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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에게 본 받을 점
창 32: 22-32
최근에 인생역전 이야기로 미국의 젊은이들에게 감동과 용기를 준 사람이 있어서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컴퓨터회사 애플의 최고 경영자(CEO)인 스티브 잡스(Steve Jobs)입니다.
그가 지난 6월 14일 미국의 스탠포드 대학 졸업식에서 축사를 했는데,
그 축사 내용이 대학 홈페이지에 소개됐고 많은 사람들이 읽고 감동과 용기를 얻게 된 것입니다.
그 내용은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는 미혼모 슬하에 태어났고 가난한 양부모 밑에서 자랐으며 대학도 이름 없는 대학 그것도 한 학기 밖에 다니지를 못했답니다. 대학을 청강생으로 자기가 듣고 싶은 과목 몇몇을 들었는데 이것이 후일에 매켄토시 컴퓨터를 만드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함께 애플 컴퓨터 회사를 만들어 중역으로 일하다 회사에서 쫓겨나게 되었답니다.
그러나 이를 악물고 창업하여 신기술로 회사를 일으켰고
이것이 약이 되어 애플과 합병하여 지금 그 총수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1년 전에 췌장암 진단을 받고 3개월 밖에 살지 못한다는 소리를 들어 절망했었답니다.
그러나 수술을 받고 회복이 되어
지금은 오늘이 마지막 말이라는 마음으로 살며 회사를 크게 성장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스티브 잡스라는 사람은 자기 인생에 세 번의 위기가 찾아왔었는데,
오히려 이것을 역전시켜 자기 성공의 발판으로 삼을 수 있었습니다.
그 비결을 그는 한 마디로 “사랑하는 것을 찾는다!”(I've got to fine what I love)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에는 여러 차례 위기가 찾아옵니다.
그 위기 앞에서 절망하다가 인생을 망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위기를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아 인생의 역전을 이루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위기가 찾아왔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 위기를 어떻게 대하느냐가 정말 중요한 문제입니다.
성경을 보면 인생의 위기를 인생역전의 기회로 삼아 큰 성공을 이룬 사람들이 여럿 있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야곱입니다.
이 야곱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큰 감동과 용기를 줍니다.
야곱은 성공하기 위해 극복해야 할 몇 가지 약점들이 있었습니다.
우선 그는 장남이 아니었습니다.
야곱은 이삭은 쌍둥이 아들 중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형 에서는 장자라는 명분으로 특별한 대우를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가문의 큰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자랐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달랐습니다.
특별한 배려나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성공을 향해 나아가기가 그만큼 쉽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다음으로 그는 성격적 문제가 있었습니다.
에서는 사냥에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호탕한 사람으로 남다른 지도력을 발휘하며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남자로서 갖추어야 할 능력이 부족했습니다.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으로 사람들과 어울리기 보다는 혼자 집에 있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별로 사람들에게 성공할 재목으로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더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치명적인 실수를 범했습니다.
아버지 이삭과 형 에서를 속였습니다.
먼저 배고파 쩔쩔 매던 형 에서를 팥죽으로 유혹해서 장자의 명분을 빼앗았습니다.
그리고 늙어 사람을 분별하지 못하는 아버지 이삭을 자신이 에서라고 속여서 에서 대신에 축복을 받았습니다.
장자 명분과 유업의 축복을 비열한 방법으로 빼앗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더 이상 집에 마물러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죄인으로 도망쳐야만 하는 상황을 맞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는 가족과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아무런 도움도 받을 수 없는 형편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볼 때 야곱은 성공하기에는 너무도 좋지 않은 상황 속에 있었습니다.
절망하며 인생을 포기하기 쉬운 조건들 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런 악조건을 딛고, 인생의 위기를 극복하고 성공적인 인생을 살 수 있었습니다.
큰 가문을 이루었습니다.
큰 재산도 모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족장으로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중심에 우뚝 서게 됐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었을까요? 성경에서 그 이유를 찾아보겠습니다.
1. 하나님을 붙잡았습니다.
야곱이라는 이름은 그가 태어날 때 모습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창 25:26을 보면 야곱은 태어날 때 쌍둥이 형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름을 야곱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야곱이라는 이름은 “발뒤꿈치를 붙잡는 자”(heel holder)라는 뜻입니다.
사실 야곱은 사람을 붙잡고 살았습니다.
자기가 갖고 싶은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붙잡았습니다.
그의 도움을 얻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나아가 그것을 빼앗고자 했습니다.
한 마디로 야곱은 사람을 바라보고, 사람을 의지하고, 사람과 씨름하며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이 바뀝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바꿔주신 것입니다.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창 32:28을 보면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고 되어있습니다.
하나님과 싸워 이기었다는 뜻이라는 말입니다.
실제로 야곱은 얍복 강가에서 밤새 기도하다가 천사를 만났습니다.
그를 붙잡았습니다.
축복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뜻 축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새벽이 되어 천사가 떠나야 하는데 놓아주지 않습니다.
천사가 그의 환도 뼈를 쳐서 위골이 되었는데도 붙잡은 것을 놓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볼 때 이스라엘이란 하나님을 붙잡은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붙잡고 살던 야곱이 하나님을 붙잡고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이란 하나님을 붙잡고 사는 사람들이라는 뜻이기도 한 것입니다.
야곱의 인생을 살펴보면 중대한 고비 고비마다 그가 철저하게 하나님을 붙잡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그가 형 에서에게 쫓겨서 멀리 하란으로 도망치다가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여기서 그가 하나님을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오다가 형 에서가 자기를 치러 온다는 사실 때문에 두려워 할 때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여기서 그가 하나님을 굳게 붙잡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야곱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붙잡은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붙잡자 하나님께서 그를 인도하시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로 홀몸으로 하란으로 갔지만 일가를 이루었고 큰 재산도 모으고 떼를 이루어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형 에서와의 전쟁의 위기를 만났을 때 하나님의 인도로 순적하게 형 에서와 화해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붙잡고 계십니까?
혹시 그 누군가 사람을 의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시 돈이나 내가 가진 그 무엇인가를 의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시 146:3-5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찌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창 35:1을 보면 하나남께서 야곱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게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야곱이 잠깐 한 눈을 팔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벧엘로 올라가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한 눈 팔지 말고 다시 하나님을 붙잡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하나님만 의지하다가고 잠깐씩 한 눈을 팔 때가 있습니다.
그 때 빨리 벧엘로 돌아가야 합니다.
얍복강가로 돌아가야 합니다.
다시 하나님을 붙잡아야 합니다. 그래야 성공적인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2. 철저하게 변했습니다.
야곱은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위해 크게 쓰임 받기에는 적절치 않던 사람입니다.
그는 대단히 교활한 사람이었습니다.
남의 약점을 이용해서 자신의 이득을 취했던 사람입니다.
배고픈 형 에서를 속여서 장자권을 배앗았습니다.
앞을 잘 보지 못하던 아버지를 속여서 축복을 가로챘습니다.
그리고 교활한 방법으로 외삼촌 라반을 속였습니다.
그러나 저가 하나님을 붙잡자 하나님께서 저를 변화시키셨습니다.
우선 그를 크게 피해를 당하게 하셨습니다.
31: 7을 보면 야곱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대들의 아버지가 나를 속여 품삯을 열 번이나 변역하였느니라 그러나 하나님 그를 금하사 나를 해치 못하게 하셨으며...”
하나님께서는 야곱보다도 더 교활한 라반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철저하게 당하고 속게 하셨습니다.
그 뿐 아니라 연단의 용광로 속으로 밀어 넣으셨습니다.
감당키 힘든 고난을 주셨습니다.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죽도록 고생했습니다.
지속적인 시련이 그를 따라다녔습니다.
그가 자신의 인생을 돌아볼 때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고 할 만큼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롬 5:3-4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는 말씀처럼 그에게 큰 환난의 시련을 주셨습니다.
야곱은 이런 시련을 통해 철저하게 새 사람으로 변화되어갔습니다.
그런 변화를 통해 그는 성공적인 인생의 길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2000년대에 들어오면서 가장 많이 듣는 말 가운데 하나가 바로 “변해야 산다!”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하도 세상이 빠르게 변하니까 거기에 적응하려면 변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내가 변하지 않으면 도태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이미 주님께서 2000년 전부터 하신 말씀입니다.
세상이 변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변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고,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서점에 갔다가 베스트 셀러를 모아놓은 곳을 보았습니다.
성공에 관한 책들이 여러 권이 놓여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책들을 대략 훑어보면서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가 있었습니다.
바로 성공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과 다른 습관이 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 점을 두드러지게 연구해서 정리해 놓은 책이 아이오아이컨텐츠 개발팀이 출판한 “성공하는 좋은 습관 실패하는 나쁜 습과 169”입니다.
이 책이 강조하는 것은
성공하는 사람은 나름대로 좋은 습관이 있고, 실패하는 사람들도 나름대로 나쁜 습관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공하려면 나쁜 습관을 버리고 좋은 습관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공은 일시적인 노력이나 남다른 상황과 조건 때문에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의 습관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표현으로 해 본다면 사람이 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속사람이 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피고 있는 야곱은 철저하게 변했습니다. 그 속사람이 변했습니다. 물론 그 습관도 변했습니다. 그 결과 성공적인 인생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변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습관이 변해야 합니다.
예배 드리는 습관이 변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습관이 변해야 합니다.
말씀을 대하는 습관이 변해야 합니다. 그러면 성공할 수 있습니다.
3. 최선을 다했습니다.
야곱은 정말 인생을 최선을 다해서 살았습니다. 정말 집요하고 끈덕지게 살았습니다.
창 29장을 보면 야곱이 외삼촌의 집에 가서 라헬을 보고 그를 아내로 맞고 싶어 했습니다.
라반과 7년을 일하면 아내로 주겠다는 약속을 하게 됩니다. 아내를 얻고자 하는 일념에 7년을 하루같이 일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라반에게 속아서 레아를 아내로 얻게 됩니다.
그러나 야곱은 물러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7년을 일합니다. 그래서 무려 14년 일해서 아내 라헬을 얻게 됩니다. 야곱은 라헬을 아내로 맞이하고자 하는 목표를 세워놓고 무려 14년 동안이나 종처럼 일을 했습니다. 정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창 32장을 보면 그가 얍복강가에서 기도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24절을 보면 그가 날이 새도록 천사와 씨름했다는 것입니다. 철야하며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천사가 환도뼈를 쳐서 큰 고통 중에서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정말 죽도록 기도한 것입니다. 정말 최선을 다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야곱은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자기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것이 또한 그의 성공 비결입니다.
1968년 멕시코 올림픽 마라톤 경기 때 있었던 일입니다.
출발신호가 나서 선수들이 달려 나가면서 한 선수가 옆 선수에게 부딪혀 넘어졌습니다.
달려 나가는 선수들에게 밟히기도 해서 달리기 불가하다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이 선수는 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걷기도 하고 찔뚝거리다 넘어지기도 하고...
모든 경기가 다 마치고 관중들도 하나 둘씩 자리를 뜰 무렵 지루하게 기다리는 심판들 시야에 한 선수가 시야에 나타났습니다. 바로 그 탄자니아에서 온 아크와리 선수였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관중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우렁찬 박수를 보냈습니다.
경기 후 기자들이 물었습니다.
“왜 꼴찌 일줄 알면서도 끝까지 뛰었습니까?”
조국 탄자니아가 나를 믿고 이 멀리까지 나를 보냈습니다.
금메달은 가지고 돌아가지는 못하지만 조국에 불명예를 끼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이것이 제가 끝까지 뛴 이유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최고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최선을 다할 수는 있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최고가 되려는 것이 아니고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하다 보면 언젠가 최고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최고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에 성공하려면 늘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최선을 다하는 사람에게 언젠가는 성공은 찾아오게 되어있습니다.
야곱은 그 힘겨운 인생길을 늘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결국 성공적인 인생을 살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최고이기를 바라지 않으십니다.
최선을 다하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내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인생을 성공적인 인생으로 가꾸어 가려면 하나님을 붙잡아야 합니다.
철저하게 변해야 합니다.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가 넘어야 할 마지막 벽
(창 32:22-32)
사람은 누구나 성공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자기 뜻대로 성공하는 사람은 극희 드믑니다.
성공이 어려운 이유는 능력 문제도 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장애물을 뛰어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공이라는 골인지점을 향해 가려면 수많은 장애물을 넘어야 합니다.
그 장애물을 제압하든지, 피하든지, 아니면 뛰어 넘어야만 성공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온전한 영광을 돌리며 복된 생활을 하려고 할 때 여러 가지 장애물이 나타납니다.
그런 장애물을 넘어야만 하나님께 인정도 받고 쓰임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고난과 역경,
그리고 환난과 시련이라는 장애물을 극복하게 될 때 쓰임을 받았던 것입니다.
요셉도, 모세도, 그리고 다니엘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뛰어넘기 가장 힘든 장애물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람이라는 장애물입니다.
재난이나 환경으로부터 오는 장애물도 힘들고 어려운 것이 있으나
가장 넘기 힘든 것은 사람이라는 장애물입니다.
요셉은 형제들이 장애물이기도 했고,
보디발 장군의 부인이 장애물이기도 했습니다.
모세는 바로가 장애물이기도 했고 고라가 장애물이기도 했습니다.
우리 예수님도 가롯 유다, 바리새인, 제사장, 장로들 등, 뛰어넘기 힘든 장애물을 넘었습니다.
특별히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크게 쓰신 사람일수록 사람 벽, 사람 장애물을 뛰어 넘었던 것입니다.
특히 오늘 우리가 봉독한 성경의 주인공인 야곱은 그 대표적인 사람인 것입니다.
에서라는 형, 라반이라는 외삼촌, 정말 감당키 힘든 사람 벽을 잘 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도 사람의 벽을 뛰어 넘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신앙 생활하다 실족한 사람들 중 사람이라는 장벽에 걸려 넘어진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비단 신앙생활뿐만이 아닙니다. 사회생활, 가정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행복을 맛보며 살아야 할 가정이 깨어집니까?
왜 직장생활에서 잘 적응하지 못하고 힘들어합니까?
사람이라는 벽을 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그 벽을 넘지 못하고 되돌아서거나 갈라서거나, 아니면 직장을 버리고 나옵니다.
그러나 그곳의 사람 벽을 넘지 못하고 피하면 다른 곳은 그런 사람이 없을까요?
교회에서도 그 사람 꼴 보기 싫어 교회 옮기면 다른 교회는 그런 사람이 없나요?
겉으로만 보면 다 천사들만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좀 들여다보면 다 죄인입니다.
그렇다면 사람 벽을 넘으려면 어찌해야 할까요?
1.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야 합니다.
1) 모든 인간은 죄인임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라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 아담이 범죄함으로 모든 인간은 죄를 짓게 되었고 결국 의인이 한사람도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은 죄인이며 누구나가 완전한 사람이 하나도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2) 사람은 행위로는 완전한 사람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 누구도, 아무리 거룩해 보이고 위대해 보여도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죄인입니다.
행위로 하나님 앞에 온전하다고 인정 될 자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50보 100인 것입니다.
다만 죄인은 죄인이되 용서 받은 죄인과 용서 받지 못한 죄인이 있을 뿐입니다.
또 들킨 죄인과 안 들킨 죄인이 있을 뿐입니다.
교도소 안의 사람과 밖의 사람은 그 차이뿐입니다.
그러기에 들킨 죄인은 마음이 평안하고 안 들킨 죄인은 하루하루 불안하게 살어름 판을 걷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구속의 은총, 대신 십자가에서 죄를 속하시는 은총이 필요한 것입니다.
3) 그러기에 사람은 사랑의 대상이지 의지할 대상은 아닙니다.
그러기에 사람의 벽을 넘으려면 이 사람이 누군지에 대한 분명하고도 명확한 정리가 필요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그래서 시편146편 3절에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했고
5절에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누구를 믿을 수 있나요? 누구를 의지 할 수 있나요?
하나님은 이부분에 대해 철저하게 우리를 훈련하십니다.
사람을 의지하고 환경을 의지하고 내 힘을 의지하면 반드시 실패하게 하십니다.
철저하게 하나님 한분만을 신뢰할 때 영광이 나타나게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은 “사람은 믿을게 못돼!” 하면서도 또 믿고 실패하고 또 믿고 낙심하곤 합니다.
신뢰의 대상도 아닙니다.
의지할 대상도 아닙니다.
오직 주의 사랑으로 사랑할 대상이며 섬길 대상입니다.
2. 사람 벽은 꿈이 클수록 높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야곱이 겪었던 모습을 보세요.
부모를 속이고 형 ‘에서’의 복을 훔쳐 도망을 쳤습니다.
그 댓가로 엄청난 세월동안 속임을 당하고 착취를 당합니다.
그러고도 사람 벽은 뛰어넘지 못합니다.
외삼촌 벽은 뛰어 넘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벧엘’로 올라가면서 에서의 벽을 넘어야 하는데 그것이 쉽게 해결되질 않습니다.
결국 그는 해결방법을 찾았습니다.
하나님과 단판을 짓는 것입니다.
싸움의 결국을 보세요.
하나님이 문제 해결을 약속하지 않고 이름만 바꾸어주고 환도 뼈만 부러트려 놓습니다.
어떤 의미가 들어 있습니까?
사람 의지하지 말라, 네 힘도 의지하지 말라, 하나님만이 해결자이다.
그것을 의지하게 합니다.
결국 그는 하나님을 만나 문제를 해결 받습니다.
그의 가장 큰 사람 벽인 에서문제를 해결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크게 쓰임 받을 사람일수록 사람 벽을 높게 만들어 놓습니다.
그 해결책을 사람에게서 찾지 못하게 하고 자기능력에서 찾지 못하게 합니다.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을 겪을 때도 예수님은 밤 사경 즈음 나타납니다.
왜 그때서 나타나셨나요?
예수님은 산위에 올라가셔서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이 고생하는 것 다 보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즉시 찾아가지 않고 기다립니다.
뭐를요?
제자들이 손들 때를 기다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 때문에 힘듭니까?
그럼 속히 하나님께 손을 드시기 바랍니다.
사람 때문에 살맛이 안 납니까?
그 사람을 내게 부쳐주신 하나님의 의도를 깨닫기를 바랍니다.
그 사람 벽을 넘어야 나를 쓰십니다.
그 사람 벽을 못 넘으면 거기서 끝입니다.
사람 벽이 너무 큽니까?
3. 사람 벽은 하나님의 방법으로만 해결할 수 있음을 믿어야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방법은 어떤 것일까요?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주님을 만나면 길이 열립니다.
1) 내가 바뀌어야 합니다.
야곱의 문제는 에서가 문제가 아니고 자신이 문제였습니다.
속이고 빼앗고 했던 이기심이 가득한 야곱, 그가 바뀌어야 해결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천사로 나타나 그를 꺾어놓으시고 그 이름을 바꾸어주셨습니다.
사람 벽을 넘을 수 있는 최고의 비법은 내가 바뀌는 것입니다.
내 생각을 바꾸고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러면 문제가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문제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벽도 그렇습니다.
사람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 사람을 바라보는 내가 문제입니다.
그러기에 내가 바뀌면 문제는 금방 해결되는 것입니다.
남편이 벽입니까?
남편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꾸셔야 합니다.
원수가 아니고 축복의 도구입니다.
그러기에 내가 바뀌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내 남편을 고쳐주세요, 기도할 것이 아니라 나를 고쳐주세요 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세요.
여러분이 남자라면 여러분 같은 아내에 만족하며 죽도록 돈벌어 오겠습니까?
남자들도 마찬가지, 여러분이 여자 같으면 여러분 같은 남편에 죽도록 수발들며 내조하겠습니까?
내가 바뀌어야 합니다.
나는 안 바꾸고 저쪽만 바꾸어 달라고 철야를 하고 금식을 하고 난리를 쳐도 안 바뀌는 것입니다.
남편이 예수 안 믿는 여자성도 여러분! 깊이 생각을 하시기 바랍니다.
남편이 예수를 믿는 여자 성도여러분! 정말 행복한 아내임을 믿으셔야 합니다.
2) 철저하게 하나님의 의도를 파악해야 합니다.
사람 벽을 넘을 수 있는 두 번째 방법은 속히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사람 벽이 내게 유익일수 있습니다.
사람 장애물이 나를 더 기도하게끔 하고 내 신앙을 더 든든히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다윗이 다윗 된 것은 사울이라는 사람 벽과 압살놈이라는 아들 벽이 있었기 때문에 위대한 인물이 된 것입니다.
욥이 욥 된 것은 그의 악처 때문이며 그의 못된 친구들 때문에 더 굳건한 인물이 된 것입니다.
때로는 염소 같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런 사람을 내 옆에 붙여주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깨닫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낙망과 절망이 기쁨과 감사로, 우리에게 다가 오게 됩니다.
3) 그 사람이 내 아군이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생활 중 많은 사람이 목사, 장로, 권사 등 중직자들에게 상처를 받습니다.
또는 한 구역, 목장에서 상처를 받고 넘어집니다.
그러나 그들은 원수가 아닙니다.
내 적이 아닙니다.
하나님 편에 속한 아군입니다.
그런데 아군을 적군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 생각과 다르다고, 내게 손해를 준다고, 전부 적군으로 여기면 어리석은 것입니다.
물론 적군의 종노릇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진정한 적군은 오직 마귀뿐입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는 모든 사람은 아군입니다.
그런데 사람 벽을 넘지 못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군을 적군으로 오인하고 그들과 싸우다 부상을 입습니다.
아군인데 내 편견, 내 생각, 내 이익만을 앞세우다가 아군을 적군으로 생각하고 싸우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우리 모든 성도는 아군입니다.
아군 적군을 제대로 구분하려면 어찌해야 할까요?
주님의 방법이 해결책입니다.
1)내 욕심을 벗어 버리고 주님의 편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2)지금 당장을 보지 마시고 앞날을 크게 보고 미래를 보아야 합니다.
3)그리고 주님이 베드로를 대하듯 사랑과 용서로 넘어가야 합니다.
4)그리고 마지막으로 끝까지 인내해야 합니다.
그러면 적군처럼 보이는 어떤 사람도 내편이 되고 나를 가로막는 모든 사람 벽은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사람 벽만 넘으면 환경의 벽, 재난의 벽, 그리고 물질의 벽은 문제도 아닙니다.
우리가 넘어야 할 마지막 벽인 사람의 벽을 넘어 주님의 신령한 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