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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세시대 엘레지
강 문 석
준호는 코로나19 펜데믹을 거치면서 한때 요란했던 백세시대 구호마저 점차 잦아든다는 느낌이 들었다. 처음 백세시대란 말이 나왔을 때만해도 사람들은 너나없이 모두 백세를 살 것처럼 들떴었다. 그런 중에도 준호는 조용히 눈을 감고 생각했었다. 이제 모진 가난시대가 끝난지 오래고 영양도 저마다 제대로 섭취하는데다 의술마저 크게 발달하였으니 나도 잘하면 팔구십은 살겠구나.
그랬지만 정작 그의 눈에 띄는 백세를 사는 사람은 그다지 늘어나 보이지 않았다. 이제 겨우 인생 팔십에 도달한 준호 자신도 하루가 다르게 기력이 떨어지는 걸 몸소 느끼고 있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 체험하는 이러한 체력저하는 결국 죽음과 맞닿아 있을 터이니 준호는 백세시대를 함부로 떠들어대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준호가 일흔을 막 넘어섰을 때 백세의 딱 절반을 살고 떠난 직장 선배 학수가 기억에 자주 떠올랐다. 선배가 처음 생각났을 때 준호는 혹시 저승에 먼저 간 그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지나 않을까 싶었다. 그렇다면 준호는 선배를 만나기 위해서라도 이승을 등져야하니 실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선배가 떠오르기 전에도 한번씩 준호는 이제 이승의 삶은 길어봐야 십 년, 그렇지 못하면 오 년이란 생각을 자주 해오던 터였다.
여든까지 살아오면서도 준호는 세 차례나 저승 문턱을 체험했었다. 준호가 생후 1년 반에 만난 원자탄 세례는 성장하면서 줄곧 어머니로부터 들었던 레퍼토리로 그 자신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갓난아기 때의 일이었다. 8월 초였던 역사 속 그날, 공중에서 떨어진 원자탄은 강제징용에 끌려간 광부들 판자촌에도 화재를 일으켰고 탄광에서 달려온 준호 아버지가 모기장 속에 잠든 어린 목숨 중 세 살 위인 딸보다 아들인 준호를 먼저 구했다는 말로 생전의 어머닌 자주 아들 기를 살려주었다. 지금까지도 준호 호적에 등재된 히로시마 출생지 주소가 주홍글씨처럼 남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히로시마 악몽에 비하면 생후 6년을 막 지나 맞닥뜨린 동란은 70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 준호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불법 남침으로 쳐들어온 공산군에 밀려 준호네 가족도 보금자리인 추풍령 밑 작은 도시를 떠나 낙동강 줄기를 따라 남하하는 피란민 대열에 합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느닷없이 피란민 중에 빨갱이가 섞였다며 아군 전투기들이 떼 지어 몰려와 백사장에서 점심을 먹고 출발명령을 기다리는 피란민들을 기총소사로 볶아댔다. 삽시간에 생지옥으로 변한 백사장은 붉게 물들었고 준호는 혼자서 언덕 위 피란 떠난 빈 집으로 숨어들었지만 결국 그날 아버지를 여의고 말았다. 그날 생지옥 같은 아비규환 속에서도 이승만이 피란민에게 포격명령을 내렸다는 흑색선전이 빠르게 퍼지던 일을 준호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2002 한일월드컵 열기가 뜨겁던 6월. 이때 이미 준호는 직장을 떠나온 뒤인 터라 집에서 티브이로 축구경기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오른쪽 눈썹에 여드름처럼 작은 종기가 돋는 바람에 자꾸 신경이 쓰였다. 상비약 통에서 고약을 찾아 종기 위에 붙이자 삽시간에 눈이 덮일 정도로 눈두덩이 부어올랐다. 준호는 슬리퍼를 끌고 집에서 가까운 종합병원을 찾아갔다. 엑스레이 결과를 확인한 신경외과 과장은 준호에게 바로 사형선고를 내려 주었다. 그는 아주 점잖은 말투로 빨리 이승의 삶을 정리하라 했고 평소 성당에서 만나면 식사와 술도 가끔 함께 하던 원장은 준호 아내를 피하면서 원무과 직원을 통해 서울에 있는 병원을 가봐도 별수 없으니 빨리 정리하는 게 낫다는 말만 거듭 전해왔다. 죽음으로 직행해야 하는 원인은 대상포진 바이러스가 뇌까지 침투했다는 거였다. 준호가 서울 아산병원 감염내과에서 치료를 마치고 귀가한 건 그로부터 정확하게 1주일 뒤였다.
그런데 준호의 눈썹 부위 대상포진은 그냥 그렇게 쉽게 끝나지 않았다. 서울 병원에서는 준호가 살아 돌아왔지만 집을 비운 사이에 벌어진 일은 소름 끼칠 정도로 쇼킹했다. 준호는 직장을 은퇴하면서 노후대책으로 3층 다가구주택을 장만했었다. 1층에 자신이 살고 그 위층에 준호와 동갑인 할머니가 혼자서 살았는데 준호가 병원에서 사경을 헤매던 그 순간에 느닷없는 짚신장수가 준호네 집을 찾아와 현관문을 두드리더라는 것. 할머니는 집이 비었으니 저러다 가겠거니 했지만 계속해서 시끄럽게 두들기기에 내다봤더니 오늘 꼭 이 짚신을 팔고 가야한다고 억지를 부리더라는 것이다. 준호 부부가 집을 나설 땐 제 정신이 아니어서 아무에게도 알리지 못해 할머니도 주인이 집을 비운 것만 알았지 어디에 갔는지는 모르고 있었다. 서울을 다녀와서도 준호 아내는 그 사실을 할머니에게 밝히질 않았는데 나이 든 사람의 육감이란 게 무서웠다. "사모님, 내가 보기엔 그 짚신장사가 틀림없는 저승사자였어예. 아이고 소름 끼쳐!" 준호 아내는 남편의 발병 사실을 이실직고하지 않을 수 없었고 할머닌 그 길로 정육점으로 달려가 환자가 빨리 회복하려면 영양을 보충해야 한다며 소고길 한 근 사왔었다.
백세가 넘어서도 집필활동과 강연을 멈출 줄 모르는 철학교수는 인생 전체를 통해서 60대 중반이 가장 행복했다고 회고했다. 그 말을 듣고 준호도 자신의 60대 중반을 되돌아보았다. 하필이면 준호는 그때에 대도시에서 변두리 신도시로 이주했었다. 그날도 아내는 시장조사에 따라나서지 않으려는 것을 바람만 쏘이고 오자며 신도시 투어에 나선 게 그곳에 정착하기에 이르렀던 것. 이주한 다음해에 준호는 대도시에 사무실이 있는 8백명 은퇴자 단체를 덜컥 맡는 바람에 다시 대도시로 나가야 했으나 물 좋고 공기 좋은데 왜 그 번잡한 곳으로 다시 가느냐며 아내가 끝내 응하지 않아 원거리를 6년 동안 출퇴근하느라 곤욕을 치렀었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은 빠르게 흘러간다. 젊은 날엔 수많은 새로운 경험을 하면서 뇌의 관심을 끌어 바로 기억으로 저장되는데 반해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경험은 줄어들어 시간이 빨리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진단다. 세월이 빠르든 말든 준호는 잘 쏘다니는 것으로 소일하는 편이니 지루함을 모르고 산다. 그런데다 허접한 삶이지만 그 속에서 자신에게 인정을 베풀어준 선배를 불러내어 소설로까지 형상화할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하는 것이다.
준호가 학수를 마지막으로 떠나보내던 날은 삼라만상이 겨울잠에서 깨어나는 초봄이었다. 그날은 입춘을 코앞에 두었지만 찌푸린 날씨 탓인지 평소 온화한 부산의 기후와는 달리 바람이 꽤나 매서웠다. 새벽부터 중부지방에 내려쌓였다는 백설이 냉기를 내뿜어 한반도 남녘까지 기온이 급강하한 것 같았다. 백양산 기슭 시립화장장은 사상공단을 등지고 돌아앉은 형국이지만 분지인 공단에 갇힌 맹독성 매연은 강줄기를 타고 내려오는 바람을 업고 수시로 화장장으로 밀려들고 있었다. 준호는 지옥처럼 섬뜩한 화장장 불가마 속으로 들어간 학수의 시신을 가슴 졸이며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죽음은 누구나 맞닥뜨리게 되는 일이지만 살아있는 동안만은 그래도 잊고 지낸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싶었다.
화부는 화로 옆을 지키며 망자의 관이 불구덩이에 들어간 장면을 지켜보는 유족들 시선엔 아랑곳하지 않고 고열에 풍선처럼 부풀려지는 사체의 장기를 하나하나 쇠꼬챙이로 헤집어 터뜨리고 있었다. 그 순간 준호는 ‘아! 그래 맞아, 우리 생은 목숨이 붙어 있을 때까지였지.’ 하며 가벼운 한숨을 토했다. 그러면서도 준호는 화부가 자신이 맡은 일을 충실히 해낸 것뿐인데 내가 왜 그를 탓하나하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불가마 속은 빠져나왔지만 유골 잔해엔 아직 드문드문 파랗게 작은 불길이 붙어있었다. 그 상태로 유골은 곧바로 작은 절구통으로 부어졌다. 망연자실 바닥에 퍼질러 앉았던 유족은 엉겁결에 절구통을 받아 안았지만 제 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옥양목이 아닌 광목으로 지어 걸친 소복 일곱 폭 상포치마 끝자락은 꿰매지 않아야할 부분까지 재봉틀 바늘이 타고 넘은 자국이 선명했다.
뿐만 아니라 미망인은 망자의 유해가 담긴 절구통을 안고도 절반은 혼이 나간 사람처럼 멍한 표정이었다. 갑작스런 죽음에 경황이 없어 부고를 제대로 못했는지 화장장에 조문객이라곤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이제 각각 고등학생이나 중학생쯤으로 자랐을 망자의 딸들과 아들마저도 안 보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우리 장례문화는 매장이 대세였다. 해마다 여의도 면적만큼의 땅이 묘지로 바뀐다며 국토관리 차원에서 자꾸만 묘지가 커지기만 하는 장례문화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었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누가 결정했는지 모르지만 학수의 사후는 걱정할 일이 없을 것 같았다. 매장만 피한 게 아니라 한 발짝 더 나아가 산골로 마무리한다니 분명하게 시대를 앞서 자연친화적인 장묘문화를 받아들인 것이었다.
간밤을 뜬눈으로 지새웠을 미망인이 벅차오르는 오열을 꾹꾹 눌러가며 절굿공이로 유골을 수습했고 그런 비통한 광경을 바짝 가까이서 지켜보는 두 사람은 젊은 날 직장 사무실에서 망자와 길지 않은 세월을 함께 한 후배들로 준호도 그 중 하나였다. 두 후배가 부부동반으로 학수의 마지막을 함께 한 것은 망자 생전에 세 부부가 가끔씩 만난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한 번씩 을씨년스러운 바람이 훑고 지나가는 절구통 바로 뒤쪽 나지막한 탁자 위에선 까만 가죽점퍼 차림의 영정사진 속 학수가 자신의 마지막을 수습하는 반려자를 무심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런 학수의 모습을 마주하자 준호는 그와 함께 했던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기 시작했다.
생전의 학수를 기억하는 이들은 젊은 날 서울에서 대학까지 나온 사람이 한 번도 넥타이를 걸친 꼴을 보지 못했다는 말을 자주 하면서 더러는 그를 기인으로 취급하기도 했다. 학수가 대학을 다닐 무렵인 동란 직후만 해도 가진 돈이 없으면 전답이나 심지어는 집에서 재산 1호로 여기며 키우던 소까지 팔아 대학등록금을 조달한 바람에 대학을 가리켜 상아탑이 아닌 우골탑이라 부르기도 했었다. 하지만 학수는 어쩐 일인지 자신의 대학시절 추억을 한 번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러니 준호로선 농담으로라도 “형, 그땐 노다지가 꿈이었던 모양이죠?” 하고 광산학과를 지원하게 된 동기를 물어볼 수도 없었다. 준호도 그저 학수를 외골수요, 남들 말 따라 그냥 괴짜로 여기는 수밖에 없었다.
준호가 군에서 제대 후 복직하여 마산에 반년 근무한 다음 부산에 전입했을 때, 사무실에서 학수를 만날 수 있었다. 60년대 후반이었던 그때 겨우 이십대 중반으로 청년이었던 준호와는 딱 10년 인생 선배로 학수는 이미 중년에 진입해 있었다. 첫 만남에서 준호가 “잘 부탁드립니다!”하고 절도 있게 고개를 숙였지만 학수는 두꺼운 돋보기 너머로 힐끗 준호를 일별할 뿐 가타부타 한 마디 말이 없었다.
60년대 중후반은 나라 전체가 온통 크게 용틀임하던 격동의 시기였다. 불과 10여 년 전, 한국동란으로 북한과 남한 각지에서 몰려든 피란민들로 부산은 몸살을 앓을 정도로 혼잡했었다. 3년 가까운 임시수도 시절을 거치면서 형성된 부산의 번화가 남포동과 광복로 시대가 60년대 후반인 이때부터 서서히 저물기 시작했고, 정부직할시였던 부산의 중심상권도 어느새 서면지역으로 넘어가는 지각변동을 시작하고 있었다. 준호가 몸담은 직장 사옥은 서면교차로에 가까운 상권중심지대 대로변에 붙어 있었다.
통영 출신인 학수는 말씨부터 행동 하나까지도 전형적인 경상도 사나이였다. 누가 억지로 주문하더라도 바깥으로 상냥함이라곤 내비치지 못하는 위인으로 보이기도 했다. 당시 기술부서인 공무과 사무실 조직은 일제의 직제 탓인지 주임까지도 간부였다. 사무실엔 과장과 두 주임을 빼고 나면 칠팔 명 직원 중에선 학수가 선임이었다. 연공서열로 따져도 그렇고 맡고 있는 업무비중으로도 그가 단연 넘버원이었다.
공무과엔 24시간 교대로 수용가 전기고장을 수리하는 보수반 직원 20여 명도 포함되어 전체 직원 숫자는 30명에 달했다. 사무실 칠팔 명 직원 중에선 주무인 학수와 장표정리를 맡은 준호만 주로 사무실에 남았고 나머진 수시로 공사설계를 위해 바깥 현장을 드나들었다. 배전선로 장표는 1961년 전력3사가 통합된 이래 전 직원을 동원하여 직접 현장설비를 실사한 서류로서 캐비닛 두 개를 가득 채울 정도의 분량이었다. 전력회사 자산을 정확하게 평가하기 위한 업무이니 설비 집계는 그만큼 시일도 촉박하면서 중요한 사안이었다. 학수는 준호가 매일 단순반복적인 업무에 싫증을 내지 않고 진득이 매달리는 게 신기했던 모양이나 준호에게 직접 그런 내색을 하지는 않았다.
준호는 입사 초기, 대전에서 배전선로 승압공사에 바로 투입되어 대전 시내는 물론 서대전과 유성지구까지 무려 1년 반 동안 공사현장에 매달리며 '기별재료명세서'와 씨름한 결과 그 분야에선 베테랑 소리를 들을 정도로 숙련되어 있었다. 대전에선 주어진 공기 안에 공사를 순조롭게 마무리하면서 서류처리도 그기에 맞추기 위해 부서장까지 나서 매일 그를 독려했던 것이다. 다행히 도급업체가 발주처인 한전과 모자관계인 한공한국전력공업주식회사이어서 서로 협조가 그만큼 잘 되었고 준호는 아버지뻘이나 되는 공사감독의 격려에 용기를 얻어 낮엔 현장에, 밤엔 서류정리에 힘을 쏟았다. 그때 준호가 전주 위에 새로 설치하거나 기존 설비 중에서 철거한 손가락만큼 작은 볼트 하나도 집계에서 놓치지 않자 회사에선 보조감독인 준호를 칭찬했지만 도급업체에선 젊은 놈이 지독하다며 수군댔다.
당시로선 전력회사 승압공사가 대전이란 도시가 생긴 이래 가장 큰 토목사업이란 말까지 나올 정도로 도시 경제에도 영향을 미쳤던 것 같았다. 휴전 직후인 50년대 중반부터 대전의 도시규모가 팽창하면서 전력난으로 곤욕을 치러다가 시작된 공사라 그만큼 절박했는지도 모른다. 대전엔 승압공사에 필요한 전공이 모자라 도급업체에선 서울을 비롯한 대구와 부산 등지에서 인력을 불러들였다. 대부분 자재 운반도 수레로 운반하고 있어 전공 30여명에 인부는 그 배로 많았다. 각자가 익힌 기능이 지역에 따라 다르고 연령층도 다양한 인력이 매일 100여 명씩 모여 전투 아닌 전투를 쳐나가고 있었다.
기준에 미달되는 전주도 교체하면서 변압기까지 바꾸자 대로나 골목의 풍경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심지어 뒷골목에선 전깃줄이 통신전주에 걸린 것도 있었고 외곽지역엔 가로수나 살아있는 수목에 걸쳐져 있었다. 승압공사는 이런 불량설비를 정리하는 계기가 되어 도시미관 개선에도 이바지할 수 있었다.
이런 긍정적인 효과에도 불구하고 준호는 지금도 당시 대전지역 배전선로 전압을 3300볼트에서 6600볼트로 높인 것은 너무나 근시안적인 처방으로 예산낭비를 크게 불러왔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한다. 그 이유는 높인 배전전압이 얼마 가지 못하고 사라진 때문이다. 나라의 산업시설이 단기간에 그만큼 팽창하리라고 아무도 내다보지 못했던 것이다. 대전 승압공사 준공 육칠 년 후 준호가 대전에 소재한 전력연구원에 출장차 철도역에 내렸을 때 자신이 땀 흘리며 건설한 배전선로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허탈감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당시 정부에선 수출산업을 독려하며 전국에 규모를 갖춘 공업단지를 여러 군데 조성했다. 그러자 나라 망할 짓을 한다고 야당 정치지도자들이 나서서 극렬하게 반대를 했지만 그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준호가 생각하기에도 정부에서 추진하는 사업들은 무모해보였고 우선 폭발적으로 치솟는 전력수요에 맞춰 설비를 구축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당시 한국보다 앞선 일본이나 대만에 조회해도 산업시설이 단기간에 이처럼 팽창한 선례가 없어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전력회사에선 우선 급한 나머지 배전전압을 6600볼트의 두 배에 가까운 11400볼트로 올리기로 하고 일차적으로 의정부와 부산에서 시험해보기로 했다. 배전선로 전압을 높이면 그만큼 큰 용량의 전력을 보낼 수 있지만 전압을 높이면 또 그만큼 위험해져 지지물인 전주도 높아져야 하고 변압기 절연도 강도를 높여야 하므로 설비비가 커져 무한정 높일 수 없는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부산에선 하필이면 도급업체가 부도를 맞자 발주처에선 직원들을 공사 현장에 투입했고 준호도 그 세 명에 들었다. 경사진 산비탈에 소재한 범일변전소에서 나온 배전선로는 좌천동을 거쳐 부산진역~초량~중앙동~대청로~국제시장을 거쳐 토성동 대학병원까지 길게 향했고 중앙동에선 다시 부두 쪽으로 갈라져 범일동으로 회귀하는 루프를 만들었다. 이때 전선을 설치하는 대로변 전주들은 외국에서 들여온 수입품으로 우람했고 한동안 도시의 미관에도 기여를 했었다. 하지만 그 전압도 늘어나는 전력수요를 제대로 감당하지 못해 곧 사라지고 말았다. 현재의 전국적인 배전전압으로 자리 잡은 22900볼트가 등장한 것이다.
학수도 업무에 악착같이 매달리는 준호를 지독하다고 생각했을 법하지만 워낙 말이 없는 스타일이라 그 속내는 알 수가 없었다. 학수는 늘 점퍼차림에 작업복바지였다. 그런데 그냥 국제시장에서 싸구려로 파는 그런 작업복이 아닌 일본에서 물 건너온 수입품이었다. 색상도 흔치 않은 진초록 가죽점퍼에다 회색으로 추레하게 보이는 바지마저도 자세히 보면 윤기가 나는 예사로운 천이 아니었다.
학수가 오랜 동안 두꺼운 돋보기를 끼어 눈자위가 푹 꺼진 건 그가 한 번씩 안경을 벗어서 닦을 때만 밖으로 드러났다. 그러한 시력으로도 학수는 깜짝 놀랄 만큼의 속필에다 달필이었다. 글씨만 그런 게 아니라 업무처리도 속도가 빨라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준호가 학수의 책상서랍에 든 백 원짜리 다발 서너 뭉치를 발견한 건 그가 전입한 후 상당히 세월이 지난 뒤였다. 위험한 전기를 직접 다루는 수리반 직원들이 작업현장에서 사고를 당하거나 현장 출동 중 교통사고라도 당하면 치료하고 수습할 비상금이었던 것이다.
학수는 사무실에서 절대로 큰소릴 내는 법이 없었고 남들처럼 호방하게 웃어재끼는 일은 더더욱 없었다. 어느 땐가 총무부서 차량 운전사가 흥분하여 학수 자리까지 찾아와 거칠게 대드는 걸 준호는 옆에서 바로 목격했는데 그때에도 학수는 끝까지 조용했었다. 다음날 소리친 그 기사가 찾아와 학수에게 쩔쩔매며 사과하는 걸 보면서 준호는 학수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준호가 처음 학수를 만났던 때를 회고하노라면 그의 청빈한 가정사도 떠올랐다. 60년대 말, 우리 사회는 그때까지도 다들 어려웠고 학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의 집은 부산의 달동네로 불리는 양정의 가파른 산비탈에 붙어있었다. 몇 기 안 되는 묘지가 옮겨가고 난 자리에 들어선 대여섯 채 주택은 딱히 판잣집은 아니지만 그 이상도 못되었다. 울타리가 없다보니 이웃 간에 정겨움은 있을 것 같았지만 바로 옆 돼지우리에선 악취를 풍기고 파리 떼까지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그 앞서 60년대 초반 서울 고학시절 달동네 판자촌을 전전했던 준호로선 세월이 한참 지났는데도 대도시에서 이러한 집들을 만난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공무과 직원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그렇게 업무에 매달리며 하루하루를 보내다가 6월 초순, 매년 가진다는 단합대회 날을 맞이했다. 준호가 보기엔 이삼십 대 경상도 사나이들이 따로 단합을 위해 시간을 낭비해가며 만나지 않더라도 화합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무슨 단합대회인가 싶었다. 하지만 단합대회는 현충일에 예정대로 열렸다. 준호는 현충일에 왜 유엔묘지가 아닌 낙동강 너머의 수로를 단체로 찾아간단 말인가 하고 고갤 갸우뚱했지만 막내격인 그가 따질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처음 행사에 참여하는 준호로선 찜찜한 기분을 삭이면서 그냥 따라나설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그곳에 국제공항이 들어선지 오래고 공항이 열리면서부터 행정구역도 김해에서 부산으로 편입되었지만 당시는 김해평야에 속하는 곡창지대로 이름난 곳이었다. 단지 그때 바로 바뀐 행정구역을 따라 부산공항으로 명칭을 바꾸지 못한 건 김해에서 땅까지 뺏어가고 공항이름마저 바꾸어서 되겠느냐고 부산에다 거칠게 항의하는 바람에 명칭을 그대로 둔 게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평소엔 사람들의 왕래가 거의 없었을 논두렁을 지나자 옥답 수로를 흐르는 맑은 물엔 민물고기가 지천이었다. 낚싯줄을 담그지 않고 그냥 뜰채로 건져 올리기만 하면 끝이었다. 삽시간에 붕어가 물통에 그득했다. 도마에다 붕어를 올려놓고 즉석에서 비늘을 벗기고 회를 치는 학수의 솜씨는 횟집 아저씨 뺨칠 정도로 능수능란했다. 말은 않고 있었지만 준호 눈에도 학수가 고향 통영에서 젊은 날부터 많이 해온 솜씨인 게 분명해 보였다. 수로를 가로지른 다리 위에다 자리를 깔고 준비해간 초장과 소주병까지 꺼내놓자 바로 술판이 걸게 벌어졌다. 그날 금세 잡은 펄펄 뛰는 싱싱한 붕어회 맛이 진미여서 그랬는지, 학수가 회를 잘 썰어서 그랬는지 단합대회 참가자들은 모두 과식에다 과음까지 하고 말았다.
붕어에 붙은 간디스토마는 다음날 사무실에서 바로 문제를 일으켰다. 초여름 나른한 오후의 사무실 안은 다들 외근을 나가고 여느 때처럼 조용했다. 자리에 앉아서 업무에 열중하던 학수가 갑자기 두 손으로 배를 좌우로 번갈아 감싸면서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아이쿠 배야, 아이쿠~ 아이쿠…” 놀란 준호는 학수를 들쳐 업고 화급하게 서면지하도 입구의 신혜의원으로 내달렸다. 200미터 거리지만 준호보다 체중이 더 나가는 학수를 업고서 어떻게 그리 빨리 병원에 도달할 수 있었는지 준호 스스로도 놀라고 있었다. 준호는 평소에도 감기나 위장 탈이 나면 자주 찾는 병원이라 중년의 원장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서울 말씨의 그 원장이 기구를 통해 본격적인 검사를 하기 전, 병상에 누인 학수의 배를 이리저리 눌러보고는 “야아~ 이 사람 이거, 간이 부었잖아?”라고 고함을 질러대는 바람에 준호는 하마터면 자신도 모르게 쿡 하고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그때 이미 학수는 간염을 심하게 앓고 있었는데도 전날 무리하게 붕어회에다 소주까지 과하게 마셨던 것이다.
군대생활을 마칠 때까지도 술을 마실 줄 몰랐던 준호는 학수를 만나 술을 배웠다. 준호가 전입 후 어느 정도 얼굴이 익은 후부터 당시 총각이었던 준호를 배려해서인지 퇴근 때마다 학수는 저녁식사를 겸해서 술자리를 만드는 것 같았지만 이때 이미 그는 어느 정도 술에 중독된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도 준호는 소탈한 학수와 갖는 술자리 분위기가 좋았다. 소주에 따라 나오는 돼지수육 안주도 가난했던 당시로선 귀한 음식에 속했다. 시장통에다 단골집을 정해놓고 자주 찾으면서 둘은 그렇게 더욱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처럼 퇴근만 하면 하루가 멀다 하고 둘은 시장 입구에서 술을 마셨다. 그렇게 자주 만났지만 대화소재는 항상 바닥을 드러내지 않았고 오히려 불어나는 게 신통했다. 그러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정담을 이어갈 수 있었다. 학수는 주석에서도 절대 큰소릴 내지 않았고 쌍욕도 대화에 올리지 않았다. “야아, 준호야 바로 그거다. 그래~ 그럼 다 끝난 거지 뭐…” 술에 취해도 자신의 인생경험을 자랑하지 않았고 소탈한 그대로 두꺼운 돋보기 속 두 눈이 자주 붙었고 그럴 때마다 미소를 보였다. 말수가 많지 않으면서도 가끔씩 배꼽을 잡게 만드는 해학이 나왔지만 여자 이야긴 할 줄을 몰랐다.
그렇게 저녁마다 술자리를 이어가다가 준호는 술김에 자신이 처녀총각 혼사에 중매를 맡았다는 말을 학수에게 고하고 말았다. 총각은 학수도 잘 아는 회사 직원이었다. 남녀관계란 게 알다가도 모를 일인지라 준호가 중매를 나서자 양쪽에선 좀 진전이 있나 싶다가도 곧 제자리로 돌아와서 중매쟁이를 애태우곤 했었다. 총각은 준호가 입대 전 근무했던 직장 한 건물에서 만난 사이로 준호보단 세 살 연상이라 이미 결혼 적령기를 넘기고 있었다. 그런 총각이 처녀가 교복을 입었을 때 첫눈에 반했다면 이제 본인이 적극성만 띠면 성사가 되겠는데 그는 아무 소극적이었다. 워낙 고생하며 자란 나머지 돈 한 푼 가지고 발발 떠는 수전노에 속했다. 필요한 곳에도 돈을 못 쓰는 것을 그 자신도 알고 있는 듯했다. 그는 편모슬하에서 워낙 어렵게 자란 때문에 그렇다며 자신을 이해해 달라고 몇 번이나 준호에게 부탁했던 것이다.
준호는 중매쟁이로서 총각에게 꼭 그 처녀와 결혼하고 싶다면 먼저 지갑을 여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몇 번이나 침을 놓았다. 그러다가 하루는 총각 집에 초대받아 한 이불 속에서 밤을 새워가며 처녀 집을 공략할 방법을 함께 모색하기도 했다. 그래도 해결책이 나오지 않자 준호는 자신이 아는 은행직원을 소개해줄 테니 뭉칫돈을 융자받아 딸부자로 어렵게 사는 처녀 집에 들고 가서 결혼승낙을 놓고 직접 부딪혀보라고 권했었다. 하지만 총각은 은행에서 돈을 빌릴 의지도 없었다. 혼담이 답보상태를 보이면서 해가 바뀌자 처녀 집에선 딸을 당분간은 결혼시키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총각으로선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되었고 중매쟁이 준호도 입장이 난처해졌다. 그러고 이미 서른을 넘긴 총각은 더 이상 미룰 수 없어 다른 상대를 물색하여 서둘러 결혼을 하기에 이르렀다.
가정형편상 딸 결혼을 몇 년이나 미룰 것처럼 보이던 처녀 집에서 이번엔 뜻밖에도 준호에게로 청혼이 들어왔다. 준호는 놀란 나머지 이 사실을 학수에게 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학수는 퇴근 후 함께 술을 마시다가도 생각이 나면 한 번씩 택시를 불러 창원 처녀 집을 함께 찾아가는 객기를 부리곤 했다. 학수가 준호처럼 가진 것 없는 후배를 배려해서 베푸는 것이었지만 그럴 때마다 준호는 스스로 방정맞게 까발린 혼담을 후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준호가 보기에 학수가 55세 정년을 10년이나 일찍 퇴직하여 사업에 띄어든 것은 자라나는 자녀들 뒤치다꺼리를 걱정한 것 같았다. 재 너머 사하 쪽이 개발되면서 처음 들어선 낡은 슬래브주택 방에다 트리용 꼬마전구를 만드는 공장을 차렸다는 걸 알고도 준호는 미적거리다가 몇 년이나 늦게 찾아갔었다. 공장은 가내공업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초라했다. 지난 시절 직장에서 학수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은 준호로선 그에게 신세를 갚아야 했지만 당장 자금을 댈 만한 여력이 없어 안타까웠다.
그러다가 학수가 경영난에 허덕인다는 말이 들렸지만 그때도 준호는 바로 찾아보질 못하고 한 달 두 달 세월만 흘렀다. 이래선 안 된다, 인간이 할 도리를 하고 살아야지 하면서도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는 사람이라 학수를 도우러 방문한다는 계획은 뒤로 밀리고만 있었다. 그러던 중 준호가 본부사업소에 업무 차 갔다가 그곳에서 학수를 만났다. 학수는 자금난에 허덕이다가 자신이 몸담았던 옛 직장에서 산업체에 사업자금을 저리로 대출한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온 거였다. 하지만 학수의 사업은 워낙 영세해서 대출대상기업이 못되었다. 학수가 젊은 날 함께 근무하며 절친했던 상사가 사업소 책임자로 와있어서 믿고 찾아왔겠지만 회사에서도 규정을 어겨가며 대출을 해줄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학수는 철공소에서 일을 끝내고 나온 직공처럼 뒷주머니에서 꺼내 머리에 눌러쓴 모자에 기름때가 반질거렸고 행색은 더없이 초라했다.
그날 바쁘다며 피하는 학수를 붙잡고 준호는 재직 당시 학수가 후배들을 대동하고 자주 찾았던 호프집으로 향했다. 단골집 홀엔 얼굴이 익은 현직 후배 여럿이 먼저와 앉았다가 일제히 일어나 학수와 준호 일행을 향해 꾸벅 인사를 해왔다. 학수와 준호는 후배들을 위해 일부러 구석진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준호는 지난 추억을 곱씹으면서도 연신 학수에게 죄송하다는 말을 건네며 밤늦도록 술을 마셨다. 준호는 원래 입에 발린 말을 잘 잘 할 줄 몰라 학수를 제대로 위로하지 못했고 그동안 무심해서 미안하다는 말만 계속 늘어놓았으니 그런 말을 듣는 학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 그런데도 학수는 그나하게 취한 때문인지 계속해서 “야! 준호야, 그런 건 하나도 걱정하지 마라,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 안 카드나? 그라고 우짜든지 열심히 살아야한대이,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제?”라며 자신을 위로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삼월 초였던 이날 부평동에서 초저녁에 시작한 술은 봄을 재촉하는 세찬 빗줄기가 창밖에 쏟아지는 줄도 모르고 늦은 밤까지 계속되었다.
그땐 휴대폰이 나오지 않았던 시절이라 학수는 취중에도 준호의 귀가가 걱정되었던지 집에 도착하자마자 혀 꼬부라진 소리로 전화를 해왔다. 술이 그를 울컥하게 만들었든지 아니면 스스로도 절망과 비애가 통제되질 않는지 그의 절규는 절반이 울부짖음이었다. 그러고 며칠 지나지 않아 준호는 학수의 부음을 듣게 되었다. 준호의 어림짐작에 생전의 학수가 딸들 아래 본 귀한 아들 칠구는 이제 예순에 가까울 터였다. 준호는 그 칠구라도 만나 하늘나라에 먼저 간 그의 아버지를 함께 기리고 싶은데 동네방네 수소문해도 그를 찾을 길이 없으니 막막하고 허무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다.
1970 봄 부산 송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