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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2부: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이여”( I )
<fieldset><legend>신앙 제2부</legend>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이여 ( I ) </fieldset> 화있을진저 로 표현된 예수님의 책망과 경고는 그 당시의 종교계에 상당한 반응을 일으켰으며, 첨단의 개혁을 촉구하는 날카로운 책망의 말씀이 되었다. 예수님의 이 경고와 책망의 말씀은 그 당시뿐만 아니라, 현시대의 교회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열렬한 회개와 철저한 개혁을 촉구하는 시대적인 교훈이 되고 있다. 주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라고 하시며,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는 자들이라고 지적하셨는데(마 23:1~3), 그 당시 유대인들의 전반적인 모든 측면, 즉 교육사업, 전도사업재정적인 측면 등을 총망라하시어 책망하시고 개혁을 요구하셨다. 이 모든 면에 대한 경고와 책망은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교육에 대한 경고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마 23:5~10)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마23:5)라는 말씀에는 바리새인들의 모든 행위의 동기가 드러나 있다. 그들이 사는 방식과 하는 모든 행위는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외식" 그 자체였다. 또한, 그들은 그들의 지식을 다른 사람에게 나타내 보이고, 사람들로부터 지식과 명망이 있다는 인정을 받으며, 명예와 칭송을 얻고, 다른 사람보다 더 높은 지위에 올라 존경을 받으며 다른 사람들을 다스리고 압제하며 사는 것을 인생 최고의 목표로 삼았다.
그런 사고방식과 생활 태도는,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에 앉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을 좋아한다고 지적하신 예수님의 표현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들이 랍비나 제사장이 되기 위해 치르는 대가는 엄청난 것이었다. 그 당시 대제사장이나 제사장직을 얻는 것은 유대 나라의 정치나 사회적으로 상당한 세력을 얻고, 또 유대 민족을 사실상 통제하고 다스릴 수 있는 권세를 의미했으므로, 그 시대에 그런 지위를 쟁탈하기 위한 음모는 실로 놀라웠다. 역사가의 문헌에 따르면, 예수님 당시의 제사장들은 그들의 제사장직을 얻기 위하여 돈과 뇌물을 사용하는 것은 물론, 심지어 폭력과 살인을 저지르는 일까지 주저하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1. 그 당시의 교육제도
그 당시, 유대의 교육제도는 헬라 문화의 영향을 받아 거의 헬레니즘에 물들어 있었다. 헬라 문화는, 주전 334년경에 이루어진 알렉산더 대왕의 세계 정복으로 말미암아 유대 나라에도 자리 잡게 되었다. 알렉산더는 온 세계를 하나의 세계 로 만들고자 하여, 그가 정복하는 곳마다 도시를 세워 헬레니즘 문화(정치, 경제 포함)를 심어놓았고, 헬라 문화를 통한 동서문화의 융합과 민족 융합정책을 꾀하였다. 그리하여 특히 언어, 학문, 교육, 예술의 분야에서 헬레니즘이 세계적으로 압도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었고, 그리스어(헬라어)는 알렉산더 대왕이 점령한 전 영역의 공통어로서 동방 세계 전역에 널리 보급되었다. 그러나 잘 알다시피 헬라 사상에는 이교의 사상과 오류의 가르침들이 한껏 녹아 들어가서 그 사상이 유대 민족의 사상을 꼴 짓는 교육과 신앙관에 막대한 영향을 끼쳐 하나님의 올바른 진리를 전수하는 일을 저해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가이사 아구스도 가 로마의 통치자로 있을 때 태어나셨는데, 그 당시 헤롯 왕의 보호자격이었던 가이사 아구스도 (영어로는 카이자르 아우구스투스 로서 옥타비아누스를 가리킴)도 알렉산더 대왕처럼 헬라 문화를 확산시킴으로 로마를 융합시키려고 하였다. 그러자 헤롯도 재빨리 그의 본을 좇아서 유대 민족에게 그 일을 시도하였다. 그 결과, 이교의 문화가 예루살렘을 휩쓸게 되었다. 헬라식의 경주와 운동경기가 도입되었고, 이를 위해 운동 경기장과 이방의 신전들이 곳곳에 세워지게 되었으며, 헬라식으로 교육하는 학교들이 세워졌다.
유대인들은 제사장들을 선두로 하여, 하나님의 뜻과 길을 따르기보다는 세상의 오락과 이교의 풍습의 급류에 휩쓸려 가게 되었다. 역사가의 말을 따르면, 그 당시 제사장들은 항상 긴 옷을 착용하여 몸을 가려야 했으나, 헬라식의 경기를 하기 위하여 벌거벗고 운동을 하였다고 한다. 또한, 청년들은 그들의 언어인 히브리어를 잊어버림으로 히브리어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을 줄 모르게 되어 영적인 지식과 진리에 몹시 어두워져 있었다.
물론, 학교에서 제사장들과 랍비들에 의해 성경과 율법들이 가르쳐지기는 했지만, 그 당시 헬라 사상으로 물들어 있는 교육제도는 청년들을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게 하거나 영적인 나라를 위한 일꾼들로 만들어내기에는 역부족이었으며, 그런 과정에서 학교의 교과 과정과 가르침과 신학들은 참된 진리에서 점점 멀리 떨어지게 되었다. 이런 이유로 예수님과 침례 요한은 랍비 학교에 다니지 않았으며, 성령을 교사로 모시고 스스로 깨우치며 공부했던 것이다.
2. 예수님의 경고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바리새인들의 마음과 사상은 이방 사상과 생활 풍조에 물들어 있었고, 하나님의 진리와 지식에서 멀었다. 그들은 신앙생활을 엄격한 통제와 율법적인 규례 하에 겉으로만 영위하는 위선적이고 형식적인 외식 주의자들이었다.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몸에 경문 을 넓게 차고 다녔다. 경문이란 양이나 물개 가죽으로 만든 작은 상자였는데, 그것은 성경 말씀을 작은 글씨로 양피에 적은 것을 넣어두는 상자였으며, 주로 기도할 때 차고 다녔다. 이 상자를 차는 것은 경건하다는 표시였다. 그들은 더욱 경건하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그 상자를 일부러 더 크게 해서 차고 다녔다.
"옷 술을 크게 하며"
유대인들은 겉옷에 푸른 술을 달게 되어 있었다. 이것도 그들이 율법을 사랑하고 지킨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었는데,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율법을 사랑하고 말씀을 가까이하는지 과시하기 위해 더 큰 술을 달고 다녔다. 그들은 인간의 명예와 존경과 세상의 야망을 너무나 중요시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지식과 행위를 이렇게 해서라도 사람들에게 외양으로 나타내기를 원했던 것이다.
경고의 요지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계명에 관하여 모세에게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 (신 6:8)으라고 말씀하셨을 때에, 이 말씀에는 깊은 의미가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명상하고 실행할 때에 모든 사람은 고상하게 될 것이며, 삶 속에서 진정한 하나님의 원칙과 성품이 드러날 것이다.
그들은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처럼 의롭고 자비롭게 거래하며, 뇌물과 부패하고 기만적인 모든 일로부터 깨끗함을 유지할 것이다. 또한, 사랑과 동정의 정신을 나타낼 것이며, 세속에 물들지 않은 채,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존경한다는 것을 흠 없는 품성을 통해 입증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그리스도 당시의 유대인들은 분간하지 못하였다. 모세에게 주어진 명령은 다만 표면적으로, 성경의 교훈을 몸에 부착해야 한다는 지시로 해석되었다.
이 명령은 양피지 조각에 기록되었으며 머리와 손목과 눈에 잘 띄도록 묶여 있었지만, 이런 일이 그들의 정신과 마음과 성품을 하나님의 계명과 정신에 맞는 것으로 이끌어주지는 못했다. 이 양피지는 다만 시선을 끌기 위한 휘장으로 차고 있는 것에 불과하였다. 그것들은 착용자들에게 백성의 존경을 일으키도록 하는 헌신 된 모습을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이 헛된 가장(假裝)에 일침을 놓으셨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한 말씀으로 마음은 탐욕과 질투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거짓된 겸손을 나타내며 지위와 권세를 얻으려는 그들의 이기적 야망을 드러내셨다.
그 당시 잔치에 초대를 받았을 때에 손님들은 신분에 따라 좌석에 앉았으며, 가장 명예로운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이 첫째로 주목되고 특별한 은총을 받았다. 바리새인들은 항상 이러한 명예를 얻으려는 계획을 세우고 행동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행습을 견책하셨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랍비나 선생이라는 이름을 탐내는 허영심을 책망하셨다. 예수님께서는 그와 같은 칭호는 사람들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 속한 것이라고 선언하셨다. 오늘날 지도자의 칭호를 받은 자 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성호와 성품을 잘못 전하고 있는가! 얼마나 자주 세속적 야망과 독재와 죄악들이 높은 성직자들의 과장된 예복 아래 감추어져 있는가!
3. 현 시대의 교육제도에 관한 고찰
하나님의 원칙에 맞는 방법으로 교육을 받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참교육을 통해서만 마지막 날에 하나님을 위해 충성 되게 서서 짐승의 표와 그 세력에 굴복하지 않는 준비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육의 진정한 목적은 영혼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다. 교육의 변천사를 잠깐 고찰해 보기로 하자.
종교 개혁과 교육사업
중세기의 종교 핍박 암흑시대의 어둠을 몰아내면서 나타난 루터의 종교 개혁을 선두로 하여 각 나라에서 시작된 종교 개혁은 주 기둥이 되는 신학적인 오류를 대항하는 일에 성공하는 듯했지만, 교육제도를 개혁하는 일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영국의 개혁자들과 종교의 핍박을 피하여 아메리카 신대륙을 찾은 청교도들은 정치적으로 종교의 자유를 부르짖고 개신교 국가를 세웠으나, 법왕권이 세운 교육제도의 그늘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들이 로마교의 교리에는 동조하지 않았지만 로마 교회의 여러 형태는 그대로 고수하고 있었다. 청교도들의 가장 큰 실수는, 그들을 신대륙으로 피신하게 했던 로마 법왕권의 교육제도를 그들의 본토에서 폐지하는 데 실패한 것이었다.
16세기의 위대한 종교 개혁자 루터와 그의 동역자 멜란히톤은 그리스도인 교육 없이 영구적인 종교 개혁을 이룩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분명히 이해하고, 1525년 훌륭한 그리스도인들을 양산해내기 위하여 참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개신교 학교를 많이 세웠다. 그러나 루터와 멜란히톤의 사망 후, 그들이 하던 개혁사업을 이어받은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인 학교를 증가시키는 대신 단지 신학적인 기교에만 몰두하여 당대에 이루어졌어야 할 위대한 사업을 지나쳐 버렸다. 후기의 개혁자들이 해이해져 가는 틈을 타서, 겉으로 신실한 개신교도로 보였던 존 스텀(John Sturm)이라는 학자가 스트라스버그(Strasburg)에 있던 개신교 학교에 법왕교의 교육제도를 실제로 도입하였다. 그는 중세기 고전문학에 약간의 성경을 첨가하고 조금의 교리와 함께 샌드위치 식의 교육을 했다.
루터의 뒤를 이은 개혁자들은 그가 채택한 모든 교육 제도를 좋게 생각하였고, 그리하여 그 학교는 독일에 있는 개신교 학교의 모델로서 개신교도들 가운데 아주 유명해졌으며, 그의 영향력은 영국에서 미국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한 역사가는, 현대 그리스도인 문화에 그리스와 로마의 문화를 재현시키는 것이 스텀이 가진 야망이었다. 라고 말했다. (Painter p.163) 스텀이 세운 학교는, 절반은 루터와 멜란히톤이 세운 그리스도인 학교요, 절반은 법왕교의 학교였다. 이튼, 윈체스터와 웨스트민스터 같은 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들 중에, 그들이 졸업한 학교의 교과 과정이 스텀에 의해 도입된 법왕권의 교육과정을 모방한 것들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영국의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 대학, 미국의 하버드나 예일, 스탠퍼드 대학 등은 스텀의 교육과정을 도입한 학교들이며, 유명한 학교는 모두 법왕권의 정신과 교육제도를 도입한 것이다.
재림을 위해 준비시키지 못하는 현 교육제도
예수님께서는 계급제도와 차별을 타파하셨다. 오늘날 학위제도나 박사학위 과정 등은 다 로마교의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학자나 교수들이 입는 가운에 드리워진 학위를 나타내는 여러 가지 색깔의 줄과 금줄과 띠들은 그들의 세상 지식과 교만을 드러내기에 알맞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영혼 안에 이루는 일을 가장 위대한 교육이라고 가르치신 위대한 교육자이셨으며, 누구에게도 랍비라 칭함을 받거나 다른 사람 위에서 세력으로 군림하는 지도자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지 말라고 경고하셨다.
오늘날의 교육을 보라! 모두 세상적인 지식만 추구하는 나머지, 올바른 인성 교육은 없어지고, 교육을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점점 인간성이 황폐해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세계의 유명 대학을 나온 사람일수록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는 자신의 지식을 의지하고 자랑하며, 그런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무신론자가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현대의 교육은 인본주의를 바탕으로 시작된 것으로서, 많은 경우에 주입식 교육이나, 세뇌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므로 주관적이거나 창의적으로 무엇을 사고하거나, 독자적이거나 개인적인 사고를 하기가 어렵게 만든다. 그러므로 이런 교육을 받은 사람은 단체사고 (Group thinking)에 길들게 되고, 사회의 틀이나 고정 관념에 사로잡히게 된다.
하나님의 마지막 백성은 홀로 서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인본주의의 사고방식으로 인간을 꼴 짓는 현대의 교육은, 진리를 고수하고 참된 복음을 전파하는 하나님의 독특하고 특별한 백성을 만들어내는 일을 방해한다. 지금은 우리의 자녀를 참된 하나님의 방법으로 교육해야 할 때이다. 옛날 유대 민족에 멸망을 가져온 것과 똑같이, 오늘날의 교육제도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청년들을 멀어지게 하고, 세상에 다가올 영적인 크나큰 사건, 재림과 심판의 날을 위해 준비하지 못하게 하며, 세속적인 성공과 부와 명예만을 추구하게 하고 있다. 이런 교육제도의 부패가 무엇보다도 가장 뚜렷한 말세의 징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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