검이 엘리사의 뼈에 닿자 되살아납니다(13,21). 이 모든 기적은 엘리사가 진정 하느님께 속한 예언자임을 알려주었습니다.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민초들을 위해 헌신한 엘리사는 마태 19,21-22의 부자 청년과 비교됩니다. 그 청년도 완전한 사람이 되고픈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20절). 하지만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를 도우면 완전해지리라는 예수님의 조언에 그만 떠나가버리지요. 근성이 받쳐주지 못하자 자신의 한계에 슬픔을 느끼면서 말입니다(22절). 십계명은 완벽히 준수했지만 하늘나라의 보물을 차지하게 해줄 하나를 채우지 못한 그였습니다.
누구나 살아가는 동안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을 구분하며 삶의 중심을 잡으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생각만 하고 행동하는 데 소심해지기 일쑤지요. 그러기에 엘리사가 보여준 근성과 결단력은 오늘날 우리에게 훌륭한 귀감이 되어줍니다.
마르코 복음서 이야기 (26) 나병환자 치유(1,40-45)
한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도움을 청합니다. 그가 어떻게 예수님을 알게 되었으며, 언제 어디서 만나게 되는지 자세한 설명은 없습니다. 하지만 앞선 단락을 통해 퍼즐을 맞추어 볼 수 있습니다.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드러난 예수님의 권위는 갈릴래아 주변 모든 지방에 두루 알려지게 되었고(1,28), 나병환자는 그 소식을 자연스럽게 접했을 것입니다. 이후 예수님은 복음 선포를 위해 갈릴래아 전역을 다녔는데(1,35-39), 나병환자가 예수님을 만난 것은 제자들과 함께 카파르나움을 떠나 다른 마을로 이동할 때였을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 주목할 만한 점들이 있습니다.
첫째, 나병환자의 ‘믿음’입니다. 나병환자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으며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 시대 나병은 천벌(天罰)이라 생각했고 오직 하느님만이 낫게 하실 수 있는 불치병이었습니다(신명 28,27.35; 2열왕 5,6-7 참조). 나병환자는 하느님이 원하시면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도 그러한 신적 권능이 있음을 고백합니다(지혜 12,18 참조).
둘째, 예수님은 ‘가엾은 마음으로’ 나병환자를 직접 ‘만져’ 치유합니다. 율법은 나병환자의 몸에 손을 대는 이는 누구나 부정한 사람이 되기에 접촉하지 않도록 규정합니다(레위 13,45-46 참조). 하지만 예수님은 나병환자를 직접 어루만짐으로써 불치병을 치료할 뿐 아니라 율법 규정을 초월하여 인간의 고통에 공감합니다.
셋째, 예수님은 치유된 이에게 모세가 정한 규정(율법)에 따르라 명령합니다. 나병환자가 겪던 고통은 육체적인 것만이 아니라 하느님과 이웃으로부터 단절에서도 비롯됩니다. 율법에 규정된 대로 행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그가 치료되었음을 공동체로부터 인정받고 하느님 및 이웃과 친교의 삶을 살도록 하는 초대입니다.
제자들은 율법 규정을 존중하면서도, 율법을 초월하여 인간의 어려움에 다가서는 예수님을 체험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침묵 명령(“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 눈에 나병 치유는 예수님의 권위를 잘 드러낼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입니다(1,35-39 참조).
설화자는 치유된 이가 예수님의 침묵 명령에 따르지 않아 예수님이 더 이상 고을에 들어갈 수 없었다고 전합니다(1,45). 예수님과 나병환자의 상황이 뒤바뀌어 버린 것입니다. 이에 수신자는 호기심과 긴장감(Suspense)을 유지한 채 예수님이 자신의 의도를 언제 어떤 방식으로 전달할지, 앞으로 어떤 이야기가 전개될지 더욱 집중하게 됩니다.
[리길재 기자의 성경에 빠지다] (29) 사도들과 교회
교회의 시대, 땅끝까지 가서 복음 선포
사도행전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후 주님의 제자들이 어떻게 복음을 전했는지, 자신들의 믿음과 주님 부활의 체험을 어떻게 삶으로 이어갔는지, 그리고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알려줍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만큼이나 충격적인 체험을 합니다. 바로 ‘성령 강림’입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 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사도 2,1-2) 이제 주님과 결합된 성령께서 그리스도인들을,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를 이끄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승천과 성령 강림은 맞닿은 사건입니다. 구약 성경이 전하는 시대가 아버지 하느님과 함께 한 시간을, 복음서는 아드님 하느님이신 예수님과 함께 한 시간을 전한다면 이제 하느님의 거룩한 영이 함께하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됐습니다. ‘교회의 시대’라고도 부르는 이 시대는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이기도 합니다.(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4월 16일자 1410호 ‘허규 신부와 떠나는 신약 여행’ 44편 참조)
그래서 교회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할 수 없습니다.’(1코린 12,3)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 영께서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고 계십니다.’(갈라 4,6) 이러한 신앙의 인식은 성령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그리스도와 만나기 위해서는 먼저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보다 앞서 오셔서 우리 안에 신앙을 불러일으키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신앙의 첫 성사인 세례성사를 받음으로써, 성부 안에 근원을 두고 성자 안에서 주어진 ‘생명’은 교회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개인적으로 내밀하게 전달됩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683)
주님의 부활과 성령 강림으로 이전까지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사도들은 완전히 바뀝니다. 그들은 땅끝까지 복음을 선포하고 신앙 공동체를 설립합니다. 그 시작은 베드로 사도였습니다. 오순절 날 예루살렘 성전에 모인 유다인들에게 그는 공개적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선포합니다. “이스라엘인 여러분, 이 말을 들으십시오. 여러분도 알다시피, 나자렛 사람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여러 기적과 이적과 표징으로 여러분에게 확인해 주신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통하여 여러분 가운데에서 그것을 일으키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미리 정하신 계획과 예지에 따라 여러분에게 넘겨지신 그분을, 여러분은 무법자들의 손을 빌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죽음에 사로잡혀 계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사도 2,22-24) 베드로뿐만 아니라 모든 사도의 설교는 이렇게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중심 내용을 선포합니다. 교회는 이 고백을 ‘케리그마(kerygma)’라고 부릅니다.
사도들은 또한 “하느님의 가장 큰 업적은 죄 중에 있던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당신과 화해시킨 것”이라고 설교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화해 말씀을 전하는 ‘화해의 직분’을 맡은 사람들(2코린 5,18)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교회의 사명’이라고 선포합니다.
사도들은 아울러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은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이에 맞갖게 동정과 호의, 겸손과 온유, 인내를 간직하여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며 감사하는 삶을 살아달라고 요청했습니다.(콜로 3,12 참조) 바오로 사도는 이러한 삶을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새 삶’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이든 행동이든 무엇이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면서,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라”고 권고했습니다.(콜로 3,17) 사도들은 무엇보다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고 지킬 것’을 강조했습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8)
복음 선포와 함께 교회 구성원들은 유다인에서 이방인으로 확장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구원을 위한 것이면서 당신 몸인 교회 안에 서로 다른 유다인과 이방인들을 하나로 만드는 사건입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에페 2,14)
사도들은 예루살렘에서 시작해 소아시아, 로마, 스페인과 아시아의 땅끝까지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사도들과 교회가 모든 이에게 복음을 선포하려고 노력하는 이유는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라고 주님께서 명하셨기 때문입니다.(마태 28,19-20)
성령 강림으로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든 구성원이 하나의 몸을 이루고 구원의 공동체가 됐습니다. 하느님의 성전인 교회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 날까지 지속할 것입니다.
[다윗 이야기] “헤브론으로 가거라.”(2사무 2,1) - 다윗이 임금으로 세워지다
여섯 번째 이야기 : 2사무 2-5장
다윗이 부하들을 데리고 필리스티아 임금이 준 성읍 치클락에서 망명생활을 한 지 일 년 사 개월 되었을 때 사울 임금은 전쟁에서 패배하고 죽는다.(1사무 27-31장) 다윗은 전쟁의 용사였던 사울과 요나탄의 죽음을 기리면서 ‘활의 노래’(1,19-27)를 지어 부르며 그들을 애도한다. 이제 다윗의 목숨이 위태로운 시기는 지났다. 그는 도피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인 유다 땅으로 가려는 마음이 들어 주님의 뜻을 묻는다.
“그 뒤 다윗이 주님께 여쭈어 보았다. ‘유다의 성읍들 가운데 한 곳으로 올라가도 되겠습니까?’ 주님께서 그에게 ‘올라가거라.’ 하고 이르셨다. 다윗이 다시 ‘어디로 올라가야 합니까?’ 하고 여쭈어 보자, 그분께서는 ‘헤브론으로 가거라.’ 하고 말씀하셨다.”(2,1)
다윗이 하느님과의 대화에서 “올라가도 되겠습니까?”, “어디로 올라가야 합니까?”라고 두 차례에 걸쳐 묻는 가운데 서두르지 않는 태도가 눈길을 끈다. 자신의 생각과 판단보다 주님의 계획에 따른 허락을 기다리는 겸허함 때문이다. 다윗은 삶의 중요한 순간에, 특히 어려움에 처했을 때 항상 주님께 묻는 모습을 보여 왔다. ‘여쭈어 보았다’로 번역된 동사 ‘샤아르’는 ‘묻다’라는 뜻으로 다윗이 주님과 대화하는 사무엘기의 네 가지 이야기에서 찾을 수 있다.
첫째, 크일라에 도피하던 다윗은 사울이 자기 때문에 그 성읍을 파괴하러 온다는 소식을 듣는다. 다윗은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 당신의 종인 저는…”라는 말로 자신을 낮추면서, 그곳을 떠나야 할지 묻고 주님의 말씀에 따라 자신의 행동을 선택한다.(1사무 23,1-5)
둘째, 다윗과 부하들의 거주지였던 치클락을 아말렉족이 약탈하고 아내와 아이들을 끌고 간 참담한 상황이 벌어진 때이다. 군사들은 불탄 성읍을 보고 다윗을 탓하며 돌을 던져 죽이자고 수군거린다. 곤경에 처한 다윗은 주님께 이 강도떼를 쫓는다면 따라잡을 수 있는지 여쭙는다. “쫓아가거라. 반드시 따라잡을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되찾을 수 있다.”라는 주님의 말씀에 그는 종일토록 전쟁을 치르고 마침내 모든 것을 도로 찾아온다.(1사무 30,1-20)
셋째, 위에 인용된 단락으로 사울의 죽음 이후의 상황에서 다윗은 주님께 유다 땅에 거주지를 마련해도 되는지, 구체적으로 어디로 정할지 묻는다. 다윗은 주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헤브론으로 거처를 옮긴다. ‘네 개의 성읍’이라는 뜻을 지닌 헤브론은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약 32킬로미터 떨어진 유서 깊은 곳이며 아브라함, 이사악, 사라 등 이스라엘 성조들의 무덤이 있는 중요한 곳이다. 다윗에 대한 주님의 계획이 무엇이기에 헤브론으로 그를 보내셨을까?
“다윗은 함께 있던 부하들도 저마다 가족을 데리고 올라가게 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헤브론의 여러 성읍에 자리 잡았다. 그러자 유다 사람들이 와, 거기에서 다윗에게 기름을 붓고 그를 유다 집안의 임금으로 세웠다.”(2,3-4)
헤브론에서 다윗은 비록 유다 지파만을 통치하지만 기름부음받은이로서 군주가 된다. 한편 사울 군대의 장수였던 아브네르는 사울의 아들 이스 보셋을 온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세운다.(2,8-9) 서로 다른 임금을 둔 사울 집안과 다윗 집안 사이의 싸움은 오래 계속되는 가운데 다윗은 갈수록 강해졌고 사울 집안은 갈수록 약해진다.
다윗이 유다를 다스린 지 일곱 해가 지났을 때 사울의 장수 아브네르는 이스라엘의 임금인 이스 보셋을 배반한다. 결국 이스 보셋이 내부의 적에게 살해됨으로써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의 마음은 다윗에게 기울어진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의 원로들이 모두 헤브론으로 임금을 찾아가자, 다윗 임금은 헤브론에서 주님 앞으로 나아가 그들과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세웠다.”(5,3)
헤브론에서 다윗이 온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리는 첫 임금이 되었을 때 그의 나이는 서른 살이었다. 하느님께는 큰 그림이 있었지만 다윗에게는 언제, 어떤 형태로 이루어질지 알지 못하는 그림이었다. 다윗은 자신을 향한 주님의 뜻을 때에 따라 묻고 듣는 가운데 그저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을 뿐이었다.
임금이 된 후에도 다윗은 중요한 상황 앞에서 여전히 주님께 묻고 그 뜻을 따라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샤아르(묻다)’ 동사가 쓰인 넷째 이야기는 다윗이 임금으로 세워졌다는 소식을 들은 필리스티아가 그를 잡으려 쳐들어 온 때의 일이다. 다윗이 “필리스티아인들을 치러 올라가도 되겠습니까?”라고 묻자 주님께서는 “올라가거라. 내가 반드시 필리스티아인들을 네 손에 넘겨주겠다.”라고 답하신다. 다윗은 주님의 지시에 충실히 따름으로써 적들을 격퇴시키는 대승을 거둔다.(5,17-25)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행위는 ‘듣는 것’이다. 피조물들이 자연법칙에 따라 하느님 뜻을 실현한다면, 인간은 하느님과 주고받는 대화를 통해 그분의 협력자가 된다. 하느님께 묻지 않고 행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도 묻지 않으며, 그 역도 성립한다. 그는 자신에게 묻고 스스로 대답하며, 하느님이 아닌 자기 자신을 섬기게 되어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된다. 먼저 내 가까이에 있는 사람에게 묻고 듣는 연습을 해 나가면 어떨까. 주님은 사람을 통해서 당신 뜻을 자주 드러내시니 말이다.
“올라가도 되겠습니까? … 어디로 올라가야 합니까?”(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